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如來藏) 계통의 경전중의 하나인 승만경은 옛부터 여래장과 불성을 설하는 귀중한 으로 취급되어 오고 있다. 승만경은 10가지 수지(十大受) 가지 서원(三大願) 설하고 있으며 일승도(一乘道) 법신상주(法身常住) 뜻을 설하고 있다. 승만경은 사성제가 아닌 일성제(一聖諦) 상주하는 멸성제(滅聖諦) 설하고불법승 삼승에 대한 귀의(三歸依) 설하지 않고 오직 () 귀의하는 일의(一依)만을 설하고 있다. 또한 여래장에는 () 뜻과 불공(不空) 뜻이 있음 밝힌다.​

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은 삼계의 분단생사(分段生死) 벗어났으나 아직 무명주지(無明住地) 소지장(所知障) 남아있어서 의생신(意生身) 변역생사(變易生死) 있고, 오직 무명주지를 끊은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일체생사를 벗어난 진정한 대열반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재가(在家) 대보살로서 거사의 대표가 유마거사라면 재가청신녀의 대표는 승만부인이라고 말할 있다. -지견청정]

 

攝受章第四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攝受正法]’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 설명하고 있다.

첫째, 보살이 가지고 있는 모든 願은 ‘바른 법[正法]을 거두어들인다[攝受]’는 하나의 큰 서원[一大願)에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 것은 하나의 서원을 말하는 이다.

둘째, ‘바른 법’이란 곧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 것은 波羅蜜이다.

셋째, 이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고자 한다면 몸[身]ㆍ생명[命]ㆍ재산[財]을 모두 버려야 한다. 그만큼 섭수정법은 철저하게 희생을 담보로 한다.

넷째,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 것은 大乘(maha-yana)이다. 왜냐하면 대승은 聲聞과 緣覺, 그리고 世間과 出世間의 훌륭한 법을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마디로 표현하면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 것은 大乘이라는 이다.

즉 ‘섭수정법(攝受正法)은 호지정법원(護持正法願)이다.]

 

[이 장에서 취택(取擇)될 내용으로서는 (1)방편과 진실지와의 관계 (2)정법이란 1승법이라는 것 (3)따라서 정법을 섭수하는 것은 붓다가 설한 대승정신을 몸으로써 나타내야할 것 (4)모든 서원은 필경 섭수정법의 하나의 큰 원에 귀일할 것 (5)그 공덕은 헤아려 알 수 없는 것 (6)그 정법을 섭수하는 사람은 온갖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대승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정법의 공덕을 나누어준다고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사람일 것 (7)그렇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법모(法母)가 되고 불청(不請)의 벗이어야 할 것 (8)이리하여 섭수 정법자가 그대로 정법의 체현자(體現者)이기 때문에 섭수되는 정법과 섭수하는 사람이 일치한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8. 정법을 받아들이는 공덕

爾時(이시) 勝鬘白佛言(승만백불언이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我今當復承佛威神(아금당복승불위신) 說調伏大願眞實無異(설조복대원진실무이)

저는 이제 다시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조복하는 원이 진실하여 틀림이 없음을 설하고자 합니다

 

佛告勝鬘(불고승만) 恣聽汝說(자청여설)    방자할 마음대로 ,

부처님께서 승만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설하는 바를 듣겠노라.

 

勝鬘白佛(승만백불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菩薩所有恒沙諸願(보살소유항사제원一切皆入一大願中(일체개입일대원중)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항하강(갠지스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원의 모두가 가지 서원에 들어가는 것이오니

所謂攝受正法(소위섭수정법) 攝受正法眞爲大願(섭수정법진실대원)

이른바 (하나의 원은)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오니정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서원입니다.

방편과 지혜, 『승만경』이라는 경의 이름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이다. 이 경명처럼 『승만경』은 그대로 일승대방편(一乘 大方便)이라 하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1승법을 선양한 대승(방광)경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승 사상과 방편 사상은 『승만경』의 성립에 앞선 『법화경』과 관계하고 있다. 따라서 섭수정법을 대승으로 하는 『승만경』의 입장은 바로 정법즉일승(正法卽一乘)이어서 섭수정법이라고 하는 하나의 큰 원에 모든 원이 귀납(歸納)되는 1승에 모든 원이 돌아감을 말한 것이다.
방편을 국어대사전(이희승 편저; 민중서림)에서 보살이 근기가 얕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쓰는 편의적인 수단 또는 진실한 교법에 끌어넣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법문과 같은 불교적인 해설과 더불어 목적을 위하여 이용되는 일시적인 수단 등으로 해설하고 있다. 우리들은 첫 번째의 의미보다는 두 번째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와전되어 진실에 대한 허위적인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흔히 “거짓말도 방편” 이라고 하는 관용어는 그러한 것에 발생의 이유가 있다.

방편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우파야(upaya)를 번역한 말이다. 일본의 범화대사전(梵和大辭典; 講談社)에 의하면 접근, 도착, 수단, 방책(方策), 공부, 교사(巧使), 권(權), 권방편(權方便), 여법(如法), 인연(因緣)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우파야는 어느 목적을 향해서 ‘가까이 가다’, ‘도달하다’라고 하는 의미의 동사upa-√i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어떤 목적이란 당연히 깨달음이라든가 해탈, 열반이 의취(意趣)된다. 

『중부(中部)』경전(經典) 제22경(經)에 뗏목[筏]의 비유에서
비구(比丘)들이여, 그대들이 구제되어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執着)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뗏목의 비유에 관한 가르침[法]을 설하리라.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큰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이 쪽 언덕은 위험해 무섭고 저쪽 언덕은 안전하여 무섭지 않다. 더욱이 이 쪽 언덕에서 저 쪽 언덕에 갈 나룻배도 없고 또 다리[橋]도 없다. 그 때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참으로 큰 강물이다. 그럼 나는 풀·나무·가지·잎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어, 그 뗏목에 의해서 손과 발로 노력하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 사람이 뗏목을 만들어 안전하게 저 쪽 언덕으로 건너갔다고 하자. 그리고 그 때, 그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자.
“아! 나는 이 뗏목에 의해서 저 쪽 언덕에서 건너왔다.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고 혹은 어깨에 메고 가자.”
그런데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할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비구들은 거룩한 분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만일 그 사람이 저 쪽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면 어떻겠는가. 오! 참으로 이 뗏목은 나에게는 크게 이바지했다. 나는 이 뗏목을 언덕에 끌어 올려 두거나 혹은 물에 띄워 두고 전진하자.
비구들이여, 그 사람이 이와 같이 했다면 그 사람은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이다.
-혜경스님]


佛讚勝鬘(불찬승만) 善哉善哉(선재선재)!智慧方便甚深微妙(지혜방편심심미묘)

부처님께서 승만 부인을 칭찬하셨습니다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지혜와 방편이 매우 깊고 미묘하니

汝已長夜殖諸善本(여이장야식제선분)  번성할 불릴 

그대는 이미 長夜=오랜 세월동안 모든 선의 근본을 심었기 때문이니라.

來世衆生久種善根者(내세중생구종선근자) 乃能解汝所說(내능해여소설)

미래세의 중생들로서 오랫동안 선근을 심은 이라면 능히 그대가 말하는 뜻을 알아들으리라.

汝之所說攝受正法(여지소설섭수정법그대가 설하는 정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받아들인다는 것은)

皆是過去未來現在諸佛已說今說當說(개시과거미래현재제불이설금설당설)

과거, 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설하시었고지금도 설하고 있는 바이며또한 장차 설하실 것이니,

我今得無上菩提(아금득무상보리) 亦常說此攝受正法(역상설차섭수정법)

지금 위없는 보리를 얻은 나도 역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항상 설하느니라.

如是我說(여시아설攝受正法所有功德不得邊際(섭수정법소유공덕불득변재)

이와 같이 내가 정법을 받아들이는 일을 설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은 가이없으니,

如來智慧辯才亦無邊際(여래지혜변재역무변재何以故(하이고)

여래의 지혜와 변재 또한 끝이 없느니라왜냐하면 

是攝受正法有大功德(시섭수정법유대공덕有大利益(유대이익)

이렇게 올바른 가르침=正法 받아들이는 것이 공덕이 되고 이익이 되는 까닭이니라.

 

[정법(正法) 수지한다는 것은 대승(大乘), 일승(一乘) 수지하는 으로서 일체 중생이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법은 일승이며, 불설(佛說)에는 이승(二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중생이 번뇌에 싸여 있지만 본성으로는 여래(如來)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품〔佛性:여래장(如來藏) 갖추고 있다고 하며, 여래장에 대해 여래장설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거의 모두 종합하여 설명하고 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하는 일승사상을 계승하고 또한 여래장 사상을 천명함으로써 여래장 사상을 대승의 정계(正系)로서 자리잡게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경전이다. 한편 승만이라는 재가여성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여 부처의 설법의 지위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대승불교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증명하는 경전이기도 하다.]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바로 지혜와 방편임을 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일불승을 모든 중생들에게 열어 보여 증득하게 하기 위해 방편으로 중생 근기에 따라 성문승이나 연각승을 보였지만 결국 오직 하나의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지혜를 있다.
정법은 대승법(大乘法)이요, 일승법(一乘法)이기에 승만부인은 정법을 섭수하고 수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먼저 드러내 강조하고 있다-혜총스님]

 

* 攝受正法廣大之義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 광대한

勝鬘白佛(승만백불)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我當承佛神力(아당승불신력) 更復演說攝受正法廣大之義(갱부연설섭수정법광대지의)

제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광대한 뜻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佛言(불언) 便說(편설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편히 말씀하시라.

 

勝鬘白佛(승만백불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攝受正法廣大義者(섭수정법광대의자) 則是無量(즉시무량) 得一切佛法(득일체불법)

정법을 받아들임의 뜻이 廣大=넓고 크다는 것은  無量=한량이 없다는 것이니일체 모든 불법을 얻어

攝八萬四千法門(섭팔만사천법문) 譬如劫初成時(비여겁초성시) 普興大雲(보흥대운)

8 4 법문을 포섭하는 까닭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劫初=세계가 처음 이루어질 때에 널리 구름이 일어나

雨衆色雨及種種寶(우중색우급종종보온갖 색깔의 비와 갖가지 보배가 비처럼 내리는 것처럼

如是攝受正法(여시섭수정법) 雨無量福報及無量善根之雨(우무량복보급무량선근지우)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역시 한량없는 복의 과보와 한량없는 선근의 비를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경의 핵심 주제어인 섭수정법에 대해 원효는 “‘정법이라는 것은 진여의 본질적 요소[]이고, ‘섭수라는 것은 正體知(후득지에 상대되는 무분별지이며如理智)이다. 지혜는 일체 분별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끝없는 진여법계가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이 평등한 것이고 둘이 아닌 것이며 다르지 않는 것이라고 깨닫는 이다.” 해설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여의 본질적 요소인 정법에 대해 일체 분별을 여윈 정체지로 깨닫는 것을 섭수정법이라 있을 것이다. 붓다가 이러한 섭수정법에 대해 승만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승만이 이것을 설하면서 일승장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승만이 꺼낸 마디는 섭수정법이 마하연이라는 선언이다.- '승만경' 일승장에 대한 원효의 해설 / 김홍미(원과)]


[섭수정법(攝受正法) 대승이며 그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 한다 세존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삼승(三乘)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일승(一乘)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모든 중생의 마음 속에는 본래부터 여래(如來) 청정한 성품이 갈무리되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대해 상세히 설하고 있다.

     장은 정법을 섭수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장으로서 '승만경(勝鬘經)' 전체를 통한 중요한 이다더욱이  섭수정법이라는 대원에 대해서 승만부인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부인 자신이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섭수정법을 듣고 승만부인의 이해가 바르고 또한 훌륭하다고 말씀하며 “  정법이야 말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똑같이 설하고 또한 설할 진실한 법이다.”라고 부인에게 말씀하신다는 내용이다.]

 

[겁초(劫初)란 세상이 시작되던 시초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작을 알 수 없는 초시간적 상황에서 시간적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최초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원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과 공간이지만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개념으로 겁초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무(無)에서 유(有) 출현하는 최초의 시간대라고 할 수 있다.-지안스님]

 

[(, kalpa)= 'kalpa' 음역인 겁파의 약칭으로, 장시·대시라 의역된다. 이나 어떤 시간의 단위로서 계산할 없는 무한히 시간을 말한다. 시간을 광겁(曠劫), 영겁(永劫)이라 하고 조재영겁(兆載永劫)이라고도 한다. () () 지극히 많은 수의 이름이다우주의 창조 신인 브라흐마의 하루는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칼파는 브라흐마의 하루 또는 하루 밤이다. 1칼파는 인간계의 43 2천만년 또는 4 3,200 년을 1겁이라 한다.

겁초(劫初)= 세상이 이루어지는 처음. 하늘과 땅이 열리고 중생이 생존하게 되는 시초를 이르는 .]

6. 부처님께서 증명하시

 

法主世尊(법주세존)!現爲我證(현위아증) 唯佛世尊現前證知(유불세존현전증지)

법의 주인세존이시여저를 위하여 증명해 주시옵소서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여기에서 증명하여 아실 것이오나

而諸衆生善根微薄或起疑網(이제중생선근미박혹기의망) 以十大受極難度故(이십대수극난도고)

여러 중생들은 선근이  微薄=얕은 탓으로 의심을 일으키기도 것입니다 엷을 ,

 十大受= 가지 서원은 끝까지 도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까닭에

彼或長夜非義饒益(피곡장야비의요익) 不得安樂(불득안락) 爲安彼故(위안피고)

저들이 기나긴 밤에 義饒益=옳은 이익을 얻지 못하여안락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나저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今於佛前說誠實誓(금어불전설성실서) 我受此十大受(아수차십대수)

지금 부처님 앞에서 진실한 서원을 말씀 드리오니제가  가지 서원을 받아서 

如說行者(여설행자) 以此誓故(이차서고) 於大衆中當雨天花(어대중중당우천화)

말씀 드린 대로 실천하면 서원으로 말미암아 대중 가운데에 마땅히 천상의 꽃이 비처럼 내리며,

出天妙音(출천묘음천상의 미묘한 음성이 들려지게 하소서.


說是語時(설시어시) 於虛空中(어허공중) 雨衆天花出妙聲言(우중천화출묘성언)

(승만부인이) 이렇게 말했을  공중(허공)에서 천상의 꽃이 비처럼 내리고미묘한 음성을 내어서,

如是如是(여시여시)!如汝所說(여여소설) 眞實無異(질실무이)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그대가 말한 바는 진실과 같아서 다르지 않느니라.

彼見妙花及聞音聲(피견묘화급문음성) 一切衆會疑惑悉除(일체중회의혹실제)

저들이 천상의 아름다운 꽃을 보고 미묘한 음성을 들은 대중들은 온갖 의혹이 모두 없어지고

喜踊無量而發願言(희용무량이발원언)  한량없이 듯이 기뻐하면서 발원하여 말하기를,

恒與勝鬘常共俱會(항여승만상공구회) 同其所行(동기소행)

언제나 승만 부인과 더불어 같이 하면서행하는 (수행) 또한 함께하리라 하였으며,

世尊悉記一切大衆如其所願(세존실기일체대중여기소원)

세존께서는 일체 대중 모두가 발원하는 바의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수기하셨습니다.

