或有衆生(혹유중생) 信佛語故(신불어고) 起常想樂想我想淨想(기상상낙상아상정상)

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까닭으로, 항상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 것은

非顚倒見(비전도견) 是名正見(시명정견) 何以故(하이고)

뒤바뀐 소견이 아니니, 이것을 올바른 소견(견해)이라 이름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중생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여래장을 의지해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 일체 부처님의 법신은 상주 불변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괴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는 지극히 즐겁다고 생각하며, 깨달아 얻어야 할 참된 자아를 확립하여 진정한 내〔我〕 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번뇌를 떠난 열반의 경지는 극히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결코 전도된 견해가 아닙니다.-혜경스님]

[이른바 열반 4덕(四德)이라는 常樂我淨, 영원하고, 즐겁고, 내가 있고, 청정한 덕은 부처님 법신을 말하는 것으로 법신을 이렇게 보고, 이렇게 이해할 때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다. 불자의 정의를 이 장에서 다시 한 번 밝힌 것이다.-지안스님]

 

[멸성제(滅聖諦)에 갖추어진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열반 4덕(四德)을 모르고 오음(五陰)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을 하지만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뒤바뀐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혜총스님]

 

如來法身是常波羅蜜(여래법신시상바라밀) 樂波羅蜜我波羅蜜(낙바라밀아바라밀)

여래의 법신은  常波羅蜜=항상한 바라밀이며,樂波羅蜜= 즐거운 바라밀이며, 我波羅蜜='나'라는 바라밀이며, 

淨波羅蜜(정바라밀) 淨波羅蜜=깨끗한 바라밀인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수행을 완성하여 증득하신 여래 법신은 상주 불변하는 상(常)바라밀이며, 지극히 즐거운 낙(樂)바라밀이며, 진정한 자아가 있는 아(我)바라밀이며, 완전하게 청정한 정(淨)바라밀이기 때문입니다.]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바라밀로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 영원한 바라밀이라고 하였다. 바라밀이란 바라밀다를 줄인 말인데 완성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흔히 ‘저 언덕에 이른다’는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하는데, 모든 실천적인 수행 전부를 통칭하는 말이다. 〈반야심경주해〉에 설명하기를 “중생이 지혜에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것을 차안(此岸)이라 하며 보살이 반야를 닦아 지혜의 성품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열반에 도달한 경지를 피안(彼岸)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능가경주'에서는 번뇌를 조복하는 것이 바라밀이라고 했다.
또 바라밀을 수행의 지위와 관련해서 구분해 말하기도 한다. '유가론기'에 의하면 보살의 수행 지위와 관련시켜 아직 초지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냥 바라밀이라고 하고, 초지(初地)에서 7지(七地)까지를 근바라밀(近波羅蜜)이라 하며 8지(八地) 이상을 대바라밀(大波羅蜜)이라고 한다 하였다.]

 

於佛法身(어불법신) 作是見者是名正見(작시견자시명정견)

부처님의 법신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이름하며,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신을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 합니다.]

正見者是佛眞子(정견자시불진자) 從佛口生(종불구생)

올바른 소견을 가진 이는 곧 부처님의 참된 아들이라 하나니,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 났으며, 

[이와 같이 여래 법신을 올바른 견해로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장래에 반드시 성불할 참다운 불자(佛子)라 합니다.]

從正法生(종정법생) 從法化生(종법화생) 得法餘財(득법여재)

올바른 가르침을 좇아 태어 났으며, 올바른 가르침의 교화=法火生을 좇아 태어 났으며, 불법의 가르침의 재산을 상속하는 까닭입니다.

[즉 참다운 불자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올바른 법을 따라 배워 번뇌에서 벗어난 새 사람이 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법을 따라 원력으로 화생(化生)하여 진리의 보배를 얻어 마침내 성불할 것입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에 설해져 있는 바이기도 한 “부처님 입에서 태어나고 부처님 법에서 교화되어 태어난다.”(從佛口生 從法化生)는 말이 강조되면서 출세간의 으뜸 중에서도 으뜸인 제일의가 괴로움이 없어진 멸제(滅諦)이니 여기에 의지하는 것이 법신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世尊(세존) 淨智者(정지자)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一切阿羅漢辟支佛(일체아라한벽지불) 智波羅蜜(지바라밀)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 바라밀이며,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는 일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 닦아야 할 지혜바라밀입니다.]

此淨智者(차정지자) 雖曰淨智(수왈정지) 於彼滅諦(어피멸제) 尚非境界(상비경계)

 청정한 지혜는 비록 청정한 지혜라고는 하지만,,  괴로움이 멸한 진실한 법=滅諦에는 경계가 아닌데,(멸제라는 진리에 작용하지 못하거늘) 

[아라한과 벽지불이 증득한 이 청정한 지혜도 부처님께서 증득한 멸제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況四依智(황사의지) 何以故(하이고) 三乘初業不愚於法(삼승초업불우어법)

하물며 네 가지 의지의 지혜=四依智에 작용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삼승을 처음 배우는 이는 법(뜻)에 어리석지 아니하며, 

[그런데 누가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를 부처님께서 증득한 청정한 지혜라고 말하겠습니까? 

於彼義當覺當得(어피의당각당득) 爲彼故世尊説四依(위피고세존설사의)

그 뜻을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四依=네 가지 의지할 바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누가 아라한과 벽지불이 증득한 지혜를 가지고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 의지해야 할 네 가지 올바른 지혜〔四依智〕라고 하겠습니까?한편 비록 성문․연각․보살인 3승의 초업(初業)이라도 법에 어리석지 않아 ‘여래장을 의지해 수행하면 청정한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이러한 이치를 마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3승들을 위해 사의지(四依智)를 설하셨습니다.]

世尊(세존) 此四依者(차사의자) 是世間法(시세간법)

세존이시여,   가지 의지한다는 것은 세간법이며, 

[세존이시여, 이 사의지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 수행의 방편이므로 세간의 법입니다.]

世尊(세존) 一依者一切依止(일의자일체의지)

세존이시여, 一依=하나의 의지할 바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의지할 바이므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절대 진리인 멸제에 귀의하는 것은 일체의 진리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出世間上上第一義依(출세간상상제일의의) 所謂滅諦(소위멸제)

출세간의 상중 상의 제일의의 의지할 바이니, 이른바  滅諦=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이 멸제야말로 출세간법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귀의하여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될 제일가는 의지처는 바로 멸제입니다.]

 

[범부의 변견(邊見)이 상견․단견이라는 치우친 견해를 갖기 쉬운데 대해 부처님의 참 아들이라는 것에 알맞은 정견(正見)이란, 어떠한 내용을 수반하고 있는가를 밝히려고 하는 것이 이 문단이다.
승만경은 이 변견과 정견에 대해 범부의 4전도(四顚倒), 네 가지 전도와 여래의 법신 열반의 4덕바라밀(四德波羅蜜)을 대치시키는 것에 의해 해설한다. 우리들 인간의 본성에는 어느 편협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사물의 참모습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때때로 선입관에 좌우되기 쉽다.
‘뱀(蛇)․새끼 줄(蠅)․삼(麻)의 비유(譬喩)’라는 비유가 불교를 비롯하여 인도 철학의 논서에도 보인다.
인간의 망상분별을 적절하게 표현한 비유이다. 즉 눈앞에 가로 누워있는 가느다란 것을 바라보고 뱀이라고 생각해 버린 사람이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고 알게 된다. 더욱이 그 새끼줄이 실은 삼(麻)을 꼰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라고 하는 비유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은 때로는 망상에 휘감기기 쉽다. 그리고 이 망상이 이것저것으로 분별하여도 참모습을 확인하려 하지 않고 사물의 한 쪽 면만을 파악한다는 편견을 낳는다. 그 중에서 석존은 특히 일체법(一切法)에 대해 인간이 가지기 쉬운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 견해에 대해 설한다.
즉 자기와 세계가 영원히 존재하며〔常〕, 인생은 고인데도 낙으로 생각하고〔樂〕, 무아이건만 아가 있다고 하며〔我〕, 이 세간은 부정한데도 청정하다〔淨〕고 하는 것이 범부의 견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 상․낙․아․정이라는 네 가지 견해는 특히 우리들 인간이 저마다의 신체에 대해서 계속 가지고 있는 망상분별이라고 가르친다.
석존의 가르침 중에서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의 5온(五蘊)에 대한 것이 가장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다. 아함경전 군(群) 가운데서 가장 교리적인 것이라고 하는 『잡아함경』에서 시작하여 대승경전 특히 반야심경에 이르기까지 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찌 보는가 라는 인간 중심의 불교였던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세존 재세 시대의 인도의 풍조로서 아(我) 및 세계가 상주하는가 아닌가 등의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토의되고 있었다고 문헌은 전한다. 석존은 이런 것들의 문제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의 고(苦)를 받고 있는 인간에게 어떤 문제해결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무기설(無記說)이라 하여 물리친 것은 유명하다. 석존에게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형이상의 문제에는 있지 않고 현실고(現實苦)를 받는 인간의 탐구이며 인간 존재의 본연의 자세였다.
따라서 ‘항상 변화를 계속하고 있는 무상한 인생이건만 상(常)하다고 생각하거나 괴로운 인간존재를 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전도된 견해이다’라고 함은 당연한 일이다. 석존이 처음 설법을 하겠다고 결의하기 직전에 범천(梵天)과의 대화가 있었다고 불전(佛傳)은 전하고 있는데, 그 대화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다.
“이 가르침은 세간 일반의 유행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미묘(微妙)하고 심심(甚深), 보기 어렵고, 또한 정세(精細)하기 때문에 탐내거나 진에(瞋恚)에 극복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세간 일반의 유행에 역행한다는 것은 연기(緣起)․무상․무아를 설한 붓다의 주장이 당시의 세계 상주론자(常住論者) 등의 주장에 역행한다는 뜻이라고 주석(註釋)은 이해하고 있다. 이 점에서 말하면 상․낙․아․정이라는 범부의 4전도(四顚倒)는 범부에 한하지 않고, 당시의 인도 일반의 사조(思潮)에 반해서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 입장에서 말하면, 석존이 가진 사상의 원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의 사상(事象) 전반에 걸쳐 무상․고․무아․정(不淨)으로 보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올바른 견해, 즉 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4부전도(四不顚倒)라고 한다.
이 4부전도에 의해 인간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안식(眼識)을 양성한다. 그것은 현실의 고뇌를 초월하기 위한 지침이 되는 것으로서 성문․연각은 이것을 불도수행의 대전제(大前提)로 삼은 것이다.
이 무상․고․무아․부정, 바꾸어 말하면 상․낙․아․정의 4전도를 초월한 가르침이 지금 『승만경』에서 법신열반(法身涅槃)의 4덕(四德)이라 하여 상․낙․아․정이 긍정된 것은 어떠한 이유에 의하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상․낙․아․정을 4전도라 하고 사부전도(四不顚倒)를 정견(正見)이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상․낙․아․정을 정견이라고 긍정한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여기에 우리들은 범부에게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가르침의 입장과 큰 이상(理想)을 실현한 여래의 측으로부터 보는 입장과의 두 가지의 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고찰해 보면,
『승만경』의 본문에 의하면 “만약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 상주 불변한다고 생각〔常想〕하고, 지극히 즐겁다고 생각하며〔樂想〕, 진정한 내가 있다고 생각〔我想〕하고, 극히 깨끗하다는 생각〔淨想〕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결코 전도된 견해가 아니〔非顚倒見〕고, 이를 정견(正見)이라 이름한다”라고 한다.
여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기에’라고 하는 것은 상․낙․아․정을 설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상․낙․아․정이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상바라밀이며, 낙바라밀이며, 아바라밀이며, 정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신을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올바른 견해[正見]라 합니다.”

『승만경』에서의 정견, 즉 여래의 법신을 상․낙․아․정으로 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겠다.
붓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서 상․낙․아․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도(顚倒)라고 보며, 우선 중생에게 현실을 직시하여 무상․고․무아․부정이라고 가르쳤지만 붓다에 의하면 현실의 고뇌를 초월하기 위한 그러한 견해에서 그것을 초월하여 깨달음이라는 차원을 달리한 큰 이상〔大理想〕을 실현하고 있다.
그 이상을 실현한 세계에서는 상항(常恒), 최고의 낙(樂), 절대적인 자유로운 대아(大我), 청정계(淸淨界)가 보이는 것이며, 그 상항(常恒), 지락(至樂), 대아(大我), 순정(純淨)의 4덕(四德)이야 말로 법신열반(法身涅槃)에 갖추어진 네 가지의 성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에 갖추어진 4덕을 바르게 보는 사람은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이며,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났고, 정법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법의 나머지 재산〔餘財〕을 얻는 것이라고 경문은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위의 경문에 관해 『상응부』의 1경(一經)을 상기(想起)한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이 장(章)에서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대목은 네 가지 열반 4덕을 의지하는 것은 세간의 법이라 하여 출세간의 상상지(上上智)가 못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최후의 완성된 열반의 경지인 제일의(第一義) 멸제(滅諦)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다.

수행이 완성된 최후의 경지는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조사도 없다’는 말이 있다. 불견(佛見), 법견(法見), 조견(祖見)이 남아 있으면 아직 완성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가(禪家)에서 오히려 자주 해온 말이다. 어떤 관념적인 생각이 남아 있으면 이것이 상(相)이 되어 실제 부처와는 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말을 의지하지마는 이때는 의언진여(依言眞如)가 되어 이언진여(離言眞如)가 아니라는 것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네 가지를 의지하는 지혜’는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가르침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의지불의식(依智不依識),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의요의경불의불요의경(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궁극적인 의미를 설한 말씀에 의지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설하지 않은 말씀에는 의지하지 말라는 사의지(四依智)입니다. 이는 처음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말씀하신 바이지만 이 네 가지 지혜마저도 세간법이라 궁극적으로 존재가 의지할 출세간 최상의 제일의는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멸성제라고 강조합니다.-혜총스님]

 

[사의(四依) 또는 사의지(四依智)

依法不依人=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음

존재의 참모습[實相]과 그 참모습에 따르는 일체의 선법을 모두 ‘진리[法]’라 하며 또 ‘진리의 현현[法身]’이라고도 한다. 만약 존재의 참모습인 진리[實相法身]를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을 닦으면, 온갖 실천과 공덕이 다 갖추어져 일체가 청정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므로 ‘진리에 의지함[依法]’이라 한다.
‘사람에 의지하지 않음[不依人]’이란, 사람은 색·수·상·행·식의 오음[五陰]이 어우러져서 이루어 진 것이며 모습이 갖추어진 몸을 거짓으로 이름한 것[假名]이니, 만약 이 ‘모습으로 이루어진 몸’을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모두 뒤틀린 모습[顚倒相]에 떨어져 마침내 존재의 참다운 모습[法身]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不依人]’고 한다.
비록 범부이더라도 설한 바와 행하는 바가 존재의 참모습에 상응하면 가히 의지하고 믿을 수 있으며, 비록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설한 바와 행하는 바가 존재의 참모습에 어긋나는 사람에게는 의지해선 안 된다.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랴.
첫 번째는 누구를 따르고 의지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위의 내용은 그것을 부연해 내용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의지할 바의 ‘법’이란 곧 존재의 실상(實相)이며 그것에 부합하는 모든 선법(善法)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모든 선법은 대체로 사람에 의하여 설해지는데,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두 실상에 부합하는지를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人]’이란, 본래 자신이 처해진 상황[色]에서 자신[我]과 자신의 것[我所]에 집착한 생각들[受想行識]의 연속으로 형성된 존재이어서, 상황에 따라 일관되지 못하거나 일시적이며 거짓되고 치우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결코 ‘사람’의 모습에 의지하여 따라서는 안 된다고 설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범부라 할지라도 그 행동과 말이 항상 연기(緣起)와 중도(中道)의 이치에 부합한다면 가히 믿고 의지할 수 있지만, 비록 겉으로는 덕 높은 이의 모습을 갖추었더라도 그 말과 행동이 진리에 맞지 않는다면 결코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바른 뜻을 담은 경전에 의지하고,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않음

‘바른 뜻의 경전에 의지함’이란, 일체의 대승과 방등 등 부처님의 가르침[十二部經]이 모두 중도(中道) 불성(佛性)과 실상(實相)의 있는 그대로의 이치[如如之理]를 밝혔으니, 만약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중도와 상응하여 능히 불성, 여래장의 이치를 보게 됨을 말한다.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위 성문이 행하는 바의 경전[九部] 가운데 중도·불성·여래장의 이치를 닦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곧 두 가지 치우침[二邊]에 떨어져 불성과 여래장의 이치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르지 못한 경전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둘째는 어떤 경전에 의지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바른 뜻의 경전[了義經]’으로서 대승의 십이부경을, ‘바르지 못한 경전[不了義經]’으로서 성문의 구부경을 들었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이란 부처님의 일대교설(敎說)을 그 경문의 성질과 형식으로 구분하여 12가지로 나눈 것으로, 계경(契經)ㆍ중송(重頌)ㆍ수기(授記)ㆍ고기송(孤起頌)·무문자설(無問自說)ㆍ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ㆍ방등(方等)ㆍ희유법(希有法)·논의(論議)를 말한다. 성문의 9부경이란, 앞의 12가지에서 방등·수기·무문자설을 뺀 아홉 가지이다.
결국 대승의 십이부경이 ‘요의경(了義經)’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교설이 다 바른 경전이라는 뜻이며, 그것을 ‘성문’의 시각으로 받아들여 9부경이 되면 ‘불요의경(不了義經)’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경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어떠한 경전이냐가 아니라 어떤 ‘시각’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문은 흔히 존재가 실재한다는 편견[有見]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처럼 유(有)나 무(無)와 같은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서는 결코 중도(中道) 불성(佛性)과 실상(實相)의 이치를 볼 수 없으므로 어떠한 경전을 보더라도 바른 깨달음의 결과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依義不依語=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음

‘뜻[義]’이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니, 만약 이 중도실상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곧 모든 뒤바뀐 생각을 깨뜨려 마음 마음이 고요하여[心心寂滅] 자연히 한량없는 선정에 들어가니 ‘뜻에 의지함[依義]’이라 한다. ‘말[語]’이란 세간의 언어이니, 문자장구(文字章句)는 허황되고 진실하지 않으며 나아가 성문이나 연각이 보는 바의 진제(眞諦)·열반(涅槃) 또한 문자가 있다. 이러한 문자언어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는다면, 논쟁·언쟁·망상번뇌가 더욱 늘어나거나 성문이나 연각의 치우친 모습에 떨어져 대승의 크나큰 깨달음[大般涅槃]에 이르지 못하므로 ‘말에 의지하지 않는다[不依語]’고 한다.

