或有衆生(혹유중생) 信佛語故(신불어고) 起常想樂想我想淨想(기상상낙상아상정상)
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까닭으로, 항상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非顚倒見(비전도견) 是名正見(시명정견) 何以故(하이고)
뒤바뀐 소견이 아니니, 이것을 올바른 소견(견해)이라 이름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중생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여래장을 의지해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 일체 부처님의 법신은 상주 불변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괴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는 지극히 즐겁다고 생각하며, 깨달아 얻어야 할 참된 자아를 확립하여 진정한 내〔我〕 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번뇌를 떠난 열반의 경지는 극히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결코 전도된 견해가 아닙니다.-혜경스님]
[이른바 열반 4덕(四德)이라는 常樂我淨, 영원하고, 즐겁고, 내가 있고, 청정한 덕은 부처님 법신을 말하는 것으로 법신을 이렇게 보고, 이렇게 이해할 때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불자의 정의를 이 장에서 다시 한 번 밝힌 것이다.-지안스님]
[멸성제(滅聖諦)에 갖추어진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열반 4덕(四德)을 모르고 오음(五陰)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을 하지만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뒤바뀐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혜총스님]
如來法身是常波羅蜜(여래법신시상바라밀) 樂波羅蜜我波羅蜜(낙바라밀아바라밀)
여래의 법신은 곧 常波羅蜜=항상한 바라밀이며,樂波羅蜜= 즐거운 바라밀이며, 我波羅蜜='나'라는 바라밀이며,
淨波羅蜜(정바라밀) 淨波羅蜜=깨끗한 바라밀인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수행을 완성하여 증득하신 여래 법신은 상주 불변하는 상(常)바라밀이며, 지극히 즐거운 낙(樂)바라밀이며, 진정한 자아가 있는 아(我)바라밀이며, 완전하게 청정한 정(淨)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바라밀로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 영원한 바라밀이라고 하였다. 바라밀이란 바라밀다를 줄인 말인데 완성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흔히 ‘저 언덕에 이른다’는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하는데, 모든 실천적인 수행 전부를 통칭하는 말이다. 〈반야심경주해〉에 설명하기를 “중생이 지혜에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것을 차안(此岸)이라 하며 보살이 반야를 닦아 지혜의 성품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열반에 도달한 경지를 피안(彼岸)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능가경주'에서는 번뇌를 조복하는 것이 바라밀이라고 했다.
또 바라밀을 수행의 지위와 관련해서 구분해 말하기도 한다. '유가론기'에 의하면 보살의 수행 지위와 관련시켜 아직 초지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냥 바라밀이라고 하고, 초지(初地)에서 7지(七地)까지를 근바라밀(近波羅蜜)이라 하며 8지(八地) 이상을 대바라밀(大波羅蜜)이라고 한다 하였다.]
於佛法身(어불법신) 作是見者是名正見(작시견자시명정견)
부처님의 법신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이름하며,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신을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합니다.]
正見者是佛眞子(정견자시불진자) 從佛口生(종불구생)
올바른 소견을 가진 이는 곧 부처님의 참된 아들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 났으며,
[이와 같이 여래 법신을 올바른 견해로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장래에 반드시 성불할 참다운 불자(佛子)라 합니다.]
從正法生(종정법생) 從法化生(종법화생) 得法餘財(득법여재)
올바른 가르침을 좇아 태어 났으며, 올바른 가르침의 교화=法火生을 좇아 태어 났으며, 불법의 가르침의 재산을 상속하는 까닭입니다.
[즉 참다운 불자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올바른 법을 따라 배워 번뇌에서 벗어난 새 사람이 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법을 따라 원력으로 화생(化生)하여 진리의 보배를 얻어 마침내 성불할 것입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에 설해져 있는 바이기도 한 “부처님 입에서 태어나고 부처님 법에서 교화되어 태어난다.”(從佛口生 從法化生)는 말이 강조되면서 출세간의 으뜸 중에서도 으뜸인 제일의가 괴로움이 없어진 멸제(滅諦)이니 여기에 의지하는 것이 법신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世尊(세존) 淨智者(정지자)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一切阿羅漢辟支佛(일체아라한벽지불) 智波羅蜜(지바라밀)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 바라밀이며,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는 일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 닦아야 할 지혜바라밀입니다.]
