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二種煩惱

 

煩惱有二種(번뇌유이종) 何等爲二(하등위이)

(이와 같이 아라한과 벽지불이 능히 끊지 못한)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謂住地煩惱及起煩惱(위주지번뇌급기번뇌)

잠재적 번뇌=住持번뇌와 현재적 번뇌=起번뇌이며, 

住地有四種(주지유사종) 何等爲四(하등위사)

잠재적 번뇌=住持번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謂見一處住地(위견일처주지) 

현상 사물을 보고 들음에 있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번뇌=見一處住持煩惱와,

[견일처주지번뇌란, 견혹(見惑)이라 하여 일방적인 편견에서 생기는 번뇌로서 말하자면 지식상의 번뇌이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의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나 잘못된 견해에 바탕을 둔 경우 그 행동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사물의 진리, 도리를 파헤치지 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리에 미혹한 견해를 견혹, 즉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의 번뇌라고 한다.-혜경스님]

欲愛住地(욕애주지)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욕계의 사혹)=欲愛住持煩惱, 

色愛住地(생애주지) 육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색계의 사혹)=色愛住持煩惱,

有愛住地(유애주지)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무색계의 사혹)=有愛住持煩惱가 그 네 가지입니다.

此四種住地(차사종주지) 生一切起煩惱(생일체기번뇌)

이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가 일체 모든 현재적 번뇌=기번뇌를 일으키는 것으로,

起者剎那心剎那相應(기자찰나심찰나상응)

현재적 번뇌=기번뇌란 찰나의 마음과 찰나에 相應=서로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이러한 기번뇌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감정의 변화를 따라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과 서로 번뇌로써 상응해 복잡한 심적 작용인 번뇌를 일으킵니다.)

 

[번뇌란 마음을 교란하는 것으로 선정에 들지 못하는 것이 이 번뇌 때문이다.
주지번뇌는 번뇌의 근본을 말하고 기번뇌는 주지번뇌로부터 파생되어 생겨나는 번뇌다.
이 번뇌를 견도위와 수도위에서 끊는 종류를 나눠 견혹(見惑) 수혹(修惑)이라고도 말하는데
견일처주지는 견혹이며, 욕애주지는 수혹이다.수혹을 사혹(思惑)이라고도 한다.
견혹은 깨닫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견도위에 들어가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를 관찰하여 끊게 된다.
욕애주지는 욕계의 사혹으로 오욕락 등에 집착하여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번뇌다.
색애주지는 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이며 유애주지는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이다. 무명주지는 곧 근본무명으로 모든 번뇌가 이를 의지해 일어난다. 파순(波旬)은 욕계 육천의 임금으로 선정을 방해하는 마왕(魔王)이라 한다.ㅡ지안스님]

 

