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5 권 1
此染污意何受相應?有義此俱唯有喜受。恒內執我生喜愛故。
이 염오의 말나식은 어떤 수(受)와 상응하는가?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말나식과 함께하는 것은 오직 희수(喜受)뿐이니, 항상 내면적으로 자아에 집착하여 희수(喜受)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하는 제5심소상응문(第五心所相應門) 가운데 제7식이 인위(因位)에서 어떤 수(受)와 상응하는가를 밝히는 수구문(受俱門)이다.
義不然應許喜受乃至有頂,違聖言故。應說此意四受相應。謂生惡趣憂受相應,緣不善業所引果故。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희수(喜受)는 유정천(有頂天,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나,
만약 그러하다면 거룩한 가르침인, '유가사지론' 제11권에서 '색계(色界)의 초선(初禪)에서 우수(憂受)를, 제2선(第二禪)에서 고수(苦受)를, 제3선(第三禪)에서 희수(喜受)를, 제4선(第四禪)에서 낙수(樂受)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서 사수(捨受)를 멸한다'고 한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것이니, 이 말나식은 네 가지의 사수(四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악취(惡趣)에 태어날 때에는 우수(憂受)와 상응하는 것이며, 우수는 불선업이 이끌어 낸 결과의 제 8식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나식이 언제나 희수(喜受)와 상응한다면, 제7식은 3계에 두루하므로 희수도 3계에 두루 해서 유정천(有頂天)에도 상응해야 할 것이나, 성교(聖敎)에서 희수는 색계 제3선천 이상에는 없다고 말하므로, 그대의 주장은 이에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유정천(有頂天, 유정지有頂地), '유정'(有頂)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3계9지(三界九地)의 '유(有)'에서 '가장 높은 정(頂)'의 '지(地)'를 말하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을 3계9지의 관점으로, 유정지라고 할 때는 두 번째 뜻이 적용되며,
유정천(有頂天)이라고 할 때는 문맥에 따라 첫 번째 뜻이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뜻이 될 수도 있다.
유형(有形) 세계의 최정상(最頂上) 즉 꼭대기라는 뜻으로, 색계의 제4선천을 뜻하며, 3유(三有) 즉 3계(三界)의 절정(絕頂) 즉 꼭대기라는 뜻으로, 무색계의 제4천인 비상비비상천을 뜻한다.
유정이 윤회하는 3계(界)ㆍ9지(地) 중에서 절정(絶頂)이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 한다.
生人、欲天、初、二靜慮,喜受相應。緣有喜地善業果故。第三靜慮,樂受相應。緣有樂地善業果故。第四靜慮乃至有頂,捨受相應。緣唯捨地善業果故。
인간ㆍ욕계천ㆍ초선천(初禪天)ㆍ제2선천(禪天)에 태어날 때에는 희수(喜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기쁨이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며,
제3선천에서는 낙수(樂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즐거움이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며,
제4선천부터 유정천에 이르기까지는 사수(捨受)와 상응하나니, 오직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평정의 사(捨)만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有義彼說亦不應理。此無始來任運一類,緣內執我恒無轉易,與變異受不相應故。
제3사(第三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의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이 제 7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자연적인 한 종류로서 내면을 반연하여 자아로 집착하면서 항상 3성(性)이 바뀌지 않으므로,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우수(憂受)ㆍ희수(喜受)의 변이수(變異受)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又此末那與前藏識義有異者,皆別說之。若四受俱,亦應別說。旣不別說,定與彼同,故此相應唯有捨受。
또한 이 말나식이 앞에서 말한 장식(藏識)과 뜻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본 게송에서도 별도로 말해야 할 것이며,
만약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우수(憂受)ㆍ희수(喜受)의 사수(四受)와 상응한다면, 본 게송에서도 역시 별도로 말해야 할 것이나, 별도로 말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그와 같은 것이므로,
따라서 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것은 오직 사수(捨受)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未轉依位與前所說心所相應,已轉依位唯二十一心所俱起,謂遍行、別境各五,善十一,如第八識已轉依位唯捨受俱,任運轉故恒於所緣平等轉故。
궁극적인 진리인 유식성(唯識性, vijñapti-mātratva) 즉 진여(眞如, tathatā)와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를 성취하는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아직 이루지 이루지 못한 지위에서는 앞에서 말한 18 심소와 상응하며,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룬 지위에서는 오직 21 가지의 심소만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각각 5 가지와 선심소(善心所)의 11 가지를 말한다.