④依智不依識=지혜에 의지하고, 잘못된 인식에 의지하지 않음

‘지혜[智]’란 본질을 꿰뚫어 비추는 마음[照了之心]이다. 만약 바르게 관찰하는 지혜[正觀智慧]로 마음이 집착할 바 없게 돼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능히 일체 번뇌와 끝없는 생사의 업을 깨뜨리고 반드시 대승 열반의 상(常)·락(樂)·아(我)·정(淨)을 얻게 되므로 ‘지혜[智]에 의지한다’고 한다. ‘식(識)’이란 망상의 마음[妄想之心]을 말하니, 만약 이 잘못된 인식[妄識]에 의지하여 모든 바라밀과 온갖 실천 공덕을 닦으면 일체 번뇌와 생사에 얽매여 모든 고통들이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된 인식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금강신문]

12. 顚倒眞實 - 뒤바뀐 법과 진실한 법

顚倒眞實章第十二(전도진실장제십이)

 

不思議是滅諦(불사의시멸제) 過一切衆生心識所緣(과일체중생심식소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諦이니, 온갖 중생들의 心識所緣=마음으로 반연할 바를 뛰어넘었으며, 

[반연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하여 알아지는 대상이 아닌, 이른바 능소(能所)의 관계로 주객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떤 인식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유무(有無)를 판단하고 시비(是非)의 장(場)을 생각 속에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안스님]

亦非一切(비일체) 阿羅漢辟支佛智慧境界(아라한벽지불지혜경계)

또한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들의 지혜로도 헤아릴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譬如生盲不見衆色(비여생맹불견중색) 七日嬰兒不見日輪(칠일영아불견일륜) 嬰 갓난아이 영,  

비유하면, 마치  때부터의 소경=生盲 갖가지의 빛깔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태어난 지 7일되는 아기 해를 보지 못하는 것같으니,

苦滅諦者(고멸제자) 亦復如是(역부여시) 고가 멸한 진실한 법=苦滅諦 역시 그와 같아서 

非一切凡夫心識所緣(비일체범부심식소연) 亦非二乘智慧境界(역비이승지혜경계)

온갖 범부들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의 지혜로 헤아릴 경계도 아닙니다.(이승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경계도 아닙니다.)

 

[열반에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는 것처럼 멸제(滅諦)에도 미완의 멸(滅)과 완전한 멸(滅)이 있다고 승만경에서 말한다. 고(苦)가 완전히 없어진 진실한 고멸제(苦滅諦)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혜로도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했다. 눈을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범부들은 마음으로 멸제를 반연하기가 어렵다고 비유를 들어 말했다.]  

 

[범부들이 멸성제(苦滅諦)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뒤바뀐 소견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고가 멸한 진실한 법(苦滅諦)이 있는데 장님이 날 때부터 빛깔을 보지 못하고 갓난아기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뒤바뀐 소견 때문에 고(苦)가 멸한 진실한 법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凡夫識者二見顚倒(범부식자이견전도)

범부의 마음(심식)은 뒤바뀐=顚倒된  가지 소견=二見(극단적인 견해)이요, 

一切阿羅漢辟支佛智者(일체아라한벽지불지자) 則是淸淨(즉시청정)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는 곧 청정한 것이니,

邊見者(변견자) 凡夫於五受陰(범부어오수음)

치우친 견해=邊見이라는 것은, 범부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受陰에 대하여 

我見妄想計著生二見(아견망상계착생이견) 著 드러날 저, 저축할 저, 붙일 착,

我見= 나라는 妄想=허망한 소견으로 고집하여  가지 소견을 내는 것을 말함이며, 

是名邊見(시명변견) 所謂常見斷見(소위상견단견)

邊見=치우친 견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 단견 그것입니다. 

 

[변집견(邊執見, 산스크리트어: anta-grāha-dṛṣṭi, 팔리어: anta-ggāhikā, 영어: extreme views, extreme view)은 단(斷)과 상(常)의 두 극단[邊]에 집착하는 견해, 즉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말한다. 줄여서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며, 2가지 변견이라는 뜻에서 2변(二邊)이라고도 하며, 변견(邊見)을 번역하여 극단적인 견해라고도 하고 2변(二邊)을 번역하여 두 극단이라고도 한다.

단견(斷見)=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단견(斷見)은 윤회가 존재하며 무위법인 열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단견(斷見)은 단멸된다는 극단 또는 단멸된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단변(斷邊)이라고도 한다.

즉 우리의 생이 금생(今生)으로 끝이고, 우리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을 모두 부정(不定)하는 견해(見解).
상견(常見)=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상견(常見)에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상견(常見)은 유위법을 무위법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이다. 상견(常見)은 영원하다는 극단 또는 영원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상변(常邊)이라고도 한다. 즉
단견(斷見)과 달리, 나라는 존재(存在)가 항시(恒時)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見解).]

 

見諸行無常(견제행무상) 是斷見非正見(시단견비정견)

모든 변천하는 법=諸行 항상함이 없는=無常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단견으로 바른 소견=正見이 아니며, 

見涅槃常(견열반상) 是常見非正見(시상견비정견)

涅槃常=열반이 항상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으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니, 

妄想見故(망상견고) 作如是見(작여시견)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탓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인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모습=,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 바깥세상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상상하는 마음=,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의지=, 분별하는 의식=의 다섯 가지가 화합하여 모인 오수음(五陰=五蘊)에 대하여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을 가져 그릇된 견해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승만부인은 불교의 수행에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빠짐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기 때문에 허망하고, 허망하기 때문에 멸성제(滅聖諦)를 터득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범부, 우리들은 곧잘 이념적 성향에 빠져 변견(邊見)에 떨어져, 자기 생각이 우월하다는 자만에 빠진다.여기에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상반된 견해가 나온다. 단견이란 없다고 부정하는 무(無)에 집착된 소견이요, 상견은 있다고 긍정 일변도의 유(有)에 집착하는 소견이다. 중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때로는 유를 말하기도 하고 무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부득이한 방편일 뿐 궁극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상(斷常) 이견(二見) 둘 다 편견(偏見)을 이루어 중도를 상실한다고 한다. 단견이나 상견에 빠지는 것을 불법 밖의 외도, 불법(佛法)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외도(外道)란 말이다.

외도도 세 종류가 있어 불법(佛法) 밖의 외도가 있고, 불법에 기생하는 외도(附佛法外道)가 있고, 불법을 배우면서도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학불법외도(學佛法外道)가 있다 하였다.
불법의 근본 대의가 중도(中道)다. 사성제(四聖諦)나 연기법이 결국 중도의 대의를 천명한 교리이다. 유무(有無)의 견해나 일이(一異)의 견해를 다 같이 뛰어넘어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일비이(非一非異), 나아가 다시 이를 뛰어넘는 비비유비비무(非非有非非無)에 이른다. 이를 중현(重玄)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사구절백비(離四句節百非)’라는 말과 비슷하다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사구(四句)가 미치지 못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일(一), 이(異)는 단원론(單元論)과 다원론(多元論)이다. 중도가 언어도단의 경지이고 깨달음이 바로 중도(中道)라는 말이다. 승만경에서 말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멸(滅)이 곧 중도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난 배경에는 부파불교의 사변적 논리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수온(受陰)은 오온(五蘊)을 말하는 것으로 5가지 망상이 성립하여 중생이 과보받는 것을 총괄하여 수(受)라 하여 오수음(五受陰)이라 한 것이다. 때로는 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이 이 다섯 가지를 취하여 자신의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능엄경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아난아, 이 오수음은 5가지 망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음이 망상으로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망상이 번뇌이므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이 된 경지가 승만경의 멸성제이다.-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현대불교신문]

 

[단견과 상견은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견해, 변견(邊見)입니다. 부처님은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의 바른 길을 설하셨습니다. 중도(中道)는 중정(中正)의 도(道)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중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생각은 고여서 썩게 되고, 뚫을 수 없는 벽이 됩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각을 가두지 않아야 되는데 유(有)에 치우치고, 공(空)에 치우치면 우주의 실상(實相)이나 부처님의 법계(法界)와는 멀어집니다.
단견은 우주의 모든 존재, 만유(萬有)는 무상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공무(空無)에 돌아가 다시 뒷세상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입니다. 또 상견은 사람은 죽지만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하여 그치거나 끊어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양극단의 변견에 떨어지면 중도(中道)와 멀어집니다. 유무(有無)의 한쪽에 치우쳐 고집하기 때문에 범부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멸성제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인 아라한, 벽지불의 청정한 지혜라는 것도 모든 앎의 경계와 여래(如來)의 법신에 대하여는 본래 보지 못한 바이기에 최상승의 경계인 멸성제를 헤아릴 경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멸성제(滅聖諦)에 갖추어진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열반 4덕(四德)을 모르고 오음(五陰)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을 하지만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뒤바뀐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於身諸根分別思惟(어신제근분별사유) 現法見壞(현법견괴)

이 몸의 諸根=여러 감각 기관에 대하여 분별하여 사유=생각하되, 現法=현재의 존재가 부서짐만을 보아

於有相續不見(어유상속불견) 起於斷見(기어단견) 妄想見故(망상견고)

윤회 생존의 계속함=有相續을 보지 못하므로 단견을 일으키나니, 그것은 망상으로 보는 탓이며

於心相續愚闇(어심상속우암) 不解不知(불해불지)

마음의 상속에 대하여서는 캄캄하여 이해하거나 알지 못하고,  

刹那間意識境界起於常見(찰나간의식영계기어상견) 妄想見故(망상견고)

찰나(잠깐) 사이의 의식 작용(경계)를 알지 못하므로 상견을 일으키는 것이니,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탓입니다.

此妄想見於彼義(차망상견어피의)

이렇게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것이   뜻에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若過若不及作異想分別(약과약불급작이상분별) 若斷若常(약단약상)
異想=잘못된 생각으로 분별하거나, 
斷=끊어졌다고 하거나, 常=영원하다고 생각하여서

顚倒衆生(전도중생) 於五受陰(어오수음) 無常常想(무상상상)

전도된 중생들은 오수음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苦有樂想(고유낙상) 無我我想(무아아상) 不淨淨想(부정정상)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나라고  것이 없는=無我를 나라고 생각하며, 부정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一切阿羅漢辟支佛淨智者(일체아라한벽지불정지자) 모든 아라한, 벽지불들의 청정한 지혜를 가진 이도 

於一切知境界及如來法身(어일체지경게급여래법신) 本所不見(본소불견)

일체지(一切知)의 경계와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서는 본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세 가지로 말하는 삼지설(三智說)이 있다. 이 삼지설은 경론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 일체지(一切智)와 도종지(道種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 세 가지를 말한다.

사람에 따라 시력 차이가 있는 것처럼 수행의 정도에 따라 지혜 도수(度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체지는 일체법의 총상(總相)을 아는 지혜로 그림을 그릴 때 전체의 구도를 잡는 것과 같은 지혜를 말한다. 번뇌가 현저히 줄어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이 실감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의 지혜는 성문과 연각 곧 이승(二乘)들의 지혜라고 한다.

도종지는 일체법의 개별적인 도법을 아는 지혜로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 쓰는 지혜라 한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도의 종류와 그 차이를 두루 아는 지혜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얻는 지혜라고 하기도 한다.

일체종지는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다 같이 통달한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그런데 때로는 일체지를 일체종지로 같이 써서 부처님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사찰에서 새벽예불 시, 행선축원(行禪祝願)에 ‘구경원성살바야(究竟願成薩婆若)’라는 송구가 있다. “구경에 살바야를 이루기 원하옵니다”라는 말인데 이 살바야(薩婆若)라는 말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는 말이다. 범어 어원은 사르바즈나(sarvajna)인데 번역하면 일체지 혹은 일체종지이다. 불교는 진리에 대한 무지를 고통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지혜가 강조된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등장한 경전이 반야부 경전이다. 반야(般若)라는 말이 경전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반야의 지혜를 내세운 것이 대승불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승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으로 등장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이다. 물론 육바라밀 전체를 아울러서 보살의 수행덕목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이를 대승의 수행자로 보았다. 반야바라밀이 육바라밀의 마지막에 나오는 바라밀이지만 반야바라밀이 보시나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을 떠받치고 있는 바라밀이다. 선종의 선수행에도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육조단경에 설해진 혜능 대사의 법문을 혜능 자신이 직접 반야바라밀다 법문이라고 밝힌 말도 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마하를 붙여 마하반야바라밀이라 하기에 이르렀고 부처님을 ‘마하대법왕’이라 하였다. 이른바 부처를 심왕(心王)으로 보고 한 말이다. 이런 4구송도 있다.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마하대법왕은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네
본래비조백(本來非遁白) 본래 검거나 희지도 않으면서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곳을 따라 푸르고 노란 색을 나타내도다
승만경의 내용을 여래장사상이라고 요약해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마하반야바라밀법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문이 지혜를 종(宗)으로 하는 반야법문이기 때문이다. 반야가 바로 깨달음의 실상을 보여주는 최고의 지혜이고, 도(道) 그 자체요, 부처 그 자체다. “어떤 이치도 아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는 것을 반야라 한다”고 하였다.- 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현대불교신문]

10. 一諦 - 한가지 진실한 법

一諦章第十

 

世尊(세존) 此四聖諦(차사성제) 三是無常一是常(삼시무상일시상)

세존이시여, 이러한 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의 세가지(고제, 집제, 도제)는 무상하고 그 하나(멸제)는 항상(영원)한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三諦入有爲相(삼제입유위상)

왜냐하면, 三諦=세 가지 진리(고제, 집제, 도제)有爲=함이 있는 相=현실(모양)에 포함되는 것이니

入有爲相者是無常(입유위상자시무상)

유위의 모양(생멸인연)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無常=항상함이 없는 것이요,

無常者是虛妄法(무상자시허망법) 무상한 것은 곧 허망한 법이며,

虛妄法者(허망법자) 非諦非常非依(비제비상비의)

허망한 법은 진실한 것이 아닌=非諦이며, 항상한 것이 아닌=非常이며, 의지할 데가 아닌=非依이니,

是故苦諦集諦道諦(시고고제집제도제) 非第一義諦非常非依(비제일의제비상비의)