[감정상의 번뇌를 사혹(思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3계(三界)에 배당하여 욕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2)욕애주지의 번뇌, 색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3)색애주지의 번뇌.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를 (4)유애주지의 번뇌라 한다. 이 세 가지 (2), (3), (4)는 사혹의 번뇌이다.
여기서 3계(三界)란 인간, 유정이 유전하고 상속하는 미혹한 세계의 과보로 성립한 것으로서 (1)욕계 (2)색계 (3)무색계의 셋을 말한다.
욕계(欲界)란, 욕소속(欲所屬)의 계(界), 색계(色界)란, 색소속(色所屬)의 계, 무색계(無色界)란, 무색소속(無色所屬)의 계라는 의미여서 애욕, 특히 식욕, 음욕, 수면욕이 소속하는 계를 (1)욕계라고 한다. 이것은 유정, 인간이 머무는 세계인데 이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및 천신의 6욕천(六欲天)이 포함된다.
색계는 욕계의 더럽고 사나운 색(色; 物質․肉體)을 떠났어도 미묘 청정한 색, 즉 물질로부터 이룩되는 세계로서 일명을 유색천(有色天), 색행천(色行天)이라고도 한다. 이 세계는 4선(四禪)을 닦은 사람이 죽은 후에 태어나는 곳으로서 천상의 초선천(初禪天), 2선천(二禪天), 3선천(三禪天) 및 4선천(四禪天)이 포함된다.
무색계는 무색천(無色天) 또는 무색행천(無色行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물질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물질적인 생각(色想)을 떠난 4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사후에 태어나는 천계(天界)이다.
그런데 이 3계 가운데에서 욕계와 색계에서 일어나는 사혹(思惑)을 경문은 (1)욕애주지, (2)색애주지, (3)유애주지의 번뇌라고 한다. 이들은 각각 유정을 욕계에 주(住)하도록 하는 사혹, 색계의 선정에 머물게 하는 것을 집착하여 이탈하고 있지 않는 사혹 즉 생사를 반복하는 미혹의 세계를 떠나는 사혹을 말하며, 무색의 선정으로 바꾸어 머물게 하여 이탈시키지 않는 사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번뇌는 수행에 의해서 끊어 없애지 않으면 안 되나 번뇌를 끊는 수행 단계의 차이에 의해 번뇌를 견혹과 사혹[修惑]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견혹은 견도(見道)에 의해서 끊을 수 있는 번뇌로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진리를 듣는 것에 의해 끊어 없앤다지만 수도에 의해서 끊어 없어지는 사혹 쪽은 이론에 의하는 것같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점점 수행함에 의해서 단제되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견혹돈단파석(見惑頓斷破石)과 같이, 사혹점단우사(思惑漸斷藕絲)와 같이' 라는 말과 같이 돌을 자르는 것처럼 빨리 끊을 수 있는 견혹에 반하여 연꽃처럼 줄기를 꺾어도 가느다란 실이 뒤에 남아서 쉽게 꺾을 수 없는 사혹은 점차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불교(아비달마 불교)의 서적인 『구사론』에 의하면 견혹은 사혹보다도 작용이 격렬하다 하며 견혹을 「이사(利使)」라고 하며 사혹을「둔사(鈍使)」라고 한다. 이 견혹에 (1)신견(身見) (2)변견(邊見) (3)사견(邪見) (4)견취견(見取見) (5)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는 성질이 맹렬하고 날카로운[猛利] 다섯 이사(利使)가 있다.
(1)신견은 본래 5온(인간을 형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모임)이 임시로 화합한 존재인 유정[人間]의 신심(身心)을 집착하여 내[我], 내 것[我所]에 집착하는 견해이다. (2)변견이란, 내 몸이 죽은 후에도 상주한다고 하는 상견(常見)과 사후에는 단멸하고 만다는 단견(斷見)에 집착하는 견해이다. (3)사견은, 모두가 잘못된 망견(妄見)을 말하며 (4)견취견은, 신견, 변견, 사견을 진실하다고 집착하는 망견을 말하고, (5)계금취견은, 정인(正因) 정도(正道)가 아닌 것을 정인 정도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것에 반하여 그 성질이 느리고 둔하여 제압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혹에는 다섯 가지의 둔사(鈍使)가 포함된다. 즉 탐, 진, 치, 만(慢), 의(疑)의 다섯이다. 사(使)란, 우리의 마음을 부려[使]서 미혹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라고 보는 네 가지 주지의 번뇌가 기본이 되어 실제로 활동하는 번뇌를 기(起)의 번뇌라고 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의 형태, 108 또는 8만 4000이라고 하는 번뇌로 되어 구체적인 것으로 된다. 그것은 마치 초목이 자라는 것 같이 마음의 잡초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가 되는 번뇌와 활동이 되어 나타나는 번뇌의 두 종류가 있으나 이 번뇌들은 어찌하여 생기(生起)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불교의 이해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본문에 「기(起)는 찰나심(刹那心)의 찰나(刹那)에 상응(相應)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한 찰나마다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외계의 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마음은 그것에 대응하여 가는 것이다.
일본 성덕태자의『승만경의소』에는「찰나심(刹那心)」이란 식심(識心)을 말하며, 「상응(相應)」이란 수(受)․ 상(想)․행(行) 등을 말한다. 우리 인간들의 식심(識心)은 그대로의 감수(感受) 등의 작용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인식이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여섯 가지의 대상, 즉 6경(六境)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고 하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六根)이 대응하고 안․이․비․설․신․의라는 6식(六識)이 생긴다. 그리고 이 근(根)․경(境)․식(識)의 3사(三事)가 화합함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 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6식(六識) 중에서 앞의 5식[前五識]은 의식(意識)에 의해서 통일되어서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인식이 생긴다. 이리하여 「식(識)」은 인식의 주체가 되고 심왕(心王)이라 이름한다. 이 심왕이 일어날 때, 그에 종속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심소(心所)라고 부른다.
심법 또는 심왕은 하나로서 마음의 주체라 이름하고, 그 체(體)는 앞서 말한 6식이다. 이 마음은 의(意) 또는 식(識)이라 하며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에 반해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심소법(心所法)이라 하여 마흔 여섯[四十六]을 헤아린다. 이것은 심왕이 일어날 때 이것에 수종하여 일어나는 종속적 심작용이다. 이 심왕과 심소는 반드시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심소의 46종을 상응법(相應法)이라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그 아름다운 꽃인 대상, 즉 경(境)은 향기가 그윽하고 복숭아 색으로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복숭아꽃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런 경우 ‘복숭아꽃이다’라고 하는 인식은 심왕과 심소가 공동작용을 하여 우리에게 ‘복숭아꽃이다’라고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외계의 사물에 작용하여 그 위에서 자기본위적인 마음의 작용이 생긴다. 이를테면 저 꽃을 내가 가지고 싶다, 꺾어서 내 방에 꽂아 두고 싶다 등등의 마음의 작용이 생긴다. 거기에 자기중심의 번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번뇌는 외계의 대상, 외계의 사물로부터 받는 감각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근원적으로 우리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번뇌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원점이라고 해도 좋으나 무시이래(無始已來)의 무명이라는 번뇌이다. 이 무명주지의 번뇌가 근본이 되어 앞서 말한 4주지(四住地)의 번뇌의 종자가 줄기로 되고 다시 그 줄기에서 108가지 번뇌의 잎이 되고 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밖으로 나타난 잡초라고 일컫는 번뇌를 베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마음속에 잠재하는 잡초의 뿌리를 캐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전(南傳)『법구경』의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저녁 무렵 기원정사의 집회당(集會堂)에 많은 비구가 모여서 이것저것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구들은 오랜 기간의 행걸(行乞) 생활로부터 오랜만에 정사(精舍), 즉 절에 돌아온 때였으므로 그들의 화제(話題)는 자연히 어제까지 행걸(行乞)해 온 그 마을 그 거리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때 스승인 붓다가 이 집회당에 나타나셔서, “비구들이여, 지금 거기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가”하고 물었다. 비구들은 “예, 이 마을, 저 거리, 그곳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그것은 모두 외계의 토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참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외계(外界)의 토지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토지이다. 마음의 밭[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붙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욕망을 쫓아서 향하는 마음을 제어(制御)하는 것은 참으로 좋다 제어된 마음은 안락을 가져오리. (『법구경』35偈).’-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원효소- 혹 어떤 자는 설한다. “견도에서 끊어져야 할 번뇌는 見一處라고 하고, 수도에서 끊어져야 할 번뇌는 3가지 愛라 하고, 법집의 분별을 무명이라 설한다. 이 5가지는 6식에 있으면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 5가지 종자는 5가지 주지의 惑이라 한다.” 혹 어떤 자는 설한다. “5가지 예리한 번뇌는 견일처 주지번뇌라 하고, 욕계의 단계에서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일체 번뇌는 욕애라 하고,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색계 번뇌는 색애라 하고, 무명주지와 견일처를 제외한 무색계 번뇌는 유애라 한다. (중략)” 혹 어떤 자는 설한다. “근본식에서 생득주지는 견일처라고 하고, 작득주지는 3가지 密로 분류한 3가지 유애이다. 근본을 짓기 때문에 이 4가지 종류를 합하여 비롯함이 없는 무명주지라고 설명하고, 곧바로 마음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므로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일체중생의 식은 (중략) 오직 붓다만 그 처음과 끝을 알 뿐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3명의 주장이 모두 그 이유가 있다. (중략) 지금 이 경전에 의거하여 하나의 의미를 도출하면, 전체적으로 번뇌는 3종류가 있다”라고 설한다. (중략) '대승기신론'에서는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하며, (중략) 홀연히 망념을 일으키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라고 설한다. 이 문장에서 보면 제8식에서 현기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궁극적 의미의 진리를 등져 일어나는 것을 혹이라고 한다. 이것으로써 주지를 삼으며, 이에 주지의 이전에 더 이상 어떤 법도 일어남이 없다. 그러므로 비롯함이 없는 무명주지라 한다”라고 설한다. 이 문장들에 의거하여 무명 주지번뇌는 오직 현기일 뿐 종자가 아니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世尊(세존) 心不相應無始無明住地(심불상응무시무명주지)