제8식이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룬 지위에서와 같이 오직 사수(捨受)만 함께하나니, 자연적으로 전전(展轉)하기 때문이고, 항상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평등하게 전전하기 때문이다.
제7식의 과(果)의 상응심소를 밝힌 것이다.
본 논서 제4권에 있는 호법(護法)의 정의(正義)인 18심소;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중의 혜(慧)
팔수번뇌(八隨煩惱); 도거(掉舉)ㆍ혼침(惛沈)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망념(妄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
4근본번뇌;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5변행심소;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21 심소;
5 가지 별경심소(別境心所);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정(定, 三摩地) · 혜(慧)
11 가지 선심소; 신(信) · 정진(精進) ·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행사(行捨) · 불해(不害)
5변행심소;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末那心所何性所攝?有覆無記所攝,非餘。此意相應四煩惱等是染法故,障㝵聖道,隱蔽自心,說名有覆。非善不善,故名無記。如上二界諸煩惱等定力攝藏,是無記攝。此俱染法所依細故任運轉故,亦無記攝。若已轉依,唯是善性。
말나식과 그 상응심소는 어떠한 성품에 포함되는가?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유부무기(有覆無記)"에 포함될 뿐, 다른 것은 아니며,
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네 가지의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사번뇌(四煩惱) 등은 잡염법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성도(聖道, 무루지 無漏智)를 장애하고 자기 마음을 은폐하므로 가림의 부(覆) 또는 막음의 장(障)이 있는 '유부(有覆)'라 하며,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이 아니므로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욕계ㆍ색계의 모든 번뇌 등이 선정의 힘으로 거두어짐으로써 무기에 포함되는 것과 같이, 이것과 함께하는 잡염법도 의지처인 소의(所依, 여기서 잡염법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는 심왕, 즉 제7식을 말한다.)가 미세하기 때문이며,
자연히 전전하기 때문에 역시 무기에 포함되나,
만약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었다면, 오직 착한 성품읜 선성(善性)뿐인 것이다.
제6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으로서, 제7말나식과 그 상응심소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임을 밝힌 것이다.
末那心所何地繫耶?隨彼所生,彼地所繫。謂生欲界現行末那,
相應心所卽欲界繫,乃至有頂應知亦然,任運恒緣自地藏識執爲內我,非他地故。
말나식과 그 상응심소는 어떤 세상(地)에 매이는 박(繫)이 되는것인가?
그 태어난 곳을 따라서 매이는 것이니, 욕계에 태어날 때에는 현행의 말나식과 그 상응심소는 욕계에 매이며,
나아가 유정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자연적으로 항상 자기가 태어나는 세상의 장식(藏識)을 반연하고 집착해서 내면의 자아로 삼는 것일 뿐, 다른 곳(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7계계분별문(界繫分別門)으로서, 말나식과 그 상응심소가 어떤 계지(界地)에 계박되는가를 밝힌 것이다.
若起彼地異熟藏識現在前者,名生彼地,染污末那緣彼執我,卽繫屬彼,名彼所繫。或爲彼地諸煩惱等之所繫縛,名彼所繫。若已轉依,卽非所繫。
만약 그 세상의 이숙(異熟)의 장식(藏識)을 일으켜서 현전하게 된다면, 그 세상에 태어난다고 이름하며,
염오의 말나식이 그것을 반연하고, 자아로 집착하여서 곧 그것에 계속(繫屬)되는 것을 그것에 매이는 계(繫)라 이름하며,
혹은 그 세상(제8식이 태어난 곳)의 제7식의 모든 번뇌 등에 의해 계박(繫縛)되는 것이므로 그것에 매이는 계(繫)라 이름하나, 만약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었다면, 매이지 않는 것이다.
'삼십송'의 제7게송에 있는 “태어난 곳에 따라서 매인다는 수소생소계(隨所生所繫)”라는 문구를 해설할 때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하나니, 태어난 곳의 소생(所生)을 제8식과 4번뇌의 둘로 나누어 해설하는 것이며,
계(繫)에도 계속(繫屬)과 계박(繫縛)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소생(所生)이 제8식인 경우는 계속(繫屬)의 의미이고,
제7식은 제8식을 반연하므로 제8식을 소속(所屬), 제7식을 능속(能屬)이라고 한다.
