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3

 

又諸所執,實有我體爲是我見所緣境不?若非我見所緣境者,汝等云何知實有我?若是我見所緣境者,應有我見非顚倒攝。如實知故,若爾如何執有我者,所信至教,皆毀我見,稱讚無我,言無我見能證涅槃,執著我見沈淪生死?豈有邪見能證涅槃,正見翻令沈淪生死?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실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아견(我見)의 인식대상이 되는 것인가? 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아견의 인식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참으로 자아가 있다고 아는 것이며,

만약 아견의 인식대상이라고 말한다면,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어떻게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가 믿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모든 아견을 비판하고 무아설(無我說)을 칭찬하는 것인가?

무아견(無我見)은 능히 열반을 증득할 수 있고,

자아에 집착하는 집착아견(執著我見)은 생사에 깊이 잠기게 한다고 말하나니,

어찌 삿된 사견(邪見)으로 능히 열반을 증득하고, 그와 반대로 바른 정견(正見)으로 생사에 깊이 빠지게 되겠는가?


又諸我見不緣實我 有所緣故,如緣餘心 我見所緣定非實我 是所緣故,如所餘法。是故我見不緣實我,但緣內識變現諸薀,隨自妄情,種種計度。

또한 모든 아견(我見)은 실아를 반연하지 않으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며, 

색법 등의 다른 것을 반연하는 심법(心法)과 같이 아견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반드시 실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기 때문에 나머지 법과 같은 것이며,

이 때문에 아견은 실아를 반연하지 않는 것으로, 다만 내부의 식이 변현(變現)한 여러 온(蘊)을 반연하여서 스스로의 허망한 생각의 망정(妄情)을 따라 갖가지로 계탁하는 것이다.


然諸我執略有二種:一者俱生,二者分別。

그러한 모든 아집에 대략으로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인 분별에 의하여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이다.

 

이하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과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인 아집(我執)의 두 종류를 복단(伏斷)하는 지위를 설명한다.

俱生我執無始時來,虛妄熏習,內因力故,恒與身俱,不待邪教及邪分別,任運而轉,故名俱生。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집인 구생기아집(俱生起我執)은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하게 훈습한 내부 원인(종자)의 세력이기 때문에 항상 신체와 함께하며,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자연히 임운(任運)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름하며, 

임운(任運)= ‘자연(自然)’의 의미로서, 어떤 조작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저절로 되는 것.


此復二種:一常相續,在第七識緣第八識,起自心相,執爲實我;

二有閒斷,在第六識緣識所變,五取薀相,或摠或別,起自心相,執爲實我。

여기에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 상속하는 상상속(常相續)으로, 제7식이 제8식을 반연하여서 스스로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며,

둘째는 단절됨이 있는 유간단(有閒斷)하는 것으로, 식이 전변된 5취온(取蘊)의 모습을 제6식이 반연하여서, 혹은 총체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집착하여서 참다운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다.


此二我執細故難斷,後修道中,數數修習勝生空觀,方能除滅。

상상속(常相續)과 유간단(有閒斷), 이 두 가지 아집은 미세하기 때문에 끊기가 어려우며, 이후의 수도(修道)에서 뛰어난 생공관(生空觀)을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바야흐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보살의 수행 위계를 41단계로 인정하고, 이를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見道)ㆍ수습위(修習位:修道)ㆍ구경위(究竟位)의 5위(位)에 배대한다.

여기에서 통달위, 즉 견도(見道)는 초지의 입심(入心) 즉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의 3현(賢)과 다음에 네 가지 선근(善根)을 경유하여 10지(地) 중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을 가리키며,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비로소 진여의 일분(一分)을 견조(見照)하는 지위이다.

수습위, 즉 수도(修道)는 그 다음 주심(住心)부터 금강심보살까지의 지위로서 견도에서 일부 증득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수습하므로 수도라고 한다.

 

*생공관(生空觀)은 아공무루관(我空無漏觀)으로, 보살은 법공무루관을 닦아서 아집을 없앤다.


