一乘章第五

5. 일승(一乘)

[一은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고, 乘은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14. 攝受正法是摩訶衍 -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대승(大乘)이다

摩訶衍者出生一切

[대승에 머물면서 대승을 섭수하는 것은 곧바로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섭수하는 것이다]

汝今更說(여금갱설) 一切諸佛所說攝受正法(일체제불소설섭수정법)

그대는 이제 다시 일체 여러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바, 정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해 보라

勝鬘白佛(승만백불) 善哉世尊(선재세존) 唯然受教(유연수교)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로지 부처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卽白佛言(즉백불언)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으니,

世尊(세존) 攝受正法者是摩訶衍(섭수정법자시마하연)

세존이시여,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대승=摩訶衍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摩訶衍者(마하연자) 出生一切(출생일체)

聲聞緣覺世閒(성문연각세간) 出世閒善法(출세간선법)

그 까닭을 말하면, 마하연은 온갖 성문과 연각과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을 낳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如阿耨大池出八大河(여아뇩대지출입대하) 阿 언덕 아, 耨 김맬 녹

세존이시여, 마치 아뇩지 큰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이 흘러나오듯이,

[阿耨大池(아뇩대지)= 아뇩달지(아누달지), 또는 아뇩지(아누지), 인도 설산(雪山)의 북쪽에 있는 못. 아누달용왕이 이곳에 살며, 맑고 찬물을 흘러내려 섬부주(瞻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하는 인도 전설의 못.]

如是摩訶衍(여시마하연) 出生一切聲聞緣覺世閒出世閒善法(출생일체성문연각세간출세간법)

마하연에서도 온갖 성문과 연각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이 나옵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에 대하여 원효소에서 “세간과 출세간이란 앞의 이승 중에 견도 이전을 세간이라 하고, 견도 이상을 출세간이라고 한다. 또한 앞의 2가지 중에 세속 의 선법을 세간이라 하고 아래에서 설해진 6처 등의 법처럼 무루의 선법을 출세간이라 한다. 아래의 4가지 해탈적 통찰[智]과 열반 등처럼 지금 그 2가지 중에 장차 일체 선법은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이라 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대승으로부터 4가지 결과가 출생하는데, 성문과 연각은 곧 이승이고 세간이란 인천승을 말하고 출세간이란 보살승을 말한다고 한다. 지금은 앞의 해석으로써 올바름을 삼을 것이다”라는 것이다.-김홍미]

 

[관념(觀念)의 족쇄에 묶여 있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하고, 관념의 족쇄를 풀어버린 이를 깨어난 이라 하네.

관념이 만든 세계를 세간(世間)이라 이름하고, 관념의 세계를 뛰어넘으면  그곳이 바로 출세간(出世間)이리.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벌려 놓았네.

관념을 여기서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첫째는 관례적 일상용어인 관념의 의미 즉 6근(根) 6경(境) 육식(六識)이 조합해서 만든 18경계(境界)에서 일어난 상념(想念)들이 만들어낸 생각들을 관념이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불교 명상수행의 핵심열쇠 낱말이라 할 수 있는 관(觀:vipassan)과 념(念:sati)이 그것이다.

18경계(境界)는 한마디로 관념(觀念)의 세계(世界)이다. 정지, 정념(Sampajanna, sammasati)과 위빠사나(Vipassana) 지혜를 개발하여 관념의 족쇄를 풀어라, 그 구체적 수단과 방법이 8정도이며, 이를 통해 사쌍팔배(四雙八輩: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증득한 사문)의 도(道)와 과(果)를 성취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관념의 족쇄 10개를 완전히 풀어버린, 또는 3개 이상을 풀어버린 상태를 말하며, 부처님은 그런 수행자를 진정한 사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계신다.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의 대의가 무엇이던가? 오직 관념이 만든 유위법의 세계는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 위의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 같은 상념(想念)의 세계다. 이 산냐(想: sanna)의 노름 놀이를 깨어버리라는 뜻 이외에 무슨 또 다른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데미안』에는 첫머리에 알을 깨고 나오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다. 헤세가 말하는 알은 곧 세계이다. 그 세계는 저마다 사람들 자신의 관념이 지어놓은 산냐[想]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하는 쑤바 바라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 청년이여, 중생(衆生)들의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주인으로 하는 자이고, 업을 상속하는 자이고,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고, 업을 권속으로 하는 자이고,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이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난다“(MN135 업에 대한 작은 분석경).

