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水源比喩 - 큰 수원(水源)의 비유
世尊(세존)!又如劫初成時(우여겁초성시) 有大水聚(유대수취)
세존이시여! 또한 겁이 처음 이루어질 때에 큰 수원=大水聚가 있어서
出生三千大千界藏(출생삼천대천계장) 及四百億種種類洲(급사백억종종유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보배와 4백억 종류의 갖가지 육지에 이르기까지를 이루어내듯이
如是攝受正法(여시섭수정법) 出生大乘無量界藏(출생대승무량계장)
이러한 정법을 거두어들이면 대승의 한량없는 세계와
一切菩薩神通之力(일체보살신통지력) 일체 보살의 신통한 힘과
一切世閒安隱快樂(일체세간안은쾌락) 閒 한가할 한, 틈 간, 사이 간. 間의 本字
일체 세간의 안온하고 즐거운 것=快樂함과
一切世閒如意自在(일체세간여의자재) 及出世閒安樂劫成(급출세간안락겁성)
일체 세간의 뜻과 같이 자재함과 그리고 출세간의 안락을 낳게 하는 것이며, 겁이 이루어지는 일 등은
乃至天人本所未得(내지천인본소미득) 皆於中出(개어중출)
천상이나 인간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 (본래부터 얻지 못하던 것이) 모두 그 가운데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불교의 중요한 명제이다. 올바른 진리를 받아 지니지 못하면 그야말로 사법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체 공덕과 선근이 정법을 섭수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하여 정법을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승의 근본 서원이 정법을 섭수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안락이 정법섭수에서 나온다고 밝히면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지안스님]
9. 堪能四重重任 -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자의 네 가지 책임
又如大地持四重檐(우여대지지사종담) 何等爲四(하등위사)?檐 질 담
또 대지가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一者大海(일자대해) 二者諸山(이자제산) 三者草木(삼자초목) 四者衆生(사자중생)
첫째는 큰 바다이고, 둘째는 여러 산이고, 셋째는 초목이고, 넷째는 중생들이니,
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여시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建立大地(건립대지)
이와 같이 바른 법=正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도 대지를 건립하여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喩彼大地(유피대지) 堪 견딜 감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지려고 하니, 비유하자면 저 대지와 같습니다.
何等爲四(하등위사)?謂離善知識(위이선지식) 無聞非法衆生(무문비법중생)
어떤 것이 넷인가 하면, 선지식을 떠나 (만나지 못하여) 정법이 아닌 것=非法을 들은 중생들을
以人天善根而成熟之(이인천선근이성숙지) 求聲聞者授聲聞乘(구성문자수성문승)
인간과 천상의 선근으로써 키워주고, 성문을 구하는 자는 성문의 가르침=聲覺乘을 주고,
求緣覺者授緣覺乘(구연각자수연각승) 求大乘者授以大乘(구대승자수이대승)
연각을 구하는 자는 연각의 가르침=緣覺乘을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대승의 가르침=大乘을 주는 것이오니,
是名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시명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건립대지)
이를 이름하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의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터전을 마련함=建立大地이라 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을 네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크게 나누면 (1)불교를 믿지 않고 법을 등지고, 법을 비방하는 무리들과 (2)불법을 믿고 불도를 걸어가려는 부류의 둘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자(前者)는 불교에 연(緣)이 없는 사람, 불법을 듣고자 하는 귀를 갖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한 부류도 또 둘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물론 다른 종교를 굳게 믿고 불교를 믿지 않는 부류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를 무시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특히 후자는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연(緣)이 없는 중생[無緣衆生]’이다. 그러나 ‘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듯 전혀 무연(無緣)의 사람은 문제 밖이라 도외시해서는 진정으로 섭수정법자(攝受正法者)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무연의 사람이라도 정법을 섭수하기 위해서는 짊어지고 갈 것이 요구된다.-혜경스님]
世尊(세존)!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여시섭수정법선남자선여인)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 선여인은 터전을 마련하여
堪能荷負四種重任(감능하부사종중임) 普爲衆生作不請之友(보위중생작불청지우)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짐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하여 청하지 않은 벗=不請友가 되어
[불청지우(不請之友) = 청하지 않은데도 친절을 베풀어 오는 벗, 佛·菩薩이 중생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작용해 오는 것을 벗에 비유함, 벗은 서로 상호부조를 본분으로 하는데 청하기 때문에 구제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참다운 벗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함에 의해서 불청지우가 되기를 강조한다.]
