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3
又諸所執,實有我體爲是我見所緣境不?若非我見所緣境者,汝等云何知實有我?若是我見所緣境者,應有我見非顚倒攝。如實知故,若爾如何執有我者,所信至教,皆毀我見,稱讚無我,言無我見能證涅槃,執著我見沈淪生死?豈有邪見能證涅槃,正見翻令沈淪生死?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실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아견(我見)의 인식대상이 되는 것인가? 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아견의 인식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참으로 자아가 있다고 아는 것이며,
만약 아견의 인식대상이라고 말한다면,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어떻게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가 믿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모든 아견을 비판하고 무아설(無我說)을 칭찬하는 것인가?
무아견(無我見)은 능히 열반을 증득할 수 있고,
자아에 집착하는 집착아견(執著我見)은 생사에 깊이 잠기게 한다고 말하나니,
어찌 삿된 사견(邪見)으로 능히 열반을 증득하고, 그와 반대로 바른 정견(正見)으로 생사에 깊이 빠지게 되겠는가?
又諸我見不緣實我 有所緣故,如緣餘心 我見所緣定非實我 是所緣故,如所餘法。是故我見不緣實我,但緣內識變現諸薀,隨自妄情,種種計度。
또한 모든 아견(我見)은 실아를 반연하지 않으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며,
색법 등의 다른 것을 반연하는 심법(心法)과 같이 아견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반드시 실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기 때문에 나머지 법과 같은 것이며,
이 때문에 아견은 실아를 반연하지 않는 것으로, 다만 내부의 식이 변현(變現)한 여러 온(蘊)을 반연하여서 스스로의 허망한 생각의 망정(妄情)을 따라 갖가지로 계탁하는 것이다.
然諸我執略有二種:一者俱生,二者分別。
그러한 모든 아집에 대략으로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분별에 의하여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이다.
이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인 아집(我執)의 두 종류를 복단(伏斷)하는 지위를 설명한다.
俱生我執無始時來,虛妄熏習,內因力故,恒與身俱,不待邪教及邪分別,任運而轉,故名俱生。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은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하게 훈습한 내부 원인(종자)의 세력이기 때문에 항상 신체와 함께하며,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자연히 임운(任運)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름하며,
임운(任運)= ‘자연(自然)’의 의미로서, 어떤 조작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저절로 되는 것.
此復二種:一常相續,在第七識緣第八識,起自心相,執爲實我;
二有閒斷,在第六識緣識所變,五取薀相,或摠或別,起自心相,執爲實我。
여기에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 상속하는 상상속(常相續)으로, 제7식이 제8식을 반연하여서 스스로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며,
둘째는 단절됨이 있는 유간단(有閒斷)하는 것으로, 식이 전변된 5취온(取蘊)의 모습을 제6식이 반연하여서, 혹은 총체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집착하여서 참다운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다.
此二我執細故難斷,後修道中,數數修習勝生空觀,方能除滅。
상상속(常相續)과 유간단(有閒斷), 이 두 가지 아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끊기가 어려우며, 이후의 수도(修道)에서 뛰어난 생공관(生空觀)을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바야흐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보살의 수행 위계를 41단계로 인정하고, 이를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見道)ㆍ수습위(修習位:修道)ㆍ구경위(究竟位)의 5위(位)에 배대한다.
여기에서 통달위, 즉 견도(見道)는 초지의 입심(入心) 즉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의 3현(賢)과 다음에 네 가지 선근(善根)을 경유하여 10지(地) 중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을 가리키며,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비로소 진여의 일분(一分)을 견조(見照)하는 지위이다.
수습위, 즉 수도(修道)는 그 다음 주심(住心)부터 금강심보살까지의 지위로서 견도에서 일부 증득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수습하므로 수도라고 한다.
*생공관(生空觀)은 아공무루관(我空無漏觀)으로, 보살은 법공무루관을 닦아서 아집을 없앤다.