또 바라문에 대한 명확한 정의(定義)를 내리신 내용이 바셋타경이다(숫타니파타 3품제 9 전재성 역, 맛지마니까야 3권 98 대림스님 옮김). 부처님께서는 바셋타와 바라드와자라 바라문 학인에게 출생과 가계 때문에 혹은 계급 때문에 거룩한 자가 되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로 인해 거룩한 자가 되고 바라문인 자가 되고 행위로 인해 이름만 바라문인, 즉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됩니다. 감관을 수호하고 제어하고 자제하고 사는 이것이 바라문이 되고 이것이 으뜸가는 바라문입니다. 이러한 님을 ‘거룩한 님’이라 하고 아라한과 동일시한다고 숫타니파타 주석서 1497에서 밝히고 있다.-임기영]

世尊(세존) 又如一切種子(우여일체종자) 皆依於地而得生長(개의어지이득생장)

세존이시여, 또 마치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이,

如是一切聲聞緣覺世閒出世閒善法(여시일체성문연각세간출세간선법)

이러한 온갖 성문과 연각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이 

依於大乘而得增長(의어대승이득증장) 대승을 의지하여 자랍니다.

是故世尊(시고세존) 住於大乘攝受大乘(주어대승섭수대승)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무르며  대승을 받아들이는 것은

卽是住於二乘攝受二乘(즉시주어이승섭수이승) 一切世閒出世閒善法(일체세간출세간선법)

곧 2승에 머물러 2승의 세간 선법과 이승의 출세간 선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六處 - 여섯 가지 요점

[세존께서 설명하셨던 6처와 같으니, 이를테면 정법의 머뭄, 정법으로서 소멸, 바라제목차(prātimokṣa), 비니(vinaya), 출가, 구족계 수지이다]

如世尊說六處(여세존설육처) 何等爲六(하등위육)?

마치 세존께서 설하시는 여섯 가지 요점=六處를 말씀하심과 같사오니, 6처란 것은,

謂正法住正法滅(위정법주정법멸) 波羅提木叉(바라제목차) 叉 깍지낄 차, 갈래 차, 

이른바 ① 바른 법이 머무는 것 (바른 가르침의 유지)=正法住, ② 바른 가르침(법)의 소멸=正法滅, ③ 계본=波羅提木叉, 

比尼出家受具足(비니출가수구족) 尼 신중 니, 여승 니, 

④ 교단의 규범=毘尼, ⑤ 출가하는 것, ⑥ 구족계를 받는 것이며, 

爲大乘故說此六處(위대승고설차육처) 대승을 위하여 이러한 여섯 가지 요점을 설하셨으니,

何以故(하이고)? 正法住者(정법주자) 爲大乘故(위대승고)

왜냐하면, 바른 법=正法의 유지는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說大乘住者卽正法住(설대승주자즉정법주)

대승이 머무는 것이 곧 정법이 머무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正法滅者(정법멸자) 爲大乘故(위대승고) 說大乘滅者卽正法滅(설대승멸자즉정법멸)

정법의 소멸은 대승을 위하여 말씀하신 때문이므로, 대승의 소멸이 곧 정법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波羅提木叉(바라제목차) 比尼此二法者(비니차이법자) 義一名異(의일명이)

바라제목차=계본과 비니=교단의 규범, 이 두 가지는 뜻은 한 가지면서 이름만 다른 것이니,

比尼者卽大乘學(비니자즉대승학)

교단의 규범은 곧 대승의 배움입니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산스크리트어: प्रातिमोक्ष Prātimokṣa, 팔리어: Pāṭimokkha)는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에 관한 조항을 모아둔 것으로 목차(木叉)로 줄여 부르거나, 계본(戒本)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경우 출가한 스님은 구족계를 받는데, 율장 가운데 사분율에 근거한 조항들로 비구가 지켜야할 250 가지 계, 비구니가 지켜야할 348 가지 계와 같은 율의 조항들을 뜻한다-위키]

[‘비니(比尼, 毘尼, 毗尼)’, 범어 ‘vinaya’를 음역한 것이며, 그 뜻은 ‘율(律)’이다. 많은 경에서는 이 비니(毗尼)보다는 ‘비나야(毘奈耶)’로 번역되어 쓰였다. - 들우물]

 

[비니〈(比(毗․毘)尼)〉란 산스크리트어 비나야(vinaya)의 음사인데 율(律), 멸(滅), 조복(調伏), 이행(離行), 화도(化度)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말한다. 수도생활 상에 정해진 규칙, 이 율(律)에 의해서 죄를 멈추게 하여 죄를 멸하고 일상생활을 조화시키며 악행을 제복(制伏)한다. 율(律) 또는 조복(調伏)이라 번역함과 같이 붓다의 계율을 말한 것이다.율(律) 또는 조복(調伏)이라 번역함과 같이 붓다의 계율을 말한 것이다. 이 양자에 의해서 선을 얻는 적극적인 면과 악을 여의는 소극적인 면이 결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지악수선(止惡修善)이라고 하는 불교 계율의 기본을 보살행의 의지처로 한 것이 바라제목차 비니의 처(處)라 한다.