그러므로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 第一義諦=제일의의 진리 아니며, 항상한 것이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성제 가운데 무상(無常) 유상(有常)으로 각 제(諦)의 성격을 밝힌 대목이다.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는 항상함이 없는 것이고 멸제(滅諦)만이 항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멸제(滅諦)를 제외한 3성제(三聖諦)는 유위의 모습이라 하여 최후의 궁극적인 진리(第一義諦)가 아니니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정제의 설명과 다르게 각 제(諦)의 성격을 분석하여 유위의 모습과 무위의 모습으로 나눈 특징이 보인다.
사성제는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불교의 인생관이나 생활관을 사성제를 통하여 제시했다고 볼 수 있는 법문이다. 특히 불교의 시작이 고(苦)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고제(苦諦)의 인식이 중요하다.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 5비구를 위하여 처음 설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의 모든 수행관이 이 사성제로부터 나온 것이다. 〈화엄경〉 안에도 ‘사성제품’이 있다. 특이한 점은 〈화엄경〉의 ‘사성제품’에서는 세계마다 다른 사성제의 이름을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사바세계를 비롯하여 밀훈세계(密訓世界), 최승세계, 이구세계, 풍일세계 등 시방으로 전개되는 10세계마다 10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다고 소개한다. 고(苦)를 죄라고 부르는 이름도 있고 가시(刺)라고 부르는 이름도 있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현실을 고통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며,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고(苦)에는 싫어하는 감정과 공허하다는 느낌의 두 가지 뜻이 포함된다고 한다. 사정제의 마지막 ‘멸(滅)’이 이른바 소멸인 멸인데 이것이 열반이다. 그러니까 고(苦)는 열반의 반대말이 된다. 열반에서 얻어지는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전부 고(苦)인 것이다. 경론에 따라서 고(苦)의 설명이 차이가 있다. 보통 4고(四苦), 8고(八苦)로 고의 종류를 설명하지만 18고설(十八苦說)도 있으며 〈유가사지론〉에서는 110가지의 고를 나열하고 있다. “모든 것은 고(苦)다(一切皆苦)”를 삼법인(三法印)에 넣기도 한다.
이러한 고(苦)의 개념이 대승불교에 와서는 무자성(無自性)이나 공(空)이라는 말이 나와 고(苦)도 공한 것이고 자체 성품이 없는 것이라 고정적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여 고(苦) 속에도 낙(樂)이 있고 번뇌 속에도 깨달음이 있다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기반으로 하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유위의 모양’이란 생멸인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멸제를 제외한 앞의 삼제(三諦)는 유위이고 멸제(滅諦)만 무위라는 말이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간을 따라 생멸변화를 갖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고 그렇지 않는 것을 무위(無爲)라 한다. 허공이나 열반 등을 무위법이라 한다. 무위법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떠나 있는 것이다. 〈승만경〉의 이 대목의 주장은 멸제(滅諦)만이 무위라는 것이다. 대승의 수행이나 선종의 수행에서도 무위심을 강조하였다. 조작하는 마음이 아닌 함이 없는 마음에서 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경〉의 ‘무주상’ 법문처럼 상(相)이 없는 수행이 이루어져 모든 집착을 떠나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해야 도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위에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을 본분의 작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무위의 마음이라 했다. 어떤 격식을 넘어선 일상의 모습을 수행과 연결 지어 말할 때 일반적으로 써온 말이 무위심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사성제(四聖諦, 산 catvāri āryasatyāni) 또는 사제(四諦).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4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의 자내증(自內證)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면, 사제설은 이 인연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설을 고안하였다. 그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생사과(生死果) ①고제(苦諦)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苦)는 구체적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8고로 하고 있다. 애별리고와 원증회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고뇌의 원인이 된다. 특히 자기 중심적인 애증(愛憎)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뇌는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구부득고는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앞의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들이다. 오온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것으로, 오온(五蘊 : 一切法)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생사인(生死因) ②집제(集諦)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그러나 갈애는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무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이것도 자기 중심적인 욕구이며, 천국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무유애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무유애라 하는데, 무유애 또한 자기 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갈애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열반과(涅槃果) ③ 멸제(滅諦)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④ 도제(道諦)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으로서 원시불교의 근본교의를 이루고 있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집·멸·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인 십사무기(十事無記)는 사성제와는 달리 지혜(智) · 깨달음(覺)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1. 一依 - 하나의 의지할 것

一依章第十一

 

一苦滅諦(일고멸제) 離有爲相(이유위상) 離有爲相者是常(이유위상자시상)

一苦滅諦=고가 멸하는  가지 진실한  유위=함이 있는 모양을 여읜것이니, 유위의 모양을 여읜 것은 항상한 것이며, 

常者非虛妄法(상자비처망법) 항상한 것은 허망한 법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며)

非虛妄法者(비처망법자) 是諦是常是依(시제시상시의)

허망한 것이 아닌 법은  진실한 것=諦이며, 항상한 것=常이며, 의지할 곳=依가 되는 것이니, 

是故滅諦(시고멸제) 是第一義(시제일의)

그러므로 고가 멸하는 滅諦=진실한  제일의의 진리입니다.

 

[사정세(四聖諦)가 곧 멸성제(滅聖諦)를 증득하기 위해 설해진 교리이다. 때문에 가장 으뜸가는 궁극적인 최후의 진리(第一義)를 멸성제(滅聖諦)라고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대목에서 궁극적인 최후의 진리인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하고 있다. 유위의 현상이 아닌 일체의 괴로움이 없어진 멸성제가 열반이요, 해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이것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가지가지 법이 설해지는 것이다.
멸(滅)은 범어 비나사(vinasa)를 어원으로 한 말로 생(生) 또는 기(起)의 반대말이다. 이 ‘멸’을 일반적으로 단멸(斷滅)과 찰나멸(刹那滅)의 두 가지로 이해한다. 단멸은 한 번 생겼다가 완전히 소멸하여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을 말하고, 찰나멸은 생겼다 없어지고 생겼다 없어지는 것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생멸현상(生滅現像)으로 볼 때의 생멸, 즉 유위법(有爲法)이라 말한다. 유위법은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가지 과정을 말하며 또한 유위사상(有爲四相)이라 하며, 이 유위사상을 본문에 ‘유위의 모습’이라 한 것이다. 하나의 법이 생길 때 반드시 유위의 사상(四相)이 함께하는 것이다. 생겨날 때 이미 소멸된 것을 예약해 놓는다는 뜻이다. 또 멸(滅)은 무상을 뜻하는 말로 무상의 원리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말이다. 그러나 생멸의 멸(滅)은 멸성제(滅聖諦)의 ‘멸(滅)’이 아니고 멸도(滅度)의 멸이요, 적멸(寂滅)의 멸이다. 이 멸은 부처님의 열반을 뜻하는 것이다. 〈승만경〉의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승(一乘)이나 불승(佛乘)과 같은 말로 권(權)을 모아 실(實)에 들어간(會權入實) 구경을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 사구게(四句偈)에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고요한 모습이다. 불자가 도를 행하고 나면 내세에 부처가 되리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라고 하였다. 또 〈열반경〉 사구게(四句偈)에서도 이렇게 밝혔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생겨났다 없어지는 법이라 생멸(生滅)이 없어지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두 경의 사구게가 모두 적멸의 멸을 경전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바로 불교의 핵심이 멸에 있으며, 멸이 열반이라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지고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경지, 이것이 수행이 지향하는 최후의 목적지며 최고의 이상(理想)이라는 것이다.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수타니파타(Sutta-nipatta)〉에는 열반을 갈애와 욕망의 소멸, 집착의 소멸이라 하고 죽음이 없는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잡아함경〉에는 “열반이 무엇인가? 탐욕이 영원히 사라지고 진에도 영원히 사라지고 우치도 영원히 사라져 모든 번뇌가 영원히 사라진 경지를 열반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소승경전에서는 기존의 도식처럼 번뇌가 사라진 것을 열반이라고 강조하고 대승경론에서는 모든 상(相)이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입능가경〉에서는 법을 보되 마음에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라 했다.
이렇듯 열반은 불교의 경론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기도 했다. 중론(中論) 등에서는 “실상이 열반이다”하여 인연으로 발생하는 모든 법 곧 연기법의 공성(空性)을 열반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열반경〉에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고 열반이 그대로 생사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반에는 상(常), 항(恒), 안(安), 청정(淸淨), 불로(不老), 불사(不死), 무구(無垢), 쾌락(快樂) 등 여덟 가지 맛이 있다 하였다. 이를 열반팔미(涅槃八味)라고 부른다. 이는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의 열반사덕(涅槃四德)을 늘여 말해 놓은 것이다.-지안스님]

9. 空義隱覆眞實 - 공한 여래장과 공하지 않는 여래장

空義隱覆眞實章第九

 

世尊(세존) 如來藏智是如來空智(여래장지시여래공지)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지혜는 여래의 공한 지혜입니다.

[여래의 지혜는 바로 여래의 공한 지혜’→ 번뇌가 완전히 공해진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무명주지가 남아 있지 않은 여래장을 말한다.-지안스님]

 

[여래장(如來藏)은 범어 tathagata-garbha의 번역으로 모든 중생의 번뇌 속에 내재해 있는 본래 청정한 여래의 법신(法身)을 말하는데, 모든 부처님이 증득한 청정법신의 체이기도 합니다. 여래장은 번뇌 속에 있어도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고 절대 청정하며 영원히 변함없는 깨달음의 본성입니다.
<보성론(寶性論)>에서는 여래장을 세 가지로 풀이합니다. “여래의 법신(法身)이 중생에 널리 차 있다. 중생은 여래와 마찬가지로 진여(眞如)를 본성으로 한다. 중생은 장래 여래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인(因)을 가지고 있다.”
이 여래장에는 번뇌를 초월하여 번뇌와 서로 응하지 않는-번뇌장을 여의었거나 벗어났거나 달라진-공여래장과 진여의 자체에 온갖 덕이 구족하여 무슨 덕이나 갖추지 못한 것이 없고 무슨 법이나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일체법을 갖추어서 번뇌(煩惱)와 불리불탈불이(不離不脫不異, 여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아니한)하는 불공(不空)여래장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혜총스님]

 

世尊(세존) 如來藏者(여래장자) 一切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일체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력 보살들로서는 

本所不見本所不得(본소불견본소불득)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며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世尊(세존) 有二種如來藏空智(유이종여래장공지)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사오니,

世尊(세존) 空如來藏(공여래장) 若離若脫若異一切煩惱藏(약리약탈약이일체번뇌장)

세존이시여,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온갖 번뇌장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며,

[空如來藏=眞空, 不空如來藏= 妙有]

世尊(세존) 不空如來藏(불공여래장) 過於恒沙(과어항사)

세존이시여,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항하 강의 모래보다 많은 

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불리불탈불이불사의불법)

여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아니한 부사의한 불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여래장(空如來藏) ① 여래장이란 진여(眞如)의 다른 이름. 진여는 공적(空寂)이고, 일체의 더러움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함. ② 부처님께서 깨달은 영원상주의 진리. 번뇌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며, 여래의 무량공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함.]

 

世尊(세존) 此二空智(차이공지) 諸大聲聞能信如來(제대성문능신여래)

세존이시여, 이러한  가지 공한 지혜로 모든  성문들은 능히 여래를 믿거니와, 

一切阿羅漢辟支佛空智(일체아라한벽지물공지) 於四不顚倒境界轉(어사불전도경계전)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공한 지혜는 네 가지 뒤바뀌지 아니한 경계에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是故一切阿羅漢辟支佛(시고일체아라한벽지불) 本所不見本所不得(본소불견본소불득)

그러므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은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고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공한 지혜가 네 가지 뒤바뀌지 아니한 경계에서 움직이는 것” → 네 가지 전도, 곧 열반의 네 가지 덕(德)인 상(常), 낙(樂), 아(我), 정(淨)에 대하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중생의 현실을 부정하고 열반을 구하려는 편협한 소견을 두고 한 말이다. 즉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 ]

 

一切苦滅唯佛得證(일체고멸유불득증) 壞一切煩惱藏(괴일체번뇌장) 修一切滅苦道(수일체멸고도)

모든 괴로움의 소멸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아 얻는 것이며, 모든 번뇌장을 깨뜨리고 온갖 고를 멸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공여래장(空如來藏)은 증득(證得)할 바의 진리(眞理)이고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은 능히 증득(證得)한 진지(眞智)라. 진리(眞理)를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말함은 진리(眞理)가 상(相)이 끊어진 것이 마치 큰 허공(虛空)과 같아서 탁 트여 조그만 티끌도(섬예纖翳) 없는 까닭이고, 참 지혜(진지眞智)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 하는 것은 참다운 지혜(智慧)가 이치를 비추는 것이 마치 저 빛나는 태양(太陽)과 같아서 허공(虛空)에 환하게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것을 장(藏)이라 말하는 것은 그 장藏[갈무리 되어 있는]이 물건 됨이 속이 텅 비기도 하고 꽉 차기도 하니 속이 빈 까닭에 가히 허공(虛空)에 비유하고 또한 꽉 차있는 까닭에 불공(不空)에 비유한 것이다. 

이제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한 것은 대개 공(空)이다, 불공(不空)이다 하는 공장(空藏)과는 다르니 조사(祖師)의 관문(關門)을 부수는 것으로서 대상을 삼는 연고니라. 사물을 쌓아두고 봉하여 드러나지 않음을 장(藏)이라 한다. 팔식(八識)의 장藏이 자성여래(自性如來)를 숨겨 덮고 있는 까닭에 이름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함이다.-염화미소]

 

[여래장의 지혜를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공하고, 공하지 않는 것이 실은 하나이다. 예를 들면, 빈 병이 하나 있으면 병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없다는 뜻에서 “병이 비었다”할 때 이는 공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 비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병 속에 넣을 수 있다” 할 때는 비어 있는 자체가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는 뜻에서는 “공한 것이 공하지 않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공과 불공의 두 가지 측면이 똑같이 빈 병 하나에 동시에 있는 것이다. 여래장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 공과 불공으로 설명된 것이다.
원래 공(空)이란 말은 범어 순야(舜若, sunya)를 번역한 말로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어 불변의 속성이나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곧잘 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말로 이 ‘공’이라는 말을 써 왔다. 특히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먼저 공관(空觀)을 닦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공의 이치를 터득해야 반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공이 무상(無常)과도 연결되어 설명되는 경우도 있다. 〈대품반야경〉에 “무상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무상이다.(無常卽是空 空卽是無常)”는 말이 나와 있다. 〈반야심경〉에도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여 공을 통하여 지혜를 완성한다고 하였다. 승만 부인의 말 가운데 ‘

불교의 여러 종파마다 공의 이치를 천명하고 공관을 닦을 것을 권장해 왔다. 그러나 자칫 공에 치우쳐 공견(空見)에 빠지면 이것이 병이 되어 수행을 그르친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공병(空病)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공견을 가지거나 공병에 빠지면 인과(因果)를 부정하게 되고 나아가 중도를 등지게 된다. 그래서 공하다는 것도 공하다는 뜻으로 공공(空空)이라는 말이 나왔고 〈금강경〉의 대의를 밝히는 말에 나온 것처럼 아공(我空), 법공(法空) 다음에 구공(俱空)이라는 말을 썼다. 아공이나 법공 그 자체도 공하다는 것이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은 〈원각경소〉에서 “공에 대하여 공이라는 견해를 빠지면 전도가 된다. 공에 집착하지 않아야 실법(實法)이다”고 하였다. 또 공의 참뜻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온 말이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정한 공 속에는 미묘한 것이 갖춰져 있다는 말이다. 〈승만경〉의 공여래장은 진공이고 불공여래장은 묘유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대승지관법문'에서 남악존자는 “여래장(如來藏) 자체가 평등하여 진실로 상대적인 차별이 없는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한다. 그러나 이 여래장의 자체에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작용이 갖추어져 있고, 또한 일체 모든 법의 성품(性品)을 갖추고 있어 현상세계의 인연을 따라 각각 차별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이 없는 가운데 차별이 벌어지는 의미이다”라고 했습니다.
남악존자의 이러한 견해는 공(空)과 불공(不空), 공함과 공하지 않은 것은 하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텅 빈 독이 하나 있으면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고 비어 있으므로 공(空)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독에는 쌀도, 된장도, 물도, 돈도 다 넣을 수 있다는 뜻에서는 ‘공하되 공하지 않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울은 비추는 성품이 있기에 크고 작은 것, 잘나고 못난 것, 형형색색의 물상(物像)들을 모두 비추지만 그 물상들은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아무 물건도 없을 때는 거울은 텅 비어 있는 허공과 같은 성품을 지니지만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물상과 상응할 때는 모두를 비춤에 평등합니다. 여기서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의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과 불공여래장은 하나의 여래장이지만 공여래장은 모든 부처님이 증득(證得)하신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체(體)이기에 우리가 깨달아야 하고 증득할 목표 그 자체요, 불공여래장은 우리들이 보리심(菩提心)을 지니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여 드러내어야 할 우리의 본래 성품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번뇌(煩惱)는 본래 허망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空)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뇌와 서로 응하지 않는 공여래장이 여래의 법신(法身)입니다. 그러나 여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번뇌를 여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아니하는 청정한 법과 상응하는 덕성을 지니기 때문에 불공(不空)입니다.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을 의지하여 생사(生死)가 전개되지만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즐겨 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합장하고 “성불합시다” 하고 인사를 하듯이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성불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수행도 성불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여래장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혜총스님]

[여래장(如來藏)-tathagata-garbha ➀ 여래의 태(胎)라는 뜻으로 중생을 그 존재 가능성 전체에서 파악한 표현인 동시에 구조적으로는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로 부처님과 같지 않은, 범부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래(부처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중생 속에 있는 여래가 될 만한 요인.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청정한 가능성을 가진 것. 만유(萬有)의 제상(諸相)이 성립하는 근원이라 생각되었다.

