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2
상(想, saṃjñā)심소
想,謂於境取像爲性,施設種種名言爲業。謂要安立境分齊相,方能隨起種種名言。
‘상(想, saṃjñā)심소’는 대상에 대하여 형상을 취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갖가지 명칭을 시설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반드시 대상의 자상과 공상의 분제상(分齊相)을 안립하여 따라서 능히 갖가지 명칭(개념화)을 일으키는 것이다.
상(想, saṃjñā)심소는 ‘표상(表象) 작용’ ‘개념화 작용’의 심소이다. 능히 자기 대상의 구체적인 양상을 안립하며, 대상의 형상을 취하여 명칭을 붙이는(언어와 일치할 수 있는) 개념화 작업을 한다.
사(思, cetanā) 심
思,謂令心造作爲性,於善品等役心爲業。謂能取境正因等相,驅役自心,令造善等。
‘사(思, cetanā)심소’는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선품(善品) 등에 대해서 심왕을 작용하게 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대상의 바른 원인인 정인(正因, 선)ㆍ사인(邪因, 악)ㆍ구상위인(俱相違因, 무기) 등의 상(相)을 취하여 자기 심왕을 작용시켜서 선 등을 짓도록 하는 것이다.
*사(思, cetanā)심소는 ‘의지 작용’으로서, 심왕ㆍ심소로 하여금 선ㆍ악의 대상에 대해 선ㆍ악의 심작업(心作業)을 일으키게 하여 업도(業道)의 근원이 된다.
*정인(正因)은 선(善)ㆍ사인(邪因)은 악(惡)ㆍ구상위인(俱相違因)은 무기의 업을 일으키는 원인(因)이다.
此五旣是遍行所攝故,與藏識決定相應。其遍行相後當廣釋。此觸等五,與異熟識行相雖異,
이러한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 오심소(五心所)는 변행심소(遍行心所)에 포함되기 때문에 장식(藏識)과 반드시 상응하며, 그 변행심소의 상은 나중에 이 논서의 제5권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이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는 이숙식과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주관적인 견분見分)이 비록 다르지만,
유식학에서 심왕과 심소는 자체가 다른 왕소체별설(王所體別說)이라고 하기 때문에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주관적인 견분見分)을 달리하며,
심왕은 대상의 전체적인 윤곽인 총상(總相)을 취하고,
심소는 총체적인 모습과 함께 구체적인 총상(總相)과 별상(別相)까지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대상 인식작용이 가능해진다.
而時、依同,所緣事等,故名相應。
작용하는 때의 시(時, 시동時同)ㆍ의지처인 의(依, 의동依同)가 동일(同)하고,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연등所緣等, 상분)ㆍ자체의 사(事, 사등事等, 자체분)는 비슷한 사등(事等)이니,
따라서 ‘상응(相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삼십송'의 제3게송에서의 상응(相應)이라는 말을 해설한 것으로,
상응(相應, saṁy- ukta)의 개념에는 네 가지 뜻이 있어서,
첫째 심왕과 심소가 현기(現起)함에는 시간이 같은 시동(時同),
둘째 심왕과 심소는 감각기관인 소의근(所依根)이 같은 의동(依同),
셋째 심왕과 심소는 그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상분相分)이 비슷한 소연등(所緣等),
넷째 심왕과 심소는 그 자체분의 사(事)가 비슷한 사등(事等)이며,
여기에서 사등(事等)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즉 유식학에서는 왕소체별설(王所體別說)의 입장이므로 심왕과 심소가 동일찰나에 비슷한 대상에 각각 하나씩 현기(現起)하며, 그 수(數)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씩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체분이 비슷한 사등(事等)이라고 말한 것으로, 사의평등(四義平等)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식학에서는 심왕과 심소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 견분)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소승에서는 그것이 비슷하다고 보고 사의평등에 행상등(行相等)을 첨가해서 오의평등(五義平等)을 말하고 있다.
此識行相極不明了,不能分別違、順境相,微細一類,相續而轉。是故唯與捨受,相應。
이 식은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명료하지 않고, 거슬림(違)과 수순함(順)의 대상인 경상(境相)을 분별할 수 없으나 그 행상은 미세한 한 종류(이숙무기성)로서 상속하면서 전전하므로, 따라서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제8아뢰야식이 5수(受) 가운데 오직 사수(捨受)와 함께함을 밝힌 것으로, 이를 수구문(受俱門)이라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는 인위(因位)에서이고, 만약 불위(佛位)라면 제8식은 인식작용이 명료하며 대상의 위순(違順)의 모습을 분별하고, 나머지 세 가지는 인과위(因果位)에 공통된다.