 

[승만부인의 서원은 대승법에 의지해 성불하는 의지처이다. 그러므로 승만부인이 세운 가지 서원은 승만부인만의 서원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서원이어야 한다. 그런데 근기가 약하거나 의심이 많은 중생들은 과연 서원을 실천할 있겠나 하고 의심부터 한다. 성불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도 않고 의심만 한다. 이것을 승만부인은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만부인은 가지 서원을 실천함이 진실이고 마땅히 그러하다고 하면 하늘의 천신들이 꽃비를 내리는 상서로운 길상을 보여 의심을 끊게 해달라고 하면서 부처님께 증명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의심은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장애 된다. 무엇으로도 없는 금강 같은 일심을 이루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데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니 발걸음이 더딜 수가 없다. 설령 출발했어도 마음이 불안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하게 된다. 기도를 통해 반드시 성불할 것이라고 하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 물러나지 않고 진득하게 나아가 성취할 있다
절에서 하는 기도 성취가 아니더라도 세속에서도 강력한 믿음의 의지가 있어야 무슨 일을 목표를 성취할 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서원(목표) 세우고 서원이 나를 성불(행복)하게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승만부인의 서원이 허망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내리면서 신묘한 천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바는 진실과 같아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이렇게 온갖 의혹이 사라지자 환희심이 일어난 사람들이 모두 승만부인과 곳에 태어나 수행하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하자 부처님께서는 대중이 서원한 대로 모두 이루어지리라 수기하셨다. 보살행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직접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신행생활에 있어서나도 승만부인처럼 보살행을 실천하겠다 보리심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혜총스님]

 

[ 가지 서원을 발한 승만 부인을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시는 장면이다.
상서로운 길상이 나타나 대중의 의혹을 풀어주고  같이 십대수의 원을 실천하여 승만 부인과 같이 되기를 발원한다.
'승만경' 여러 사람들이 발원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데여기에도 묘한 상징성이 있다.
인간의 염원이 진실하면  염원을 언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은 믿는 대로 보이게 되며 아는 것만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서원을 발하는 진실한 생각이 가득하다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이다.
따라서 내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세상은 긍정되어지고 조화되며통일되는 근본의 법칙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중생의 업이 충돌하여 온갖 부조리하고 이율배반적인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세상의 근본진리 자체가 잘못되는 수는 없는 것이다부처님의 수기는  세상을 긍정해 주어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는 하나의 마침표이다.ㅡ지안스님]

三願章第三

 

7. 三大願 - 가지 서원을 발하다.

爾時勝鬘復於佛前發三大願(이시승만복어불전발삼대원) 而作是言(이작시언)

이때 승만 부인은 다시 부처님 앞에서  가지 서원을 세우고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以此實願安隱無量無邊衆生(이차보원안은무량무변중생)

진실한 서원으로 헤아릴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편안하고 안온하게 하려 하오니

以此善根於一切生得正法智(이차선근어일체생득정법지) 是名第一大願(시명제일대원)

선근으로써 일체 중생의 일체의 생에 태어  때마다  정법의 지혜가 얻어지게 하소서이것이  번째 서원입니다.

[첫째 서원은 지혜증득(上求菩提) - 自利] 

我得正法智已(아득정법지이) 以無厭心爲衆生說(이무염심위중생설)

제가 정법의 지혜를 얻은 후에는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정법을 설하겠습니다.

是名第二大願(시명제이대원이것이  번째 서원입니다.

[둘째 서원은 중생제도(下化衆生) - 利他

我於攝受正法(아어섭수정법) 捨身(사신)、命()、財(), 護持正法(호지정법)

제가 정법을 거두어 가지고는몸과 목숨과 재산 등을 버려서라도 정법을 보호하여 유지하겠습니다.

是名第三大願(시명제삼대원이것이  번째 서원입니다.

[셋째 서원은 불법호지(不自惜身命) 삼대원]  

爾時(이시) 世尊卽記勝鬘三大誓願(세존즉기승만삼대서원)

그때 세존께서 승만의 가지 서원을 증명(수기)하셨으며,

如一切色悉入空界(여일체색실입공계) 如是菩薩恒沙諸願(여시보살항사제원)

( 가지 서원은모든 () 허공에 들어 있는 것처럼마치 온갖 빛깔이 허공 속에 들어 있는 것같이 항하의 모래 수같이 많은 보살의 헤아릴 없는 서원이

皆悉入此三大願中(개실입차삼대원중) 此三願者眞實廣大(차삼원자진실광대)

 모두 가지 서원 속에 들어 있으니, 가지 서원은 진실로 넓고 큰것이니라.

[바른 법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고 중생제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번째 과제이다. 본인만 정법의 지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널리 지혜를 펼치는 대승적 입장에 서야 한다. 보살은 정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재산도 바치겠다는 서원이 가능하다. 부처님 법은 세속의 정의나 도덕과는 차원이 다르다. () () 초월하고 자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무차별한 법이다. 그러므로 정법의 길을 걷는 불자(보살) 길은 무엇과도 바꿀 없는 수승한 불사이다. 사람 받기 어렵고, 부처님 만나기 어렵고, 바른 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한다.
<승만경> 승만부인의 대서원을 바탕으로 대승의 정법에 대해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중생들이 대승의 정법에 눈을 뜨게 있다면 보살의 공덕은 무량하다. 보살은 자신이 먼저 정법의 지혜를 증득하고 정법의 지혜를 중생들에게 두루 펼쳐 고통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려서라도 정법을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승만부인의  번째 대원은 <법화경> ‘여래수량품부자석신명(不自惜身命), 자기 스스로 신명(身命) 아끼지 않는다 <법화경> ‘권지품아불애신명(我不愛身命), 나는 신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목과 상통한다.
승만부인이 제일 먼저 정법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의 실천이 성불의 길이기 때문이다. 승만부인은 이미 오랜 세월 이전부터 정법의 섭수가 성불의 길임을 체득했기에 다시 생에서 부처님을 만나 이런 서원을 받들어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행이 실천으로 발현할 부처님의 정법이 세계 곳곳에 꽃을 피우게 된다. 우리도 승만부인처럼 보살행을 실천해서 부처님의 정법이 바람에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널리 퍼뜨려야 하겠다.-혜총스님]

[ 가지 서원을 발한 십대수(十大受章) 이어 다시 가지 서원을 발하는 삼대원(三大願)장이다.
'승만경' 승만 부인의 서원을 중심으로 대승의 정법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 키워주는 법문이라 있다.
지혜가 없는 믿음은 맹신이 되고 말기 때문에 중생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정법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째 원은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번째 원은 이타를 말하는 것으로결국 불교의 목적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원력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승의 정신인 이타가 없이는 자리가 없다는 숨은 뜻이 들어 있다.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앞서는 현대사회는 남을 위한 진정한 이타심이 부족해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 것이다.
번째 원에서 승만 부인은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려서라도 정법을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맹세를 한다바른 법에 의해
중생의 삶이 더욱 성숙되고 가치가 더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빛이 있어야 어둠을 물리칠 있는 것처럼 정법의 지혜에 의해 무명의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다.ㅡ지안스님]

 

[승만부인은 신명, 재산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정법을 지키며 기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법을 넓히고자하여 정법이 영원히 머물도록 하는데 서원을 세웠다. 우리들은 부인의 이 서원 가운데 부인의 보살행 실천 모습을 볼 수 있다.
법이라고 하는 불교의 진리는 오직 그 절대성의 영역에 정체하고 있는 한 법은 진리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반드시 인간의 세계, 즉 우리들의 세계에 나타나서 사람에 의해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고 받들어진다고 하는 영역에서 작용하지 않으면 그 의의가 없다.
초기 불교 성전(聖典)은 그 동안의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존자(尊者)시여, 어떠한 인(因), 어떠한 연(緣)에 의해서 이전에는 학칙이 적었는데도 많은 비구는 지(智)에 안립(安立)해 있었습니다. 존자시여, 어떠한 인, 어떠한 연에 의해서 지금은 학칙이 많은데도 많은 비구는 지(智)에 안립하지 못합니까.」
「카샤파여, 그것은 이러한 까닭이 있다. 사람들이 서두르게 되고 정법이 멸해 가기 때문이다. 정법이 멸하지 않은 한, 상법(像法)이 세상에 생기는 일은 없다. 상법이 세상에 생길 때에는 정법은 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金)이 멸하지 않는 한 가짜 금이 생기는 일은 없다. 그러나 가짜 금이 세상에 생겨날 때에는 금의 멸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상응부』제2권)-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394년 ~ 468년) : (요약) 중부 인도 출신의 승려로 중국에 건너가 『잡아함경(雜阿含經)』등을 비롯한 경전(經典) 번역에 종사하였다.

   중인도의 역경승. 공덕현(功德賢)이라 번역한다. 바라문 종족으로 어려서부터 천문ㆍ수학ㆍ의술ㆍ주술(呪術)과 오명론(五明論) 등에 정통했다.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고 불교에 귀의, 삼장(藏)을 통달했으며 마침내 대승을 배웠다. 여러 나라를 다니다가 435년(송의 원가 12년) 해로로 중국 광저우[광주(廣州)]에 들어왔다. 문제(文帝)는 사신을 보내어 건강(建康)으로 맞아들이고, 기원사(祇 洹 寺)에 있게 하여 역경 사업을 시작했다. 뒤에 말릉(抹陵)에 백탑사(白塔寺)를 세웠다.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르는데 이는 대승을 배웠다는 뜻을 일컬음이다.]

 

5. 十受章第二 가지 서원을 세우다 ( 가지 받음=十受)

 

爾時(이시) 勝鬘聞受記已(승만문수기이) 恭敬而立受十大受(공경이립수십대수)

그때 승만부인은 수기 주심을 듣고 공경히 서서 가지 (서원) 부처님께 증명 받았습니다.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 於所受戒不起犯心(어소수계불기범심)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깨우칠 때까지받은 바 계율에 대하여 범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오늘부터 깨칠 때까지 받은 계율을 범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 번째 서원은, 계율수지를 다짐함과 아울러 어른들을 공경하고 성내는 마음을 다스려 자비심을 발현하고 사상(四相) 취착해 질투하거나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겠다는 자신을 제어하는 바탕으로 삼겠다는 다짐이다.-혜총스님]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 於諸尊長不起慢心(어제존장불기만심)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모든 어른들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於諸衆生不起恚心(어제중생불기에심 성낼 

모든 중생에 대하여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보리에 이를 때까지

於他身色及外衆具不起疾心(어타신색급외중구불기질심  

다른 사람의 모습(용모)이나 그들이 가진 소유물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보리에 이를 때까지

於內外法不起慳心(어내외법불기간심 아낄 

안팎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아끼는 마음)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 제1에서부터 제5까지는 섭율의식(攝律儀式)]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不自爲己受畜財物(불자위기수축재물)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凡有所受悉爲成熟貧苦衆生(범유소수실위성숙빈고중생)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모으지 않을 것이며무릇 받는 것이 있다면모두 가난하고 곤궁한 중생들을 위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世尊(세존)!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不自爲己行四攝法(불자위기행사섭)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위하여 사섭법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爲一切衆生故(위일체중생고) 以不愛染心(이불애염심)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애착하지 않는 마음) 

無厭足心(무염족심) 無罣㝵心(무괘애심) 攝受衆生(섭수중생 거리낄 , 그칠 ,  

만족함이 없는 마음과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거두어 들여 교화=攝受하겠습니다.

 

世尊(세존) 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若見孤獨幽繫疾病(약견고독유결질병)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만약 고독하게 홀로 있는 사람, 갇혀 있는 사람, 병든 사람

그윽할 , 검을   

種種厄難困苦衆生(종종액난곤고중생) 終不暫捨(종불잠사 잠깐 

온갖 액난으로 괴로워하는 중생을 본다면 잠시도 버리지 않고

必欲安隱(필욕안은) 以義饒益令脫衆苦(이의요익영탈중고) 然後乃捨(연후내사)

반드시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의리로써 이롭게 하고(도와주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뒤에야 그들을 보내겠습니다.  

 

世尊(세존) 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보리에 이를 때까지

若見捕養衆惡律儀及諸犯戒終不棄捨(약견보양중악율의급제법계종불기사 버릴 

만일 중생을 사로잡아 기르는 나쁜 생활법() 갖가지 계율을 범하는 것을 보게 되면 끝내 버려 두지 않고

我得力時(아득력시) 於彼彼處見此衆生(어피피처견차중생)

제가 힘을 얻은 곳곳에서 이런 중생을 보면  

應折伏者而折伏之(응절복자이절복지應攝受者而攝受之(응섭수자이섭수지 꺾을 

마땅히 조복할 사람은 조복하고거두어들일 사람은거두어들이겠습니다.

何以故(하이고) 以折伏(이절복)  攝受故令法久住(섭수고영법지주)

왜냐하면조복 받거나 거두어들임으로써 (불법, 진리) 영구히 머물게 되고 

法久住者(법구주자天人充滿(천인충만

법이 영구히 머물게 되면천상의 사람과 인간세상 사람이 많아지고 

惡道減少(악도감소能於如來所轉法輪而得隨轉(능어여래소전법륜내득수전)

악도중생이 줄어들어서, 능히 여래께서 굴리시는 법륜을 따라 굴리게 것이며

見是利故救攝不捨(견시리고구섭불사)

이러한 이익이 있으므로, 거두어들이고 버리지 않겠습니다.  

[제6에서부터 제9까지 중생을 구제하려는 섭중생계의 실천행. ]

 

世尊(세존) 我從今日乃至菩提(아종금일내지보리) 攝受正法終不忘失(섭수정법종불망실)

세존이시여저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를 때까지 바른 =正法 거두어 지녀, 마침내 잊지 않겠습니다.

何以故(하이고) 忘失法者則忘大乘(망실법자즉망대승)

왜냐하면, 바른 법을 잊어버리는 것은 대승을 잊어 버리는 것이요

忘大乘者則忘波羅蜜(망대승자즉망바라밀) 忘波羅蜜者則不欲大乘(망바라밀자즉불욕대승)

대승을 잊는 것은 바라밀을 잊어 버리는 것이요, 바라밀을 잊는 것은 대승을 바라지 않는 것이니,

若菩薩不決定大乘者(약보살불결정대승자) 則不能得攝受正法欲(즉불능득섭수정법욕)

만약 보살이 대승을 원하지 않는다면그는 정법을 거두어 지니지 못할 것이며,  

隨所樂入(수소락입) 永不堪任越凡夫地(영불감임초범부지)

법을 즐거움을 따라서 들어가려 할지라도, 영원히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할 것입니다

我見如是無量大過(아견여시무량대과저는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잘못) 보았으며

又見未來攝受正法菩薩摩訶薩無量福利(우견미래섭수정법보살마하살무량복리)

미래에 정법을 거두어 지니는 보살마하살의 한량없는복과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故受此大受(고수차대수 가지 크나큰받아 지녀야 것을 받습니다.(이렇게 서원을 부처님께 증명 받습니다.)

[제10은 섭선법계]

[이러한 서원을 바로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이 보리심에는 두 가지의 서원과 한 가지의 다짐이 필요한 것이다.
첫째, 중생을 건지겠다는 서원이 필요조건이다.
둘째,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내가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서원이다.
그리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가 되는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이다.