勝鬘經의 여래장(如來藏)에 세가지 의미 (1) 여래의 절대신(絶對身)(산, dharma-kaya)은 모든 생류(生類)에 널리 존재하고 있다는 뜻. (2) 진실성(산, tathata 진여(眞如)인 여래는 무차별한 총체라는 뜻. (3) 모든 생류(生類)중에는 여래의 배종(胚種)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 

➂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 ➃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머물러 있는 깨달음의 성질.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여래의 종자. 여래장(如來藏)은 여래가 중생의 마음을 갖고 있음. 중생의 마음이 여래를 가지고 있음. 여래의 제덕(諸德)을 중생심(衆生心)이 갖고 있다는 것을 세종류로 해석하며, 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하고, 재전위(在纏位)의 법신(法身)이라 한다. ➄ 중국 불교 일반의 견해로서는 여래종자가 번뇌 때문에 가려져 있는 상태. 재전위(在纏位)의 법신(法身). 부처님이 우리중에 숨겨져 있는 것.

<五敎章> <四敎儀註 上本> ➅ 여래장(如來藏)은 번뇌속에 숨겨져 존재하고 있으나 그것이 노출되어 모습을 나타낸 바를 가리켜 법신(法身)이라 부른다. 여래장(如來藏)은 법신(法身)이고 법신(法身)은 여래장(如來藏)이라 하여 양자의 상즉(相卽)을 명확히 하고 또 여래장(如來藏)을 관찰하는 지혜를 불공(不空 : 如來藏智), 법신(法身)을 관찰하는 지혜를 공(空 : 如來空智)이라 부르고 있음. 그런데 번뇌의 미혹 중에 있는 범부인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와 함께 하는 여래장의 체득이 당면과제임. 왜냐하면 우리는 윤회하는 미혹의 범부이기 때문임.「승만경」에 있어서는「생사는 여래장에 의한다. 여래장(如來藏)이 있어 생사를 설한다」고 서술되어 있음. 미혹과 깨달음이 각각의 것이 아니며, 깨달음이 우리에 있어서의 것이므로 미혹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미혹이 있으므로 깨달음이 있다는 것임. 우리안에 여래가 있고, 또 여래안에 우리가 있다라는 두 가지 역(逆)의 의의가 있음.]

8. 제 8장 법신(法身)

法身章第八

 

若於無量煩惱藏所纏(약어무량번뇌장소전) 如來藏不疑惑者(여래장불의혹자) 纏 얽힐 전,  

만약 한량없는 煩惱藏=번뇌의 더미에 얽매여 있는 여래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於出無量煩惱藏(어출무량번뇌장) 法身亦無疑惑(법신역무의혹)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서 벗어난 법신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於說如來藏(어설여래장) 如來法身(여래법신) 不思議佛境界及方便說(불사의불경계급방편설)

여래장과 여래의 법신을 말한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와 방편으로 설한 것에 대하여 

心得決定者(심득결정자) 此則信解說二聖諦(차즉신해설이성제)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곧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함을 信解=믿고 이해할 것입니다.

 

如是難知難解者(여시난지난해자) 謂說二聖諦義(위설이성제의)

이렇게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 까닭이니,

何等爲說二聖諦義(하등위설이성제의)? 어떤 것이  가지 성제의 뜻을 말한 것인가?

謂說作聖諦義(위설작성제의) 說無作聖諦義(설무작성제의)

이른바 有作=지음이 있는 聖諦=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과 無作=지음이 없는 聖諦=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유작(有作)은 무명번뇌가 쌓인 채로 생멸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하기 때문에 불완전하지만 무작(無作)은 그 반대로 생멸이 사라진 경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전합니다. 이렇게 승만부인이 성문이나 연각의 이승이 갖는 사성제(四聖諦)와 부처님, 불승(佛乘)의 경계에서의 사성제를 다르게 설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는 사성제는 소승의 사성제와 다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의 입장에서 보는 소승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무명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경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라는 진리를 알기는 하지만 사성제를 알아 작위적으로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나아가더라도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문과 연각은 생사를 초월했다고 하지만 유위유작(有爲有作)의 분단생사를 넘은 것일 뿐 단지 사성제의 진리를 보기는 했지만 깨달음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혜총스님,불교신문] 

 

說作聖諦義者(설작성제의자) 是說有量四聖諦(시설유량사성제) 何以故(하이고)?

지음이 있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은 곧 유한한 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非因他能知一切苦斷(비인타능지일체고단) 一切集證(일체집증) 一切滅修(일체멸수)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능히 모든 苦=괴로움을 알며, 모든 괴로움의 集=원인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滅=소멸을 증득하려고, 

一切道(일체도) 是故世尊(시고세존)

온갖 道=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有有爲生死(유유위생사) 無爲生死(무위생사) 涅槃亦如是(열반역여시) 有餘及無餘(유여급무여)

有爲=함이 있는 생사와 無爲=함이 없는 생사가 있으며, 열반 역시 이와 같아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있습니다.

 

[사성제를 작성제(作聖諦)와 무작성제(無作聖諦)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작(作)은 작위(作爲)로, 의도적으로 애를 써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인위적인 마음이다. 반면에 무작(無作)은 무작위(無作爲)로, 말하자면 인위적 의도를 가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순수성이 그대로 완전하게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지음이 있고 지음이 없는 것을 구분해 말하는 것은 이승의 사성제와 대승의 사성제를 다르다고 보는 견해에 의해서이다.
〈법화경〉을 깊이 연구한 천태 지의(538~597)는 〈법화현의〉에서 네 가지 사제를 세워 생멸사제, 무생멸사제, 무량사제, 무작사제로 나누기도 했다. 이 중 무작사제에 대해서는 대승의 보살이 제법을 관찰할 때에는 사사(事事)가 이(理)에 즉(卽)하여 있기 때문에 조작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을 무작이라 한다 하였다. 작(作)은 중도에 대한 미혹이 남아 있어 이(理)에 어두워 보리가 번뇌가 되고 열반이 생사가 되는 것이 고제(苦諦)이지만, 이를 통달하고 보면 번뇌가 곧 보리가 되는 것이 도제(道諦)이고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이 멸제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사(事事)가 중도가 되므로 조작하는 것이 없으므로 무작이라 한다고 설명하였다. 원래 ‘무작’이라는 말은 어떤 작용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또 분별 조작이 없어 자연 그대로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때로는 무위(無爲)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유마경〉에는 이렇게 말했다.
“법은 공을 거스르지 않고 무상(無相)에 따르며 무작(無作)에 응한다. 법은 아름답거나 추한 분별을 떠나고, 법은 증가하거나 감손되는 차별을 떠나며, 법에는 생성과 소멸이 없고 법은 돌아가는 곳도 없다. 법은 육근(六根)으로 포착되지 않으며, 법에는 높거나 낮은 차별이 없다. 법은 항상 머물며 움직이지 않으며 법은 모든 관행(觀行)을 여의었다.” 하였다.
생사를 말하면서도 유위의 생사와 무위의 생사를 말했는데, 마음에 생멸이 남아 식심(識心)이 완전히 끊어지지 못한 것은 유위며, 생멸이 사라져 식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무위다. 유루업(有漏業)으로 말미암아 수동적으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유위생사이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원력을 세움으로써 능동적으로 생사에 머무는 보살의 변역생사를 무위생사라 한다. 부처님이 이승을 위한 작성제와 대승보살을 위한 무작성제를 각각 설하여 여덟 가지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밝히고 있는 대목이 〈승만경〉 사성제 설명의 특징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4성제의 법문에 대해서 (1) 성문․연각의 2승이 갖는 4성제관(四聖諦觀)과 (2) 부처님․여래의 4성제관을 설한다. 앞의 것을 〔유(有)〕 작(作), 유량(有量)의 4제라 하고, 뒤의 것을 무작(無作), 무량(無量)의 4제로 설하고 있다. 〔유(有)〕 작(作)이란 작위(作爲)가 있다는 것으로서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타동적이며 불철저하다고 말한다. 불철저하기 때문에 한량이 있다. 즉 유량(有量), 분량(分量)이 있는 것이 된다. 무작(無作)은 이와 반대이다.

그렇다면 왜 4성제 그 자체는 하나인데 두 가지의 4성제가 고려되었는가. 원래 석존은 두 가지의 4성제를 설한 것이 아니다. 「여래소설」의 경전에도 있듯이 고제․집제․멸제․도제라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개시(開示)하였고 이 전승이 원시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라고 하는 「불교」의 새로운 사상 전개 가운데서 대승측에서 소승측에 대한 폄칭의식(貶稱意識)이 생겨 「탐착소승(貪着小乘) 삼장학자(三藏學者)」(『법화경』안락행품) 라고 하듯이 소승․대승이라는 대립이 생겨났다. 이리하여 소승의 4제관(四諦觀)은 불완전한 것이며 대승의 사제관은 완전하다고 하는 입장이 생겨난 것이다. 이 입장에 서서 『승만경』은 작(作)의 사성제와 무작(無作)의 사성제를 설하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승만경』의 취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성문․연각의 2승의 무리는 남으로부터 가르쳐질지라도 「일체의 고(苦)를 완전히 다 알고 일체의 고의 원인을 다 끊고 일체의 고의 멸을 작증(作證)해 마치고 일체의 고멸(苦滅)에 도달하는 길을 다 닦았다」라고는 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2승의 얕은 지혜로는 4성제의 도리를 순차적으로 이해했을 뿐이며 4성제를 관통하는 정신을 완전히 다 알고, 다 끊고, 다 증득하고, 다 닦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2승의 무리는 아직도 참답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깨달음에 향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진리를 보았다고 하는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했다고 하지만 유위의 생사, 분단생사를 넘은 것뿐이므로 그것에서 얻어진 열반이라도 유여열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승만경』의 주된 뜻이다.-제주불교신문, 혜경스님]

 

說無作聖諦義者(설무작성제의자) 說無量四聖諦義(설무량사성제의)

無作聖諦=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다는 것은 무한한 四聖諦=네 가지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무작성제는 부처님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어 상대적인 의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4성제의 의미를 설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能以自力知一切受苦斷(능이자력지일체수고단)

왜냐하면 자기의 힘으로써 능히 모든 苦=괴로움을 알수 있으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참다운 부처님의 성품에서 나온 힘으로 자기가 받고 있는 일체 고(苦)를 알며,] 

一切受集證(일체수집증) 一切受滅修(일체수멸수) 一切受滅道(일체수멸도)

모든 괴로움의 集=원인을 끊을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滅=소멸을 증득하려고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道=길을 닦기 때문입니다.

[받고 있는 일체 고(苦)의 원인인 집(集)을 끊으며, 받고 있는 일체의 고를 멸(滅)한 상태를 증득하기 위하여 받고 있는 일체의 고를 끊기 위한 수행[道]을 닦기 때문에 무작성제라 합니다.]

 

如是八聖諦(여시팔성제) 如來說四聖諦(여래설사성제)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성제로 여래께서는 4성제를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이 작성제와 무작성제의 8성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4성제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如是四無作聖諦義(여시사무작성제의) 唯如來應等正覺事究竟(유여래응등정각사구경)

이와 같은 네 가지의 無作聖諦=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은 오직 여래, 응공, 등정각만이 궁극적으로 깨달으심이며

[이러한 무작성제의 뜻은 오직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만이 완전히 깨달아 우리를 위해 그 진리를 설하실 수 있으며]

非阿羅漢辟支佛事究竟(비아라한벽지불사구경)

아라한, 벽지불의 궁극적인 것이 아니니, 

[성문인 아라한과 연각인 벽지불은 실천 수행을 완전히 끝낸 것이 아닙니다.]

何以故(하이고) 非下中上法得涅槃(비하중상법득열반)

왜냐하면 하, 중, 상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방편으로써 근기에 따라 설하신 상․중․하의 방법으로는 최고의 경지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何以故(하이고) 如來應等正覺(여래응등정각) 於無作四聖諦義事究竟(어무작사성제의사구경)

왜냐하면, 그것은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는 이 無作四聖諦義=네 가지 지음이 없는 성제의 뜻에 대하여 구경하시어

[또한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의 경우에 있어서만 무작성제를 깨달아 완전한 법신=事를 성취하십니다.] 

以一切如來應等正覺(이일체여래응등정각) 知一切未來苦(지일체미래고)

모든 여래, 응공, 등정각으로서 일체 미래의 괴로움을 아시며,

[일체 모든 여래․응공․정변지이신 부처님은 미래에 발생될 일체의 고(苦)를 아시며,] 

斷一切煩惱上煩惱所攝受一切集(단일체번뇌상번뇌소섭수일체집)

모든 번뇌와 上煩惱=부수적 번뇌가 攝受=거두어들이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고, 

[일체의 번뇌와 상번뇌(上煩惱)를 포함한〔攝受〕 고의 원인인 집(集)을 끊고,] 

滅一切意生身(멸일체의생신) 除一切苦滅作證(제일체고멸작증)

모든 의생신을 멸하며, 모든 괴로움을 멸하는 증득을 얻은 까닭입니다. 

[일체보살이 원력에 따라 몸을 자유자재로 바꿔 중생을 제도하는 의생신을 멸하여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非壞法故(비괴법고) 名爲苦滅(명위고멸)

세존이시여, 壞法=존재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니,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변화를 초월하여 파괴되지 않는 법을 증득하셨기 때문에 일체의 고통을 소멸한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所言苦滅者(소언고멸자) 名無始無作(명무시무작) 無起無盡(무기무진)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비롯함(시작)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이니,

[즉 일체의 고(苦)를 멸진하여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번뇌가 생기는 시작도 없고, 의식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작위도 없으며, 또한 번뇌가 사라졌으므로 고통이 생겨나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에서 나오는 위력은 다함이 없습니다.]

離盡常住(이진상주) 自性淸淨(자성청정) 離一切煩惱藏(일일체번뇌장)

다함을 여의고 항상 머물러서, 自性=제 성품이 청정하여 온갖 번뇌장을 여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궁극의 경지인 열반에만 안주하지 않으시고, 중생 교화를 위해 사바세계에 항상 머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래 누구나 갖추고 있는 자성(自性)은 청정하여 일체 모든 번뇌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습니다.]

