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如來菩提智所應斷 - 여래의 지혜라야 끊을 수 있는 무명주지 

 

世尊(세존) 於此起煩惱(어차기번뇌) 剎那心剎那相應(찰나심찰나상응)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일으킨 번뇌는(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마음이 찰나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世尊(세존) 心不相應無始無明住地(심불상응무시무명주지)

세존이시여, 心不相應=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입니다.

 

世尊(세존) 若復過於恒沙如來菩提智所應斷法(약부과어항사여래보리지소응단법)

세존이시여, 여래의 보리로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항하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더라도, 

一切皆是無明住地所持所建立(일체개시무명주지소지소건립)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 주지로 유지되는 것이며, 세워지는 것이니,

譬如一切種子皆依地生 建立增長(비여일체종자개의지생 건립증장)

비유하면, 마치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나서 건립하고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若地壞者彼亦隨壞(약지괴자피역수괴)

만약 땅이 무너지면 그 씨앗도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如是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여시과항사등여래보리지소응단법)

이와 같이 여래의 보리 지혜로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아도

一切皆依無明住地生建立增長(일체개의무명주지생건립증장)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나서 세워지고 자라는 것이므로

若無明住地斷者(약무명주지단자) 만일 무명주지가 끊어지면 

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과항사등여래보리지소응단법) 皆亦隨斷(개역수단)

여래의 지혜로 끊을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도 모두 따라 끊어지는 것입니다.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上煩惱斷(상번뇌단)

이와 같이 해서 모든 번뇌와 上煩惱=부수적 번뇌가 끊어지면, 

過恒沙等如來所得一切諸法(과항사등여래소득일체제법)

여래가 얻을 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법에 

通達無㝵一切知見(통달무애일체지견) 㝵 거리낄 애, 그칠 애,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고, 모든 지견이 

離一切過惡(이일체과악) 得一切功德(득일체공덕) 法王法主而得自在(법왕법주이득자재)

온갖 過惡=허물을 여의었으며, 모든 공덕을 얻었으며, 법의 왕이신 法主=법의 주재자로서 자재를 얻었으며 

登一切法自在之地(증일체법자재지지)

모든 법의 자재로운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如來應等正覺正師子吼(여래응등정각정사자후)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 사자후하시기를, 

‘我生已盡(아생이진) 梵行已立(범행이립) 所作已辦(소작이판) 不受後有(불수후유)

나의 일이 이제 끝났고, 梵行=청정한 행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지어 마쳤고, 뒤의 몸=後有을을 받지 아니한다(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 하셨으며,

是故世尊以師子吼依於了義(시고세존이사자후의어요의) 一向記說(일향기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자후로 올바른 이치를 의지하여 한결같이 설하셨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처음 미세한 단계에서 점점 거친 단계로 진행이 된다.
'기신론'에서는 이를 세 가지 미세한 단계와 여섯 가지 거친 단계인 3세(三細) 6추(六麤)의 9상차제(九相次第)로 설명하고 있다.
상응이란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어지는 대상인 객체가 분리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경우를 말하고,
불상응이란 주객의 나뉨이 없는 본래 깨닫지 못한 무명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불상응을 무명주지라 하였다.
또한 이 무명주지가 마치 대지가 온갖 식물의 종자를 싹트게 하여 자라게 하듯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가
무명주지에 의해 일어나 서게 되고 커지게 된다 하였다. 이 무명주지는 오직 여래의 지혜로야 만이 끊을 수 있다 하였다.
ㅡ지안스님]

 