大悲安慰哀愍衆生(대비안위애민중생) 爲世法母(위세법모)
중생들을 편안하게 위로하며 불쌍히 (어여삐) 여겨서 세상에서 진리의 어머니=法母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취택(取擇)될 내용으로서는
➀ 방편(方便)과 진실지(眞實智)와의 관계
➁ 정법이란 일승법(一乘法)이라는 것,
➂ 따라서 정법을 섭수(攝受)하는 것은 붓다(buddha)가 설한 대승정신(大乘精神)을 몸으로써 나타내야 할 것,
➃ 모든 서원은 필경 섭수 정법이라는 하나의 큰 서원(誓願)에 귀일(歸一)할 것,
➄ 그 공덕은 헤아려 알 수 없는 것,
➅ 그 정법을 섭수하는 사람은 온갖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대승보살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정법의 공덕(功德)을 나누어 준다고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짏어진 사람일 것,
➆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법모(法母)가 되고 불청지우(不請之友)의 벗이어야 할 것,
➇ 이리하여 섭수 정법자가 그대로 정법의 체현자(體現者)이기 때문에 섭수되는 정법과 섭수하는 사람이 일치한다.
여기에 정법을 섭수한다는 의의가 있다. 그것은 대승 보살행의 실천 항목으로서의 육바라밀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그와 같은 사람의 행위가 그대로 정법을 섭수하는 것이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붓다는 이상과 같이 이해하는 부인의 설하는 바에 대해 「정법을 받아 기억하는 일은 넓고 크기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도 반드시 정법을 전하여 정법을 받아 기억하는 사람이 되도록」 거듭하여 부인의 이해에 찬동하고 있다.]
[정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의 네 가지 책임이란 바로 정법을 거두어들이려는 대승보살의 책임이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정법을 듣지 못한 불우한 중생들에게 선근을 심어 키우게 해 인간세상과 천상에서 복을 누리도록 하고 2승들에게는 그들의 근기에 맞는 방편을 쓰고,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법으로써 가르침을 주겠다는 것이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 (不能度無緣衆生)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 법에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 ㅡ지안스님]
[불능도무연중생(不能度無緣衆生)이란 말처럼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제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새벽이슬에 젖어들 듯이 서서히 부처님 정법에 물들어 믿음의 땅에 서도록 해야 한다.
정법을 섭수하는 사람은 불청지우(不請之友)가 되는 것은 기다리지 말고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라는 것이다. 고통의 소리가 들리고 보이면 즉각 달려가 도와주는 좋은 벗이 되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좋은 벗을 위해서는 그를 이롭게 하고 인자하게 보살피는 것이니, 주기 어려운 것을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비밀스러운 것도 서로 털어 놓고, 서로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괴로움에 처했을 때 외면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복지시설 등에서 봉사에 동참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바로 불청지우이다. 남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도움이 되고자 나선 참으로 착한 벗들이다.-혜총스님(불교신문)]
[근기(根機)= 근기는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의 세 가지로 나눈다. 선가(禪家)에서는 참선하는 사람을 상근기,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중근기, 염불하는 사람을 하근기로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능엄경에 보면 대세지보살은 염불삼매로 원통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세지보살은 상근기 중에서도 상근기인데 염불로 원통을 얻었으니 하근기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전국의 선방에서 참선하는 사람은 모두 상근기인가? 그렇지 않다. 참선수행하는 사람 중에는 불교교리에도 어둡고 자비심과 덕도 부족하고 정진력도 약한 하근기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기는 수행방법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전에 따라 상근기의 경전이 따로 있고, 중근기의 경전, 하근기의 경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읽고도 공(空), 연기(緣起), 중도(中道)를 깨닫기도 하며 반야경을 읽으면서도 유심(唯心)을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면 교리에 따라 상근기를 대상으로 한 법문과 중근기를 대상으로 한 법문과 하근기를 대상으로 한 법문을 나눌 수는 있다.
(1) 하근기(下根機)를 대상으로 한 법문은 인천도(人天道)다. 생사윤회를 설하고 삼악도의 고통과 천상의 행복을 설하며 불선업(악업)을 쌓으면 삼악도에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천상 또는 인간에 태어난다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설하는 것이다. 이 법문은 초기불교의 경전(니까야, 아함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대승불교의 경전에서도 많이 말씀하셨다.
인천도의 수행법은 오계(五戒)와 십선업(十善業)이다. 또한 천상에 태어나는 도(天道)인 오법(五法)도 여기에 속한다. 오법은 믿음(信), 보시(布施), 지계(持戒), 다문(多聞), 지혜(智慧)다. 이것들이 인천도(人天道)로서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근기 중에서도 높은 근기는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니 즉, 생사윤회를 믿고 업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인과응보의 도리를 잘 아는 것이다.
하근기 중에서도 낮은 근기는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하기 위하여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빌어서 불보살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사견(邪見)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사람은 이런 방편으로라도 불법과 인연을 맺는 것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빌더라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마음으로는 겸손하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착한 마음을 낼 것이고,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착한 말을 할 것이고, 몸으로는 부처님의 상을 향해 절하고 공양을 올리는 착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업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정법(正法)을 가르쳐주는 선지식이 나타나서 정법을 배우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2) 중근기(中根機)를 대상으로 한 법문은 해탈도(解脫道)다. 성문도(聲聞道)와 연각도(緣覺道)가 여기에 속한다. 성문도는 삼법인과 사성제의 법문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연각도는 십이연기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 해탈도는 주로 자리(自利)의 수행이며 이타(利他)의 수행은 적다.