 

[아라한은 여래와 같이 온갖 고통의 원인과 온갖 의생신을 멸하고 고통이 소멸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괴로움을 받는 존재(법)가 파괴된다고 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합니다. 쉽게 말해서 괴롭다고 자살한다고 해서 그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업연은 완전한 소멸,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 이상 끝없이 윤회의 사슬에 얽혀 유전하는 것입니다.-혜총스님,불교신문]

 

世尊(세존) 過於恒沙不離不脫不異(과어항사불리불탈불리)

세존이시여, 항하 강의 모래보다 많으며, 不離=떠나지도 않고, 不脫=벗어나지도 않으며, 不異=다르지 않으며,

[세존이시여, 비록 중생의 마음이 갠지스강의 모래알 보다 더 많은 무수한 번뇌를 떠나지 못하고 그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번뇌로 가득찬 마음과 청정한 자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不思議佛法成就(불사의불법성취) 說如來法身(설여래법신)

생각할 수도 없는 불법을 성취하심을 여래의 법신이라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의 인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불법(佛法)이 중생의 마음에 모두 갖추어져〔成就〕있는 것을 여래의 법신〔如來藏〕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은 부처님이 설한 법의 보편성, 확실성을 주체화한 것으로서 그것은 법성(法性), 진여(眞如)라고 해도 좋다. 따라서 보편성, 확실성 있는 법성, 법신은 어느 특정한 한정을 갖지 않으므로 동체일미(同體一味)의 내용을 갖는 것이다(不異). 동체일미이기 때문에 차별이나 분리는 없다(不離). 그 법성, 법신은 영원히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不脫〕, 우리 인간들이 상식으로는 사의(思議)할 수 없는 세계〔不思議〕인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생활체험을 가졌으며 그로부터 생기는 인생관, 생활환경에도 서로 다름이 있다. 이 생활체험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 모습도 천차만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똑같이 여래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여래장을 발굴하여 깨달음의 결과로서의 법신 그 자체에 귀일했을 때에는 천차만별이라는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일여평등(一如平等)으로 되는 것이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世尊(세존) 如是如來法身不離煩惱藏(여시여래법신불리번뇌장) 名如來藏(명여래장)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래의 법신은 번뇌장을 여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 법신이 중생의 번뇌[煩惱障]를 떠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법신이 번뇌를 떠나지 않고 더불어 있는 상태가 여래장이다. 따라서 여래장이란 말은 번뇌에 덮여 있는 중생이 본래의 불성은 그대로 갖고 있음으로 여래를 내장해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법신을 성취하면 이 여래장이 법신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다 중생이다 할 것이 없이 모든 장애를 벗어나므로 여기에서는 해탈이라 할 것도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음이 없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無作四聖諦)를 증득한 부처님의 경계가 이승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생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있지만 여래장(如來藏)은 본래 번뇌의 창고(煩惱藏)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번뇌의 존재로 보지만 번뇌는 본래 공하여 여래장 안에서는 번뇌의 역할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장을 공(空)의 뜻으로 보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한다. 물론 여래장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불법을 갖추고 있다는 면에서는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한다.
보통, 번뇌를 극복하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수행에는 번뇌의 장애가 있다. 몸과 마음을 교란시키는 것이 번뇌다. 이 번뇌로 말미암아 선정에 들어가지 못하며 본래의 자기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이 번뇌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만들어 ‘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집이다. 변계소집성이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말한다. 길가에 떨어진 새끼를 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번뇌장이 끊어질 때 아집(我執)이 없어진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장애로 소지장(所知障) 있는데 이는 아는 것이 장애가 된다는 뜻이다. 올바른 견해가 아닌 알음알이로 분별을 일삼아 정견(正見)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무지의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소지장 때문에 법집(法執)을 일으킨다고 한다. 따라서 소지장을 끊으면 법집이 없어진다.
'원각경'에서는 두 가지 장애를 이장(理障), 사장(事障)이라 하였다. 이장(理障)이란 '승만경'에서 말하는 번뇌의 장애처럼 바른 앎(正知)과 바른 견해(正見)을 막아 본각진여를 보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장이라 하였다. 사장(事障)은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등의 번뇌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 끊임없이 윤회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승만경'의 이 대목에서는 여래장은 번뇌의 장애를 떠나지 않는다 하여 번뇌 속에서도 여래장은 여래장일 뿐이며 이것이 여래의 법신이라 하였다. 번뇌의 장애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가 있어도 여래장 자체가 오염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치 금이 불순물과 섞인 광석 속에 있어도 순금의 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래장 사상의 핵심 이야기는 여래장이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열반의 원인이 되므로 중생의 가치를 열반 쪽에서 보는 관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법신은 곧 여래, 부처님입니다. 이 부처님이 번뇌의 덩어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번뇌 그대로가 곧 보리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생사의 경계가 곧 열반이라는 말입니다. 탐·진·치 등의 번뇌, 그 당체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보리입니다. 이 보리의 법성은 곧 번뇌의 성품 위에 서는 것입니다. 번뇌는 분별하는 성품이라 그 성품이 공(空)함을 볼 때 번뇌는 곧 보리가 되는 것이니 번뇌를 끊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7. 제 7 장 여래장(如來藏)

如來藏章第七

 

聖諦者(성제자) 說甚深義(설심심의) 微細難知(미세난지) 非思量境界(비사량경계)

聖諦=성스러운 진리란 매우 깊은 뜻을 설하는 것이며, 현묘하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성스러운 진리=聖諦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 것이므로 매우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성제는 그 의미가 매우 미묘하고 심원하여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각[思慮分別]으로는 도저히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습니다[心行處滅].-혜경스님]

是智者所知(시지자소지) 一切世閒所不能信(일체세간소불능신)

이는 지혜로운 이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이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지혜를 얻은 이[智者]라야 알 수 있습니다. 일체 세간의 중생들은 감히 그것이 깊고 오묘한 진리라는 사실을 믿지도 못할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此說甚深如來之藏(차설심심여래지장)

왜냐하면, 이는 매우 깊은 여래의 씨앗=如來藏을 설하기 때문입니다

如來藏者(여래장자) 是如來境界(시여래경계) 非一切聲聞緣覺所知(비일체성문연각소지)

여래장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경계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성제는 매우 심오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장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은 여래의 경계(境界)이므로 일체 모든 성문과 연각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如來藏處(여래장처) 說聖諦義(설성제의) 如來藏處甚深故(여래장처심심고)

여래장의 차원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여래장의 차원이 매우 깊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래장의 자리에서 성스러운 진리인 성제를 설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안주하시는 여래장의 경지는 매우 심오합니다.]

說聖諦亦甚深(설성제역심심) 微細難知(미세난지) 非思量境界(비사량경계)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 역시 매우 깊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是智者所知(시지자소지) 一切世閒所不能信(일체세간소불능신)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지혜를 갖춘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일체 세간의 중생들은 감히 그 깊고 오묘한 여래장의 경지를 믿지도 못합니다.]

[여래장(如來藏)」이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agata-garbha)의 번역으로, 모든 사람들의 번뇌 속에 덮여 있는(藏), 본래는 청정한[自性淸淨] 여래 법신을 말한다. 따라서
(1) 모든 사람은 여래가 될 성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2) 모든 사람은 여래의 아들, 여래의 태아(胎兒)로서 여래라고 하는 모태(타타가타․가르바, 여래태(如來胎) 속에 감추어져 있다라고 하는 뜻이다.

앞에서 4성제관(四聖諦觀)에 관해서 여래와 성문․연각 사이의 차이(差異)를 지적했으나 이 장에서는 그 서로 다름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우선 성제(聖諦)에는 깊고 깊은 뜻이 있으므로 그 진의(眞意)를 미세(微細)하게 아는 것은 어려워서 2승의 무리가 사의(思議)할 경계가 아니고 지자(智者)만이 잘 알 수 있는 세계이다. 두 번째 점은 그 이유로서 ‘성제는 심심한 여래장을 설하기 때문’이라 설하고 있다. 여기에 『승만경』에서 여래장이라는 술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래 진리는 작증(作證)되어서 비로소 진리가 된다. 진리가 단순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만의 것이 아님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는 불․세존이 스스로가 도달하고 작증한 세계이며 4제최승(四諦最勝)의 법은 그 작증한 내경(內景)에서 솟아난 교설이다. 무릇 가르침을 설하는 경우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하여 세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조작을 가지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이것은 장미꽃이다」라고 설명하면 누구라도 이해되며 또한 인식될 것이다. 그렇지만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와 같은 것의 내경(內景)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다」라고 설명해도 실제로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면 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다. 체인(體認)이라든가 체해(體解)라는 말은 신체로 요해(了解)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몸을 가지고 요득(了得)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진리의 내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설하려고 하는 경우 아무래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말로 이것을 「세간언설(世間言說)」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형식을 취하지 않고는 남에게 전달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승만경』본문에 성제는 ‘심심한 뜻을 설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라고 갈파한 것은 참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알았다, 깨달았다는 성문․연각의 단계에서는 엄밀히 말해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본번뇌를 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을 첫째 점이라 한다면 둘째 점은 거듭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즉 깊고 깊은[甚深] 뜻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의 장(藏)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여래장은 여래의 경계여서 일체의 성문․연각이 알지 못한다, 라고 명언한다. 여기서 여래장이라는 말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래장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스크리트어의 타타가타․가르바의 한역이다. 그것은 여래(tathagata)와 태(胎)․장(藏; garbha)과의 합성어이다. 가르바는 본래 태의 의미이므로 여래태라고 해야할 것이다. 장은 감추다, 숨기는 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태, 모태(母胎)가 아이를 감추는 것과 똑같이 태라 하여도 장이라 해도 같은 의미이다.
이 여래장을 여래의 태로 보는 것도 여래인 태, 여래즉태(如來卽胎)로 볼 수도 있으나 여래의 모태를 의미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여래장이라 하는 사상의 위치함이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어 온다.
『승만경』이 대승경전 중에서도 특히 여래장 사상을 강조한 까닭을 찾아가면 『대승열반경』의 모든 것은 부처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라는 사상과 관계하고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부처가 되는 가능성(佛性)을 감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나 그 불성을 여래장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번뇌에 덮여져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여래가 되는 성질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불성과 여래장과는 동의이어(同義異語)로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한 여래의 태는 그 의미에서 여래를 낳는 모태이며 여래즉태(如來卽胎)는 우리 인간은 여래의 아들로서 여래인 태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불교는 마음이 삶을 창조한다고 가르친다. 무신론인 불교는 신을 찾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마음을 찾을 뿐이다. 삶의 주체가 마음이고 깨달음의 주체가 마음이라는 것이다. 곧 삶과 깨달음, 그리고 나와 마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본성을 주제로 한 경전이 여래장 3부경(〈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이다
여래장 사상은 인간은 본래 마음속에 여래가 될 가능성인 여래장(如來藏),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모든 사람은 여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론에서처럼 마음 작용에 관한 이론의 다양한 전개보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제일 중시하고 있다. 마음이 진여이고 여래장이며 그 사상을 건립하는 것이 여래장 3부경의 핵심사상이며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여래장경〉은 불교사에서 최초로 여래장이라는 용어를 창안해 부처님 가르침을 선창한 경전으로, 모든 중생이 번뇌 속에 뒤덮여 있지만 여래장을 갖고 있으므로 영원히 더럽게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껍질이 씌워져 있는 곡물이나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진금(眞金)에 비유하며 번뇌의 누더기를 벗으면 깨끗한 여래장이 나온다고 말한다. 〈여래장경〉은 세존께서 성도하신 10년 뒤, 세존을 모시고 영취산에서 법회를 시작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금강혜 보살이 묻고 세존이 여래장에 관해 답변하고 있다. 그리고 세존은 많은 보살과 대중에게 상서로운 기적을 시현하는 데 바로 이것이다. 연꽃의 꽃잎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불(化佛)이 앉아계시는데, 연꽃은 순식간에 시들어버리지만, 화불은 변함없이 그대로 앉아계시는 기적을 보여 그것을 증명하였다. 모든 사람의 안에는 법성·법계인 여래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관계없이 상주불변이라고 하였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은 한자로 불과 3,000자를 조금 넘는 아주 짧은 소부(小部)의 경전이지만, 여래장 사상사에 있어서는 참으로 중요하다. 
〈여래장경〉이 단순하게 중생의 성불의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발견하고 이것을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라면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의 성질이나 번뇌와의 관계 등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교리적으로 체계화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매개로 하여 중생과 법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미혹한 중생과 깨달음의 법신은 둘 다 함께 여래장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법신의 자리에 서든 중생의 자리에 서든 어느 쪽이든 둘 다 함께 평등이라고 말한다. 중생 성불의 가능성을 마음속의 여래장에서 구하며 더 나아가 그 발현을 연설하고 그것을 근거로 중생·보살·여래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래장경보다 상당히 진보한 것이라고 본다.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이라는 원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승만경〉은 승만 부인이 사자후로 최고의 진리인 일승 대방편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 경전, 여래장 사상을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한 여래장 3부경 중 으뜸 경전이다. 
〈유마힐소설경〉이 청신사인 위말라끼르띠 거사가 진리를 진술한 것이라면, 이 경전은 청신녀인 슈리말라 왕비가 거룩하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서 진리를 진술한 것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인도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데, 2600년 전 인도에서 재가 여성 불자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설했다는 것부터 대단히 혁신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슈리말라 왕비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먼저 10가지 서원을 세우고, 또 이 10가지 발원을 3대원으로 함축하여 실천할 것을 부처님께 맹세하는 것 또한 〈승만경〉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여래장을 갖추고 있으니 실천을 통해 여래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다.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위로받기 위해 신(神)이나 불보살(佛菩薩)에게 의지하며 기도하기도 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기도 한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 경전 특히 여래장 3부 경전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여래장, 즉 깨달음을 얻어 여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 바탕, 가능성이 깃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알아차리지 못할 뿐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은 여래(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존재,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는 바탕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라는 학설로, 2천 년 불교 사상사의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6장 無邊聖諦 - 진리는 끝이 없다

無邊聖諦章第六

 

[앞의 제5장에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일승이라는 법에서 나와 이 일승법에 귀의한다. 즉 1승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고 말했으며,  이 장(章)에서는 1승의 내용이 질문된다.
‘무변(無邊) 성제(聖諦)’라는 장명(章名)은 진실(眞實)한 이(理)는 한량없고 무변(無邊)하다는 뜻이다. 성제(聖諦 : aryasacca, aryasatya)란 성(聖)스러운(arya) 진리(眞理 : sacca, satya)인데 붓다(佛陀)가 설한 무수한 가르침 중에서 무언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제일의(第一義)의 성제(聖諦:성스러운 진리)를 밝히는 것이 이 장(章)의 목적이다.-혜경스님]

 

世尊(세존) 聲聞緣覺初觀聖諦(성문연각초관성제) 以一智斷諸住地(이일지단제주지)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聖諦=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할 때에 一智=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잠재적 번뇌=무명주지를 끊으며,

[고(苦)․집(集)․멸(滅)․도(道)의 4성제를 관찰함으로써 거기에서 생긴 지혜로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번뇌인 주지번뇌(住地煩惱)를 어느 정도 끊습니다.]

以一智四斷(이일지사단) 知功德作證(지공덕작증) 亦善知此四法義(역선지차사법의)

一智=하나의 지혜로써 四斷=네 가지를 끊음으로써 공덕을 증득함을 알고, 또한 이 四法=네 가지 진실한 법의 뜻을 잘 압니다.

[한편 이렇게 생긴 지혜로 중생이 끊어야 할 네 가지 번뇌=四住地煩惱를 없애는 지혜인 4단지(四斷指)와 수행을 통해 얻은 공덕의 결과로써 성인의 지위에 오른 증표인 공덕작증(功德作證)을 잘 알게 되어 고․집․멸․도 4성제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잘 이해하게 됩니다.]

世尊(세존) 無有出世閒上上智(무유출세간상상지) 四智漸至及四緣漸至(사지점지급사연점지)

세존이시여, 出世閒=세간을 벗어나는 上上智=최고의 지혜는 없지만, (수행을 계속함으로써) 네 가지 반연=四緣으로써,  가지 지혜에 점점 나아가는 것이니, 

[세존이시여, 아직 성문과 연각에서는 세간의 번뇌에 물들지 않는 지혜인 출세간상상지(出世間上上智)가 없지만 그들이 수행을 계속함으로써 점점 도지(道智)․도종지(道種智)․일체지(一切智)․일체종지(一切種智)인 4지(四智)를 갖추게 됩니다. 한 4성제〔四綠〕를 점점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

無漸至法是出世閒上上智(무점지법시출세간상상지)

점점 나아감이 없는 법이  출세간의 상상지가 됩니다.

[이와 같이 점점 4지와 4성제를 닦아 나아간다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 지혜인 출세간상상지에 도달해 갈 것입니다.]

[출세간상상지(出世間上上智)와 사지(四智)의 점지(漸至)가 대조적으로 설해 있다. 전자는 여래의 사제관(四諦觀)을 후자는 성문․연각의 사제관(四諦觀)을 의미하는 것이나 평등하게 사제관을 관하는데 어찌하여 한쪽에는 점지가 있고 다른 쪽에는 점지가 없는 것일까.
이미 이에 관해 설한 바와 같이 성문․연각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않았으므로 그 성제지(聖諦智)도 무상(無上)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어서 구경지(究竟智)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서 여래의 4제관(四諦觀)은 출세간상상지라 하여 제일의지(第一義智)라고 한다.-혜경스님]

世尊(세존) 金剛喩者是第一義智(금강유자시제일의지)

세존이시여, 金剛喩=금강석과 같다고 하는 것은 곧 제일의의 지혜이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지혜를 금강(金剛, 다이아몬드)에 비유되는 것은 그것이 최고 절대 지혜인 제일의지(策一義智)라는 의미입니다.]