分別我執,亦由現在外緣力故,非與身俱,要待邪教及邪分別然後方起,故名分別。唯在第六意識中有。
후천적인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은 역시 현재의 외연(外緣)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신체와 함께하지 않으나, 반드시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이라 이름하며, 오직 제6의식에만 있는 것이다.
此亦二種:一緣邪教所說薀相,起自心相,分別計度,執爲實我;
二緣邪教所說我相,起自心相,分別計度,執爲實我。此二我執麤故易斷,初見道時,觀一切法生空眞如,卽能除滅。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온(蘊)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자기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하면서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으로, 즉온(卽蘊)의 아집인 즉온아(卽蘊我)이며,
둘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자아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자기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하면서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니, 이온(離蘊)의 아집인 이온아(離蘊我, 異蘊我)이다.
이 두 가지 아집은 두드러지기 때문에 끊기 쉬우니, 처음의 견도(見道)의 시기에 일체법의 생공진여(生空眞如)를 관찰하여서 곧 없앨 수 있으며, 보살은 법공무루관(法空無漏觀)을 닦음으로써 아집을 없애는 것이다.
如是所說一切我執自心外薀或有或無,自心內薀一切皆有,是故我執皆緣無常,五取薀相妄執爲我。
然諸薀相從緣生故,是如幻有,妄所執我橫計度故,決定非有。
이상과 같이 말한 모든 아집 중에서 자기 마음 밖인 심외온(心外蘊)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니, 제7식에 의해 집착된 자아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나, 제6식에 의해 집착된 자아는 없기도 한 것이며,
자기 마음의 내부의 심내온(心內蘊) 곧 자신의 영상(影像), 즉 친소연(親所緣)은 모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집은 모두 무상한 5취온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망령되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온(蘊)의 상(相)은 연(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여환(如幻)과 같이 존재하는 것이니, 허망하게 집착한 자아는 제멋대로 계탁한 것으로 반드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외온(心外蘊)= 외부대상인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능연(能緣)이 소연(所緣)을 반연하지만, 그 본질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심외(心外)라 한다.
故契經說,苾芻當知,世閒沙門、婆羅門等所有我見,一切皆緣五取薀起。
그러므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제34권에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세간의 사문(沙門, śrāmaṇa)과 바라문(婆羅門, brāhmaṇa) 등에게 있는 아견들은 모두 5취온을 반연해서 일으킨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문(沙門, śrāmaṇa)= 석존(釋尊) 당시 인도 사상계에는 정통 바라문(婆羅門)의 사상에 대하여, 사문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많이 나타나서 정통사상을 비판하고, 새로운 우주관ㆍ인생관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문은 원래 석존 당시의 새로운 사상가들을 총칭하는 용어였으나 후세에는 불문(佛門)에 출가한 사람을 가리켜서 비구(比丘)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바라문(婆羅門, brāhmaṇa)은 인도 4성(姓) 계급 중의 하나로서, 최고 지위의 사제(司祭)들을 말하며, 그들은 신(神)의 대표자로서 권위를 떨쳤으며, 범행기(梵行期)ㆍ가주기(家住期)ㆍ임서기(林棲期)ㆍ유행기(遊行期)의 네 시기의 생활을 하였다.
實我若無,云何得有憶、識、誦、習、恩、怨等事?
만약 실아(實我)가 없다면 어떻게 기억하고 식별하며, 소리 내어 읽고 익히며, 감사해 하거나 원한을 품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정적으로 외인(外人)의 비판 질문을 설정하여서 그에 대하여 논파하는 것이다.
所執實我旣常無變,後應如前,是事非有。前應如後,是事非無,以後與前體無別故。
집착된 실아(實我)는 이미 상주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후의 것이 이전과 같은 것으로서 변화되지 않은 것이어야 하며, 이전의 것도 이후와 같은 것으로서 변화되지 않아야 하나니, 이후와 이전의 체(體)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론(數論)을 논파한 것으로, 그들에 의하면, 25원리(諦) 중에서 신아(神我, 뿌루사)와 근본자성(根本自性, 쁘라끄리띠)을 제외한 나머지 23법이 아직 변현하지 않은 동안에는 뿌루사는 아직 경계를 수용하지 않으며, 23법이 나타날 때 뿌루사가 그것을 수용한다고 하며, 뿌루사의 체(體)는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논주가 비판하기를, 만약 그대들이 집착하는 실아(實我)는 이미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쁘라끄리띠로부터 전변된 나머지 원리들에도 전변되기 이전과 같이 경계를 수용하는 작용이 없을 것이고, 또한 전변 이전의 자아도 전변 이후의 자아와 같이 경계를 수용하는 작용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이후의 것과 이전의 자아의 체(體)가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파한 것이다.