分別我執,亦由現在外緣力故,非與身俱,要待邪教及邪分別然後方起,故名分別。唯在第六意識中有。

후천적인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아집인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은 역시 현재의 외연(外緣)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신체와 함께하지 않으나, 반드시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이라 이름하며, 오직 제6의식에만 있는 것이다.


此亦二種:一緣邪教所說薀相,起自心相,分別計度,執爲實我;

二緣邪教所說我相,起自心相,分別計度,執爲實我。此二我執麤故易斷,初見道時,觀一切法生空眞如,卽能除滅。

분별기아집(分別起我執)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온(蘊)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자기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하면서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으로, 즉온(卽蘊)의 아집인 즉온아(卽蘊我)이며, 

둘째는 삿된 가르침에서 말하는 자아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자기 마음의 심상(心相)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계탁하면서 집착하여서 참다운 자아인 실아(實我)로 삼는 것이니, 이온(離蘊)의 아집인 이온아(離蘊我, 異蘊我)이다.

이 두 가지 아집은 두드러지기 때문에 끊기 쉬우니, 처음의 견도(見道)의 시기에 일체법의 생공진여(生空眞如)를 관찰하여서 곧 없앨 수 있으며, 보살은 법공무루관(法空無漏觀) 닦음으로써 아집을 없애는 것이다.


如是所說一切我執自心外薀或有或無,自心內薀一切皆有,是故我執皆緣無常,五取薀相妄執爲我。

然諸薀相從緣生故,是如幻有,妄所執我橫計度故,決定非有。

이상과 같이 말한 모든 아집 중에서 자기 마음 밖인 심외온(心外蘊)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니, 제7식에 의해 집착된 자아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나, 제6식에 의해 집착된 자아는 없기도 한 것이며,

자기 마음의 내부의 심내온(心內蘊) 곧 자신의 영상(影像), 즉 친소연(親所緣)은 모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집은 모두 무상한 5취온의 상(相)을 반연하여서 망령되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온(蘊)의 상(相)은 연(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여환(如幻)과 같이 존재하는 것이니, 허망하게 집착한 자아는 제멋대로 계탁한 것으로 반드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외온(心外蘊)= 외부대상인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능연(能緣)이 소연(所緣)을 반연하지만, 그 본질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심외(心外)라 한다.


故契經說,苾芻當知,世閒沙門、婆羅門等所有我見,一切皆緣五取薀起。

그러므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제34권에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라, 세간의 사문(沙門, śrāmaṇa)과 바라문(婆羅門, brāhmaṇa) 등에게 있는 아견들은 모두 5취온을 반연해서 일으킨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문(沙門, śrāmaṇa)= 석존(釋尊) 당시 인도 사상계에는 정통 바라문(婆羅門)의 사상에 대하여, 사문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많이 나타나서 정통사상을 비판하고, 새로운 우주관ㆍ인생관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문은 원래 석존 당시의 새로운 사상가들을 총칭하는 용어였으나 후세에는 불문(佛門)에 출가한 사람을 가리켜서 비구(比丘)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바라문(婆羅門, brāhmaṇa)은 인도 4성(姓) 계급 중의 하나로서, 최고 지위의 사제(司祭)들을 말하며, 그들은 신(神)의 대표자로서 권위를 떨쳤으며, 범행기(梵行期)ㆍ가주기(家住期)ㆍ임서기(林棲期)ㆍ유행기(遊行期)의 네 시기의 생활을 하였다.


實我若無,云何得有憶、識、誦、習、恩、怨等事?

만약 실아(實我)가 없다면 어떻게 기억하고 식별하며, 소리 내어 읽고 익히며, 감사해 하거나 원한을 품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정적으로 외인(外人)의 비판 질문을 설정하여서 그에 대하여 논파하는 것이다.