此淨智者(차정지자) 雖曰淨智(수왈정지) 於彼滅諦(어피멸제) 尚非境界(상비경계)
이 청정한 지혜는 비록 청정한 지혜라고는 하지만,, 저 괴로움이 멸한 진실한 법=滅諦에는 경계가 아닌데,(멸제라는 진리에 작용하지 못하거늘)
[아라한과 벽지불이 증득한 이 청정한 지혜도 부처님께서 증득한 멸제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況四依智(황사의지) 何以故(하이고) 三乘初業不愚於法(삼승초업불우어법)
하물며 네 가지 의지의 지혜=四依智에 작용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삼승을 처음 배우는 이는 법(뜻)에 어리석지 아니하며,
[그런데 누가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를 부처님께서 증득한 청정한 지혜라고 말하겠습니까?
於彼義當覺當得(어피의당각당득) 爲彼故世尊説四依(위피고세존설사의)
그 뜻을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四依=네 가지 의지할 바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누가 아라한과 벽지불이 증득한 지혜를 가지고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 의지해야 할 네 가지 올바른 지혜〔四依智〕라고 하겠습니까?한편 비록 성문․연각․보살인 3승의 초업(初業)이라도 법에 어리석지 않아 ‘여래장을 의지해 수행하면 청정한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이러한 이치를 마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3승들을 위해 사의지(四依智)를 설하셨습니다.]
世尊(세존) 此四依者(차사의자) 是世間法(시세간법)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의지한다는 것은 세간법이며,
[세존이시여, 이 사의지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 수행의 방편이므로 세간의 법입니다.]
世尊(세존) 一依者一切依止(일의자일체의지)
세존이시여, 一依=하나의 의지할 바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의지할 바이므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절대 진리인 멸제에 귀의하는 것은 일체의 진리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出世間上上第一義依(출세간상상제일의의) 所謂滅諦(소위멸제)
출세간의 상중 상의 제일의의 의지할 바이니, 이른바 곧 滅諦=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이 멸제야말로 출세간법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귀의하여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될 제일가는 의지처는 바로 멸제입니다.]
[범부의 변견(邊見)이 상견․단견이라는 치우친 견해를 갖기 쉬운데 대해 부처님의 참 아들이라는 것에 알맞은 정견(正見)이란, 어떠한 내용을 수반하고 있는가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 이 문단이다.
승만경은 이 변견과 정견에 대해 범부의 4전도(四顚倒), 네 가지 전도와 여래의 법신 열반의 4덕바라밀(四德波羅蜜)을 대치시키는 것에 의해 해설한다. 우리들 인간의 본성에는 어느 편협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사물의 참모습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때때로 선입관에 좌우되기 쉽다.
‘뱀(蛇)․새끼 줄(蠅)․삼(麻)의 비유(譬喩)’라는 비유가 불교를 비롯하여 인도 철학의 논서에도 보인다.
인간의 망상분별을 적절하게 표현한 비유이다. 즉 눈앞에 가로 누워있는 가느다란 것을 바라보고 뱀이라고 생각해 버린 사람이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고 알게 된다. 더욱이 그 새끼줄이 실은 삼(麻)을 꼰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하는 비유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은 때로는 망상에 휘감기기 쉽다. 그리고 이 망상이 이것저것으로 분별하여도 참모습을 확인하려 하지 않고 사물의 한 쪽 면만을 파악한다는 편견을 낳는다. 그 중에서 석존은 특히 일체법(一切法)에 대해 인간이 가지기 쉬운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 견해에 대해 설한다.
