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如來有二種不受後有智 - 여래의 윤회하지 않는 두 가지 지혜
世尊(세존) 不受後有智有二種(불수후유지유이종)
세존이시여, 不受後有=‘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뒤의 몸을 받지 아니하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사오니,
謂如來以無上調御降伏四魔(위여래이무상조어항복사마)
이른바 여래께서는 無上調御= 위없는 방법으로 四魔=네 가지 악마를 항복 받고,
出一切世閒(출일체세간) 爲一切衆生之所瞻仰(위일체중생지소첨앙)
모든 세간을 뛰어나서, 모든 중생의 존경을 받는
得不思議法身(득불사의법신) 於一切爾焰地得無㝵法自在(어일체이염지득무애법자재)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었으며, 온갖 지혜를 낼 만한 경계에 대하여 걸림이 없는 법의 자재를 얻었으며,
於上更無所作(어상갱무소작) 無所得地十力勇猛(무소득지십력용맹)
이 위에 더 지어야 할 바도 없으며, 얻어야 할 바도 없는 경지(지위)에서 십력이 용맹하시어,
昇於第一無上無畏之地(승어제일무상무외지지)
제일이며 위없는 無畏=두려움 없는 지위에 오르셨으며,
一切爾炎無㝵智觀不由於他(일체이염무애지관불유어타) 不受後有智師子吼(불수후유지사자후)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를 걸림 없는 지혜로 관찰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뒤의 몸을 받지 않는 지혜로 사자후 하는 것입니다.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度生死畏(아라한벽지불도생사외) 次第得解脫樂(차제득해탈락)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사의 두려움을 벗어나서 차례로 해탈의 즐거움을 얻어서,
作是念(작시념) ‘我離生死恐怖(아이생사공포) 不受生死苦(불수생사고)’
생각하기를 ‘나는 생사의 공포를 벗어났으므로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리라’ 하나니,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觀察時(아라한벽지불관찰시)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한 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得不受後有(득불수후유) 觀第一蘇息處涅槃地(관제일소식처열반지)
가장 뛰어난 안식처=蘇息處인 열반의 경지를 관하는 것입니다.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되살아날 소. 蘇息소식=끊어질 듯이 막혔던 숨을 돌려서 되쉼
世尊(세존) 彼先所得地(피선소득지) 不愚於法(불우어법) 不由於他(불우어타)
세존이시여, 저들이 앞에 얻은 바 열반의 경지는 법에 어리석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亦自知得有餘地(역자지득유여지) 必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필당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스스로 有餘地=불완전한 지위(남음이 있는 지위)를 얻었지만, 반드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것을 아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聲聞緣覺乘皆入大乘(성문연각승개입대승)
왜냐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이 모두 대승에 들어가는 것이니,
大乘者卽是佛乘(대승자즉시불승) 是故三乘卽是一乘(시고삼승즉시일승)
대승은 곧 부처님의 길=佛乘이며, 그러므로 삼승이 곧 일승이며
得一乘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일승자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일승을 얻은 이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는 것이 되며,
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卽是涅槃界(아뇩다라삼막삼보리자즉시열반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열반의 경지이며,
涅槃界者卽是如來法身(열반계자즉시여래법신) 열반의 경지는 곧 여래의 법신이므로
得究竟法身者則究竟一乘(득구경법신자즉구경일승) 無異如來(무이여래)
究竟法身=완전한 법신을 얻은 이는 곧 완전한 일승을 얻음이니,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으며,
無異法身(무이법신) 如來卽法身(여래즉법신) 得究竟法身者(득구경법신자)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며, 여래가 곧 법신이니, 究竟法身=완전한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則究竟一乘(즉구경일승) 究竟者卽是無邊不斷(구경자즉시무변부단)