도(道)를 구하는 사람은 출가의 생활에 철저해야 한다는 출가의 처(處)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출가는 초기의 불교에서는 '집에서 집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재가의 생활을 떠난 사람을 출가자라고 부르고 있다. 출가(出家)란 재가의 생활, 가정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을 떠나 도(道)를 구하며 수행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 혹은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재가의 생활에는 여러 가지의 속박이 있어 집착을 낳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재가의 생활을 하고 있어서는 수도에 방해가 되므로 출가의 생활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 원시불교의 출가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도(道)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가의 생활을 취(取)해 승원(僧院)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재가의 생활 속에 도를 구하는 것을 강조한다.
전자는 몸[身] 출가의 입장, 즉 수염과 머리를 깍고 삼의일발(三衣一鉢)의 유행(遊行) 탁발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며 후자는 마음[心]의 출가, 즉 재속인 채로 불문(佛門)에 귀의하고 보살행을 실천하여 가는 삶을 말한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대승의 보살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서 재가 생활을 계속하면서 불도를 행하는 사람도 출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른바 출가의 참뜻은 도를 구하는 수행자이다. 머리를 깎고 3의1발(三衣一鉢), 즉 옷 세 개(상의․중의․하의)와 발우 하나로 무집착의 생활을 계속하며 승단(상가)의 일원이 되어 계율을 엄수하여 가는 것을 본분으로 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의 출가자의 입장이었다.
신출가(身出家)는 초기불교의 비구와 대승의 보살승으로 삭발하고 승원에 들어간(승가의 일원이 된다) 사람을 말하고 심출가(心出家)는 소위 대승의 보살거사(菩薩居士)로서 속가에 있는 그대로 불문에 귀의하고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특히 시정(市井) 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대승의 법을 생활 위에 구현화하려고 하는 소위 보살행자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유마경』에 등장하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있고 그리고 지금 『승만경』의 주인공인 승만 부인을 들 수 있다.-혜경스님]

 

[원효는 “㉯, 즉 ‘세존께서 설명하셨던 6처와 같다’고 한 것에서 6처는 소승의 삼장이고, 처(處)는 學處[훈련 주제]라고 풀이하고, 곧바로 앞의 성문, 독각의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출생한다고 설해지고 있는 학처이다”라고 해설한다. 이를테면 원효는 세존께서 설명하신 이 6 가지 훈련주제가 곧바로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하는 방법과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선법을 섭수하는 주제라고 읽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6처가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하는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승 삼장인 6처가 바로 그대로 실례이고, 동시에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모든 선법을 섭수하는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 즉 ‘대승을 위해 이 6처로 설한 것이다’는 원효의 해설을 살펴보면, 근본[如世尊]으로써 지말[說六處]을 포섭하는 것이고, 이승에 속한 사람들에게 점차로 대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6처로서 설한 것이므로 대승을 여의지 않는다고 파악하고 있다. 
비록 6처가 기존 이승의 학처이더라도 근본인 세존께서 대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마하연이라는 정법을 섭수하는 충분한 훈련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를 대승적으로 재구성된 이 6처로 설해진 것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6처에 대한 원효의 구체적 해설을 살펴보자.
6처는 곧 소승의 교법으로서 삼장이다. 학처가 되기 때문에 處라고 한 것이다. ‘정법의 머뭄’이란 수다라장이다. 올바로 가르친 진리를 ‘정법’이라 하는데 이 교법으로 증상심학을 성취할 수 있고, 한 경계에 대해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住’라 한 것이다. (중략) ‘정법으로서 소멸’이란 달마장이다. 이것은 정법의 말씀이고 또한 능전을 제시한 것이다. 이 
교법으로 증상혜학을 성취할 수 있고 번뇌를 끊기 때문에 ‘소멸’이라 한 것이다. (중략) 그 아래 4가지 처는 비니장으로 연 것이다. 능전과 소전으로 각각을 2가지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바라제목차’는 곧 간략한 문장이고, 이것을 별해탈계라 번역하며, 소전의 법으로부터 능전의 가르침을 목록화한 것이다. ‘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곧 자세한 문장이고 이것을 소멸이라고 하며, 또한 소전으로부터 능전을 목록화한 것이다. 출가라 하는 것은 사미의 계이고 구족계를 받는다는 것은 큰 승려
의 계이며, 이 두 가지는 그 소전의 교법을 여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원효는 6처를 소승의 삼장으로 해설하면서 그럼에도 정법의 머뭄이 대승의 머뭄이 될 수 있는 것은 대승의 광대한 증상심학 안에서 학처로서 ‘경장이 거칠고 얕은 부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정법으로서 소멸도 대승의 광대한 증상혜학 안에서 학처로서 ‘논장이 거칠고 얕은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칭만 다를 뿐 의미는 동일한 바라제목차와 비니도 대승불교도의 훈련이고, 출가와 구족계 수지 역시, 모두 비니로서 대승의 위의계’라는 경문에 대해 원효는 “대승의 계는 통틀어 삼업을 단속하여 내적으로 작은 부분에서조차 몸과 말의 끝을 단속하는 것”이라 재해석하고 있다. 즉 소승을 위해 위의계라 하더라도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단속을 토대로 하는 대승보살의 계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약 대승과 소승이 다르다면 아라한에게 별도로 비니를 세워야 할 것이고 별도로 출가하고 구족계를 수지하는 무리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들에게 별도의 가르침을 세울 수 없고 그 때문에 별도로 출가하고 구족계를 수지하는 무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에게는 출가와 구족계 수지가 없다. 왜냐하면 별도의 탈 것이 없고 오직 一佛乘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이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을 모두 섭수하는 것으로 알려진 6처를 붓다에 의해 대승적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주석하여, 비록 그 구체적 내용이 소승의 삼장이더라도 누구라도 대승에 머물면서 정법을 섭수할 수 있는 훈련 주제라고 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경문에서 승만 왕비의 설명을 참조하면 이 6처 중 아라한에게는 출가와 구족계 수지라는 2가지가 없다. 이를테면 붓다에게 의지하지 않는 한, 붓다와 동일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기회가 그들에게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아라한일지라도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 수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김홍미]