즉 자기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하며〔常〕, 인생은 고인데도 낙으로 생각하고〔樂〕, 무아이건만 아가 있다고 하며〔我〕, 이 세간은 부정한데도 청정하다〔淨〕고 하는 것이 범부의 견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 상․낙․아․정이라는 네 가지 견해는 특히 우리들 인간이 저마다의 신체에 대해서 계속 가지고 있는 망상분별이라고 가르친다.
석존의 가르침 중에서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의 5온(五蘊)에 대한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다. 아함경전 군(群) 가운데서 가장 교리적인 것이라고 하는 『잡아함경』에서 시작하여 대승경전 특히 반야심경에 이르기까지 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찌 보는가 라는 인간 중심의 불교였던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세존 재세 시대의 인도의 풍조로서 아(我) 및 세계가 상주하는가 아닌가 등의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토의되고 있었다고 문헌은 전한다. 석존은 이런 것들의 문제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의 고(苦)를 받고 있는 인간에게 어떤 문제해결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무기설(無記說)이라 하여 물리친 것은 유명하다. 석존에게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형이상의 문제에는 있지 않고 현실고(現實苦)를 받는 인간의 탐구이며 인간 존재의 본연의 자세였다.
따라서 ‘항상 변화를 계속하고 있는 무상한 인생이건만 상(常)하다고 생각하거나 괴로운 인간존재를 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전도된 견해이다’라고 함은 당연한 일이다. 석존이 처음 설법을 하겠다고 결의하기 직전에 범천(梵天)과의 대화가 있었다고 불전(佛傳)은 전하고 있는데, 그 대화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다.
“이 가르침은 세간 일반의 유행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미묘(微妙)하고 심심(甚深), 보기 어렵고, 또한 정세(精細)하기 때문에 탐내거나 진에(瞋恚)에 극복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세간 일반의 유행에 역행한다는 것은 연기(緣起)․무상․무아를 설한 붓다의 주장이 당시의 세계 상주론자(常住論者) 등의 주장에 역행한다는 뜻이라고 주석(註釋)은 이해하고 있다. 이 점에서 말하면 상․낙․아․정이라는 범부의 4전도(四顚倒)는 범부에 한하지 않고, 당시의 인도 일반의 사조(思潮)에 반해서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 입장에서 말하면, 석존이 가진 사상의 원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의 사상(事象) 전반에 걸쳐 무상․고․무아․정(不淨)으로 보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올바른 견해, 즉 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4부전도(四不顚倒)라고 한다.
이 4부전도에 의해 인간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안식(眼識)을 양성한다. 그것은 현실의 고뇌를 초월하기 위한 지침이 되는 것으로서 성문․연각은 이것을 불도수행의 대전제(大前提)로 삼은 것이다.
이 무상․고․무아․부정, 바꾸어 말하면 상․낙․아․정의 4전도를 초월한 가르침이 지금 『승만경』에서 법신열반(法身涅槃)의 4덕(四德)이라 하여 상․낙․아․정이 긍정된 것은 어떠한 이유에 의하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상․낙․아․정을 4전도라 하고 사부전도(四不顚倒)를 정견(正見)이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상․낙․아․정을 정견이라고 긍정한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여기에 우리들은 범부에게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가르침의 입장과 큰 이상(理想)을 실현한 여래의 측으로부터 보는 입장과의 두 가지의 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고찰해 보면,
『승만경』의 본문에 의하면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 상주 불변한다고 생각〔常想〕하고, 지극히 즐겁다고 생각하며〔樂想〕, 진정한 내가 있다고 생각〔我想〕하고, 극히 깨끗하다는 생각〔淨想〕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결코 전도된 견해가 아니〔非顚倒見〕고, 이를 정견(正見)이라 이름한다”라고 한다.
여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라고 하는 것은 상․낙․아․정을 설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상․낙․아․정이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상바라밀이며, 낙바라밀이며, 아바라밀이며, 정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신을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올바른 견해[正見]라 합니다.”
