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以故(하이고) 以依佛出家而受具足(이의불출가이수구족)
그 까닭은 부처님에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는 것이므로
是故說大乘威儀戒是比尼(시고설대승위의계시비니)
그러므로 대승의 위의인 계=大乘威儀戒가 곧 比尼=교단의 규범이며,
是出家是受具足(시출가시수구족)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 설하는 것이며,
是故阿羅漢無出家受具足(시고아라한무출가구족)
그러므로 아라한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없사오니,
何以故(하이고) 阿羅漢依如來出家受具足故(아라한의여래출가수구족고)
왜냐하면 아라한은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또 구족계를 받는 까닭입니다.
[수구족(受具足)은 비구․비구니가 반드시 받아야할 계를 받는 것, 즉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비구(出家僧)나 비구니가 반드시 받아야할 계로서 그 계에는 무량한 계덕(戒德)이 갖추어져 있음으로 구족계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비구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500계(四分律에 의함)라고 말하지만, 이와 같은 수구족을 6처의 하나로 한 것은 대승을 믿고 보살행을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위의(威儀)를 반듯이 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의 가르침에 의해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는 일은 없는 것이어서 여래에 귀의해 비로소 출가, 구족계를 받는다고 한다. 성문, 연각의 가르침에 의해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는 것은 대승의 방편 시설이며 어디까지나 여래가 있고 대승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자기의 완성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대승의 정신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세존은 중생의 구제, 해탈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세존이 대승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르친 것이 이상의 6처, 즉 여섯 가지의 의지처이다. 이와 같이 대승을 떠나 소승은 없고 소승은 대승에 귀납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이 단(段)의 취지이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그[원효] 스승은 정법으로서 머뭄과 소멸은 경장과 논장이고 바라제 목차 등 4가지는 율장을 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해석한 이유를 말한다. 무엇 때문에 이 藏[율장]을 별도로 4가지로 열었는가? 근본과 지말, 포섭과 들어감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왜인가? 바라제목차는 지말이고 비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비니는 근본이어서 그 지말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포섭의 의미는 이승이 인식할 대상이다. 이 실례가 대승이 포섭하는 의미를 표시하기 때문이 다. 이를테면 6처는 지말이고 대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승은 근본 이어서 그 지말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가는 작은 부분의 계이고 구족계 수지는 구족계이다. 작은 부분의 계를 지니고 구족계로 들어가며, 구족계에 들어갈 때는 별도의 작은 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이 들어간다는 의미는 그들[二乘]이 인식할 대상이다. 이 실례가 대승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승이란 작은 수레이고 여래와 대승은 원만한 수레이다. 작은 수레를 가지고 원만한 수레에 들어가며, 원만한 수레에 들어갈 때는 별도의 작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포섭하고 들어간다는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비니에 대한 글의 의미를 별도로 연 것이다.
(2) 그러므로 구룡은 말한다. ‘허위 중생’이라 한 것은 이를테면 범부들 에게 여러 공덕이 없기 때문에 ‘虛’라고 하고, 많은 번뇌를 지니기 때문에 ‘僞’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성인이 있더라도 다수로부터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勝鬘經疏詳玄記]
15. 二乘有恐怖 - 이승(二乘)들은 두려움이 있다.
阿羅漢歸依於佛(아라한귀의어불) 阿羅漢有恐怖(아라한유공포)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나, 아라한은 공포가 남아 있으니,
何以故(하이고) 阿羅漢於一切無行怖畏想住(아라한어일체무행포외상주)
왜냐하면, 아라한은 一切無行=온갖 것에 대한 행이 없으며, 두려워하는 생각에 머물기 때문에
如人執劍欲來害己(여인집검욕래할기) 是故阿羅漢無究竟樂(시고아라한무구경락)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와서 나를 해치려 함과 같으므로, 아라한은 끝까지 즐거움이 없나니,
何以故(하이고) 世尊(세존)! 依不求依(의불구의) 如衆生無依(여중생무외)
그 까닭은 세존이시여,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않는 이에게 의지하는 것인데, 저 중생들은 의지처가 없으므로
彼彼恐怖(피피공포) 以恐怖故則求歸依(이공포고즉구귀의)
그들은 가는 데마다 공포를 느끼고, 공포를 느낌으로 말미암아 의지처를 구하나니,
如阿羅漢有怖畏(여아라한유포외) 以怖畏故依於如來(이포외고의어여래)
그와 같이 아라한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소승과 대승의 입장을 아라한과 불․세존․여래와의 대비 중에서 파악하려 하고 있다. 즉 소승의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아라한에게는 궁극적인 즐거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당연히 두려움이 있어 이 두려움 때문에 여래에 의존한다. '따라서 의존하지 않는 여래는 의존할 바를 구하지 않는다.'란 아라한과 여래․불․세존과의 사이에 그런 까닭에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아라한이란 범어의 아르핫트(arhat)의 음역으로 응공(應供)․살적(殺賊)․불생(不生) 등으로 번역된다.
