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5  1

 

此染污意何受相應?有義此俱唯有喜受。恒內執我生喜愛故。

 염오의 말나식은 어떤 수(受)와 상응하는가?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말나식과 함께하는 것은 오직 희수(喜受)뿐이니, 항상 내면적으로 자아에 집착하여 희수(喜受)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하는 5심소상응문(第五心所相應門) 가운데 7식이 인위(因位)에서 어떤 () 상응하는가를 밝히는 수구문(受俱門)이다.

 

義不然應許喜受乃至有頂,違聖言故。應說此意四受相應。謂生惡趣憂受相應,緣不善業所引果故。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희수(喜受)는 유정천(有頂天,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나, 

만약 그러하다면 거룩한 가르침인, '유가사지론' 제11권에서 '색계(色界)의 초선(初禪)에서 우수(憂受)를, 제2선(第二禪)에서 고수(苦受)를, 제3선(第三禪)에서 희수(喜受)를, 제4선(第四禪)에서 낙수(樂受)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서 사수(捨受)를 멸한다'고 한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것이니,  말나식은  가지의 사수(四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악취(惡趣)에 태어날 때에는 우수(憂受)와 상응하는 것이며, 우수는 불선업이 이끌어  결과의 제 8식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나식이 언제나 희수(喜受) 상응한다면, 7식은 3계에 두루하므로 희수도 3계에 두루 해서 유정천(有頂天)에도 상응해야 할 것이나, 성교(聖敎)에서 희수는 색계 3선천 이상에는 없다고 말하므로, 그대의 주장은 이에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유정천(有頂天, 유정지有頂地), '유정'(有頂)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3계9지(三界九地)의 '유(有)'에서 '가장 높은 정(頂)'의 '지(地)'를 말하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을 3계9지의 관점으로, 유정지라고 할 때는 두 번째 뜻이 적용되며,

유정천(有頂天)이라고 할 때는 문맥에 따라 첫 번째 뜻이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뜻이 될 수도 있다.
유형(有形) 세계의 최정상(最頂上) 즉 꼭대기라는 뜻으로, 색계의 제4선천을 뜻하며, 3유(三有) 즉 3계(三界)의 절정(絕頂) 즉 꼭대기라는 뜻으로, 무색계의 제4천인 비상비비상천을 뜻한다.
유정이 윤회하는 3계(界)ㆍ9지(地) 중에서 절정(絶頂)이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 한다.


生人、欲天、初、二靜慮,喜受相應。緣有喜地善業果故。第三靜慮,樂受相應。緣有樂地善業果故。第四靜慮乃至有頂,捨受相應。緣唯捨地善業果故。

인간ㆍ욕계천ㆍ초선천(初禪天)ㆍ제2선천(禪天)에 태어날 때에는 희수(喜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기쁨이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며,

제3선천에서는 낙수(樂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즐거움이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며,

제4선천부터 유정천에 이르기까지는 사수(捨受)와 상응하나니, 오직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평정의 사(捨)만 있는 지위(地)의 선업의 결과를 반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有義彼說亦不應理。此無始來任運一類,緣內執我恒無轉易,與變異受不相應故。

제3사(第三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의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이 제 7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자연적인 한 종류로서 내면을 반연하여 자아로 집착하면서 항상 3성(性)이 바뀌지 않으므로,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우수(憂受)ㆍ희수(喜受)의 변이수(變異受)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又此末那與前藏識義有異者,皆別說之。若四受俱,亦應別說。旣不別說,定與彼同,故此相應唯有捨受。

또한  말나식이 앞에서 말한 장식(藏識)과 뜻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게송에서도 별도로 말해야 할 것이며,

만약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우수(憂受)ㆍ희수(喜受)의 사수(四受)와 상응한다면, 본 게송에서도 역시 별도로 말해야 할 것이나, 별도로 말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그와 같은 것이므로,

따라서 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것은 오직 사수(捨受)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未轉依位與前所說心所相應,已轉依位唯二十一心所俱起,謂遍行、別境各五,善十一,如第八識已轉依位唯捨受俱,任運轉故恒於所緣平等轉故。

궁극적인 진리인 유식성(唯識性, vijñapti-mātratva) 즉 진여(眞如, tathatā)와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를 성취하는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아직 이루지 이루지 못한 지위에서는 앞에서 말한 18 심소와 상응하며,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룬 지위에서는 오직 21 가지의 심소만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의 각각 5 가지와 선심소(善心所)의 11 가지를 말한다. 

제8식이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룬 지위에서와 같이 오직 사수(捨受)만 함께하나니, 자연적으로 전전(展轉)하기 때문이고, 항상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평등하게 전전하기 때문이다.

7식의 () 상응심소를 밝힌 것이다.

 

본 논서 제4권에 있는 호법(護法)의 정의(正義)인 18심소;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중의 혜(慧)
팔수번뇌(八隨煩惱); 도거(掉舉)ㆍ혼침(惛沈)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망념(妄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
4근본번뇌;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5변행심소;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21 심소;

5 가지 별경심소(別境心所);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정(定, 三摩地) · 혜(慧)

11 가지 선심소; 신(信) · 정진(精進) ·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행사(行捨) · 불해(不害)

5변행심소;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末那心所何性所攝?有覆無記所攝,非餘。此意相應四煩惱等是染法故,障㝵聖道,隱蔽自心,說名有覆。非善不善,故名無記。如上二界諸煩惱等定力攝藏,是無記攝。此俱染法所依細故任運轉故,亦無記攝。若已轉依,唯是善性。

말나식과  상응심소는 어떠한 성품에 포함되는가?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유부무기(有覆無記)"에 포함될 뿐, 다른 것은 아니며,

 말나식과 상응하는  가지의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사번뇌(四煩惱) 등은 잡염법이기 때문에, 성스러운도(聖道, 무루지 無漏智)를 장애하고 자기 마음을 은폐하므로 가림의 부(覆) 또는 막음의 장(障)이 있는  '유부(有覆)'라 하며,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이 아니므로 무기(無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욕계ㆍ색계의 모든 번뇌 등이 선정의 힘으로 거두어짐으로써 무기에 포함되는 것과 같이, 이것과 함께하는 잡염법도 의지처인 소의(所依, 여기서 잡염법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는 심왕, 즉 제7식을 말한다.)가 미세하기 때문이며,

자연히 전전하기 때문에 역시 무기에 포함되나,

만약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었다면, 오직 착한 성품읜 선성(善性)뿐인 것이다.

6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으로서, 7말나식과 상응심소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임을 밝힌 것이다.


末那心所何地繫耶?隨彼所生,彼地所繫。謂生欲界現行末那,

相應心所卽欲界繫,乃至有頂應知亦然,任運恒緣自地藏識執爲內我,非他地故。

말나식과  상응심소는 어떤 세상(地)에 매이는 박(繫)이 되는것인가?

태어난 곳을 따라서 매이는 것이니, 욕계에 태어날 때에는 현행의 말나식과  상응심소는 욕계에 매이며,

나아가 유정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자연적으로 항상 자기가 태어나는 세상의 장식(藏識)을 반연하고 집착해서 내면의 자아로 삼는 것일 뿐, 다른 곳(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계계분별문(界繫分別門)으로서, 말나식과 상응심소가 어떤 계지(界地) 계박되는가를 밝힌 것이다.


若起彼地異熟藏識現在前者,名生彼地,染污末那緣彼執我,卽繫屬彼,名彼所繫。或爲彼地諸煩惱等之所繫縛,名彼所繫。若已轉依,卽非所繫。

만약  세상의 이숙(異熟)의 장식(藏識)을 일으켜서 현전하게 된다면,  세상에 태어난다고 이름하며,

염오의 말나식이 그것을 반연하고, 자아로 집착하여서  그것에 계속(繫屬)되는 것을 그것에 매이는 계(繫)라 이름하며,

혹은  세상(제8식이 태어난 곳)의 제7식의 모든 번뇌 등에 의해 계박(繫縛)되는 것이므로 그것에 매이는 계(繫)라 이름하나, 만약 이미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었다면, 매이지 않는 것이다.

 

'삼십송'의 제7게송에 있는 “태어난 곳에 따라서 매인다는 수소생소계(隨所生所繫)”라는 문구를 해설할 때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하나니, 태어난 곳의 소생(所生)을 제8식과 4번뇌의 둘로 나누어 해설하는 것이며,

계(繫)에도 계속(繫屬)과 계박(繫縛)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소생(所生)이 제8식인 경우는 계속(繫屬)의 의미이고,

제7식은 제8식을 반연하므로 제8식을 소속(所屬), 제7식을 능속(能屬)이라고 한다.

소생(所生)이 4번뇌인 경우에는 계박(繫縛)의 의미로써, 제7식이 생겨난 4번뇌에 계박되므로 제7식은 소계(所繫)가 되고, 4번뇌는 능계(能繫)가 되는 것이다.


此染污意無始相續,何位永斷或暫斷耶?“阿羅漢、滅定、出世道無有。”阿羅漢者,摠顯三乘無學果位。此位染意種及現行俱永斷滅,故說無有。

 염오의(染汚意)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어떤 지위(位)에서 영원히 단절되거나, 혹은 잠시 단절되는 것인가?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아라한’은 전체적으로 3승의 무학과(無學果)의 지위를 나타내며, 이 지위에서는 염오의의 '종자와 현행(現行)'이 함께 영원히 단절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8기멸분위문(第八起滅分位門)으로서, 말나식이 어떤 지위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 것이다.

 

學位、滅定、出世道中俱暫伏滅,故說無有。謂染污意無始時來微細一類任運而轉,諸有漏道不能伏滅,三乘聖道有伏滅義,眞無我解違我執故,後得無漏現在前時,是彼等流,亦違此意。

유학위의 ‘멸진정(滅盡定)’과 ‘출세도(出世道)’에서는 '종자와 현행(現行)' 함께 잠시 조복되거나 단멸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염오의(染污意)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미세한 한 종류로서 자연히 전전하는 것이다. 

사관(事觀)의 유루의 6행지(行智)의 모든 유루도(有漏道)로써는 조복하고단멸할  없으나,

3승의 성도(聖道)로써만 조복(伏)하고 단멸(滅)된다는 뜻이 있으며,

참된 무아의 이치를 아는 무분별진지(無分別盡智)는 아집에 거스르기 때문이며,

후득(後得)의 무루지가 현전할 때에도 이것은 그것의 등류이므로 역시  염오의에 거스르는 것이다.

 

'유학'(有學) 또는 '학인'(學人), 배울 것이 있는 이,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이 또는 배우는 이라 하며 이에 상대하여 무학을 배울 것 없는 이 또는 배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이라고도 한다.
학(學) 즉 배움이란 일반적인 학문을 뜻하는 것이 아닌, 출세간의 성취를 배운다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계(戒) · 정(定) · 혜(慧)의 3가지 공덕 또는 3학의 선한 역량을 배워서 번뇌의 단멸인 택멸(擇滅)을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셋3학, 즉, '번뇌를 끊기 위해 필수적인 3가지 수단 또는 방법'을 공부하고 행하는 이를 불교도라고 하며, 3학의 공덕이 청정한 이, 특히, 번뇌를 끊는 힘을 가진 무루지를 일부라도 성취한 이, 즉, 4향4과의 성자들을 승(僧) 즉 승려(스님)라고 한다-위키


眞無我解及後所得俱無漏故,名出世道。滅定旣是聖道等流,極寂靜故,此亦非有。由未永斷此種子故,從滅盡定聖道起已,此復現行,乃至未滅。

참된무아(眞無我)의 이치를 아는 것과 후득지(後得智)는 모두 무루지이기 때문에 출세도(出世道)라 이름하며,

멸진정(滅盡定)은 이미 성도(聖道)의 등류에서도 매우 적정하기 때문에 역시 여기서 존재하지 않으니, 아직 영원히 이것의 종자를 단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진정과 성도(聖道)로부터 일어난 때에는 이것이 다시 현행하며, 나아가 아직 단멸하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이다.

 

진여의 무분별지를 본질의 입장에서는 근본지(根本智) 또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라 하고,

진여를 완전히 깨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증득의 입장에서는 후득지(後得智) 또는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라 하며, 가행(加行: 노력, 방편) 즉 선정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진여의 무분별지의 일부로서의 갖가지 무루혜를 가행지(加行智) 또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라 하며, 가행지는 근본지를 깨쳐 후득지가 드러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대승기신론》등의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 계열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을 본질의 입장에서 본각(本覺)이라 하고,

증득의 입장에서 범부가 최초로 증득하는 무루혜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하고,

성자가 선정 수행 즉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중간의 갖가지 무루혜를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성자가 근본무명을 끊고 진여를 완전히 깨쳐 본각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위키


然此染意相應煩惱是俱生故,非見所斷。是染污故,非非所斷。極微細故,所有種子與有頂地下下煩惱一時頓斷,勢力等故。金剛喩定現在前時,頓斷此種成阿羅漢。故無學位永不復起。

그런데  염오의(染污意)와 상응하는 번뇌는 선천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소단(見所斷)이 아니니, 염오성이기 때문에 단멸할 것이 없는 비소단(非所斷)의 법이 아니며,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를 유정지(有頂地)의 하품 중의 하품인 하하(下下)의 번뇌인, 제6식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번뇌(俱生煩惱)와 동시에 단박에 끊을 수 있으니, 세력이 같기 때문이다.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 이것의 종자를 바로 끊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므로 무학위에서는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소단(非所斷, aheya) 또는 비단(非斷)은 견도나 수도위에서 단멸할 것이 없는 법, 즉 무루법을 말하는 것으로, 택멸무위(擇滅無爲)처럼 견도(見道)나 수도(修道) 어느 것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는 법(法)을 말한다.  


二乘無學迴趣大乘,從初發心至未成佛,雖實是菩薩,亦名阿羅漢,應義等故不別說之。

2승(乘)의 무학이 대승에 전향하여서 나아가면, 처음발심(初發心)한 때부터 아직 성불하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가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역시 아라한이라고 이름하나니, 응공(應供)의 뜻이 같기 때문에 별도로 말하지 않는다.


此中有義,末那唯有煩惱障俱,聖教皆言三位無故。又說四惑恒相應故,又說爲識雜染依故。

안혜(安慧)의 주장으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말나식은 오직 번뇌장과 함께하는 것으로, '아비달마잡집론'의 제2권의 가르침에서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가지 지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안혜(安慧)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3()에서는 말나식의 자체(體) 없으므로,  식과 함께하는 것은 오직 아집(我執)뿐인 것으로, 법집(法執)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지 번뇌인 사혹(四惑)과 항상 상응한다고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또한 식의 잡염의 의지처가 된다고, '섭대승론(攝大乘論)'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有義彼說教理相違,出世末那經說有故,無染意識如有染時,定有俱生不共依故。

호법(護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나, 호법이 말한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니,   '해탈경'에서 출세도의 말나식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때문이며,

잡염이 없는 의식은 잡염이 있을 때와 같이 반드시 선천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구생(俱生, 제7식)으로, 다른 것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의(不供依)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論說:“藏識決定恒與一識俱轉,所謂末那。意識起時則二俱轉,所謂意識及與末那。若五識中隨起一識,則三俱轉,乃至或時頓起五識則七俱轉。”

논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51권에서 장식(藏識)은 결정적으로 항상 하나의식(一識)과 함께 전전한다고하였으니, 이른바 말나식인 것이며,  

의식이 일어날 때에는   가지로 함께 전전하는 것이니, 이른바 의식과 말나식이며,

만약 5식 가운데 하나의 식을 일으킬 때에는   가지, 즉 제7식과 제6식 및 5식 중의 하나로 함께 전전하며,

나아가 단박에 5식을 모두 일으킬 때에는, 곧 일곱 가지, 즉 제7식과 제6식 및 5식 모두 함께 전전한다.


若住滅定無第七識,爾時藏識應無識俱,便非恒定一識俱轉。住聖道時若無第七,爾時藏識應一識俱,如何可言若起意識爾時藏識定二俱轉?

만약 멸진정에 머물 때에 제7식이 없다면, 그 때의 장식(藏識)은 식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그러하다면 항상 반드시 하나의 식과 함께 전전함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51권에서 장식(藏識) 항상 반드시 하나의 () 함께 전전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성도(聖道)에 머물 때에 만약 제7식이 없다면, 그 때의 장식(藏識)은오직 하나의 식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하다면 어떻게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 '만약 무루(無漏)의 제6식을 일으킬 때의 장식은 반드시 제6식과 제7식의 두 가지가 함께 전전한다고 말하였겠는가?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4  11

 

依二十二隨煩惱中,解通麤、細,二性,說十。

앞에서 말한 20 가지의 수번뇌에 삿된 욕구인 사욕(邪欲)과 와 삿된 승해인 사승해(邪勝解)를 첨가한 22 가지 수번뇌 중에서 인식작용이 두드러진 추(麤)와 미세한 세(細)에 통하고, 무참ㆍ무괴의 두 가지 성품에 의거해서  가지로 말하는 것이니,

22 가지 수번뇌 중에서 이해가 오직 두드러지는, (忿)   가지 소수번뇌인 소수혹(小隨惑)과 무참ㆍ무괴의 이중수혹(二中隨惑)을 가려낸 나머지  가지이다.