『승만경』에서의 정견, 즉 여래의 법신을 상․낙․아․정으로 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겠다.
붓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서 상․낙․아․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도(顚倒)라고 보며, 우선 중생에게 현실을 직시하여 무상․고․무아․부정이라고 가르쳤지만 붓다에 의하면 현실의 고뇌를 초월하기 위한 그러한 견해에서 그것을 초월하여 깨달음이라는 차원을 달리한 큰 이상〔大理想〕을 실현하고 있다.
그 이상을 실현한 세계에서는 상항(常恒), 최고의 낙(樂), 절대적인 자유로운 대아(大我), 청정계(淸淨界)가 보이는 것이며, 그 상항(常恒), 지락(至樂), 대아(大我), 순정(純淨)의 4덕(四德)이야 말로 법신열반(法身涅槃)에 갖추어진 네 가지의 성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에 갖추어진 4덕을 바르게 보는 사람은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이며,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났고, 정법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법의 나머지 재산〔餘財〕을 얻는 것이라고 경문은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위의 경문에 관해 『상응부』의 1경(一經)을 상기(想起)한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이 장(章)에서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대목은 네 가지 열반 4덕을 의지하는 것은 세간의 법이라 하여 출세간의 상상지(上上智)가 못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최후의 완성된 열반의 경지인 제일의(第一義) 멸제(滅諦)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다.
수행이 완성된 최후의 경지는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조사도 없다’는 말이 있다. 불견(佛見), 법견(法見), 조견(祖見)이 남아 있으면 아직 완성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가(禪家)에서 오히려 자주 해온 말이다. 어떤 관념적인 생각이 남아 있으면 이것이 상(相)이 되어 실제 부처와는 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말을 의지하지마는 이때는 의언진여(依言眞如)가 되어 이언진여(離言眞如)가 아니라는 것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네 가지를 의지하는 지혜’는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가르침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의요의경불의불요의경(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궁극적인 의미를 설한 말씀에 의지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설하지 않은 말씀에는 의지하지 말라는 사의지(四依智)입니다. 이는 처음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말씀하신 바이지만 이 네 가지 지혜마저도 세간법이라 궁극적으로 존재가 의지할 출세간 최상의 제일의는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멸성제라고 강조합니다.-혜총스님]
[사의(四依) 또는 사의지(四依智)
① 依法不依人=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음
존재의 참모습[實相]과 그 참모습에 따르는 일체의 선법을 모두 ‘진리[法]’라 하며 또 ‘진리의 현현[法身]’이라고도 한다. 만약 존재의 참모습인 진리[實相法身]를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을 닦으면, 온갖 실천과 공덕이 다 갖추어져 일체가 청정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므로 ‘진리에 의지함[依法]’이라 한다.
‘사람에 의지하지 않음[不依人]’이란, 사람은 색·수·상·행·식의 오음[五陰]이 어우러져서 이루어 진 것이며 모습이 갖추어진 몸을 거짓으로 이름한 것[假名]이니, 만약 이 ‘모습으로 이루어진 몸’을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모두 뒤틀린 모습[顚倒相]에 떨어져 마침내 존재의 참다운 모습[法身]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不依人]’고 한다.
비록 범부이더라도 설한 바와 행하는 바가 존재의 참모습에 상응하면 가히 의지하고 믿을 수 있으며, 비록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설한 바와 행하는 바가 존재의 참모습에 어긋나는 사람에게는 의지해선 안 된다.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랴.
