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3  2

 

상(想, saṃjñā)심소

想,謂於境取像爲性,施設種種名言爲業。謂要安立境分齊相,方能隨起種種名言。

‘상(想, saṃjñā)심소’는 대상에 대하여 형상을 취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갖가지 명칭을 시설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반드시 대상의 자상과 공상의 분제상(分齊相)을 안립하여 따라서 능히 갖가지 명칭(개념화)을 일으키는 것이다.

 

상(想, saṃjñā)심소는 ‘표상(表象) 작용’ ‘개념화 작용’의 심소이다. 능히 자기 대상의 구체적인 양상을 안립하며, 대상의 형상을 취하여 명칭을 붙이는(언어와 일치할 수 있는) 개념화 작업을 한다.

 

(思, cetanā) 심

思,謂令心造作爲性,於善品等役心爲業。謂能取境正因等相,驅役自心,令造善等。

‘사(思, cetanā)심소’는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선품(善品) 등에 대해서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대상의 바른 원인인 정인(正因, 선)ㆍ사인(邪因, 악)ㆍ구상위인(俱相違因, 무기) 등의 상(相) 취하여 자기 심왕을 작용시켜서  등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사(思, cetanā)심소는 ‘의지 작용’으로서, 심왕ㆍ심소로 하여금 선ㆍ악의 대상에 대해 선ㆍ악의 심작업(心作業)을 일으키게 하여 업도(業道)의 근원이 된다.

*정인(正因)은 선(善)ㆍ사인(邪因)은 악(惡)ㆍ구상위인(俱相違因)은 무기의 업을 일으키는 원인(因)이다.

 

此五旣是遍行所攝故,與藏識決定相應。其遍行相後當廣釋。此觸等五,與異熟識行相雖異,

이러한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 오심소(五心所) 변행심소(遍行心所)에 포함되기 때문에 장식(藏識)과 반드시 상응하며,  변행심소의 상은 나중에 이 논서의 제5권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는 이숙식과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주관적인 견분見分)이 비록 다르지만,

유식학에서 심왕과 심소는 자체가 다른 왕소체별설(王所體別說)이라고 하기 때문에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주관적인 견분見分) 달리하며,

심왕은 대상의 전체적인 윤곽인 총상(總相) 취하고,

심소는 총체적인 모습과 함께 구체적인 총상(總相)과 별상(別相)까지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상 인식작용이 가능해진다.

 

而時、依同,所緣事等,故名相應。

작용하는 때의 시(時, 시동時同)ㆍ의지처인 의(依, 의동依同)가 동일(同)하고,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연등所緣等, 상분)ㆍ자체의 사(事, 사등事等, 자체분)는 비슷한 사등(事等)이니,

따라서 ‘상응(相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의 상응(相應)이라는 말을 해설한 것으로,

상응(相應, saṁy- ukta)의 개념에는 네 가지 뜻이 있어서,

첫째 심왕과 심소가 현기(現起)함에는 시간이 같은 시동(時同),

둘째 심왕과 심소는 감각기관인 소의근(所依根)이 같은 의동(依同),

셋째 심왕과 심소는 그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상분相分)이 비슷한 소연등(所緣等),

넷째 심왕과 심소는 그 자체분의 사(事)가 비슷한 사등(事等)이며,

여기에서 사등(事等)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즉 유식학에서는 왕소체별설(王所體別說)의 입장이므로 심왕과 심소가 동일찰나에 비슷한 대상에 각각 하나씩 현기(現起)하며, 그 수(數)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씩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체분이 비슷한 사등(事等)이라고 말한 것으로, 사의평등(四義平等)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식학에서는 심왕과 심소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견분)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소승에서는 그것이 비슷하다고 보고 사의평등에 행상등(行相等)을 첨가해서 오의평등(五義平等)을 말하고 있다.

 

此識行相極不明了,不能分別違、順境相,微細一類,相續而轉。是故唯與捨受,相應。

 식은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명료하지 않고, 거슬림(違)과 수순함(順) 대상인 경상(境相)을 분별할  없으나  행상은 미세한  종류(이숙무기성)로서 상속하면서 전전하므로, 따라서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제8아뢰야식이 5수(受) 가운데 오직 사수(捨受)와 함께함을 밝힌 것으로, 이를 수구문(受俱門)이라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는 인위(因位)에서이고, 만약 불위(佛位)라면 제8식은 인식작용이 명료하며 대상의 위순(違順)의 모습을 분별하고, 나머지 세 가지는 인과위(因果位)에 공통된다.

 

又此相應受唯是異熟。隨先引業轉不待現緣,住善惡業勢力轉故,唯是捨受。苦、樂二受,是異熟生非眞異熟。待現緣故非此相應。

또한 이것과 상응하는 수(受)는 오직 이숙(異熟)으로, 이전의 인업(引業)에 따라서 전전하고, 수순함(順)과 거슬림(違) 등의 현행의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며, 선ㆍ악업의 힘에 따라 전전하기 때문에 오직 사수(捨受)일 뿐이며,

고수(苦受)ㆍ낙수(樂受)는 이숙생(異熟生)일 뿐, 참다운 이숙이 아니며,

현행의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又由此識常無轉變,有情恒執爲自內我。若與苦、樂二受相應,便有轉變寧執爲我?故此但與捨受相應。

또한  식(識)은 항상하고 전변함이 없는 일류(一類)이라서, 유정(제 7식)이 항상 집착하여 자신의 내면의 자아로 삼는 것이니,  만약 고수ㆍ낙수와 상응한다면, 고(苦)ㆍ낙(樂)이 전변하므로 상일(常一)이 아니므로  전변함이 있게 되거늘, 어떻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若爾,如何此識亦是惡業異熟?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식(識)이 또한 악업의 이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설일체유부 등이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 것으로, 사수(捨受)는 적정(寂靜)한 것이므로 선악에 의해 그것을 초감(招感)해야 하는데, 제 8식이 이숙(異熟)이라고 말한다면, 선ㆍ악업에 의해서도 초감하듯이 악업으로써 적정의 사수(捨受)의 과(果)를 초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旣許善業能招捨受,此亦應然。捨受不違苦樂品故,如無記法善惡俱招。

▷답한다; 선업이 능히 사수(捨受)를 부를  있다고 인정한다면, 따라서 이것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사수는 괴로움의 품류인 고품(苦品)과 즐거움의 품류인 낙품(樂品)에 거슬리지 않기 때문에, 무기법이 선ㆍ악에 초감(招感)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何此識非別境等心所相應?互相違故。

▷외인(外人)의 질문; 어찌하여 이 식(識)은 별경심소(別境心所) 등과 상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 8식이 5변행심소 이외에 다른 심소와 함께하지 않는 까닭을 밝힌 것이다. 

謂欲希望所樂事轉,此識任運無所希望。勝解印持決定事轉。此識瞢昧無所印持。念,唯明記曾習事轉。此識昧劣不能明記。定,能令心專注一境,此識任運剎那別緣。慧,唯簡擇德等事轉,此識微昧不能簡擇。故此不與別境相應。

'욕(欲)심소'는 좋아하는 것을 희망하여 전전하는 하여,  식(識)은 업을 따를 뿐 희망하는 것이 없으며,

'승해(勝解)심소'는 결정된 사물을 분명히 지녀서 전전하는 하여,  식(識)은 몽매하여 분명히 지니는 바가 없으며,

'염(念)심소'는 오직 예전에 익힌 일을 분명하게 기억해서 전전하는 하여,  식(識)은 어둡고 미약해서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며,

'정(定)심소'는 능히 심왕으로 하여금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게 하는 하여,  식(識)은 자연히 찰나마다 따로 반연하며,

'혜(慧)심소'는 오직 덕(德) 등의 일을 간택해서 전전하는 하여,  식(識)은 미세하고 어두워서 간택하지 못하므로,

따라서 이 식(識)은 별경심소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此識唯是異熟性故,善、染污等亦不相應。惡作等四無記性者,有閒斷故定非異熟。

이 식(識)은 오직 이숙성이기 때문에 선(善)ㆍ염오(染污) 등의 심소와도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제8식은 선심소(善心所)ㆍ번뇌심소(煩惱心所)ㆍ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와 상응하지 않는다.)

오작(惡作) 등의 네 가지의 부정심소(不定心所)인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사무기성(四無記性)이지만 잠깐씩 단절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숙이 아니다. 

 

法有四種:謂善、不善、有覆無記、無覆無記。阿賴耶識何法攝耶?此識唯是無覆無記,異熟性故。

법에 네 가지가 있으니, 선(善)과 불선(不善),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며,

이 가운데에서 아뢰야식은 어느 법에 들어가는가?이 식(識)은 오직 무부무기이니, 이숙성이기 때문이다.

 

*무기(無記)는 사물의 체성이 중용(中容)으로서,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기별(記別)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부(覆)는 은복(隱覆)ㆍ은폐(隱蔽)의 뜻으로서 염오의 성품이므로, 유부무기(有覆無記)는 망혹(妄惑)의 체성의 세력이 매우 미약하며, 구생기(俱生起)의 아집과 법집, 즉 제7식이 유부무기성으로, 성스러운 도(道)를 장애하여 청정심을 은폐한다.

무부무기(無覆無記)는 체성이 망혹(妄惑)이 아니고, 세력이 미약하여 선악이 아닌 것으로, 아뢰야식의 자체(體)와 5근(根) 및 외부세계의 산하초목 등이 무부무기성이다.

 

이어서 아뢰야식이 3성(性) 중에서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을 밝힌다(三性門).

異熟若是善染污者,流轉還滅應不得成。又此識是善染、依故,若善染、者,互相違故,應不與二俱作所依。

이숙식이 만약 선(善)이나 염오(染污)라면,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은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하며,

또한 이 식(識)은 선과 염오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선과 염오는 서로 다른 것으로, 그 둘이 같이 의지할 수 없어야 하며, 

 

*유전(流轉)은 고제(苦諦)ㆍ집제(集諦)이고,

*환멸(還滅)은 멸제(滅諦)ㆍ도제(道諦)이다.

만약 제8식이 오직 선성(善性)이라면 유전이 없어야 하고, 오직 염오성이라면 환멸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又此識是所熏性故,若善染者如極香臭,應不受熏。無熏習故,染淨因果俱不成立故

또한 이 식(識)은 훈습을 받아들이는 체성인 소훈성(所熏性)이기 때문에, 선과 염오는 매우 향기로운 것과 악취 나는 것과 같이, 서로 훈습을 받지 않아야 하며, 훈습이 없기 때문에 잡염ㆍ청정의 원인ㆍ결과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설일체유부 등의 비판에 대하여 답변한 것으로, 그들이 훈습의 식(識)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여서, 논주가 답하기를, 만약 훈습이 없다면 잡염ㆍ청정법의 인과(因果)가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이미 훈습이 없기 때문에 종자도 없어야 하고, 만약 종자가 없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되며, 만약 원인이 없다면, 결과 역시도 없어야 한다고 논파한 것이다.

 

此唯是無覆無記。覆謂染法,障聖道故,又能蔽心令不淨故。此識非染故名無覆。

따라서 이 식(識)은 오직 무부무기이니, 은폐하는 부(覆)는 잡염법을 말하는 것으로, 성스러운 도(道)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또한 능히 마음(법성심ㆍ의타기심)을 은폐하여서 청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 식(識)은 잡염이 아니므로 무부(無覆)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記謂善、惡。有愛、非愛果及殊勝自體,可記別故。此非善、惡故名無記。

기(記)라는 것은 선과 악을 말하는 것으로, 애착함과 애착하지 않음의 결과를 갖는 뛰어난 자체(自體)이므로 기별(記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선이나 악이 아니므로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며, 

 

觸等亦如是者,謂如阿賴耶識唯是無覆無記性攝,觸、作意、受、想、思亦爾。諸相應法必同性故。

'삼십송'의 제4게송에서, ‘촉(觸) 등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오직 무부무기성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오심소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니, 모든 상응법은 반드시 심왕과 같은 성질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심소례동문(心所例同門)으로, 이것은 제8식 자체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10의(義) 중에는 포함되지 않고 8단(段)에서 다룬다.

 

又觸等五如阿賴耶亦是異熟。所緣、行相俱不可知,緣三種境,五法相應,無覆無記。故說觸等亦如是言。

또한 촉(觸) 등 다섯 심소도 아뢰야식과 같이 역시 이숙이며,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을 모두 알기 어려우며,

세 가지 대상인 3류경(類境) 성경(性境)ㆍ독영경(獨影境)ㆍ대질경(帶質境)을 반연하며,

다섯 가지 법과 상응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촉(觸)인 경우, 접촉하는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4심소와 심왕과 상응하며,  나머지 4심소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무부무기이므로, 따라서 ‘촉(觸) 등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류경(類境), 즉 성경(性境)ㆍ독영경(獨影境)ㆍ대질경(帶質境)으로,

성경(性境)은 5관(官)에 비치어 오는 것을 5식(識)이 대상으로 해서 인식하는 객관세계로써 곧 제8식의 상분(相分)으로서의 대상을 말하며,

독영경(獨影境)은 주관이 단독으로 나타낸 환영(幻影)으로서 따로 객관적 존재가 없는 것으로, 예를 들면 토끼의 뿔 등을 말하며,

대질경(帶質境)은 본질은 있으나 그대로 영사(映寫)되지 않은 것으로 예를 들면 노끈을 뱀으로 잘못 아는 것 등을 말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3  1

 

*아뢰야식과 상응하는 5변행심소(遍行心所), 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을 설명함

此識與幾心所相應?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阿賴耶識,無始時來,乃至未轉,於一切位,恒與此五心所相應。以是遍行心所攝故。

 식(識)은 몇몇 심소(心所)와 상응하는가?

항상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와 상응하며, 아뢰야식은 아득한 옛부터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를 이루기 이전의 금강무간도(金剛無間道)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위에서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와 상응하나니,

이것은 두루 작용하는 심소인 변행심소(遍行心所)이기 때문이다.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 수행에 의해 ‘소의(所依, 의타기依他起)를 전환시키는 것’을 말하는, 즉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 의타기성, 8식 혹은 지종의持種依인 아뢰야식)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번뇌에 오염된 8식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되는 전식득지(轉識得智)하여서, 아뢰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5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된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8식 모두에 언제나 상응해서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으로, 이 심소는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 모두에 두루 일어나며, 3계(界)ㆍ9지(地)의 일체제(一切地)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으로, 

유심무심(有心無心)의 모든 순간의 일체시(一切時)에 일어나고, 변행의 5심소는 언제나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이다. 이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가 있다.

 

(觸, sparśa) 심소
觸謂三和、分別變異,令心、心所,觸境爲性,受、想、思等所依爲業。

‘촉(觸, sparśa)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세 가지의 화합인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달라지는 변이(變異)하여서 분별(分別)하는 것을 말하며,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체성(體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는다.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을, 업용(業) 간접적인 작용을 말하며, 이하에서는 심소의 해설에 있어서 모두  체성과 업의  작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촉(觸, sparśa) 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즉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최초의 접촉에 해당되며, 이로써 인식의 장(場)이 열리게 된다.

안근(眼根)과 색경(色境)이 연(緣)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고, 세 가지(根ㆍ境ㆍ識)의 화합이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촉심소를 일어나게 하며, 반드시 촉심소에 의해 심왕ㆍ심소가 화합하여 하나의 대상에 접촉하게 된다.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란 감각기관인 소의근(所依根)ㆍ식은 능연식(能緣識)ㆍ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으로, 여기서 촉(觸, sparśa)심소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촉은 결과(果)이고, 세 가지의 화합은 원인(因)이며,

삼사화합(三事和合)가 화합하는 곳에서 촉이 생겨난다고 하는 삼화생촉설(三和生觸說)은 설일체유부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경량부는 삼화성촉설(三和成觸說)을 주장하여서 세 가지가 화합하는 곳이 바로 촉이며 별도로 새롭게 촉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변이(變異)의 뜻은,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이 각각 별도로 있을 때에는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나, 셋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각자의 작용을 현현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세 가지가 화합될 때는 뛰어난 작용을 일으켜서 이전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여기에서 변이(變異)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분별(分別)은 상사(相似)의 의미로서, 일반적인 사유분별에서의 분별이 아니며, 본문에서 변이(變異)한 것에서 분별한다는 뜻은, 즉 세 가지 근경식(根ㆍ境ㆍ識)이 화합하여 촉이 생겨나고, 이 때의 셋은 화합 이전과 크게 다른 변이(變異)한 것으로써 생겨난 촉은 다시 셋의 화합을 강화시켜서 모두 대상에 접촉하게 한다.

이 때에는 촉이 원인(因)이고 셋의 화합은 결과(果)가 되며, 

본문에서 분별, 즉 상사(相似)란 첫째, 세 가지의 화합된 상태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고,

둘째, 세 가지의 화합으로써 촉을 생겨나게 한 것과 비슷하게 수(受) 등을 일으키는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작용을 가리킨다.