 

故此彼說非互相違。然此意俱心所十五,謂前九法,五隨煩惱,幷別境慧。我見雖是別境慧攝,而五十一心所法中,義有差別,故開爲二。

따라서 이것은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과 '유가사지론' 제55권ㆍ제58권에서 말한 것에 서로 어긋나지 않으나,  말나식과 함께하는 심소는 15 가지이니,

앞에서 말한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의 4 가지 근본번뇌와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5변행심소의 9가지의 구법(九法)과

혼침ㆍ도거ㆍ불신ㆍ해태ㆍ방일의 심소인 5 가지의수번뇌(五隨煩惱)와 아울러 

별경심소 중의 혜(慧)심소를 말하는 것이며,

아견은 별경심소 중의 혜(慧)에 포함되지만, 51심소법 중에서 뜻의 차이가 있으므로 나누어 둘로 한 것이다.


何緣此意無餘心所?謂忿等十行相麤動,此識審細,故非彼俱。無慚、無愧唯是不善。此無記故,非彼相應。散亂令心馳流外境,此恒內執一類境生,不外馳流,故彼非有。不正知者,謂起外門身、語、意行,違越軌則。此唯內執故非彼俱。無餘心所義如前說。

무엇에 의거해서  말나식에 다른 심소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해(害)ㆍ교(憍) 등의  가지 심소는 인식작용이 두드러진 것으로, 이 말나식은 살피고 미세한 심세(審細)한 것이므로 그것과 함께하지 않으며,

무참(無慙)ㆍ무괴(無愧) 심소는 오직 불선으로 무기이므로, 따라서 말나식 상응하지 않으며,

산란(散亂)심소는 마음을 외부대상으로 치달리게 하는 것이니, 말나식은 항상 내면적으로  종류의 대상에 집착해서 일어나고, 외부로 치달리지 않으므로 따라서 이것이 없으며,

부정지(不正知)심소는 외부의 신체ㆍ언어ㆍ의지의 행위를 일으키고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게 하나, 말나식 오직 내부만을 집착하므로 그것과 함께하지 않으며,

다른 심소가 없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有義。應說六隨煩惱遍與一切染心相應。'瑜伽論'說不信、懈怠、放逸、忘念、散亂、惡慧一切染心皆相應故。忘念、散亂、惡慧若無,心必不能起諸煩惱。要緣曾受境界種類,發起忘念及邪簡擇,方起貪等諸煩惱故。

말나식에 상응하는 수번뇌심소의 종류에 관한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니,  

불신ㆍ해태ㆍ방일ㆍ망념ㆍ산란ㆍ악혜(惡慧)의 여섯 가지 수번뇌가 모든 잡염심과 상응한다고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설한 때문이며,

만약 망념과 산란과 악혜(惡慧)가 없다면, 심왕(마음)이 반드시 모든 번뇌를 일으킬  없어야 할 것이니, 예전에 받아들인 경계의 종류를 반연하여 망념과 삿된 간택(簡擇)을 일으켜서 비로소 탐욕  모든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煩惱起時,心必流蕩皆由於境起散亂故。惛沈、掉擧行相互違。非諸染心皆能遍起。論說五法遍染心者,解通麤細,違唯善法,純隨煩惱,通二性故。說十遍言義如前說。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마음이 반드시 유탕(流蕩)하여상(경계)에 대해서 산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나, 혼침과 도거의 심소는 인식작용이 서로 다른 것으로, 모든 잡염심에서 능히 두루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논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 6권에서 불신(不信)ㆍ해태ㆍ혼침ㆍ도거(掉擧)ㆍ방일의 심소의 다섯 가지법(五法)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은, 인식작용이 두드러진 추(麤)와 미세한 세(細) 통하고, 오직 선법(善法)을 거스르며, 순수한 수번뇌이고, 무참과 무괴의 두 가지 성품에 통하기 때문이니,

 가지의  두루 함의 십변(十遍)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는 앞에서와 같은 것이다.


然此意俱心所十九。謂前九法、六隨煩惱幷念、定、慧及加惛沈。此別說念准前慧釋。幷有定者,專注一類所執我境,曾不捨故。加惛沈者,謂此識俱無明尤重,心惛沈故。無掉擧者,此相違故。無餘心所如上應知。

 말나식과 함께하는 심소는 19 가지이니, 앞에서 말한 아홉 가지의 구법(九法)과 여섯 가지수번뇌(六隨煩惱)와 아울러 염(念)ㆍ정(定)ㆍ혜(慧)  혼침의 심소를 첨가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 별도로 염(念)심소를 말한 것은 앞의 혜(慧)심소에 견주어서 해석하도록 한다. 

아울러 정(定) 심소는  종류로 집착된 자아의 대상에 집중해서 일찍이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혼침을 첨가한 것은  식과 함께하는 무명이 더욱 무거워서 심왕이 혼침한 때문이며,

도거심소가 없는 것은 이 혼침과 다르기 때문이며,

욕(欲)ㆍ승해(勝解) 심소 등과 같은 다른 심소가 없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有義。復說十隨煩惱,遍與一切染心相應。'瑜伽論'說放逸、掉擧、惛沈、不信、懈怠、邪欲、邪勝解、邪念、散亂、不正知,此十一切染污心起。通一切處、三界繫故。

말나식에 상응하는 수번뇌심소의 종류에 관한 제3사(第三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다시  가지수번뇌(十隨煩惱)가 모든 잡염심과 두루 상응한다는 것으로,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말하기를, 방일ㆍ도거ㆍ혼침ㆍ불신ㆍ해태ㆍ삿된 욕(欲)ㆍ삿된 승해(勝解)ㆍ삿된 염(念)ㆍ산란ㆍ부정지(不正知)의  10 가지는 모든 염오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모든 포섭처인 일체처(一切處)와 3계에 계박된 삼계박(三界繫)에 통한다고때문이다.


若無邪欲、邪勝解時。心必不能起諸煩惱。於所受境要樂合離,印持事相,方起貪等諸煩惱故。諸疑理者於色等事,必無猶豫。故疑相應亦有勝解。

만약 삿된욕(邪欲)ㆍ삿된승해(邪勝解)가 없을 때에는 심왕(마음)이 반드시 모든 번뇌를 일으킬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대상에 대해서 반드시 합하고 떠남의 합리(合離)를 즐기고, 사물의 상(相) 분명히 지녀서 비로소 탐(貪)  모든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니,

모든 이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색법 등의 사물에 대해서 결코 주저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의(疑)심소와 상응하며 역시 승해(勝解)심소도 있는 것이다.


於所緣事亦猶豫者,非煩惱疑,如疑人杌。餘處不說此二遍者,緣非愛事,疑相應,心邪欲、勝解非麤顯故。餘互有無義如前說。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사물에 대해서도 머뭇거리는 것은 번뇌의 의(疑)심소가 아닌 것이니, 사람을 나무 그루터기로 의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논서에서  둘을 두루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랑할 만한 것이 아닌 사물을 반연할 때와 의심에 상응할 때에는 심왕에 삿된 사욕(邪欲)과 삿된 사승해(邪勝解)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니,

서로 다름이 서로 있고 없는 것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此意心所有二十四。謂前九法、十隨煩惱,加別境五。准前理釋。無餘心所如上應知。

 말나식의 심소는 24 가지이니, 앞에서 말한 아홉 가지의 구법과  가지 수번뇌와 별경심소 다섯을 더한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논리에 견주어서 해석하도록 한다. 다른 심소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有義。前說皆未盡理。且疑他世爲有爲無,於彼有何欲、勝解相?煩惱起位,若無惛沈,應不定有無堪任性。掉擧若無,應無囂動。便如善等非染污位。若染心中,無散亂者,應非流蕩,非染污心。若無失念、不正知者,如何能起、煩惱現前。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니, 우선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의심하는 것에 있어서, 무슨 욕(欲)ㆍ승해(勝解)의 양상이 있다는 것인가?

번뇌가 일어나는 지위에서 만약 혼침심소가 없다면, 반드시 무감임성(無堪任性, 혼침)이 없어야 하며,

도거심소가 없다면 시끄러운 움직임의 효동(囂動)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곧 선(善) 등과 같아서 염오의 지위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만약 잡염심 중에 산란심소가 없다면 유탕하지 않아서 염오심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만약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가 없다면, 어떻게 능히 번뇌를 일으켜서 현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故染污心,決定皆與八隨煩惱,相應而生。謂惛沈、掉擧、不信、懈怠、放逸、忘念、散亂、不正知。忘念、不正知,念、慧爲性者,不遍染心。非諸染心皆緣曾受有簡擇故。若以無明爲自性者,遍染心起。由前說故。

따라서 염오심은 반드시 혼침ㆍ도거ㆍ불신ㆍ해태ㆍ방일ㆍ망념ㆍ산란ㆍ부정지의 여덟 가지 수번뇌와 상응해서 생겨나는 것이며,

망념과 부정지(不定知)가 염(念)과 혜(慧)로써 자성을 삼는다면, 잡염심에 두루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잡염심이 예전에 받아들인 것을 반연하여 간택함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을 자성으로 삼는다면, 잡염심에 두루하여 일어날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然此意俱心所十八。謂前九法、八隨煩惱,幷別境慧。無餘心所。及論三文准前應釋。若作是說不違理教。

▷정의한다; 그러므로 이 말나식과 함께하는 심소는 18 가지이니,

네 가지 근본번뇌와 5변행심소의 아홉 가지 구법과 여덟 가지 팔수번뇌(八隨煩惱)와 아울러 별경심소 중의 혜(慧)를 말하며, 다른 심소는 없는 것이다.

논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과 '유가사지론'의 제55권ㆍ제58권의 세 군데에서의 문장은 앞의 내용에 견주어서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말한다면 바른 논리와 성교(聖敎)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중의 혜(慧)
팔수번뇌(八隨煩惱); 도거(掉舉)ㆍ혼침(惛沈)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망념(妄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

4근본번뇌;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5변행심소;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成唯識論卷第四 終 성유식론 제 4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4  10

 

有十種,此何唯四?有我見故餘見不生。無一心中有二慧故。

번뇌(번뇌심소)에  가지가 있으나, 어째서 이 제7식에는 오직  가지뿐인가?

아견(我見)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견해의 여견(餘見)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한 마음의 일심(一心)에는  가지의 혜(慧)심소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 가지 번뇌심소는 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해(害)ㆍ교(憍)


如何此識要有我見?二取、邪見但分別生,唯見所斷。此俱煩惱唯是俱生,修所斷故。

어째서  제 7식에는 반드시 아견만 있는 것인가?

 가지 취착된 견해인 이취(二取)인 계금취견(戒禁取見)과 견취견(見取見)과, 사견(邪見)은 다만 후천적으로 분별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견소단(見所斷)이며,  

이 제 7식과 함께하는 번뇌는 오직 선천적으로 함께 생겨나는 구생(俱生)으로,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수소단(修所斷)이기 때문이다.

 

 5견(五見, 5견五見 또는 5악견(五惡見), 자세히는 유신견(有身見, 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가지 잘못된 견해로 나뉘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단순히 견(見)이라 부르기도 한다.

①유신견(有身見, satkāya-drsti, view of individuality, self view, identity view)은 소의신(所依身), 즉 5온(五蘊)의 화합체를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견해, 즉 5온의 화합체를 실재하는 나(我) 또는 아소(我所)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줄여서 신견(身見) 또눈 원어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하여 살가야견(薩迦耶見), 삽가야견(颯迦耶見) 또는 삽가사견(薩迦邪見)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허위신견(虛偽身見), 괴신견(壞身見) 또는 이전신견(移轉身見)이라고도 한다. 

②변집견(邊執見, anta-grāha-dṛṣṭi, extreme views, extreme view)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단(斷, 단견)과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고 항상하다는 상(常, 상견)의 두 극단(邊)에 집착하는 견해로, 줄여서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며, 2가지 변견이라는 뜻에서 2변(二邊)이라고도 하며, 극단적인 견해 또는 두 극단이라고도 한다. 

③사견(邪見, mithyā-dṛṣṭi, false view, evil view)은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부정하는 견해, 즉 원인[因] · 결과[果] 또는 작용(作用)을 부정하거나, 혹은 선한 일[善事]을 허물거나 파괴하는 오염된 지혜이다. 그리고 사견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근을 끊고 불선근을 견고히 하고 불선을 낳고 선을 낳지 않는다 것이다

④견취(見取, drstiparāmarśa, adherence to views, view of attachment to views)는 견취견(見取見)이라고도하며,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을 일으킨 후 이를 고집하여 진실하고 뛰어난 견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견취는 저열한 것[劣] 즉 무루성혜[聖] 또는 성도[聖]에 의해 끊어지는 유루(有漏)를 뛰어난 것[勝] 즉 무루(無漏)라고 여기는 것이다

⑤계금취(戒禁取, śīla-vrata-parāmarśa,  adherence to observances and rituals, view of rigid attachment to the precepts)는 그릇된 계행(戒行)과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인(因)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참된 해탈도(解脫道)가 아닌 것을 참된 해탈도라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말한다. 계금취견(戒禁取見) · 계금취결(戒禁取結) · 계금등취견(戒禁等取見) · 계도견(戒盜見) · 계도결(戒盜結) · 계취(戒取) · 계취견(戒取見) 또는 계취결(戒取結)이라고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svara)이나 생주신(生主神, prajāpati)을 세간의 참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개나 소 따위가 죽은 뒤엔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여서 개나 소처럼 풀을 먹고 똥을 먹으며 개와 소의 행동을 하면서 이것이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고 바른 길이라고 집착하는 것, 또는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스강에 목욕하거나 불속에 뛰어드는 것 등이 계금취에 해당한다.


我所、邊見依我見生。此相應見不依彼起。恒內執有我故,要有我見。由見審決疑無容起。愛著我故瞋不得生。故此識俱煩惱唯四。

나의 소유라는 아소(我所)와 변견(邊見, 변집견)은 아견(我見)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니, 제7식과 상응하는 아견은 아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항상 내면적인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므로 반드시 아견이 있는 것이다. 

아견(我見)이 살피고 결정하기 때문에 의(疑)심소가 일어날  없으며,

아애(我愛)가 자아에 탐착하기 때문에 진(瞋)심소가 일어날  없으므로,

 식과 상응하는 번뇌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의  가지 뿐인 것이다.


見、慢、愛三如何俱起?行相無違,俱起何失?

아견(我見)과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가지 번뇌가 어떻게 함께 일어나는 것인가?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거스러지 않으므로 함께 일어난다고 하는 것에 어떤 과실이 있겠는가?


'瑜伽論'說:“貪令心下,慢令心擧。”寧不相違?

▷외인(外人)의 질문;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말하기를, 탐욕은 마음을 비열하게 하고, 아만은 마음을 높인다고 하였거늘, 어째서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分別俱生,外境內境,所陵所恃,麤細有殊。故彼此文義無乖返。

▷답한다; 분별과 구생(俱生), 외부 대상인 외경(外境)과 내부 대상인 내신(內身), 업신여겨진 것과 믿어진 것, 두드러진 것과 미세한 것의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그 문장과  문장의 뜻이 어긋나거나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전의를 득하지 못한 상태 즉 아직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의 3성의 관점에서의 성질은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아뢰야식의 견분(見分: 의식작용)을 끊임없이 자신의 내적 자아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오염된 자아의식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은 항상 아치(我痴)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번뇌 즉 4가지의 근본적인 번뇌성의 마음작용과 함께 일어나며, 이들 4번뇌 외에도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는 변행심소에 속한 5가지 마음작용 모두와 별경심소에 속한 혜(慧) 그리고 대수번뇌심소에 속한 8가지 마음작용이 있다. 이들과 4번뇌를 합하면 총 18가지의 마음작용이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과 상응하여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위키


此意心所唯有四耶?不爾。及餘觸等俱故。有義。此意心所唯九。前四及餘觸等五法。卽觸、作意、受、想與思。意與遍行定相應故。前說觸等異熟識俱,恐謂同前亦是無覆,顯此異彼故,置餘言。及是集義。前四後五合與末那恒相應故。

 말나식의 심소는 오직  가지 뿐인가? 그렇지 않으니, 이밖에도 촉(觸) 등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제1사(第一師)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말나식의 심소는 오직 아홉 가지로써, 앞에서 말한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가지 외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다섯 가지 법이니, 말나식은 변행심소와 반드시 상응하기 때문이다. 