열 가지의 커다란 가르침(戒)을 지켜 가겠다는 다짐이지만 그것은 불교 생활을 체험하려고 하는 승만부인 개인에 있어서의 타이름(戒)임과 동시에 불도를 걷겠다고 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에 간직해야 할 타이름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이 타이름을 계율(戒律)이라고 한다. 주로 초기의 불교 교단에서 비구, 비구니가 승가(僧伽)에서 생활에 즈음한 규칙인데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500계(四分律에 의함)라고 정해져 있었다.
계율에도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라는 호칭이 있다. 그렇다면 승만부인의 십대수(十大受=戒)는 어떤 구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법구경(法句經)』의 제183게(偈)에 「모든 악을 행하지 말 것. 선을 획득(獲得)할 것. 스스로의 마음을 맑힐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7불통게(七佛通偈)라고 하여,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소승은 자리행(自利行)을, 대승은 이타즉자리행(利他卽自利行)을 실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틀림없이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 사상에서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대승은 다른 사람을 위한 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참다운 의미에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라든지 남을 위해서라고 하는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악을 멈추고 선을 닦는다(止惡修善)라고 하는 불교 윤리의 기조에는 소승도 대승도 구별되지 않음이 실제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있어야 할 일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하는 행위는 그 자체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자기를 위해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승만부인의 10대수(十大受)는 참으로 대승계(大乘戒)의 범주에서 보면 대승보살계에 통섭되는 것이다. 즉 모든 계를 유지해 가려는 의미의 (1)섭율의계(攝律儀戒), 온갖 선법을 닦아 가는 의미에서의 (2)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사람들을 이익 되게 하는 의미에서의 (3)섭중생계(攝衆生戒)라고 하는 3취정계(三聚淨戒)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우선 자율적인 정신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스스로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지만 그 기본이 되는 것은 불교에서 3독(三毒), 3화(三火)라 일컫는 번뇌를 지멸(止滅)하는 데에 있다. 즉 탐욕과 진에와 우치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세 가지는 아함불교(阿含佛敎) 이래 불선(不善)의 근본이라고 하며 인간이 가진 번뇌의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인간은 여러 가지의 것에 집착하며 집착하기 때문에 욕망이 증대하는 것이지만 그것들 중에서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 즉 아집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이 아집은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집착, 즉 아소집(我所執)으로 된다. 따라서 자기의 의사에 거슬리는 것,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가 생긴다. 혹은 자기에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시새움을 내고 명성이나 권력을 동경한다. 반면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서는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며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거만한 마음을 가지고 접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한 아집·아소집에서 생겨난 것이다.
섭악율의계(攝惡律儀戒)란 이러한 생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를 규제[律]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탐욕․진애․우치 라고 하는 불교의 불선(不善)의 근본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여 두는 것이 아니라 불선심(不善心)을 없애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지악(止惡)이라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이 노력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지악에서 반대로 선을 행하려는 적극성이 생겨난다.  선을 짓는, 섭선법계는 『승만경』이라고 하는 경전의 안목을 이야기하는 것도 된다.
-혜경스님]


[열 번째는 정법(대승법) 수지해서 결코 잊지 않겠다는 섭선법계를 세운다

십대수(十大受)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말씀을 올리는 모습이지만 대승의 서원은 바로 부처님의 본원과 같기 때문에 부처님의 증명 아래 부처님의 본원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십대수는 한마디로 성불할 그날까지 대승의 보살도를 실천하겠다는 의지요, 다짐이다. 승만부인이 보살의 마음을 굳게 세우고 끝까지 성불하려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이다. 따라서  보리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없는 중생을 건지는 선법(善法) 실천하는 그것이 정법(正法)이요 대승(大乘)이며, 성불의 , 부처의 이다.

승만부인의 십대수에는 대승불교의 가지 기본적인 계법인 삼취정계(三聚淨戒) 녹아있다. 모든 계율을 지키고 닦으려는 섭률의계(攝律儀戒), 온갖 착한 법을 닦는 섭선법계(攝善法戒), 일체 중생을 구하려는 섭중생계(攝衆生戒)이다.

원효스님은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섭률의계와 섭선법계만 있고 섭중생계가 없다고 한다면, 오로지 자리행(自利行) 있는 것이 되어 이승(二乘) 머무를 뿐이고 섭중생계만 있으면 이타행(利他行) 있고 자리행이 없게 되는 까닭에, 범부와 다를 없는 것이 되어, 보리의 싹을 돋아나게 없다. 그리고 삼취정계를 갖추면 무상보리(無上菩提) 열매를 감득할 있고, 삼취정계야말로 불사약인 감로(甘露)이다.”
그래서 삼취정계를 간직함에 따라 중생과 자기의 마음에 갖추고 있는 불성, 여래장(如來藏), 본각(本覺), 불과(佛果) 있다고 강조했다.-혜총스님(불교신문)]


[ 장은 '승만경' 십대수장(十大受章)으로, 10가지 서원을 발하는 것이며, 10대수는 대승의 서원이 부처님의 본원과 같으므로 부처님으로부터 승만 부인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하겠다는 것은 이타원력을 근본으로 하는보살의 대원이다. 화엄경의자신을 제도하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한다.” (自未得度先度他) 것과 같다. 장에서는 부처님의 정법이 대승이라 하여 대승이 바로 부처님의 정법임을 천명 놓았다.ㅡ지안스님]

 

[『정법을 섭수(攝受)하여 잊지 않는다』라는 것이 선을 짓는 것의 기본적인 태도라고 보고 있다. 정법이란 바로 대승이며 이 대승인 정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바라밀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여기에서는 정법=대승=바라밀이라고 하는 등식(等式)을 볼 수 있다. 
원래 정법(正法)이라는 말은 아소카(阿育)왕의 소마애법칙(小摩崖法勅) 가운데 바이라트의 제2법칙문(第二法勅文)에 보인다. 이 법칙문은 델리의 동남방 근처 자이풀주의 바이라트 동북에 있는 산의 암석에 새겨진 것으로서 1871년에 발견 된 것이다. 그 법칙문에는「여러 대덕들이여, 여러 스승께서는 짐이 얼마만큼 붓다와 법과 상가에 대해서 공경과 신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으리라. 여러 대덕들이여 세존․붓다의 설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선설(善說)하신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짐이「이와 같이하여 정법은 영구히 머물 수 있다」라고 사유하여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나야(毘奈耶)에서의 최승법설(最勝法說) 성종경(聖種經) 당래포외경(當來怖畏經) 모니게(牟尼偈) 적묵행경(寂黙行經) 우파제사문경(優波帝沙門經) 설라후라경(說羅睺羅經)이다.
「여러 대덕이여, 짐은 많은 비구 및 비구니가 전적으로 이들의 법문을 자주 청문하고 사념할 것을 바라고 있다. 재가(在家)의 신자(信者), 즉 우바새(優婆塞)와 신녀(信女), 즉 우바이(優婆夷)도 그와 같을 것을 바라고 있다.」
여기서 정법이란 붓다께서 설하신 법문(dharma-pariyaya)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법을 섭수하는 것은 이 정법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원한 것에 있다.
지금 『승만경』에서 정법의 이해도 이 기본선을 거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정법=대승=바라밀이며 우리 모두 다함께라고 말씀하신 붓다 소설(所說)의 법이었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이상․목적인 깨달음의 피안에 모든 사람이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상과 목적이 뚜렷이 밝혀진 이상, 그것의 구체화에 노력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붓다에 의해서 인간 존재의 원점이 적발되고 그 인간의 정신적인 개발이 적시된 것이 바로 불소설의 법이었다. 이 법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오늘 이후 장래에 걸쳐서 닦아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의 생존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임은 물론이지만 나 한 사람에게 주어진 길․법이 아닌 이상, 이 법을 서로 경숭하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영구히 존속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된 희망이다. 승만 부인의 「정법섭수」는 여기에 본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혜경스님]

[四攝法(사섭법) catur-samgraha-vastu , 사섭사(四攝事), 사사섭법보살이 중생을 섭수교화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보시섭·애어섭·이행섭·동사섭의 4가지 행위 말하며사섭법은 삼종심·사무량심·육바라밀 등과 함께 대승불교 보살도의 대표적인 수행덕목이다.
타인(他人) 상속(相續) 성숙(成熟)시키는 사섭법(四攝法) 애어섭(愛語攝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 부드러운 말로 바라밀(波羅蜜) 등을 말하는 것이다이행섭(利行攝)이란, 어떤 가르침이라도 받는 이들이 실제로 행동(行動)하게 하고 바르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동사섭(同事攝)이란 남이 하는 일에 자기도 함께 하면서 함께 배우는 것이다.
사섭(四攝)으로 나누는 것인가권속(眷屬) 선행(善行) 닦게 하려면 먼저 환희심(歡喜心) 내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게 하자면 먼저 그들에게 이익(利益) 되도록 알려야 하기에애어(愛語) 설법(說法)하여무지(無智) 의심(疑心) 없애도록 하고법의 뜻이 전도(顚倒)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른 이해(理解) 하게 하였다면, 이행(利行)으로 선행(善行) 닦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스스로 행하지 않고, 남에게 시키기만 한다면, 따르지 않을 것이기에, 자기도 남과 함께 동사(同事)하여 수행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믿고 따를 것이다.
애어섭(愛語攝)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법(世俗法) 따르는 애어(愛語) 화기애애(和氣靄靄) 얼굴로 안부(安否) 묻는  세속(世俗) 방법(方法)으로 대하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정법(正法) 가르치는 애어(愛語) 법을 믿고 계행(戒行) 지키며지혜를 일깨우는 공덕(功德) 노력하도록 () 설하여 주는 것이다.
이행섭(利行攝) 성숙(成熟)하지 않은 이를 성숙(成熟)하게 하고성숙(成熟) 이를 해탈(慧脫)하게 하는  가지 있다이행섭(利行攝) 중생(衆生)들에게 선행(善行) 하는데 도움이 되고이익(利益)되는 () 하여야 하는 것이다.
동사(同事)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중생(衆生)들의 이익(利益) 먼저 생각하고가행(加行)으로 먼저 자기를 조복(調伏)하여야 한다.
사섭법(四攝法)에서 보시섭(布施攝) 재섭(財攝) 법섭(法攝)으로 나눌  있다재물(財物) 보시는 재섭(財攝) 되고나머지는 ()으로 하는 보시(布施) 법섭(法攝) 속한다.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  가지 섭문(攝門) 합하여 사섭사(四攝事) 한다.
보살행(菩薩行) 끝이 없지만총괄(總括한다면 육바라밀(六波羅蜜) 사섭법(四攝法)이다육바라밀(六波羅蜜) 모든 불법(佛法) 완전(完全)하게 성숙(成熟)시키고모든 섭사(攝事) 모든 중생(衆生)들을 완전(完全)하게 성숙(成熟)시킨다.
모든 보살(菩薩)들도 처음부터 수행을 잘할  없었지만먼저 알고   서원(誓願) 대상(對象) 점차 넓혀 수행하였다그런 후에는 힘들이지 않고 수행할  있도록 습관(習慣)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지금 수행할  없다고 생각하며마음 닦는 습관(習慣) 버린다면청정(淸淨) 길에서 아주 멀어지게  것이다.
보살율의(菩薩律儀) 지닌 이들이 제행(諸行) 배우지 못할 방편(方便) 없다. 보리심(菩提心) 의식(儀式) 지니지 못한 이들도 배우고 노력하면 제행(諸行) 배울려는 강렬(强烈) 의지(意志) 생겨나고, 이때 율의(律儀) 받아 지니면 더욱 견고(堅固)하게 되므로 마땅히 애써야 것이다.]

4. 佛受記 - 부처님이 수기를 주시다.
(授記: 다음 생에 성불하리라 예언 하는 ,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승만경은 기원전 3∼4세기경에 大衆部(Mahāsāṃghika) 계통에서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원전의 일부가 보성론, 불성론 등에 인용되고 있다. 이 경은 주인공 勝鬘부인(Śrī-Mālā)의 입을 빌어 법화경에서와 같이 三乘(聲聞, 緣覺, 菩薩)의 구분은 방편이며, 오직 一(佛)乘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일승사상과 더불어 승만 부인의 열 가지 서원 및 세 가지 큰 서원(十大受, 三大願) 등 대승불교의 보살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승학]

 

佛於衆中卽爲受記(불어중중즉위수기)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서 수기(예언) 하셨으니,

汝歎如來眞實功德(여탄여래진실공덕) 以此善根(이차선근)

그대는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으니이러한 공덕(선근)으로 말미암아서

當於無量阿僧祇劫天人之中爲自在王(당어무량아승지겁천인지중위자재왕)

마땅히 한량없는 아승지겁동안에 천상과 인간 중에서 자재한 왕이 것이며,

一切生處常得見我(일체생처상득견아) 現前讚歎如今無異(현전찬탄여금무이)

태어나는 어디에서나 항상 나를 만날 있을 것이며,
앞에서 찬탄하는 것이 지금과 같아서 다름이 없을 것이며,

當復供養無量阿僧祇佛(당복공양무량아승지불)

마땅히 또한 한량없는 아승지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過二萬阿僧祇劫當得作佛(과이만아승지겁당득작불)

2 아승지겁동안을 하여 마땅히 부처가 것이니

號普光如來(호보광여래) () 正遍知(정변지)

이름하여 보광 여래응공정변지라 것이며,

 

[수기(授記) 범어 Vyakarana 번역한 말로 불법을 수행하는 이에게 부처님이 미래 어느 때에 부처가 것이라고 보장해주는 예언을 주는 것을 수기라 한다.
아승지는 대수(代數) 쓰이는 용어로 숫자로 표현 없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화엄경' 124개의 대수 용어가 설해져 있다.
()이란 가장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며, 찰나(刹那) 상대되는 말이다.
부처님을 찬탄한 공덕으로 아승지겁을 인간과 천상의 왕이 되었다가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2 아승지겁동을 하여 보광여래가 것이라고 수기를 내용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띠고 있는 이야기로 씨앗 하나가 수많은 꽃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서, 양이 점점 증가하여 무한대로 이어지듯이 작은 인연에서 시작하여 성불을 기약하는 인연이 오게 되는 미묘한 이치를 설하고 있다.-지안스님]

 

[수기(授記) 또는 기별(記別)이란 불법(佛法) 닦는 사람에게 부처님이 미래에 부처(부처님의 경지) 것이라고 미리 예언해 주는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승만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께서 갖추신 여러 가지 공덕과 능력을 찬탄한 찬탄이 부처님의 뜻과 일맥상통하였기에 부처님께서 승만부인과 더불어 권속들에게까지 수기를 내리신 것이다.
승만부인의 찬탄은 초발심이지만 이미 오랜 영겁의 세월 이전에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처님의 증명이 있었기에 지금 부처님께서 나투신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부처님을 뵙고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내리신 것이다.-혜총스님(불교신문)]

 

[십호(十號) : 부처님께 있는 功德相 일컫는  가지 명호.

(1)如來. 부처님과 같은 길을 걸어서 세상에 來現 사람, 또는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란 .

(2) 應供.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천상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만한 덕있는 사람을 뜻함.

(3) 正遍知. 일체의 지혜를 갖추어 온갖 우주간의 물심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

(4) 明行足. 無上正遍智, 行足 脚足이란 뜻으로 3학을 가리킴. 부처님은 3학의 脚足 의하여 무상정변지를 얻었으므로 명행족이라 한다.

(5) 善逝. 으로부터 가기를 잘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는 . 부처님은 여실히 언덕에 가서 다시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함.

(6) 世間解. 부처님은 능히 세간의 온갖 일을 아신다는

(7) 無上士. 부처님은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大士라는 .

(8) 調御丈夫. 부처님은 大慈大悲大智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드러운 , 간절한 ,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조복 制御하고 正道 잃지 않게 하는 이라는 .

(9) 天人師. 부처님은 스승이라는 .

(10) 佛世尊. 불타는 智者 또는 깨달은 사람이라 번역하며, 세존은 세상에서 가장 존중하다는 . 그러나 가운데 세존을 나누면 11호가 된다. 그러나 성실론 등에 無上士 調御丈夫 합하여 一號이므로 세존은 정히 十號 된다 하였음앞의 九號 갖추어 세상이 존중하므로 세존이라 .]