謂根、境、識更相隨順故,名三和。觸依彼生,令彼和合,故說爲彼。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이 다시 서로 수순하기 때문에  가지의 화합인 삼화(三和)라고 이름하며,

촉(觸)심소가 그 근경식(根ㆍ境ㆍ識)에 의해서 생기(生起)하고, 그 셋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촉(觸)을 세 가지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말한 뜻을 다시 부연 설명한 것으로,

첫째, 촉이 근경식(根ㆍ境ㆍ識)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는 셋의 화합인 삼화(三和)를 원인(因)으로 하며,

둘째,  근경식(根ㆍ境ㆍ識)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는 경우는 셋의 화합인 삼화(三和)를 결과(果)로 한다.

이와 같이 인과(因果)에 따라서 촉을 세 가지의 화합인 삼화(三和)라고 말한다.

 

三和合位,皆有順生心所功能,說名變異。觸似彼起故,名分別。根變異力,引觸起時,勝彼識、境故,集論等,但說分別根之變異。

그러므로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그것을 삼사화합이라고 하며, ㅡ'아함경'에서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셋이 화합된 것이 촉이라는 근경식 삼사화합 촉(根境識 三事和合 觸)”라고 말씀하셨다.ㅡ

삼사가 화합(和合)하는 단계(位)에서 모두 수순하여 심소를 일으키는 작용인 공능(功能)이 있는 것을 변이(變異)라 이름하며,

촉이 그 삼사화합에 비슷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分別)이라 이름하며,

감각기관의 변이(變異)의 힘이 촉을 이끌어 일어나게  때, 근(根)의 작용이  식(識)ㆍ대상(境)보다 뛰어나므로 '집론(集論)' 등에서 다만 감각기관의 변이(變異)에서 분별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다른 논서와의 차이점을 회통한 것으로, 세 가지의 화합 작용에 비슷하게 됨으로써 변이(變異)하여 분별하게 한다고 말하면, 어째서 '집론(集論)' 등에서 감각기관(根)의 변이에 있어서 분별하는 것으로써 체(體)로 삼는다고 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답변한 것이다.

즉 사실은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셋이 모두 촉을 이끌어 내지만, 그 중에서 감각기관의 변이의 힘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집론' 등에서는 다만 그 뛰어난 측면만을 말한 것일 뿐, 본 논서와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회통한 것이다.


和合一切心及心所,令同觸境,是觸自性。旣似順起心所,功能故,以受等所依爲業。‘起盡經’說受、想、行薀,一切皆以觸爲緣故。

모든 심왕과 심소를 화합하여서  같이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이 촉의 자성이며,

이미 수순해서 심소를 일으키는 작용, 즉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화합의 작용인 삼화공능(三和功能)에 비슷하게 됨으로써 수(受)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니,  

'기진경(起盡經)'에서 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의 모두, 즉 수(受)ㆍ상(想)ㆍ행(行)의 3온(蘊)에 포함되는 모든 심소가 한결같이 촉을 연(緣)으로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한 것으로,

촉의 자성(體性), 즉 직접적인 작용은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화합을 강화해서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촉의 업용(業用), 즉 간접적인 작용은 세 가지의 화합이 촉의 심소를 생겨나게 했듯이, 촉이 이미 수순해서 그 작용에 비슷하게 되는 상사(相似), 즉 분별하여서 수(受)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말한다.


由斯故,說識、觸、受等,因二、三、四和合而生。

그러므로 식(識)ㆍ촉(觸)ㆍ수(受) 등은 둘(根境)ㆍ셋(根境識)ㆍ넷(根境識觸)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하나니,

() 감각기관(根) 대상(境)  가지, 

() ()ㆍ경()ㆍ식()  가지,

() ()ㆍ경()ㆍ식()ㆍ촉()  가지가 화합하는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瑜伽但說與受、想、思爲所依者,思於行薀,爲主勝故,擧此攝餘。

'유가사지론'에서 촉이 다만 수(受)ㆍ상(想)ㆍ사(思) 심소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된다고 말한 것은,

사(思)심소가 행온(行蘊) 중에서 주가 되고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이것을 거론하여서 다른 것을 포함시킨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논서와의 차이점을 회통하는 부분으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3권과 제55권에서 촉(觸)이 수(受)ㆍ상(想)ㆍ사(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된다고만 말하고, 어째서 다른 심소의 소의가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점에 대한 것을 회통한 것이다.


集論等說爲受依者,以觸生受近而勝故。謂觸所取,可意等相與受所取,順益等相,極相鄰近,引發勝故。

'집론' 등에서 수(受)의 의지처가 된다고 말한 것은, 촉이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가깝고 뛰어나기 때문이며,

촉의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가의(可意) 등의 모습과 수(受)의 인식대상의 순익(順益)등의 모습이 서로 아주 가까워서 이끌어 내는 인발(引發) 뛰어나기 때문이다.

'집론(集論)' 등에서 촉이 오직 수(受)의 의지처가 된다고 말한 뜻을 회통한 것으로,

촉의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가의(可意)ㆍ불가의(不可意)ㆍ구상위(俱相違)의 상과

수(受)의 인식대상의 순익(順益)ㆍ손해(損害)ㆍ구상위(俱相違)의 상이 매우 비슷하고,

촉(觸)이 수(受)를 이끌어 내는 것이 다른 심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회통한다.


然觸自性是實非假。

그런데 촉의 자성은 참된 실(實)이며, 임시적인 가(假)가 아니니,  

경량부에서 삼화성촉설(三和成觸說),  셋이 화합하는 곳이 바로 ()이라고 하여서 촉이 가법(假法)으로서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하고, 촉은 실법(實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六六法中,心所性故,是食攝故能爲緣故,如受等性,非卽三和。

6식(識)ㆍ6촉(觸)ㆍ6수(受)ㆍ6상(想)ㆍ6사(思)ㆍ6애(愛)의 여섯 가지의 6법(六法) 중에서 심소의 자성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식(識)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능히 연이 되는 능연(能緣)이 되기 때문이고, 수(受) 등의 체성과 같이 세 가지 화합  자체가  촉이 아닌 것이다.

촉(觸)이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하는 네 가지 음식작용물인 사식(四食),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 중의 하나임을 가리킨 것으로, 4식(食)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2권 10리증(理證) 중의 4식증(食證) 부분에서 다루었다.

 

작의(作意, manasikāra)심소
作意謂能警心爲性,於所緣境引心爲業。謂此警覺應起心種,引令趣境故名作意。雖此亦能引起心所,心是主,故但說引心。

‘작의(作意, manasikāra)심소’는 능히 심왕을 경각(警覺)시키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하고,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 쪽으로 심왕을 이끄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하며,

이것이 일으켜야 하는 심왕의 종자인 과구유(果俱有)를 경각시키고 이끌어서 대상으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의(作意)라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은 심소도 능히 이끌어 일으키지만, 심왕이 주체이기 때문에 다만 심왕을 이끈다고 말한다.

 

작의(作意, manasikāra)는 경각(警覺)의 뜻으로, 이 경각에는 종자경각(種子警覺)과 현행경각(現行警覺)의 두 가지가 있으며, 

종자경각(種子警覺)은 작의(作意)의 종자가 다른 심왕ㆍ심소의 종자를 경각하여 현행시키는 것을 말하고,

현행경각(現行警覺)은 작의가 현행하여 다른 심왕ㆍ심소의 현행을 경각시켜서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有說令心迴趣異境,或於一境持心令住故,名作意。彼俱非理。應非遍行不異定故。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11권에서는 작의(作意)가 심왕을 다른 대상으로 돌려서 향하게 한다고 말하며,

'대법론(對法論)' 제1권에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심왕을 지녀서 머물게 하기 때문에 작의(作意)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모두는 옳지 않은 것으로, '순정리론(順正理論)'의 견해는 변행심소가 아니며,

'대법론(對法論)'에서 잡집사(雜集師)의 견해는 정(定)심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受, vedāna) 심소

受謂領納順、違、俱非境相爲性,起愛爲業。能起合、離、非二欲故。

‘수(受, vedāna)심소’는 수순함(順)과 거슬림(違), 수순도 거슬림도 아닌 구비(俱非)의 대상인 경상(境相)을 받아들이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능히 화합과 떠남의 합리(合離)  화합도 떠남도 아닌 비합리(非合離)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受, vedāna)심소는 ‘감수작용’ ‘느낌’의 심소이며, 고(苦)ㆍ낙(樂)ㆍ사(捨)의 3수(受)가 있다.

또는 3수에 우수(憂受)ㆍ희수(喜受)를 더하여 5수(受)를 말하기도 하며,

능히 수순ㆍ거슬림ㆍ중용의 대상을 받아들여서 심왕으로 하여금 기쁨이나 괴로움 등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낙수(樂受)에 있어서는 아지 얻지 못한 미득(未得)의 낙(樂)에는 합하기를 바라는 (구하는) 욕(欲),

이미 얻은 이득(已得)의 낙(樂)에서는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고수(苦受)에 있어서는 미득(未得)의 고(苦)에는 합하지 않기를 좋아하고(樂),

이득(已得)의 고(苦)에는 떠나기를 좋아하며,

둘 다 아닌 불락불고(不樂불不苦)에 대해서는 앞의 두 가지가 아닌 것을 말한다.


有作是說。受有二種:一境界受謂領所緣;二自性受,謂領俱觸。唯自性受是受自相,以境界受共餘相故。

'아비달마순정리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나니,

수(受)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경계수(境界受)로써 인식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자성수(自性受)이니, 함께 일어난 촉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오직 자성수가 수(受)의 자상(自相)이니, 경계수는 다른 법(다른 심왕ㆍ심소)과 공통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彼說非理。受定不緣俱生觸故。若似觸生名領觸者,似因之果應皆受性。又旣受因應名因受,何名自性?

위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수(受)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구생촉(俱生觸)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촉에 비슷하게 생겨난다고 해서 촉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름한다면, 원인(因)에 비슷한 결과인 등류과(等流果)는 모두 수(受)의 자성이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이미 원인을 받아들이므로 인수(因受)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촉(觸)은 능히 수(受)를 일으키므로 수(受)의 원인이다. 따라서 원인(因)을 받아들이는 영납(領納)이므로 인수(因受)라고 이름해야지,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하지 않아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若謂如王食諸國邑,受能領觸所生受體名自性受,理亦不然。違自所執,不自證故。

만약 국왕이 나라의 모든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수(受)가 능히 촉에 의해 생겨난 수(受)의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성수라고 이름하는 것 역시도 논리가렇지 않은 것이니, 자신이 집착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나라의 모든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것은 직접 고을의 땅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생겨난 쌀 등을 먹는 것이며, 의지처인 소의(所依)인 땅에 따라서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受, 즉 王)가 능히 촉(觸,고을)이 생겨나게 한 수(受)의 자체(쌀 등)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지처인 촉에 따라서 촉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수(受)가 수의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니, 그대는 이것을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하는 것이나, 이것은 그대가 주장하듯이 심왕 등은 자체를 반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위배된다고 논파한 것이다.


若不捨自性名自性受,應一切法皆是受自性。故彼所說但誘嬰兒。

然境界受非共餘相。領順等相定屬己者,名境界受,不共餘故。

만약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한다면, 제법은 한결같이 수(受)의 자성이어야 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다만 어린아이를 유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경계수(境界受)는 다른 법(심왕ㆍ심소)과 공통되지 않는 것이니, 수순(順) 등의 모습을 받아들여서 반드시 자신에게 소속시키는 것을 경계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므로 다른 것에는 공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11

 

如是處處說唯一心。此一心言亦攝心所。故識行相卽是了別,了別卽是識之見分。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오직 한마음 뿐인, 유일심(唯一心)이라고 말하나니, 이 일심(一心)이라는 말에는 심소 또한 포함되는 것으로, 따라서 식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요별이고, 요별은  식의 견분(見分)인 것이다.


所言處者謂異熟識,由共相種成熟力故,變似色等器世閒相,卽外大種及所造色。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말하는 ‘처(處)’는 이숙식이 공상(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의해서 색법  기세간의 상으로 변현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외부세계, 즉 심외(心外,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외부가 아니다.)의  가지 요소인 사대종(四大種)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인 것이다.


雖諸有情所變各別,而相相似處所無異。如衆燈明各遍似一。

비록 모든 유정의 전변된 소변(所變)이 각각 다르지만 상(相)은 서로 비슷하고 처소가 다르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많은 등불의 밝음이 각각 두루한 것으로서 하나의 등불과 비슷한 이치와 같은 것이다.


誰異熟識,變爲此相?有義。一切。所以者何?如契經說,一切有情業,增上力共所起故。

누구의 이숙식이 이러한 상(相)을 변현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것은 범(凡)ㆍ성(聖)ㆍ5취(趣)의 유정ㆍ자타(自他)의 계지(界地)ㆍ내신(內身) 등의 일체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불설입세아비담론(佛說立世阿毘曇論)' 제10권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모든 유정의 업이 증상력(增上力)에서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有義。若爾,諸佛菩薩應實變爲此雜穢土。諸異生等應實變爲他方、此界諸淨妙土。又諸聖者厭離有色,生無色界,必不下生,變爲此土,復何所用?是故現居,及當生者,彼異熟識變爲此界。經依少分說一切言,諸業同者皆共變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만약 그렇다면 모든 8지 이상의 불보살은 실로 염되어서 더러운 잡염토(雜穢土)를 변현해야 하며, 중생들은 실제로 삼천세계 밖의 극락세계 등과 같은 다른 세계와  세계의 모든 청정ㆍ승묘한 사바세계의 영산(靈山) 등의 국토를 변현해야 하며, 또한 모든 성자는 물질(色)을 싫어하여서 떠나 무색계에 태어나서는 반드시 하계에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국토를 변현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따라서 현재 거주하는 자와 장차 태어날 자의 이숙식이  세계를 변현하는 것이니,

경전에서는 일부분에 의거해서 일체라 말한 것이고, 업이 같은 동업자(同業者)는 모두 함께 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有義。若爾,器將壞時,旣無現居及當生者,誰異熟識變爲此界?又諸異生厭離有色,生無色界,現無色身,預變爲土此復何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만약 그러하다면 기세간이 무너지려  때에는 이미 현재 거주하는 자와 장차 태어날 자가 없을 것이거늘, 누구의 이숙식이  세계를 변현시킨다는 것인가?

또한 모든 중생이 물질(色)을 싫어해서 떠나 무색계에 태어난다면, 현재의 색신(色身, 몸)이가 없는 것으로 미래의 국토를 변현시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세계의 성립으로부터 공무(空無)에 이르기까지를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네 가지의 사겁(四劫)으로 나누며, 이 문의 내용은 그 중에서 괴겁를 말하는 것이다.


設有色身與異地器,麤細懸隔,不相依持。此變爲彼,亦何所益?

설사 색신(色身, 몸)이 있어도 다른 곳의 기세간과는 두드러짐과 미세함이 현저히 다른, 즉 상지(上地)는 미세하고 하지(下地)는 허소(虛疎)의 차이가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것을 변현한다는 것이 무슨 도움 되겠는가?


然所變土本爲色身依持受用。故若於身,可有持用,便變爲彼。由是設生他方自地,彼識亦得變爲此土。

▷정의한다; 변현된 국토는 본래 색신(色身, 몸)을 의지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만약 색신(色身, 몸)에서 의지와 수용이 있을  있으면 문득 그것을 변현할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설사 다른 세계인 타삼천계(他三千界)에서의 자기 지위인 자지(自他)에 태어날 지라도  식(識)이 역시  국토를 변현할  있는 것이다.

설사 삼천계(三千界)나 떨어진 세계라 할지라도 욕계는 욕계, 색계는 색계의 모습으로 자타(自他)의 기세간을 변현하는 것으로, 욕계의 유정은 욕계 자신의 지위(地)를 변현하고, 색계와 무색계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故器世界將壞初成,雖無有情而亦現有。此說一切,共受用者。若別受用,准此應知鬼、人、天等所見異。

그러므로 기세간이 무너지려  때나 처음 만들어질 때에도 비록 유정이 없어도 역시 현재는 는 것이니, 이것은 일체가 함께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별도로 수용하는 것은 마땅히 이것에 견주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아귀와 인간과 천인이 보는 것이 다른 소견이(所見異)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餓鬼)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보며, 천인(天人)으로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곳으로 보고, 인간은 그냥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으로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故諸種子者謂異熟識所持、一切有漏法種。此識性攝故是所緣。無漏法種雖依附此識,而非此性攝,故非所緣。雖非所緣而不相離,如眞如性,不違唯識。

앞에서 말한 모든 종자란, 이숙식이 지니는 일체 유루법의 종자이며, 이것은 식의 체성인 식성(識性)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연이며,

무루법의 종자는 비록  식에 의탁하지만, 이것의 체성인 식성(識性)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소연이 아니며,

비록 소연이 아닐지라도 서로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니, 진여성(眞如性)과 같이 유식(唯識)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有根身者,謂異熟識不共相種成熟力故,變似色根及根依處。卽內大種及所造色。有共相種成熟力故,於他身處亦變似彼。不爾應無受用他義。

유근신(有根身)이란, 이숙식이 불공상(不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의해 색근(승의근)과 부진근이 변현된 것으로, 곧 내부의 내사대종(內四大種)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으로, 공상의 종자를 성숙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타신처(他身處)에서도 역시 그것을 현현하나니, 그렇지 않다면 다른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 없어야 할 것이다.