 

所執實我旣常無變,後應如前,是事非有。前應如後,是事非無,以後與前體無別故。

집착된 실아(實我)는 이미 상주하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후의 것이 이전과 같은 것으로서 변화되지 않은 것이어야 하며, 이전의 것도 이후와 같은 것으로서 변화되지 않아야 하나니, 이후와 이전의 체(體)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론(數論)을 논파한 것으로, 그들에 의하면, 25원리(諦) 중에서 신아(神我, 뿌루사)와 근본자성(根本自性, 쁘라끄리띠)을 제외한 나머지 23법이 아직 변현하지 않은 동안에는 뿌루사는 아직 경계를 수용하지 않으며, 23법이 나타날 때 뿌루사가 그것을 수용한다고 하며, 뿌루사의 체(體)는 상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논주가 비판하기를, 만약 그대들이 집착하는 실아(實我)는 이미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쁘라끄리띠로부터 전변된 나머지 원리들에도 전변되기 이전과 같이 경계를 수용하는 작용이 없을 것이고, 또한 전변 이전의 자아도 전변 이후의 자아와 같이 경계를 수용하는 작용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이후의 것과 이전의 자아의 체(體)가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파한 것이다.


若謂我用前後變易非我體者,理亦不然。用不離體,應常有故。體不離用,應非常故。

만약 자아의 작용이 전후의 변천이 있어서 자아의 본체인 아체(我體)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작용은 본체에서 떠나지 않는, 용불이체(用不離體)이므로, 상주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며,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 체불이용(體不離用)이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然諸有情各有本識,一類相續,任持種子,與一切法,更互爲因熏習力,故得有如是憶識等事,故所設難於汝有失,非於我宗。

정의하자면, 모든 유정은 각각 근본식이 있어서 한 종류인 일류(一類)로 상속하여서 종자를 보존하는 것이니,

제법과 함께 다시 서로의 원인이 되어서 훈습하는 훈습력(熏習力)에 의하여서, 이와 같이 기억하고 식별하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는, 즉 근본식과 7전식(轉識)이 서로 인연이 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기억ㆍ식별력 등의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따라서 시설한 비판은 그대들의 잘못일 뿐 우리의 교의(敎義)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若無實我,誰能造業,誰受果耶?

▷묻습니다; 만약 실아(實我)가 없다면, 누가 능히 업을 짓고 누가 과보를 받는 것입니까?

 

所執實我旣無變易,猶如虛空,如何可能造業受果?若有變易,應是無常。

▷답한다; 집착된 실아는 변천하는 변이(變易)가 없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것이니, 어떻게 능히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인가? 만약 변천이 있다면, 곧 무상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然諸有情心、心所法因緣力故,相續無斷造業受果,於理無違。

▷정의하여서; 모든 유정은 심왕과 심소법의 인연력(因緣力)에 의하여 상속해서 단절되지 않고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我若實無,誰於生死、輪迴諸趣,誰復厭苦求趣涅槃?

▷묻습니다; 만약 자아가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사에서 여러 세계로 윤회하는 것은 누구이며?

다시 고통을 싫어해서 열반을 구하는 것은 누구 입니까?


所執實我旣無生滅,如何可說生死輪迴?常如虛空,非苦所惱,何爲厭捨求趣涅槃?故彼所言常爲自害。

▷답한다; 집착된 실아는 이미 생멸이 없는데, 어떻게 생사에서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은 것이며, 고통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괴로움을 싫어해서 버리고 나아가 열반을 구하겠는가?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항상 자기모순이 되는 것이다.


然有情類身心相續,煩惱業力輪迴諸趣,厭患苦故,求趣涅槃。由此故知定無實我,但有諸識無始時來,前滅後生,

정의하자면; 유정의 무리는 몸과 마음이 상속해서 번뇌력(煩惱力)과 업력(業力)으로써 여러 세계에서 윤회하며, 고통을 싫어하고 근심하기 때문에 나아가 열반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결정코 실아(實我)는 없는 것이나 다만 여러 식(識)들만이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앞의 전(前)이 멸하면 뒤의 후(後)가 생겨나면서,

제8식은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변현하여 끊임없이 상속하고, 제7식도 역시 그러하며,

제6식은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변현하고, 5위무심(位無心, 무상천無想天ㆍ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인 경우를 제외한 다른 때에는 항상 현기(現起)하는 것으로, 

5식은 연(緣)을 따라 현기하는 것이다.