 

[역사적으로 대승은 부파불교 시대 이후에 발생한 신불교 운동으로, 대승의 출현은 개인적 수행에서 나아가 대사회적인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의 육바라밀 수행과 공사상을 사상적 특징으로 하고 있어 가히 혁명적인 불교의 변화라 하겠다. 계율적인 면에서도 섭율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의 삼취정계(三聚淨戒), 즉 계율을 지키고 선법을 닦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포괄적인 대승계가 출가자들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여기서 일승장(一乘章)이라는 말은 이 장의 끝부분에, “만일 여래께서 저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곧 대승이며 삼승이 없는 것이니, 삼승이 일승에 들어가고, 일승이 곧 제일의(第一義)가 됩니다”라는 법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화경>의 비유에서 보듯이 불타는 집과 같은 사바세계에서 철없는 아이들과 같은 중생들을 구하고자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 가지 탈 것(三乘)’을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은 곧 일불승의 진실을 열어서 나타내어 보이기 위한 부처님의 교묘한 선교방편(善巧方便)인 것이다.-혜총스님]

 

[대승, 1승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한 장으로 '승만경' 전체 15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4장까지는 승만부인이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에 대해, 이 장에서는 그 생각이 제불의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부처님께서 승만부인에게 ‘섭수정법을 설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법을 말하고 있다.
1승장(一乘章), 대승=불승=1승이라는 사상과 3승 사상(三乘思想)과의 관계를 보면, 일승을 불승(佛乘)이라 하고 또 그것을 대승으로 보는 사상이 대승경전, 특히 '법화경'의 중심사상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은 1승을 근본적인 입장을 하고 있으나 1승을 3승 문제와의 관련에서 설하는 것은 ‘방편품’과 ‘비유품’의 2품(二品)이다. ‘사리불이여, 여래는 오직 1승(一乘)만을 가지고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다른 승(乘)인, 혹은 2[二], 혹은 3[三]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하여 '법화경'은 1불승진실(一佛乘眞實)을 개현(開顯)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2승, 3승은 방편설(方便說)이었다고 한다. 진실법은 1승법(一乘法), 즉 불승(佛乘), 유일(唯一)한 승(乘)이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3승법은 제불의 방편설(方便說)이었다고 한다. 즉 3승은 제불의 교화로서 설해진 것이다.