此中有義。亦變似根。辯中邊說似自他身五根現故。有義。唯能變似依處。他根於己非所用故。

이에 대해서 안혜 등이 주장하는 견해는 다만 타신(他身)의 부진근(扶塵根)만이 아니라 역시 승의근(勝義根)도 변현한다는 것으로, '변중변론(辯中邊論)'의 상권에서 자신과 타인의 다섯 감각기관을 변현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호법 등이 주장하는 견해로써는 오직 부진근인 의처(依處)만을 변현할  있으니, 타인의 감각기관은 자신에게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似自他身五根現者,說自他識各自變義。故生他地或般涅槃,彼餘尸骸猶見相續。前來且說業力所變外器,內身界地差別。

자신과 타인의 오근(五根)을 변현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식이 각가 스스로 전변한다는 의미로써, '변중변론'에서 자신과 남의 5근(根)으로 사현(似現)한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식(識)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타인의 식은 타인의 감각기관을 각각 스스로 변현한다는 의미라고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다른 곳에 태어나거나 또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도, 그 남은 시체는 오히려 남의 눈, 즉 견(見,타인의 부진근인 의처依處)에 상속하게 되며,

이상의 내용은 우선 업력이 전변한 자연계와 신체의 계(界)와 지(地)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若定等力所變器、身,界地自他則不決定。所變身、器多恒相續。變聲光等多分暫時,隨現緣力擊發起故。略說此識所變境者,謂有漏種、十有色處,及墮法處所現實色。

만약 선정 등의 힘으로 전변한 자연계와 몸(身)이라면 자신과 타인의 세계(界)와 지(地)에 있어서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니, 전변한 몸(身)과 기세간은 대부분 항상 상속하는 것이며, 

소리나 빛 등을 변현하면 대부분 잠시만 존재할 뿐이니, 현재의 연력(緣力)의 격발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식의 인식대상의 경계인 아뢰야식의 소연경(所緣境)을 총체적으로 간략히 말한다면, 유루종자인 유루종(有漏種), 열 가지 색법인 십유색처(十有色處), 법처(法處)에 이르기까지에 포함되며 현현된 참다운 색법의 소현실색(所現實色, 기세간)인 것이다.

 

何故此識,不能變似心、心所等爲所緣耶?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식(識)은 심왕과 심소 등을 변현하여 소연으로 삼을  없는 것입니까?


有漏識變略有二種:一隨因、緣勢力故變。二隨分別勢力故變。初必有用後但爲境。

▷답한다; 유루식(有漏識)의 전변에 간략히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인연세력(因緣勢力)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분별세력(分別勢力)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하는 것이니, 

앞의 것은 반드시 작용이 있고, 후자는 다만 대상을 삼을 뿐이다.

 

*인연세력(因緣勢力)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하는 것; 여기서 열 가지 색법인 유색처(有色處)는 유근신(有根身)을 가리키며, 열 가지는 내오근(內五根)과 내외에 통하는 5진(塵)으로서 총체적으로 유근신이다.

*분별세력(分別勢力)에 따르기 때문에 전변하는 것; 유루식(有漏識)의 전변에 인연변(因緣變)과 분별변(分別變)의 두 가지가 있으며, 인연변에서 인연이라는 참된 세력이 있는 종자를 가리키며,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사물을 인연변이라고 한다. 즉 제8심왕과 5식의 심왕ㆍ심소, 5구의식(俱意識)의 심왕ㆍ심소, 선정에 들어 있을 때의 정심(定心)과 소연(所緣)의 실제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분별(分別)은 심왕과 심소의 다른 명칭으로서, 능연(能緣)의 분별력으로부터 전변된 상분(相分)을 분별변(分別變)의 상분이라고 한다. 이 상분을 일으키는 능생(能生)의 종자에 실제 종자가 없는 것도 있고 또한 생겨난 상분에 작용이 없는 것도 있다. 즉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심왕ㆍ심소의 상분, 제7식의 심왕ㆍ심소의 상분, 제8식의 심소의 상분 등은 다만 임시적인 종자인 가종(假種)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지 실제 종자가 아니며, 다만 대상으로 할 뿐으로서 실제의 작용이 없는 것이다.

 

異熟識變但隨因緣,所變色等必有實用。若變心等,便無實用。相分心等不能緣故。須彼實用別從此生。

이숙식이 전변하는 것은 다만 인연에 따르고, 변현된 색법 등은 반드시 실제의 작용이 있으니,

만약 심왕 등을 변현한다면 문득 실제의 작용이 없으니, 상분의 심왕 등은 능히 반연할  없기 때문이며, 그것(제 7식)은 실제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제 8식)으로부터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變無爲等亦無實用。故異熟識不緣心等。至無漏位,勝慧相應。雖無分別而澄淨故。設無實用亦現彼影。不爾,諸佛應非遍知。

무위법 등을 변현하면, 역시 실제의 작용이 없으니, 따라서 이숙식은 심왕 등을 반연하지 않으나, 무루위에 이를 때에는 뛰어난 지혜와 상응하나니, 비록 분별이 없지만 맑고 청정하기 때문이다. 

설사 실제의 작용은 없어도 역시 그 무위법의 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모든 부처님에게는 두루하는 편지(遍知) 없어야 할 것이다.


故有漏位,此異熟識但緣器、身及有漏種。在欲、色界,具三所緣。無色界中緣有漏種。厭離色故,無業果色。有定果色,於理無違。彼識亦緣此色爲境。

따라서 유루위에서  이숙식은 다만 자연계ㆍ유근신(有根身, 몸)ㆍ유루종자를 인식대상으로 하며,

욕계와 색계에 있을 때에는  가지 대상인 종자ㆍ유근신ㆍ기세간을 갖추며,

무색계에서는 유루종자만을 반연하고 물질(色)을 싫어해서 떠난 때문에 업과(業果)로서의 색법은 없는 것이다.

선정의 과보로서의 색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으며, 그 식(識) 역시도 이 색법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는다.


不可知者,謂此行相極微細故,難可了知。或此所緣,內執受境,亦微細故,外器世閒,量難測故,名不可知。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감지하기 어렵다는 불가지(不可知)’라는 것은 바로 이것의 인식작용이 매우 미세하므로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거나, 또는 이것의 인식대상인 내부세계의 집수대상인 집수경(執受境)이 역시 미세하기 때문이고, 외부세계의 자연계도 크기가 광대해서 측량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지하기 어렵다는 불가지(不可知)’고 하는 것이다.

즉, 보고 듣는 등 6식의 작용은 쉽게 느낄 수 있으나, 아뢰야식의 경우는 감지(感知)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왜냐하면 이 식의 인식작용은 일반인들이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미세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세(微細, sūkṣma)’라고 한 것은 웬만큼 총명한 사람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인 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몸의 유근신(有根身)의 경우도 알기 어려우니, 여기서 ‘근(根)’은 미세하고 투명한 물질인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측량하기 어려우므로 ―색경(色境)이나 성경(聲境)과 같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이 자연계를 인식대상으로 하여서 끊임없이 미세한 인식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일반인에게는 감지되기 어려운 것이다.


云何是識取所緣境,行相難知?如滅定中不離身識,應信爲有。

어찌하여 이 식의 대상을 취하는 소연경(所緣境)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견분)이 알기 어렵다는 것인가?

멸진정 중에서 몸을 떠나지 않는 신식(身識)이 있는 것과 같이, 존재(有)한다고 마땅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상좌부와 경량부 말파(末派)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에 의하면 멸진정은 무심(無心)이지만, 미세한 의식이 있어서 몸을 떠나지 않고 상속한다고 한다따라서 여기서 그것을 예로 들어서, 그대들이 멸진정에서 미세한 의식이 있고 유정에 소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제8식도 비록 그대들의 분별지혜가 미치지는 않지만, 세존께서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식이 있어서 유전(流轉)과 장애를 끊는 것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대들도 역시 믿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然必應許滅定有識。有情攝故,如有心時,無想等位當知亦爾。

멸진정에는 반드시 식이 존재하는 유식(有識)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니, 멸진정에 든 자 역시도 유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제6식이 활동하는 지위인 유심위(有心位)에서와 같이 무상정 등의 지위에서도 역시 그러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논리인 정리(正理)로써 설일체유부에 대해 답변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두 가지 무심정에는 식(識)이 존재하지 않지만,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을 유지하므로 유정이라고 부르며, 따라서 여기서 멸진정 중에 식(識)이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成唯識論卷第二 終 성유식론 제2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10

 

此中了者,謂異熟識,於自所緣,有了別用。此了別用,見分所攝。

여기서 ‘요별(了)’이란, 이숙식이 자기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요별의 작용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요별의 작용은 견분(주관의 식)에 포함된다.

여기서의 소연(所緣)은 제8식의 상분(相分)으로서, 곧 종자(種)와 몸(유근신 有根身) 및 기세간을 말한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종자(種)종자ㆍ와 몸(유근신 有根身)ㆍ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이다.

아뢰야식은 자체 안의 종자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작용이 발생되며, 또한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대사(代謝) 작용의 흐름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으로,

사실 아뢰야식이 종자와 신체를 유지하는 작용은, 그것들을 인식대상으로 끊임없이 요별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然有漏識自體生時,皆似所緣、能緣相現。彼相應法應知亦爾。

그런데 유루식(有漏識) 자체가 일어날 때에는 모두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모습으로 사현(似現, pratibhāsa)하는 것으로, 그것의 상응법(심소)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이하 4분의(分儀)를 밝히는 것으로, 안혜(安慧)와 정량부(正量部) 등이 소연의 모습이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며,

또한 설일체유부 등이 행상(行相)은 있지만 심외(心外)의 대상을 취한다고 하는 것과도 다흔 것이다.

 

似所緣相,說名相分,似能緣相,說名見分。

인식대상으로 사현하는 상을 상분(相分, 객관으로서의 식)이라 하고, 

인식주관으로 사현하는 양상을 견분(見分, 주관으로서의 식)이라 이름한다.

심왕의 상응법인 심소(心所)도 역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심분(心分)이 있다.

 

若心、心所無所緣相,應不能緣自所緣境。

만약 심왕과 심소가 소연(所緣)의 양상이 없다면, 자기의 소연의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을 능히 반연할  없어야 하며,

안혜와 정량부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或應一一能緣一切,自境如餘,餘如自故。

혹은 하나하나가 능히 모두를 반연해야 하고, 자기의 외부대상도 다른 사람의 대상과 같으며,

다른 사람의 대상도 자신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능연식(能緣識)이 자신의 상분(相分)을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식이 자신의 상분인 색경(色境)을 반연하고, 이식(耳識)이 자신의 상분인 성경(聲境)을 반연하는 등의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일체의 대상을 반연하고, 자신의 대상인 자경(自境)을 다른 이의 감각기관인 타근(他根)이 반연하고, 다른 이의 대상인 타경(他境)을 자신의 감각기관인 자근(自根)이 반연하는 등이 되는 것이다.

 

若心、心所,無能緣相,應不能緣。如虛空等。或虛空等亦是能緣。故心、心所,必有二相。如契經說。

만약 심왕과 심소에 능연(能緣)의 양상이 없다면, 능히 반연할  없어야 할 것이니, 비유하면 허공 등과 같으며,

혹은 허공 등도 역시 능연이어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반드시  가지의 양상인 이상(二相)이 있으니,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一切唯有覺 所覺義皆無, 能覺所覺分 各自然而轉。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각(覺)이 있을 뿐이니, 

인식대상인 소각(所覺, 심외실경心外實境)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주체인 능각분(能覺分, 견분)과  인식대상인 소각분(所覺分, 상분)이

각기 다르게 자연히 전전하는 것이다. - 후엄경(厚嚴經)

여기서의 각(覺)은 심왕(心王)ㆍ심소(心所)의 총명(總名)이며, 

견분(인식주체)과 상분(인식대상)이 각각 자연히 그 인연화합에 따라 일어나므로,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인 심외실경(心外實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執有離識所緣境者,彼說外境是所緣,相分名行相,見分名事。是心、心所自體相故。心與心所同所依、緣,行相相似。事雖數等而相各異。識、受、想等相各別故。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외부대상을 소연(所緣)으로, 상분을 행상(行相, 인식작용)으로, 견분을 자체(事)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은 심왕과 심소의 자체상이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함께하고,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이 서로 비슷하며,

자체(事, 사체事體, 심왕과 심소의 자체)는 비록 수(數)가 같은, 즉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하나 뿐인 것으로, 많이 있는 것이 아니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각각 다른 것은 식(識)ㆍ수(受)ㆍ상(想) 등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達無離識所緣境者,則說相分是所緣,見分名行相。相、見所依自體名事,卽自證分。此若無者,應不自憶心、心所法。如不曾更境,必不能憶故。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없음을 통달한 사람은 상분을 소연으로, 견분을 행상이라 이름하며,

상분(인식대상)과 견분(인식주체)이 의지하는 자체분을 사(事)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자증분(自證分)이다. 

만약 이 자체분(자증분)이 만약 없다면, 스스로 심왕과 심소법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니, 예전에 인식하지 않았던 대상은 반드시 기억할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心與心所,同所依根,所緣相似,行相各別。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인 감각기관이 같고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서로 비슷하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이 각각 다른 것으로,  

즉, 소연(所緣)이 비슷하다는 것은 심왕과 심소가 변현한 상분(相分)이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며,

행상(行相)이 다르다는 것은, 예를 들면 심왕과 심소가 하나의 대상을 반연할  심왕은 요별의 행상으로 대상을 반연하고, 작의(作意)심소는 경각(警覺)의 행상으로 반연하며, 수(受)는 영납(領納)의 행상으로 반연하는 등이다.

 

了別領納等作用,各異故。事雖數等,而相各異,識、受等,體有差別。

요별하고(識) 받아들이는(受) 등의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니,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각기 하나씩이라서 자체(事)는 비록 수(數)가 같지만, 행상이 각각 다른 것이니,

식(識)ㆍ수(受) 등의 자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故然心、心所一一生時,以理推徵,各有三分,所量、能量、量果別故。相、見必有所依體故。如‘集量論’伽他中說:

그런데 심왕과 심소가 하나하나씩 일어날 때,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각각  가지 심분인 삼분(三分)이 있으니,

인식되는 것의 소량(所量)과 인식하는 것의 능량(能量)과 인식의 결과인 양과(量果)가 다르기 때문이며, 

상분과 견분은 반드시 의지처인 자체분이 있기 때문이다.

'집량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진나(陳那)는 식의 3분설(三分說)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인식인 양(量, pramāṇa)이 성립하는 데는 인식되는 것인 소량(所量, prameya), 인식하는 것의 능량(能量, pramāṇa), 인식의 결과인 양과(量果, pramāṇa-phala)의 세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로써,

예를 들면 옷감의 길이를 자로 재는 경우에 옷감이라는 사물, 자(尺)라는 계량기, 치수를 읽는 인간의 인지력(認知力)이 필요한 것으로, 이 셋을 차례로 말해서 소량(所量)ㆍ능량(能量)ㆍ양과(量果)이고,

4분(分)에서 말한다면 상분ㆍ견분ㆍ자증분이다.

 

似境相所量 能取相自證, 卽能量及果 此三體無別。

대상으로 사현한 형상은 인식대상인 소량(所量)이니, 

능히 형상을 취하고 자증(自證)하는 것이  인식주체인 능량(能量)과 인식결과인 양과(量果)이며,

 셋은 자체(體)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체(體)는 하나의 식(識)이지만,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각각 다르므로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又心、心所若細分別,應有四分。三分如前,復有第四證自證分。此若無者,誰證第三?心分旣同,應皆證故。又自證分應無有果。諸能量者必有果故。不應見分是第三果。見分或時非量攝故。由此見分不證第三。證自體者必現量故。

또한 심왕과 심소를 상세하게 분석한다면,분(四分)이 있어야 마땅한 것이니,

3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이에 다시 제4의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제3분을 증명하겠는가? 

심분(心分)이란 이미 같은 것으로써 모두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증분은 인식결과인 양과(量果)가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모든 인식하는 것인 능량(能量)은 반드시 인식결과인 양과(量果)가 있기 때문이다. 

견분이 제3분의 인식결과인 양과(量果)이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견분은 혹은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에 포함되기 때문이니, 즉 제7식의 견분은 항상 비량(非量)이며, 제6식의 견분은 3량(量)에 통하므로 비량(非量)일 때도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분은 제3분을 증명하지 못하며, 자체분을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현량(現量)이기 때문이다.

 

호법(護法)의 주장으로, 진나(陳那)의 이론에서 양과(量果), 즉 확인 작용을 증명하는 제4의 심분(心分)인 증자증분(證自證分)을 설정하였고, 이 이론을 4분설(四分說)이라고 한다.