[자기에 있어서의 일생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해 달라고 할 수 없는 거룩한 일생이다. 자기에 있어서의 살아가는 방법, 살아가는 의의는 그 사람에게 있어 둘도 없는 것이다. ‘소작이작(所作已作)’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을 음미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석존에게는 자기의 깨달음에 대한 완성과 일체 중생과 더불어 그 깨달음의 광요(光耀)에 비추어질 것을 원하여 그것이 원성(圓成)되는 곳에 할 일을 다 해 마쳤다라고 하는 실감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우리들은 여기서 석존 성도 직전의 모습을 불전(佛傳) 가운데서 잠시 되돌아보기로 한다.
석존이 성도직전 최후의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악마 나무치의 유혹이 있었다고 불전(佛傳)에 설하고 있다.
그 1절을 보면「네란쟈라(尼連禪) 강변에서 안온을 얻기 위해 정진하며 전심(專心)하고 노력하고 명상(暝想)하고 있는 나에게, 악마 나무치(namuci)는 위로의 말을 하며 나에게 가까이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야위어서 얼굴빛도 나쁘다. 당신의 죽음은 가깝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갈 가망은 천(千)에 하나의 비율이다. 그대여, 살아라, 사는 편이 좋다. 목숨이 있고서야 모든 선행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범행자(梵行者)로서의]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의 공물(供物)을 바쳐야만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고행에 정진한다고 도대체 무엇이 되겠는가』
세존은 악마 나무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안주(安住)하고 최대의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온갖 욕망을 되돌아보지는 않는다. 보라, 이 내 심신(心身)의 청정함을. 악마여, 너의 첫 번째의 군대는 욕망이며, 두 번째의 군대는 마음의 불만이며, 세 번째의 군대는 기갈(飢渴)이며, 네 번째의 군대 는 망집(妄執)이며, 다섯 번째의 군대는 수면(睡眠)이며, 여섯 번째의 군대는 공포(恐怖)이며, 일곱 번째의 군대는 의혹(疑惑)이며, 여덟 번째의 군대는 강정(强情)이다 』
악마 나무치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7년간이나 세존에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붙어 다녔다. 그러나 정각자(正覺者)에게 달라붙을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상은 원시불교 성전의 가장 오래된 위치에 있는 『숫타․니파타』중에 있는 이야기이다.
어느 불전(佛傳)의 자료에 의하면 악마는 또 3인의 여자를 보내어 수행 중의 석존을 유혹했다고 전하고 있다. 3인의 여자에 대해서는 각각 탄하(tanha; 渴愛) 아라티(arati; 不快) 라가(raga; 貪欲) 라고 보고 있다.(다른 경전에 의하면 은애(恩愛)․상락(常樂)․대락(大樂), 욕비(欲妃)․열피(悅彼)․쾌관(快觀), 염욕(染欲)․능열인(能悅人)․가애락(可愛樂),가애(可愛)․가희(可喜)․희견(喜見)이라고도 한다)
이 악마들 및 악마의 심부름꾼[使者]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볼 때, 탐욕․진에․우치라고 하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불선심(不善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수행중의 석존은 자기와의 싸움에 밤을 새운 것 같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의 악마를 항복시킨 석존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가을 하늘과 닮은 맑음과 광대한 자유를 쟁취했다고 볼 수 있다.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의 경지는 이미 그 이상의 해야할 수행도 없고 여래만이 갖는 열 가지의 자재력을 얻어 정법을 펴서 설하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작용은 인식기관이 대상과 교류하는 것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불교의 술어에서 말한다면 안근(眼根―여기서 근(根)은 감각기관을 말함)․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이라 하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각각 대응하는 색(色; 물건)․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六境)―경(境)이란 대상(對象)―과 대응에 의하여 인식이 시작된다. 간단히 말하면 식(識)과 명색(名色)―명은 명칭, 색은 형태―즉 온갖 것[개물(個物)]이라는 대상과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인식, 마음의 작용으로 마음이 그지없이 동요하는 것이므로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듯이 한 곳에 멈추지 않고 한 순간 한 찰나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높은 산에 올라가면,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매 발톱꽃이나, 단풍낙엽송 등의 고산식물을 보면 언뜻 기념으로 하고 꺾고 싶어진다. 그 반면에 고산식물을 채취해서는 안 된다는 자율성이 한편에서 머리를 쳐든다. 아름답다고 하는 마음의 작용에서 사람이 보지 않으면 꺾어들고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또 죄의식이 머리를 쳐든다. 아주 작은 한 송이의 식물을 본 것뿐이지만 이와 같은 격렬한 마음의 작용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단 한 송이의 화초라는 대상에 자극된 뿐인 대도 그것에 대응하여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한 순간 한 순간에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를 기(起)의 번뇌라 하며, 그것은 바로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주지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번뇌로 파악한다. 그것은 심왕과 심소가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근저에 있는 근본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근본무명을 끊지 않는 한, 지말(枝末)의 번뇌를 끊는다 해도 참으로 번뇌를 완전히 끊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반대로 근본무명을 끊을 수 있다면 여타의 일체의 번뇌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본무명은 오직 여래의 지혜만이 훌륭하게 끊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거기에 비로소 일체의 공덕을 갖춘 법왕이 될 수 있어 「아생이진(我生已盡), 범행이립(梵行已立), 소작이변(所作已弁), 불수후유(不受後有)」가 성립한다고 끝맺는다.
경문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의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지에 생육하고 있는 종자나 초(草)․목(木)은 모두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을 취하면서 저마다의 이름과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지라고 하는 지반(地盤)에 의존하여 생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만일 그 대지가 불에 타서 무너져 버리면 즉시 초․목도 불에 타서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물이 말라서 대지가 갈라지며 세찬 힘으로 대지를 파괴하여 가는 모습을 보며 혹은 기록영화에서 전쟁 중에 원자폭탄이 대지를 뿌리째 불태워 버린 기억을 지금도 선명히 가지고 있다. 초목이 다시 생육하려면 대지가 초목을 생육하기에 알맞은 토양을 회복(恢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기(起)의 번뇌는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무명이라는 번뇌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안다. 갠지스 강의 모래 수에 비교되는 여러 가지의 번뇌도 무명주지라고 하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생육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근본무명은 우리의 분별지(分別智)에 의해서 끊을 수는 없다. 오직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만이 끊을 수 있다. 그 끊어버린 세계에서 비로소 자재의 경지가 가능한 것이다.
불․세존이 '나의 미혹한 생(生)은 다하여 재차 고(苦)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것은 법왕(法王), 법의 자재자(自在者)가 된 부처님의 진실한 경지를 나타낸 것이며 거기에 여래의 설법의 진실성을 엿볼 수 있다.-혜경스님]