본 논서 제3권(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9)의 아뢰야식에 상응하는 심소를 설명할 때, 촉(觸) 등은 이숙식과 함께한다고 하였으니, 제 8식에 상응하는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5변행심소와 마찬가지로 역시 덮어서 가릴 수 없는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말할 것이 염려되어서, 이 제 7식의  등은 그 이숙식의  등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더불어 급(及)’이라는 말은 모음의 집(集)의 뜻이니, 앞의  가지와 다섯 가지가 합하여 말나식(제 7식)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8식 모두에 언제나 상응해서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으로, 이 심소는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 모두에 두루 일어나며, 3계(界)ㆍ9지(地)의 일체제(一切地)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으로, 

유심무심(有心無心)의 모든 순간의 일체시(一切時)에 일어나고, 변행의 5심소는 언제나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이다. 이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가 있다.ㅡ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此意何故無餘心所?謂欲希望未遂合事,此識任運緣遂合境,無所希望,故無有欲。

어째서 이 말나식에는 다른 심소가 없는 것인가? 욕(欲)심소는 이루지 못한 일을 희망하는 것으로, 이 식은 이루어진 대상을 자연적으로 반연하는 것으로 희망하는 바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욕심소가 없으며, 

 

勝解印持曾未定境,此識無始恒緣定事,無所印持。故無勝解。

승해(勝解)심소는 예전에 결정되지 않은 대상을 분명히 지니는 것으로,  식은 아득한 부시로부터 일정한 것을 반연하면서 분명히 지니는 바가 없으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승해심소가 없으며,  

 

念唯記憶曾所習事。此識恒緣現所受境,無所記憶。故無有念。

염(念)심소는 오직 예전에 익힌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식은 항상 현재에 받아들인 대상을 반연하며, 기억하는 바가 없으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염(念)심소가 없으며, 


定唯繫心專注一境,此識任運剎那別緣,旣不專一。故無有定。

정(定)심소는 오직 심왕(마음)을 붙잡아서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게 하는 것으로, 이 식은 자연적으로 찰나마다 다른 대상을 반연하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정(定)심소가 없는 것이며,  


慧卽我見。故不別說。善是淨故。非此識俱。

혜(慧)심소는  아견이므로 별도로 말하지 않겠으며,

선(善)심소는 청정한 것이므로  말나식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 별도의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 일어나거나 작용하며, 또는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 일어나거나, 작용한다는 뜻으로 '두루 작용한다'는 뜻의 '변행(遍行)'의 반대말이다. 별경심소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특정한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서 일어날 때에만 그 마음(8식,심왕, 심법)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심소법)들을 말한다

욕(欲, chanda) · 승해(勝解, adhimoksa) · 염(念, smrti) · 정(定, 三摩地, samādhi) · 혜(慧, prajñā)의 5가지.


隨煩惱生必依煩惱,前後分位差別建立,此識恒與四煩惱俱,前後一類,分位無別,故此識俱無隨煩惱。惡作追悔先所造業,此識任運恒緣現境,非悔先業,故無惡作。

수번뇌(隨煩惱)가 생겨나는 것은 반드시 번뇌의 전후 찰나의 분위(分位)의 차이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나, 이 말나식은 항상  가지의 사번뇌(四煩惱)와 함께해서 전후 찰나에  종류로서 분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말나식과 함께하는 수번뇌심소는 없는 것이다. 

오작(惡作)심소는 예전에 지은 업을 후회하는 것으로, 이 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반연하며 이전의 업을 후회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오작심소가 없는 것이며, 

 

수번뇌(隨煩惱, upakleśā)는 수혹(隨惑)이라고도 하며,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를 따라 일어난 2차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이 경우에는 수번뇌를 근본번뇌와 구분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또는 지말혹(枝末惑)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는 마음(心, citta)을 따라 일어나서 유정을 괴롭고 혼란스럽게하는 마음작용, 즉 근본번뇌라는 뜻이다.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는 곧 일체(一切)의 번뇌 즉 모든 번뇌를 말하며, 이 경우 수번뇌는 번뇌의 여러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睡眠必依身心重昧,外衆緣力有時暫起,此識無始一類內執,不假外緣,故彼非有。尋、伺俱依外門而轉,淺深推度,麤細發言。此識唯依內門而轉,一類執我,故非彼俱。

면(眠)심소는 반드시 신심(身心) 깊은 어두움과 외부의 여러 연(緣)의 세력에 의하며, 때때로 잠시 일어나는 것이나, 이 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종류로 내부에 집착하는 것으로, 외부의 연(緣)을 의뢰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수면 심소는 없는 것이며,

심(尋)ㆍ사(伺) 심소는 함께 감각기관의 외문(外門)에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으로, 얕거나 깊게 헤아리며, 구체적이거나 미세하게 언어를 일으키는 것이나, 이 식은 오직 내면에 의지해서 전전하고  종류로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有義。彼釋餘義非理。頌別說此有覆攝故。又闕意俱隨煩惱故。煩惱必與隨煩惱俱,故此餘言顯隨煩惱。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가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의 뜻을 해석한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니, 게송에서 별도로 이것을 유부무기에 포함된다고 말한 때문이며, 또한 식과 함께하는 수번뇌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번뇌는 반드시 수번뇌와 함께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은 수번뇌를 나타내는 것이다.


此中有義。五隨煩惱遍與一切染心相應。如󰡔集論󰡕說惛沈、掉擧、不信、懈怠、放逸,於一切染污品中,恒共相應。若離無堪任性等染污性成,無是處故。煩惱起時,心旣染污故,染心位必有彼五。煩惱若起必由無堪任、囂動、不信、懈怠、放逸故。掉擧雖遍一切染心,而貪位增但說貪分。如眠與悔雖遍三性心,而癡位增,但說爲癡分.
囂 떠들썩할 효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다섯 가지수번뇌(五隨煩惱)가 두루하여서 모든 잡염심과 상응한다고, '대승아비달마집론' 제 4권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ㆍ방일의 심소는 모든 염오심 중에서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며,

무감임성(無堪任性, 혼침) 등에서 떠나서는 염오성이 된다고는 이 '집론'에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심왕(마음)이 이미 염오성이므로, 잡염심의 지위에서는 반드시  다섯 가지의 오수번뇌(五隨煩惱)가 있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무감임성(혼침)ㆍ시끄러운 움직임의 효동(囂動, 도거)ㆍ불신ㆍ해태ㆍ방일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도거(掉擧)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하지만 탐(貪)심소의 지위에서 증성하므로 다만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며,

면(眠)ㆍ회(悔) 심소는  가지 성품의 삼성심(三性心, 선 불선 무기)의 심왕에 두루하지만, 치(癡)심소의 분상에서 증성하므로 다만 치심소의 일부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2사가 '삼십송'의 6게송의 ‘그 외(餘)’라는 말이 수번뇌(隨煩惱) 가리킨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그에 해당되는 수번뇌의 종류를 열거한 것이며, 이에 다시 가지 견해가.

 

雖餘處說有隨煩惱或六或十,遍諸染心,而彼俱依別義,說遍非彼實遍一切染心。

'유가사지론'의 여러 곳에서는 수번뇌가 혹은 여섯 가지, 혹은 열 가지가 있어서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뜻에 의해서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실제로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 것은 아니다.

 논서 55권에서 수번뇌로서 여섯 가지를, 58권에는  가지를 들고 있.

 

謂依二十隨煩惱中,解通麤細,

20 가지의 수번뇌 중에서 인식작용, 즉 해(解)가 두드러진 추(麤)와 미세한 세(細)에 통하고

(忿), 한(恨), 뇌(惱), 부(覆), 광(誑), 첨(諂), 교(憍), 해(害), 질(嫉), 간(慳) 심소   가지 소수번뇌인 소수혹(小隨惑)은 이해(解) 오직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성의 마음작용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 근본번뇌를 의지하여 근본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라는 것을 뜻하며, 소수번뇌(小隨煩惱)라는 말은 각기 따로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를 뜻하며, 각각 따로 일어난다는 것이란, 소수번뇌심소에 속한 마음작용들은 심한 번뇌들, 불선(악)으로 분류되는 번뇌들, 즉 더 오염된 마음작용들이다. '소(小)'가 심하지 않은 번뇌 또는 덜 오염된 마음작용을 의미한다고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無記不善,通障定慧相顯,說六。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는 오직 불선(不善)으로서 무기와 불선의 두 가지 성품의(二性)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공통적으로 선정(定)과 지혜(慧)를 장애하는 상이 드러나는 혼침ㆍ도거 심소에 의거해서 불신ㆍ해태ㆍ방일ㆍ실념(失念)ㆍ산란ㆍ부정지(不正知) 심소의 여섯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4  9

 

有義。此意緣彼識體及相應法。論說末那,我、我所執,恒相應故。謂緣彼體及相應法。如次執爲我及我所。

난타(難陀) 등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말나식(意)   8 체(體, 자체) 상응하는 (심소, 마음작용) 반연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말나식은 나(我) 아소(我所, 나의 소유)라는 집착과 항상 상응한다고 말한 때문이니,

그것의 자체와 상응법을 반연하고 집착하여서 나(我)ㆍ나의 소유(我所)로 삼는다고 하였다

난타 견해로써,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처인 소의(所依) 생기하는 동시  그것을 대상인 소연(所緣)으로 인식작용을 한다여기서 구체적으로 아뢰야식 중의 어느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가?  아뢰야식의 자체분(自體分)인가 견분(見分)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며, 이에 인도 유식 논사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가지 학설로 정리할 수 있다

난타(難陀)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자체분을 나(我) 삼고 상응법인 심소(心所)를 나의 소유인 아소(我所) 삼는다고 하였고,

화변(火辨) 아뢰야식의 견분을 나(我) 삼고 상분을 나의 소유(我所) 삼는다고 보았으며,

안혜(安慧) 아뢰야식을 나(我) 삼고 종자를 나의 소유(我所) 삼는다고 말하였으며,

호법(護法) 아뢰야식의 견분을 나(我) 삼는다고 주장하였다

 

然諸心所不離識故,如唯識言無違失。

그런데 모든 심소(마음작용)는 식(識)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유식(唯識)이라는 말과 같이 성교(聖敎) 위배되는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

'삼십송'의 5게송에서 그것을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심소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그러나 심소(마음작용)가 심왕(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반드시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심소를 제외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有義。彼說理不應。然曾無處言緣觸等故。應言此意但緣彼識見及相分,如次執爲我及我所。相、見俱以識爲體故,不違聖說。

화변(火辨, Citrabhana)의 주장으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나, 우선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일찍이 경론의 어떤 곳에서도 촉(觸) 등을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았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말나식(제 7식)은 다만 8 견분ㆍ상분을 반연하고 다음과 같이 집착해서 나와 나의 소유로 삼는다는 것이다.

상분과 견분은 모두 (자체분) 자체로 삼기 때문에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촉(觸, sparśa) 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즉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최초의 접촉에 해당되며, 이로써 인식의 장(場)이 열리게 된다.

안근(眼根)과 색경(色境)이 연(緣)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고, 세 가지(根ㆍ境ㆍ識)의 화합이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촉심소를 일어나게 하며, 반드시 촉심소에 의해 심왕ㆍ심소가 화합하여 하나의 대상에 접촉하게 된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말나식(末那識, manas의 意, manas-vijñāna 의식 意識)은 유식유가행파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는 의(意)라고도 의역된다.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역인 의(意)라고 하지 않고 음역을 사용하여 말나(末那)라고 한다.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을 소의(所衣, 의지)로 하여 성립된 식이며 또한 제6 의식(第六意識)의 성립에 있어서 소의가 되는 식으로, 본질적인 성질은 끊임없는 사량(思量)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이끌어 내어 현행하게 함으로써 현재적인 인식이 이루어지게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6식(六識: 6가지 식)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6식이 일어나게 하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有義。此說亦不應理。五色根、境非識薀故,應同五識亦緣外故,應如意識緣共境故,應生無色者不執我所故。厭色生彼,不變色故。應說此意但緣藏識及、彼種子,如次執爲我及我所。以種卽是彼識功能,非實有物不違聖教。

안혜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제8식의 상분(相分)인 오색근(五色根)과 대상(境)은 식온(識薀)이 아니기 때문이고 5식과 같이 외부의 오경(五境)을를 반연해야 하기 때문이며, 의식과 같이 공통의 대상을 반연해야 하기 때문이고,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나의 소유로 집착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니, 물질(色)을 싫어해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물질을 변현하지 않는 불변색(不變色)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닌 것이다.

대신에 이 말나식은 다만 장식과 그 종자를 반연하고 집착해서 나와 나의 소유로 삼는다고 해야 될 것이니, 

종자는   식의 공능(功能)으로서 실유(實有)가 아니므로 성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有義。前說皆不應理。色等種子非識薀故,論說種子是實有故。假應如無非因緣故。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색법 등의 종자는 식온이 아니기 때문이고, 논서,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종자는 실유라고 말한 때문이다. 

종자가 임시적인 가(假)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인연이 아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又此識俱薩迦耶見任運一類,恒相續生。何容別執有我、我所?無一心中有斷常等二境,別執俱轉義故。亦不應說二執前後。此無始來一味轉故。

또한  식과 함께하는 아견,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자연적이고  종류인 것으로써 항상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이거늘, 어찌 별도로 나ㆍ나의 소유가 있다고 집착함을 허용하는 것인가?

일심(一心) 중에는 단멸과 상주 등의  가지 대상이 있어서 별도로 집착하여 함께 전전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ㆍ나의 소유의  가지 집착인 이집(二執)이 앞뒤로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되는 것이니,

제 7식은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종류인 일미(一味)로 전전한 때문이다.

 

應知此意但緣藏識見分非餘。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말나식(제 7식)은 다만 장식(제 8식)의 견분(見分, 주관)만을 반연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상분과 견분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 또는 견분의 인식작용의 결과로서의 자체분보다는, 아뢰야식의 실제적인 인식상황 속의 주체인 견분이 자아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彼無始來,一類相續,似常一故,恒與諸法爲所依故。此唯執彼爲自內我,乘語勢故說我所言。

그것(자아, ātman)은 아득한 옛적부터  종류로 상속하여서 상주함의 상(常)과 유일한 하나의 일(一)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항상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ātman)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 띠는 존재이다. 그런데 말나식의 입장에서   아뢰야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끊임없이 상속되었기 때문에 항상되고(常) 유일한(一) 것으로 착각되며,

또한 7전식을 비롯하여 모든 현상적 존재가 그것을 근본적인 의지처로 하므로 주재(主宰)한’ 것으로 오인되는 것이다.

이 제7식은 오직 그 제8식을 집착하여 자신의 내면의 자아인 자내아(自內我)로 삼는데, 용어의 편리를 따라서 나의 소유인 아소(我所)라고 말하는 것이다.

 

或此執彼是我之我故。於一見義說二言。若作是說,善順教理。多處唯言有我見故,我、我所執不俱起故。

혹은 이 제 7식이 그 제 8식이 나(我), 즉  제6식이 집착하는 가아(假我)의 나(我), 즉 제7식이 계탁(計度)하는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하나의 견분(주관)에 대하여 두 가지의 뜻, 즉 나(我)와 아소(我所, 나의 소유)로 말하나, 사실은 다만 하나의 아견(我見)일 뿐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성교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수순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와 '현양성교론' 제17권에서 오직 아견(我見)이 있다고만 말한 때문이고, 나(我)와 아소(我所) 대한 집착이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未轉依位,唯緣藏識。旣轉依已亦緣眞如及餘諸法。平等性智證得十種平等性故。知諸有情勝解差別,示現種種佛影像故。

아직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지위인, 초지(初地) 이전에서는 오직 장식(藏識)만을 반연하고,

전의를 이룬 이후에도 역시 진여  다른법을 반연하나니, 

평등성지(平等性智)는  가지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모든 유정의 이해하는 근기의 차이를 알아서 갖가지로 부처님의 불영상(佛影像)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전의(轉依, 변형, 질적 변형, 질적 전환, āśraya-parāvṛtti)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방법과 그 방법에 의해 성취되는 상태에 대한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으로, 유식리(唯識理) 즉 유식의 궁극적인 진리인 유식성(唯識性, vijñapti-mātratva) 즉 진여(眞如, tathatā)와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불교로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성유식론' 제1권에서는 전의(轉依)의 성취 즉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성취가 유가유식행파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의(轉依)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
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는 소의이전(所依已轉) 또는 변주(變住)라고도 하는데,

소의이전(所依已轉)은 소의(所依)가 이미 변형되었다는 뜻이고

변주(變住)는 변형이 완료되어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此中且說未轉依時。故但說此緣彼藏識。悟迷通局理應爾故,無我我境遍不遍故。

그런데 여기서는 우선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초지(初地) 이전의 시기에 관한 것이므로, 다만 장식만을 반연한다고 하는 것이니, 깨달음과 미혹이 통함과 국집됨이 있으므로, 논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며,  

무아와 자아의 경계가 두루함(무아)과 두루하지 못함(자아)이 있기 때문이다.