호법은 인식을 상분ㆍ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의 네 부분으로 나누고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상분ㆍ견분은 식의 자체(자증분)에서 마치 달팽이가 자기 몸에서 두 뿔을 내밀듯이 나타나며,

자증분ㆍ증자증분이 서로 동시에 상응하여서 증명하고 그 작용을 증지(證知)한다고 하였으며,

그렇게 확인 작용이 무한히 소급되는 모순을 해결한 것이다.

 

此四分中,前二是外,後二是內。

 4분(四分) 중에서 앞의 둘인 상분과 견분은 외부(外)이고, 나머지 둘인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내부(內)이다.

상분은 외부 본질인 경(境)의 영상을 떠올리므로 외부라고, 견분은  상분을 반연하기 때문에 역시 외부라 하나, 외부라고 하여 물론 체(體)가 외부라는 뜻이 아니다.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오직 체내(體內)이며 외부를 향해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內)라 한 것이다.

 

初唯所緣,後三通二。謂第二分,但緣第一。或量非量,或現或比。第三能緣第二第四。證自證分唯緣第三。非第二者,以無用故。第三、第四皆現量攝。

처음의 하나(상분)는 오직 소연(所緣)이고, 나머지 셋은 능연ㆍ소연의 둘에 통하며,

제2분(견분)은 다만 제1분(상분)만을 반연하며, 바른 인식(量)이기도 하고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이기도 하며, 현량 혹은 비량(比量)이기도 하다. 

제3분(자증분)은 능히 제2분(견분)과 제4분(증자증분)을 반연하며,

증자증분은 오직 제3분(자증분)만을 반연하는 것으로 제2분(견분)이 아닌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제3분(자증분)과 제4분(증자증분)은 모두 현량에 포함된다.

 

故心、心所,四分合成,具所能緣,無無窮過,非卽非離,唯識理成。是故契經伽他中說: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4분(四分)이 합해서 이루어지고, 소연과 능연을 갖추므로 끝없이 소급해 들어가는 과실이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므로 유식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니, 경전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衆生心二性 內外一切分, 所取能取纏 見種種差別。

중생심에는 내외(內外)의 두 가지 체성이 있으니, 

내부(자증분ㆍ증자증분)와 외부(상분ㆍ견분)의 일체분이

소취(所取, 상박相縛)와 능취(能取, 추중박麤重縛)의 계박(繫縛, 전纏)이 있으니, 

견분(見, 능연의 의미)에는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이다. - '후엄경(厚嚴經)'에 설해져 있다고 하며, '불지론(佛地論)' 제3권에 인용되어 있다

유루심(有漏心)의 4분(分)은 계박(繫縛)이고, 무루심에는 이러한 계박이 없다.

 

此頌意說。衆生心性二分合成。若內若外皆有所取、能取纏縛。見有種種,或量、非量,或現或比,多分差別,此中見者是見分故。

위의 게송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중생의 심성은 2분(分)이 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내부이든 외부이든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계박(繫縛)이 있으며, 

견분은 갖가지 바른 인식(量),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 현량(現量) 혹은 비량(比量) 등의 여러 차이가 있으니, 게송에서의 ‘견(見)’은 견분(見分)이기 때문이다.

 

如是四分或攝爲三。第四攝入自證分故。或攝爲二,後三俱是能緣性故,皆見分攝。此言見者,是能緣義。或攝爲一,體無別故。如入楞伽伽他中說:  

이와 같은 4분(四分)을 '집량론(集量論)'에서는 포괄적으로 3분(分)으로 하는 것은 제4분(증자증분)을 자증분에 포함시킨 때문이며,

'후엄경(厚嚴經)'에서는 거두어서 2분(分)으로 하였으니, 뒤의 셋인 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은 모두 능연의 성질이기 때문에 모두 견분에 포함시킨 것이다.

위의 게송에서 ‘견(見)’이라고 말한 것은 능연의 의미이며,

어떤 곳에서는 안혜의 일분설(一分說)과는 다르게 넷을 합해서 하나로 거두어 일분(一分)으로 하였으니, 체(體)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입능가경'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由自心執著 心似外境轉彼所見非有 是故說唯心。

스스로의 마음의 집착에 의해서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하여 전변하며, 

그 인식대상인 소견(所見, 심외실경心外實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마음, 즉 유심(唯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입능가경(入楞伽經)' 제9권

 

심외실경(心外實境),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실재한다는 대상을 가리킨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9

 

依何等義立熏習名。所熏能熏各具四義。令種生長故名熏習。

어떠한 뜻에 근거해서 훈습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가?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과 능히 훈습하는 능훈(能熏)에 각각  가지의 의미가 있으니,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증장하게 하므로 훈습(薰習)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종자를 저장하려면, 즉 소훈처(所熏處)의 역할을 하려면 견주성(堅住性)ㆍ무기성(無記性)ㆍ가훈성(可熏性)ㆍ화합성(和合性)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하며,.

또한 7전식(轉識)이 능훈식(能熏識)으로서 작용하려면 역시 유생멸(有生滅)ㆍ유승용(有勝用)ㆍ유증감(有增減)ㆍ화합성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한다.

아뢰야식과 7전식은 각각 그러한 속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소훈처와 능훈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何等名爲所熏四義?一堅住性。若法始終一類相續能持習氣,乃是所熏。此遮轉識及聲風等。性不堅住故非所熏。

무엇을 소훈(所熏)의  가지 뜻이라고 이름하는가?

첫째, 견고하게 머무는 속성의 견주성(堅住性)으로, 만약 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종류로 상속해서 능히 습기를 유지한다면, 이것이  소훈이며,

이것은 전식(轉識)과 소리ㆍ바람 등(等)의 감각기관ㆍ외부대상ㆍ12처의 법처색(法處色)이 아니며,

그것들은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곧 색법이 없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갈 때에는 심법이 없으니,

이와 같이 그것들은 체성이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에 소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二無記性。若法平等無所違逆能容習氣,乃是所熏。此遮善染勢力强盛,無所容納故非所熏。由此如來第八淨識唯帶舊種非新受熏。

둘째, 무기의 성품인 무기성(無記性)이니,

무기(無記)는 선이나 악에 거스르지 않으므로, 만약 법이 평등하여서 거스르는위역(違逆)함이 없어서 능히 습기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소훈이니,

선(善)과 잡염의 성품은 강성해서 다른 성질의 법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훈이 아닌 것이므로 여래의 제8청정식은 오직 본래의 종자인 구종(舊種, 무루종자)를 유지하며 새롭게 훈습을 받지 않는 것이다.


三可熏性。若法自在性非堅密,能受習氣乃是所熏。此遮心所及無爲法依他堅密故,非所熏。

셋째, 훈습을 받을  있는 속성의 가훈성(可熏性)이니,

만약 법, 즉 제8식이 심왕으로서 자체가 자재하고(심소는 자재하지 못하므로 소훈이 아니다.) 

소훈으로서 제8식의 체성이 응연상주(凝然常住, 견밀堅密하지 않은)가 아니라서, 능히 습기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소훈이니,

심소법  무위법은 다른 것에 의지하는 심소법(心所法)이고 응연상주하는 무위법(無爲法)이기 때문에 소훈이 아닌 것, 즉 무위법은 응연상주하여 소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四與能熏共和合性。若與能熏同時同處不卽不離,乃是所熏。此遮他身剎那前後,無和合義故,非所熏。唯異熟識具此四義,可是所熏,非心所等。

넷째, 능훈과 함께 화합하는 속성의 화합성(和合性)이니,

만약 능훈과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하여 하나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불즉불이(不卽不離)한 것이라면, 이것이  소훈인 것으로

다른 사람의 타신(他身), 자신이 지은 선악 등을 다른 사람의 식(識)에 훈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상응하지 않으며), 원인ㆍ결과가 전찰나와 후찰나에 존재하는 것, 즉 경량부 등에서 주장하는 인과이시(因果異時)와 같은 것은 화합의 뜻이 없기 때문에 소훈이 되지 못하며, 

오직 이숙식만이   가지 뜻을 갖추어 소훈이   있으니,

제8식에 상응하는 심소 등의 7전식(轉識)의 심왕과 상응 심소가 아닌 것이다


何等名爲能熏四義?一有生滅。若法非常能有作用生長習氣,乃是能熏。此遮無爲前後不變,無生長用故非能熏。

무엇을 능훈(能熏)의  가지 뜻이라고 이름하는가?

첫째, 생멸이 있는 유생멸(有生滅)이니,

만약 법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고 능히 유위법으로서 생멸 변화하는 작용을 지녀서, 습기를 생겨나게 하고(신훈종자) 증장케 하는(본유종자) 것이라면, 이것이  능훈인 것으로,

무위법은 전후로 변함이 없어서 생겨남과 증장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닌 것이다.


二有勝用。若有生滅勢力增盛能引習氣,乃是能熏。此遮異熟心心所等,勢力羸劣故非能熏。

둘째, 뛰어난 작용이 있는, 유승용(有勝用)이니,

만약 생멸함이 있고 세력이 증성(增盛)해서 능히 습기를 이끌어 낸다면, 이것이  능훈인 것으로,

이숙의 심왕과 심소(견분見分, 주관) 등의 제8식의 상분 및 6식 중에서 이숙생(異熟生)의 무기(無記)는 세력이 미약해서 능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三有增減。若有勝用可增可減攝植習氣,乃是能熏。此遮佛果圓滿善法無增無減,故非能熏。彼若能熏,便非圓滿。前後佛果應有勝劣。

셋째, 증감이 있는 유증감(有增減)이니,

만약 뛰어난 작용이 있어 증성(增盛)할  있고 감소할  있어서 습기를 거두어 이식한다면, 이것이  능훈인 것으로,

부처님의 지위인 불과(佛果)에서 원만한 선법(善法)은 증가도 감소도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닌 것이다. 

만약 불과가 능훈이라면  원만한 것이 아닌 것이니, 부처님의 지위에서 전찰나와 후찰나에 뛰어남과 열등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과(佛果)에서 새로운 종자를 훈습ㆍ증장시킨다면, 네 가지 지혜의 심품인 사지심품(四智心品)에 차등이 생겨서 원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불과의 전후에 우열(優劣)이 있게 되는 것이다.


四與所熏和合而轉。若與所熏同時同處不卽不離,乃是能熏。此遮他身剎那前後無和合義,故非能熏。唯七轉識及彼心所有勝勢用,而增減者,具此四義可是能熏。

넷째, 소훈과 화합하여 전전하는 화합성(和合性)으로,

만약 소훈과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해서 하나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이  능훈이니,

다른 사람이나 원인ㆍ결과가 전찰나와 후찰나에 존재하는 것은 화합의 뜻이 없기 때문에 능훈이 아니며,

오직 7전식과  심소가 뛰어난 작용이 있어서 증성하고 감소하므로   가지 사의(四義)를 갖춤으로써  능훈이   있는 것이다.


如是能熏與所熏識,俱生俱滅,熏習義成。令所熏中種子生長,如熏苣蕂,故名熏習。

苣 상추 거, 홰 거, 藤등나무 등

이와 같이 능훈식(能熏識)과 소훈식(所熏識)이 함께 생멸해서 훈습의 뜻이 성립되는 것이니,

훈습을 받아들이는 곳의 소훈처(所熏處, 제8식)에 있는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증장케 하는 것이 거등(苣藤)의 훈습과 같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能熏識等從種生時,卽能爲因復熏成種。

능훈식(能熏識) 등이 종자에서 현행할 때에 능히 바로 원인이 되어서 다시 종자를 훈습하나니, 

 

종자(種子) 갖가지 정신현상의 주체와 작용이 발생ㆍ존재하게 되는 원동력이다. 

종자의 동력인(動力因) 역할은 훈습과 현행(現行)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구체적으로는,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서 찰나마다 생멸하면서 성숙되는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과정에서 생연(生緣),  7전식(轉識)ㆍ심리작용인 심소(心所)ㆍ감각기관(根)ㆍ대상(境) 작용이라는 () 만나면 생기하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하며,

모태에서 아뢰야식으로부터 7식이 전변(轉變)ㆍ생기(生起)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현행의 영향 아래 7식ㆍ심소ㆍ근()ㆍ경() 화합으로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며,

 정신적ㆍ신체적 행위가 아뢰야식에 이식되어서 기존의 종자를 증장시키는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가 되는 것이다.

 

三法展轉因果同時。如炷生焰焰生燋炷。亦如蘆束更互相依。因、果俱時,理不傾動。

본유(本有)ㆍ현행(現行)ㆍ신훈(新熏) 종자의 세 가지법(三法)이 전전해서 원인과 결과가 시간을 같이하나니, 비유하면 심지가 불꽃을 일으키고, 불꽃이 심지를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갈대 묶은 다발이 다시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원인과 결과가 시간을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이 편향되지 않은 논리인 것이다.

 

삼법(三法)은 ①현행하게 된 종자(因)인 본유(本有),

②현행의 과(果)인 동시에 능훈(能熏)의 인(因),

③현행에 의해 훈습된 종자인 과(果), 신훈(新熏)을 말하며, 이 세 가지가 같은 순간에 전전(展轉)하면서 인과관계를 맺으므로써 ②가 ①의, 또한 ③이 ②의 속성을 온전히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나, 

동시(同時)의 개념은 시간적으로 완전히 같은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비록 단계적으로는 종자ㆍ현행ㆍ훈습 종자의 순서로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이 ‘한 찰나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能熏生種,種起現行,如俱有因,得士用果。種子前後,自類相生,如同類因,引等流果。此二於果是因緣性。除此餘法皆非因緣。設名因緣,應知假說。是謂略說一切種相。

능훈(能熏)이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종자가 현행(現行)을 일으키는 것은, 소승에서 주장하는 구유인(俱有因)으로써 사용과(士用果)를 얻는다고 말함과 같으며,

종자가 전후하여 자기 부류로서 서로 생겨나게 하는 자류상생(自類相生)인 것은, 대승에서 주장하듯이 동류인(同類因)으로써 등류과(等流果)를 이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ㆍ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동시인과(同時因果)와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이시인과(異時因果), 이  가지는 결과에 대한 인연성이며,

이러한 이외의 다른 법은 모두 인연이 아니니, 비록 인연이라고 이름할지라도, 그것은 가설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체종자의 양상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예를 들면 '대법론(對法論)' 제4권에서 12연기(緣起)를 인연으로 이름하는 것 등은 가설(假說)인 것으로 직접 자기 결과를 판별하는 친인연(親因緣)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용과(士用果), 소승에 6인(因)ㆍ4연(緣)ㆍ5과설(果說)이 있으며, 구유인(俱有因)은 6인 중의 하나로서, 동일한 시간에 자타가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어 돕는 것을 말한다.

사용과(士用果)는 5과(果) 중의 하나로서, 구유인과 상응인(相應因)의 작용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를 말하며, 사용(士用)은 사대부의 작용이라는 뜻으로서, 사대부의 힘에 의해 모든 사업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구유인과 상응인의 작용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이므로 비유로써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동류인(同類因)은 6인 중의 하나이며, 동일한 부류로서 전시(前時)의 것이 후시(後時)의 것에 대하여 원인(因)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전시(前時)의 선심(善心)이 후시(後時)의 선심의 원인인 것 등이다.

등류과(等流果)는 5과(果) 중의 하나로서 6인 중 동류인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를 말하며, 후시(後時)의 결과가 전시(前時)의 원인과 동등 등류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此識行相、所緣云何?謂不可知執受、處、了。了,謂了別。卽是行相。識以了別,爲行相故。處,謂處所,卽器世閒。是諸有情所依處故。

 식(識)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능연)과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어떠한가?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 “감지하기 어려운 집수(執受)와 기세간(處)의 요별(了)을 갖네”라고 말하였으니,

‘요(了)’는 요별하는 것이니,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이며,

'식(자체분)'은 요별로써 행상(行相, 견분, 주관)을 삼기 때문이며,  

‘처(處)’는 처소, 곧 기세간(器世間)이며, 이것은 모든 유정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행상(行相)에서 행(行)은 유이(遊履), 상(相)은 체상(體相)의 뜻으로써, 

능연(能緣)인 견분이 소연경(所緣境)인 체상(體相)에 유이(遊履)하는 것, 즉 인식작용의 의미이다.


執受有二:謂諸種子及有根身。諸種子者謂諸相、名、分別習氣。有根身者謂諸色根及根依處。此二皆是識所執受,攝爲自體。同安危故。

‘집수(執受)’에  가지가 있으니,  모든 종자와 몸인 유근신(有根身)이다.

모든 종자는 형상ㆍ명칭ㆍ분별의 습기이며,

유근신(有根身)은 바로 모든 감각기관인 색근(色根, 승의근)과 부진근(扶塵根, 근의처根依處)이며,

 둘은 모두 식에 집수(執受)되고 거두어져서 체로 삼으며,

양호한 상태인 안(安)와 좋지 못한 상태의 위(危)를 함께하는 동안위(同安危)이다.