완전한 일승을 얻는 것이며, 究竟=궁극적이라는 것은(완전함이라는 것은) 끝이 없으며 끊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이 일불승(一佛乘)으로 귀결되는 것은 '법화경'의 핵심인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과도 통합니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홀로 이 세상의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승이고,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 하나, 일승이라는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는 방편을 써서 삼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삼승은 방편(三乘方便)이요, 일승은 진실(一乘眞實)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평등무차별하게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불교는 일부 특정인만을 위한 차별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워하는 일반사람들이나 일불승의 인연을 만나지 못한 수행자들에게는 3승의 방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문, 연각의 2승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하므로 대승이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승만부인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 왜 붓다의 방편이 되는지에 대한 원효의 해설을 요약하면, 이승에게 변역생사에서 재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 무명 주지 번뇌가 끊어진 것도 아니며 거기에서 멸제와 도제가 아직 현증된 것도 아니고 수습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효는 ‘고제는 이미 끊어졌다’고 아는 것이지만 변역생사에서 재생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붓다의 방편이 되고, ‘집제는 이미 끊어졌다’고 아는 것이지만 무명과 같은 미혹이 남아 있어서 아직 모두 끊어진 것이 아니므로 방편이 되고, 멸제가 이미 현증되었다는 것과 도제가 이미 수습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변역생사에서의 멸제와 도제가 오히려 아직 현증되지 않았고 수습되지 않았으므로 방편이 된다고 해설한 것이다. 따라서 원효는 불완전한 열반이지만 붓다가 방편으로 완전한 것처럼 설한 것이라 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경문은 이것을 토대로 붓다에게 귀의한 후, 일체 사성제에 대해 철저하게 여실지견한다면 완전한 상주 열반을 얻을 것이고,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열반이 해탈의 맛으로서 동일한 맛[一味]이고 평등한 맛[等味]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주 열반을 성취할 때, 일체 제법을 얻고, 걸림 없이 일체 지견에 통달하고 일체 나쁜 허물에서 떠나고 일체 공덕을 얻는 자로서 여래는 “나의 태어남은 끝났고, 범행은 이미 세워졌으며, 지어야할 것은 이미 다했고, 후유를 받지 않는다”라고 궁극적 의미에서 사자후할 것이다.-김홍미]
[앞에서 아라한(聲聞)․벽지불(緣覺)의 열반과 부처님․여래의 대열반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성문․연각의 열반을 대열반과 대립적으로 생각한다면 성문․연각과 대승, 즉 불승(佛乘)이란 영원히 대립하는 것이 되어 성문, 연각이 불승에 귀일하는 장(場)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승만경은 아라한․벽지불의 열반은 대승의 대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일시적(假)인 열반이라고 본다. 즉 부처님의 대열반(大涅槃 : 般涅槃)에 도달하기 위한 휴식처이라 한다. 성문승, 연각승의 가르침에서는 저마다의 이상(理想)으로 하는 아라한과(阿羅漢果), 벽지불과(벽支佛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대승에서는 성문승도 연각승도 대승 속에 융합되고 귀일하는 것이다.
본경은 대승이란 즉 불승이라고 가르치고, 3승 즉 1승이므로 1승을 얻는 사람은 위없는(無上) 정각(正覺)을 얻는다. 그것이 곧 열반계(涅槃界)라고 설한다. 여래․부처님의 대열반은 「지혜로 말미암아 생사에 주(住)하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열반에 주한다.」였다. 큰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열반의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 낙에 머무는 일이 없고 항상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비원(悲願)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이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빛을 가진 상주(常住)의 법신(法身)인 것이다.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인 1승도(一乘道)를 설하는 까닭은 구경법신(究竟法身)을 증득하는 데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것 이외에 다른 1승법신(一乘法身)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법과 승가 이 두 가지에만 귀의하는 것은 완전한 귀의가 아닌 불완전한[有限] 귀의라고 했습니다.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어느 것에 귀일(歸一)하고 의지한다는 것, 즉 귀의(saran-gaetan)이다. 불교에서 부처님과의 만남은 자기 속에 있는 불성(佛性), 즉 여래장(如來藏)을 개발(開發)하는 것에 있으나 이 개발도 인생에 있어서 언제 어디인가는 저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이것을 「기(機)」라고 한다면 이 「기(機)」를 소중히 할 것이 중요하다. 불교입문(佛敎入門)의 첫 번째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諸佛)의 가르침은 「자연히(自) 그(其) 마음(意)이 정화(淨)해진다」라고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괴로워하며 「선(善)을 닦(修)고 악(惡)을 멈춰(止)라」고 하는 가르침에도 철저하지 못한 존재이다. 