 

如何此識緣自所依?如有後識卽緣前意,彼旣極成。此亦何咎?

어떻게  식(識)이 자신의 의지처인 자소의(自所依)를 반연하는 것인가?

다음 찰나의 식인 제6식이 이전 찰나의 의식인 제6식(등무간의근)을 반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거늘,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가?

 

頌言“思量爲性相“者,雙顯此識自性、行相。意以思量爲自性故。卽復用彼爲行相故。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사량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은,  식의 자성인 자증분(自證分)과 행상의 견분(見分)을 이중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말나식(제 7식)은 사량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고,  사량함을 행상(行相, 작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4체성행상문(體性行相門)이다.

 

由斯兼釋所立別名,能審思量名末那故。未轉依位恒審思量所執我相。已轉依位亦審思量無我相故。

이에 의하고 겸하여서 건립된 다른 명칭을 해석하고 능히 살피고 사량하는 것을 말나(末那)라고 이름하나니,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초지(初地) 이전의 지위에서는 항상 살펴서 집착된 자아의 양상을 사량하고,

전의를 이룬 지위에서는 역시 살펴서 무아상(無我相)을 사량하기 때문이다.

 

이하는 5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 관한 해설.

此意相應有幾心所?且與四種煩惱常俱。此中俱言顯相應義。謂從無始至未轉依,此意任運恒緣藏識,與四根本煩惱相應。

 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선  가지의 번뇌와 항상 함께하는 상구(常俱)하나니, 여기에서 ‘함께한다는 구(俱)’라는 말은 상응의 의미를 나타니며, 아득한 무시로부터 아직 전의를 이루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말나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장식을 반연하고  가지의 근본번뇌와 상응한다.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 root kleshas)는 근본혹(根本惑) 또는 본혹(本惑)이라고도 하며, '근본번뇌'를 줄여서 그냥 번뇌(煩惱)라고도 하고,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의 6가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이들 중 무명(無明)은 치(癡)라고도 하고, 견(見)은 악견(惡見) 즉 부정견(不正見)을 뜻하는,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五見)을 말한다.

근본번뇌로부터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를 수번뇌(隨煩惱)라 한다. 예를 들어,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 따르면 질(嫉)은 근본번뇌 가운데 진(瞋: 미워함, 손상시키고 싶어함, 성냄)으로부터 생겨나는 수번뇌이다.근본번뇌는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번뇌(根本煩惱) 또는 수면(隨眠)이라고 하며, 이들 6가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6가지 번뇌(煩惱)를 6근본번뇌(六根本煩惱) 또는 6수면(六隨眠)이라고 한다. 한편 유식유가행파의 소의 논서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66권에서는 탐(貪) · 진(瞋) · 치(癡)를 3근본번뇌 또는 3종근본번뇌(三種根本煩惱)라고 칭하고 있다. ㅡ 위키

 

其四者何?謂我癡、我見,幷我慢、我愛。是名四種。我癡者謂無明。愚於我相迷無我理,故名我癡。

  가지란 무엇인가?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말하는 것으로, 

  가지를 근본번뇌라 이름한다.

‘아치(我痴)’는 무명을 말하며, 자아의 아상(我相) 어리석어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하므로, 아치라 이름하며,

아치(我痴, ātmamoha) 자기 본질의 이치인 무아(無我)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  무명(無明)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와 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이지만, 

 걸음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痴)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하였다.

 

我見者謂我執。於非我法妄計爲我。故名我見。

‘아견(我見)’은 아집을 말하며, 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서 망령되게 계탁하여 자아로 삼는 것이므로,  따라서 아견이라 이름하며,

아견(我見, ātmadi) 자아(ātman)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으로서,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di, 유신견有身見)이라고도 한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ㆍ아소(我所) 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我慢者謂倨傲。恃所執我令心高擧。故名我慢

‘아만(我慢)’은 거만함을 말하며, 집착된 자아를 믿어서 심왕을 높이 올리는 것이므로, 따라서 아만이라 이름하며,

아만(我慢, ātmamāna) 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소의(所依, 의지처)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고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ㆍ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뜻하였으나,

유가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我愛者謂我貪。於所執我深生耽著。故名我愛。

‘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을 말하며, 집착된 자아에 대해서 깊이 탐착(耽着)을 일으키므로 따라서 아애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애(我愛, ātmasneha)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고, 또한 죽음의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幷表慢愛有見慢俱,遮餘部執無相應義。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아울러의 병(幷)’이라고 말한 것은, 아만(我慢)과 아애(我愛)가 아견(我見)ㆍ아만(我慢)과 함께하는 일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다른 부파, 즉 설일체유부가 상응하는 뜻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此四常起擾濁內心,令外轉識恒成雜染。有情由此生死輪迴不能出離。故名煩惱彼。

아치(我痴)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아만→아애의 순서로, 이 네 가지가 항상 일어나서, 

안으로는 심왕(제7식과 제8식)을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하며, 밖으로는 전식(6식)을 항상 잡염되게 하나니, 

유정이 이러함으로 인해서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날 수 없으므로, 번뇌라 이름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8

 

故'瑜伽'言若此六識爲彼六識等無閒緣,卽施設此名爲意根。若五識前後定唯有意識,彼論應言。若此一識爲彼六識等無閒緣。或彼應言若此六識,爲彼一識等無閒緣。旣不如是。故知五識有相續義。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 52권에서, 만약 이 6식을 그 6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면, 곧 이를 시설해서 의근(意根)으로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5식의 전후 찰나에는 오직 의식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논서에서는 곧 만약 이 일식(一識, 의식)을 그 6식의 등무간연으로 한다거나, 혹은 거기에서 만약 이 6식을 그 일식(一識, 의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고 말하였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와 같지 않으니, 그러므로 5식은 상속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五識起時必有意識,能引後念意識令起。何假五識爲開導依?無心睡眠、悶絕等位,意識斷已。後復起時藏識、末那,旣恒相續,亦應與彼爲開導依。若彼用前自類開導,五識自類何不許然?此旣不然彼云何爾?

5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의식(意識)이 있어서, 능히 다음 찰나의 의식(意識)을 이끌어 일어나게 하나니, 어째서 5식을 의뢰해서 개도의(開導依)로 삼는 것인가? 

무심위의 수면ㆍ기절 등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단절되며, 이후에 다시 일어날 때에는 장식과 말나식이 이미 항상 상속함으로써, 역시 그 제6식의 개도의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를 사용해서 열어서 인도하는 개도(開導)한다고 한다면, 오식의 자류(自類)는 어째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 5식이 이미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그 제 6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7식과 8식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서 극히 친밀하여 불가분(不可分)하다. 의장(依仗)의 입장에서 말하면 말나식은 능의(能依)가 되고 아뢰야식은 소의(所依)가 된다. 8개식(八個識)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은 모두 소의(所依, 의지처)가 있으니 소의(所依)에는 3종(三種)이 있다. 
① 종자의(種子依), 인연의(因緣依)라고도 하며, 제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지해야 생기(生起)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밖에 환경조건을 연(緣)이라 하여서 이를 종자의(種子依)라 한다.   
② 증상의(增上依), 구유의(俱有依)라고도 하며,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③ 무등간연의(無等間緣依), 개도의(開導依)라고도 하며,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같아서 등이라 하고 상속(相續)하여 부단(不斷)하므로 무간이라 한다. 이는 전념이 후념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됨을 말한 것으로 생각이란 전념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곧 지난 과거의 관념에 의해 생기(生起)함을 뜻한다. 만약에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틈이 생긴다면 생각이 재생(再生)할 수 없고 전현(轉現)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개도(開導)란 전념이 후념을 개도한다는 뜻이니 과거의 잘못을 귀감삼아서 미래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ㅡ 월제

 

平等性智相應末那初起,必由第六意識。亦應用彼爲開導依。圓鏡智俱第八淨識,初必六、七方便引生。又異熟心,依染污意。或依悲願相應善心。旣爾必應許第八識,亦以六、七、爲開導依。由此彼言都未究理。

평등성지(平等性智)와 상응하는 제7식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제6의식에 의지하며, 역시 그 제 6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아야 하며,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함께하는 제8청정식은 처음에는 반드시 제6식과 제7식의 방편에 이끌려 생겨나며,

또한 이숙심은 염오의(染汚意)에 의지한다고 '섭대승론석' 제3권에서 말하며,  

또는 비원(悲願)과 상응하는 선심(善心, 착한 심왕)에 의지한다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5권에서 말하나니, 

그러하다면 반드시 제8식은 역시 제6식과 제7식으로 개도의로 삼는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의 주장은 모두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모든 것을 알게 됢으로써 자타(自他)가 평등하며 둘이 아닌 불이(不二)라는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로서, 이 지혜에서 발현되는 마음은 평등(平等)과 불이(不二)의 앎에서 조건 없이 일어나는 대자비심(大慈悲心), 즉 무연대비(無緣大悲: 인연이 없어도 자비를 베풀음, 즉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으로서의 자비심), 즉 모든 유정의 성불을 염원하고 실천하는 모든 부처와 여래의 대자비(大慈悲)와 대비원(大悲願)의 마음이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일체종지(一切種智) 즉 우주의 모든 것을 아는 불지(佛智) 즉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한다. -위키


應說五識前六識內隨,用何識爲開導依。第六意識用前自類,或第七、八爲開導依。第七末那用前自類,或第六識爲開導依。阿陁那識用前自類,及第六、七,爲開導依。皆不違理。由前說故。

5식은 이전 찰나의 6식 속에서 수순하여 어떤 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제 6의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나 혹은 제7식과 제8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으며,

제 7말나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나 혹은 제6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으며,

아타나식(무구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와 제6식과 제7식을 개도의로 삼는 것이라 하는 것은 모두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으니, 앞에서 말한 것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아타나식(阿陀那識, ādāna-vijñāna)은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발음하기도 하고 타나식(陀那識)이라고도 하며, 집지식(執持識)이라고 한다.
집지(執持)는 산스크리트어 아다나(ādāna)의 번역어이며, 집지(執持)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붙잡아 유지한다'이며, 아타나식 또는 집지식은 제8식 즉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으로, 유루 · 무루의 모든 종자와 신체인 색근(色根)을 유지해서 무너지지 않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아타나식이라는 명칭은 뢰야3위 가운데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에 관련하여 사용되며, 이 때의 아타나(阿陀那) 즉 집지(執持)는 오로지 순(純)무루의 종자만을 상속 · 유지한다는 뜻이며, 오직 불과(佛果) 즉 여래지(如來地)인 부처의 경지에서만 존재하며, 이러한 무루 · 청정의 뜻에서는 아타나식은 제8식의 다른 명칭인 무구식(無垢識)과 동의어이다.
한편, 구역가(舊譯家)의 입장은 위와 같은 법상종 등의 신역가(新譯家)와 달리, 아타나를 집아(執我: '나'라고 집착한다)의 뜻으로 해석해서 아타나식을 제7말나식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한다.- 위키

 

有義。此說亦不應理。開導依者謂有緣法爲主,能作等無閒緣。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주장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개도의(開導依)는 인식대상, 즉 소연(所緣)을 갖는 유연법(有緣法), 즉 능연(能緣)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개도의(開導依)가 되어서 심(尋) 심소를 인생(引生)할 수 없다는, 곧 색법ㆍ불상응행법ㆍ무위법은 개도의가 될 수 없음을 말하며, 

소연을 갖는 유연법(有緣法)이 주(主)가 되어서 자재하는 힘이 있어야 능히 심(尋) 심소를 인생(引生)하는 등무간연(개도의)이 되는 것을 말한다.

곧 이것은 ()심소법은 개도의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종류의 식, 타인의 식, 후시(後時)의 심왕을 전시(前時)의 심왕에 배대한 것으로, 구시(俱時)의 심(尋)심소라는 주장을 논파한 것이다.

 

此於後生心、心所法,開避引導名開導依。此但屬心非心所等。

개도의(開導依)는 소연을 갖는 유연법(有緣法)ㆍ주체가 되는 위주(爲主)ㆍ등무간연의 세 가지 뜻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이 후에 생겨나는 심왕과 심소법에 대해서 열어 피하하는 개피(開避)하고 인도(引導)하므로 개도의라 이름하며,

이것은 다만 심왕에만 속하고 심소(마음작용) 등이 아닌 것이다.


若此與彼無俱起義,說此於彼有開導力。一身八識旣容俱起,如何異類爲開導依?

만약 이 전념(前念)의 심왕(마음)이 그 후념(後念)의 심왕ㆍ심소(마음작용)와 함께 일어나는 뜻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그것에 대해서 열고 인도하는 힘이 있다고 말해야 것이니,  몸에 8식이 함께 일어난다고 이미 허용하였거늘, 어찌 다른 부류의 8식을 개도의로 삼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한 주장을 논파한 것으로, 다른 종류의 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 없다면, 다른 종류의 식이 개도의(開導依) 뜻이 있게 되는 것이며,

다른 종류의 식이 함께 일어난다면, 다른 종류의 식에 개도의의 뜻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따라서   건립될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若許爲依,應不俱起。便同異部心不竝生。

만약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개도의로 삼는다고 인정한다면, 8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에서 심왕(마음)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며, 

 

又一身中,諸識俱起,多少不定,若容互作等無閒緣,色等應爾。便違聖說,等無閒緣唯心、心所。

또한 일신(一身)에서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어느 정도 일정하지 않으므로,

만약 서로 등무간연이 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색법 등도 그러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유가사지론' 제38권의 성교(聖敎)에서 등무간연은 오직 심왕과 심소뿐이라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然'攝大乘'說色亦容有等無閒緣者,是縱奪言。謂假縱小乘色心,前後有等無閒緣,奪因緣故。不爾,等言應成無用。

그런데 '섭대승론'에서 색법에도 역시 등무간연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 것은, 수순하고 부정하는 종탈(縱奪)의 말이니, 소승에서 신체와 마음의 색심(色心)이 전후하여 등무간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가정적으로 좇아서 인연을 부정한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등무간연'의 등(等)이라는 말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若謂等言,非遮多少,但表同類,便違汝執異類識作等無閒緣。是故八識,各唯自類爲開導依,深契教理。自類必無俱起義故。心所此依應隨識說

만약 '등(等)'이라는 말이 다소(多少)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다만 같은 종류임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그대들이 다른 종류의 식이 등무간연이 된다고 국집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8식은 각자 오직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로써 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성교(聖敎)와 바른 논리에 깊이 계합하나니,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니,  

심소(마음작용)의  의지처는 식을 따라 말해야 하는 것이다.


雖心、心所異類竝生,而互相應。和合似一定俱生滅。事業必同。一開導時餘亦開導。故展轉作等無閒緣。諸識不然。不應爲例。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는 다른 종류로서 나란히 일어나기는 하지만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화합해서 하나가 된 것과 비슷하며, 반드시 함께 생멸하는 것이나, 하는 일이 반드시 같은 것이다. 

하나(심왕, 마음)가 열고 인도할 때에는, 다른 것(심소, 마음작용)도 역시 열고 인도하므로, 따라서 전전하여 등무간연이 되나, 모든 식(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 예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然諸心所非開導依。於所引生無主義故。若心、心所等無閒緣各唯自類,第七、八識初轉依時,相應信等此緣便闕。則違聖,說諸心、心所皆四緣生。

그런데 모든 심소(마음작용)는 개도의가 아니니, 이끌려 생겨나는 인생(引生)한 것에 대해서 주체의 뜻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 등무간연은 각자 오직 자기 부류뿐이라고 말한다면,

제7식과 제8식이 처음 전의(轉依)할 때에 상응하는 신(信)심소 등에는 이 연(緣)이 없게 되며,

만약 그러하다  성교(聖敎)에서 모든 심왕과 심소는  가지의 사연(四緣)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씀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無心睡眠、悶絕等位,意識雖斷,而後起時,彼開導依卽前自類。閒斷五識應知亦然。無自類心於中爲隔,名無閒故。彼先滅時,已於今識爲開導故。何煩異類爲開導依?

무심위의 수면과 기절 등의 상태에서 의식은 단절되긴 하지만, 이후에 일어날  그것의 개도의는  이전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이며, 단절됨이 있는 5식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의 심왕(마음)에 중간의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이전에 멸할 때에는 이미 지금의 식에 대해서 개도(開導)가 되었기 때문이니,

어찌 번거롭게 다른 종류로써 개도의로 삼겠는가?