 

집수(執受)의 산스끄리뜨 원어인 upātta는 upā-√dā(to receive, gain, seize)의 과거분사로 만들어진 명사로서 ‘받아들여진 것’, ‘유지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비달마불교에서 집수는 감각기관인 오근(五根) 또는 몸의 유근신(有根身)을 가리키며,

유식학에서는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ㆍ보존된다고 보므로 집수에 종자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집수에는 능생각수(能生覺受)와 안위동일(安危同一)의 두 가지 뜻이 있으며, 안위동일은 다음 항에서 다루며,

각수(覺受, 능생각수)의 뜻에서 보면 몸은 집수이고, 종자와 기세간은 비집수(非執受)이며,

유근신(有根身) 중에서도 오직 신근(身根)뿐이고, 나머지 4근(根)과 부진근은 신근(身根)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으므로 역시 그것도 각수(覺受)라고 한다.

*색근(色根)은 5근(根), 즉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키며, 근의처(根依處)는 부진근(扶塵根)을 말한다.

신체는 이 두 가지로써 이루어지므로 신체를 유근신(有根身)이라고 하며,

승의근(勝義根)은 바로 5근의 체(體), 즉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으로서 5관신경(官神經)에 해당되고,

부진근(扶塵根)은 승의근의 근의처(根依處, 의지처)로서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4경(境)을 그 자체로 하며, 이것은 곧 눈ㆍ귀 등 5관의 기능이다.

*동안위(同安危), 구체적으로 ‘안위동일(安危同一, ekayogakṣema)은 아뢰야식은 신체 속에 내재하면서 그 작용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생명체이며,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과 신체의 유기적 생리적인 상응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안위동일(安危同一, ekayogakṣema)’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원래 'yogakṣema'는 'nirvāṇa(열반)'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안(成安)ㆍ안온(安穩)ㆍ적정ㆍ해탈 등으로 번역되었다.

유가행파에서는 yoga를 실천해서 얻어지는 평안ㆍ안온(kṣema)을 강조하기 위해서 yogakṣema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처럼 yogakṣema는 ‘성(成)ㆍ안(安)ㆍ리(利)’의 의미였을 뿐인데, 한역서에서 upaghata(損)의 측면도 고려하여 ‘위(危)ㆍ괴(壞)ㆍ쇠(衰)ㆍ부(否)’를 첨가하여서 ekayogaks-ema는 안위동일(安危同一), 안위등(安危等), 안위공동(安危共同), 동성괴(同成壞) 등으로 한역하였다.

이것은 둘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양호한 상태(安) 또는 좋지 못한 상태(危)이면, 다른 한쪽도 그에 대응해서 같이 양호 또는 불량한 상태가 되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執受及處俱是所緣。阿賴耶識因、緣力故,自體生時,內變爲種及有根身,外變爲器。卽以所變爲自所緣,行相仗之,而得起故。

집수와 자연계는 모두 인식대상이니, 아뢰야식은 명언친인연(名言親因緣)의 종자인 인(因)과 선악업의 증상연의 종자인 연(緣)의 세력에 의해 제8식의 자체가 현행할 때, 안으로는 종자(種)와 몸(유근신 有根身) 변현하고, 밖으로는 자연계를 변현하는 것으로,

 전변된 것으로써 자신의 인식대상(상분, 객관)을 삼으니, 인식작용(견분, 주관)은 그것(상분, 객관)에 의해서 일어날  있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8

 

其聞熏習,非唯有漏,聞正法時,亦熏本有,無漏種子,令漸增盛,展轉,乃至生出世心。故亦說此,名聞熏習。

문훈습(聞熏習)은 오직 유루종자가 아닌 것으로, 정법을 들음으로써 역시 본유의 무루종자를 훈습하여서 점차 증성하게 하여서, 전전하여 나아가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따라서 이 '본유무루종자'를 문훈습(聞熏習)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聞熏習中,有漏性者,是修所斷,感勝異熟,爲出世法,勝增上緣。

문훈습(聞熏習)에서의 유루성품은 수도(修道)에서 단멸되어야  성질의 것인 수도단(修所斷)으로써, 

뛰어난 이숙을 초감하고, 출세간법을 위한 뛰어난 증상연(增上緣)이며, 

문훈습은 부처님의 정법을 들어 훈습시키는 선근이지만,  선법(善法)이 아직 열등하여서 전위(前位)의 선(善)이 후위의 장애가 되면 수도에서 단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無漏性者,非所斷攝,與出世法,正爲因緣。此正因緣,微隱難了,有寄麤顯,勝增上緣,方便說,爲出世心種。

무루성품은 수도에서 단멸시켜야  성질의 것이 아닌 비소단(非所斷)으로, 출세간법의 진정한 인연인, 정인연(正因緣)이 되는 것이다.  정인연(正因緣) 미세하고 은밀해서 알기 어려우며,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뛰어난 증상연이 되는 것이 있음 의거해서, 방편으로 출세간심의 종자인 비정인연(非正因緣)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루의 문훈습이 곧 무루의 뛰어난 증상연이 되는 것에 의거해서 '섭대승론' 등에서 방편으로 출세심의 종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인연인 정인연(正因緣)이 아니다.

 

依障建立種姓別者,意顯無漏種子有無。謂若全無無漏種者,彼二障種,永不可害,卽立彼,爲非涅槃法。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장애에 의해 종성의 차별을 건립한다고 말한 의미는,

무루종자가 있고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약 무루종자가 전혀 없는 사람이   가지 장애인 번뇌장과 소지장을 영원히 없앨  없다면, 그를 곧 열반에 들어갈  있는 도리가 없는 종성의 비열반법성(非涅槃法姓, 무성천제 無性闡提)이라고 말한다. 

闡提천제= 부처가 될 바탕이 전혀 없는 사람

 

若唯有二乘,無漏種者,彼所知障種,永不可害,一分立,爲聲聞種姓,一分立,爲獨覺種姓。若亦有佛,無漏種者,彼二障種,俱可永害,卽立彼,爲如來種姓。故由無漏種子有無,障有可斷、不可斷義。

만약 오직 2승(乘)의 무루종자만 있는 사람이  소지장의 종자를 영원히 없애지 못한다면,

  부류의 둔근자(鈍根者)는 성문종성이라고 하고, 다른 한 부류인 이근자(利根者)는 독각종성이라고 건립하며,

만약 역시 부처님의 무루종자가 있는 사람이   가지 장애인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영원히 없앨  있다면, 그를 바로 여래종성이라 하나니,

따라서 무루종자의 있고 없음에 의거해서, 장애를 끊을  있고 없다 뜻이 되는 것이다.

 

然無漏種微隱難知故,約彼障顯性差別。不爾彼障有何別因,而有可害不可害者。若謂法爾有此障別,無漏法種寧不許然?若本全無無漏法種,則諸聖道永不得生。誰當能害二障種子,而說依障立種姓別?旣彼聖道必無生義。說當可生亦定非理。

그러나, 무루종자는 미세하고 은밀해서 알기 어려우므로,  장애에 연결 지어서 종성의 차별을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장애에 차이가 있는 것이 겠는가?

그러나 끊을  있고 끊을  없는 사람이 있으니,

만약 본래부터  장애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무루법의 종자는 어째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겠는가?

만약 본래부터 전혀 무루법의 종자가 없다고 한다면,  모든 성도(聖道)는 영원히 생겨날  없어야 할 것이니, 누가 장차 능히 번뇌장과 소지장의  가지 장애의 종자를 없앨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대들은 장애에 의해서 종성의 차이를 건립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미  성도가 반드시 생겨나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장차 생겨날  있다고 말하는  역시도 반드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이다.

 

然諸聖教處處說有本有種子,皆違彼義。故唯始起理教相違。由此應知,諸法種子各有本有、始起二類。

그런데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의 여러 곳에서는 본유종자가 있다고 말하는  모두는, 오직 신훈뿐이라는 그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니,

따라서 오직 비로소 생겨난 종자뿐이라는 주장은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알라! 제법의 종자는 각각 본래부터 있는 종자와 훈습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난 종자의  종류가 있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然種子義略有六種:一剎那滅,謂體纔生無間,必滅有勝功力方成種子此遮常法常無轉變,不可說有能生用故。

그런데 종자의 개념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찰나에 생멸하는 찰나멸(刹那滅)로써, 종자 자체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순간적으로 멸함으로써의 승공력(勝功力, 뛰어난 세력)이 있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주불변의 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상주불변해서 전변이 없는 것은 능히 생겨나게 하는 작용이 있다고 말할  없기 때문이다.

무위법 또는 외도의 자성(自性) 등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상주법은 생멸이 없으므로 종자의 속성이 없으며, 그 진여로부터 일체법을 연기한다는 주장을 논파한 것이다.

 

二果俱有,謂與所生。現行果法俱,現和合方成種子。此遮前後及定相離。現、種異類,互不相違。

둘째, 결과와 함께 존재한다는 과구유(果俱有)이니, 일어난 현행의 결과법과 함께 현현하여 화합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앞뒤로 시간을 달리하는, 즉 경량부와 상좌부 등의 주장인 원인은 반드시 앞에 있고 결과는 뒤에 있어야 한다는 인과이시(因果異時)의 견해와 반드시 별개로 존재한다는 상이(相離)한다는 대자재천외도의 견해와 주장을 부정하는 것으로,

현행과 종자는 다른 종류이므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즉 동시에 병존하여서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니,

예를 들자면 색법의 현행의 장애인 질애(質礙)가 있고, 종자는 장애가 없어서 다른 종류이므로 동시에 병존할 수 있으며, 

 

一身俱時,有能生用,非如種子自類相生前後相違必不俱有。

일신(一身) 함께할  능히 생겨나게 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니,

종자가 자기 부류를 서로 생겨나게 해서 전법과 후법이 반드시 서로 달라서 함께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뢰야식 속에서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경우는, 능생(能生)의 종자도 소생(所生)의 종자도 같은 종류이므로 동시에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전후 두 찰나에 인과(因果)가 되므로 진정한 인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다만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인과라는 명칭을 부여할 뿐인 것이다.

 

雖因與果,有俱、不俱,而現在時,可有因用,未生、已滅,無自體故。依生現果,立種子名,不依引生自類名種,故但應說與果俱有。

원인과 결과는 함께하는 것과 함께하지 않기도 하는, 즉 종자와 현행의 인과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이고, 종자와 종자의 인과는 인과이시(因果異時)이지만,

현행할 때에 원인의 작용이 있을  있으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와 이미 멸한 과거는 체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에 결과를 일으키는 것에 종자라는 명칭을 붙임에 의하는 것이지, 자기의 부류를 이끌어 내는 것을 종자라고 이름함에 의하지 않는 것이므로 다만 결과와 함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인연에 종자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한편, 종자생종자에도 종자로서의 뜻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三恒隨轉,謂要長時,一類相續,至究竟位,方成種子

셋째,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는 항수전(恒隨轉) 반드시 오래도록  종류로 상속해서 구경위에 이르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되는 것으로,  

여기서 구경위(究竟位)는  종자에 따라 달라진다종자가 초지(初地)에서 견도에 들어갈  끊어지면 전도가 구경위가 되고,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끊어질 때에는 금강유정이 구경위가 된다.

 

此遮轉識,轉易閒斷,與種子法,不相應故。此顯種子自類相生。

이것은 종자가 전식(轉識)이 아니라는 뜻으로, 전식은 삼성(三性)이 전이(轉易, 바뀌는)하는, 즉 3수(受)가 전이(轉易)하고, 3성(性)이 바뀌어서 개전(改轉)하는 것이 잠시 중단됨이 있어서, 종자의 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자가 자기 부류를 서로 생겨나게 하는 자류상생(自類相生)을 나타내는 것이다.

 

四性決定,謂隨因力,生善惡等功能決定,方成種子此遮餘部執。異性因生異性果有,因緣義。

넷째, 성품이 결정적이라는 성결정(性決定)으로, 원인의 힘인 인력(因力) 따라 선과  등을 일으키는 능력이 결정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부파인, 설일체유부 등에서 다른 성질의 원인이 다른 성질의 결과를 일으키는  인연의 뜻이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五待衆緣。謂此要待自衆緣合,功能殊勝方成種子。此遮外道執自然因不待衆緣恒頓生果或遮餘部

緣恒。非無顯所待緣非恒,有性故種,於果非恒頓生。

다섯째, 여러 가지 연(緣)을 기다린다는 대중연(待衆緣)으로, 반드시 자기의 여러 연(緣)의 화합을 기다려서 작용의 능력이 뛰어나게 되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외도가 집착하는 바와 같이, 자연히 존재하는 원인인 자연인(自然因)이 여러 연(緣)을 기다리지 않고 항상 바로 결과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부파에서 연(緣)이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필요로 하는 연이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즉 설일체유부에서 삼세실유(三世實有)ㆍ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을 주장하여서 필요로 하는 소대연(所待緣)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니,

따라서 종자는 결과가 항상 바로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六引自果。謂於別別色心等果各各引生方成種子。此遮外道執唯一因生一切果。或遮餘部執色心等互爲因緣。

여섯째,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인자과(引自果)이니, 갖가지의 색법ㆍ심법 등의 결과를 각각 이끌어 내는 것이 비로소 종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도가 오직 하나의 원인(대자재천)이 모든 결과를 일으킨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부파(유부 등)가 색법과 심법이 서로 인연이 된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唯本識中,功能差別具斯六義成種非餘。

오직 근본식 중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이  여섯 가지 뜻을 갖추어 종자를 이루는 것으로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여섯 가지는 종자의 속성인 동시에 종자가 종자로서 작용하기 위한 조건 자격으로,

모든 종자는 찰나멸(刹那滅)ㆍ과구유(果俱有)ㆍ항수전(恒隨轉)ㆍ성결정(性決定)ㆍ대중연(待衆緣)ㆍ인자과(引自果)의 여섯 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종자로서의 작용이 가능해지나, 순간순간 반드시 여섯 가지를 구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순간에 함께 구비한다는 것이다.

 

外穀麥等識所變故,假立種名,非實種子。

외부세계의 곡식ㆍ보리 등은 식이 전변한 것이기 때문에 종자라는 이름을 가립할 수 있지만, 참다운 의미의 종자는 아니니,

보리  곡식은 식소변(識所變)의 현행법으로서 그것에서 다시 보리 등의 싹을 내므로 종변(種變)이지만,  현행법은 종자가 아니다따라서 증상연으로서 친인연(親因緣)의 뜻은 없지만, 다만 가(假)로 종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此種勢力生近正果名曰生因,引遠殘果令不,絕卽名引因。

 종자의 가까운 결과인 근과(近果)와 진정한 결과인 정과(正果)를 일으키는 것을 생인(生因)이라 이름하고,

 결과인 원과(遠果)와 나머지 결과인 잔과(殘果)를 이끌어 갑자기 단절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인인(引因)이라 하는 것이다.

내부의 종자인 내종(內種)과 외부의 종자인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을 쌍(雙)으로 판별한 것이다.

 

內種必由熏習生長親能生果,是因緣性。外種熏習或有或無,爲增上緣辦所生果,必以內種爲彼因緣。是共相種所生果故。

내부세계의 종자인 내종(內種)은 반드시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신훈종자(新熏種子)이고 증장해서 직접 결과를 일으키는 본유종자(本有種子)이니, 이것이 인연의 속성인 인연성(因緣性)인 것이다.

외부세계의 종자인 외종(外種)에는 훈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

외부세계의 종자인 외종(外種)은 증상연이 되어 생겨난 결과를 판별하며,

반드시 내종(內種)으로써 그 외종(外種)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은 공상종자(共相種子)가 생겨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종자에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가 있으며, 

다른 유정과 함께 수용하는 모든 대상의 종자는 공상종자(共相種子)이고,

오직 자기에만 국한되고 다른 것에 통하지 않는 5근(根) 등의 종자는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7

 

有義。種子各有二類:一者本有,謂無始來異熟識中,法爾而有,生薀、處、界功能差別。世尊依此,說諸有情無始時來,有種種界,如惡叉聚,法爾而有。餘所引證廣說如初。此卽名爲本性住種。

다음은 호법(護法)의 견해로써 종자의 신훈본유설(新熏本有說)이며, 종자에는 각각 두 종류가 있어서,

첫째는 본래부터 있는 종자인 본유종자(本有種子)이며, 무시로부터 이숙식에 본래부터 존재하면서 온(蘊)ㆍ처(處)ㆍ계(界)를 일으키는 공능차별(功能差別)을 말하는 것으로,

세존께서 이에 근거해서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부터 갖가지의 계(界)가 있어서 마치 악차 열매가 모여 있는 것과 같이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외에 앞에서 인용한 증명 문장을 자세히 말한다면, 앞에서 호월이 주장한 바와 같은 것으로, 이것을 본성주종자(本性住種子)라고 이름하며, 

 

二者始起,謂無始來數數現行熏習而有。世尊依此,說有情心染、淨諸法所熏習故,無量種子之所積集。諸論亦說染、淨種子,由染、淨法熏習故生,此卽名爲習所成種。若唯本有,轉識不應與阿賴耶爲因緣性。如契經說:

둘째는 비로소 생겨난 시기종자(始起種子)로써, 아득한 옛부터 누누이 현행에 훈습 되어서 있게 되는 것을 말하며,

세존께서 이에 근거하여 '다계경'에서, 유정의 마음이 잡염과 청정의 제법에 훈습되어서 무량한 종자가 모여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여러 논서에서도 역시 잡염ㆍ청정법의 종자는 잡염ㆍ청정법의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곧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습소정종자(習所成種子)라 이름라는 것이다.