世尊(세존) 非聲聞緣覺不斷無明住地(비성문연각부단무명주지)

세존이시여,  성문이나 연각으로서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初聖諦智是第一義智(초성제지시제일의지) 성제 처음  지혜는 제일의의 지혜가 아니니, 

世尊(세존) 以無二聖諦智斷諸住地(이무이성제지단제주지)

세존이시여, 둘이 없는 성제를 아는 지혜로써 모든 주지(잠재적 번뇌)를 끊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아직 근본번뇌인 무명주지(無明住地)를 끊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4성제를 관찰함으로써 얻게 된 지혜를 가지고는 결코 절대의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인 제일의지(策一義智)가 되지 못합니다.]

 

世尊(세존) 如來應等正覺(여래응등정각) 非一切聲聞緣覺境界(비일체성문연각경계)

세존이시여, 여래, 응공, 등정각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경지(경계)가 아니고, 

不思議空智(불사의공지) 斷一切煩惱藏(단일체번뇌장)

不思議空智=부사의한 공의 지혜이니, 煩惱藏=모든 번뇌의 더미를 끊어야 합니다.

[즉 부처님은 모든 차별상을 뛰어넘어 절대 하나인 진리의 세계를 관하는 지혜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공지(空智)로써 일체 모든 번뇌의 덩어리=煩惱藏을 끊습니다.]

世尊(세존) 若壞一切煩惱藏究竟智(약괴일체번뇌장구경지)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번뇌의 더미가 무너진다면 究竟智=구경의 지혜이니,

是名第一義智(시명제일의지) 곧 제일의의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初聖諦智非究竟智(초성제지비구경지) 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智(향아뇩다라삼막삼보리지)

처음으로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며,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4성제를 관찰함으로써 생긴 지혜는 완전〔究竟〕한 지혜가 아니고 최고의 완전한 지혜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으로 향해 나가는 지혜라고 합니다.]

 

世尊(세존) 聖義者(성의자) 非一切聲聞緣覺(비일체성문연각)

세존이시여, 성스러움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성(聖)의 의미가 일체 모든 성문과 연각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聲聞緣覺成就有量功德(성문연각성취유량공덕) 성문과 연각은 유한한 공덕을 성취하였을 뿐이며, 

聲聞緣覺成就少分功德(성문연각성취소분공덕) 故名之爲聖(고명지위성)

성문과 연각은 부분적인 공덕(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이름하여 ‘성스럽다’고 하는 것이나,

[왜냐하면 성문과 연각은 아직 수행 중에 있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은 무한한 공덕을 성취하지 못했고 겨우 조금〔小分〕밖에 공덕을 닦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성(聖)자를 붙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범부와 구별하기 위해서 성인=四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聖諦者(성제자) 非聲聞緣覺諦(비성문연각제) 亦非聲聞緣覺功德(역비성문연각공덕)

聖諦=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의 공덕도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 4성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경지일 뿐 성문과 연각이 깨달은 경지의 법은 아닙니다. 또한 성문과 연각이 닦은 공덕으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世尊(세존) 此諦如來應等正覺初始覺知(차제여래응등정각초시각지)

세존이시여, 이러한 諦=진실한 법은 여래, 응공, 등정각이 처음으로 비로소 깨달아 아는 것이지만,

然後爲無明㲉藏世閒開現演說(연후위무명각장세간개현연설),是故名聖諦。殼 '껍질 각'

그 후에 무명의 껍질에 싸여 있는 세간을 위하여 열어 보이시고 연설하셨으므로 성제라 합니다.

 

[성제는 4성제라고 하는 석존성도(釋尊成道) 후 최초 설법의 내용으로 생각된다. 거기에 설해진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야말로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을 나타낸 것이며 우리들의 인생에 대처하는 존재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이 4성제의 가르침은 사제(四諦) 최승(最勝)의 법, 제불(諸佛)이 칭찬한 교설(敎說)이라 하고 연기심심법(緣起甚深法)과 더불어 석존의 근본교설(根本敎說)이라 한다.
사제최승법(四諦最勝法)이란, 
'상응부(相應部)'제56, 2에 여래소설(如來所說)이라는 하나의 경(經)이 있다. 그것에 의하면 그 때, 세존은 5인의 수행자(비구) 무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 두 가지의 극단(極端)에 친근(親近)해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온갖 욕망에서 쾌락의 생활에 빠진다는 것은 하열(下劣)하며 야비(野卑)한 것이다. 그것은 범부가 하는 짓이고 성스러운 것은 아니며, 참다운 목적에서 보아 무익한 것이다. 또 스스로 육체적인 피로와 소모(苦行)에 빠진다는 것은 괴롭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고 참다운 목적에 있어서 무익한 일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 중도야말로 범부들에게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낳아 영원한 평안과 증지(證智)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혜경스님]

 

[이 장에서 승만부인은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어떻게 볼 것인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사성제는 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제(諦)는 불변(不變)하고 여실(如實)한 진리이다. 불변하는 참다운 진리를 뜻한다.
이 성스러운 진리에는 네 가지가 있다. ‘미혹한 이 세상은 다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고제(苦諦), ‘괴로움의 원인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번뇌집착이다’ 하는 집제(集諦), ‘집착을 완전히 끊어 없애버림으로 괴로움을 멸할 때가 궁극의 이상경이다’라는 멸제(滅諦),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팔정도의 올바른 수행의 길을 따라야 한다’라는 도제(道諦)이다. 앞의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끝없이 유전하는 인과요, 뒤의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깨달음의 인과이다.
승만부인이 이 장에서 강조하려는 속뜻은, 분명히 불변하는 사성제라는 법이 있고, 그 법의 지혜를 성문이나 연각이 얻었지만 그 지혜가 최상의 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간에는 불교를 많이 안다고 마치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만 불교라는 지식을 알 뿐이지 열반의 구경처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수행하고 공덕을 지어서 열반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승만부인이 후세에 전하는 간절한 말씀이다.
성문이나 연각도 사성제를 알고 수행하는 분이니 대단한 성인이고 성스러운 분이지만 유한한 공덕, 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한 분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경지로 나아가는 머나먼 여정의 길에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잠재하고 있는 무명주지의 번뇌를 모두 소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문과 연각이 사성제를 아는 지혜는 무명주지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제일의 지혜가 되지 못한다 하였다. 하지만 여래의 사성제는 출세간의 상상지(上上智)가 되며, 제일의 지혜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지혜라든가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법도 없다고 하였다.-혜총스님]

 

[이런 면에서 보면 사성제가 단순한 하나의 교리해설이 아니라 번뇌를 없애는 수행의 실천요목으로, 사성제를 닦음으로서
번뇌를 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진 동기가 멸성제(滅聖諦)를 증득하기 위하여 설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으뜸가는 궁극적인 최후의 진리(第一義)를 멸성제(滅聖諦)라고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길장(吉藏)의 〈승만보굴〉에서는 유작사성제(有作四聖諦)와 무작사성제(無作四聖諦)를 합하여 팔제(八諦)라고 하면서 유작사성제는 소승의 사성제로, 완전하지 못하고 궁극적이지 않아 언젠가 다시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 했고, 무작사성제는 대승의 사성제로, 완전하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닦고 조작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 천태 지의는 교상(敎相)을 구분하여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에 짝을 맞추어 사종사제(四種四諦)를 내세웠다.
1. 생멸사제(生滅四諦) : 장교의 설로서 유위의 생멸 현상에 대하여 사제의 인과에 진실로 생성과 소멸이 있다고 보는 것.
2. 무생사제(無生四諦) : 통교의 설로서 인연소생의 모든 법은 생성과 소멸이 없는 공(空)이라는 관점에서 사제와 미오(迷悟)의 인과가 없다고 보는 것.
3. 무량사제(無量四諦) : 별교의 설로서 모든 현상이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차별을 갖추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사성제도 무수한 차별이 있다고 보는 것.
4. 무작사제(無作四諦) : 원교의 설로서 미오(迷悟) 그 자체가 실상이라는 주장으로 비록 대립과 모순으로 나타나는 미오의 경계가 다르지만 둘 다 실상이라고 보는 것.
멸성제를 증득하지 못하면 사성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최후의 진리인 제일의제(第一義諦)는 성문이나 연각의 수행으로는 완전히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24. 歸依第一義者是歸依如來 - 제일의에 귀의하는 것이 여래에의 귀의

 

世尊(세존) 如來無有限齊時住(여래무유한제시주)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량없는 시간 동안 머무시며, 

如來應等正覺後際等住(여래응등정각후제등주)

여래, 응공, 등정각은 後際=끝없는 미래와 같이 머무시니,

如來無限齊大悲(여래무한제대비) 亦無限齊安慰世閒(역무한제안위세간)

여래는 한량없으며, 크게 자비로우심=大悲 또한 한량없으며 또한 세간을 편안하게 위로하십니다.

 

[여래는 한제(限齊), 즉 한계(限界)가 없다고 하며 귀의(歸依)의 제일의(第一義)는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하는 바는 여래(如來)는 시간적(時間的), 공간적(空間的)인 한정(限定)을 받지 않으며, 대비(大悲)에도 한계(限齊)가 없이, 이 세간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애민(哀愍)하므로 그 여래에 귀의하는 것이 귀의의 요체(要諦)라고 하는 것이다-혜경스님]

[여래는 무한한 시간 속에 항상 머문다고 설한 것은 진리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진리는 어느 한 곳에만 옳다는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이다. 그리고 끝없이 확장되는 시공의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비는 영원하고 중생은 언제 어느 세계에서나 구원받고 제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승(佛乘)의 본래 모습이다.-혜총스님]

 

無限大悲(무한대비) 無限安慰世閒(무한안위세간)

한정이 없는 자비로 한정이 없는 세간을 위로하시니, 

作是說者是名善說如來(작시설자시명선설여래)

이러한 설을 하는 이를 이름하며 여래를 잘 설하는 것이라하며,

若復說言無盡法(약부설언무진법) 常住法(상주법) 一切世閒之所歸依者(일체세간지소귀의자)

만약 다시 ‘다함이 없는 법과 항상 머무는=상주하는 법은 모든 세간의 귀의할 바이라'고 설한다면

亦名善說如來(역명선설여래) 是故於未度世閒(시고어미도세간) 無依世閒(무의세간)

또한 이름하여 잘 설하는 것이라 하며, 그러므로 여래는 아직 제도를 얻지 못한 세간과, 의지할 데 없는 세간에 대하여

與後際等(여후제등) 作無盡歸依(작무진귀의) 끝없는 미래=後際 같이 다함이 없는 귀의와 

常住歸依者(상주귀의자) 謂如來應等正覺也(위여래응등정각야)

상주하는 귀의가 되는 이를 일컬어 이른바 여래, 응공, 등정각이라 합니다.

 [삼보 중의 불보(佛寶) 즉 여래(如來)․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을 파악하는 것이지만, 법(法)과 승(乘)에 대해서는 각각 1불승(一佛乘), 3승중(三乘衆)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이라고 설한다. 일승도(一乘道)의 교법(敎法)은 법신(法身)을 증명하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하는 것이므로, 구경의 법신을 얻었으면 그 위에 다시 1승도의 교법을 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승중(三乘衆)은 근본번뇌(無明住地)를 끊지 못했으므로 공포(恐怖)를 갖는 것이며, 세존에 귀의함에 의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향해서 전진한다. 더욱이 1승 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라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에 의해서 교법인 법(法)과 3승중인 승(僧)에게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 귀의하는 것에 귀일(歸一)한다. 여래가 없으면 1승법(一乘法)도 3승중(三乘衆)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혜경스님]

法者卽是說一乘道(법자즉시설일승도) 僧者是三乘衆(승자시삼승중)

법이라 함은 곧 一乘=하나의 길이고 승이라 함은 三乘=세 가지의 대중을 말하는 것이니,

此二歸依非究竟歸依(차이귀의비구경귀의) 名少分歸依(명소분귀의)

이 두 가지에 귀의함은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므로 少分歸依=부분귀의(불완전한 귀의)라 이름하니,

何以故(하이고) 說一乘道法(설일승도법) 得究竟法身(득구경법신)

왜냐하면, 일승의 법을 설하는 것은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 것이며, 

於上更無說一乘法身(어상갱무설일승법신) 그 외에 다시 일승의 법신을 설하지 아니하였으며,

三乘衆者有恐怖(삼승중자유공포) 歸依如來(귀의여래)

삼승의 대중들은 공포가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여 

求出修學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구출수학향아뇩다라삼막삼보리)

벗어나기 위하여 修學=도를 닦아, 위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是故二依非究竟依(시고이의비구경의) 是有限依(시유한의)

그러므로 이 둘에 귀의하는 것은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며 한계가 있는 귀의이니,

若有衆生(약유중생) 如來調伏歸依如來得法津澤(여래조복귀의여래득법진택) 津 나루 진, 澤 못 택,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에게 조복하여 여래에게 귀의하면, 불법의 은혜를 얻게 되고

生信樂心歸依法僧是二歸依(생신락심귀의법승시이귀의)

불법을 믿는 즐거움의 마음을 내어 법과 승에 귀의한다면, 

非此二歸依是歸依如來(비차이귀의시귀의여래)

이는 그 둘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고,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 됩니다.

 

[참답고 청정한 나로서의 즐거움이 항상 머무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네 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열반이요, 즉 구경의 불승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런 열반의 세계를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며 증득하도록 팔만사천의 무궁무진한 경전을 통해 법의 방편을 설하신다. 그리고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을 방편으로 보이시기도 한다. 이 법이라는 일승과 삼승은 그 이름이 일승이요, 삼승이지 곧 여래에 귀의함과 같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하신 경전의 말씀에 의지하여 일승의 법신으로 나아가거나, 또 홀로 선정을 닦거나, 혹은 십이연기의 이치를 체득하거나, 보살행을 닦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탈 것들은 대승의 길로서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일승의 법신이요, 제일의라는 것이다.]

 

歸依第一義者是歸依如來(귀의제일의자시귀의여래) 此二歸依第一義(차이귀의제일의)

왜냐하면, 제일의에 귀의하는 것이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니, 이  가지에 귀의하는 것과 제일의는 

是究竟歸依如來(시구경귀의여래) 何以故(하이고)

구경에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無異如來無異二歸依(무이여래무이이귀의) 如來卽三歸依(여래즉삼귀의)。

여래는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으므로, 여래는 곧 삼귀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說一乘道(설일승도) 如來四無畏成就師子吼說(여래사무외성취사자후설)

왜냐하면, 일승의 도를 설하는 것은, 여래께서 四無畏= 가지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여, 사자후로 설하시는 것이니,

若如來隨彼所欲而方便說(약여래수피소욕이방편설) 卽是大乘無有三乘(즉시대승무유삼승)

만일 여래께서 그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라면 곧 대승이며 삼승이 없는 것이니, 

三乘者入於一乘(삼승자입어일승) 一乘者卽第一義乘(일승자즉제일의승)

삼승이 일승에 들어가는 것이며, 일승이라는 것은 곧 제일의의 승(길)이 되는 때문입니다.

제일의 [第一義]= 근본이 되는 첫째 의의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욕망을 살펴서[隨] 교묘한 수단[方便]으로 법을 설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승(大乘)의 가르침일 뿐 방편으로서의 삼승(三乘)은 진실이 아닙니다. 즉 방편으로써 삼승을 설한 까닭은 결국 모든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일승(一乘)에로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일승이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제1의승(策一義乘)입니다.」
참으로 여래의 그 때 그 곳에 응해서 설한 방편의 가르침은 1승에 모두 포섭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 ‘1승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 지금 이 『승만경(勝鬘經)』에서 훌륭하게 결실(結實)을 맺은 것을 알 수 있다.-혜경스님]

 

[사무소외(四無所畏)란 여래가 두려운 생각이 없는 자신감의 힘으로 설법하시는 네 가지 위신력을 말하며

①정등각무소외(正等覺無所畏) “나는 일체법(一切法)을 평등하게 깨달아 다른 이의 힐난을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

②누영진무소외(漏永盡無所畏) “나는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어서 밖으로부터 오는 곤란을 두려워 않는다”는 자신감,

③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나는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악법(惡法)을 모두 말했기에 다른 이의 비난이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

④ 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 “나는 괴로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길을 모두 말해서 다른 이의 비난이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의 힘이다.
이런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여래께서 사자후하시는 것이니 일승(一乘)이 제일의(第一義)요, 가장 수승한 도리, 구경의 진리, 최승진실(最勝眞實)의 도리이다.부산 감로사 주지]

[승(乘, Yan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실어나르는 수단이요, 둘째는 운송해야 할 대상이다. 실어 나르는 수단에서 볼 때, 대승은 보리심으로써 주요한 인(因)을 삼고 육바라밀로써 수행의 방편을 삼는다.