 

彼佛國土(피불국토) 無諸惡趣(무제악취 부처님 나라에는 여러 가지 나쁜 갈래=惡趣 없으며

老病衰惱不適意苦(노병쇠뇌불적의고)   쇠할 , 원수 ,

늙고, 병들고, 쇠퇴하며뜻에 맞지 않고 귀찮은 괴로움이 없으며

亦無不善惡業道名(역무불선악업도명彼國衆生色力壽命(피국중생색력수명)

또한 좋지 못한 악업의 이름마저 없으며 나라의 중생들은 몸과 힘과 수명과 

五欲衆具(오욕중구) 皆悉快樂(개실쾌락) 勝於他化自在諸天(승어타화자재제천)

다섯 가지 욕락이 모두 갖추어져, 모두 즐겁기만 하여 타화자재천의 천상세계보다 나을 것이며,

彼諸衆生純一大乘(피제중생순일대승) 諸有修習善根衆生皆集於彼(제유수습선근중생집어피)

세계의 중생들은 한결같이 순수하게 대승에서 온갖 선근을 닦아 익힌 이들만이 모여 사는 곳이니라.

勝鬘夫人得受記時(승만부인득수기시) 無量衆生(무량중생)

승만 부인이 수기를 받았을 한량없는 중생들과 

諸天及人願生彼國(제천급인원생피국) 世尊悉記皆當往生(세존실기개당왕생)

천상의 사람들이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으며, 세존께서는 모두 마땅히 왕생하리라 수기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은 성불하면 그만이지 세상을 바꾸어 때마다 성불하는가 하는 의문이 것이다. 부처님들은 부처가 되는 순간 대비심과 대자심이 일어나 끝없이 중생계를 찾게 된다. 중생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행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상주하신다.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항상 머무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의 인연을 열고 보여주고 닦아서 증득하도록 이끄시고, 당신 스스로 누구나 성불할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혜총스님(불교신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rmita-vaśa-vartino devāḥ) 음역하여 바라니밀(波羅尼蜜) · 바라니밀화야월치(波羅尼蜜和耶越致) · 바라유마바사(波羅維摩婆奢) 또는 사사발리(娑舍跋提)라고도 한다. 의역하여 타화락천(他化樂天) · 타화자전천(他化自轉天) 또는 화응성천(化應聲天)이라고도 한다. 줄여서 자재천(自在天) · 타화천(他化天) 또는 화타천(化他天)이라고도 한다욕계의 여섯 번째 하늘이라는 뜻에서 6(第六天)이라고도 한다.
6
욕천 가운데 6천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다른 유정이 변화시킨 묘욕경[欲境] 자유자재하게 자신의 즐거움으로 향수하는 하늘이다.

6욕천(六欲天,  ṣaḍ kāmadeva) 욕계6(欲界六天) · 욕계천(欲界天) 또는 욕천(欲天)이라고도 하며, 줄임말로 6(六欲) 또는 6(六天)이라고도 하며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3 가운데 욕계에 속한 여섯 하늘[] 뜻하는데, '욕천(欲天)' 여섯 하늘의 유정들은 모두 (, 산스크리트어: kāma)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목록의 명칭과 순서는 대승불교의 천태종의 논서인《천태사교의》에 따른 것이다.
4천왕천(四天王天, . cātur-mahārāja-kāyikā devāḥ)
도리천(忉利天, . Trāyastriṃśa)
야마천(夜摩天, . Yāmādevāḥ)
도솔천(兜率天, . Tuṣita)
화락천(化樂天, . Nirmāṇaratideva, Sunirmāarati)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 Para-nirmita-vaśa-vartino devāḥ)]

 

 

 

2. 불법(佛法) 귀의한 승만부

勝鬘得書歡喜頂受(승만득서환희정수) 讀誦受持(독송수지

승만 부인은 편지를 받아 기뻐하며정수리 위에 받들었다가편지를 읽고 외우며 받아 지니고는 

生希有心(생희유심) 向旃提羅而說偈言(향전제라이설게언)

희유한 마음을 내어 전제라(찬다라) 향하여 게송=노래를 부르듯 말하였습니다.

我聞佛音聲(아문불음성世所未曾有(세소미증유)

내가 듣자니부처님의 음성은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所言眞實者(소언진실자應當修供養(응당수공양)

편지의 말씀대로 진실하다면마땅히 공양을 올려야 하리라.

仰惟佛世尊(앙유불세존普爲世閒出(보위세간출 생각할 

우러러 생각하건대 부처님 세존께서는 널리 세상을 위하여 출현하셨으니

 

[우러러 생각건대 일체중생 구하러 세상에 나셨으니’ 이는 《법화경》의 일대사 인연의 내용과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오직 한 가지 크나큰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일대사인연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듯이 나 역시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나 역시도 부처님처럼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을 실천해 성불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처럼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을 통해 자신의 일대사인연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경전을 바르게 이해하는 마음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출생하는 문제에 관한 첫 번째 비밀은 자신이 의지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출현 할 때는 분명히 자신의 의지대로 생일, 고향, 부모를 선택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비밀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명한 출생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정뿐만 아니라 미물인 곤충, 심지어 인간이 해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 생명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만큼 다른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우주법계는 본래 하나의 대 생명력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이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며, 남을 도와주는 것이 자기를 돕는 일이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우주의 생명력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지에서 보면 불보살들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제하는 원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강물에 오물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오물을 버리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일대사인연이 무엇인지를 잘 기억해 항상 보살과 같은 삶의 질로써 살아가야 할 것이다.
-혜경스님]

 

亦應垂哀愍(역응수애민必令我得見(필영아득견

역시 응당히 불쌍하게 여겨주시어저로 하여금 반드시 뵈올 있게 하소서.

卽生此念時(즉생차념시佛於空中現(불어공중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을 부처님이 허공 중에 나타나시어

普放淨光明(보광정광명顯示無比身(현시무비신)

깨끗한 밝은 광명 널리 놓으시며/, 비할 없는 몸을 나타내 보이셨다

勝鬘及眷屬(승만급권속頭面接足禮(두면접족예)

승만 부인과 권속들은 머리를 발에 대어 정례() 하고는

咸以淸淨心(함이청정심歎佛實功德(탄불실공덕    

모두들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참된 공덕을 찬탄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승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根機)이다. 
부처님은 어느 날 젊어서 방탕하게 살다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에 그를 만났다.
부처님은 “그대는 예전에 내가 보낸 천사(天使)를 만나 보았는가”라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천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는 분명히 너에게 천사를 보냈다. 그대는 늙어 가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느냐, 병든 자를 만나 본 적이 없느냐, 죽은 자를 만나본 적이 없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바로 생(生)·노(老)·병(病)·사(死)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천사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천사(天使)’라는 말의 의미는 종교에 따라 각각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배경이 투영된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다보니 천사는 어깨에 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식의 천사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의 모습이 바로 천사라고 말하고 있다. 석존도 생로병사라는 천사를 만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만일 상근기라면 생·노·병·사라는 천사의 그림자를 보고 나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다’ 즉 ‘나도 언젠가는 병들고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자각해 발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석존의 경우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경전 문학적 기법으로 천사를 만나 발심해 출가했다. 자신이 직접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생·노·병·사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본 것이다. 석존은 저렇게 되기 전에 생·사가 없는 본래의 깨달음의 세계로 가야 되겠다고 발심했던 것이다.
중근기는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친한 친구가 죽었다든지 하게 되면, 그제야 우리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면서 발심하는 경우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든지, 친한 친구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하근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친구가 죽어도, 심지어 자식이 죽어 그 주변에서 수없이 생·노·병·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를 말한다.
근기를 ‘달리는 말’에 비유하면, 상근기의 말은 주인의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알아서 달린다. 이와 같이 가장 좋은 말은 총명해 알아서 미리 행동하므로 굳이 채찍을 사용하지 않아도 잘 달린다. 중근기의 말은 채찍으로 엉덩이를 한번 맞고 나서 달린다. 중근기의 말은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야 주인의 뜻을 알아차려 달리는 말이다. 하근기의 말은 엉덩이에 피가 나도록 얻어맞아도 잘 달리지 않는 말이다. 하근기의 말은 어리석어 채찍으로 얻어맞아도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승만은 부모인 파사익왕과 말리부인의 영향을 받아 불법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근기에 속한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들은 부처님을 찬탄하는 편지를 딸에게 보내게 된다. 그 편지를 받아보고 승만은 발보리심하게 된 것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여기서 부처님의 출현이란 말이 나오는데 <법화경> 부처님께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했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일러 모든 부처님이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 부처님의 지혜) 열어주어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이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도에 들어가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승만부인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발원하자 수승해서 비교할 없는 대광명의 부처님 모습인 무비신(無比身) 허공중에 홀연히 나타난다. 부처님의 법신은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법신 부처님은 중생이 부르면 즉각 나타난다. 다만 부르는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해야 나타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불교를 신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혜총스님]

 

['승만경'이 대승경전으로 법화경』에 설해진 일승사상(一乘思想) '열반경' 등에 설해진여래장사상의 대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도 매우 간명하게 경문이 서술되며 다른 대승경전에 나오는 보살이나 부처님 제자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고 오직
승만 부인만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지안스님]

 

[아요사국은 범어로 아요디야(Ayodhya)는 중인도의 코살라, 즉 슈라바스티의 남쪽에 인접한 작은 나라를 말한다.
지금의 베나레스(Benares)의 북방으로 오우드(Oudh) 지방이며,  불교 8대 성지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사위성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아요디야는 인구 10만 정도 되는 작은 종교도시로, 힌두교 사원과 이슬람 모스크를 합쳐 1만개 정도의 종교사원이 있다고 한다.

옛 신라시대 때 경주에 두 집 건너 한 집이 절이었다고 하듯이 아요디야는 인도에서 중요한 종교도시에 속한다.
승만부인이 시집간 아요디야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삼국시대 이전 김해지역에 여러 개의 가야국(駕洛國) 가운데 금관가야국의 왕이 인도의 아요디야국에서 온 허황후(許皇后)와 결혼을 하게 된다. 허황후와 김수로왕(金首露王) 사이에 7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들이 수행해 성불한 곳이 현재 지리산(智異山) 칠불암(七佛庵)의 아자선방(亞字禪房)이다.
허황후의 동생 장유화상은 현재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시(金海市)의 신어산(神魚山)에 있는 은하사(銀河寺)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외국인 승려가 우리나라에 처음 세운 절이다. 은하사는 영화 ‘달마야 놀자’를 찍은 곳으로 유명하다.
허황후가 인도 아유사 사국에서 배를 타고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 파사석이란 돌멩이를 싣고 왔다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신문왕(神文王) 3년에 이 돌로 석탑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의 석탑(石塔)이다. 이 돌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는 종류의 돌로 밝혀졌다.
「가락국 본기」에 보면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길 헤쳐 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후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 왔구나’라고 기록돼 있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3. 부처님을 찬탄하고 예배하다

如來妙色身(여래묘색신世閒無與等(세간무여등응신

여래의 아름답고 묘하신 =妙色身(응신) 세상에서 더불어 같이할 없으며,

無比不思議(무비불사의是故今敬禮(시고금경예)

견줄 수도 헤아릴 수도 없으니, 이제 공경하며 예배드립니다.

如來色無盡(여래색무진智慧亦復然(지혜역부연보신

여래의 모습() 다함이 없고 지혜=(보신) 역시 또한 그와 같으며,

一切法常住(일체법상주是故我歸依(시고아귀의법신
일체의 모든 (진리) 항상 머무시니=(법신), 그러므로 제가(저희) 지금 귀의하나이다.

['여래'란 타다아가타(Tathagata)라고 하여 진리[眞如]에서 오고 진여에서 나타난 깨달은 이, 즉 깨달은 사람(覺者)의 존칭이다. 즉 '그와 같이 오기 때문에 여래이고, 그와 같이 가기 때문에 여래이다. 그리고 여래를 여거(如去)라고도 한다'. 상세히 말하면 석가모니여래이다. 이는 싯다르타 태자가 성도해 성인이 되고 정각(正覺)을 얻은 것에 대해 남으로부터 받들어진 존칭이다. 이를 해석하면 석가 종족이 오랫동안 산림의 적정처(寂靜處)에서 마음을 닦고 도(道)를 배워 지자(智者)가 된 진여에서 내생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降伏心過惡(항복심과오及與身四種(급여신사종)

마음으로 지은 허물=心過惡인 악업과 몸으로 짓는 가지 업=身四種을 항복 받았으며,

已到難伏地(이도난복지是故禮法王(시고예법왕)

이미  조복하신 경지(지위) 이르렀으니, 그러므로 법왕=진리의 왕께 예배하나이다.

[이 구는 3계(三界) 안의 4주지(四住地), 즉 3계의 일체 견혹(見惑)인 견일체주지(見一切住地)와 사혹(思惑)인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의 악(惡)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여래의 해탈의 덕을 찬탄하고 법신을 공경예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음의 허물=心過惡, 3독(三毒) 즉 탐진치 미혹과,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네 가지를 거꾸로 생각하는 4도(四倒)이다. 우리 인간은 덧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고뇌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즐겁다. 즉 낙(樂)이라고 생각하며 혹은 그 마음이 항상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조금도 고정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정불변한 자기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자기 주관의 중심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을 들어 말하는가. 우리 신체의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 ‘나’를 집어낼 수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없다. 또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착각된 것이다. 우리들은 일종의 착각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몸의 네 가지=身四種, 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음(死)를 말한 것으로서, 이 신체는 4대(四大), 지(地)·수(水)·화(火)·풍(風)이라는 네 가지의 성분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다.
지대(地大), 굳고 가로막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을 마음대로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모든 견성(堅性)은 이에 속한다.
수대(水大)는 습윤(濕潤)을 성(性)으로 하고 사물을 수섭(收攝)함을 용(用)으로 하며 모든 습성(濕性)은 이것에 속한다.
화대(火大)는 난열(煖熱)을 성으로 하며 사물을 성숙하는 용(用)으로서 온갖 온성(溫性)은 이에 속한다.
풍대(風大)는 동전(動轉)을 성으로 하므로 사물을 장양(長養)함을 용으로 하며 모든 동성(動性)은 이에 속한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노·병·사의 계박(繫縛)에 사로잡히지 않은 심경, 즉 몸도 마음도 자유자재하여 번뇌인 악마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이라도 이것만은 꺾을 수 없는 경지, 이것을 난복(難伏)의 지(地) 또는 불지(佛地)라고 하는데 이 마음을 금강심(金剛心)이라고 한다.]

 

知一切爾焰(지일체이염智慧身自在(지혜신자재)

일체의 알아야  바(實智)=爾焰를 모두 아시며 智慧身=지혜의 몸(방편지)이 자유자재 하시며

攝持一切法(섭지일체법是故今敬禮(시고금경예)

모든 진리를 받아 지니셨으므로 이제 예경하나이다.

[이는 여래가 가진 반야(般若; Prajna)의 덕을 찬탄한 것으로, 이염(爾炎)이란, 범어 Jneya(즈내야)의 음역을 소리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므로 이것을 번역하면 지모(智母)가 된다.
『승만경의소(義疏)』에 의하면, 「이염이란, 중국에서는 지모라 한다. 지모란, 진제(眞諦)의 경공(境空)으로서 지(智)를 낳는 근본이기 때문에 어머니[母]라고 한다.」라고 하며 지혜의 바탕을 말한다. 하늘과 같은 맑은 거울[明鏡]은 만상을 역력히 비치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신(智慧身; Jnna-Mati)'이란, 사리(事理)의 정사(正邪)를 판별(判別)하는 마음의 작용과 대경(對境)에 향해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분별하는 정신작용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모두 거두어 간직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금 공경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염이라는 말과 또 지혜신이라는 말이 중복되어 있음은 앞의 이염 즉 지모는 실지(實智)를 가리킨 것이며 뒤의 지혜신은 방편지(方便智)를 찬탄한 것이다.]