만약 오직 본유종자일 뿐이라면, 전식(轉識)이 아뢰야식과 인연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니, 경전,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諸法於識藏,識於法亦爾。更互爲果性,亦常爲因性。’

제법, 즉 현행의 7전식(제법)은 장식(藏識, 제 8식)에 대해서, 장식도 법에 대해서 역시 그러하며, 

다시 서로 결과의 성질이 되고, 역시 항상 원인의 성질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 설해져 있다고 하며, '섭대승론'의 제2권에 인용되어 있으며, 7전식(轉識)과 제8식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경문에서 제법은 7전식을, 식은 제8식을 가리킨다.

제법어식장(諸法於識藏) 식어법역이(識於法亦爾), 제1구의 뜻은;

제8식은 소훈처(所熏處)로서 7전식의 종자를 함장하고 있으며, 이 종자로부터 일체법, 즉 7전식을 현행하며, 다음에 제8식이 5근(根)을 집지(執持)함으로써 5식(識)이 생겨나고, 제8식이 제7식의 소의(所依)가 됨으로써 제7식이 생겨나고, 제7식이 제6식의 소의가 됨으로써 제6식이 생겨나는 것이며,

갱호위과성(更互爲果性) 역상위인성(亦常爲因性), 제2구의 뜻은;

제8식의 견분(주관)의 종자는 제7식과 제6식으로써 훈습되므로 능훈과 소훈의 인과관계이며, 선악업의 종자도 제6식의 현행으로부터 훈습되므로 능훈과 소훈의 인과관계이다. 이와 같이 7전식과 제8식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이다.

 

此頌意言:阿賴耶識與諸轉識,於一切時展轉相生,互爲因果。攝大乘說:“阿賴耶識與雜染法互爲因緣,如炷與焰展轉生燒。又如束蘆,互相依住。”唯依此二建立因緣,所餘因緣不可得故。

 게송의 의미는,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이 어느 때나 전전, 즉 상호전전(相互展轉)하여서 서로 생겨나게 함으로써,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하며,

'섭대승론석'에서 말하기를 “아뢰야식은 잡염법과 서로 인연이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심지와 불꽃이 전전하면서 일어나서 타오르는 것과 같고, 묶은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해서  있는 것과 같다”고 세친의 '섭대승론석' 제2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직 종자와 현행의 둘에 의지해서 인연을 건립하는 것으로, 이외의 다른 인연은 있을  없기 때문이다.

 

전전(展轉)에는 차제전전(次第展轉)과 상호전전(相互展轉)의 두 가지 뜻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이다.

 

若諸種子不由熏生,如何轉識與阿賴耶有因緣義?非熏令長可名因緣,

만약 모든 종자가 훈습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식(轉識)이 아뢰야식과 인연의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훈습해서 증장케 하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할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종자본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만 훈습으로써 증장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인연이라고 말한다고 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논파한 것이다.

 

勿善惡業與異熟果爲因緣故。

선악의 업이 이숙과와 인연이 된다고 말해서는  되기 때문이다. 

선악업의 종자가 증장됨으로써 제8식의 이숙과가 감득(感得)되는 것이라 할 경우, 만약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그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나, 인연은 인과동류(因果同類)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이숙의 원인은 선악이고, 결과는 무기(無記)로서 인과이성(因果異性)인 것을 어떻게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즉, 이 선악업의 종자는 이숙과의 증상연(增上緣)일 뿐, 인연이 아니라는 취지이다.

 

又諸聖教說有種子由熏習生,皆違彼義。故唯本有,理、教相違。若唯始起,有爲無漏無因緣故,應不得生。

또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어떤 종자는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모두의 뜻은 본유설(本有說)과는 다른 것이니,

따라서 오직 본유종자라고 한다면, 바른 논리(理)와 성스러운 가르침(敎)에 위배되며,

만약 오직 비로소 생겨난 종자뿐이라면, 유위의 무루법, 즉 견도(見道)에서 비로소 일어나는 무루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생겨날  없어야 하는 것이며,  

오직 신훈(新熏)이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有漏不應爲無漏種,勿無漏種生有漏故。許應諸佛,有漏復生善等應爲不善等種。

유루는 무루의 종자가   없으니, 무루종자가 유루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해서는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에게 유루종자가 다시는 생겨나지아야 하는 것이고, 선(善) 등을 불선 등의 종자로 삼을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유루선심(有漏善心)의 최후로서 최상구경인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인연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왜냐하면 세제일법은 아무리 뛰어나도 유루일 뿐이거늘, 유루가 어떻게 무루의 종자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반대로 무루의 종자로부터 유루를 생겨나게 할 수 있어야 하나,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논지이다.

 

分別論者雖作是說:“心性本淨,客塵煩惱所染污故,名爲雜染。離煩惱時轉成無漏,故無漏法非無因生。”

분별론자(分別論者)는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번뇌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잡염이라고 이름하며,

번뇌를 여의었을 때에 바뀌어 무루를 이루게 되므로 무루법은 원인없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분별론자(分別論者)란 갖가지 삿된 분별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소승의 대중부, 일설부(一說部) 등 또는 대승 중에서 일부 삿된 분별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而心性言彼說何義?若說空理,空非心因,常法定非諸法種子,以體前後無轉變故。

그러나 마음의 본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만약 공의 진리인 공리(空理, 진여)라고 말한다면, 공은 마음의 원인이 아닌 것이니,

상주하는 상법(常法)은 결정코 일체법의 종자가 아니며, 본체가 전후로 전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설(眞如緣起說)을 논파하는 취지이다.

 

若卽說心,應同數論,相雖轉變,而體常一

만약 심왕, 즉 심(心)이라고 말한다면, 수론파(數論派)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상(相)의 대(大) 등은 전변하지만, 본체는 상주불변의 상일(常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야 하며, 

만약 심성(心性)을 의타기의 심(心)이라고 말한다면, 상(相)은 전변하고 체(體)는 상주불변이 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수론(數論)에서는 자성명제(自性冥諦, 쁘라끄리띠)로부터 23원리가 전변되어 나오며,

그 쁘라끄리띠는 체(體)로서 상주하는 것이고, 23원리는 상(相)으로서 무상(無常)이라고 인정하므로, 마치 그 주장과 같다는 비판이다.

왜냐하면 심성(心性)이 곧 심체(心體)이고 번뇌 때문에 오염되어 상(相)이 전변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惡、無記心又應是善。

악(惡)과 무기의 마음도 역시 선(善)이어야 하는 것이니,  

심성(心性)이 만약 선(善)이라면 악과 무기심도 역시 선이어야 하는 것으로, 선 악 무기의 3성(性)의 상(相)은 달라도 체(體)는 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許則應與信等相應,不許便應非善心體。尚不名善,況是無漏?

만약 유루의 불선심(不善心) 등의 체성도 역시 선이라고 인정한다면, 불선심이 일어날 때 곧 신(信)심소 등의 11가지의 선심소(善心所)도 상응해야 하며,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득 착한 마음의 본체인 선심체(善心體)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니, 

오히려 선이라고도 이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무루이겠는가?

 

有漏善心旣稱雜染,如惡心等性非無漏。故不應與無漏爲因,勿善、惡等互爲因故。若有漏心性是無漏,應無漏心性是有漏,差別因緣不可得故。

유루의 착한 선심(善心) 이미 잡염과 칭합(稱合)하는, 즉 잡염은 모든 삼마지(三摩地)의 유루에 통하기 때문에 선성(善性)도 포함하는 것이므로, 악심(惡心) 등과 같이 본성이 무루가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따라서 무루의 원인이   없는 것이니, 선과  등은 서로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유루심의 본성이 무루이라면, 무루심의 본성이 유루이어야 할 것이니, 차별된 인연은 있을  없기 때문이다.

유루는 다스려지는 소대치(所對治)의 장애이고, 무루는 다스리는 능대치(能對治)의 지혜이다.

그런데 유루심의 본성이 무루라고 한다면, 무루심의 본성은 또한 유루가 되는 것이므로 인연이 차별되고 혼동되어서 논리가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又異生心若是無漏,則異生位無漏現行應名聖者。若異生心性雖無漏而相有染,不名無漏,無斯過者,則心種子亦非無漏。何故汝論說有異生,唯得成就無漏種子?種子現行性相同故。

만약 중생의 마음이 무루라고 한다면,  중생의 지위에서 무루가 현행하여서 성자(聖者)라 이름해야  것이며,

만약 중생심이 본성은 무루지만, 상(相)에 잡염이 있으므로 무루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또한 이에 과실이 없다면,  마음의 종자도 역시 무루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무엇 때문에 논서에서 어떤 중생은 오직 무루종자를 성취할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는가?

종자와 현행의 본성인 무루(無漏)와 유루(有漏)가 같기 때문이라고 '유가사지론' 57권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然契經說心性淨者,說心空理所顯眞如,眞如是心眞實性故。或說心體非煩惱故,名性本淨,非有漏心性是無漏故名本淨。

그런데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에서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고 것은,

마음의 공성(空性)에서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것이며, 진여는 마음의 참다운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는 마음의 본체인 심성(心性)을 심체(心體), 즉 의타기의 심체(心體)는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이름한 것으로,  

유루심의 본성인 진여는 무루이기 때문에 본성청정의 본정(本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유루심의 본성인 진여는무루이며, 그것으로부터 일체법을 연기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논파한 것이다.

 

由此應信有諸有情,無始時來有無漏種不由熏習法爾成就,後勝進位熏令增長,無漏法起以此爲因,無漏起時復熏成種。有漏法種類此應知。諸聖教中,雖說內種,定有熏習,而不定說一切種子皆熏故生,寧全撥無本有種子?然本有種,亦由熏習,令其增盛,方能得果故,說內種定有熏習。

▷정의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할 것이니,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부터 무루의 종자가 있었으며, 훈습에 의하지 않고 본래부터 성취된 것이다. 

이후에 승진하는 지위인 5위(位) 중에서 자량위(資糧位)에서 훈습해서 증장하게 하며,

무루법이 일어나는 것도 이 '본유무루종자'가 원인이 되며,

무루가 일어날 때, 즉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에 다시 종자(신훈종자)를 훈습해서 이루는 것이다. 

유루법의 종자도 이에 비추어서 본유(本有)ㆍ신훈(新熏),  가지의 종자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비록 내부세계의 종자인 내종(內種)에 반드시 훈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모든 종자가 결정적으로 훈습에 의해 생겨난다는 뜻은 아니거늘, 어째서 본유종자가 전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인가? 

그러나 본유종자 역시도 훈습에 의해 증성(增盛)되어 비로소 결과를 얻을  있기 때문에, 내부세계의 종자인 내종(內種)에 반드시 훈습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6

 

종자의 가실(假實)을 판별하는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雖非一異,而是實有,假法如無,非因緣故。

비록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지만, 이것은 실유(實有)이니, 임시적인 존재인 가법(假法)은 존재하지 않음의 무(無)와 같아서 인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경량부(經量部)의 비유사(譬喩師)나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의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비판의 내용은 "종자에 실체가 있다면 현행법과 전혀 달라야 하는 둘(종자와 현행의 제8식)이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말하기 때문에, 종자는 실(實)이 아니라 가(假)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답변이다.

 

此與諸法旣非一異,應如甁等是假非實。

이것은 일체법과 이미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므로 병(甁) 등의 경우와 같이 가유(假有)일 뿐, 실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안혜(安慧) 등의 비판내용이다.

 

若爾,眞如應是假有,許則便無眞勝義諦。

만약 그러하다면 진여도 임시적 존재인, 가유(假有)이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곧 문득 참다운 승의제(勝義諦)가 아닌 것이 된다.

안혜의 비판에 대한 논주의 논박이다. 그대의 논리대로라면 진여도 일체법과 불일불이(不一不異)이므로 가유(假有)이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참다운 승의제(勝義諦)가 없어야 할 것이니, 무엇에 배대해서 세속제가 있다고 말할 것이며,

또한 승의제가 없으므로 열반도 없으니, 무엇 때문에 성불하고자 수행할 것인가 하는 논지이다.

 

然諸種子唯依世俗,說爲實有,不同眞如。種子雖依第八識體,而是此識相分非餘,

그런데 모든 종자는 오직 세속제(世俗諦)에 근거해서 실유라고 말한 것이니, 진여와 같지 않기 때문이며,

종자는 비록 제8식의 체에 의지하지만, 이 식의 상분(객관)일 뿐 다른 것(見分, 주관 등)이 아닌 것이며,

종자의 가실(假實)을 판별한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안혜(安慧) 등이 종자가 실(實)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므로, 진여를 예로 들어서 종자가 유(有)라는 성립시키며, 또한 종자도 진여와 같은 실유(實有)라고 오해할 것을 두려워해서 다시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자의 유(有)는 세속제에 의해서 실유이고, 진여는 승의제에서의 승의(勝義)인 것이다.

 

見分恒取此爲境故。諸有漏種與異熟識體無別故,無記性攝。

견분(주관)이 항상 이것을 취해서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니, 모든 유루종자는 이숙식과 체성이 다른 체별(體別)이 아니므로 무기성에 포함되며,

4분(分)을 판별한 것으로, 제8식의 자체분이 소훈처(所熏處)이므로, 모든 유루종자는 제8식의 자체분을 의지처로 하여서 상분(객관)이되며, 무루종자는 유루의 제8식의 상분이 아닌 것이다.

 

因果俱有善等性故,亦名善等。

원인도 결과도 모두 선(善) 등의 세 가지 성품이 있으므로 역시 선종자(善種子) 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종자의 3성을 판별한 것으로, 종자의 작용을 제8식의 자체에 귀속시켜서 앞에서 종자의 성품을 무기성(無記性)이라고 말했지만, 종자가 항상 오직 무기성만이 아닌 것으로,

종자의 작용과 제8식의 자체를 나누어 따로 논한다면, 능훈의 현행이 3성(性)에 통하므로 훈습되는 종자도 역시 3성에 통하며, 또한 종자로부터 현행된 일체법이 3성에 통하므로, 그 원인인 종자도 3성에 통하는 것이다.

 

諸無漏種非異熟識性所攝,故因果俱是善性攝,故唯名爲善。

모든 무루종자는 이숙식의 성(性)에 포함되지 않고, 원인도 결과도 모두 선의 성품인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오직 선종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성(性)은 체성(體性)과 성류(性類)의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체성의 의미로서 말한다면, 무루종자의 체성은 다만 선(善)이고 이숙식의 체성은 다만 무기(無記)이므로 두 체성이 달라서 무루종자를 이숙식의 성(性)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성류(性類)로 말한다면, 무루종자는 다스리는 주체의 능대치(能對治)의 법이고 유루의 이숙식은 다스려지는 소대치(所待治)의 법이므로 그 성류가 달라서 무루종자를 제8식의 성(性)에 포함시킬 수 는 것이다.

 

若爾,何故決擇分說二十二根,一切皆有異熟種子,皆異熟生?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유가사지론'의 제57권 '섭결택분'에서 22근(根)을 설명하고 있으며, 일체 모두가 이숙종자가 있다고 하고, 모두가 이숙생(異熟生)이라 하는 것인가?

 

*22근(根)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ㆍ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우근(憂根)ㆍ희근(喜根)ㆍ고근(苦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며,

 가운데에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의 셋은 무루근(無漏根)이므로 제8식의 성(性)에 포함되지 않아야 하는데,  모두를 이숙의 종자이고 이숙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묻는 이다.

 

雖名異熟,而非無記。依異熟故,名異熟種。異性相依,如眼等識。或無漏種由熏習力,轉變成熟,立異熟名。非無記性所攝異熟。

비록 이숙이라 이름할지라도 무기성이 아니니, 이숙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숙종자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그 성품을 달리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것이 안식 등과 같은 것이며, 

또한 무루종자는 훈습력에 의해서 전변ㆍ성숙되기 때문에 이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니, 무기성에 섭수되는 이숙이 아닌 것이다.

'유가사지론' 제57권의 '섭결택분'에서 이숙(異熟)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종자의 체(體)가 이숙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8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지처인 소의(所依)의 제8식에 따라서 이숙이라고 말할 뿐이다. 

소의인 제8식은 무기(無記)이고 능의(能依)인 종자는 무루로서 성품이 달라도 관계 없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안식 등은 소의근(所依根)에 따라 그 명칭을 붙이는데, 소의인 감각기관은 무기이고 능의인 식(識)은 제6식을 따라 3성(性)에 두루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능의ㆍ소의가 성품이 달라도 지장 없이 식(識)이 감각기관에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하는 종자의 신훈본유(新熏本有)를 판별하는 것으로, 우선 유본유설(唯本有說)의 내용을 서술하며, 이것은 호월(護月, Candrapāla)의 주장이라고 한다.