 

因果相續,

원인과 결과, 즉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과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로써 상속하는 것이며, 

 

由妄熏習似我相現,愚者於中,妄執爲我。

허망한 훈습에 의해서 아상(我相)으로 현현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아상(我相)으로 사현된 상분(객관)과 견분(주관)에 망령되게 집착해서 자아로 삼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2

 

或復內識轉似外境,我、法分別熏習力故,諸識生時變似我、法。

혹은 다시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 즉 견분(見分, 주관)이 전변하여 외부의 대상으로의 사현(似現, 인식작용)하는, 즉 상분(相分, 객관)으로 자아(我)와 법(法)으로 분별하면서 훈습하는 힘 때문에,

모든 식이 일어날 때에 변하여 자아(我)와 법(法)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십대논사 중에서 난타(難陀, Nanda) 등의 견해이며, 그는 2분(分)을 건립하지 않고 견분을 능변의 식체(識體)로 하고,   자체,  견분이 전변하여서 마음 밖에 대상으로 사현(似現)하는데,  변화된 것을 상분이라 하며, 이것에 의지해서 자아와 법을 시설한다고 하였다.

 

此我、法相雖在內識,而由分別似外境現。諸有情類無始時來,緣此執爲實我、實法,如患、夢者,患、夢力故,心似種種外境相現,緣此執爲實有外境。似 같을 사, 닮을 사

이 자아(我)와 법(法)의 모습은 비록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에 있지만, 분별에 의해서 외부대상으로 현현하는 것이니, 모든 유정의 무리는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사아사법(似我似法)의 상(相)을 반연하여 집착하여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으로 삼으니,

마치 환자나 꿈을 꾸는 사람이 병이나 꿈의 힘에 의해서 마음이 갖가지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현현하고, 이것을 반연해서 집착하여서 참으로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식이 전변된 식소변(識所變)이라는 용어를 자세하게 해설한 것으로, 흔히 실체로서의 자아나 법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실아실법(實我實法)이 아니라 사아사법(似我似法)이며, 세간과 성교(聖敎)에서 이것을 자아와 법이라고 가설한 것이다.


愚夫所計實我實法都無所有,但隨妄情而施設,故說之爲假,內識所變似我、似法,雖有而非實我、法性,然似彼現,故說爲假。外境隨情而施設,故非有如識,內識必依因緣生故,非無如境,由此便遮增、減二執。

어리석은 범부가 의식 작용으로 여러 사물을 잘 헤아려 분별하여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라고 하는 것 모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다만 허망한 생각을 따라서 시설된 것으로, '삼십송'의 1게송에서 그것을 임시적인 가(假)라고 말하였다.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이 전변하여 사현된 자아인 사아(似我) 사현된 법인 사법(似法)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참다운 자아와 법의 성품이 아닌 것이 그것으로 사현되기 때문에 임시적인 가(假)라고 말하는 것이다.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은 허망한 생각인 정(情) 따라 시설된 것이므로, 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은 반드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처럼 존재하지 않는 비무(非無)이며,

이러한 까닭 문득 증익(增) 감소(減)의  가지 집착을 막는 것이다. 

외경(外境) 변계소집성으로서 ()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외경실유(外境實有)라는 증익(增益) 집착을 막으며,

내식(內識) 의타기성으로서 ()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손멸(損滅) 집착을 막는 것이다.

 

境依內識而假立,故唯世俗有,

외부대상은 내식(內識) 의지해서 가립(假立)되는 것이므로 오직 세속제에서만 존재하는 세속유(世俗有)이며, 

세속제(世俗諦) 범부 소견의 경지이고, 승의제(勝義諦)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경지이다.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사속일진설(四俗一眞說) 바탕을 두고 4() 세속ㆍ승의 2() 건립하여서 세간세속제(世間世俗諦)ㆍ세간승의제(世間勝義諦)ㆍ도리승의제(道理勝義諦)ㆍ증득승의제(證得勝義諦)ㆍ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 구분하며,  

본문에서의 세속제는 세간세속제를 말하며 마음 밖의 대상이란 세간세속제의 허망한 경계인 망경(妄境) 뿐인 것이다.