然聖教中,說前六識互相引起,或第七、八依六、七生,皆依殊勝增上緣說,非等無閒。故不相違。

그런데 성스러운 가르침인 성교(聖敎)에서 6식이 서로 이끌어 내며, 혹은 제7식과 제8식은 제6식과 제7식에 의지해서 생겨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수승한 증상연에 의지해서 말한 것일 뿐, 등무간연이 아니므로 따라서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瑜伽論'說若此識無閒諸識決定生,說此爲彼等無閒緣。又此六識爲彼六識等無閒緣,卽施設此名意根者,言摠意別亦不相違。故自類依深契教理。

'유가사지론' 제 85권에서 말하기를, 만약8식의 다음 찰나에 모든 식이 결정적으로 생겨난다면, 이것을 그 제 8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또한  6식을  6식의 등무간연으로 삼으니, 곧 이것을 곧 시설해서 의근(意根)이라고 이름하는 것에서, 의근(意根)이라는 그 말(言)은 총체적이나, 뜻(意)은 개별적이므로 역시 위배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로써 의지처(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교(聖敎)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깊이 계합하는 것이다.


傍論已了應辯正論。此能變識雖具三所依,而依彼轉言,但顯前二。爲顯此識依、緣同故。又前二依有勝用故。或開導依易了知故。

▷정의한다; 기타의 방론(傍論)은 이미 요별하였고, 마땅히 정론(正論)을 판별하리라. 

 능변식(能變識)에 비록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 세 가지 의지처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는  “제8식에 의지해서 유전한다”고 한 것 다만 앞의 인연과 증상연을 나타내는 것이며,

능변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같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앞의  가지 의지처는 수승한 작용이 있기 때문이며, 혹은 개도의는 알기 쉽기 때문인 것이다.

 

識所變相雖無量種,而能變識類別唯三:一謂異熟,卽第八識,多異熟性故;二謂思量,卽第七識,恒審思量故;三謂了境,卽前六識,了境相麤故。及言顯六合爲一種。此三皆名能變識者。

‘식이 전변한 것의 식소변(識所變,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의 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식(能變識)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으로, 곧 제8식이며, 대부분 이숙성(異熟性)이기 때문이며,

(유식삼십송의 제1ㆍ2 게송 중 앞의 본 논서 제1권에서 말한 “이 능변식……”의 세 구를 설명한다)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며,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식(能變識)이라 이름한다. 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 권 4

 

능변(能變, pariṇāma)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변화시킬 수 있음'이며, 파리나마는 다음의 뜻을 갖는다.
변화(change), 변경(alteration), 변형(transformation), 발달(development), 진화(evolution)
익음(ripeness), 성숙(maturity), 음식의 변질(alteration of food), 소화(digestion)
시듦(withering), (색이) 점점 희미해짐 또는 바램(fading), (시간의) 경과(lapse [of time])
(나이가 들어) 쇠퇴함(decline [of age]), 늙어감(growing old), 결과(result, consequence), 결말(issue, end) - 위키


如是已說此識所依,所緣云何?謂卽緣彼。彼謂卽前此所依識。聖說此識緣藏識故。

이상과 같이  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말하였는으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그것을 반연한다”고 말한 것에서 ‘그것’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제 7식의 의지처인 제 8식이며, 이 식은 장식을 반연한다고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와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의 성교의 가르침인에서 말한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7

 

有義。前說皆不應理。未了所依與依別故。依謂一切有生滅法,仗因託緣而得生住。諸所仗託皆說爲依,如王與臣互相依等。若法決定,有境爲主,令心、心所取自所緣乃是所依。卽內六處。餘非有境定爲主故。此但如王非如臣等。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의지하는 의(依)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의(依)란, 모든 생멸하는 법이 원인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고 머무는 것을 말하며,

의지하고 의탁하는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의(依)라고 말하는 것이다. 

왕과 신하가 서로 의지하는  등과 같이, 어떤 법이 결정적이고, 대상이 있으며,  주체가 되고,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자신의 인식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의(所依, 의지처)이니,

 내부의 여섯 인식기관인 내육근(內六根)으로, 다른 것은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니며,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의(所依, 의지처)는 다만 왕과 같으며, 신하 등과 같은 것은 아니다.


故諸聖教唯心、心所名有所依。非色等法無所緣故。但說心所心爲所依,不說心所爲心所依。彼非主故。

그러므로 여러 성교(聖敎)인,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심왕과 심소만을 의지처가 있는 유소의(有所依)라고 이름하였으니, 색법 등이 아니고 인식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심소(마음작용)는 심왕(마음)을 소의(所依, 의지처) 삼는다고만 말하고, 심소를 심왕의 소의(所依, 의지처) 삼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 심소(마음작용)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心, citta)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6식(六識)을 말하며,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 따르면 6식에 제7식의 말나식과 제8식의 아뢰야식을 더한 8식(八識)을 말한다.
마음을 주체(主體) 또는 주관(主觀)의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도 하며, 집기(集起, citta)의 뜻에서 심법(心法)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음을 장소 또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지(地, bhūmi)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란 온갖 심소법(心所法)들, 즉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의 온갖 마음작용들이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공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법체계에 따르면, 이러한 주체 또는 공간으로서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도 유위법(有爲法)의 일종이므로 온갖 마음작용(심소법)들과 마찬가지로, 엄정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 하에,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그러한 법(法, 구체적 존재)이다.

 

마음작용의 다른 이름인 심소법(心所法)과 심소(心所)는 모두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소유한 법'이라는 뜻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준말이다. 여기서 '소유(所有)'는 '가지고 있다'는 의미나 '일부분'이라는 의미보다는, 심왕(心王, 즉 마음, 즉 6식 또는 8식, 즉 심법)이 거느리는 권속(眷屬) 또는 신하(臣下)의 뜻이 강하다.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임금(심왕)이라 하고 마음작용(심소, 심소법)을 권속이나 신하(심소)라고 칭하는 명명법에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별개의 실체, 즉 별개의 법(法)으로 여기며 또한 이들 간의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평등한 관계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반면, 모든 것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에 있었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당연히 마음작용은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지어낸 것이며 마음에 종속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마음작용은 현상계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예를 들어 현상계에서 지각작용(受)과 표상작용(想)과 의지작용(思, 즉 行)이 다르고 또한 믿는 마음작용(信)과 믿지 않는 마음작용(不信)이 다르듯이, 현상계의 여러 마음작용들은 서로 확연히 차이가 있으며 또한 이들 마음작용들은 마음과도 그 성질이 확연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 여러 마음작용들을 별도의 실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작용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인 '마음과 마음작용의 상응(相應)'을 마치 별도의 실체인 것처럼 가설(假設: 임시로 설치함)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교의를 설명함에 있어 편리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 나오는 용어의 대다수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일체 존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5위 100법의 법체계를 성립시켰다.
그래서 마음작용(심소법)은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법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 위키


然有處說依爲所依,或所依爲依,皆隨宜假說。由此五識俱有所依,定有四種:謂五色根、六、七、八識。隨闕一種必不轉故。同境、分別、染淨、根本所依別故。

그런데 '유가사지론' 제1권에서는 의지하는 의(依)를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는다고 말하고, 혹은 소의(所依, 의지처) 의지하는 것으로 삼는다고  것은 모두 편의에 따라 가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에 의거해서 5식의 구유소의(俱有所依)에는 반드시  가지가 있으니, 오색근(五色根)ㆍ제6식ㆍ제7식ㆍ제8식을 말하며, 그것들에 수순해서 하나라도 없을 때에는 절대 유전(流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인 오식(五識), 분별(제6식), 잡염ㆍ청정(제7식), 근본(제8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다르기 때문이다.


聖教唯說依五根者,以不共故,又必同境近相順故。

성교(聖敎)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오직 오근(五根) 의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함께하지 않는 불공(不共)이기 때문이며, 또한 반드시 같은 대상인 동경(同境)이고, 가까우며 서로 수순하는 근상순(近相順)이기 때문이다.


第六意識俱有所依,唯有二種:謂七八識。隨闕一種必不轉故。雖五識俱取境明了,而不定有故非所依。

제6의식의 구유소의(俱有所依)에는 오직  가지가 있으니, 제7식(잡염ㆍ청정의 소의所依)과 제8식(근본의)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들에 수순해서 하나라도 없을 때에는 절대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며,

5식과 함께하고 대상을 취하는 것이 명료하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독두의식(獨頭意識)이므로 소의(所依, 의지처) 아닌 것이다.

 

소의(所依, āśraya)는 의존처(依存處) · 의지처(依止處) · 의지(依止) · 근거(根據) 또는 발동근거(發動根據)를 뜻하며, 능의(能依: 의지하는 자)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나무와 풀은 땅에 의존하여, 의지하여, 또는 근거하여 자라는데, 이 때 나무와 풀은 능의에 해당하고 땅은 소의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신(信, 믿음, 청정)은 별경심소에 속한 욕(欲: 희망, 욕구)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작용(業)을 한다.

다른 예로는, 무탐선근(無貪善根) 또는 무탐(無貪)은 '악행을 일으키지 않는 일(惡行不起)'이 일어나는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작용(業)을 한다.- 위키


聖教唯說依第七者,染淨依故。同轉識攝近相順故。

성교(聖敎)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에서 오직 제7식에 의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제7식이 잡염ㆍ청정의 소의(所依, 의지처)이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전식에 포함되고 가까우며 서로 수순하는 근상순(近相順)이기 때문이다.


第七意識俱有所依,但有一種謂第八識。藏識若無,定不轉故。如伽他說:

제7식의 구유소의는 다만  가지이니, 제8식을 말한다. 만약 장식이 없을 때에는 제7식이 반드시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능가경' 제9권의 게송에서 아래처럼 말씀한 바와 같으니; 


阿賴耶爲依 故有末那轉, 依止心及意 餘轉識得生。

아뢰야식을 의지하여서 말나식이 전전하며, 

심(心, 제8식)과 의(意, 제7식)에 의지하여서 다른 전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阿賴耶識俱有所依亦但一種,謂第七識。彼識若無,定不轉故。論說藏識恒與末那俱時轉故。又說藏識恒依染污,此卽末那。

아뢰야식의 구유소의도 다만  가지이니, 제7식을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 7식이 없다면 제8식이 절대 유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장식은 항상 말나식과 동시에 전전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3권에서는 장식은 항상 염오(染汚)에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말나식인 것이다.


而說,三位無末那者,依有覆說。如言四位,無阿賴耶非無第八。此亦應爾。雖有色界亦依五根,而不定有非所依攝。

그런데 '삼십송'의 제 7게송에서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삼위(三位)에 말나식이 없다”고 말한 것은 유부무기(有覆無記, nivrtāvyākrta)에 의해서 말한 것이며,

성문ㆍ독각ㆍ불퇴전보살ㆍ여래의 네 가지 지위에는 아뢰야식이 없다고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 말할지라도, 제8식이 없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색계에서는 역시 오근(五根)에도 의지하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지처인 소의(所依)에 포함되지 않는다.

 

유부무기(有覆無記, nivrtāvyākrta)는 '가림의 부(覆) 또는 장애의 장(障)이 있는 무기(無記)'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기를 말하며, 줄여서, 유부(有覆)라고도 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일단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이숙과(異熟果: 현생에서 타고나는 몸과 마음)를 낳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聖道: 출세도, 8정도, 도제, 또는 무루지에 의한 정도)를 가리고 덮은 부(
覆)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뜻에서 유부무기를 부정(不淨: 맑고 명료하지 못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부무기는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맑고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무기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번뇌들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2가지 염오견과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 즉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들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은 번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유부(有覆)이고 선정의 힘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무기(無記)이다.


識種不能現取自境,可有依義而無所依。心所所依隨識應說,復各加自相應之心。若作是說妙符理教。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은 자신의 현재 대상을 취할  없으니, 의지하는 의(依) 뜻은 있을  있지만 소의(所依, 의지처) 아니며,

심소(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의지처) 식에 따라서 말해야 하며, 다시 각각 상응하는 심왕을 더하는 것이니, 이렇게 말하면 바른 논리와 성교에 승묘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後開導依,有義五識自、他前後不相續故,必第六識所引生故,唯第六識爲開導依。第六意識自相續故,亦由五識所引生故,以前六識爲開導依。第七、八識自相續故,不假他識所引生故,但以自類爲開導依。

다음 개도의(開導依, 등무간연의)에 대해서 난타 등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5식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전후 찰나에서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고, 반드시 제6식에 이끌려 생겨나기 때문에 오직 제6식만을 개도의로 삼으니,

제6의식은 스스로 상속하기 때문이고 또한 5식에 이끌려 생겨남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전 찰나의 6식을 개도의로 삼으니,

제7식과 제8식은 스스로 상속하기 때문이고, 다른 식에 이끌려 생겨난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자기 부류를 개도의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有義。前說未爲究理。且前五識未自在位遇非勝境,可如所說。

若自在位,如諸佛等於境自在,諸根互用任運決定,不假尋求。彼五識身寧不相續?

안혜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아직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한 것이나, 5식이 자재하지 못한 지위  뛰어나지 않은 대상을 만나게 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고   있으니, 

만약 자재한 지위라면, 모든 부처님 등의 8지 이상은 대상에 대해서 자재하고 제근(諸根) 서로 작용하며, 스스로 일어나고 결정적이며, 심(尋, 찾고 탐구함)ㆍ사(伺, 정밀하게 살핌) 심소를 의지하지 않으니, 그 5식이 어째서 상속하지 않는 것인가?

 

마음작용간의 차이점으로, 사(伺)는 정밀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으로 사찰(伺察, 정밀하게 살펴봄)이라 하고,

심(尋)은 거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이으로 거친 살펴봄의 심구(尋求: 찾고 탐구함)라 한다.


等流五識旣爲決定、染淨、作意勢力引生,專注所緣未能捨頃,如何不許多念相續?

등류심(等流心)의 5식이 이미 제 6의식의 결정심(決定心)ㆍ염정심(染淨心)ㆍ작의(作意)의 세력에 의해 이끌려 생겨나서, 대상에 집중하여 능히 버릴  없는 순간에, 어째서 많은 생각이 상속한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5심(五心)은 객관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 마음으로서, 처음 대상에 작용하는 찰나의 마음의 솔이심(率爾心)ㆍ대상이 무엇인지 알려고 추구하는 마음의 심구심(尋求心)ㆍ대상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하는 마음의 결정심(決定心)ㆍ대상을 결정한 후에 선심(善心)이나 악심(惡心) 등을 일으키는 염정심(染淨心)ㆍ염심이나 청정심이 찰나마다 상속해서 같은 마음이 계속되는 등류심(等流心)이다.  


故'瑜伽'說:“決定心後,方有染淨,此後乃有等流眼識,善、不善轉。而彼不由自分別力。乃至此意不趣餘境,經爾所時眼、意二識,或善或染相續而轉。如眼識生,乃至身識,應知亦爾。”彼意定顯經爾所時,眼、意二識俱相續轉。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 1권에서 말하기를 “결정심 이후에 비로소 염정심이 있고, 그 다음에 등류심의 안식이 있어서 선과 불선으로서 전전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분별력에는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의(意)가 다른 대상에 나아가지 않을 때에는 그곳의 시간을 지나서 안식과 의식이 혹은 잡염심이나 혹은 청정심으로서 상속하여 전전하며,

안식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신식(身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의 의미는 반드시 그곳의 시간을 지나서 안식과 의식이 함께 상속하여 전전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旣眼識時,非無意識。故非二識互相續生。若增盛境相續現前,逼奪身心,不能暫捨時五識身理必相續。如熱地獄、戲忘天等。

이미 안식이 작용할 때에도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니, 따라서 두 식이 서로 상속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약 증성(增盛)한 대상이 상속하고 현전하여서 몸과 마음을 바짝 조이는 핍탈신심(逼奪身心)하여서 잠시도 버릴 수 없을 때의 5식은 당연히 반드시 상속하는 것이니, 마치 뜨거운 열 지옥과 육욕천(六欲天)에서 위의 4천(天)인 희망천(戱忘天) 등과 같은 것이다.

논주가 해명발언을 논파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6

 

眼、耳、身根卽三識種,二界、五地爲難亦然。又五識種旣通善惡,應五色根非唯無記。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신근(身根)은   가지 식(識)인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종자라고 말하는 것은  가지 지위인 이지(二地, 계 界)와 오지(五地) 있어서 비판이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신근(身根) 각각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가지 () 욕계와 색계 초선천(初禪天) 2()2()에만 한정되며,  원인인  가지 () 2계ㆍ2지에 한정되어야 한다. 