 

敬禮過稱量(경예과칭량敬禮無譬類(경예무비류 비유할 

부처님의 크신 공덕 헤아릴 없음에 예배하며비유할 없음에 예배하며

敬禮無邊法(경예무변법敬禮難思議(경예난사의)

가이없는 법문(진리) 예배하며, 생각하기 어려움에 예배하나이다.

[이것은 여래의 세 가지 덕을 찬탄한 것으로서 여래의 세 가지 덕이란 은덕(恩德), 단덕(斷德), 지덕(智德), 혹은 법신덕(法身德; Dharmakaya), 반야덕(般若德; Prajna), 해탈덕(解脫德; Moksa) 등과 그 절대 무변으로 입에도 마음에도 다할 수 없는 감사함을 나타내며(과칭량 過稱量), 그 덕은 무량무변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비유할 수 있는 무리가 없다.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무비류 無譬類). 그러기에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의 넓고 크며 가이 없음을(무변법 無邊法) 말한다. 또한 도저히 사람의 지혜로는 생각해 헤아리기가 어렵다(난사의 難思議)라는 것으로서 그 덕에 경례 드린다는 것이다]

 

哀愍覆護我(애민복호아令法種增長(영법종증장)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희를 보호하여 주시고, 부처님 법의 종자가 자라나게 하소서.

此世及後生(차세급후생願佛常攝受(원불상섭수)

금생에도 다음 생에도 부처님께서 항상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 구절은 승만부인이 여성으로서의 우아하고 정숙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여래의 법신, 법의 진리를 모조리 이해하고 찬탄하며 귀의해 왔다. 첫째로 아무쪼록 부처님의 공덕에 의해 애민을 내리시어 저를 보호되도록 법신을 얻는 종자인 만선(萬善)을 증장(增長)토록 하소서, 하고 우선 부처님의 가호(加護)를 받고 나서 후에 이익이 증장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생(生)을 받고 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후생(後生)」에도 이와 같이 애호(愛護)되기를 원하오니 부처님이시여, 아무쪼록 이 뜻을 항상 거두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린다.]


我久安立汝(아구안립여前世已開覺(전세이개각)

내가 너를 편안하게 오래이니, 전생에 이미 깨달음을 얻게 하였으며

今復攝受汝(금복섭수여未來生亦然(미래생역연)

이제 다시 너를 거두어 주노니 미래의 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리라.

 

我已作功德(아이작공덕現在及餘世(현재급여세)

저는 이미 공덕을 지었듯이현재에도 다음 생에도(나머지 생에서도)

如是衆善本(여시중선본唯願見攝受(유원견섭수)

이러한 모든 선근들을 근본=善本으로 삼겠사오니오직 원컨대 거두어 주소서.

[승만이 두려워하면서 여래에게 애호를 원한 것에 대해 여래는 “묵연히 허락하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대로 하여금 확실한 대법(大法)의 기초 위에 안립(安立)토록 해 왔다. 그대는 현세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깨달음을 열고 있었다. 지금 또한 그대의 원을 받아 드릴 뿐 아니라 미래세에 생을 얻어도 역시 이와 같이 지켜 줄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라고 여래는 승만이 2세(二世)를 원했는데도 3세를 통해 보증하신 것이다.
여래로부터 승만이 3세에 걸쳐 선(善)을 쌓고 수도(修道)의 공덕을 짓고 또 지을 것을 보증 받았으므로 승만은 “나는 이미 전생에서도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쌓고 수도의 공덕을 짓고 또 현세에서도 거듭 불제자가 되고 미래세에서도 이와 같이 부처님에게 귀의해 모든 대승에 의한 법의 선행을 쌓고 쌓을 것입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허락해 주옵소서”하고 말한다.
「선본(善本)」이라는 것이 법신의 종자로 특히 대승 중 『승만경』에서는 「선(善)」이 골자로 되어 있다.]

爾時(이시) 勝鬘及諸眷屬(승만급제권속) 頭面禮佛(두면예불)

이때 승만 부인과 그녀의 모든 권속들이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예배하였다.

[승만부인과 부처님 사이에 교환된 예찬과 섭수의 약속은 불교의 「믿음[信]」에 연결되는 것으로 깊이 믿고 귀의하는 마음 위에 비로소 약속된다고 생각한다.

불교입문에 있어 무엇이 제일 요소인가에 대해 우리들은 귀의(歸依)의 생각을 우선 맨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승단[僧]의 3보[三寶]에 대한 귀의이다.
‘스스로 부처님(붓다)께 귀의합니다. 스스로 가르침(단마)에 귀의합니다. 스스로 스님들(상가)께 귀의합니다.’
이 3귀의문[三歸依文] 가운데 「부처님」이란 원래부터 붓다, 스승이신 붓다이며, 「가르침」이란 붓다가 설해 밝힌 불법(佛法), 교법(敎法)이고, 「스님들」이란 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 즉 붓다의 후계자로써 집합한 승가[僧團]이다. 이 3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갖는 것에 불교입문의 제일 긴요한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귀의하는 마음[念]은 불교에 대한 진실한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참다운 신심(信心), 참다운 신앙이라는 것은 순진(純眞)하고 지순(至純)한 종교심의 싹틈이며 이 싹을 다시 육성하는 것도 신앙이다. 그리고 신앙은 청정심에 깃든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하는 말이 『열반경(涅槃經)』이라는 경전에 있다. 이 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심성본정·心性本淨)이라는 아함불교(阿含佛敎) 이래의 전통인 불교적 이해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청정심(淸淨心)으로 파악한다. 이 청정심은 가끔 외계의 깨끗치 못한 것[객진·客塵]에 의해 더럽혀질 때, 거기에 여러 가지의 번뇌가 생겨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외계의 것에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은 외계와의 접촉에 의해 여러 가지 내용이 지어지고 형성되어 간다.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고, 마음이 더러워지면 중생도 더러워진다」고 『아함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를 표시한 것이다.]

 

[여래묘색신(如來妙色身) 세간무여등(世間無與等) 무비부사의(無比不思議) 시고금경례(是故今敬禮) 여래색무진(如來色無盡) 지혜역부연(智慧亦復然) 일체법상주(一切法常住) 시고아귀의(是故我歸依)”
게송은 부처님께서 나투시는 현묘한 3(三身),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찬탄하고 있다묘색신이 응신, 다함없는 여래색신과 지혜는 보신, 끝으로 일체법 상주는 법신, 이렇게 삼신을 찬탄하고 예배 공경한다.
부처님의 몸은 진리의 몸으로 우주 법계에 항상 머무시면서 널리 중생을 위해 복전(福田) 되지만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듯이만약 나를 구하려 하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색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는 본체가 미묘하여 법의 몸인 여러 부처이며 법의 본체는 없는 것이니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능히 아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부처님의 몸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다. 영원한 생명이요, 아비무간지옥의 천년 어둠도 몰아내는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도 다함이 없어서 <별역잡아함경>부처님은 과거세를 알고, 미래세를 역시 알며, 현재세에 모든 법이 무너지는 모양도 아십니다. 모든 현상을 통달하여 닦아야 것을 마땅히 닦고 끊어야 것을 모두 끊나니 그래서 부처라고 말한다. 전체적인 현상과 부분적인 현상을 낱낱이 분별하여 꿰뚫어 알아 일체 모든 것을 알고 보나니 그래서 부처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다.-혜총스님(불교신문)]

 

[승만경의 역사적 사실과 경전적 사실을 살펴보면, 우선 『승만경』이 설해진 사위성과 등장인물인 푸라세나짓과 말리카부인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경전적인 두 가지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대승경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승만경』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푸라세나짓왕과 말리카부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푸라세나짓왕은 부처님을 존경해 석가족의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다. 석가족은 전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해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를 공주로 꾸며 사위성으로 보냈다.
당시 석가족의 입장에서 사위성은 강대한 나라였기에 그 나라의 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푸라세나짓왕과 석가족의 하녀 사이에서 비유리왕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비유리왕자가 어느 정도 자라 어머니의 고향인 석가족을 방문했다. 그러자 석가족 사람들이 비유리왕자를 가리키면서 하녀의 아들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는 이 사실에 엄청난 치욕을 느끼고 나중에 왕이 되면 석가족을 다 멸망시키겠다고 한을 품게 되었다.
푸라세나짓왕이 다른 나라로 가서 잠깐 왕궁을 비운 사이 비유리왕자는 왕권을 찬탈해 왕이 된다. 그 후 왕자 때 받은 치욕감을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석가족을 쳐들어간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에 있다가 종족이 멸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비유리왕이 쳐들어오는 길목의 죽은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마침 이파리도 없는 나무 밑에 앉아 땀을 흘리는 석존을 보자 비유리왕이 “저쪽에는 그늘진 숲이 있는데 왜 이런 곳에서 고생하십니까”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친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나무와 같소”라고 답했다. 비유리왕은 부처님의 심중을 헤아려 군대를 물리게 된다.
그 후 다시 두 번째로 쳐들어왔는데 역시 부처님은 위와 같이 대치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부처님도 “석가족이 지은 악업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시며 말리지 않았다. 석가족은 비유리왕에 의해 거의 멸족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승만경』에서는 푸라세나짓왕과 말리카왕비 사이에 승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하나의 경전이 생겨난다. 여기서 대승경전이 출현하게 되는 근거에 대해 설명하면, 각 경전을 연극에 비유해서 『아함경』에서 연극의 주연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석존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오직 하나뿐인 인물이다. 그리고 조연으로 성문의 비구·비구니의 출가 제자와 우바새·우바이의 재가 제자들이 등장한다.
대승경전 속에는 형식상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연이지만 수많은 형태의 부처님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약사여래부처님 혹은 비로자나부처님 등 여러 부처님이 등장하게 된다. 대승경전에서는 주연(主演)이 형식상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수많은 화신의 불보살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조연(助演)으로는 수많은 불보살님이 등장하는데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함께 나타난다.
『승만경(勝經)』 서품(序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푸라세나짓왕, 말리카부인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승만경』에서는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푸라세나짓왕, 그리고 말리카부인을 경전적 사실로 유도하기 위해 배우로 기용하고 있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종교(宗敎: religion) 어원이 라틴어 religio에서 파생된 것이라 하는데  어원의 뜻을 예배(禮拜)라고 번역하며 또는 결합(結合)이라 번역한다물론 이는 서양의 신을 믿는 종교에서 하는 말이다.
인간이 초월자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를 올린다는 의미와 인간을 절대자와 결합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교에 있어서 예배는 필수적인 요소다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부처님을 예경하는 마음으로 공경의 예를 갖출  신심이 우러나고 신앙심이 돈독해 지는 것이다.
입적한 오래된 어느 큰스님은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주는 조건으로 3000배의 절을 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절이란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공경을 표하는 예법이지만 진리를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숨은  있다.
부처님을 향하여 자기의 원을 피력하고 그러한 원이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힘에 의하여 성취되기를 바라는 순진한 마음이 일어나야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신행이 귀의, 찬탄, 참회, 발원의  가지에 의해 믿음의 바탕이 이루어지는 이다.ㅡ지안스님]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송(宋) 중인도(中印度)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승만경(勝鬘經)'은 재가 여성불자(우바이)인 승만부인을 중심으로, 중생의 마음속에 여래의 성품인 ‘여래장’이 깃들어 있어〔일체중생 실유여래장(一切衆生 悉有如來藏)〕,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는 대승경전이다.

승만부인은 사위국(舍衛國)의 파사익(波斯匿) 왕의 딸로서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우칭(友稱)왕과 결혼한 승만부인(僧鬘婦人)이 부처 앞에서 설주(說主)가 되어 설법을 펴고, 부처 승만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인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승만부인은 몸으로써 체험하려는 10가지 서원(십대원)을 세우고(십대수, 十大受), 이 10대수를 요약해서 3대원(三大願)으로 강조하며, 이 3대원은 다시 섭수정법(攝受正法)이라는 일대원(一大願)에 수납된다고 강조한다.

정법(正法)을 수지한다는 것은 대승(大乘), 즉 일승(一乘)을 수지하는 것으로서 일체 중생이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법은 일승이며, 불설(佛說)에는 이승(二乘)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중생이 번뇌에 싸여 있지만 본성으로는 여래(如來)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품〔佛性:여래장(如來藏)〕을 갖추고 있다고 하며, 그 여래장에 대해 여래장설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거의 모두 종합하여 설명하고 있다.-孝菴 公認 大法師]

 

[《승만경(勝鬘經, 산스크리트어: Srimaladevi-simhanada-sutra 스리말라데비 싱하나다 수트라)》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천명한 대승 경전의 하나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제목의 뜻은 "성스러운 승만부인의 사자후 사자후(獅子吼)라고 이름붙힌 경"이라는 뜻이다.  유송(劉宋)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 Gunabhadra: 394~468) 역에서는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이라 하였으며, 《유마경》과 더불어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승불교의 특색인 재가주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승만경은 대승불교의 진제(眞諦;眞理)를 천명한 여러 경전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더욱이 승만 부인 즉 슈리마라(Srimala)의 입을 빌어서 말했기 때문에 여성에게 극히 알기 쉽게 설해져 있다.
다른 경전처럼 여러 가지의 비유도 없으며, 대승의 다섯 가지 장애(五障)와 여래장(如來藏)을 열어 나타내 보여줌으로써 자성청정여래법신(自性淸淨如來法身)의 경지에 여성으로 하여금 노닐도록 하고 있다. 즉 보리(菩提)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열반(涅槃)이며, 열반의 경우는 법신이다.
여성이 알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해져서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각각 대승의 뜻이며, 그 교리는 매우 깊고 넓으며, 논리 또한 정연하다. 더욱이 길[大部]지 않고 1권 20여장의 작은 두루마리에 일체의 불교를 대승으로 들어오게 하고 있다.
승만경을 한역한 것이 무릇 세 번이나 된다.

첫째는 동진(東晋)시대 안제(安帝) 무렵에 중인도의 삼장법사인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승만사자후일승방편경(勝師子吼一乘方便經)》이라는 것이 처음 나왔으나 이것은 궐본(闕本)이 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유송(劉宋)의 원가(元嘉) 12년(435) 중국에 온 중인도의 삼장법사로서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가 단양군의 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한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이 있다.
세 번째는 당(唐)의 예종(睿宗) 장수(長壽) 2년(693) 중국에 온 남인도의 보리유지(菩提流志) 삼장이 번역한 《대보적경(大寶積經)》이라고 하는 120권에 이르는 큰 경전 가운데에 『승만부인회(勝夫人會)』라고 하는 1권이 있다. 그렇지만 《대보적경》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을 찬집한 것이며, 개원(開元)·정원(貞元)의 양 석경록(兩 釋經錄)에 등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전한 것으로서는 두 번째에 거론한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역의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이다.
1. 남송의 복법사(馥法師) 및 법요법사(法瑤法師), 정영(淨影)의 원법사(遠法師) 등의 소(疏)는 각각 2권본으로 되어 있다.

2. 인도스님으로서 도유(道攸)라고 하는 사람이 5권본의 주해(註解)를 지었다.

3. 법자법사(法慈法師)라는 사람이 그 요점을 취하여 2권본으로 한 것이 있다.

4. 양(梁)나라 때 임법사(林法師)라는 사람이 1권본의 주석을 저술했다.