이 벽(壁)을 깨뜨리려고 할 경우, 무엇보다도 우선 오직 어느 것에 귀의한다는 지순(至純)한 마음을 양성(養成)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승만경』은 삼보 중의 불보(佛寶) 즉 여래(如來)․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을 파악하는 것이지만, 법(法)과 승(乘)에 대해서는 각각 1불승(一佛乘), 3승중(三乘衆)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이라고 설한다. 일승도(一乘道)의 교법(敎法)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법신(法身)을 증명하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하는 것이므로, 구경의 법신을 얻었으면 그 위에 다시 1승도의 교법을 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승중(三乘衆)은 근본번뇌(無明住地)를 끊지 못했으므로 공포(恐怖)를 갖는 것이며, 세존에 귀의함에 의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향해서 전진한다. 더욱이 1승 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라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에 의해서 교법인 법(法)과 3승중인 승(僧)에게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 귀의하는 것에 귀일(歸一)한다. 여래가 없으면 1승법(一乘法)도 3승중(三乘衆)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가령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욕망을 살펴서[隨] 교묘한 수단[方便]으로 법을 설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승(大乘)의 가르침일 뿐 방편으로서의 삼승(三乘)은 진실이 아닙니다. 즉 방편으로써 삼승을 설한 까닭은 결국 모든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일승(一乘)에로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일승이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제1의승(策一義乘)입니다.」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 ‘1승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 지금 이 『승만경(勝鬘經)』에서 훌륭하게 결실(結實)을 맺은 것을 알 수 있다.-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一乘 :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은 오직 하나, 그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이 된다는 가르침
승(乘)이란 타는 물건이란 뜻. 깨달음에 나가게 하는 수(數)를 말한다. 일승(一乘)이라 함은 불교의 참다운 교는 오직 하나로, 그 교에 의해서 모든 이가 고루 불타가 된다고 설(說)하는 교이며, 삼승(三乘)이라 함은, 중생의 성질이나 능력에 응해서,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에 고유한 3종의 깨달음의 길이 있는 것을 말함. 또 삼승(三乘)에는 일승(一乘)에 대해서 말하는 이외에, 또 3종의 교, 3종의 깨달음의 실천을 말하는 경우가 있어, 법장(法藏)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권1에는, 소승(小乘)ㆍ대승(大乘)ㆍ일승(一乘), 혹은 대승(大乘)ㆍ중승(中乘)ㆍ소승(小乘)의 3으로 하고, 대보적경(大寶積經) 권94에는, 보살은 천승(天乘, 초선(初禪) 내지 사선(四禪)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실천)ㆍ범승(梵乘, 자비선사(慈悲禪寺))ㆍ성승(聖乘, 팔성도(八聖道))의 3을 스스로 닦아 다른 이를 가르친다고 설함.
①일승(一乘)이란,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는, <유유일승법무이역무삼(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이라고 말하여, 이승이라든가 삼승이라고 하는 것은 일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화엄경 명난품(明難品)이나 승만경일승장에도 불타는 일승을 설(說)하고, 일승에 의해서 불타가 되는 것을 설함. 일승은 불승(佛乘)ㆍ일불승(一佛乘)ㆍ일승교(一乘敎)ㆍ일승구경교(一乘究竟敎)ㆍ일승법(一乘法)ㆍ일도(一道) 등이라고 하고, 일승의 교를 설하는 경을 일승의 묘전(妙典), 일승(一乘)의 교(敎)를 믿는 이를 일승의 기(機), 그 깊고 넓은 것을 바다에 비유해서 일승해(一乘海) 등으로 일컫고, 일승은 대승(大乘)의 최고의 교이기 때문에 일승극창(一乘極唱)이라고 한다. 삼승(三乘)이란 말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45를 비롯한 여러 경론(經論)에 보이고, 성문승(聲聞乘)을 소승(小乘)ㆍ하승(下乘)ㆍ연각승(緣覺乘)을 벽지불승ㆍ독각승(獨覺乘)ㆍ중승(中乘)ㆍ보살승(菩薩乘)을 대승(大乘)ㆍ불승(佛乘)ㆍ여래승(如來乘)ㆍ상승(上乘)이라고도 하고, 삼승(三乘)의 교(敎)를 삼승교(三乘敎)라고 한다.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이승(二乘)이라고 하고, 대승(大乘)을 전연 믿을 수 없는 이승을 우법(愚法)의 이승, 마음을 뒤집어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이승을 불우법(不愚法)의 이승이라고 한다.