만약   가지 근이 색계의 4지에 있다고 말한다면,  결과인  가지 식도 역시 5(地, 욕계지 색계의 4) 항상 있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5식의 종자인 오근(五根)은 이미 선과 악에도 통하고 다섯 가지의색근(五色根)은 오직 무기(無記)만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5() 무부무기인 것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그것이 5식(五識)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5근도 3() 통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又五識種無執受攝,五根亦應非有執受。又五色根若五識種,應意識種卽是末那。彼以五根爲同法故。

또한 5식(五識)의 종자를 집수가 없는 무집수(無執受)에 포함시키면, 오근(五根) 역시 집수가 있는 유집수(有執受)가 아니어야 하며,

또한 오색근(五色根) 만약 5식(五識)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의식의 종자는  말나식이어야 할 것이니,

'섭대승론석' 제1권에서 다섯 감각기관으로써 같은법(同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집수(有執受, upātta)는 사람(유정)의 몸 중에서 감각이 있는 부분을 말하고, 엄밀하게는 심법(心法: 마음)과 심소법(心所法: 마음 작용)이 함께 집지(執持) · 포섭(包攝)하여 의처(依處), 즉 소의(所依: 도구, 감각 기관)나 경계(境界: 대상)로 삼는 색(色, 물질)을 가리키며, 달리 말하면, 현재 시점에서 마음의 지각작용, 즉 5온 중 수온(受蘊: 지각작용)의 소의(所依: 도구, 감각 기관)나 경계(境界: 대상)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무집수(無執受, anupātta)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몸 중에서 감각이 없는 부분을 말한다. 한편, 호흡(숨, 즉, 들숨과 날숨)도 몸에 속한 것으로 보는데, 숨은 무집수에 속한다. 숨을 몸에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불교의 4념처 수행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인 지식념 또는 수식관이 법념처가 아닌 신념처에 속하며, 엄밀하게는, 뜻이 없는 색(色, 물질)을 말하며, 현재 시점에서 마음의 지각작용, 즉 수온의 소의나 경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又瑜伽論說眼等識皆具三依。若五色根卽五識種,依但應二。

又諸聖教說眼等根皆通現、種。執唯是種,便與一切聖教相違。

또한 '유가사지론' 제 1 권에서 안식 등은 종자로써 구유근을 삼기 때문에 모두  가지 의지처를 갖춘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오색근(五色根)  5식(五識)의 종자라고 한다면, 의(依, 의지처)는 다만 둘이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여러 성교(聖教)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안근 등은 모두 현행과 종자에 통한다고하였으니,

오직 종자뿐이라고 고집한다면,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인 성교(聖教)에 위배되는 것이다.


有避如前所說過難,朋附彼執、復轉救言,異熟識中,能感五識,增上業種,名五色根。非作因緣、生五識種。妙符二頌,善順瑜伽。彼有虛言,都無實義。應五色根非無記故。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은 과실과 비판의 과난(過難)을 피하면서,  집착된 견해에 무리지어 덧붙여서 다시 부연 주장하기를, 이숙식 중에서 능히 5식(五識)을 초감하는 증상(增上)의 업종자만이 아니라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의 현행업도 취해서 오색근(五色根)이라 이름하고, 인연이 되어서 5식(五識)을 생겨나게 하는 종자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ㅡ '유식이십론'과 '관소연론'의 두 게송에 미묘하게 부합하고 '유가사지론'에  수순한다고 말한다.ㅡ

그러나 그것은 허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으니, 오색근(五色根)은 무기(無記)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又彼應非唯有執受,唯色薀攝,唯內處故。鼻、舌唯應欲界繫故。三根不應五地繫故。感意識業,應末那故。眼等不應通現、種故。又應眼等非色根故。

또한 그것은 오직 유집수(有執受)가 아니어야 하고, 오직 색온에만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니, 오직 내부의 감각기관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며, 

5() 현행업(現行業) 취하는 이상, 색온(色蘊) 행온(行蘊)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비근과 설근은 오직 욕계에 계박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안근ㆍ이근ㆍ신근의 세 가지 감각기관인 삼근(三根)은 다섯 가지 지위인 오지(五地)에 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며,

의식을 초감하는 업은 말나식(제 7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안식 등은 현행과 종자에 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안식 등은 색근(色根)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적으로 타인의 해명발언을 시설하여 논파한 것이다.


又若五識皆業所感,則應一向無記性攝。善等五識旣非業感,應無眼等爲俱有依。故彼所言非爲善救。

또한 만약 5식(五識)이 모두 업(業)에 초감된다고 말한다면,  오로지 무기성(無記性)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선(善) 등의 잡염(雜染)의 5식(五識)은 이미 업에 초감되는 것이 아닌 것일 것이며,

안근 등을 구유의(俱有依)로 함이 없어야 할 것이므로,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훌륭한 해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구유의(俱有依, 증상의增上依),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월제


又諸聖教處處皆說,阿賴耶識變似色根及根依處、器世閒等。如何汝等撥無色根,許眼等識變似色等,不許眼等藏識所變?如斯迷謬深違教理。

또한 성교(聖敎)인, '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뢰야식(제 8식)이 전변하여 승의근(勝義根, 색근)ㆍ근의처(根依處, 부진근)ㆍ기세간(器世閒) 등으로 사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색근이 없다고 부정하고, 안식 등이 색법 등으로 사현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안식 등을 장식(藏識)이 전변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미혹된 오류는 성교(聖敎)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다.

 

*사현(似現, pratibhāsa)의 현현(顯現ㆍ변사 變似)라고도 하며, 식이 인식대상을 닮은 형상을 띠는 작용을 말한다. pratibhāsa는 원래 물에 비친 달 등의 영상을 의미하는 용어였는데, 유식교학에서는 마음속에 나타난 사물의 영상 또는 주체 쪽의 인식작용을 의미하게 되었다.


然伽他說,種子功能名五根者,爲破離識實有色根。於識所變似眼根等,以有發生五識用故,假名種子及色功能,非謂色根卽識、業種。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유식이십론'의 게송에서의 종자와 '관소연론'의 게송에서의 공능(功能) 5근(五根)으로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식(識)을 떠나서 참으로 색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다. 

식(識, 근본식)이 전변된 사현(似現)의 안근 등에 대해서 5식(五識)을 발생하는 작용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적으로 종자와 색법의 공능으로 이름한 것일 뿐, 색근이  식(識)과 업(業)의 종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又緣五境明了意識,應以五識爲俱有依。以彼必與五識俱故。若彼不依眼等識者,彼應不與五識爲依。彼此相依勢力等故。

또한 다섯 대상인 오경(五境)을 반연하는 명료한 의식, 즉 5식과 인식대상을 같이하는 의식의 오동연의신(五同緣意識)은 5식(五識)으로써 구유의(俱有依)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그 제6식은 반드시 5식(五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안식 등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5식(五識)의 의지처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제 6식과 이 5식(五識)이 서로 의지한다는 것은 세력이 같기 때문이다.


又第七識雖無閒斷,而見道等旣有轉易,應如六識有俱有依。不爾彼應非轉識攝。便違聖教轉識有七。故應許彼有俱有依。此卽現行第八識攝。

또한 제 7식(말나식)은 단절됨이 없지만, 견도 등에서 변화하는 일이 있으므로 6식과 같이 구유의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전식에 포함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성교(聖敎)인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전식에 일곱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제7식(말나식)도 구유의(俱有依)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은  현행의 제8식에 포함되는 것이다.


如󰡔瑜伽󰡕說:“有藏識故,得有末那。末那爲依,意識得轉。”彼論意言,現行藏識爲依止故,得有末那,非由彼種。不爾,應說有藏識故,意識得轉。由此彼說理、教相違。

'유가사지론' 제 51권에서 말하기를 “장식(藏識, 아뢰야식, 제8식)이 있으므로 말나식(제 7식)이 있을  있고, 말나식을 의지처로 하여 의식이 전변할  있다”고 하였다. 

 논서에서 의미하는 것은 현행의 장식을 의지처로 함으로써 말나식이 있을  있는 것이지, 제 8식의 종자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장식이 있음으로써 의식이 전변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근거한다면, 그 주장은 바른 논리와 성교(聖敎)에 위배되는 것이다.

 

마음이 찰나 찰나로 상속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심상속이라고 한다. 심상속에 근거하여 마음을 전찰나의 마음(前刹那의 心)과 후찰나의 마음(後刹那의 心)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 명명한다. 이 쌍을 다른 말로는 전념(前念)과 후념(後念), 또는 전식(前識)과 후식(後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나눌 때, 마음(6식 혹은 8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이란 곧 전찰나의 마음, 전념(前念), 혹은 전식(前識)을 말한다. -위키

 

是故應言,前五轉識一一定有二俱有依,謂五色根同時意識。第六轉識決定恒有一俱有依,謂第七識。若與五識俱時起者,亦以五識爲俱有依。第七轉識決定唯有一俱有依,謂第八識。唯第八識恒無轉變,自能立故無俱有依。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다섯 가지 전식인 전오식(五轉識)은 하나하나가 반드시  가지 구유의(俱有依)를 가지니, 오색근(五色根)  그것과 시간을 같이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제6전식(第六轉識)에는 반드시 항상 하나의 구유의가 있으니, 제7식을 말하며, 만약 5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역시 5식으로써 구유의로 삼는 것이다. 

제7전식(第七轉識)에는 반드시 오직 하나의 구유의가 있으니, 제 8식을 말하며, 오직 제 8식만은 항상 전변함이 없이 스스로 능히 건립되므로 구유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안혜의 정의를 서술하였다.

 

8식 중에서의 앞의 5가지 식, 즉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뒤의 3가지 식, 즉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

전5식(前五識)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그 인식대상들을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이라 하며 이들을 5경(五境)이라 하고,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제6의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며, 다시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
8식 중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제외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을 전6식(前六識)이라고도 한다.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 등 대승불교에서는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을 7식(七識)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른다. 
한편, 미륵 → 무착 → 세친 → 덕혜(德慧, Gunamati: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 안혜(安慧, Sthiramati: 475~555 또는 510~570) → 진제(眞諦: 499~569)의 섭론종으로 이어진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13]의 논서들에서 전식(轉識)은 제7 말나식을 제외한 전6식(前六識)만을 의미한다.- 위키

 

有義。此說猶未盡理。第八類餘旣同識性,如何不許有俱有依。第七八識旣恒俱轉,更互爲依斯有何失?

정월(淨月, Śudhacandra)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상과 같이 말한 것은 아직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하며, 제 8식도 제 7식과 비슷한, 마찬가지의 식성(識性)인데, 어찌 구유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제7식과 제8식은 항상 함께 전전하므로, 이에 서로 의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 것인가?


許現起識以種爲依,識種亦應許依現識。能熏、異熟爲生長住依。識種離彼,生長住故。

현행식이 종자(인연의)로써 의지처(구유의)로 삼는다고 인정한다면,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도 역시 현행식에 의지한다고 인정해야 하며, 능훈(能熏)과 이숙식은 새로운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본유종자를 증장케 하며, 이숙식을 머물게 하는 의지처가 되나니,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은 그것을 떠나서는 생겨나고 증장하여서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훈(能熏) 7전식은 생장의 의지처인 생장의(生長依) 되는 것으로, 이것은 본유종자를 증장시키고, 신훈종자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숙식은 종자가 머무는 의지처인 주의(住依) 되는 것이.


又異熟識,有色界中能執持身,依色根轉。如契經說,阿賴耶識業風所飄,遍依諸根恒相續轉。

또한 이숙식이 색계 중에서는 능히 몸(身)을 유지한다면, 색근(色根)에 의해서도 전전하는 것이니,

'입능가경(入楞伽經)' 제 9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뢰야식은 업(業)의 바람에 나부껴서 모든 감각기관에 두루 의지하여서 항상 상속하면서 전전한다고  것과 같은 것이다.


'瑜伽'亦說:“眼等六識各別依故,不能執受有色根身。”

'유가사지론' 제 51권에서도 역시 말씀하시기를 “안식  6식은 각각 별도의 의지처가 있기 때문에 몸(身) 집수(執受)할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유가사지론' 51권의 인명작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다.

종(), 6전식은 능히 집수하는집수(能執受)가 아니어야 한다.

인(), 두루하는 의지처인 편의(遍依) 아니기 때문이다.

유(), 번개가 번쩍이는 전광 등과 같은 것이다.

 

若異熟識不遍依止有色諸根,應如六識非能執受。或所立因有不定失。

만약 이숙식이 두루 감각기관(根)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6식과 같이 능히 집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혹은 건립된 이유인 인(因)에 일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의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인명논리에서 부정(不定) 과실이란, 3() 중의 이유인 인(因)이 비유의 유(喩) 중의 동품(同品) 이품(異品) 전부에 두루 통하는 경우를 말한다.


是故藏識若現起者,定有一依謂第七識。在有色界亦依色根。若識種子,定有一依謂異熟識。初熏習位亦依能熏。餘如前說。

그러므로 장식(藏識)이 현행하면 반드시 하나의 의지처가 있으니, 제7식을 말하며, 색계에 있을 때에는 역시 색근에도 의지한다.

만약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의지처가 있으니, 이숙식을 말하며,

처음의 훈습하는 지위인 초훈습위(初熏習位)에서는 역시 능훈에도 의지하며, 다른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정월의 정의를 서술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5

 

諸心、心所皆有所依。然彼所依摠有三種:一因緣依,謂自種子。諸有爲法皆託此依。離自因緣,必不生故。

모든 심왕과 심소를 의지처가 있는 유소의(有所依)라고 말하며,  의지처인 소의(所依) 전체적으로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인연의(因緣依, 종자의 種子依)로써자신의 종자를 말하며모든 유위법은   의지처에 의탁하나니자신의 인연을 떠나서는 절대 생겨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의(所依,āśraya) ‘발생의 의지처’  식이 생기(生起)하는  보조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āśraya ā-√śri(의지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어떤 것이 그것에 의지하는 어떤 사물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ㆍ기체(基體)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비달마사상에서는 6근이 6식을 발생시키는 근거로 생각되어 그것을 소의(所依)라고 하였고또한 신체와 정신은 개체가 존속하는 근거이고 기체(基體)이므로, 5온을 소의로 설명하였다.

유가유식학에서 근원적인 소의는 아뢰야식으로 설명된다.

 

인연의(因緣依)는 종자의(種子依)라고도 하며, 이것은 곧 여러 식의 심품(心品) 각자의 종자를 말한다. 그런데 인연의는 종자생현행ㆍ현행훈종자ㆍ종자생종자에 모두 통하는 데 반하여, 종자의는 현행훈종자에만 통한다.

 

二增上緣依,謂內六處。諸心、心所皆託此依。離俱有根必不轉故。

둘째는 증상연의(增上緣依, 구유의 俱有依)으로, 6(根, 내육처內六處) 말하며, 모든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에 의탁한다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감각기관을 떠나서는 반드시 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증상연의(增上緣依, 구유의 俱有依)는 원래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감각기관인 구유근(俱有根)을 말한다. 증상연의가 곧 감각기관인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증상연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시각 장애ㆍ청각 장애 등 감각기관이 기능을 상실하면 그에 따른 안식(眼識)ㆍ이식(耳識) 등의 식이 또한 작용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三等無閒緣依,謂前滅意。諸心、心所皆託此依。離開導根,必不起故。唯心、心所具三所依,名有所依,非所餘法。

셋째는 등무간연의(等無間緣依, 개도의開導依)으로, 이전 찰나에 멸한 8식(識)에 통하는 개념의 의식을 말하며, 모든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에 의탁하는 것으로, 열고 인도하는 인식기관인 개도근(開導根)을 떠나서는 반드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심왕과 심소만이 인연의(因緣依,종자의 種子依), 증상연의(增上緣依, 구유의 俱有依), 등무간연의(等無間緣依, 개도의開導依)의  가지 의지처를 갖추므로 의지처가 있는 유소의(有所依)라 이름하나, 색법 등은 오직 인연의(因緣依)만이다.

 

初種子依,有作是說。要種滅已現果方。生無種已生 '集論' 說故。種與芽等不俱有故。

처음의 종자의(種子依)에 대한 별도의 다른 견해로서 세 가지 의지처인 소의(所依)에 견해 있으니,

반드시 종자가 멸하고 나서 현재의 결과가 비로소 생겨나는 인과이시설(因果異時說)이며,

먼저 종자의(種子依) 대해서 말하는데, 본문의 내용은 난타(難陀) 최승자(最勝子) 견해로서 인과이시설(因果異時說)이며, 경량부에서도 역시  입장을 취한다.