세존이시여, 心不相應=마음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은 無始無明=시작을 알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마음과 외부의 경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항상 존재하는 번뇌의 근본인 무명주지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음은 무시(無始)의 무명주지(無明住地)이다’라고 하는데 이 시원적(始原的)인 번뇌야말로 우리 인간의 원점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망상, 번뇌가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여기에 심불상응(心不相應)이란 외계로부터의 자극에 응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서 여러 가지 기번뇌(起煩惱)의 찰나심이라는 찰나상응(刹那相應)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의 기번뇌는 찰나 찰나에 생기하는 것이지만 무명은 그 근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시이래의 번뇌라고 하는 무명은 인간이 영원하게 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인가 아닌가.
여기에 우리는 임마누엘 칸트(Kant)가 문제로 삼은 근본악(根本惡: Radikalbose)의 개념을 상기(想起)한다. 과연 무명은 그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까.
무명(無明; avija, avidya)이란 원래 명(明), 명지(明知), 즉 진실한 지혜가 없는 것,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결여(缺如)한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지혜, 여실지견을 획득할 때 무명은 명(明)으로 됨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근본악을 문제로 하는 칸트의 입장은 ‘나의 행위가 보편적 율법에 상응하지 않아 그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려고 한다. 더구나 선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곳에 윤리에서 종교의 세계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이해된다.
불교의 입장은 선(善)과 불선(不善), 무명(無明)과 명(明)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표리(表裏)의 관계에 서서 파악하고 무명이 여실지(如實智)에 의해서 소멸되는 곳에 명(明)이 나타난다고 본다.
탐수면(貪隨眠)을 버리고 진수면(瞋隨眠)을 없애[除去]고 내가 있다 하는 견만수면(見漫隨眠)을 근절하여 무명을 버리고 명을 일으켜서 현법(現法)에서 고(苦)의 멸(滅)을 이룬다. (『중부(中部)』제1권) 라고 한다. 말하자면 번뇌의 내면에의 전환을 생각하고 있었던 점에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무명의 멸, 즉 ‘진실지(眞實智)의 획득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승만경』은 이 무명주지는 비유해서 말하면 욕계 제6천(第六天)의 마왕 파순의 마(魔)의 권속을 시켜서 정법의 홍통을 방해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 힘은 극대(極大)하여 말하자면 번뇌의 왕이 된다. 이 번뇌가 있는 이상 4종의 주지번뇌의 근절은 있을 수 없고 또한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의 보리지(菩提智)에 의해서만이 없앨 수 있는 것이어서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혜경스님]