이러한 수행 방편은 대승의 공통된 길이다. 비록 대승 가운데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두 종파의 지견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 파가 승(乘)이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승의 구별은 방편에 의한 것인데, 중관과 유식의 수행 방편에는 다른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 다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보리심을 발하고, 이러한 마음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중관(中觀)에서 보여주는 '미세한 법무아'의 도리에 깊이 상응하여 계합하는 사람은 대승의 바른 근기의 수행자라고 한다.또 대승 속에 금강승(金剛乘), 곧 밀교는 네 부파로 나누어지지만, 이들 또한 이타의 원을 발하는 것을 인으로 삼고, 육바라밀로써 수행법을 삼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교리와 필요로 하는 바가 다른 것을 살펴 여러 가지 가르침과 서로 다른 승(乘)의 길을 설해 놓으셨다.
이와 같이 다른 교리와 승이 다양하게 출현하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가깝고 먼 파벌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법을 들을 수 있는 근기와 성향과 능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수행자에게 계합되는 다른 수행법을 전수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실 때 아직 전혀 성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네가 부처의 과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러한 수행자들이 받아들여 그가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만을 설해 주셨다.
그야말로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는데, 비록 그 설법에서 분명하게 '부처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최고의 깨달음은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방편들이었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법을 펴신 본래 뜻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혜를 성취케 하고자 함이었으므로 이러한 지혜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은 다 일승(一乘)에 속하는 것이지 이승(二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는 승으로써 유정중생들을 인도하지 않으셨다.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다 부처의 지위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다른 승을 보여주신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륵보살께서는, '대승을 수지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사람은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장애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구하는 소승의 길로 물러날 때는 불과에 이르는 데 막대한 장애가 일어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수행자가 만약 소승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 장애의 정도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승의 길 역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대승을 수행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진 자가 대승을 버리고 소승을 닦는다면 반드시 성불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승을 닦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부처의 지위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불의 길을 수행할 수 있는 자가 대승의 방편을 포기하였을 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드시 각각의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하겠다."
(위 말씀의 뜻은, 어떤 사람은 소승불교에 심취하여 배우다가 대승불교로 건너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분들이 꽤 되시죠. 그리고 또 확고한 신념으로 아라한을 목적으로 한 소승불자도 있다는 뜻 입니다.)
소승은 대승의 일부분이 아니다. 성불의 길에 이르는 가행(加行) 단계일뿐, 정행(正行)인 대승의 길은 아니다. 대승이라야만 비로소 원만히 성불할 수 있는 길을 구족한다. 대승과 소승 사이에는 원만함과 원만치 않음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고하(高下)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고하>는 제도하는 중생의 숫자를 말합니다. <고하>라는 번역보다는 <다소>라고 하는게 낫겠죠.
결코 소승은 구경의 요의승(了義乘)이 아니다. 요의승은 '사람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다 그대로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가르침은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진실한 인(因)인 것이다. -작성자 마하보디]

22. 如來有二種不受後有智 - 여래의 윤회하지 않는 두 가지 지혜

 

世尊(세존) 不受後有智有二種(불수후유지유이종)

세존이시여, 不受後有=‘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뒤의 몸을 받지 아니하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사오니,

謂如來以無上調御降伏四魔(위여래이무상조어항복사마)

이른바 여래께서는 無上調御= 위없는 방법으로 四魔=네 가지 악마를 항복 받고, 

出一切世閒(출일체세간) 爲一切衆生之所瞻仰(위일체중생지소첨앙)

모든 세간을 뛰어나서, 모든 중생의 존경을 받는 

得不思議法身(득불사의법신) 於一切爾焰地得無㝵法自在(어일체이염지득무애법자재)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었으며, 온갖 지혜를  만한 경계에 대하여 걸림이 없는 법의 자재를 얻었으며,

於上更無所作(어상갱무소작) 無所得地十力勇猛(무소득지십력용맹)

이 위에 더 지어야 할 바도 없으며, 얻어야 할 바도 없는 경지(지위)에서 십력이 용맹하시어, 

昇於第一無上無畏之地(승어제일무상무외지지)

제일이며 위없는 無畏=두려움 없는 지위에 오르셨으며, 

一切爾炎無㝵智觀不由於他(일체이염무애지관불유어타) 不受後有智師子吼(불수후유지사자후)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를 걸림 없는 지혜로 관찰하되, 다 이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뒤의 몸을 받지 않는 지혜로 사자후 하는 것입니다.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度生死畏(아라한벽지불도생사외) 次第得解脫樂(차제득해탈락)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사의 두려움을 벗어나서 차례로 해탈의 즐거움을 얻어서,

作是念(작시념) ‘我離生死恐怖(아이생사공포) 不受生死苦(불수생사고)

생각하기를 ‘나는 생사의 공포를 벗어났으므로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리라’ 하나니,

世尊(세존) 阿羅漢辟支佛觀察時(아라한벽지불관찰시)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한 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得不受後有(득불수후유) 觀第一蘇息處涅槃地(관제일소식처열반지)

가장 뛰어난 안식처=蘇息處인 열반의 경지를 관하는 것입니다.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되살아날 소. 蘇息소식=끊어질 듯이 막혔던 숨을 돌려서 되쉼

 

世尊(세존) 彼先所得地(피선소득지) 不愚於法(불우어법) 不由於他(불우어타)

세존이시여, 저들이 앞에 얻은 바 열반의 경지는 법에 어리석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亦自知得有餘地(역자지득유여지) 必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필당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스스로 有餘地=불완전한 지위(남음이 있는 지위)를 얻었지만, 반드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것을 아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聲聞緣覺乘皆入大乘(성문연각승개입대승)

왜냐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이 모두 대승에 들어가는 것이니

大乘者卽是佛乘(대승자즉시불승) 是故三乘卽是一乘(시고삼승즉시일승)

대승은 곧 부처님의 길=佛乘이며, 그러므로 삼승이 곧 일승이며 

得一乘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일승자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일승을 얻은 이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는 것이 되며,

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卽是涅槃界(아뇩다라삼막삼보리자즉시열반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열반의 경지이며,

涅槃界者卽是如來法身(열반계자즉시여래법신) 열반의 경지는 곧 여래의 법신이므로 

得究竟法身者則究竟一乘(득구경법신자즉구경일승) 無異如來(무이여래)

究竟法身=완전한 법신을 얻은 이는 곧 완전한 일승을 얻음이니,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으며, 

無異法身(무이법신) 如來卽法身(여래즉법신) 得究竟法身者(득구경법신자)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며, 여래가 곧 법신이니, 究竟法身=완전한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則究竟一乘(즉구경일승) 究竟者卽是無邊不斷(구경자즉시무변부단)

완전한 일승을 얻는 것이며, 究竟=궁극적이라는 것은(완전함이라는 것은) 끝이 없으며 끊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이 일불승(一佛乘)으로 귀결되는 것은 '법화경'의 핵심인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과도 통합니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홀로 이 세상의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승이고, 보살승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 하나, 일승이라는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는 방편을 써서 삼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삼승은 방편(三乘方便)이요, 일승은 진실(一乘眞實)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평등무차별하게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불교는 일부 특정인만을 위한 차별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워하는 일반사람들이나 일불승의 인연을 만나지 못한 수행자들에게는 3승의 방편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문, 연각의 2승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부처가 되어야 하므로 대승이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승만부인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 왜 붓다의 방편이 되는지에 대한 원효의 해설을 요약하면, 이승에게 변역생사에서 재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 무명 주지 번뇌가 끊어진 것도 아니며 거기에서 멸제와 도제가 아직 현증된 것도 아니고 수습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효는 ‘고제는 이미 끊어졌다’고 아는 것이지만 변역생사에서 재생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붓다의 방편이 되고, ‘집제는 이미 끊어졌다’고 아는 것이지만 무명과 같은 미혹이 남아 있어서 아직 모두 끊어진 것이 아니므로 방편이 되고, 멸제가 이미 현증되었다는 것과 도제가 이미 수습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변역생사에서의 멸제와 도제가 오히려 아직 현증되지 않았고 수습되지 않았으므로 방편이 된다고 해설한 것이다. 따라서 원효는 불완전한 열반이지만 붓다가 방편으로 완전한 것처럼 설한 것이라 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경문은 이것을 토대로 붓다에게 귀의한 후, 일체 사성제에 대해 철저하게 여실지견한다면 완전한 상주 열반을 얻을 것이고,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열반이 해탈의 맛으로서 동일한 맛[一味]이고 평등한 맛[等味]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주 열반을 성취할 때, 일체 제법을 얻고, 걸림 없이 일체 지견에 통달하고 일체 나쁜 허물에서 떠나고 일체 공덕을 얻는 자로서 여래는 “나의 태어남은 끝났고, 범행은 이미 세워졌으며, 지어야할 것은 이미 다했고, 후유를 받지 않는다”라고 궁극적 의미에서 사자후할 것이다.-김홍미]

 

[앞에서 아라한(聲聞)․벽지불(緣覺)의 열반과 부처님․여래의 대열반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성문․연각의 열반을 대열반과 대립적으로 생각한다면 성문․연각과 대승, 즉 불승(佛乘)이란 영원히 대립하는 것이 되어 성문, 연각이 불승에 귀일하는 장(場)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승만경은 아라한․벽지불의 열반은 대승의 대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일시적(假)인 열반이라고 본다. 즉 부처님의 대열반(大涅槃 : 般涅槃)에 도달하기 위한 휴식처이라 한다. 성문승, 연각승의 가르침에서는 저마다의 이상(理想)으로 하는 아라한과(阿羅漢果), 벽지불과(벽支佛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대승에서는 성문승도 연각승도 대승 속에 융합되고 귀일하는 것이다.
본경은 대승이란 즉 불승이라고 가르치고, 3승 즉 1승이므로 1승을 얻는 사람은 위없는(無上) 정각(正覺)을 얻는다. 그것이 곧 열반계(涅槃界)라고 설한다. 여래․부처님의 대열반은 「지혜로 말미암아 생사에 주(住)하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열반에 주한다.」였다. 큰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열반의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 낙에 머무는 일이 없고 항상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비원(悲願)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이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빛을 가진 상주(常住)의 법신(法身)인 것이다.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인 1승도(一乘道)를 설하는 까닭은 구경법신(究竟法身)을 증득하는 데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것 이외에 다른 1승법신(一乘法身)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법과 승가 이 두 가지에만 귀의하는 것은 완전한 귀의가 아닌 불완전한[有限] 귀의라고 했습니다.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어느 것에 귀일(歸一)하고 의지한다는 것, 즉 귀의(saran-gaetan)이다. 불교에서 부처님과의 만남은 자기 속에 있는 불성(佛性), 즉 여래장(如來藏)을 개발(開發)하는 것에 있으나 이 개발도 인생에 있어서 언제 어디인가는 저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이것을 「기(機)」라고 한다면 이 「기(機)」를 소중히 할 것이 중요하다. 불교입문(佛敎入門)의 첫 번째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諸佛)의 가르침은 「자연히(自) 그(其) 마음(意)이 정화(淨)해진다」라고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괴로워하며 「선(善)을 닦(修)고 악(惡)을 멈춰(止)라」고 하는 가르침에도 철저하지 못한 존재이다. 이 벽(壁)을 깨뜨리려고 할 경우, 무엇보다도 우선 오직 어느 것에 귀의한다는 지순(至純)한 마음을 양성(養成)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승만경』은 삼보 중의 불보(佛寶) 즉 여래(如來)․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을 파악하는 것이지만, 법(法)과 승(乘)에 대해서는 각각 1불승(一佛乘), 3승중(三乘衆)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이라고 설한다. 일승도(一乘道)의 교법(敎法)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법신(法身)을 증명하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하는 것이므로, 구경의 법신을 얻었으면 그 위에 다시 1승도의 교법을 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승중(三乘衆)은 근본번뇌(無明住地)를 끊지 못했으므로 공포(恐怖)를 갖는 것이며, 세존에 귀의함에 의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향해서 전진한다. 더욱이 1승 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라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에 의해서 교법인 법(法)과 3승중인 승(僧)에게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 귀의하는 것에 귀일(歸一)한다. 여래가 없으면 1승법(一乘法)도 3승중(三乘衆)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가령 부처님께서 저희들의 욕망을 살펴서[隨] 교묘한 수단[方便]으로 법을 설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승(大乘)의 가르침일 뿐 방편으로서의 삼승(三乘)은 진실이 아닙니다. 즉 방편으로써 삼승을 설한 까닭은 결국 모든 중생이 최고의 깨달음을 향한 일승(一乘)에로 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일승이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제1의승(策一義乘)입니다.」 법화경(法華經) 이래(以來)의 사상(思想) ‘1승진실(一乘眞實)․3승방편(三乘方便)’이 지금 이 『승만경(勝鬘經)』에서 훌륭하게 결실(結實)을 맺은 것을 알 수 있다.
-혜경스님(제주불교신문)]

 

[一乘 :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은 오직 하나, 그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이 된다는 가르침
승(乘)이란 타는 물건이란 뜻. 깨달음에 나가게 하는 수(數)를 말한다. 일승(一乘)이라 함은 불교의 참다운 교는 오직 하나로, 그 교에 의해서 모든 이가 고루 불타가 된다고 설(說)하는 교이며, 삼승(三乘)이라 함은, 중생의 성질이나 능력에 응해서,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에 고유한 3종의 깨달음의 길이 있는 것을 말함. 또 삼승(三乘)에는 일승(一乘)에 대해서 말하는 이외에, 또 3종의 교, 3종의 깨달음의 실천을 말하는 경우가 있어, 법장(法藏)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권1에는, 소승(小乘)ㆍ대승(大乘)ㆍ일승(一乘), 혹은 대승(大乘)ㆍ중승(中乘)ㆍ소승(小乘)의 3으로 하고, 대보적경(大寶積經) 권94에는, 보살은 천승(天乘, 초선(初禪) 내지 사선(四禪)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실천)ㆍ범승(梵乘, 자비선사(慈悲禪寺))ㆍ성승(聖乘, 팔성도(八聖道))의 3을 스스로 닦아 다른 이를 가르친다고 설함.

①일승(一乘)이란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는, <유유일승법무이역무삼(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이라고 말하여, 이승이라든가 삼승이라고 하는 것은 일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화엄경 명난품(明難品)이나 승만경일승장에도 불타는 일승을 설(說)하고, 일승에 의해서 불타가 되는 것을 설함. 일승은 불승(佛乘)ㆍ일불승(一佛乘)ㆍ일승교(一乘敎)ㆍ일승구경교(一乘究竟敎)ㆍ일승법(一乘法)ㆍ일도(一道) 등이라고 하고, 일승의 교를 설하는 경을 일승의 묘전(妙典), 일승(一乘)의 교(敎)를 믿는 이를 일승의 기(機), 그 깊고 넓은 것을 바다에 비유해서 일승해(一乘海) 등으로 일컫고, 일승은 대승(大乘)의 최고의 교이기 때문에 일승극창(一乘極唱)이라고 한다. 삼승(三乘)이란 말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45를 비롯한 여러 경론(經論)에 보이고, 성문승(聲聞乘)을 소승(小乘)ㆍ하승(下乘)ㆍ연각승(緣覺乘)을 벽지불승ㆍ독각승(獨覺乘)ㆍ중승(中乘)ㆍ보살승(菩薩乘)을 대승(大乘)ㆍ불승(佛乘)ㆍ여래승(如來乘)ㆍ상승(上乘)이라고도 하고, 삼승(三乘)의 교(敎)를 삼승교(三乘敎)라고 한다.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이승(二乘)이라고 하고, 대승(大乘)을 전연 믿을 수 없는 이승을 우법(愚法)의 이승, 마음을 뒤집어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이승을 불우법(不愚法)의 이승이라고 한다.