5. 수(隋)나라 때, 가상사(嘉祥寺)의 길장(吉藏)이라는 사람으로서 후에 삼론종의 가상대사(嘉祥大師)가 『승만경보굴(勝經寶窟』이라 이름 하는 주석서를 3권 저작했다.

6. 양(梁)의 광택사(光宅寺) 법운(法雲)도 주석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7. 자은대사(慈恩大師)의 문인(門人)으로서 의령(義令)이라는 사람이 술기(述記) 3권을 지었다.
그리고 일본의 성덕태자는 이러한 주석서를 본 후 의소(義疏)를 찬술(撰述)했는데 중국의 어떤 것보다 훌륭했으므로 이 의소는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후에는 중국에까지도 역수입되었다고 한다. 이를 자세히 말하면 당나라 때 정매법사(靖邁法師)와 둔륜법사(遁倫法師)가 소(疏)를 각각 2권씩 저술했으며 신라의 원효법사(元曉法師)도 소를 2권 저술하였다.

구나발다라는 중인도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공덕현(功德賢)이라 번역명(飜譯名)을 붙이게 되었으나 역시 범명(梵名)의 음역(音譯)인 구나발다라로 알려져 있다. 출생은 브라흐만(婆羅門) 종(種)이라 하여 인도 4성(四性)의 제일위(第一位)의 종족으로 더욱이 불교의 반대편 종족이다. 총명(聰明)한 자질을 가졌으며 어렸을 때부터 오명(五明)의 제론(諸論)을 익혀서 천문(天文)·서(書)·산(算)·의방(醫方)·주술(呪術)과 브라흐만의 온갖 학문에 해박해 있었는데 어느 때, 불교의 《아비달마(阿毘達磨)》라는 경전을 읽자 그 교리가 참으로 정연하고 사제(四諦)를 관(觀)하여 열반으로 향하는 무루(無漏)의 정혜(淨慧)와 수행(隨行)과를 논하고 있는 등 아무리 해도 브라흐만 학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비밀히 출가(出家)하여 불교 신자가 되어 널리 스승과 벗을 구하였다. 마침내 삼장에 정통하고 사자국(獅子國) 즉 지금의 스리랑카에 건너갔으며 거기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오려고 했으나 도중에서 바람이 멎고 먹을 물이 말라 난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남인도에서 밀교(密敎)를 닦아 왔으므로 은밀하게 주경(呪經)을 외우자 문득 순풍이 불고 비가 내려서 담수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마침내 중국의 광주(廣州)에 도착했다.

이 사람은 대승의 학문에 통효(通曉)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고 이름하고 있었다. 그가 광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유송의 문제 원가12년(435)의 일이었다. 자사(刺史)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자 태조는 곧바로 사신을 보내 이들을 맞이하여 경사(京師)의 기원사(祇洹寺)에 안치하고 역경에 종사토록 했다.
그 곳에서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했으며, 또 동안사(東安寺)로 옮겨 《법고경(法鼓經)》을 번역했다. 이 《승만경》도 이 무렵 번역된 것이다. 동(同) 대명(大明) 6년(462) 중국 전토가 한발이 들어 여러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으므로 세조 즉 효무제는 그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빌도록 하자 비밀신주(秘密神呪)를 송(誦)하자 그 다음날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유송(劉宋) 천축삼장(天竺三藏)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 역(譯) 《승만경(勝經)》의 범본(梵本)은 Vyuha-pariprccha(뷰하-파리프릿차)라고 하는데, 이를 『승만(勝)』이라고 번역한 것은 본문의 주인공, 승만 부인의 이름을 따서 제목으로 한 것이다. 『승만』의 「승」은 실리(室利) 즉 슈리(Siri), 「만」은 말라(末羅) 즉 마라(Mara)라고 한다. 부인의 아름다운 머리 장식이 뛰어난 것을 나타낸 말이므로 현대어로는 아름다운 여인·가인(佳人)·재원(才媛)·현부인(賢夫人)·최고 권위, 요즘말로 ‘스타’라고 하는 부인의 미(美)에 대한 온갖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승만부인은 인도의 석존께서 세상에 계실 무렵, 즉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전(556-477) 인도의 열여섯 큰 나라의 하나인 교살라국(薩羅國 : Kosala), 즉 마가다(摩迦陀國 : Magadha)의 북방(北方)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 Kapilavastu) 서쪽에 있는 교살라국의 사위성(舍衛城; Sravasti)에 살고 있는 파사익왕(波斯匿王) 프라세나짓(Prasenajit)의 딸로서 이웃 나라인 아유사국(阿踰國) 아요다야(Ayodhaya)의 우칭왕(友稱王)에게 시집가서 그 부인이 되었다.
『사자후(師子吼)』,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獅子)는 다른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고 울부짖는 소리는 다른 여러 짐승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한다.

이 경에서 승만 부인이 마치 사자왕이 포효하는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대승의 진제(眞諦)를 연설했으므로 『사자후(師子吼)』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일승(一乘)』이란, 불교에는 대승과 소승이 있다. 소승은 고통을 멸하여 작은 이익을 주는 가르침이며, 자리주의의 성문과 연각이 아라한과를 얻는 법문이다. 대승은 이 작은 것에 대한 큰 것이어서 불과(佛果)인 대열반을 구하는 길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타는 것으로서 큰 괴로움을 멸하여 큰 이익을 주는 가르침이다. 보살의 큰 자질이 불과인 대열반을 얻는 법문으로 한때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고 하여 석존의 금구(金口, 부처님의 입)에서 나온 직설이 아니다 등으로 말하고 있으나 우주의 진리인 절대지(絶對智, 지식의 최고조) 즉 사르나즈냐(Sarnajna), 일체지의 발표이므로 석존께서 멸도한 후에 그 뜻을 부연한 것이므로 역시 그것은 불설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승에는 권대승(權大乘)과 실대승(實大乘)이 있다. 권대승이란, 법상(法相)·유식(唯識)·삼론(三論) 등으로 실대승교에서 보면 아직 진실 원만의 교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실대승교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 수단으로 설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대승을 시냇물에 비유하여 실대승의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도정이라고 말한다.
실대승은 매우 진실하여 추호도 방편을 수반하지 않는 교법으로서 천태(天台)·진언(眞言)·화엄(華嚴)·선종(禪宗) 등은 모두 이 실대승이다. 그리고 권대승을 3승(三乘)이라고도 부른다. 3승은 성문승과 연각승과 보살승으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각각 자기에게 알맞은 교법에 의거하여 미계(迷界)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실대승을 또 1승(一乘)이라 한다. 즉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성불케 한다는 것이다. 또한 1불승(一佛乘)이라고 할 때도 있다. 이 경의 제목에 1승이라 표시한 것은 위의 실대승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승(乘)이란 승여(乘輿) 즉 탈것을 말하며, 불교의 길에 인인(因人)을 태우고 증과(證果)로 운반한다고 하기 때문에 승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미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가르침의 탈 것에 태우고 열반의 언덕으로 운반한다는 것을 말한다.
대방편(大方便)』은 방법편용(方法便用)이라는 말로 그 것을 두 가지로 말하는 바 능히 방법을 사용해 중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 이를 법용방편(法用方便)이라 한다.-제주불교신문]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한 회옹(晦翁) 혜경(惠耕) 스님은 서울 보성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대승사에 출가한 후 용문사 대경 스님에게 구족계를, 야옹 스님에게 건당해 회옹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한국불교법화종으로 이적한 스님은 재단법인 한국불교법화종 유지재단 이사, 대한불교법화종 총본산 무량사 조실, 재단법인 한국불교법화종 이사장 등의 소임을 맡았었다. 왕성한 저술활동을 통해 불교교리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스님은 현재 서울 무설정사, 경기도 양주 화담정사 조실과 서귀포시 지역 불자들의 경전모임인 ‘흰 연꽃들의 모임’ 회주를 맡는 등 불법홍포와 불교발전에 기여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법화경 이야기(범우사)·법구경 입문(범우사)·법화삼부경(문학예술사)·법화경총설(삼양)·관무량수경(집문당) 등과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현재 법화삼부경 강설 10권을 저술중이다.

 

승만경(勝鬘經)의 원래 이름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이다. 승만부인이 일승(一乘), 곧 대승의 참다운 진리(眞諦)를 사자후한 경(經)이라는 뜻이다. 이 경은 수많은 경전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이 설하는 경으로서, 그 설법의 내용은 매우 심오하면서 논리 정연하여 누구나 대승의 큰 바다로 들어오게 하므로 유마거사에 의해 설해진 <유마경>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승만경>은 동진(東晋)시대 중(中)인도의 삼장법사인 담무참(曇無讖)에 의해 처음 한역되었으나 역시 중인도의 삼장법사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남북조시대 유송(劉宋) 436년에 번역한 것이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다. 이 경이 오늘날 높게 평가되는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교리에서 탈피해 우리의 삶 속에 대승(大乘)의 정신을 논리정연하고 폭넓게 고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경은 전문을 15장으로 나누고 있다. ‘제1 여래진실공덕장(如來眞實義功德章)’에서는 부모님이 보낸 편지를 받아 읽은 승만이 부처님을 찬탄한다. 이때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 승만의 앞에 무비신(無比身)을 나타내어 승만의 귀의를 받으며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준다. 

<승만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승만부인이 세운 열 가지 서원이 설해져 있는 ‘제2십대수장(十大受章)’이다.

승만부인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열 가지 서원을 한다. 

① 받은 계율을 범할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② 어른께 거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③ 중생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④ 남에게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⑤ 모든 것에 대하여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⑥ 저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지 않겠으며, 받은 것이 있으면 가난한 중생들을 구제하겠습니다.

⑦ 제 몸을 위하여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애착하지 않는 마음과 만족함이 없고 거리낌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겠습니다.

⑧ 만일 고독자, 구금당한 사람, 병이 있거나 여러 가지의 액난을 당한 중생을 보면 잠깐도 버리지 않고 의리로써 편안하게 도우며 온갖 고통을 벗어나게 한 뒤에야 떠나겠습니다.

⑨ 만일 중생을 사로잡아 기르는 등 나쁜 생활법과 계율을 범하는 것을 보면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타이르고 거두겠습니다.

⑩ 깨칠 때까지 바른 법을 거두어 지녀서 잊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열 가지 서원을 발(發)하는데 승만부인의 보살도에 대한 확고한 실천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승만경>은 이와 같이 대승사상을 설하는 중요한 경전으로 여래의 씨앗,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여래장 사상을 강조한다. 중생의 생사도 여래장에 의지한 것이라 하며,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으며,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자성 청정의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이 성불의 길임을 밝히고 있다.- 혜총스님(불교신문) 

<승만경>에는 승만부인의 세 가지 서원이 제3 ‘삼원장(三願章)’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① 이 진실한 서원으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안온하게 하려 하오니 이 선근으로써 어느 세상이고 날 적마다 정법의 지혜를 얻겠나이다. 이것이 첫째 큰 서원이옵니다.
② 제가 정법의 지혜를 얻은 뒤에는 싫어하지 않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연설하겠습니다. 이것이 둘째 큰 소원이옵니다.
③ 제가 정법을 받아 지니고는 몸과 목숨과 재물을 버려서라도 정법을 보호하여 유지하겠습니다. 이것이 셋째 큰 소원이옵니다.
이 세 가지 큰 서원을 다시 발하자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의 서원이 이 진실로 넓고 큰 원 속에 다 들어 있다고 찬탄하신다.
제4 ‘섭수장(攝受章)’에서는 육바라밀행이 곧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행임을 밝히며 바른 법에 의지하는 한량없는 공덕과 이치를 설하고 있다.
제5 ‘일승장(一乘章)’에는 정법인 일승이 곧 대승이며, 모든 선법이 대승에 의해서 자라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 일승이 제일의 승이며 여기에 귀의하는 것이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라 하였다.
제6 ‘무변성제장(無邊聖諦章)’과 제7 ‘여래장장(如來藏章)’, 제8 ‘법신장(法身章)’ 제9 ‘공의은복진실장(空義隱覆眞實章)’, 제10 ‘일제장(一諦章)’, 제11 ‘일의장(一依章)’에서 여래의 성제는 무량한 공덕을 성취해 있는 것인 반면 이승(二乘)의 성제는 무명주지(無明住地)의 번뇌를 끊지 못한 것이라 한다. 여래의 성제는 깊고 깊은 여래장을 설하는 것으로 알기 어려우며 범부의 경계를 뛰어 넘고 이승의 지혜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승만부인은 사성제의 멸성제만 진실한 것이며. 시각장애인이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범부나 이승들은 고가 소멸한 진실한 법을 보지 못한다 하였다.
제13 ‘자성청정장(自性淸淨章)’에서는 중생의 생사가 여래장을 의지하여 있다고 설하면서도 여래장은 내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고 목숨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나온다. 또 승만은 부처님께 여래장이 법계장(法界藏)이며,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이며, 자성청정장(自性淸淨藏)이라 말한다.
제14 ‘진자장(眞子章)’에서는 스스로 밝힌 지혜의 등불에 의지하여 믿는 자가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라고 설명한다.
마지막 제15 ‘승만장(勝鬘章)’에서는 승만부인이 아유사성으로 돌아와서 우칭왕에게 대승법을 찬탄하고 성 가운데 있는 일곱 살 이상의 남녀를 우칭왕과 함께 대승법으로 교화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일승사상과 여래장사상은 바로 대승의 올바른 진리를 뜻하는 말이다. “아뇩이라는 큰 못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이 흘러나오듯이 대승은 온갖 성문과 연각,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내고,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자라듯이 온갖 성문과 연각, 세간과 출세간의 선법이 대승을 의지하여 자란다”고 하였다.
특히 <승만경>에서 승만부인이 정법을 수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은 모든 불자들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올바른 진리, 정법을 수호하고 나쁜 법에 빠진 사람들을 조복 받도록 하겠다면서 몸과 목숨과 재산을 버려서라도 정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에 귀의하는 자세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승만경>은 신심 깊은 승만부인이란 불자를 통해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부처의 씨앗이 싹트게 하는 법문이며, 성불을 향한 보리심을 분발하게 해 주는 법문이다.-혜총스님(불교신문)

 

1. 여래의 참된 공덕[如來眞實義功德]

 

如是我聞(여시아문) 나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一時(일시)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불주사위국기수급고독원)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를 통서(通序)라 하며여시아문(如是我聞)』은 어떤 경전의 첫머리에 있는 구(句)로서 아난다 존자가 마가다국 왕사성 인근 칠엽굴에서 결집할 때,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하는 바가 틀리지 않음을 밝혀 때와 장소를 나타낸 것이다.

일시(一時)』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의논되어 왔으나 석존께서 《법고경(法鼓經)》을 설하신 때라고 한다. 석존이 나무 아래서 설법을 하고 있자 이곳 저곳에서 법을 듣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 푸라세나짓왕[波斯匿王]이 법문을 들으러 오는데, 그 호위병이 위의를 바르게 하고 북을 치며 행군을 해 왔다.
석존께서는 그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곁에 있던 아난다 존자에게 “저것은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자 아난다는 “북소리입니다”라고 석존께 대답했다. 그러자 석존께서는 그 자리에서 “왕은 생사의 북을 치고, 나는 법왕인 까닭에 법고(法鼓)를 친다”라며 《법고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시(一時)』란 푸라세나짓왕의 면전에서 《법고경》을 설했던 때이다.]