구마라습은 3승을 성문․벽지불․불승이라 하고 축법호(竺法護)는『정법화』에서 성문․연각․보살의 도(道)라고 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을 2승이라 부르는 것도 관습적이지만 문제는 보살승을 불승, 1승이라 하는 입장(이 경우에는 3승 중의 보살승은 1승, 1불승으로 파악하고 있다)과 3승 외에 1불승을 세우는가, 어떤가의 문제가 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보살승의 내용에 관계되는 것이나 그것은『비유품』의 화택(火宅) 삼거(三車)라는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양거(羊車: 성문승), 녹거(鹿車: 연각승), 우거(牛車: 보살승)의 3거에 대해 대백우거(大白牛車: 1불승) 라고 하는 1불승을 따로 세우는 입장, 즉 이른바 4거가(四車家)와 3거(三車) 중의 우거(牛車)와 1불승인 대백우거를 동일로 보는 3거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쟈타카』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은 석존의 전생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하거나 석존 또는 과거불(過去佛)이나 미래불에 한해서 사용되고 있던 부파불교의 보살에 대한 관념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승만경』에서 설하는 1승은 1불승을 보살승으로 하는 법화의 사상을 이어 받은 것임을 우선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 1승장 제5에서 1승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승만부인이 “세존이시여, 대승에 주(住)하여 대승을 섭수하는 것은 곧 2승에 주하여 2승과 일체의 세간․출세간의 선법(善法)과를 섭수 하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체의 교법은 대승에서 발하고 대승에 포섭되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원래 대승불교, 적어도 『법화경』 이전에는 성문에 도달하기 위해서의 승(乘), 즉 수행을 닦아 가면 아라한에, 연각승을 수행하면 연각에, 보살승을 수행하면 보살․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제각각 수행의 결과를 설정하고 각각의 존재 방식을 설하고 있었다.
“3乘 가르침은 천차만별인 중생 근기에 상응하도록 불법 설하기 위한 선교방편”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이 비롯되듯 모든 가르침 1乘의 가르침에서 흘러나와”
그런데 『법화경』에 이르러 그러한 3승의 가르침은 중생의 근기에 서로 다름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설법에도 제각각의 근기에 상응하도록 천차만별로 설한, 이른바 선교방편이라고 하여 진실은 오직 1불승이었다고 가르쳐 타이른다.
따라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어느 것도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것이어서 결코 그것들이 의의가 없는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승만경』은 그것을 이어 받아서 그대로 1불승과 같은 값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본 『승만경』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1승은 2, 3과 대립하는 1승이 아니라 2승, 3승을 포섭하는 절대의 1승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3승을 여기서는 1승이라는 생각 속에 해소시키고 정법을 섭수하는 것은 대승 1승법에 철저히 하는 것, 즉 3승을 안에 포섭하는 넉넉한 세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을 두 가지의 비유로 해설한다. 하나는 아뇩달지(阿耨達池: anavatapta)의 비유여서 이 연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八大河]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모든 가르침은 1승이라고 하는 진실한 가르침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또 대지가 모든 종자를 양육하여 번성, 증장시킨다고 하는 대지의 비유에 의해서 1승법은 모든 가르침, 일체세간․출세간․선법을 생하고 증장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가 걷는 길을 최고로 생각하고, 이윽고 그것에 고집하며 남을 고려하지 않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숫타․니파타』, 즉 붓다의 말씀을 모은 글인 『경집』제883게와 4게(四偈)에도 있음과 같이 '어떤 사람들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그 견해마저도 다른 사람들이 '허위이다. 허망하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집견(執見)을 품고 논쟁을 한다. 무슨 까닭에 여러 길의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883게(偈))
“진리는 하나이며 제2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투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각자 다른 진리를 칭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길의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884게)
여기에 예로부터 ‘진실은 오직 하나’라는 사상의 한 조각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붓다에 있어서의 진리․연기(緣起)의 법문은 여래의 출세(出世), 미출세(未出世)에 관계없이 보편(普遍)의 진리로서 있었던 것이며, 과거의 제불도 또한 그와 같은 진리를 설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승, 즉 1승법이 진실한 가르침으로서 모든 것을 포섭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뇩달지(阿耨達池)에서 흘러나오는 8대하[八大河]의 명칭은 갠지스 강이라던가, 인더스강이라던가, 하는 이름이 있어서 각각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의 연못이다.
그것은 마치 붓다가 4성(四姓)의 평등을 설함에 있어서 예를 들면 여러 큰 강이 있다. 즉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등은 큰 바다에 도달하면 앞의 이름과 성(姓)을 버리고 다만 큰 바다라고 만 말한다.(『증지부』제4권)
어떠한 강이라도 갠지스[恒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모두 그들의 이름과 성(姓)을 잃는다. 항하(恒河)도 바다에 들어갈 때, 이미 있었던 것과 같이 보이지 않는다.(『쟈타카』제6권)-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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