世尊(세존) 此四住地力(차사주지력) 一切上煩惱依種(일체상번뇌의종)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은 모두 부수적 번뇌=上煩惱의 의지할 종자이지만,

比無明住地(차무명주지) 筭數譬喩所不能及(산수비유소불능급) 筭 셈 산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큰 힘에 비교하면 산수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일체의 선한 행위를 방해하려는 번뇌인 상번뇌가 의지할 곳이며 종자입니다. 그러나 무명주지번뇌에 비하면 다른 여타의 번뇌는 숫자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이 세력이 약합니다.)

 

世尊(세존) 如是無明住地力(여시무명주지력)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 주지번뇌의 힘은 

於有愛數四住地(어유애수사주지) 無明住地其力最大(무명주지기력최대)

네 가지의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보다 매우 큰 것이니,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무색계(無色界)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유애주지번뇌(有愛住地煩惱)와 색계나 욕계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수번뇌 등 네 가지 종류의 주지번뇌의 세력보다 더 큽니다.)

譬如惡魔波旬(비여악마파순) 於他化自在天色力壽命(어타화자재천색력수명)

마치 악마 파순이 (욕계의 여섯 번째 하늘) 타화자재천에서 육체적인 능력과 수명과 권속과 
眷屬衆具自在殊勝(권속중구자재수승)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 및 장신구를 가장 잘 이용하듯이, 

如是無明住地力(여시무명주지력) 於有愛數四住地(어유애수사주지)

이러한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은 네 가지의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주지번뇌 보다 

其力最勝(기력최승) 恒沙等數上煩惱依(항사등수상번뇌의)

그 세력이 강하니, 항하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수적 번뇌=상번뇌의 의지하는 바가 되며, 

亦令四種煩惱久住(역영사종번뇌구주) 역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주지번뇌를 오래 머물도록 하므로,

阿羅漢辟支佛智所不能斷(아라한벽지불지소불능단)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혜로도 능히 끊지 못하며, 

唯如來菩提智之所能斷(유여래보리지소능단)

오직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菩提智라야 능히 끊을 수 있는 것이니,

如是世尊(여시세존) 無明住地最爲大力(무명주지최위대력)

이와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잠재적 번뇌=주지번뇌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이 무명주지번뇌의 세력은 저 네 가지 종류의 주지무명의 세력보다 강합니다.)