此中有義:一切種子,皆本性有,不從熏生。由熏習力,但可增長。如契經說:一切有情,無始時來,有種種界,如惡叉聚,法爾而有。界卽種子差別名故。又契經說:無始時來界,一切法等依。界是因義。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호월護月, Candrapāla의 주장)

일체 종자는 모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훈습력에 의해서 다만 증장할 뿐이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유정은 아득한 옛부터 갖가지의 계(界)가 있어서, 비유하자면 악차(惡次, rudra-akṣa) 열매가 쌓여 있는 것과 같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계(界)는 종자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며, 

또한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득한 옛부터 계는 일체법 등의 의지처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의 계(界)는 원인의 뜻인 인의(因義)인 것이다.

 

*악차(惡叉, rudra-akṣa) 과일의 이름으로, 그 씨로 염주를 만들며, 이것을 금강자(金剛子)ㆍ천목구(天目球)라고 하며,  과일이 땅에 떨어지면  장소에 많이 쌓이기 때문에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에서  장소에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할  흔히 이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2권 말(末)에 의하면, '대승장엄경론'에서도 '무진의경(無盡意經)'이라는 명칭으로  경전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3승(乘)에서 공통적으로 믿는 경전이라고 한다.

 

瑜伽亦說,諸種子體無始時來,性雖本有,而由染、淨,新所熏發。諸有情類,無始時來。若般涅槃法者,一切種子皆悉具足。不般涅槃法者,便闕三種菩提種子。如是等文誠證非一。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도 말하기를 “모든 종자 자체는 아득한 옛부터 체성이 비록 본유(本有)이지만, 잡염과 청정한 업으로 인해서 새롭게 훈습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2권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 중에서 아득한 옛적부터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의 반열반법(般涅槃法)이 있는 사람은 일체의 유루(有漏)ㆍ무루(無漏) 종자를 모두 다 구족하였으며,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불반열반법(不般涅槃法)의 사람은 곧 세 가지 보리종자인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 즉 3승(乘)의 무루종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유가사지론' 제2권의 이와 같은 문장으로 증명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며, 

 

又諸有情旣說,本有五種性別,故應定有法爾種子,不由熏生。

또한 '능가경'에서, 모든 유정은 이미 본래 다섯 종성의 오종성(五種姓)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반드시 본래부터 존재하는 종자가 있으며, 훈습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입능가경(入楞伽經)' 제2권에서 말하고 있으며, 

 

*오종성(五種姓) 성문정성(聲聞定姓)ㆍ독각정성(獨覺定姓)ㆍ보살정성(菩薩定姓)ㆍ무성유정(無性有情,  無性闡提)ㆍ부정성(不定姓)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논서의 9권에서 다루고 있다.

 

又瑜伽說:地獄成就三無漏根,是種非現。又從無始展轉傳來法爾,所得本性住性。

또한 '유가사지론'의 제57권에서 말하기를 “지옥에서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을 성취하는데, 이것은 종자인 것으로 현행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유가사지론'의 제35권과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제1권과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의 제1권 등에서는, "아득한 옛적부터 전전(展轉)하면서 전래하여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본성에 안주하는 종성인 본성주성(本性住姓, 본유종자)이라고 하며, 

 

由此等證無漏種子法爾本有,不從熏生。有漏亦應法爾有種,由熏增長,不別熏生。如是建立因果不亂。

이와 같은 종류의 증명문장에 의한다면, 무루종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유루종자 또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훈습되어서 증장하는 것일 뿐, 따로 훈습을 받아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이 건립하여 원인(종자)과 결과(현행)가 정연하다고 하는 것이다.

 

有義種子皆熏故生,所熏能熏俱無始有,故諸種子無始成就。

유신훈설(唯新熏說)의 견해가 있으니, 종자는 모두 훈습을 받아서 생겨나는 것으로,

훈습을 받아들이는 소훈(所熏)과 훈습하는 능훈(能熏) 모두가 아득한 옛부터 있었기 때문에 종자는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 하는 것으로, 

 

*유신훈설(唯新熏說)은 십대논사 중에서 난타(難陀)ㆍ승군(勝軍)의 주장이라고 한다.

*유본유가(唯本有家)가 앞에서 일체 종자는 아득한 옛적부터 존재한다는 경문(經文)을 인용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에 답하여 말하는 것으로, 즉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이 모두 아득한 무시에서부터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아득한 옛적부터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종자 그 자체가 본유(本有)라는 뜻은 아니라고 회통한다.

 

種子旣是習氣異名,習氣必由熏習而有,如麻香氣花熏故生。如契經說:諸有情心,染、淨諸法所熏習故,無量種子之所積集。

종자는 습기의 다른 명칭이고, 습기는 반드시 훈습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니, 마(麻, 삼)의 냄새가 꽃에 의해 훈습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유식론술기' 제2권 말(末)에 '다계경(多界經)'을 인용하여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유정의 마음은 잡염과 청정의 여러 법으로 훈습을 받아서, 무량한 종자가 모여진 곳이라고 하였다.

 

*마(麻, 삼)은 호마(胡麻)를 말하는 것으로, 인도에는 호마의 기름으로 향유(香油)를 만들어서 피부에 바르는 풍습이 있다. 방향(芳香)의 기름의 원료는 호마에 꽃의 향기를 쬐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비유로 든 것이다.

 

論說:內種定有熏習,外種熏習或有或無。又名言等三種熏習,摠攝一切有漏法種。彼三旣由熏習而有,故有漏種必藉熏生。

논서에서는 “내면세계의 종자는 반드시 훈습이 있고, 외부세계의 종자는 훈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의 상권에서 말하였으며,

또한 명언종자(名言種子)ㆍ아집종자(我執種子)ㆍ유지종자(有支種子) 등의 세 가지 훈습(본 논서 제8권)에 모든 유루법의 종자를 전체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는 훈습에 의해 있게 되는 것이므로 유루종자는 반드시 훈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無漏種生亦由熏習。說聞熏習,聞淨法界等流正法,而熏起故,是出世心種子性故。有情本來種姓差別,不由無漏種子有無,但依有障無障建立。

무루종자가 생겨나는 것도 역시 훈습에 의한 것이니, '섭대승론'의 상권에서 "문훈습(聞熏習)은 청정법계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바른 법을 듣고 훈습되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세간을 벗어난 마음의 무루심(無漏心)종자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유정이 본래 종성의 차별이 있는 것은 무루종자의 있고 없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장애인 번뇌장ㆍ소지장이 있고 없음에 의해서 건립되는 것이다.

만약 오직 신훈(新熏)뿐이라면, 어떻게 다섯 가지 종성(種姓)이 차별이 있다고 성교(聖敎)에서 말씀하셨겠는가라는 비판에 대하여 경문(經文)의 뜻을 회통해서 답변한 것이다.

 

如瑜伽說:“於眞如境,若有畢竟二障種者,立爲不般涅槃法性。”若有畢竟所知障種非煩惱者,一分立爲聲聞種性,一分立爲獨覺種性。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말하기를 “만약 진여의 경지에 대하여 궁극적인 두 가지 장애인 필경이장(畢竟二障)의 종자가 있는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불열반법성(不般涅槃法姓)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궁극적인 필경소지장(畢竟所知障)의 종자가 있고 번뇌장(煩惱障)의 종자가 없으면,

한 부류인 둔근(鈍根)은 성문의 종성으로 하고,

또 한 부류의 이근(利根)은 독각의 종성으로 하며,

 

*완전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종성의 불열반법성(不般涅槃法姓)이란 무성종성(無性種姓)으로, 즉 무성천제(無性闡提)를 가리키는 것이다.

 

若無畢竟二障種者,卽立彼爲如來種性。故知本來種性差別依障建立,非無漏種。

所說成就無漏種,言依當可生,非已有體。

만약 궁극적인 두 장애인 필경이장(畢竟二障)의 종자가 없으면, 곧 여래종성(보살종성)이라 하는 것이므로

본래의 종성(種姓)의 차별은 장애에 의해 건립되는 것일 뿐, 무루종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유가사지론' 제 57권에서 지옥의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 즉 무루종자를 성취한다고 말한 것은 장차 생겨날 가능성에 의한 것으로, 이미 무루종자의 본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유가사지론' 제57권에 의하면, 지옥에서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을 성취하는데, 이것은 종자이지 현행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오직 신훈설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라는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장차 번뇌를 끊어서 무루종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며, 아직 종자를 훈습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의 체(體)가 있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오직 신훈설이 맞다는 내용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5

 

論曰:初能變識,大小乘教名阿賴耶。此識具有能藏、所藏、執藏義故。

▷논하여 제8식의 세 가지 체상인, 능장 소장 집장의 삼상(三相)을 총체적으로 설한다;

첫 번째의 초능변식(初能變識)은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에서 아뢰야식(제 8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 초능변식(아뢰야식)에 구체적으로 능장(能藏, 지중의持種義)ㆍ소장(所藏, 수훈의受薰義)ㆍ집장(執藏, 아애소집의我愛所執義)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능변식(能變識)은 전변의 주체인 능체(能變)가 되는 식(識)이라는 뜻으로,

*초능변식(初能變識, 제8식)을 아뢰야식(阿賴耶識)ㆍ일체종자심식ㆍ이숙식(異熟識)ㆍ아타나식(阿陀那識)ㆍ심(心) 등으로 이름한다. 이들 명칭 중에서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아뢰야식, ālaya는 a-√lī(집착하다, 저장하다, 저장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여,

'숫따니빠따'ㆍ'증일아함경' 등 초기경전에서 알라야 ālaya는 ‘집착’, ‘애(愛)ㆍ낙(樂)ㆍ흔(欣)ㆍ희(喜) 하는 집착의 대상’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비달마구사론' 제16권에서는 탐욕ㆍ욕망 등과 나란히 열거되고 있으며,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6권에서는 애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유가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근원적인 대상으로서 이 식을 들어서,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我, ātman)로 착각해서 집착하므로― 아뢰야식이라 명명하였다.

유식학파에서는 ‘집착’의 뜻 이외에 ‘저장’의 의미가 강조되며,

접두어 a를 첨가한 것은 ‘무몰(無沒)’의 의미, 즉 이 식이 아득한 옛적부터 끊임없이 항상 작용한 항전여폭류(恒轉如暴流)이기 때문이다.

*자상(自相)은 자체의 양상이라는 의미로서, 제8식이 뇌야삼장(賴耶三藏), 즉 능장(能藏, 지중의持種義)ㆍ소장(所藏, 수훈의受薰義)ㆍ집장(執藏, 아애소집의我愛所執義)의 세 가지 뜻을 갖추므로 아뢰야식, 장식(藏識)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유정의 정신적ㆍ신체적 행위는 모두 종자(種子, bīja)의 형태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능장(能藏, 지중의持種義)은 제8식이 능히 모든 잡염법(선ㆍ악ㆍ무기)의 종자를 저장ㆍ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잡염품은 아뢰야식에 결과의 이성(異性)으로서 저장된다.

*소장(所藏, 수훈의受薰義)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어서,

첫째는 제8식이 7전식에 의해 모든 잡염법의 훈습을 받아들이는 소훈처(所熏處)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잡염품의 법, 즉 구체적인 경험세계 속에서 그것을 발생한 아뢰야식이 원인의 인성(因性)으로서 내재하는 것을 말하고, 

*집장(執藏, 아애소집의我愛所執義)은 말나식이 아득한 옛적부터 아뢰야식을 자아로 착각하여 아애(我愛)를 일으켜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謂與雜染互爲緣故,有情執爲自內我故。此卽顯示初能變識所有自相,攝持因果爲自相故。

此識自相分位雖多,藏識過重,是故偏說。此是能引諸界、趣、生,善、不善業異熟果故,說名異熟。

이에 능장ㆍ소장의 뜻은, 잡염법(선ㆍ악ㆍ무기)과 서로 연(緣)이 되기 때문이며,

집장의 뜻은, 유정(제7식)이 집착해서 자기 내면의 자아로 삼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은 곧 초능변식에 있는 자체의 자상(自相)을 나타내는 것으로, 원인ㆍ결과를 거두어서 자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초능변식(아뢰야식)의 자상은 분위(分位)가 많지만 장식(藏識)이라하는 것은,

첫 번째 지위이면서 과실이 크기 때문에 이에 비중을 두어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능히 모든 계(界)ㆍ취(趣)ㆍ생(生)을 이끄는 선업ㆍ불선업의 이숙과인 총보업(總報業)이므로 이숙식(異熟識)이라 이름한다.

 

*뇌야삼위(賴耶三位),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의 3가지 지위 또는 계위의 뇌야삼위(賴耶三位)에서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의 제8식을 장식(藏識), 즉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말한 것으로, 뇌야삼위는 수행기간인 인위(因位)에서 불과(佛果)의 지위인 과위(果位)에 이르는 사이에 제8식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세 가지로 나눈 것이며, 이 외에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가 있다.

아애집장현행위는 제7식이 제8식의 견분을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으로 하여서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실제적 주체로써의 아(我, ātman)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기간이며,

범부에서부터 보살은 제7지인 원행지(遠行地)까지, 2승(乘)은 유학의 성자까지의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물론 선악업과위의 이숙식(異熟識)과 상속집지위인 아타나식(阿陀那識)도 병행하지만, 아애집장현행의 뜻이 가장 강하고 그 과실이 크므로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제8지인 부동지(不動地) 이상의 보살과 2승의 무학위(아라한)에서는 순(純)무루종자가 상속해서 아집을 영원히 일으키지 않으므로, 제8식에 대해서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뢰야3위(賴耶三位) 또는 뇌야3위(賴耶三位)는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의 수행론의 일부로서, 수행이 향상되면서 모든 번뇌 즉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함에 따라 일어나는 제8식 즉 아뢰야식의 변화를 크게 3단계로 나눈 지위 또는 계위를 말하는 것으로, 수행기간인 인위(因位)에서 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인 과위(果位)에 이르는 사이에 제8식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 또는 변형을 3단계로 나눈 것이다.
'성유식론'를 비롯한 유식학 논서들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뢰야3위는 제8식의 여러 명칭 가운데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 · 이숙식(異熟識, vipāka vijñāna) · 아타나식(阿陀那識, adāna vijñāna, 집지식, 執持識)이라는 3가지 명칭이 지닌 의미와 결부하여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제1위인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는 아뢰야식 · 이숙식 · 아타나식이라는 3가지 명칭이 지닌 의미가 모두 존재하는 지위인데 아애 · 집장의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의 의미가 두드러진 지위이며, 아애는 말나식의 4번뇌 가운데 하나이고, 집장은 특히 번뇌장을 뜻한다.

제2위인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는 이숙식 · 아타나식이라는 2가지 명칭이 지닌 의미만 존재하는 지위인데, 선업 · 악업의 이숙과라는 이숙식이라는 명칭의 의미가 두드러진 지위이다. 번뇌장이 단멸된 상태이므로 특히 선업의 이숙과라는 의미가 두드러진 지위이다.

제3위인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는 아타나식(집지식)이라는 1가지 명칭이 지닌 종자 특히 무루종자의 상속과 유지라는 의미만이 존재하는 지위이다.

 

離此,命根、衆同分等,恒時相續,勝異熟果不可得故。此卽顯示初能變識所有果相。

이 외에는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 등 항상 상속하여 뛰어난 이숙과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초능변식에 있는 과보로서의 체상인 과상(果相)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과상(果相)은 과보로서의 체상을 밝힌 것으로, 제8식은 유정이 전생에 지은 선악의 업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를 받은 총보(總報)의 주체임을 말한다.

이 식은 3계(界)ㆍ5취(趣)ㆍ4생(生) 중 어디에도 전생할 종자를 모두 지니고 있으며, 선이나 악의 강성한 업종자의 조력이 있어야 한다.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유식론술기' 제1권에서 ‘성류(性類)를 달리해서 성숙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즉 현재의 제8식을 초래한 전생의 원인(因)은 반드시 강성한 선업이나 악업이고, 초감(招感)된 제8식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此識果相雖多位多種,異熟寬不共,故偏說之。

이 식의 과상(果相)은 지위도 많고 종류도 많은 다위다종(多位多種), 즉 이 식의 과상(果相)은 지위도 많고 종류도 많지만, 이숙식이라는 명칭이 널리 두 가지 지위인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과 증과의 5위(位) 중에서는 네 가지 지위에 통하며(寬), 또한 제8식뿐으로서 다른 법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不共)이므로,

이에 비중을 두어 이숙식(異熟識)으로서 과상을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위다종(多位多種), 지위가 많다는 다위(多位)는 뇌야삼위(賴耶三位) 중 앞의 2위에 통하고, 5위(位, 범부ㆍ二乘有學ㆍ無學ㆍ十地ㆍ여래지) 중 앞의 4위에 통하는 것이고,

종류가 많다는 다종(多鍾)은 5과(果) 중에서 이숙과ㆍ증상과(增上果)ㆍ등류과의 세 가지 과(果), 또는 여기에 사용과(士用果)를 더하여 네 가지 결과에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3위(位) 중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즉 아득한 옛적부터 선악의 이숙업에 의해 초감된 총보(總報)ㆍ무기(無記)의 과체(果體)의 명칭을 이숙식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범부에서부터 보살은 금강심보살까지, 2승은 무학과의 성자(아라한)까지의 지위에서는 제8식을 이숙식(vipāka-vijñāna)이라고 한다.