서 대승(大乘)에 들어가는 이승을 불우법(不愚法)의 이승이라고 한다
②아함경(阿含經)에는 삼승의 도를 얻을려고 하면 중(衆)중에 구하라고 하였고, 유부(有部) 등에서는 삼승의 구별은 인위(忍位)에 있어서 정(定)해지고,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은 각기 사체(四諦)ㆍ십이인연(十二因緣)ㆍ육도(六度)를 닦아서 해탈(解脫)하는데, 얻어지는 열반에 다른 바는 없다고 한다. 대승(大乘) 가운데, 법상종(法相宗)에 의하면, 중생은 처음부터 오성(五性)의 구별이 있고, 정성성문(定性聲聞), 정성연각(定性緣覺), 정성보살(定性菩薩)은 삼승교(三乘敎)에 의해서 각기의 과(果)를 깨닫고, 다만 불정성(不定性)인 자는 일승의 교(敎)를 받아서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일승교(一乘敎)는 부정성(不定性)인 자를 유인(誘引)하기 위한 불타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삼승진실(三乘眞實)ㆍ일승방편(一乘方便)의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 대해서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참다운 불교는 일승뿐이라고 하여 일승진실(一乘眞實) 삼승방편(三乘方便)의 입장을 취한다. 또 삼론종(三論宗)에서 삼승중의 보살승(菩薩乘)을 진실(眞實), 이승을 방편(方便)으로 하는데 천태종이나 화엄종에서는 삼승(三乘) 밖에 불승(佛乘)이 있다고 한다. 이 법상종(法相宗)이나 삼론종을 삼차가(三車家), 화엄종이나 천태종을 사차가(四車家)라고 하는데, 삼차(三車)ㆍ사차(四車)의 구별은 삼승과 일승의 관계를 법화경 비유품(譬喩品)의 화택내(火宅內) 양(羊)ㆍ록(鹿)ㆍ우(牛)의 삼차(三車)와 문외(門外) 대백우차(大白牛車)의 관계 해석에 관련시켜서 붙인 이름이다.
화엄종에서는, 그 구극적(究極的)인 교(敎)인 일승원교(一乘圓敎)를 상대적 차별의 면과 절대적 평등(平等)의 면에서 동교(同敎)와 별교(別敎), 공교(共敎)와 불공교(不共敎), 방편승(方便乘)과 정승(正乘))의 2종 일승(一乘)으로 하고, 동별(同別)의 2를 나누면서, 동별무애라고 한다. 또 동교일승(同敎一秉)의 체(體)에 일승(一乘)ㆍ삼승(三乘) 등의 모든 승교(乘敎)가 있는 것을 분제승(分諸乘), 그것들의 모든 승교가 모두 일승(一乘)이라는 것을 융본말(融本末)이라고 한다. 오종(五種) 일승(一乘)이라 함은 별교일승(別敎一乘, 초월(超越)절대적인 일승(一乘). 화엄경ㆍ동교일승(同敎一乘, 삼승(三乘))에 공통하는 내재적(內在的)인 일승(一乘). 법화경ㆍ절상일승(絶相一乘, 사량(思量)을 넘어 직접으로 진리를 체현(體現)하는 일승유마경(一乘維摩輕)등 불성평등일승(佛性平等一乘), 평등일승(平等一乘))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어서 성불(成佛)한다고 하는 일승(一乘)ㆍ승만경(勝鬘經)ㆍ열반경(涅槃經) 등ㆍ밀의일승(密意一乘, 밀의의일승(密義意一乘))이라고도 한다. 삼승진실(三乘眞實) 일승방편(一乘方便)의 일승(一乘),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의 5로, 오교(五敎)에 맞춰보면 동별이교(同別二敎)는 원교(圖敎), 절상(絶相)은 돈교(頓敎), 평등(平等)은 종교(終敎), 밀의(密意)는 시교(始敎)가 된다. 삼종일승(三種一乘)이라 함은, 존삼(存三, 밀의일승(密意一乘)을 말함)ㆍ차삼(遮三, 법화경과 같이 삼승(三乘)을 폐차(廢遮)한다)ㆍ표체(表體, 화엄경과 같이 대보살의 일승을 직현(直顯)함)를 말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법화경에 의거하여 법화일승(法華一乘)을 진실로 하는데, 이것을 교행인리(敎行人理)의 사일(四一, 곧 교(敎)도 수행도 수행자도 깨닫는 이치도 이 넷이 다 하나이다)로 해석한다. 지의의 법화현의(法華玄義) 권9 하(下)에는,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의 관계를 10의 면(面)에서 논(論)하고, 잠정적인 삼승(三僧) 등의 권(權, 방편(方便))을 부정(否定)하고 진실로 돌아오는 것(민권귀실(泯權歸實))을 설(說)하고, 특히 진상(實相)의 이(理)에 서서 삼승(三乘) 그대로가 일승(一乘)에 융합(融合)된다고 한다. 곧 법화일승(法華一乘)의 교(敎)를 설호에 따라서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이승이 불타가 될 (이승작불(二乘作佛)) 수 있다고 한다. 

⑤ 진종(眞宗)에서는 서원일불승(誓願一佛乘)이라고 하여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돌아감에 의해서 모든 이가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여 불타가 된다고 하고, 자리(自利)만을 구하는 이승종(二乘種)도 그대로는 태어나지 못하는데(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 자력(自力)의 마음을 뒤집으면 다 같이 왕생하여 불타가 된다고 한다.- 보브아빠]

22. 如來菩提智所應斷 - 여래의 지혜라야 끊을 수 있는 무명주지 

 

世尊(세존) 於此起煩惱(어차기번뇌) 剎那心剎那相應(찰나심찰나상응)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일으킨 번뇌는(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마음이 찰나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世尊(세존) 心不相應無始無明住地(심불상응무시무명주지)

세존이시여, 心不相應=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입니다.

 

世尊(세존) 若復過於恒沙如來菩提智所應斷法(약부과어항사여래보리지소응단법)

세존이시여, 여래의 보리로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항하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더라도, 

一切皆是無明住地所持所建立(일체개시무명주지소지소건립)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 주지로 유지되는 것이며, 세워지는 것이니,

譬如一切種子皆依地生 建立增長(비여일체종자개의지생 건립증장)

비유하면, 마치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나서 건립하고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若地壞者彼亦隨壞(약지괴자피역수괴)

만약 땅이 무너지면 그 씨앗도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如是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여시과항사등여래보리지소응단법)

이와 같이 여래의 보리 지혜로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많아도

一切皆依無明住地生建立增長(일체개의무명주지생건립증장)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나서 세워지고 자라는 것이므로

若無明住地斷者(약무명주지단자) 만일 무명주지가 끊어지면 

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과항사등여래보리지소응단법) 皆亦隨斷(개역수단)

여래의 지혜로 끊을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도 모두 따라 끊어지는 것입니다.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上煩惱斷(상번뇌단)

이와 같이 해서 모든 번뇌와 上煩惱=부수적 번뇌가 끊어지면, 

過恒沙等如來所得一切諸法(과항사등여래소득일체제법)

여래가 얻을 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법에 

通達無㝵一切知見(통달무애일체지견) 㝵 거리낄 애, 그칠 애,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고, 모든 지견이 

離一切過惡(이일체과악) 得一切功德(득일체공덕) 法王法主而得自在(법왕법주이득자재)

온갖 過惡=허물을 여의었으며, 모든 공덕을 얻었으며, 법의 왕이신 法主=법의 주재자로서 자재를 얻었으며 

登一切法自在之地(증일체법자재지지)

모든 법의 자재로운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如來應等正覺正師子吼(여래응등정각정사자후)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 사자후하시기를, 

‘我生已盡(아생이진) 梵行已立(범행이립) 所作已辦(소작이판) 不受後有(불수후유)

나의 일이 이제 끝났고, 梵行=청정한 행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지어 마쳤고, 뒤의 몸=後有을을 받지 아니한다(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 하셨으며,

是故世尊以師子吼依於了義(시고세존이사자후의어요의) 一向記說(일향기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자후로 올바른 이치를 의지하여 한결같이 설하셨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처음 미세한 단계에서 점점 거친 단계로 진행이 된다.
'기신론'에서는 이를 세 가지 미세한 단계와 여섯 가지 거친 단계인 3세(三細) 6추(六麤)의 9상차제(九相次第)로 설명하고 있다.
상응이란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어지는 대상인 객체가 분리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경우를 말하고,
불상응이란 주객의 나뉨이 없는 본래 깨닫지 못한 무명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불상응을 무명주지라 하였다.
또한 이 무명주지가 마치 대지가 온갖 식물의 종자를 싹트게 하여 자라게 하듯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가
무명주지에 의해 일어나 서게 되고 커지게 된다 하였다. 이 무명주지는 오직 여래의 지혜로야 만이 끊을 수 있다 하였다.
ㅡ지안스님]

 

[자기에 있어서의 일생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해 달라고 할 수 없는 거룩한 일생이다. 자기에 있어서의 살아가는 방법, 살아가는 의의는 그 사람에게 있어 둘도 없는 것이다. ‘소작이작(所作已作)’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을 음미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석존에게는 자기의 깨달음에 대한 완성과 일체 중생과 더불어 그 깨달음의 광요(光耀)에 비추어질 것을 원하여 그것이 원성(圓成)되는 곳에 할 일을 다 해 마쳤다라고 하는 실감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우리들은 여기서 석존 성도 직전의 모습을 불전(佛傳) 가운데서 잠시 되돌아보기로 한다.
석존이 성도직전 최후의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악마 나무치의 유혹이 있었다고 불전(佛傳)에 설하고 있다.
그 1절을 보면「네란쟈라(尼連禪) 강변에서 안온을 얻기 위해 정진하며 전심(專心)하고 노력하고 명상(暝想)하고 있는 나에게, 악마 나무치(namuci)는 위로의 말을 하며 나에게 가까이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야위어서 얼굴빛도 나쁘다. 당신의 죽음은 가깝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갈 가망은 천(千)에 하나의 비율이다. 그대여, 살아라, 사는 편이 좋다. 목숨이 있고서야 모든 선행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범행자(梵行者)로서의]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의 공물(供物)을 바쳐야만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고행에 정진한다고 도대체 무엇이 되겠는가』
세존은 악마 나무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안주(安住)하고 최대의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온갖 욕망을 되돌아보지는 않는다. 보라, 이 내 심신(心身)의 청정함을. 악마여, 너의 첫 번째의 군대는 욕망이며, 두 번째의 군대는 마음의 불만이며, 세 번째의 군대는 기갈(飢渴)이며, 네 번째의 군대 는 망집(妄執)이며, 다섯 번째의 군대는 수면(睡眠)이며, 여섯 번째의 군대는 공포(恐怖)이며, 일곱 번째의 군대는 의혹(疑惑)이며, 여덟 번째의 군대는 강정(强情)이다 』
악마 나무치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7년간이나 세존에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붙어 다녔다. 그러나 정각자(正覺者)에게 달라붙을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상은 원시불교 성전의 가장 오래된 위치에 있는 『숫타․니파타』중에 있는 이야기이다.
어느 불전(佛傳)의 자료에 의하면 악마는 또 3인의 여자를 보내어 수행 중의 석존을 유혹했다고 전하고 있다. 3인의 여자에 대해서는 각각 탄하(tanha; 渴愛) 아라티(arati; 不快) 라가(raga; 貪欲) 라고 보고 있다.(다른 경전에 의하면 은애(恩愛)․상락(常樂)․대락(大樂), 욕비(欲妃)․열피(悅彼)․쾌관(快觀), 염욕(染欲)․능열인(能悅人)․가애락(可愛樂),가애(可愛)․가희(可喜)․희견(喜見)이라고도 한다)
이 악마들 및 악마의 심부름꾼[使者]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볼 때, 탐욕․진에․우치라고 하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불선심(不善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수행중의 석존은 자기와의 싸움에 밤을 새운 것 같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의 악마를 항복시킨 석존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가을 하늘과 닮은 맑음과 광대한 자유를 쟁취했다고 볼 수 있다.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의 경지는 이미 그 이상의 해야할 수행도 없고 여래만이 갖는 열 가지의 자재력을 얻어 정법을 펴서 설하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인식작용은 인식기관이 대상과 교류하는 것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성립된다. 불교의 술어에서 말한다면 안근(眼根―여기서 근(根)은 감각기관을 말함)․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이라 하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각각 대응하는 색(色; 물건)․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六境)―경(境)이란 대상(對象)―과 대응에 의하여 인식이 시작된다. 간단히 말하면 식(識)과 명색(名色)―명은 명칭, 색은 형태―즉 온갖 것[개물(個物)]이라는 대상과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인식, 마음의 작용으로 마음이 그지없이 동요하는 것이므로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듯이 한 곳에 멈추지 않고 한 순간 한 찰나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높은 산에 올라가면,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매 발톱꽃이나, 단풍낙엽송 등의 고산식물을 보면 언뜻 기념으로 하고 꺾고 싶어진다. 그 반면에 고산식물을 채취해서는 안 된다는 자율성이 한편에서 머리를 쳐든다. 아름답다고 하는 마음의 작용에서 사람이 보지 않으면 꺾어들고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또 죄의식이 머리를 쳐든다. 아주 작은 한 송이의 식물을 본 것뿐이지만 이와 같은 격렬한 마음의 작용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단 한 송이의 화초라는 대상에 자극된 뿐인 대도 그것에 대응하여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한 순간 한 순간에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를 기(起)의 번뇌라 하며, 그것은 바로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주지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번뇌로 파악한다. 그것은 심왕과 심소가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근저에 있는 근본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근본무명을 끊지 않는 한, 지말(枝末)의 번뇌를 끊는다 해도 참으로 번뇌를 완전히 끊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반대로 근본무명을 끊을 수 있다면 여타의 일체의 번뇌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본무명은 오직 여래의 지혜만이 훌륭하게 끊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거기에 비로소 일체의 공덕을 갖춘 법왕이 될 수 있어 「아생이진(我生已盡), 범행이립(梵行已立), 소작이변(所作已弁), 불수후유(不受後有)」가 성립한다고 끝맺는다.
경문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의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지에 생육하고 있는 종자나 초(草)․목(木)은 모두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수분을 취하면서 저마다의 이름과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지라고 하는 지반(地盤)에 의존하여 생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만일 그 대지가 불에 타서 무너져 버리면 즉시 초․목도 불에 타서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물이 말라서 대지가 갈라지며 세찬 힘으로 대지를 파괴하여 가는 모습을 보며 혹은 기록영화에서 전쟁 중에 원자폭탄이 대지를 뿌리째 불태워 버린 기억을 지금도 선명히 가지고 있다. 초목이 다시 생육하려면 대지가 초목을 생육하기에 알맞은 토양을 회복(恢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기(起)의 번뇌는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무명이라는 번뇌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안다. 갠지스 강의 모래 수에 비교되는 여러 가지의 번뇌도 무명주지라고 하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생육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근본무명은 우리의 분별지(分別智)에 의해서 끊을 수는 없다. 오직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만이 끊을 수 있다. 그 끊어버린 세계에서 비로소 자재의 경지가 가능한 것이다.
불․세존이 '나의 미혹한 생(生)은 다하여 재차 고(苦)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라고 선언한 것은 법왕(法王), 법의 자재자(自在者)가 된 부처님의 진실한 경지를 나타낸 것이며 거기에 여래의 설법의 진실성을 엿볼 수 있다.-혜경스님]


[일체 모든 번뇌는 이 무명주지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수도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상번뇌(上煩惱)도 무명주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일체의 고를 알고, 일체의 집을 끊고, 일체의 멸을 증득하고, 일체의 도를 닦았으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실천적인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청정하고 평등한 열반을 얻은 것으로 세상의 의지할 바가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진정한 열반의 맛인 한맛과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라 설한다.
승만부인은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응당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고 끝내지 못하였으니,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과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였고, 마땅히 증득하여야 할 것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수행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근본무명, 무명주지의 힘은 강력해서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로만이 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이 사바세계에서 과연 성불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교에서 누구나 깨칠 수 있다면서 성불을 강조하고 깨달음을 역설하지만 정작 아라한과 같은 선지식이나 벽지불, 대력보살마저도 성불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불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불은 누구나 이룰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성불의 인연 공덕을 쌓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은 공덕으로 성불하셨듯이 누구나 쉽게 성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1주일만 정진하면 깨칠 수 있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전생부터 닦아온 상근기의 사람이 1주일 동안 용맹정진해서 깨쳤다 하더라도 무명습기의 근본 무명을 모두 소멸한 경지인 성불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 <승만경>의 말씀이다.
우리가 갈 길은 어디인가. 물론 우리가 갈 길은 성불이다. 그 성불로 가기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한다. 낙수가 바위를 뚫듯이 지긋하게 하루하루 부지런히 수행해가면서 육바라밀의 보살행을 실천해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임종 후에는 극락세계에 나야 한다.
역대 선사나 선지식들께서 한결같이 극락왕생을 염하신 것도 극락에만 가 놓으면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고 악도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성불한다는 <아미타경>의 말씀에 의지하신 가르침이다. 극락에만 가면 하루 종일 착한 도반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며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구경에는 성불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을 지어야 하겠다. 나무아미타불! -혜총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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