若謂我用前後變易非我體者,理亦不然。用不離體,應常有故。體不離用,應非常故。
만약 자아의 작용이 전후의 변천이 있어서 자아의 본체인 아체(我體)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작용은 본체에서 떠나지 않는, 용불이체(用不離體)이므로, 상주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며,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 체불이용(體不離用)이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然諸有情各有本識,一類相續,任持種子,與一切法,更互爲因熏習力,故得有如是憶識等事,故所設難於汝有失,非於我宗。
정의하자면, 모든 유정은 각각 근본식이 있어서 한 종류인 일류(一類)로 상속하여서 종자를 보존하는 것이니,
제법과 함께 다시 서로의 원인이 되어서 훈습하는 훈습력(熏習力)에 의하여서, 이와 같이 기억하고 식별하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는, 즉 근본식과 7전식(轉識)이 서로 인연이 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기억ㆍ식별력 등의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따라서 시설한 비판은 그대들의 잘못일 뿐 우리의 교의(敎義)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若無實我,誰能造業,誰受果耶?
▷묻습니다; 만약 실아(實我)가 없다면, 누가 능히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所執實我旣無變易,猶如虛空,如何可能造業受果?若有變易,應是無常。
▷답한다; 집착된 실아는 변천하는 변이(變易)가 없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것이니, 어떻게 능히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인가? 만약 변천이 있다면, 곧 무상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然諸有情心、心所法因緣力故,相續無斷造業受果,於理無違。
▷정의하여서; 모든 유정은 심왕과 심소법의 인연력(因緣力)에 의하여 상속해서 단절되지 않고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我若實無,誰於生死、輪迴諸趣,誰復厭苦求趣涅槃?
▷묻습니다; 만약 자아가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사에서 여러 세계로 윤회하는 것은 누구이며?
다시 고통을 싫어해서 열반을 구하는 것은 누구 입니까?
所執實我旣無生滅,如何可說生死輪迴?常如虛空,非苦所惱,何爲厭捨求趣涅槃?故彼所言常爲自害。
▷답한다; 집착된 실아는 이미 생멸이 없는데, 어떻게 생사에서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은 것이며, 고통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괴로움을 싫어해서 버리고 나아가 열반을 구하겠는가?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항상 자기모순이 되는 것이다.
然有情類身心相續,煩惱業力輪迴諸趣,厭患苦故,求趣涅槃。由此故知定無實我,但有諸識無始時來,前滅後生,
정의하자면; 유정의 무리는 몸과 마음이 상속해서 번뇌력(煩惱力)과 업력(業力)으로써 여러 세계에서 윤회하며, 고통을 싫어하고 근심하기 때문에 나아가 열반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결정코 실아(實我)는 없는 것이나 다만 여러 식(識)들만이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앞의 전(前)이 멸하면 뒤의 후(後)가 생겨나면서,
제8식은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변현하여 끊임없이 상속하고, 제7식도 역시 그러하며,
제6식은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변현하고, 5위무심(位無心, 무상천無想天ㆍ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인 경우를 제외한 다른 때에는 항상 현기(現起)하는 것으로,
5식은 연(緣)을 따라 현기하는 것이다.
因果相續,
원인과 결과, 즉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로써 상속하는 것이며,
由妄熏習似我相現,愚者於中,妄執爲我。
허망한 훈습에 의해서 아상(我相)으로 현현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아상(我相)으로 사현된 상분(객관)과 견분(주관)에 망령되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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