 

此能執持諸法種子令不失故,名一切種。離此餘法,能遍執持諸法種子不可得故。

이것이 능히 일체법의 종자를 집지(執持)해서 잃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일체종자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 외의 다른 법이 능히 두루 일체법의 종자를 지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량부의 비유사(譬喩師) 등은 색심호지설(色心互持說)에 집착해서 말하기를,

유색계에 태어나면 색근(色根) 속에 심왕ㆍ심소의 종자가 있고,

무색계에 태어나면 심왕ㆍ심소의 종자 등이 있게 되며,

이와 같이 색법ㆍ심법이 서로 집지(執持)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하여서 제8식을 떠난 다른 법이 널리 일체법의 종자를 집지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卽顯示初能變識所有因相。

이것은 곧 초능변식(아뢰야식, 제8식)에 있는 원인으로서의 체상인 인상(因相)을 나타내 보이며,

 

*인상(因相)은 원인으로서의 체상을 밝힌 것으로, 제8식에 유위(有爲)ㆍ무위(無爲)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색법ㆍ심법 등의 제법을 현행시키는 원인으로서의 종자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잃지 않고 보존하다가 그 종자가 현행할 조건을 만나면 과(果)로서 현행하는 것이다.

 

此識因相雖有多種,持種不共,是故偏說。

이것의 인상(因相)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종자를 지니는 것이 공통되지 않으므로, 이에 비중을 두어 일체종자식이라고 말하며,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의 제8식을 일체종자식(sarvabījaka-vijñāna), 즉 집지식(執持識, ādāna-vijñāna)이라 하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제8식은 아득한 옛적부터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상속하면서 종자를 저장ㆍ보존하고 신체의 신근(根身)을 유지하며, 수행기간인 인위(因位)에서는 유루ㆍ무루의 종자를 지니고,

깨달음의 지위인 불과위(佛果位)에서는 무루의 종자를 지닌다.

 

初能變識體相雖多,略說唯有如是三相。

초능변식(아뢰야식, 제8식)의 체상이 많지만, 간략히 말해서 오직 이와 같은 세 가지 체상, 즉 자상(自相)ㆍ과상(果相)ㆍ인상(因相)의 3상(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하는 일체 종자의 체상을 구체적으로 10문(門), 즉 출체문(出體門),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이제분별문(二諦分別門), 사분분별문(四分分別門), 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 신훈본유분별문(新熏本有分別門), 구의다소설문(具義多少說門), 내외종(內外種)의 생인이인(生引二因)을 분별하는 문과 내외종의 4연(緣)을 판별하는 문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것으로, 먼저 종자의 체(體)를 밝히는 것이다.

一切種相應更分別,此中何法名爲種子?謂本識中親生自果功能差別。此與本識及所生果,不一不異,體、用因、果理應爾故。

일체종자식의 체상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나니, 이 가운데에서 어떤 법을 종자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근본식 안에서 직접 자기의 결과를 일으키는 공능차별(功能差別,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을 말하며,

이것은 근본식이 현행된 결과(7식 등), 즉 제8식과 종자의 관계가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異, 일이분별문 一異分別門)이니,

체성(근본식)과 작용(종자), 원인ㆍ결과의 이치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능차별(功能差別, śakti-viśeṣa 또는 sāmarthya- viśeṣa)이며, śakti, sāmarthya는 ‘힘’ㆍ‘세력’, viśeṣa는 ‘특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자는 ‘특별한 힘’, 곧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를 뜻한다.

 

아뢰야식은 자체 안에 종자를 저장ㆍ유지하는데, 체성과 작용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

여기서 둘이 어떤 관계인가? 즉 자체가 별개인가 하나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유식학에서 아뢰야식과 종자는 체(體)가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異)로 설명되며,

근본식은 체(體)이고 종자는 작용의 용(用)이기 때문에, 본체와 작용의 관계에서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도 전혀 다른 것이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종자는 원인(因)이고 생겨난 현행은 결과(果)이기 때문에, 인과관계에서 둘이 완전히 하나라고도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근본식과 종자는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의 관계임을 밝힌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4

 

亦非離此有別方便,施設自相爲假所依。然假智、詮必依聲起,聲不及處,此便不轉,能詮、所詮俱非自相。故知假說不依眞事。

또한 이러한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을 떠나서 별도의 방편이 있으나,

자상을 시설하여서 임시적인 의지처인 소의(所依, 실구 實句)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임시적 존재를 아는 지혜인 가지(假智)와 임시적 존재를 표현하는 가전(假詮)은 반드시 소리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소리는 자상에는 미치지 못하며,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은 전전하여서 자상에 미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표현의 주체인 능전(能詮)도 표현의 대상인 소전(所詮)도 자상이 아니니,

가설은 참된 진사(眞事)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由此但依似事而轉,似謂增益非實有相,聲依增益似相而轉,故不可說假必依眞。是故彼難不應正理。然依識變,對遣妄執眞實我、法,說假似言。由此契經伽他中說:

이러한 까닭으로 다만 사현된 사물, 즉 의타기성의 공상(共相)에 의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며,

사현(似現)된 것은 증익(增益, 공상 共相)의 실유상(實有相)이 아니며,

소리는 공상의 사현된 상인 증익사상(增益似相)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따라서 허망한 가(假)를 표현하는 것이 반드시 참된 실(實, 자상)에 의지한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따라서 그들의 비판은 정리(正理)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전변인 식변(識變)에 의해서 참다운 자아와 법이라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임시적 존재인 가(假)와 사현된 존재인 사(似)라고 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의 사현된 자아인 사아(似我)와 사현된 법의 사법(似法)이라 하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경전(후엄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爲對遣愚夫,所執實我法,故於識所變,假說我法名。

어리석은 범부가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와 법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식이 전변한 식소변(識所變)한 것의 견분(見分, 주관)과 상분(相分, 객관)에 대해서

가정적으로 자아(我)와 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 후엄경의 게송

 

識所變相雖無量種,而能變識類別唯三:一謂異熟,卽第八識,多異熟性故;二謂思量,卽第七識,恒審思量故;三謂了境,卽前六識,了境相麤故。及言顯六合爲一種。此三皆名能變識者。

‘식이 전변한 것의 식소변(識所變,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의 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식(能變識)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으로, 곧 제8식이며, 대부분 이숙성(異熟性)이기 때문이며,

(유식삼십송의 제1ㆍ2 게송 중 앞의 본 논서 제1권에서 말한 “이 능변식……”의 세 구를 설명한다)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며,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식(能變識)이라 이름한다.

 

이숙식(異熟識, vipāka vijñāna)은 범부로부터 보살은 제10지(地)의 맨 나중인 금강심보살까지, 2승(乘)은 무학과의 성자(아라한)까지의 지위에서의 제8식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숙식이라는 명칭이 뇌야삼위(賴耶三位) 중에서 초위(初位:藏識)와 제2선(선악업과위)에 통하고 다위(多位)에서 항상 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이숙식(異熟識, vipāka vijñāna, consciousness differing in maturation, differential maturing consciousness)은 제8식의 다른 명칭 가운데 하나이며, 음역하여 비파가식(毘播迦識) 또는 비파가비약남(毘播迦毘若南)이라고도 한다.
또 이숙보식(異熟報識) · 과보식(果報識) 또는 이숙심(異熟心)이라고도 한다. 
이숙식과 비파가식을 간단히 줄여서 이숙(異熟) 또는 비파가(毘播迦)라고도 한다.
《성유식론》 제3권에 따르면, 제8식은 능히 생사를 인기(引起)하는 선업 · 불선업이 다르게(異) 익어서(熟) 나타난 이숙과(異熟果)이기 때문에 이숙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숙식이라는 명칭은 범부 · 2승 · 보살의 지위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부처의 지위인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제외한다. 즉, 부처를 제외한 범부와, 유학 · 무학의 성자(즉 4향4과의 성인), 그리고 연각(또는 독각), 그리고 10지의 보살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여래지에 대해서는 이숙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여래지에서는 이숙무기(異熟無記)의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변(能變, pariṇāma)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변화시킬 수 있음'이며, 파리나마는 다음의 뜻을 갖는다.
변화(change), 변경(alteration), 변형(transformation), 발달(development), 진화(evolution)
익음(ripeness), 성숙(maturity)
음식의 변질(alteration of food), 소화(digestion)
시듦(withering), (색이) 점점 희미해짐 또는 바램(fading)
(시간의) 경과(lapse [of time])
(나이가 들어) 쇠퇴함(decline [of age]), 늙어감(growing old)
결과(result, consequence), 결말(issue, end) - 위키

 

*식(識)의 명명법; 8식 중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은 모두 각자의 소의근(所依根), 즉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 · 신근(身根) · 의근(意根)을 따라 그 이름이 세워진 식(識)들로써, 본래 1가지로 단일한 마음(즉 심왕, 즉 심법)을 구분할 때 소의근에 따라 6가지 식(識)으로 구분한 것이다.
8식 중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 본질적 성질 즉 자성(自性)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식(識)들이다.

*말나식(末那識)의 본질적 성질은 언제나 심세하게 생각하는 긍심사량(恆審思量)으로, 이것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사량(思量) 또는 의(意)라고 하며, 이 두 낱말은 모두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를 의역한 것이며 마나스를 음역하여 말나(末那) 또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본질적 성질은 인과의 종자를 함장하고 인연에 따라 그 종자를 현행 상태로 일으키는 것으로, 이것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집기(集起: 쌓고 일으킴) 또는 심(心)이라고 하며, 이 두 낱말은 모두 산스크리트어 치타(citta)를 의역한 것이며, 이러한 성질을 가진 식을 아뢰야(阿賴耶)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 위키

 

能變有二種:一因能變,謂第八識中等流、異熟二因習氣。等流習氣由七識中善、惡、無記熏令生長。異熟習氣由六識中有漏善、惡熏令生長。

능변(能變)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인능변(因能變)으로, 제8식 중의 등류습기와 이숙습기의 두 가지 인(因, 업종자)의 습기를 말하는 것으로,

등류습기(等流習氣)는 7식 중의 선ㆍ악ㆍ무기에 의해 훈습하여 생성ㆍ증장하게 하며,

이숙습기(異熟習氣)는 6식 중의 유루의 선ㆍ악에 의해 훈습하여 생성ㆍ증장하게 한다.

 

*인능변(因能變), 인(因)은 제8식이 집지(執持)하는 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 인(因)의 종자로부터 전변해서 만법을 생겨나게 하므로 종자를 능변의 체(體)로 한다. 여기서 변(變)은 전변(轉變, parinama)의 뜻으로서 원인이 전변하여 결과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낸다.

*등류습기(等流習氣), 등류(等流)에서 등(等)은 상사(相似)의 뜻으로서 원인(因)이 과성(果性)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유(流)는 유류(流類)의 의미로서 결과가 원인의 부류(類)이므로 류(流)라고 하며, 등류(等流)는 같은 종류라는 뜻으로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결과를 내는 종자를 말한다.

선인(善因)에서 선과(善果)를 내고, 악인(惡因)에서 악과(惡果)를 내는 것과 같이, 종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인 현행법과 비슷할 때, 그것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이숙습기(異熟習氣), 이숙(異熟)은 성류(性類)를 달리해서 성숙되는 것을 뜻하며,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는 습기이다.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그 과체(果體)는 무기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무기성(無記性)인 신체인 유근신(有根身)을 나게 하는 선ㆍ악업의 종자이다.

 

二果能變,謂前三種習氣力故,有八識生現種種相。等流習氣爲因緣故,八識體相差別而生,名等流果,果似因故。異熟習氣爲增上緣,感第八識酬引業力,恒相續故,立異熟名。感前六識,酬滿業者,從異熟起,名異熟生。不名異熟,有閒斷故。

둘째는 과능변(果能變)이니, 앞에서 말한 등류습기와 이숙습기의 두 세력에 의해서 8식인 자체분(自體分)이 생겨나서 갖가지 양상을 나타냄을 말하는 것이다.

등류습기를 인연으로 함으로써는 8식의 체상이 차별적으로 생겨나므로, 이를 등류과(等流果)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결과가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이숙습기를 증상연으로 하여서 제8식을 받아들여서 초감(招感)하는 인업(引業)의 힘에 응하여 항상 상속하기 때문에 이숙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며,

전6식을 받아들여서 초감하는 만업(滿業)에 응하는 것은 이숙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숙생(異熟生)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숙이(異熟果)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니, 잠시 단절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숙인 진이숙(眞異熟)은 선악업의 결과이고, 부단(不斷)이며, 3계에 두루한다는 세 가지의 뜻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5식(識)은 잠시 단절됨이 있고, 제6식도 5위무심(位無心)이라 하여서 5위(位, 무상천無想天ㆍ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에서는 작용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6식은 잠시 단절됨이 있으므로, 이숙(異熟)의 조건인 부단(不斷)의 의미를 잃는(缺) 것이며,

이것은 이숙식에서 생겨난 것의 이숙생(異熟生)으로, 진이숙(眞異熟)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卽前異熟及異熟生,名異熟果。果異因故。此中且說我愛執藏,持雜染種能變果識,名爲異熟,非謂一切。

곧 앞의 이숙(제8식)과 이숙생을 이숙과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결과가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아애(我愛)로써 집착하고 잡염의 종자를 지니는 능변의 과식(果識)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이숙식이라고 하는 것일 뿐, 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능변(果能變), 여기서 과(果)는 8식의 현행(現行)을 말하며, 과능변(果能變)은 현행식을 능변의 체(體)로 하며, 과능변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변이 포함된다.

첫째는 과거의 업력(業力)이 증장됨으로써 이숙습기가 활동할 수 있게 하여서 아뢰야식이 다른 중동분(衆同分)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등류습기가 활동할 수 있게 됨으로써, 아뢰야식으로부터 전식(轉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셋째는 현행된 8식의 자체분에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이 변현되는 것이다.

*인업(引業), 총보업(總報業)을 가리키며,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는 선ㆍ악업에 총보업ㆍ별보업(別報業)이 있다. 총보업은 총체적인 과체(果體)로서의 제8식을 이끌어 내므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만업(滿業), 별보업(別報業)은 6식을 이끌어 내는 업으로서, 총보의 과체(果體, 제8식)를 장엄 원만하게 하므로 만업(滿業)이라고도 한다.

*이숙생(異熟生), 총보업(인업)에 이끌려 생긴 인생(引生)의 제8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별보업(만업)에 이끌려 생기된 6식을 이숙생(異熟生)이라고 이름하며, 

총보업(인업)과 별보업(만업)은 별개의 체가 아니라 총보의 과체(果體)인, 앞에서의 별보의 결과(果)도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雖已略說能變三名,而未廣辯能變三相,且初能變,其相云何?頌曰:

앞에서 능변의 세 가지 명칭을 간략하게 설하였으나, 능변의 세 가지 체상인 삼삼(三相)을 자세하게 판별하지 않았으니,

우선 초능변식(初能變識)의 체상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2ㆍ3ㆍ4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하는 초능변식(初能變識)에 관한 게송을 총체적으로 열거한 것이다.

初阿賴耶識,異熟一切種。

첫 번째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이숙식(異熟識)이며,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

 

不可知執受處了 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唯捨受。

감지하기 어려운 집수(執受)와 기세간(處)의요별을 갖네.

항상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심소 같이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네.

 

是無覆無記,觸等亦如是。恒轉如瀑流,阿羅漢位捨。

이것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니,촉 등도 역시 그러하며, 

항상 폭류(暴流)와 같이 흘러서 유전(流轉)하는 것이나, 아라한의 지위에서 버리네.

 

이 게송들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유식론 2ㆍ3ㆍ4 권에 걸쳐 8단(段) 10의문(義門)으로 설명한다.

우선 10의문은, ①자상문(自相門, 아뢰야식), ②과상문(果相門, 이숙식), ③인상문(因相門, 일체종자식),

④소연문(所緣門, 執受와 處), ⑤행상문(行相門, 요별),

⑥상응문(相應門, 촉ㆍ작의ㆍ수ㆍ상ㆍ사),

⑦수구문(受俱門, 捨受), ⑧3성문(性門, 무부무기성ㆍ촉 등도 그러함), ⑨인과비유문(因果譬喩門, 항상 폭류의 흐름처럼 유전함), ⑩복단위차문(伏斷位次門, 아라한위이다)이며,

다음의 8단문(段門)은 ①②③을 합하여 3상문(相門)으로 하고,

④⑤를 합하여 소연행상문(所緣行相門)으로 하며, 

제6에 심소동례문(心所同例門)을 첨가하여 총 여덟 가지로 분단(分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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