해탈도의 수행법은 ① 팔정도(八正道)와 ② 사념처(四念處)를 시작으로 한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과 ③ 사마타、위빠사나를 포함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다. 이 수행법으로 성문도에서는 사사문과(四沙門果)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증득하며, 연각도에서는 벽지불의 깨달음을 증득한다.
해탈도의 과정은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고 하니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의 과정이다.
① 계가 청정해지면 후회가 없고, 후회가 없으면 기쁨이 일어나고, 기쁨이 일어나면 몸이 가볍고 편안하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② 마음이 즐거우면 고요해지고 선정에 든다.
③ 선정에 들면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가 일어난다.
④ 지혜가 일어나면 세간법(오온)을 염오(厭惡)하게 되고, 염오하면 탐욕을 떠나고(離欲) 네 가지 취착(욕취, 견취, 계금취, 아취)가 소멸한다.
⑤ 취착이 소멸하면 해탈한다. (盡智)
⑥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견이 생겨난다. (無生智)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다 해 마쳤고, 다시는 후생의 존재(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도의 과정이다.
(3) 상근기(上根機)를 대상으로 한 법문은 보살도(菩薩道)다. 보살도는 보리심의 서원을 발심한 때로부터 시작한다. 보리심을 내지 않은 사람은 아직 보살이 아니다. 단, 전생에는 보리심을 냈으나 금생에 태어나서 아직 대승법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곧 다시 선지식을 만나고 대승법을 만나서 다시 보리심을 내게 된다.
보리심은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기를 서원합니다.” 이와 같이 서원하고 발심하는 것이다. 보살도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덕이 원만한 큰 길이다.
과거에 연등불(燃燈佛)이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몸인 수메다 즉, 선혜보살(善慧菩薩)은 서원을 세웠다. “나는 원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어찌 혼자서만 가랴. 일체중생을 성숙시켜서 해탈시키기 위해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리라.” 이것이 보살의 서원이다.
보살도의 수행법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십바라밀(十波羅蜜)이다. 또한 사섭법(四攝法), 삼취정계(三聚淨戒)의 보살행(菩薩行)이다. 또한 보현십종광대행원(普賢十種廣大行願)이다. 이 모든 수행법의 우두머리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못한 모든 수행법은 보살도라고 이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인천도나 해탈도에 속하는 것이다. 보살도를 닦아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사선근(四善根), 보살십지(十地)와 등각(等覺)을 거쳐서 묘각(妙覺)에 이르면 성불한다.
보살에는 초학보살(初學菩薩.新學菩薩)과 지혜가 성숙한 보살이 있다. 초학보살은 대승으로 발심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지혜가 미숙한 보살을 말한다. 또는 전생에는 이미 보리심을 냈으나 금생에 아직 대승법을 만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대승법을 다시 만난 보살도 초학보살로 본다. 이들은 아직 지혜가 미숙하기 때문에 다시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4. 대기설법(對機說法)
보살도에서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한다. 물론 초학보살은 아직 지혜가 약하기 때문에 보살행을 하지 못하며 다시 법을 배우고 익혀서 지혜가 성숙했을 때 비로소 보살행을 하게 된다.
지혜가 성숙한 보살은 인천도와 해탈도(성문도, 연각도)와 보살도를 모두 잘 알고 통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도의 근기에게는 인천도로서 교화하고, 성문도의 근기에게는 성문도로서 교화하고, 연각도의 근기에게는 연각도로 교화하고, 보살도의 근기에게는 보살도로 교화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만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 堪能四重重任의 내용참고~
지혜가 성숙한 보살은 인천도와 해탈도(성문도, 연각도)와 보살도를 모두 잘 알고 통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도의 근기에게는 인천도로서 교화하고, 성문도의 근기에게는 성문도로서 교화하고, 연각도의 근기에게는 연각도로 교화하고, 보살도의 근기에게는 보살도로 교화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그런데 보살도의 근기를 교화할 때도 방편선교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초학보살에게는 거기에 맞는 법으로서 교화하고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한 중생에게는 거기에 맞는 법으로서 교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학보살에게는 보리심을 발하도록 하고 나서 인천도와 해탈도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기초교리와 기초수행법을 알아야 대승의 수행법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천도와 해탈도를 잘 알아야 나중에 보살행을 하여 중생을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한 보살에게는 대승법을 가르친다. 반야의 공성(空性)과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여래장(如來藏)、유심(唯心)의 도리와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이 도리를 공부하여 통달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통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성자 지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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