무학위의 최후 온(蘊)은 종자가 멸한 상태에서 생겨난다고 '대승아비달마집론' 제 2권에서 설하는 것으로,

종자와 아(芽, 싹) 등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집론'의 내용은 무학위의 최후온(最後蘊) 대해서 말한 것으로, 무학위의 최후온은 다음 찰나에 회신멸지(灰身滅智) 있는 지위에 있는 ()으로서, 이것은 이전 찰나의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有義。彼說爲證不成。彼依引生後種說故。種生芽等非勝義故。種滅芽生非極成故。焰、炷同時互爲因故。然種自類因、果不俱。種、現相生決定俱有。

호법의 견해가 있으나, 호법이 말하는 것은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니, 거기에서는 이후의 종자를 이끌어 내는 것에 의지해서 말하기 때문이며,

종자가 아(芽, 싹) 등을 내는 것은 승의(勝義)가 아니기 때문이며,

종자가 아(芽, 싹) 등을 내는 것은 세속의 인과이지, 승의(勝義) 인과가 아니다. 따라서 인명논리에서 능립불성(能立不成) 과실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종자가 멸하여 아(芽, 싹)이 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종자가 멸하여 싹이 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온전하지 않으니, 예를 들어 청련(靑蓮, 연꽃) 뿌리가 싹을  때, 뿌리와 싹은 반드시 함께하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역시 소립불성(所立不成) 과실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불꽃과 심지는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기 때문이나, 종자의 자기 부류의 원인과 결과는 함께하지 않는,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는 인과이시(因果異時)인 것이며,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는 인과동시(因果同時)로써, 종자와 현행이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은 반드시 함께하는 것이다.

 

故瑜伽說,無常法與他性爲因,亦與後念自性爲因。是因緣義。自性言顯種子自類前爲後因。他性言,顯種與現行互爲因義。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 5권에서 말하기를, 무상(無常)한 법이 다른 성품인 타성(他性)의 원인이 되며, 

종자와 현행의 인과동시(因果同時) 가리킨다.

또한 다음 찰나 생각의 자성의 원인이 된다고 하나니,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인과이시(因果異時) 말한다.

이것이 인연의 뜻이다. 

자성(自性)은 종자의 자기 부류(종자생종자)에서 앞의 것이 뒤의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내며,

타성(他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자와 현행이 서로 원인이 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攝大乘論亦作是說:藏識、染法互爲因緣,猶如束蘆俱時而有。又說種子與果必俱,故種子依定非前後。設有處說種果前後,應知皆是隨轉理門。如是八識及諸心所,定各別有種子所依。

세친의 '섭대승론석' 제 2권에서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장식(藏識, 아뢰야식)과 잡염법은 서로 인연이 되나니, 마치 갈대 묶음이 동시에 함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한 '섭대승론석' 제2권에서는, 종자와 결과는 반드시 함께한다고 말하였으니, 따라서 종자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는 반드시 이전 찰나ㆍ이후 찰나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설사 어떤 곳에서 종자ㆍ결과가 이전 찰나ㆍ이후 찰나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근기에 따라 말하는 방편문인 수전이문(隨轉理門)인 것이다. 

이와 같이 8식과 모든 심소는 반드시 각각 별도로 종자의 인연의(因緣依)가 있는 것이다.

 

次俱有依有作是說。眼等五識,意識爲依。此現起時必有彼故。無別眼等爲俱有依。眼等五根卽種子故。二十唯識伽他中言:

다음으로는 구유의(俱有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안식(眼識) 등의 5식은 의식(意識)을 의지처로 하며, 이 5식(五識)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대상을 요별하는 작용을 핵심적인 작용으로 하는, 제 6식(제3능변 第三能變)이 있기 때문이다. 

별도의 안근 등을 구유의로 하는 것은 없으니, 안근 등의 5근(根)은  종자이기 때문이다. 

'유식이십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으니;

 

識從自種生 似境相而轉, 爲成內外處 佛說彼爲十。

식(識)이 자신의 종자로부터 생겨나서, 즉 식(識), 5식(識)이 자신의 종자인 견분(見分)ㆍ상분(相分)으로부터 생겨나서, 

대상의 모습에 비슷하게 전변하나니, 

내부의 인식기관인 내처(內處, 오근 五根, 견분의 종자)과 외부의 대상인 외처(外處, 오경 五境, 상분의 현행)을 이루나니,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 포섭처인 십처(十處)라고 말씀하셨다. (유식이십론 唯識二十論에서)

 

彼頌意說。世尊爲成十二處故,說五識種爲眼等根,五識相分爲色等境。故眼等根卽五識種。觀所緣論亦作是說:

게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으니, 세존께서 12처(處)를 말씀하셨으니 5식의 종자를 안근 등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5식의 상분을 색경(色境) 등으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안근 등은  5식의 종자이니,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識上色功能 名五根應理, 能與境色 無始互爲因。

식(이숙식) 위에 있는 색법의 공능(功能, 종자)을

5근(根)으로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에 맞는 것이니, 

공능(종자)과 대상인 색법은 아득한 옛적부터 서로 원인이 되어 온 것이다. 

 

彼頌意言:異熟識上能生眼等色識種子,名色功能,說爲五根,無別眼等,種與色識常互爲因。能熏與種,遞爲因故。

 게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으니, 이숙식에서 능히 안식(眼識)  대상에 대한 색식(色識, 견분과 상분)을 일으키는 종자를 ‘색법의 공능인 색공능(色功能)’이라 이름하고, ‘5근’이라고도 말하며, 별도의 감각기관은 없는 것이다. 

종자는 색식(色識)과 항상 서로 원인이 되나니,

5(),  5식종자(識種子) 5식현행(識現行) 아득한 옛적부터 종자생현행ㆍ현행훈종자로 서로 인연이 되었다.

능훈(能熏, 견분의 종자 및 상분의 현행)은 종자와 번갈아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第七、八識,無別此依,恒相續轉。自力勝故。第六意識別有此依,要託末那,而得起故。

제7식과 제8식은 별도의  의지처인 소의(所依, 구유의 俱有依)가 없으니, 항상 상속해서 전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이 뛰어나기 때문이나, 

제6의식은 별도로 의지처가 있으니, 반드시 말나식(제 7식)에 의탁해서 일어날  있기 때문이다.

 

有義。彼說理、教相違,若五色根卽五識種,十八界種應成雜亂。然十八界各別有種,諸聖教中處處說故。

안혜(安慧) 등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나, 그 주장은 바른 논리와 성교(聖敎)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5근(根)이 곧 5식의 종자라 한다면, 6근(根)ㆍ6경(境)ㆍ6식(識)의 18계(界)의 종자가 뒤섞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18계는 각각 별도로 종자를 갖는다는 것을 성교(聖敎)의 여러 곳(유가사지론의 제96권23)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8계(界)는 6근(根)ㆍ6경(境)ㆍ6식(識)을 말하며, 계(界, dhātu)는 ‘세계’, ‘경계’의 뜻이 아니라 ‘부류(類)’ ‘종족’ ‘층(層)’의 의미로써, 현현(顯現) 중인 법과 그것을 중심으로 그것에 연(緣)하고 있는 한 무리, 일족(一族)의 법을 의미하며, 그 일족의 법은 층(層)과 비슷한 입체적인 복합구조성을 갖는 것을 나타낸다.

 

又五識種各有能生相、見分異,爲執何等名眼等根?若見分種應識薀攝,若相分種應外處攝,便違聖眼等五根皆是色薀、內處所攝。

또한 5식의 종자는 각각 상분과 견분을 내는 것이 다르거늘, 무엇에 집착하여 안근 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앞에서 난타 등이 견분과 상분의 종자라고 말한 것은 모두 옳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만약 견분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식온(識薀)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고,

만약 상분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외부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곧 성교(聖敎, 유가사지론 제54권)에서 안근 등 5근은 모두 색온과 내부의 감각기관에 포함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견분의 종자를 집착해서 안근(眼根) 등으로 이름할 것인가? 상분의 종자에 집착해서 안근 등으로 이름할 것인가? 라고 비판한 것이다.

 

又若五根卽五識種,五根應是五識因緣,不應說爲增上緣。攝又鼻、舌根卽二識種,則應鼻、舌,唯欲界繫,或應二識通色界繫。許便俱與聖相違。

또한 만약 5근이 곧 5식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5근은 5식의 인연이어야 할 뿐, 증상연에 포함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5() 5() 증상연(增上緣)이다.

그런데 5근을 5식의 종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5식의 인연(因緣)이지 증상연이 아니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비근(鼻根)과 설근(舌根)이 곧 두 가지의 이식(二識, 비식ㆍ설식)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비근ㆍ설근은 오직 욕계에 계박된 것이어야 하며, 혹은 두 가지 식은 색계에 계박된 것에도 통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곧 모두 '유가사지론'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음에 감각기관과 식의 계박(繫縛) 다름을 들어서 비판한 것으로,

만약 비근(鼻根)ㆍ설근(舌根) 비식(鼻識)ㆍ설식(舌識) 종자라고 말한다면, 비식ㆍ설식은 욕계(欲界)에만 있고 색계에는 없기 때문에 원인(因) 비근과 설근도 욕계에만 있고 색계에는 없어야 하며,

만약 비근ㆍ설근이 색계에 있다고 말한다면,  결과(果) 비식ㆍ설식도 색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은 성교(聖敎)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4

 

若無此識持煩惱種,轉依斷果亦不得成。謂道起時,現行煩惱及彼種子俱非有故。染、淨二心不俱起故。道相應心不持彼種。自性相違如涅槃故。去、來、得等非實有故。餘法持種理不成故。旣無所斷能斷亦無,依誰由誰而立斷果?

만약  식(識)이 유루의 종자를 지니지 않는다면, 전의(轉依)라는 단멸증과인 단과(斷果) 역시도 성취될  없어야 할 것이니, 무루의 무간도(無間道) 일어날 때에는 현행의 번뇌와  종자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니, 잡염ㆍ청정의  가지 심왕은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도와 상응하는 심왕은 그 번뇌의 종자를 지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자성이 달라서 마치 열반과 같기 때문이며, 과거ㆍ미래ㆍ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득(得, prāpti) 등은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색법 등이 종자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단멸되는 것은 미혹이 없기 때문에 능히 단멸하는(道) 또한 없을 것인데, 어떠한 번뇌에 의지하고, 어떠한 도(道)에 의지해서 단멸된 증과의 단과(斷果)를 건립하겠는가?

단멸되는 소단(所斷)의 번뇌도 없고 단멸하는 능단(能斷)의 () 없기 때문에, 단멸된 증과인 단과(斷果) 건립할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若由道力,後惑不生立斷果者,則初道起應成無學。後諸煩惱皆已無,因永不生故。許有此識,一切皆成。唯此能持染淨種故。

만약 도력(道力)에 의해 이후의 미혹이 생겨나지 않는 것에 단멸된 증과인 단과(斷果)를 건립한다고 말한다면,  처음의 예류향(預流向)의 견도(見道) 일어날 때에 무학(無學)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후의 모든 번뇌는  이미 없을 것이니, 원인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식(識)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일체가  성립되는 것이니, 오직 식, 이것만이 능히 잡염ㆍ청정법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이다. 

10리증(理證)의 10염정증(染淨證) 총체적으로 결론지었다.


證此識有理趣無邊,恐厭繁文略述綱要。別有此識教、理顯然。諸有智人應深信受。

 식(識)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논리의 취지가 한없이 많지만, 문장이 번쇄하여지면 염증을 낼까 두려우므로 간략히 요점을 서술하여서, 10리증(理證)을 3단(段)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세 번째로 총체적으로 열 가지 논증을 결론 맺는다.

별도로  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가 경론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마땅히 깊이 믿고 받아 지녀야 하리라.

5() 10리증(理證)으로써 8식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운데,  번째로 총체적으로 결론 맺는다.

 

이하는 2능변인 말나식(末那識) 관한 해설이다.

如是已說初能變相。第二能變其相云何?頌曰:

이상과 같이 초능변식의 상(相)을 말하였으니, 제2능변식의 상(相)상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5ㆍ6ㆍ7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다음은 제2능변식(第二能變識)이니,  식(識)을 말나식(末那識, 제 7식)이라고 이름하며,

그 아뢰야식(제 8식)에 의지해서 유전하고 그것을 반연하며, 

사량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行相)으로 삼는 것이다.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幷我慢我愛 及餘觸等俱。

 가지 의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하나니,  아치(我癡)와 아견(我見)과

아울러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인 것으로,  외에는 촉(觸) 등과 함께하는 것이다.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유부무기(有覆無記)에 포함되며, 태어난 곳을 따라 매이는 것이며,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말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송들의 뜻을 해설함에 있어서 논서 4권과 5권에 걸쳐 8() 10의문(義門)으로 설명한다. 자세한 설명은 논서 2 83 참조.

 

3성(三性)은 선(善)과 불선(不善)의 기준에 따라, 즉 도덕 · 윤리 · 업(카르마)의 관점에서 일체법을 분류했을 때의 세 갈래인 선(善, kuśala, 유익함) · 불선(不善, akuśala, 해로움) · 무기(無記,  avyākrta,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음)이다.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rtāvyākrta)는 '가림의 부(覆) 또는 막음의 장(障)이 없는 무기(無記)'로, 번뇌와 상응하지 않으며 성도(聖道)를 장애하지 않는 무기(無記)를 말한다. 줄여서 무부(無覆)라고도 하며 정무기(淨無記)라고도 한다. 
무부무기는 다시 크게 유위무기(有為無記)와 무위무기(無為無記)의 2종으로 나뉜다

①유위무기(有為無記)는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무부무기이며, 이숙무기(異熟無記) · 위의무기(威儀無記) · 공교무기(工巧無記) · 통과무기(通果無記) · 자성무기(自性無記)의 5종이 있다.

②무위무기(無為無記)는 승의무기(勝義無記)라고도 하며,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인 아닌 무위의 무부무기를 말하며, 허공무위(虛空無為)와 비택멸무위(非擇滅無為)의 2가지 무위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論曰:次初異熟能變識,後應辯思量能變識相。是識聖教別名末那。恒審思量勝餘識故。

논하여 말한다. 8() 중에서 1거체출명문(擧體出名門)

처음의 이숙능변(異熟能變, 제 8식)의  다음에 사량능변(思量能變, 제 7식)의 식의 양상을 판별하나니, 성스러운 가르침의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식을 별도로 말나식으로 이름하였으니, 항상 살펴서 사량하는 것이 다른 식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3능변(三能變), 이숙능변(異熟能變) · 사량능변(思量能變) · 요경능변(了境能變)이라고도 하며, 능변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드러내는, 즉 어떠한 핵심적인 작용을 하는가를 드러내는 명칭이며, 유식학에서는 8식을 '능변(能變: 자신을 포함한 갖가지 법을 변화시키고 현행시킴)'의 관점에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하였다.
①제8아뢰야식을 초능변 또는 제1능변이라 하며, 이숙(異熟)의 작용을 핵심적인 작용으로 하는, 즉 이숙과(집기)라는 변화가 생기게 하는 식으로, 초능변은 인능변과 과능변의 뜻을 모두 지닌다
②제7말나식을 제2능변(第二能變)은 사량(思量)의 작용을 핵심적인 작용을 통해 평등한 지혜인 평등성지(平等性智) 혹은 4번뇌라는 변화가 생기게 하는 식으로 과능변의 뜻만을 지닌다
③전6식(前六識)을 제3능변(第三能變)은 '대상을 요별, 요경(了境)'하는 작용을 핵심적인 작용으로 하는 식, 즉 전6식은 대상에 대해 인식작용을 하여 대상에 대해 '모름'으로부터 '앎(요별)'이라는 변화가 생기게 하는 식으로, 과능변의 뜻만을 지닌다

 

유식학에서는 '능변(能變)'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인능변(因能變)은 원인(因), 즉 종자를 능변하는 경우다.
과능변(果能變)은 결과(果) 즉 자신을 포함한 현행의 법을 능변하는 경우이다.ㅡ 위키

 

此名何異第六意識?此持業釋。如藏識名識卽意故。彼依主釋。如眼識等識異意故。

 명칭이 제6의식과 어떻게 다른가? 이 제7식은 지업석(持業釋)이니, 장식(藏識)이라는 명칭과 같이 식이  의(意)이기 때문이며, 

그 제6식은 의주석(依主釋)이니, 안식 등과 같이 식이 의(意)와 다르기 때문이다.

7식을 의식(意識)이라고 말한 것은 의즉식(意卽識) 지업석(持業釋)으로서, 예를 들면 장즉식(藏卽識) 뜻과 같으며, 

6식을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 의지하는 ()이라는 의주석(依主釋)으로서, 예를 들면 안식 등이 안근 등에 의지하는 식이라는 뜻과 같다.

 

지업석(持業釋)은 6합석(合釋)의 하나이며, 6합석은 인도에서 하나의 명사를 해석하는 것에 여섯 가지 방법으로써, 이에 의주석(依主釋)ㆍ지업석(持業釋)ㆍ유재석(有財釋)ㆍ상위석(相違釋)ㆍ인근석(隣近釋)ㆍ대수석(帶數釋)이 있다.

의주석은 예를 들면 산사(山寺)라고 할 때, 산(山)은 의지처인 소의(所依)의 주(主)이고, 사(寺)는 의지하는 능의(能依)의 사물인 경우를 말하며,

지업석은 연석(硯石)이라고 할 때, 연즉석(硯卽石)으로서 연석이 이미 연(硯)의 작용인 업용(業用)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이다.