又此相應受唯是異熟。隨先引業轉不待現緣,住善惡業勢力轉故,唯是捨受。苦、樂二受,是異熟生非眞異熟。待現緣故非此相應。
또한 이것과 상응하는 수(受)는 오직 이숙(異熟)으로, 이전의 인업(引業)에 따라서 전전하고, 수순함(順)과 거슬림(違) 등의 현행의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며, 선ㆍ악업의 힘에 따라 전전하기 때문에 오직 사수(捨受)일 뿐이며,
고수(苦受)ㆍ낙수(樂受)는 이숙생(異熟生)일 뿐, 참다운 이숙이 아니며,
현행의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又由此識常無轉變,有情恒執爲自內我。若與苦、樂二受相應,便有轉變寧執爲我?故此但與捨受相應。
또한 이 식(識)은 항상하고 전변함이 없는 일류(一類)이라서, 유정(제 7식)이 항상 집착하여 자신의 내면의 자아로 삼는 것이니, 만약 고수ㆍ낙수와 상응한다면, 고(苦)ㆍ낙(樂)이 전변하므로 상일(常一)이 아니므로 곧 전변함이 있게 되거늘, 어떻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오직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若爾,如何此識亦是惡業異熟?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식(識)이 또한 악업의 이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설일체유부 등이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 것으로, 사수(捨受)는 적정(寂靜)한 것이므로 선악에 의해 그것을 초감(招感)해야 하는데, 제 8식이 이숙(異熟)이라고 말한다면, 선ㆍ악업에 의해서도 초감하듯이 악업으로써 적정의 사수(捨受)의 과(果)를 초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旣許善業能招捨受,此亦應然。捨受不違苦樂品故,如無記法善惡俱招。
▷답한다; 선업이 능히 사수(捨受)를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따라서 이것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사수는 괴로움의 품류인 고품(苦品)과 즐거움의 품류인 낙품(樂品)에 거슬리지 않기 때문에, 무기법이 선ㆍ악에 초감(招感)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何此識非別境等心所相應?互相違故。
▷외인(外人)의 질문; 어찌하여 이 식(識)은 별경심소(別境心所) 등과 상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 8식이 5변행심소 이외에 다른 심소와 함께하지 않는 까닭을 밝힌 것이다.
謂欲希望所樂事轉,此識任運無所希望。勝解印持決定事轉。此識瞢昧無所印持。念,唯明記曾習事轉。此識昧劣不能明記。定,能令心專注一境,此識任運剎那別緣。慧,唯簡擇德等事轉,此識微昧不能簡擇。故此不與別境相應。
'욕(欲)심소'는 좋아하는 것을 희망하여 전전하는 데 비하여, 이 식(識)은 업을 따를 뿐 희망하는 것이 없으며,
'승해(勝解)심소'는 결정된 사물을 분명히 지녀서 전전하는 데 비하여, 이 식(識)은 몽매하여 분명히 지니는 바가 없으며,
'염(念)심소'는 오직 예전에 익힌 일을 분명하게 기억해서 전전하는 데 비하여, 이 식(識)은 어둡고 미약해서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며,
'정(定)심소'는 능히 심왕으로 하여금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게 하는 데 비하여, 이 식(識)은 자연히 찰나마다 따로 반연하며,
'혜(慧)심소'는 오직 덕(德) 등의 일을 간택해서 전전하는 데 비하여, 이 식(識)은 미세하고 어두워서 간택하지 못하므로,
따라서 이 식(識)은 별경심소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此識唯是異熟性故,善、染污等亦不相應。惡作等四無記性者,有閒斷故定非異熟。
이 식(識)은 오직 이숙성이기 때문에 선(善)ㆍ염오(染污) 등의 심소와도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제8식은 선심소(善心所)ㆍ번뇌심소(煩惱心所)ㆍ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와 상응하지 않는다.)
오작(惡作) 등의 네 가지의 부정심소(不定心所)인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사무기성(四無記性)이지만 잠깐씩 단절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숙이 아니다.
法有四種:謂善、不善、有覆無記、無覆無記。阿賴耶識何法攝耶?此識唯是無覆無記,異熟性故。
법에 네 가지가 있으니, 선(善)과 불선(不善),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며,
이 가운데에서 아뢰야식은 어느 법에 들어가는가?이 식(識)은 오직 무부무기이니, 이숙성이기 때문이다.