[사위성(舍衛城) 또는 사위국(舍衛國)=실라벌실저(室羅伐悉底) 또는 실라벌(室羅筏)은 슈라바스티(산스크리트어: Śrāvastī)의 다른 말. 슈라바스티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이며, 옛날 코살라 왕국의 두번째 수도였으며 오늘날에는 불교의 8대 성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기원정사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제타 태자의 숲」(기타림祇陀林, Jetavana)으로 「의지할 곳 없는 이에게 베풀다」(Anāthapiṇḍada)라는 단어를 붙인 것으로, 그 유래는, 기수급고독원의 원래 주인이었던 제타 태자는 코살라국 파세나디 왕의 태자로, 당시 슈라바스티에는 수닷타(須達多)라는 이름의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급고독자」(給孤独者) 또는 「급고독 장자」(給孤独長者, Anāthapiṇḍada)라고 불렀다.
어느 날 수닷타 장자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이에 귀의하고, 석가모니 붓다에게 그가 설법을 행할 수 있는 사찰(정사)을 바치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이전의 불교 교단은 1년 내내 돌아다니면서 포교(전도) ・ 탁발 등의 수행(유행遊行)을 행하고 있었지만, 우기 때의 유행은 벌레나 식물 등이 발에 많이 밟혀서 살생을 저지를 우려가 있었으므로, 우기 때만큼은 건물 내에서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안거安居), 이는 교단에 걸맞는 시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때 수닷타 장자의 눈에 들어온 부지가 코살라국의 태자 제타(jetṛ、祇陀)가 소유한 원림(vana)이었다. 그 토지를 양도해 주기를 비는 수닷타 장자에게 제타 태자는 「네가 원하는 땅의 넓이만큼 금화를 깔아놓는다면 넘겨 주겠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수닷타가 정말로 금화를 땅에 깔기 시작하자, 제타 태자는 놀라서 그대로 토지를 수닷타 태자에게 넘겨주었고 또한 자신도 숲의 나무를 기부하여 사원의 건설을 원조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그 승원은 제타 태자와 급고독 장자 수닷타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独園)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곳에 세워진 정사를 「제타 태자의 숲(한역하면 「祇陀樹」이고 줄여서 「祇樹」),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장자(한역하면 「給孤独長者」로 줄여서 「給孤独」)의 원림(園)에 있는 정사(精舎)」다 불리며 한역해서 「기수급고독원정사」(祇樹給孤独園精舎)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舎)라 불리게 되었다. 석존께서는 이곳에 무려 25년 동안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셨다. 현장삼장(玄奘三蔵)의 번역에서는 「서다림급고독원」(誓多林給孤独園)이 되어 있다.]

 

1. 부모님의 편지

時,波斯匿王及末利夫人(시, 바사닉왕급 말리부인) 信法未久(신법미구)

그 때는 파사익왕과 말리  부인이 불법=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共相謂言(공상위언) 왕과 부인은 함께 의논하기를,

勝鬘夫人是我之女(승만부인시아지녀) 우리 딸 승만은

聰慧利根(총혜이근) 通敏易悟(통민이오) 聰 귀밝을 총,  敏 재빠를 민, 민첩할 민

(불도를 닦을) 자질이 총명하고 슬기로우니,  쉽게 빨리 깨달을 것입니다.

若見佛者必速解法(약견제불) 만일 부처님을 뵙기만 한다면, 반드시 가르침=법을 빨리 이해하여

心得無疑(심득무애) 宜時遣信(의시견신) 發其道意(발기도의) 遣 보낼 견, 하사품 견

마음에 의심이 없는 경지를 얻을 것이니, 적당한 때에 편지를 보내어서 그녀의 보리심=道意를 일으키게 합시다.

夫人白言(부인백언), 今正是時(금정시시)

부인이 말하기를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王及夫人與勝鬘書(왕급부인여승만서) 略讚如來無量功德(약찬여래무량공덕)

그리하여 왕과 부인은 승만에게 여래의 무량한 공덕을 찬탄하는 글을 간단히 써서

卽遣內人名旃提羅(즉견내입전제라)

즉시 전제라(Chandra)는 이름의 궁녀에게 주어 보냈습니다.

使人奉書至阿踰闍國(사인봉서지아유사국) 踰 넘을 유, 闍 망루 도, 화장할 사, 사리 사

심부름하는= 使人은 아유사국에 도착하여 대궐로 들어가, 

入其宮內敬授勝鬘(입기궁내경수승만) 授 줄 수

승만 부인에게 공경히 편지를 전하였습니다.

 

[파사익왕(波斯匿王)은 범명(梵名)을 푸라세나짓(Prasenajit, 팔리어pasenadi)이라 하며 화열(和悅), 월광(月光) 또는 승군왕(勝軍王) 등으로 한역되고 있다. 코살라국의 국왕으로 그 아버지는 범수왕(梵授王)이며 제타(祇陀)태자의 부왕이다.
파사익왕은 석존과 같은 날 태어났다고 하며 불교의 독신자였다. 그는 기원정사에서 거의 매일처럼 석가모니 세존의 설법을 들으며 법열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때 세존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을 하려고 도리천에 올라가셨다.
왕은 강당에 들어서자 정면의 금강좌에 언제나 세존의 모습을 뵈올 수 있었는데 세존께서 계시지 않으므로 갈앙하는 나머지 공방(工房)에 명하여 전단(檀)나무로 세존의 상(像)을 만들도록 한 후 기원정사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즉 불상조각의 원조인 왕이다.
또한 왕비인 말리부인(末利夫人)도 불교의 독신자였는데 말리(末利: Mali 또는 Malika)라고 하는 이름이 부인의 머리를 장식하는 꽃의 이름이므로 승만(勝)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어 딸과 같은 이름이나 요컨대 미인계통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위국의 바라문 야즈나타는 많은 하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바라문은 카필라라는 하녀에게 자신의 동산을 가꾸는 일을 맡겼다. 카필라는 홀로 꽃동산을 가꾸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나는 비록 얼굴이 못생겼지만 언젠가는 하녀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어느 날 카필라가 도시락을 가지고 꽃동산으로 일하러 가던 도중 마침 거룩한 모습을 한 수행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수행자에게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온전히 보시했다. 그 날 사위국 파사익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꽃동산을 발견했다. 왕은 혼자 꽃동산에서 잠시 쉬려 했다. 카필라가 가꾸는 꽃동산은 본래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는데 그 날 꽃동산에 사람이 찾아온 것을 보고 그녀는 너무나 기뻐했다.

그녀는 그가 국왕인지도 모른 채 그가 편히 쉬도록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물을 떠다 발을 씻어주고,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깔개를 만들어 주었다. 사냥으로 지쳤던 파사익왕은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왕은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탄해서 “그대는 누구인고?” 하고 물었다.
왕의 물음에 그녀는 “저는 바라문의 하녀로서 이 꽃동산을 가꾸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냥이 끝날 무렵 신하들이 임금이 있는 꽃동산으로 왔다. 국왕은 동산 주인인 바라문 야즈나타를 불렀다.
왕은 “카필라라는 여인이 당신의 하인인가?”하고 물었고, 야즈나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 국왕은 “나는 오늘 이 여인을 처음 만났지만 너무나 마음씨가 아름답기에 결혼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야즈나타는 난색을 표하며 “이 여인은 하녀인데 어떻게 임금과 하녀가 결혼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괜찮다”며 카필라를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궁에 들어 온 카필라는 궁의 여인들이 닦아야 할 학문과 기예를 열심히 연마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500명의 왕비 가운데 제일 부인이 되면서 말리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말리카는 자신의 운명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하녀에서 사위국의 제일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파사익왕을 만나던 그 날 점심 무렵 수행승에게 도시락을 공양한 것이 인연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이와 같이 생긴 거룩한 모습의 수행승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시녀들이 그 수행승을 찾아보니 마침 그는 기원정사에 머물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말리카는 왕의 허락을 받아 500명의 시녀를 데리고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에 가서 예배했다.
말리카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똑같은 여자의 몸으로 태어남에 어떤 사람은 얼굴이 못생기고, 어떤 사람은 가난으로 고생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신분이 비참한 여자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화를 잘 내는 여자는 얼굴이 추하게 태어나고, 욕심이 많고 남에게 베풀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게 되며,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여자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된다.」
말리카는 돌이켜 생각해 자신이 전생에 화를 자주 내 금생에 얼굴이 못생긴 여자로 태어난 것을 참회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앞으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도록 하겠으며, 보시도 더 많이 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도 시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가르침, 승단에 귀의합니다. 평생토록 살생과 도둑질과 싸움과 거짓말과 음주를 금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재가의 여신도가 되었다.-혜총스님(제주불교신문)]

2. 기신론 에 영향을 끼친 여래장 계열 경전들

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을 중심으로,

흔히 如來藏經, 不增不減經, 勝鬘經을如來藏三部經’이라 한다. 여래장경은 다른 경전(央掘魔羅經, 大法鼓經, 涅槃經등)에 인용된 순서 및 여래장을 단지 비유로만 설명하고 있는 소박한 서술방식으로부터 이 세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음으로 부증불감경과 승만경은 앞 절에서 살펴본 보성론의 골자를 이루며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不空), 법신에 대한 네 가지 규정(常·樂·我·淨), 중생계와 법신과의 관계 등 여래장사상의 중요 개념들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기신론과 관련하여 아울러 원효는 楞伽經에 의지하여 기신론의 주요 개념들, 특히 眞妄화합식으로 정의된 알라야식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기신론에 영향을 끼친 주요 경전으로서 능가경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선종사에는 菩提達磨가 중국에 능가경을 가져와(520년 또는 526년경) 이른바楞伽宗’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 경에一字不說(부처는 깨달은 이후 49년 동안 한 자도 말하지 않았다)”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指月端)”의 비유, 愚夫所行禪·觀察義禪·攀緣眞如禪·諸如來禪의 四種禪등이 설해져 있음을 볼 때 능가경을 순수한 여래장 계열 경전으로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위의 세 경전을 통해 초기 여래장사상의 모습을 살펴보고, 다음 절에서 기신론의 알라야식 개념을 논하는 자리에서 능가경과 관련된 부분을 조명해 보기로 하자.

 

1) 아홉 가지 비유로 제시된 여래장 개념: 여래장경 을 중심으로, 

여래장경은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주장을 한 최초의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여래장’이라는 말은 중생의현실’에 대한 하나의 규정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중생이 번뇌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그에게 여래와 동일한 본질 또는 여래가 될 수 있는 성질이 감춰져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래장경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번뇌 가운데에서도 중생에게 여래의 지혜와 안목과 몸이 변함없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러한 여래의 胎(如來藏)가 번뇌에 물들지 않은 채 여래 자신과 다름이 없는 德相을 구족하고 있음을 佛眼으로써 보았노라고 설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부처의 안목(佛眼)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중생은 번뇌 속에 깃든 자신의 그러한참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 여래장경은 여래장에 대한 그러한 사실을 다음의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① 시든 꽃봉우리 속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化佛,

② 벌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는 꿀,

③ 탈곡하지 않은 곡물의 알갱이,

④ 더러운 쓰레기더미에 던져진 보금

⑤ 가난한 집의 땅속에 파묻힌 보물,

⑥ 장차 커다란 나무가 될 암마라 열매의 씨,

⑦ 강도를 만나 횡사한 使臣이 누더기 조각에 품고 있던 眞金像,

⑧ 천한 신분의 여인이 잉태한 전륜성왕,

⑨ 거푸집 속에 진금상,

이상의 비유에서시든 꽃봉우리’, ‘벌’, ‘딱딱한 껍데기’, ‘더러운 땅’, ‘암마라 열매’, ‘누더기조각’ 등은 모두 불성을 덮고 있는 외적인 번뇌를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외적인 번뇌는 그 안에 있는 보금과 금불상 등에 비유되는 불성을 파괴하지 못하며, 번뇌가 제거될 때 불성은 저절로 드러날 것(除滅煩惱顯現佛性)임을 이 경은 비유로써 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⑦과 ⑧에서 사람들이 그 누더기 조각 안에 보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고, 장차 자신의 아들이 聖人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스스로 천한 자식을 낳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등의 비유로 중생의 어리석음과 자기 비하를 언급한 점은 주목된다. 따라서 이 경은너희들은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지 말지어다. 너희들의 몸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 만약 정진하여 잘못과 악행을 없앤다면, 곧 보살이나 세존이라는 이름을 받을 것이며, 무수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있다.

 

2) 一法界와 법신의 자기 전개: 부증불감경을 중심으로,

여래장경이 번뇌에 싸여있는 중생 가운데에서 성불의 가능성, 불변의 법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박한 비유로써 설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부증불감경은 이러한 여래장의 성격 및 번뇌와의 관계를 보다 조직적·논리적으로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은 여래장경 보다 여래장에 대한 이해가 한층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증불감경은一法界’에 대한 바른 知見을 강조하면서, 이 일법계에 대한 지견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邪見이 일어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견이란, 여래장이 중생에게 있다거나 여래가 열반에 든다는 표현을 오해하여 중생계가 늘어난다거나 혹은 줄어든다고 보는 견해로서 크게 增益見과 損減見으로 나눌 수 있다. 부증불감경은 우선 열반에 의해 중생계가 줄어든다고 하는 損減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가 佛法을 듣지 못하고 지혜가 없어서 여래와 열반에 대한 말을 듣고 斷見과 減見, 斷想과 滅想을 일으켜 중생계가 줄어든다고 한다. … 그러한 견해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 斷見으로 (열반을 통해 있던 것이) 끝내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며, 둘째는 滅見으로 열반을(現前하는 법이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셋째는 열반이 없다고 보는 견해로 열반이란 결국 空寂(하며 無力)한 것이라고 한다. … 세 가지 견해가 因과 緣이 되어 두 종류의 邪見을 일으키는데, 無欲見과 畢竟無涅槃見이 그것이다. … 무욕견에는 계율에 대한 전도된 견해와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보는 전도된 견해가 있다. … 필경무열반경에 의해 여섯 가지 견해가 일어나는데세간에 시작이 있다고 보는 견해, 세간에 종말이 있다고 보는 견해, 중생이란 허깨비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견해, 苦나 樂이 없다는 견해, 중생으로서의 일이 없다는 견해, 사성제가 없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반대로 增益見에는 열반이라는 것이 시초가 있다는 견해,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났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견해는 수행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왜냐하면 열반을 현상적 존재가 無化되는 것으로 보거나 아무런 노력도 없이 無로부터 갑자기 주어지는 것으로 볼 경우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열반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계와 열반계의 참다운 모습은 이러한 增減을 떠나 있는 것(‘不增不減’)으로, 그것은오로지 여래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경계”이며 聲聞·緣覺등 二乘은 알 수 없고 그들은 오로지 믿을 수 있을 뿐이라고 부증불감경은 설한다. 이 경은 일법계에 대한 이러한 지혜를第一義諦’라고 불렀으며, 그 내용은중생계가 곧 여래장이며, 여래장이 곧 법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에서 말하는일법계’란 중생계 그 자체이며, 그것을 벗어나 따로 열반계, 곧 여래와 법신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중생계와 법신은 단지 그 이름이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

부증불감경의 이러한 일법계 개념은 기신론에서도 등장한다. 기신론 은 一心法(중생심)에 의지하고 있는 진여·생멸 二門이 모든 존재(世間法=染法, 出世間法=淨法)를 포섭하며,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不相離)에 놓여있으며, 진여문의 心眞如는일법계의 大總相法門의 본체”라고 설하고 있다.