 

[<승만경>은 번뇌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지번뇌(住地煩惱)와 기번뇌(起煩惱)이다. 주지번뇌는 모든 생물을 안고 키우는 대지처럼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 그리고 기번뇌는 실제로 일어나는 번뇌이다. 근본이 되는 주지번뇌는 잘못된 미혹한 견해(見惑), 편견에서 생기는 지적인 번뇌인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계의 모든 경계를 탐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욕애주지(欲愛住地)·색계의 모든 경계를 탐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색애주지(色愛住地)·무색계의 마음에 집착하는 사혹(思惑)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번뇌인 유애주지(有愛住地)로 나뉜다.
이 네 가지 주지번뇌를 낳은 번뇌가 바로 무명주지 번뇌이다. 이 무명주지의 번뇌가 뿌리가 되어 네 가지 주지번뇌의 종자에서 자란 나무에서 백팔번뇌, 팔만사천번뇌 등으로 셀 수 없는 기번뇌의 잎들이 피어나는 것이다.
승만부인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수행을 닦아 증득한 지혜로 네 가지의 주지번뇌를 제거할 수 있지만 무명주지만은 끊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여래의 지혜(佛智)’만이 이 무명주지마저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덧붙여 생사가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미혹한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나누는데, 욕계는 식욕, 음욕, 수면욕이 치성한 세계로 유정, 인간이 머무는 세계인데 이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및 천신의 6욕천(六欲天)이 포함된다. 그리고 색계는 욕계의 탐욕은 없으나 미묘한 형체(色)는 있는 세계로 4선(四禪)을 닦은 사람이 죽어서 나는데 천상의 초선천(初禪天), 2선천(二禪天), 3선천(三禪天) 및 4선천(四禪天)이 포함된다. 세 번째 무색계는 색계와 같은 미묘한 형체도 없는 순전한 정신세계이므로 물질적인 생각[色想]을 떠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천계(天界)이다.
이 삼계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주지번뇌인데 이 주지번뇌는 아라한이나 벽지불 등 2승이 멸할 수 있지만 주지번뇌를 일으키는 무명주지번뇌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기번뇌가 아니라 ‘마음이 상응하지 않는, 시작이 없는’ 심불상응(心不相應)의 태초 이전 무시(無始)의 번뇌라서 오직 여래의 보리의 지혜(菩提智)만이 끊을 수 있다고 한다.-혜총스님]

['仏全'4에 기술된 '승만경보굴'의 설명을 예로 들면, ‘일승’이란 명칭이 경의 제목에도 나타나고 다섯 번째 장의 제목으로도 제시되는 이유를 밝히는 설명 방법으로 활용된다. 다시 말하면 경의 제목으로서 일승은 삼세제불이 세간에 출현하신 본래의 의도를 나타낸 그 體이고, 다섯 번째 장의 제목으로서 일승은 4가지 측면에서 그 用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수행차제라면 승만이 처음 붓다를 찬탄하고 섭수를 요청한 이후 보리심을 발하고, 그 다음 보살행을 수습하는데, 그 수습으로 인해 스스로 수계를 서원하고 그 원행이 이루어지면 정법을 증득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둘째 섭수의 측면이라면 초지 이상 불지에 이르기까지 섭수장에서는 십지 이상에 오르는 것을, 일승장에서는 그 불과를 밝히기 위해서이고, 

셋째 一門 인과 차제라면 첫 1장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음 3장은 보살행을 수습하는 것이고, 일승장은 불과를 획득하는 것을 설하기 위해서이고,

넷째 설법 차제라면 첫 3장은 설법의 방편을 일으켜 사람과 법을 중요하게 여기어 헐뜯음을 그치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고, 섭수장 이후는 바로 종지를 열어 밝히는 것으로서 行法 가운데 섭수장과 일승장이 포함된다고 해설하는 등등이다(p.94上5-下15 참조)-김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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