소생(所生)이 4번뇌인 경우에는 계박(繫縛)의 의미로써, 제7식이 생겨난 4번뇌에 계박되므로 제7식은 소계(所繫)가 되고, 4번뇌는 능계(能繫)가 되는 것이다.
此染污意無始相續,何位永斷或暫斷耶?“阿羅漢、滅定、出世道無有。”阿羅漢者,摠顯三乘無學果位。此位染意種及現行俱永斷滅,故說無有。
이 염오의(染汚意)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어떤 지위(位)에서 영원히 단절되거나, 혹은 잠시 단절되는 것인가?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아라한’은 전체적으로 3승의 무학과(無學果)의 지위를 나타내며, 이 지위에서는 염오의의 '종자와 현행(現行)'이 함께 영원히 단절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제8기멸분위문(第八起滅分位門)으로서, 말나식이 어떤 지위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 것이다.
學位、滅定、出世道中俱暫伏滅,故說無有。謂染污意無始時來微細一類任運而轉,諸有漏道不能伏滅,三乘聖道有伏滅義,眞無我解違我執故,後得無漏現在前時,是彼等流,亦違此意。
유학위의 ‘멸진정(滅盡定)’과 ‘출세도(出世道)’에서는 '종자와 현행(現行)'이 함께 잠시 조복되거나 단멸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염오의(染污意)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미세한 한 종류로서 자연히 전전하는 것이다.
사관(事觀)의 유루의 6행지(行智)의 모든 유루도(有漏道)로써는 조복하고단멸할 수 없으나,
3승의 성도(聖道)로써만 조복(伏)하고 단멸(滅)된다는 뜻이 있으며,
참된 무아의 이치를 아는 무분별진지(無分別盡智)는 아집에 거스르기 때문이며,
후득(後得)의 무루지가 현전할 때에도 이것은 그것의 등류이므로 역시 이 염오의에 거스르는 것이다.
'유학'(有學) 또는 '학인'(學人), 배울 것이 있는 이,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이 또는 배우는 이라 하며 이에 상대하여 무학을 배울 것 없는 이 또는 배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이라고도 한다.
학(學) 즉 배움이란 일반적인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닌, 출세간의 성취를 배운다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계(戒) · 정(定) · 혜(慧)의 3가지 공덕 또는 3학의 선한 역량을 배워서 번뇌의 단멸인 택멸(擇滅)을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셋3학, 즉, '번뇌를 끊기 위해 필수적인 3가지 수단 또는 방법'을 공부하고 행하는 이를 불교도라고 하며, 3학의 공덕이 청정한 이, 특히, 번뇌를 끊는 힘을 가진 무루지를 일부라도 성취한 이, 즉, 4향4과의 성자들을 승(僧) 즉 승려(스님)라고 한다-위키
眞無我解及後所得俱無漏故,名出世道。滅定旣是聖道等流,極寂靜故,此亦非有。由未永斷此種子故,從滅盡定聖道起已,此復現行,乃至未滅。
참된 진무아(眞無我)의 이치를 아는 것과 후득지(後得智)는 모두 무루지이기 때문에 출세도(出世道)라 이름하며,
멸진정(滅盡定)은 이미 성도(聖道)의 등류에서도 매우 적정하기 때문에 역시 여기서 존재하지 않으니, 아직 영원히 이것의 종자를 단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진정과 성도(聖道)로부터 일어난 때에는 이것이 다시 현행하며, 나아가 아직 단멸하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이다.