然諸聖教,恐此濫彼故於第七但立意名。又摽意名爲簡心、識。積集了別,劣餘識故。或欲顯此,與彼意識,爲近所依故,但名意。

그런데 모든 성교(聖教)에서 이 제7식이 그 제6식에 혼동될까 염려한 까닭에, 제7식에 대해서는 다만 의(意)라는 명칭만을 건립하며,

또한 의(意)라는 명칭만을 붙인 것은 심(心, 제8식)과 식(識, 6식)에 구별하기 위한 것이니, 적집하고 요별하는 것이 다른 식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며,

혹은 이것이  의식의 가까운 의지처인 소의(所依)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이것을 다만 의(意)라고 이름한 것이다.

초기불교와 아비달마불교까지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6식설(識說) 심의식설(心意識說)  방면으로 설명하였다. 

심의식설에서 (心, citta) 적집(積集) 의미이고, (意, manas) 사량(思量)이며, (識, vijñāna) 요별의 의미이다. 

유식학에서는 ()ㆍ의()ㆍ식() 체별(體別) 주장하고, 심의식설과 8식설을 결합한,

 8식은 심의식(心意識) 중에서 ()’으로서 적집(積集) 뜻이 뛰어나고,

6() ()’으로서 요별 뜻이 뛰어나며,

7식은 적집하고 요별하는 것이 다른 식보다 열등하고, 오직 ‘사량’ 뜻이 뛰어나므로 7식을 ()라고 이름하였다.

 

말나식에서 말나(末那)의 산스끄리뜨인 manas는 √man(생각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써, 이것은 ‘사량(思量)’으로 번역되듯이, 대상을 명료하게 ―깊고 강하게―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ñāna라고 하여 똑같이 manas가 사용되므로, 따라서 제6의식과 구분하여 보통 말나식, 제7식 또는 단지 의(意)라고 부른다.

 

다음은 2소의문(所依門)이다.

依彼轉者顯此所依。彼謂卽前初能變識,聖說此識依藏識故。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그것에 의지해서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것은 이것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나타내며, ‘그것’이란  앞에서 말한 초능변식이다.

'유가사지론' 제51권의 성교(聖教)에서는  식은 장식(藏識)을 의지한다고 말한 때문이다.


有義。此意以彼識種而爲所依,非彼現識。此無閒斷,不假現識,爲俱有依,方得生故。

난타(難陀)와 최승자(最勝子)의 견해는 다음과 같으니,

 말나식은 제8식이 집지(執持)하는 종자 중에서 제7식을 생겨나게 하는 종자인 자종(自種) 의지처인 소의(所依, 인연의因緣依)로 하나, 그것의 현행식은 아닌 것으로,

이것은 상속이 단절됨이 없으므로, 제8식의 현행식을 의지해서 구유의(俱有依)로 삼아서 비로소 생겨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有義。此意以彼識種及彼現識,俱爲所依。雖無閒斷,而有轉易,名轉識故。必假現識,爲俱有依,方得生故。

호법(護法)의 견해로는, 이 말나식(제 7식)은 제8식의 종자는 인연의(因緣依)가 되고, 제 8식의 현행식을 구유의(俱有依)로 삼아서, 제 8식의 종자와  현행식을 모두 의지처로 삼으며,

제 7식은 단절됨이 없지만, 변화의 전이(轉易)가 있어서 전식(轉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며,  

반드시 제 8식의 현행식을 의지하여 구유의로 삼아서 비로소 생겨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轉謂流轉。顯示此識恒依彼識取所緣故。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전(轉)’이라는 것은 유전(流轉)을 말하며, 이 식은 항상 제8식의 종자와 현행식 의지하여서 인식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4 권 3

 

又契經說,意、法爲緣生於意識,三和合觸,與觸俱起有受、想、思。若此定中,有意識者,三和合故,必應有觸。觸旣定與受、想、思俱,如何有識而無心所?

▷논주의 질문; 또한 '잡아함경' 제11권에서 설하기를, 의근(意根)과 법을 연(緣)으로 해서 의식을 일으키고,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가지가 화합하여 촉(觸)이 있고, 

촉과 함께 일어나는 수(受)ㆍ상(想)ㆍ사(思)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선정 중에 의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반드시 촉(觸)이 있어야 할 것이며, 촉(觸)은 반드시 수(受)ㆍ상(想)ㆍ사(思) 함께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식(識)만 있고 심소는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若謂餘時三和有力,成觸生觸能起受等。由此定前,厭患心所故,在定位三事無能,不成生觸,亦無受等。

▷외인의 답; 다른 때에는 셋의 화합에 힘이 있어서 촉을 이루어서(삼화성촉설 三和成觸說), 촉을 생겨나게 함으로써(삼화생촉설 三和生觸說) 능히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선정 이전의 단계에서 심소를 싫어하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 있을 때에는 셋의 화합이 있을  없으므로 촉을 이루고 생겨나게   없으므로, 또한  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량부가 자기들의 입장을 해명하는 발언이다.

 

세 가지가 화합하여 촉을 이룬다는 것은 삼화성촉설(三和成觸說)이고, 촉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은 삼화생촉설(三和生觸說)이다. 이와 같이 경량부에서도 성촉설만이 아니라 일부에서 생촉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구사론'에 따르면, 촉(觸)은 감관(根)과 대상(境)과 마음(識: 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3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나는 마음작용으로, 감관(根)과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대상을 접촉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즉, 설일체유부에서는 감관(根)과 대상(境)과 마음(識)의 3가지가 화합이 원인이 되어 이 화합과는 별도의 마음작용으로서의 촉(觸)이 생겨난다는 3화생촉설(三和生觸說)을 주장하였고 후에 경량부에서 3화성촉설(三和成觸說)을 주장하였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서는 설일체유부와 동일하게 삼화생촉설을 주장하였다.


若爾應名滅心所定。如何但說滅受、想耶?

▷논주의 반대 질문; 만약 그러하다면 모든 심소를 멸하는 선정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거늘, 어째서 다만 수(受)ㆍ상(想)만을 멸한다고 설하는 것인가?


若謂厭時唯厭受、想,此二滅故心所皆滅。依前所厭以立定名。

▷외인 답; 싫어할 때에는 오직 수(受)ㆍ상(想)만을 싫어하고,  둘을 멸함으로써 모든 심소가  멸하는 것이니, 이전에 싫어한 바에 의지해서 선정을 명명한 것이다.

경량부의 해명 발언으로, 멸진정에서는 모든 심소를 멸하지만,  선정에 들어가기 이전에 진정으로 싫어한 것은 수(受)ㆍ상(想) 뿐이었으므로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 이름한다고 설명하였다.


旣爾,此中心亦應滅,所厭俱故,如餘心所。不爾,如何名無心定?

▷논파한다; 그러하다면, 선정 중에서는 심왕도 역시 멸해야 할 것이니, 싫어하는 애(愛) 등과 함께하기 때문이며, 나머지는 다른 심소와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무심정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이하는 논주가 본격적으로 하나하나 논파하는 것이다.

又此定位意識是何?不應是染或無記性。諸善定中無此事故,餘染、無記心必有心所故,不應厭善起染等故,非求寂靜翻起散故。

또한  선정에서의 의식은 어떠한가? 잡염 또는 무기성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선(善)의 선정에서는 이런한 잡염ㆍ무기성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멸진정 중의 식(識)이 잡염이나 무기심(無記心)이라면, 멸진정이 아닌 다른 무기심과 같이 잡염과 무기의 심왕이므로 반드시 심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선(善)을 싫어하고, 잡염 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을 구하며, 반대로 산란(염오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若謂是善,相應善故,應無貪等,善根相應。此心不應是自性善或勝義善。違自宗故,非善根等及涅槃故。

만약 이것이 선(善)이고 상응선(相應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무탐(無貪)심소 등의 선근도 상응해야 할 것이니,  심왕은 자성선(自性善)이나 승의선(勝義善)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자기 학파의 근본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고 선근 등이 곧 열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량부의 본파(本派) 논파한 것이다. 멸진정 중의 심왕이 ()이고, 열한 가지 선심소(善心所) 상응하므로 상응선(相應善)이라고 말한다면, 무탐(無貪) 등의 선근도 상응하므로 멸진정에는 모든 심소가 없다는 자종(自宗) 위배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4종선(四種善) 또는 4선(四善); 자성선(自性善)은 본질상 선(善)을 말하며, 참(慚)과 괴(愧) 선근(善根)이 자성선에 해당한다. 선근(善根)은 온갖 선을 내는 근본이란 뜻으로,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3선근(三善根)을 말하고, 자성선은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5가지의 선을 말한다. 즉, 이들 5가지는 그 본질상 편안하고 즐거운 낙보(樂報)를 낳는 것이며 또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것이다.

상응선(相應善, 무탐無貪 등에 상응하는 심심소心心所), 이란 본질상 무기(無記)이지만 자성선과 상응함으로써 비로소 선(善)이 되는 법(法, 특히 마음작용)을 말한다

등기선(等起善, 선심소가 일으킨 신어업 身語業의 무표업 無表業)이란 자성선이나 상응선에 상응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에 의해 일으켜져서 해당 자성선 또는 상응선과 등기(等起: 함께 일어남)하는 신업(身業)과 어업(語業), 그리고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자성선이나 상응선과 상응할 때와 이 상응의 결과 해당 자성선이나 상응선이 일어나는 현행(現行)일 때 일종의 원리들 또는 법칙들로서 등기(等起)하는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을 통칭하여 말한다.

승의선(勝義善, 열반)은 '궁극적 의미에서의 선(善), 가장 뛰어난 선(善), 최고의 선(善), 가장 훌륭하며 진실한 선(善), 또는, 우주 만유의 평등하고 무차별한 절대적 진리의 선(善)'으로, 무위(無爲)의 선(善), 즉 진해탈(眞解脫), 즉 열반(涅槃)을 말한다. 열반은 최고로 안온(安隱)하며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적멸해 있기 때문에 승의선이라고 한다. - 위키 


若謂此心是等起善,加行善根所引發故,理亦不然。違自宗故,如餘善心非等起故。善心無閒起三性心。如何善心由前等起?

만약  심왕이 등기선(等起善)이고, 가행의 선근에 이끌려서 인발(引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논리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자기 학파의 근본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나머지 다른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과 같이 등기선이 아니어야 할 것이 때문이다.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 바로 다음 찰나에는  가지 성(性) 심왕을 일으키나니, 어떻게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만을 이전의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에 의해 함께 일어나는 등기(等起)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故心是善由相應力。旣爾必與善根相應。寧說此心獨無心所?故無心所,心亦應無。

따라서 심왕이 착한 성품인 것은 상응하는 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선근과 상응해야 할 것이거늘, 어째서  심왕만을 홀로 심소가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심소가 없다면 심왕 역시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如是推徵,眼等轉識於滅定位,非不離身故。契經言不離身者,彼識卽是此第八識。入滅定時,不爲止息此極寂靜執持識故。無想等位類此應知。

▷정의한다;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추구한다면, 안식 등의 전식(轉識)은 멸진정 중에 몸(身)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경전에서 몸(身)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한  식이 바로 제8식인 것이다. 

멸진정에 들어갈 때에는 매우 고요하고  집지식(執持識, 아타나식)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니, 무상정, 즉 무심천(無心天)등의 지위도 이에 비추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다.

 

10리증(理證) 가운데 10염정증(染淨證)
又契經說:“心雜染故有情雜染,心淸淨故有情淸淨。”若無此識,彼染淨心不應有故。謂染淨法以心爲本,因心而生依心住故。心受彼熏,持彼種故。

또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상권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잡염되기 때문에 유정이 잡염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유정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취지의 문장이 '잡아함경' 12에도 있음.

만약  식(識)이 없다면,  잡염ㆍ청정한 마음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며, 잡염법ㆍ청정법은 마음(心, 근본식)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인하여 생겨나고 마음에 의지해서 머물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것의 훈습을 받고 그것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이다.

먼저 총체적으로 해설하였다.


然雜染法略有三種:煩惱、業、果種類別故。若無此識持煩惱種,界、地往還,無染心後,諸煩惱起皆應無因。餘法不能持彼種故。過去、未來非實有故。若諸煩惱無因而生,則無三乘學、無學果。諸已斷者皆應起故。

그런데 잡염법에 대략  종류가 있으니, 번뇌ㆍ업ㆍ과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식(識)이 유루종자를 지니지 않는다면, 3계(界)ㆍ9지(地)에 오고  때와 잡염이 없는 무염심(無染心) 이후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니,

번뇌를 다스리는 대치(對治)식이 견도에서 일어나면, 모든 세간의 식은 이미 멸한다. 만약 그 때에 아뢰야식이 없다면, 나머지 번뇌의 종자의 의지처인 소의(所依)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논파한 것이다.

색법 등의 다른 법은 유루의 종자를 지닐  없기 때문이고, 과거와 미래는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번뇌가 원인없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3승(乘)의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과보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니, 이미 끊어진 모든 것이 원인없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 때문이다.


若無此識持業、果種,界、地往還,異類法後,諸業果起亦應無因。餘種、餘因,前已遮故。若諸業果無因而生,入無餘依涅槃界已,三界業、果,還復應生。煩惱亦應無因生故。

만약  식(識)이 업ㆍ과보의 종자를 지니지 않는다면, 3계ㆍ9지에 오고갈 때와 다른 종류의 법인 무루심(無漏心) 이후에 모든 업ㆍ과보가 일어나는 것에도 역시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니, 색법 등의 다른 법의 종자와 과거ㆍ미래세의 다른 원인은 앞에서 이미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업ㆍ과보가 원인이 없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세계에 들어간 사람의 3계의 업ㆍ과보가 다시 생겨나야 할 것이니, 번뇌 역시도 원인이 없이 생겨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又行緣識應不得成。轉識受熏前已遮故。結生染識非行感故。應說名色行爲緣故,時分懸隔無緣義故。此不成故後亦不成。

또한 행(行)은 식(識)의 연(緣)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성립될  없어야 하는 것이니,

전식이 훈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선악의 행업(行業) () 되어 미래의 8식을 야기하나, 만약 8식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식(轉識) 수훈(受熏) 뜻이 없으므로 (行, saskāra) () () 된다는 것을 설명할  없어야 한다고 논파하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날 때의 잡염식, 즉 중유(中有)의 말심(末心)에서 애욕과 성냄의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는 번뇌에 상응하는 제6식은 행(行)에 초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명색(名色)은 행을 연(緣)으로 한다고 말하는 것은, 행(行)은 과거에 있고, 식(識)의 과보는 현재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현격하게 떨어져 있어서 연의 뜻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량부의 해명발언을 논파한 것으로, 명색(名色) 중의 이숙식을 식지(識支) 이름하여서 행지(行支)가 그것을 초감하므로 () () () 된다고 말한다. 논주가 그것을 비판하여 말하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 의하면 () 과거에 있고, () 과보는 현재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현격히 떨어져 있어서 () 뜻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논파한 것이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취(取, upādana)가 유(有, bhāva)의 연(緣)이 된다는 것도 역시 시간이 현격하게 떨어져 있어서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諸淸淨法亦有三種:世、出世道,、斷果別故。若無此識持世、出世,淸淨道種,異類心後起彼淨法,皆應無因。所執餘因前已破故。若二淨道無因而生,入無餘依涅槃界已,彼二淨道還復應生。所依亦應無因生故。

모든 청정법에도 역시  종류가 있으니, 유루(有漏)의 6바라밀(波羅蜜)을 닦는 지혜의 세간의 세도(世道)와 

무루(無漏)의 능히 다스리는 능대치(能對治)의 지혜인 출세간의 출세도(出世道)  

단멸된 증과인 단과(斷果)의 무위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식(識)이 세간과 출세간의 청정도(淸淨道)의 종자를 지니지 않는다면, 

욕계 이후에 색계의 선(善)을 일으키거나, 악(惡)과 유부무기(有覆無記) 이후에 유루선(有漏善)을 일으키거나, 유루선 이후에 무루선(無漏善)을 일으키는 것 등의 다른 종류의 마음 이후에  청정법을 일으키는 것 모두에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이 집착하는 전식(轉識), 색법(色法), 과거ㆍ미래의 불상응행법 등은 원인(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원인은 앞에서 이미 논파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ㆍ출세간의  가지 청정도가 원인이 없이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무여의열반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의   가지 청정도가 다시 생겨나야  것이니, 의지처인 소의(所依) 역시 원인없이 생겨나야 할 것이 때문이다.


又出世道初不應生。無法持彼法爾種故。有漏類別,非彼因故。無因而生非釋種故。初不生故,後亦不生。是則應無三乘道果。

또한 출세간도는 처음의 견도(見道)에서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법이 그 본래부터 있는 종자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며, 유루법은 종류가 다르므로 그것의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석존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처음의 견도 초기의 무루(無漏)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후시(後時)의 무루 역시도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곧 3승의 도과(道果)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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