원효는 이에 대해 진여문과 생멸문은 각각 모든 존재의 보편적인 본질인 진여로서의 通相(總相)과 진여로부터 발생한 선·악의 차별상인 別相을 나타낸다고 해설한다. 이와 같이 진여문이 모든 개별자들을 포괄하는 보편성(通相), 생멸문이 개별자들의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別相)을 다루고는 있지만, 진여문이건 생멸문이건 모든 존재를 포섭하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또한 이 두 문이不相離’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모두一心으로서의’ 일법계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해설로부터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던일법계’라는 말이 기신론에서는일심법계’로 치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마음 속의’ 진여, 곧 여래장을 선·악의 因으로 보는 능가경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一心’은 기신론에서는 대개진여’와 동의어이며, 능가경 에서는여래장’과 동의어이다). 이것은 또한 기신론이일법계’의 의미를, 중생계 그 자체보다는 중생에게 내재된 성불의 가능태이자 중생의 참모습(진여)인 여래장으로서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기신론은 無明을일법계에 통달하지 못한 것”으로 정의하는데, 이것은 부증불감경에서 일법계에 대한 바른 지견이 없음으로 인해 중생계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는 邪見을 낸다고 설한 것에 대응될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과 법신의 세계가 그와 같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중생이 중생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 중생계와 법신을 매개한 개념인여래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래장’은 번뇌에 의해 뒤덮여 있는 법신이자 중생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번뇌가 사라질 때에는 중생에게 내재된 법신이 곧바로 드러나고 중생의 衆生性이 탈각된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부증불감경은 그러한법신’을 常住하며 생멸을 떠나있는 것(不生不滅法)이라고 전제한 다음, 중생과 보살, 그리고 부처(如來)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법신이 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한없는 번뇌에 둘러싸여 無始이래 세간을 따라 떠다니며 생사를 오가는 것을 중생이라 한다. … 이 법신이 세간과 생사의 고뇌를 싫어하여 모든 욕구를 버리고 10바라밀을 행하며, 8 4천 법문을 攝受하고 菩提行을 닦는 것을 보살이라 한다. … 이 법신이 일체 세간의 크고 작은 번뇌(煩惱使纏)를 떠나고, 모든 고통을 벗어나며, 모든 번뇌의 때를 떠나며, 청정함을 얻어 彼岸의 청정한 법에 머물며, 모든 중생이 바라는 땅에 이르며, 모든 경계 가운데에서 궁극적으로 통달하여 勝者가 되며, 모든 장애를 떠나 모든 법 가운데에서 自在力을 얻는 것을 여래-응공-정변지(Tathāgata-Arhat-Samyaksabuddha)라 한다.

요컨대 중생과 보살, 여래가 모두 법신이라는 본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이 번뇌를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현실적으로 중생과 보살, 여래의 모습이 나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서는 법신과 함께 무명(번뇌)의 존재 또한 중생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중생계는 ⑴ 상주불변하는 법신, 생사의 고뇌의 근본원인인 무명, 그리고 양자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는 중생이라는 세 요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 경에서 일법계인 중생계 안에 세 가지의 法(존재의 범주)이 있다고 하는 것 또한 이러한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여래장과 본래 상응하는 청정한 법(眞如法界, 自性淸淨心), 여래장과 본래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뒤덮인 청정하지 않은 법(妄法, 妄心), 여래장과 궁극적으로 동등한 불변의 법계 및 세간의 존재(不思議淸淨法界와 衆生)라는 세 범주가 중생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증불감경은 중생계를 일법계로 절대화하고, 중생에게 내재된 성불의 가능성(여래장)의 발현 양태로 중생, 보살, 여래의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은여래장과 본래 상응하지 않는 법’, 곧 無明의 존재양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래장과 무명을 모두 존재의 범주로 인정할 경우 여래장사상은 이원론으로 흐르고 말 것이며, 이는 여래장을 중심으로 현상계의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여래장사상의 일원론적 경향(如來藏緣起說)과 배치될 것이다. 따라서 여래장과 함께 무명을 일원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시도가 승만경, 無上依經, 기신론 등 다른 경론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3)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승만경을 중심으로 

승만경은 기원전 3∼4세기경에 大衆部(Mahāsāṃghika) 계통에서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원전의 일부가 보성론, 불성론 등에 인용되고 있다. 이 경은 주인공 勝鬘부인(Śrī-Mālā)의 입을 빌어 법화경에서와 같이 三乘(聲聞, 緣覺, 菩薩)의 구분은 방편이며, 오직 一()乘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일승사상과 더불어 승만경은 승만 부인의 열 가지 서원 및 세 가지 큰 서원(十大受, 三大願) 등 대승불교의 보살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데, 본 소절에서는 여래장사상과 직접 관련이 되는 부분만 다루기로 한다.

우선 이 경은 성문(아라한), 연각(벽지불)의 二乘과 一乘의 차이점으로 그들의 사성제가 서로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곧 이승이 말하는 苦·集·滅·道의 사성제는 知的인 한계가 있는 진리(有量聖諦)인 반면, 일승이 믿는 여래장과 여래 법신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그러한 한계가 없는 진리(無量聖諦)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성제는 각각 作聖諦와 無作聖諦라고도 불리는데, 후자가 참다운 진리인 이유를 이 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성제가 한계가 있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원인)을 끊으며,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有爲생사와 無爲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또한 이와 같아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무작성제가 (지적인) 한계가 없는 진리인 이유는 자기 자신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苦를 알고, 모든 集을 끊고, 모든 滅을 깨닫고, 모든 道를 닦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세존이시여, 법을 파괴함으로 해서 고통이 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소멸(이라 불리는 여래의 법신)은 시초가 없고, 作爲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궁극을 떠났으며, 항상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래 깨끗하여(自性淸淨) 일체의 번뇌장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이 법신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은, 분리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佛法(佛性)이 수반됩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래 법신이 번뇌장을 떠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합니다.

요컨대 성문·연각 등이 진리로 삼고 있는 작성제가 조건지워진 존재, 곧 有爲法의 소멸을 열반으로 보는 것과 달리, 佛智의 영역인 무작성제는 본래 깨끗하며 常住하는 법신을 통찰하되, 그것이 중생의 현실(번뇌장)을 떠나 있지 않은 모습(여래장)을 보는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와 열반계를 하나의 세계(一法界)로 본 것과 일치한다. 또한 부증불감경에서 현실적으로 법신이 번뇌에 둘러싸여(在纏)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지만, 그 법신이 보살과 여래로 전개되어 나아갈 수 있음을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승만경에서도 법신이 번뇌를 초월하여(出纏) 여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부증불감경이 無明의 지위를 단지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과 달리 승만경은 무명·번뇌를 현실적인 존재자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만경은 이승과 여래의 열반을 비교하면서 끊기 힘든 번뇌로서無明住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범부의 삶이 신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됨에 대하여(分段死), 성문과 연각 등은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몸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不思議變易死).

그러나 그들이 비록 범부가 느끼는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따라서다시 미래의 몸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라고 선언하더라도, 그들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이 못 된다(有餘涅槃)고 설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중생이 윤회하면서 받는 육체적 한계(分段身, bhāgya-kāya)를 벗어나 뜻한대로 태어나는 意生身(manomaya-kāya)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은 중생이 겪는 생사를 두려워하는 미세한 번뇌로 인해 얻게 된 또 다른 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문과 연각이 얽매여 있는 미세한 번뇌를 승만경 은 무명주지라고 하였다.

승만경에서 무명주지는 모든 번뇌가 생겨날 수 있는 근본 번뇌인住地번뇌’ 가운데 하나로서 나머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오래 머물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승만경은 네 가지 주지 번뇌를 끊더라도 이러한 무명주지는 여래의 지위에 이르러야만 끊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다면 무명주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승만경 은성문과 벽지불이 無漏를 다하지 못한 것”을 무명주지라고 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성문과 벽지불이두려워하는 바’가 바로 중생의 생사라면, 이들 二乘이 얽매여 있는 무명주지란 결국 열반을 중생계를 떠난 초월적 실재로 보는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증불감경에서일법계에 대한 바르지 못한 知見’으로 지적한 增減의 二見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기신론의근본불각’ 또는근본무명’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기신론의 근본불각(근본무명)이 이와 같이 생사에 대한 두려움, 곧 무위법(열반)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기신론에서의 깨달음은 중생계 내에서의 자비의 실현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기신론 해석분의分別發趣道相’에서 보살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證發心에서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온 세계에 (법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고 말한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무명주지 개념과 더불어 승만경이 여래장사상사에 기여한 바는 여래장에 空과 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천명한 데에 있다. 우선, 이 경은 무명주지가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을 수 없는 미세한 번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장 역시 이들이 볼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여래장을 볼 수 있는 여래의 지혜(如來藏空智)는 ⑴ 모든 번뇌로부터 구별되는 청정한 지혜 또는 법신 그 자체인 空여래장, ⑵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佛法또는 법신의 공덕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不空여래장 두 가지가 있다고 설한다. 이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이 기신론의 진여문의 두 가지 뜻을 설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如實空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없는(無漏)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기신론은 ⑴ 진여가 공한 이유는 그것이 중생의 妄念(染法)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⑵ 진여가 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망념을 떠난(法體空) 眞心은 항상하여 변치 않아 淨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신론은 이러한 不空의 진여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형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형상 따위에 집착하는 망념을 떠남으로써 如實空한 진여의 이치를 證得한 연후에야 번뇌 없는 공덕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공의 공덕이 번뇌가 궁극적으로는 허망하다는 공의 지혜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승만경의 不空여래장 역시 空여래장에 대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승만경은 여래장을 生死등 유위법의 의지처가 되며 그 자체는 생사를 겪지 않는 常住不變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할 수 없을 것임”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이 불변하는 여래장과 달리 우리의 일반적인 지각6識과心法智’로 불리는 제7 末那識(자아의식, manas)―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아 생사의 괴로움을 感受하여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厭苦樂求涅槃)를 중생에게 불러일으킬 수 없음을 부연하고 있다.

앞의 여래장경과 부증불감경, 그리고 승만경의 작성제·무작성제 해설 부분에서 여래장을 번뇌에 뒤덮인 법신으로 보고, 중생을 여래장과 동일시하며, 법신을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여래장을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고 그것이 중생에게 열반을 希求케 하는 작용력(有爲)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물론 여래장이 중생의 현실에 대한 규정이고, 또 그것이 이 맥락에서 실체로 간주된다고 해서 중생을 둘러싼 번뇌까지 실체시될 수는 없다). 아울러 이 부분은 여래장과 의식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의 특정 단계와 명확히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래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승만경은 여래장을 아트만()으로도, 7식을 떠난 제3의 의식으로도 환원시키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이 그것의 難信難解함을 강조할 뿐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자아가 아니며, 중생이 아니며, 생명도 아니고, 인격적 존재도 아닙니다. … 여래장이란 法界藏이며, 法身藏이며, 出世間上上藏이며, 自性淸淨藏입니다. 이처럼 자성청정한 여래장이 객진번뇌와 上번뇌(부수적인 번뇌)에 물드는 (것을 보는) 것은 불가사의한 여래의 경지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의 착한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또한 찰나의 나쁜 마음도 번뇌에 물들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또한 번뇌에 접촉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접촉하지 않는 법이 능히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번뇌도 있고, 번뇌가 마음을 물들이는 일도 있습니다.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부처만이 참다운 눈과 진실한 지혜로 법의 근본이 되었으니 법에 통달하고 올바른 진리에 귀의하여 진실하게 알며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자성청정한 여래장이 객진번뇌 등에 물드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말은 어떻게 해서“在纏位의 법신”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말과 같다(인용문에서의마음’은자성청정심’으로서의 여래장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와 본질적으로 다르며(空如來藏), 모든 부처의 공덕을 具足한(不空如來藏) 법신이 어떻게 해서 번뇌 속에 들어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중생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승만경은 이러한 법신을 常·樂·我·淨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여래장(번뇌 속의 법신)我’는 아니지만, 常住不變한다는 위의 주장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그러나 승만경은 이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을 회피한 채 그것은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며, 이러한 이유로 여래장사상은믿음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한편, 자성청정한 여래장이 번뇌에 물들 수 있다는 관념은 기신론의 무명의 진여에 대한 훈습, 不思議熏習’ 개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만경은 여래장사상을 보다 조직화하고 여래장 개념을 풍부하게 만들었지만, 번뇌(무명)와는 근본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여래장이 어떻게 해서 중생에게 내재될 수 있는지를 단지불가사의한 여래의 경지”에 둠으로써 부증불감경에서 문제시되었던 번뇌의 존재론적 위상 또는 번뇌의 발생과 관련된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소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승만경은 空여래장 개념에 의해 번뇌의 실체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여래장사상에 있어서 해탈이란 어떤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비록 淸淨不變의 마음의 본성(자성청정심=여래장=법신)번뇌 속에 머물러 중생의 몸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깨끗한 본성은 번뇌에 물들지 않음(空여래장)을 자각할 때, 번뇌로부터의 해탈하여 부처가 가진 것과 같은 공덕(不空여래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뇌의 존재론·발생론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미흡하지만, 번뇌의소멸’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은 본래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불가사의하게’ 더럽혀져 있더라도 내 마음 속의 법신(여래장)의 작용으로 인해 결국에는 그 깨끗함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끊기 힘든 번뇌로 제시되었던 무명주지 역시 결국에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허망한 것임을 시사하며, 따라서 번뇌라는 것은 그 시작하는 지점은 알 수 없지만, 결국에는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물론 이러한淨化’는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게 하는(厭苦樂求涅槃)” 여래장의 작용에 의해 가능한 것이지만, 여래장의 작용이 곧바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여래장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 속에 여래장이 있음을 자각하는 나름의 수행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만경은 그러한 수행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단지 그러한 자각이 부처의 위치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설할 뿐이다. (능가경과 기신론에서 禪定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승만경의 실천론상의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함은 아닐까?)

한편, 승만경은 여래장을 “6식 및 心法智를 초월한 것”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여래장을 의식으로 환원시킬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왜냐하면심법지’를 제7 末那識으로 다룰 경우 여래장은 이 7식을 초월한 제8 알라야식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 소개할 능가경은 여래장에 대한 이러한 識說的해명을 시도하고 있는 경전이다.

* 이상에서 살펴본 여래장삼부경에서 제시된 여래장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여래장’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여래장경은 갖가지 비유로써 번뇌에 휩싸여 있는 중생 속에 불변의 법신이 있고,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설하였다. 중생의 이러한 상태는여래의 태아’, 곧 여래장을 안에 품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다음으로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중생과 법신을 매개하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법신의 세계(열반계)는 중생계와 분리된 별도의 세계가 아니어서 늘거나 줄지 않음(不增不減)을 강조하였다. 부증불감경은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를 하나의 세계(一法界)로 볼 것을 강조했지만, 기신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심(一心法) 안에 있는 불변의 요소(진여)인 여래장(一心)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세계(一心法界)를 인식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부증불감경은 법신이 번뇌 속에서 유전하는 존재를 중생으로 규정하면서도 번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는다.

승만경은 중생의 번뇌는 결코 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불변의 여래장만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厭苦樂求涅槃) 힘을 갖는 실체라는 점을 여래장의 空과 不空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이 경은 여래장을 번뇌 속에 깃들어 있는 법신(在纏位法身)으로, 여래를 번뇌로부터 벗어난 법신(出纏位法身)으로 규정하면서, 법신이 常·樂·我·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승만경은 그 본성이 본래 물들지 않는(自性淸淨) 여래장이 어떻게 해서 번뇌에 물들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해명을 회피한 채, 오직 부처의 경지에서만 알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여래장사상을믿음의 종교’로 만들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승만경에서 시도된 이와 같은 번뇌의 발생론에 대한 나름의해명’은 기신론에서 이른바不思議훈습’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이 경은 여래장을 “6식 및 心法智를 초월한 것”으로 다루면서도 구체적으로 의식과의 관련성을 밝히고 있지 않음으로써 능가경에서 여래장을 알라야식과 동일시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는 기신론에서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식으로 알라야식을 정의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海印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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