응공이란, 사람들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살적이란, 번뇌의 적(賊)을 죽였다는 뜻이고, 불생이란 영원히 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원어의 음사에 의한 아라한 또는 나한(羅漢)으로 호칭한다.-혜경스님]
[여기서 승만부인은 아라한이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소승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대승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라한은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성자요, 공양과 보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수행자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성자이지만 생사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열반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아라한(阿羅漢)은 의역하여 번뇌의 적을 물리쳤다는 살적(殺賊)이라고도 하고, 일체의 지혜를 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라는 뜻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또 다시는 나고 죽지 않는다는 뜻에서 불생(不生)이라고도 하며 더 배워야 할 것이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처와 여래의 열 가지 명호인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하나로 부처의 지위를 증득한 유정(有情), 즉 부처 또는 여래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부파불교 시대 이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자 부처님과 수행자로서의 아라한을 구분하게 되면서 성문의 최고위인 아라한과를 얻은 자를 통틀어 아라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혜총스님]
[ 첫 번째 비유의 2가지 의미= 아라 한에게는 공포가 있기 때문에 곧 귀의처를 구한다는 비유는 동일하다는 비유이고, 그 반대로 여래에게는 공포가 없기 때문에 귀의처를 추구 하지 않는다고 나타낸 것은 다르다는 비유이다.
원효는 합(合) 중에 아라한에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여래를 의지해야 한다고 한 것은 통틀어 2가지 의미를 합한 것이다. 귀의의 대상으로서 여래는 귀의처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김홍미]
16. 唯有如來得般涅槃 - 오로지 여래만이 열반의 세계를 얻음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有怖畏(아라한벽지불유포외)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是故阿羅漢辟支佛(시고아라한벽지불) 有餘生法不盡故有生(유여생법불진고유생)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有餘=업의 잔재가 남아 있어, 生法=윤회와 재생으로 이어지는 성질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며,
有餘梵行不成故不純(유여범행불성고불순) 事不究竟故當有所作(사불구경고당유소작)
有餘= 업의 잔재가 있음에 梵行=청정한 행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순수하지 못하며,
일이 끝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바가 있으며,
[성스러움(梵, ārya)은 멸제의 청정한 특성을 이름하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행을 현증하므로 梵行이라 한다]
不度彼故當有所斷(불도피고다유소단) 以不斷故去涅槃界遠(이불단고거열반계원)
피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 있으며, 끊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열반의 세계=涅槃界와는 거리가 머나이다.
[아라한은 번뇌를 끊고 해탈한 점에서는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기에 마땅하고, 최고의 지위에 있는 성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두려움은 있을 수 없다. 두려움이 없으면 영원한 즐거움을 느끼면 좋을 따름이다. 그런데 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일까. 이에 관하여 본경은 ‘아라한은 일체에 행하는바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 의미는 ‘아라한은 스스로의 깨달음만을 목표로 하고 다른 중생에 대한 행, 즉 대승 보살행의 이타행이 빠져 있다’고 한다. 만일 일체중생을 위해 생각하고 또한 그를 위한 행을 행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안심감을 줄 것이지만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일체중생이 생사의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 절대의 안락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즉 아라한에게는 대승의 보살의 항상 일체중생의 해탈․구제를 염하고 그를 위한 행을 실천하는 자비행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아라한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여래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아라한은 번뇌로 인한 장애인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있지만 일체지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알아야할 것에 대한 장애인 소지장(所知障)을 끊지 못했으므로 최고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리해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불․여래에 의지한다는 필연성이 있다고 한다.-혜경스님]
何以故(하이고) 唯有如來應正等覺得般涅槃(유여래응정등각득반열반)
그 까닭을 말하면, 오직 여래ㆍ응공ㆍ정등각만이 반열반에 들 수 있사오니,
成就一切功德(성취일체공덕) 온갖 공덕을 모두 성취한 까닭이오며,
故阿羅漢辟支佛不成就一切功德(고아라한벽지불불성취일체공덕)
아라한ㆍ벽지불은 온갖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열반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唯有如來得般涅槃(유유여래득반열반) 成就無量功德(성취무량공덕)
오직 여래만이 般涅槃=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사오니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한 까닭이오며,
故阿羅漢辟支佛成就有量功德(고아라한벽지불성취유량공덕)
아라한ㆍ벽지불은 有量功德=한량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나,
言得涅槃者是佛方便(언득열반자시불방편)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성문과 연각, 2승이 도달하는 열반과 여래의 열반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5가지 점에서 나타내고 또한 여래의 반열반은 부처님의 방편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이 1단이다. 여기서 2승과 여래의 서로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열반을 매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열반에 대해서 해설하면, ‘열반(파 nibbana, 범 nirvana)이란, 원래 불어 끄는 것으로서 번뇌의 불을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탐욕, 진에, 우치라고 하는 번뇌의 3독․삼화(三火)를 지멸(止滅)한 적멸(寂滅)의 경지를 이름 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의 아함(阿含)․니카이야에서의 정형구(定型句)로서 열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貪欲)의 멸(滅), 진에(瞋恚)의 멸(滅), 우치(愚痴)의 멸(滅),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상응부』제4권〉 혹은 「갈애(渴愛)를 여의는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상응부』제1권〉 등을 볼 수 있고, 한역에서는 번뇌의 숲에서 탈출한다는 것으로서 출조림(出稠林)이라는 역어가 주어져 있다.