진여의 무분별지를 본질의 입장에서는 근본지(根本智) 또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라 하고,
진여를 완전히 깨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증득의 입장에서는 후득지(後得智) 또는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라 하며, 가행(加行: 노력, 방편) 즉 선정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진여의 무분별지의 일부로서의 갖가지 무루혜를 가행지(加行智) 또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라 하며, 가행지는 근본지를 깨쳐 후득지가 드러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대승기신론》등의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 계열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을 본질의 입장에서 본각(本覺)이라 하고,
증득의 입장에서 범부가 최초로 증득하는 무루혜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하고,
성자가 선정 수행 즉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중간의 갖가지 무루혜를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성자가 근본무명을 끊고 진여를 완전히 깨쳐 본각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위키
然此染意相應煩惱是俱生故,非見所斷。是染污故,非非所斷。極微細故,所有種子與有頂地下下煩惱一時頓斷,勢力等故。金剛喩定現在前時,頓斷此種成阿羅漢。故無學位永不復起。
그런데 이 염오의(染污意)와 상응하는 번뇌는 선천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소단(見所斷)이 아니니, 염오성이기 때문에 단멸할 것이 없는 비소단(非所斷)의 법이 아니며,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를 유정지(有頂地)의 하품 중의 하품인 하하(下下)의 번뇌인, 제6식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번뇌(俱生煩惱)와 동시에 단박에 끊을 수 있으니, 세력이 같기 때문이다.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 이것의 종자를 바로 끊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므로 무학위에서는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소단(非所斷, aheya) 또는 비단(非斷)은 견도나 수도위에서 단멸할 것이 없는 법, 즉 무루법을 말하는 것으로, 택멸무위(擇滅無爲)처럼 견도(見道)나 수도(修道) 어느 것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
二乘無學迴趣大乘,從初發心至未成佛,雖實是菩薩,亦名阿羅漢,應義等故不別說之。
2승(乘)의 무학이 대승에 전향하여서 나아가면, 처음 초발심(初發心)한 때부터 아직 성불하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가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역시 아라한이라고 이름하나니, 응공(應供)의 뜻이 같기 때문에 별도로 말하지 않는다.
此中有義,末那唯有煩惱障俱,聖教皆言三位無故。又說四惑恒相應故,又說爲識雜染依故。
안혜(安慧)의 주장으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말나식은 오직 번뇌장과 함께하는 것으로, '아비달마잡집론'의 제2권의 가르침에서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세 가지 지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안혜(安慧)는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3위(位)에서는 말나식의 자체(體)가 없으므로, 이 식과 함께하는 것은 오직 아집(我執)뿐인 것으로, 법집(法執)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네 가지 번뇌인 사혹(四惑)과 항상 상응한다고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또한 식의 잡염의 의지처가 된다고, '섭대승론(攝大乘論)'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有義彼說教理相違,出世末那經說有故,無染意識如有染時,定有俱生不共依故。
호법(護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나, 호법이 말한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니, '해탈경'에서 출세도의 말나식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때문이며,
잡염이 없는 의식은 잡염이 있을 때와 같이 반드시 선천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구생(俱生, 제7식)으로, 다른 것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의(不供依)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論說:“藏識決定恒與一識俱轉,所謂末那。意識起時則二俱轉,所謂意識及與末那。若五識中隨起一識,則三俱轉,乃至或時頓起五識則七俱轉。”
논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51권에서 장식(藏識)은 결정적으로 항상 하나의 일식(一識)과 함께 전전한다고 설하였으니, 이른바 말나식인 것이며,
의식이 일어날 때에는 곧 두 가지로 함께 전전하는 것이니, 이른바 의식과 말나식이며,
만약 5식 가운데 하나의 식을 일으킬 때에는 곧 세 가지, 즉 제7식과 제6식 및 5식 중의 하나로 함께 전전하며,
나아가 단박에 5식을 모두 일으킬 때에는, 곧 일곱 가지, 즉 제7식과 제6식 및 5식 모두 함께 전전한다.
若住滅定無第七識,爾時藏識應無識俱,便非恒定一識俱轉。住聖道時若無第七,爾時藏識應一識俱,如何可言若起意識爾時藏識定二俱轉?
만약 멸진정에 머물 때에 제7식이 없다면, 그 때의 장식(藏識)은 식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그러하다면 항상 반드시 하나의 식과 함께 전전함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 장식(藏識)은 항상 반드시 하나의 식(識)과 함께 전전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성도(聖道)에 머물 때에 만약 제7식이 없다면, 그 때의 장식(藏識)은오직 하나의 식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하다면 어떻게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 '만약 무루(無漏)의 제6식을 일으킬 때의 장식은 반드시 제6식과 제7식의 두 가지가 함께 전전한다고 말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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