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이승을 불우법(不愚法)의 이승이라고 한다
②아함경(阿含經)에는 삼승의 도를 얻을려고 하면 중(衆)중에 구하라고 하였고, 유부(有部) 등에서는 삼승의 구별은 인위(忍位)에 있어서 정(定)해지고,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은 각기 사체(四諦)ㆍ십이인연(十二因緣)ㆍ육도(六度)를 닦아서 해탈(解脫)하는데, 얻어지는 열반에 다른 바는 없다고 한다. 대승(大乘) 가운데, 법상종(法相宗)에 의하면, 중생은 처음부터 오성(五性)의 구별이 있고, 정성성문(定性聲聞), 정성연각(定性緣覺), 정성보살(定性菩薩)은 삼승교(三乘敎)에 의해서 각기의 과(果)를 깨닫고, 다만 불정성(不定性)인 자는 일승의 교(敎)를 받아서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일승교(一乘敎)는 부정성(不定性)인 자를 유인(誘引)하기 위한 불타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삼승진실(三乘眞實)ㆍ일승방편(一乘方便)의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 대해서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참다운 불교는 일승뿐이라고 하여 일승진실(一乘眞實) 삼승방편(三乘方便)의 입장을 취한다. 또 삼론종(三論宗)에서 삼승중의 보살승(菩薩乘)을 진실(眞實), 이승을 방편(方便)으로 하는데 천태종이나 화엄종에서는 삼승(三乘) 밖에 불승(佛乘)이 있다고 한다. 이 법상종(法相宗)이나 삼론종을 삼차가(三車家), 화엄종이나 천태종을 사차가(四車家)라고 하는데, 삼차(三車)ㆍ사차(四車)의 구별은 삼승과 일승의 관계를 법화경 비유품(譬喩品)의 화택내(火宅內) 양(羊)ㆍ록(鹿)ㆍ우(牛)의 삼차(三車)와 문외(門外) 대백우차(大白牛車)의 관계 해석에 관련시켜서 붙인 이름이다.
③화엄종에서는, 그 구극적(究極的)인 교(敎)인 일승원교(一乘圓敎)를 상대적 차별의 면과 절대적 평등(平等)의 면에서 동교(同敎)와 별교(別敎), 공교(共敎)와 불공교(不共敎), 방편승(方便乘)과 정승(正乘))의 2종 일승(一乘)으로 하고, 동별(同別)의 2를 나누면서, 동별무애라고 한다. 또 동교일승(同敎一秉)의 체(體)에 일승(一乘)ㆍ삼승(三乘) 등의 모든 승교(乘敎)가 있는 것을 분제승(分諸乘), 그것들의 모든 승교가 모두 일승(一乘)이라는 것을 융본말(融本末)이라고 한다. 오종(五種) 일승(一乘)이라 함은 별교일승(別敎一乘, 초월(超越)절대적인 일승(一乘). 화엄경ㆍ동교일승(同敎一乘, 삼승(三乘))에 공통하는 내재적(內在的)인 일승(一乘). 법화경ㆍ절상일승(絶相一乘, 사량(思量)을 넘어 직접으로 진리를 체현(體現)하는 일승유마경(一乘維摩輕)등 불성평등일승(佛性平等一乘), 평등일승(平等一乘))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어서 성불(成佛)한다고 하는 일승(一乘)ㆍ승만경(勝鬘經)ㆍ열반경(涅槃經) 등ㆍ밀의일승(密意一乘, 밀의의일승(密義意一乘))이라고도 한다. 삼승진실(三乘眞實) 일승방편(一乘方便)의 일승(一乘),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의 5로, 오교(五敎)에 맞춰보면 동별이교(同別二敎)는 원교(圖敎), 절상(絶相)은 돈교(頓敎), 평등(平等)은 종교(終敎), 밀의(密意)는 시교(始敎)가 된다. 삼종일승(三種一乘)이라 함은, 존삼(存三, 밀의일승(密意一乘)을 말함)ㆍ차삼(遮三, 법화경과 같이 삼승(三乘)을 폐차(廢遮)한다)ㆍ표체(表體, 화엄경과 같이 대보살의 일승을 직현(直顯)함)를 말한다.
④천태종(天台宗)에서는 법화경에 의거하여 법화일승(法華一乘)을 진실로 하는데, 이것을 교행인리(敎行人理)의 사일(四一, 곧 교(敎)도 수행도 수행자도 깨닫는 이치도 이 넷이 다 하나이다)로 해석한다. 지의의 법화현의(法華玄義) 권9 하(下)에는,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의 관계를 10의 면(面)에서 논(論)하고, 잠정적인 삼승(三僧) 등의 권(權, 방편(方便))을 부정(否定)하고 진실로 돌아오는 것(민권귀실(泯權歸實))을 설(說)하고, 특히 진상(實相)의 이(理)에 서서 삼승(三乘) 그대로가 일승(一乘)에 융합(融合)된다고 한다. 곧 법화일승(法華一乘)의 교(敎)를 설호에 따라서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이승이 불타가 될 (이승작불(二乘作佛)) 수 있다고 한다.
⑤ 진종(眞宗)에서는 서원일불승(誓願一佛乘)이라고 하여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돌아감에 의해서 모든 이가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여 불타가 된다고 하고, 자리(自利)만을 구하는 이승종(二乘種)도 그대로는 태어나지 못하는데(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 자력(自力)의 마음을 뒤집으면 다 같이 왕생하여 불타가 된다고 한다.- 보브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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