[일체 모든 번뇌는 이 무명주지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수도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상번뇌(上煩惱)도 무명주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일체의 고를 알고, 일체의 집을 끊고, 일체의 멸을 증득하고, 일체의 도를 닦았으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실천적인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청정하고 평등한 열반을 얻은 것으로 세상의 의지할 바가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진정한 열반의 맛인 한맛과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라 설한다.
승만부인은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응당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고 끝내지 못하였으니,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과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였고, 마땅히 증득하여야 할 것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수행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근본무명, 무명주지의 힘은 강력해서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로만이 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이 사바세계에서 과연 성불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교에서 누구나 깨칠 수 있다면서 성불을 강조하고 깨달음을 역설하지만 정작 아라한과 같은 선지식이나 벽지불, 대력보살마저도 성불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불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불은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성불의 인연 공덕을 쌓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은 공덕으로 성불하셨듯이 누구나 쉽게 성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1주일만 정진하면 깨칠 수 있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전생부터 닦아온 상근기의 사람이 1주일 동안 용맹정진해서 깨쳤다 하더라도 무명습기의 근본 무명을 모두 소멸한 경지인 성불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 <승만경>의 말씀이다.
우리가 갈 길은 어디인가. 물론 우리가 갈 길은 성불이다. 그 성불로 가기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한다. 낙수가 바위를 뚫듯이 지긋하게 하루하루 부지런히 수행해가면서 육바라밀의 보살행을 실천해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임종 후에는 극락세계에 나야 한다.
역대 선사나 선지식들께서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염하신 것도 극락에만 가 놓으면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고 악도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성불한다는 <아미타경>의 말씀에 의지하신 가르침이다. 극락에만 가면 하루 종일 착한 도반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며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구경에는 성불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을 지어야 하겠다. 나무아미타불! -혜총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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