*무기(無記)는 사물의 체성이 중용(中容)으로서,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기별(記別)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부(覆)는 은복(隱覆)ㆍ은폐(隱蔽)의 뜻으로서 염오의 성품이므로, 유부무기(有覆無記)는 망혹(妄惑)의 체성의 세력이 매우 미약하며, 구생기(俱生起)의 아집과 법집, 즉 제7식이 유부무기성으로, 성스러운 도(道)를 장애하여 청정심을 은폐한다.
무부무기(無覆無記)는 체성이 망혹(妄惑)이 아니고, 세력이 미약하여 선악이 아닌 것으로, 아뢰야식의 자체(體)와 5근(根) 및 외부세계의 산하초목 등이 무부무기성이다.
이어서 아뢰야식이 3성(性) 중에서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을 밝힌다(三性門).
異熟若是善染污者,流轉還滅應不得成。又此識是善染、依故,若善染、者,互相違故,應不與二俱作所依。
이숙식이 만약 선(善)이나 염오(染污)라면,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은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하며,
또한 이 식(識)은 선과 염오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선과 염오는 서로 다른 것으로, 그 둘이 같이 의지할 수 없어야 하며,
*유전(流轉)은 고제(苦諦)ㆍ집제(集諦)이고,
*환멸(還滅)은 멸제(滅諦)ㆍ도제(道諦)이다.
만약 제8식이 오직 선성(善性)이라면 유전이 없어야 하고, 오직 염오성이라면 환멸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又此識是所熏性故,若善染者如極香臭,應不受熏。無熏習故,染淨因果俱不成立故
또한 이 식(識)은 훈습을 받아들이는 체성인 소훈성(所熏性)이기 때문에, 선과 염오는 매우 향기로운 것과 악취 나는 것과 같이, 서로 훈습을 받지 않아야 하며, 훈습이 없기 때문에 잡염ㆍ청정의 원인ㆍ결과가 모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설일체유부 등의 비판에 대하여 답변한 것으로, 그들이 훈습의 식(識)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어떠한 과실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여서, 논주가 답하기를, 만약 훈습이 없다면 잡염ㆍ청정법의 인과(因果)가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이미 훈습이 없기 때문에 종자도 없어야 하고, 만약 종자가 없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되며, 만약 원인이 없다면, 결과 역시도 없어야 한다고 논파한 것이다.
此唯是無覆無記。覆謂染法,障聖道故,又能蔽心令不淨故。此識非染故名無覆。
따라서 이 식(識)은 오직 무부무기이니, 은폐하는 부(覆)는 잡염법을 말하는 것으로, 성스러운 도(道)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또한 능히 마음(법성심ㆍ의타기심)을 은폐하여서 청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 식(識)은 잡염이 아니므로 무부(無覆)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記謂善、惡。有愛、非愛果及殊勝自體,可記別故。此非善、惡故名無記。
기(記)라는 것은 선과 악을 말하는 것으로, 애착함과 애착하지 않음의 결과를 갖는 뛰어난 자체(自體)이므로 기별(記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선이나 악이 아니므로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며,
觸等亦如是者,謂如阿賴耶識唯是無覆無記性攝,觸、作意、受、想、思亦爾。諸相應法必同性故。
'삼십송'의 제4게송에서, ‘촉(觸) 등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오직 무부무기성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오심소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니, 모든 상응법은 반드시 심왕과 같은 성질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심소례동문(心所例同門)으로, 이것은 제8식 자체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10의(義) 중에는 포함되지 않고 8단(段)에서 다룬다.
又觸等五如阿賴耶亦是異熟。所緣、行相俱不可知,緣三種境,五法相應,無覆無記。故說觸等亦如是言。
또한 촉(觸) 등 다섯 심소도 아뢰야식과 같이 역시 이숙이며,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을 모두 알기 어려우며,
세 가지 대상인 3류경(類境) 성경(性境)ㆍ독영경(獨影境)ㆍ대질경(帶質境)을 반연하며,
다섯 가지 법과 상응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촉(觸)인 경우, 접촉하는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4심소와 심왕과 상응하며, 나머지 4심소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무부무기이므로, 따라서 ‘촉(觸) 등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류경(類境), 즉 성경(性境)ㆍ독영경(獨影境)ㆍ대질경(帶質境)으로,
성경(性境)은 5관(官)에 비치어 오는 것을 5식(識)이 대상으로 해서 인식하는 객관세계로써 곧 제8식의 상분(相分)으로서의 대상을 말하며,
독영경(獨影境)은 주관이 단독으로 나타낸 환영(幻影)으로서 따로 객관적 존재가 없는 것으로, 예를 들면 토끼의 뿔 등을 말하며,
대질경(帶質境)은 본질은 있으나 그대로 영사(映寫)되지 않은 것으로 예를 들면 노끈을 뱀으로 잘못 아는 것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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