첫 번째는 누구를 따르고 의지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위의 내용은 그것을 부연해 내용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의지할 바의 ‘법’이란 곧 존재의 실상(實相)이며 그것에 부합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모든 선법은 대체로 사람에 의하여 설해지는데,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두 실상에 부합하는지를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人]’이란, 본래 자신이 처해진 상황[色]에서 자신[我]과 자신의 것[我所]에 집착한 생각들[受想行識]의 연속으로 형성된 존재이어서, 상황에 따라 일관되지 못하거나 일시적이며 거짓되고 치우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의 모습에 의지하여 따라서는 안 된다고 설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범부라 할지라도 그 행동과 말이 항상 연기(緣起)와 중도(中道)의 이치에 부합한다면 가히 믿고 의지할 수 있지만, 비록 겉으로는 덕 높은 이의 모습을 갖추었더라도 그 말과 행동이 진리에 맞지 않는다면 결코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② 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바른 뜻을 담은 경전에 의지하고,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않음
‘바른 뜻의 경전에 의지함’이란, 일체의 대승과 방등 등 부처님의 가르침[十二部經]이 모두 중도(中道) 불성(佛性)과 실상(實相)의 있는 그대로의 이치[如如之理]를 밝혔으니, 만약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중도와 상응하여 능히 불성, 여래장의 이치를 보게 됨을 말한다.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위 성문이 행하는 바의 경전[九部] 가운데 중도·불성·여래장의 이치를 닦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곧 두 가지 치우침[二邊]에 떨어져 불성과 여래장의 이치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르지 못한 경전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둘째는 어떤 경전에 의지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바른 뜻의 경전[了義經]’으로서 대승의 십이부경을, ‘바르지 못한 경전[不了義經]’으로서 성문의 구부경을 들었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이란 부처님의 일대교설(敎說)을 그 경문의 성질과 형식으로 구분하여 12가지로 나눈 것으로, 계경(契經)ㆍ중송(重頌)ㆍ수기(授記)ㆍ고기송(孤起頌)·무문자설(無問自說)ㆍ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ㆍ방등(方等)ㆍ희유법(希有法)·논의(論議)를 말한다. 성문의 9부경이란, 앞의 12가지에서 방등·수기·무문자설을 뺀 아홉 가지이다.
결국 대승의 십이부경이 ‘요의경(了義經)’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교설이 다 바른 경전이라는 뜻이며, 그것을 ‘성문’의 시각으로 받아들여 9부경이 되면 ‘불요의경(不了義經)’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경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어떠한 경전이냐가 아니라 어떤 ‘시각’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문은 흔히 존재가 실재한다는 편견[有見]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유(有)나 무(無)와 같은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서는 결코 중도(中道) 불성(佛性)과 실상(實相)의 이치를 볼 수 없으므로 어떠한 경전을 보더라도 바른 깨달음의 결과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③依義不依語=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음
‘뜻[義]’이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니, 만약 이 중도실상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곧 모든 뒤바뀐 생각을 깨뜨려 마음 마음이 고요하여[心心寂滅] 자연히 한량없는 선정에 들어가니 ‘뜻에 의지함[依義]’이라 한다. ‘말[語]’이란 세간의 언어이니, 문자장구(文字章句)는 허황되고 진실하지 않으며 나아가 성문이나 연각이 보는 바의 진제(眞諦)·열반(涅槃) 또한 문자가 있다. 이러한 문자언어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는다면, 논쟁·언쟁·망상번뇌가 더욱 늘어나거나 성문이나 연각의 치우친 모습에 떨어져 대승의 크나큰 깨달음[大般涅槃]에 이르지 못하므로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不依語]’고 한다.
④依智不依識=지혜에 의지하고, 잘못된 인식에 의지하지 않음
‘지혜[智]’란 본질을 꿰뚫어 비추는 마음[照了之心]이다. 만약 바르게 관찰하는 지혜[正觀智慧]로 마음이 집착할 바 없게 돼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능히 일체 번뇌와 끝없는 생사의 업을 깨뜨리고 반드시 대승 열반의 상(常)·락(樂)·아(我)·정(淨)을 얻게 되므로 ‘지혜[智]에 의지한다’고 한다. ‘식(識)’이란 망상의 마음[妄想之心]을 말하니, 만약 이 잘못된 인식[妄識]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일체 번뇌와 생사에 얽매여 모든 고통들이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된 인식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금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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