이와 같이 열반 본래의 의미는 번뇌를 모두 끊은 적정(寂靜)의 경지이다. 그런데 후세의 수행자들이 그와 같이 노력 정진하면서도 생존하는 한, 바꾸어 말하자면 육체가 존속하는 한, 번뇌를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유되어 여기에 '육체의 사멸(死滅)에 의해 열반이 있다'라고 하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nirupadhisesa-nirvana)과 육체가 있어도 탐내고[貪]․성내고[瞋] ․어리석음[癡]을 멸한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opadhisesa-nirvana)이라고 하는 두 가지 열반을 세우게 되었다.
오늘날 절 행사의 하나에 열반재(涅槃齋)가 있는데 이것은 석존께서 입멸하신 2월 15일을 추억하는 불사(佛事)로서의 의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일반에는 열반에 드는 것을 사멸(死滅)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혜경스님]
[부처님의 반열반(般涅槃)= 恒河를 건넌 붓다는 다시 遊行을 계속하여 跋耆의 수도 毘舍離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기를 맞은 붓다의 일행은 夏安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붓다는 더위와 장마에 시달려 몸져 눕게 되었다. 비구들은 이것이 최후가 아닌가 해서 우울했다. 그러나 붓다는 굳은 정신력으로 병을 극복하고 우기가 끝날 무렵엔 비사리를 떠나 다시 북쪽으로 유행의 길을 떠났다. 붓다가 파바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准陀라는 사람의 공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또 병을 일으켜 붓다는 위독하게 되었다.
經典에 의하면 버섯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하는데, 병이 난 붓다는 쿠시나라로 돌아갈려고 무척 애를 쓴것 같다.
파바에서 쿠시나라로의 길은 왕사성에서 사위성에 이르는 당시의 인도에 있어서 주요한 교통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 大道를 따라 최후의 遊行을 마치고 붓다는 다시 사위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쿠시나라에 이르러 붓다의 생명력은 다하고 말았다.
"아란아, 나는 지쳤다. 눕고 싶다. 저 砂羅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아다오."
"世尊, 두렵습니다." 하고 아란은 대답하고 砂羅 숲속의 並木 아래 자리를 깔자 붓다는 그곳에 누웠다. 그것이 붓다의 죽음의 무대였다. 붓다의 죽음을 불교술어로는 般湼槃(Prinibbana의 音譯. 완전한 寂滅의 뜻으로서 붓다의 죽음을 말한다.)이라고 한다.
쿠시나라 교외의 砂羅 숲속에서 몸져 누운 붓다는 병상 가에 둘러선 많은 비구들을 보고 말했다.
"비구들아, 어쩌면 그대들 중에는 아직 敎法에 대해서, 僧伽에 대해서 혹은 실천의 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질문을 해라. 뒤에, 그때 나는 스승의 옆에 있었는데도 왜 물어보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비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을 앞에서 선뜻 질문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붓다는 두번 세번 재촉했다. 비구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붓다는 다시, "그대들은 나를 숭앙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래서는 안된다. 친구가 친구에게 묻는 것같은 기분으로 질문을 해라." 그렇게 말을 해도 역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다.
그때 시자 阿難이 말했다. "世尊아, 진실로 회유한 일이지만, 이제야말로 한 사람의 비구도 敎法에 대해 僧伽에 대해 혹은 실천의 방법에 대해 조금도 의문을 남긴 자가 없다고 믿습니다."
붓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또 비구들에게 일렀다. "그럼 비구들아, 내가 말하마. <이승의 일은 壤法(Vayadhamma의 譯. 모든 것은 變移하는 것이라는 뜻)이니라. 放逸하지 말고 精進할지라.> 이것이 나의 최후의 말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눈을 지긋이 감고 영원의 정적에 잠겼다.
이와 같은 붓다의 죽음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경전을 <大般涅槃經>이라고 한다. 그것은 붓다의 '크나큰 죽음'의 모습을 서술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여강(如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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