 

識是假境所依事故,亦勝義有。

식(識)은 허망한 대상이 의지하는 자체인 소의사(所依事)이므로 역시 승의제(勝義諦)에서도 존재하며, 

여기서는 세간승의제(世間勝義諦)를 가리키며, 식이 전변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은 세간승의제인 의타기법일 뿐이다.


云何應知實無外境,唯有內識似外境生?實我、實法不可得故。

참으로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은 없고 오직 내식(內識)만이 있어서 외부대상으로 현현(生)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에 대한 집착을 논파하는 것으로, '유식삼십송'의 취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실아(實我)에 대한 집착을 논파하는 것으로, 세 부류의 외도의 국집된 견해를 열거하고 그것들을 논파하며,

무아(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실아(實我)로 집착하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아치(我痴)에 의한 아집(我執)을 없애지 않고는 참다운 해탈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如何實我不可得耶?

諸所執我略有三種:一者執我體常周遍,量同虛空,隨處造業,受苦樂故;二者執我其體雖常,而量不定,隨身大小有卷舒故;三者執我體常至細如一極微,潛轉身中作事業故。

▷묻습니다; 어찌하여 실아(實我)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입니까?

▷답한다; 모든 집착된 자아에는 대략으로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아는 본체가 상주하고 널리 두루하며, 크기가 허공과 같다고 집착하여서 거처하는 곳을 따라 업을 짓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며,

인도철학사상에서 상캬(Sākhya, 數論)학파나 와이세시까(Vaiśeṣika, 勝論)학파 등의 견해

둘째는, 자아는  본체가 상주하지만 그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신체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감기고 펴짐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며,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에서 무참외도(無慙外道) 빠꾸다 깟짜야나와 니간타 나따뿟따의 견해로써, 사람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으로, 무참외도라고 부른다. 나간타 나따뿟따의 자이나교에서는 나체(裸體) 걸식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무참외도라 한다.

셋째는, 자아라는 본체가 상주하고 지극히 미세해서 하나의 극미와 같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신체 속에 내재하면서 옮겨 다니면서 업을 짓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수주(獸注)ㆍ변출(遍出) 등의 외도의 견해이다.


初且非理,所以者何?執我常遍,量同虛空,應不隨身受苦樂等。又常遍故,應無動轉,如何隨身能造諸業?又所執我,一切有情爲同爲異?若言同者,一作業時一切應作,一受果時一切應受,一得解脫時一切應解脫,便成大過。

 번째의 주장은 바른 논리가 아니니,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집착된 자아가 상주하고 두루하는 것이며, 크기가 허공과 같다고 한다면, 몸을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 등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수론(數論) 인명논리의 방법인 인명작법(因明作法)으로 논파한 것이다

또한 상주하고 두루하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신체를 따라 능히 여러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인가?

승론(勝論) 논파한 것이다.

또한 집착된 자아는 모든 유정이 같은 것도 되고 다른 것도 된다는 것에서 

만약 같다고 말한다면,  사람이 업을 지으면 모든 사람이 짓는 것이어야 하고, 

 사람이 과보를 받는 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받는 것이어야 하며, 

 사람이 해탈할 때에 모든 사람이 해탈해야 하는 것이니, 곧  오류가 있게 되는 것이.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의 동이(同異)를 쌍(雙)으로 논파한 것으로, 외도들이 자아가 상주하여서 법계에 두루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유정의 자아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묻고는, 그 둘 모두의 모순점을 들어서 논파한 것이다.


若言異者,諸有情我更相遍故,體應相雜,又一作業一受果時與一切我處無別故,應名一切所作所受。若謂作、受各有所屬無斯過者,理亦不然,業、果及身與諸我合,屬此非彼不應理故。一解脫時一切應解脫,所修證法一切我合故。

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모든 유정의 자아는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본체가 서로 뒤섞여야 하며,

또한  사람이 업을 짓고  사람이 과보를 받을 때, 모든 사람의 자아와 처소, 즉 자아의 주처(住處)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체가 짓고 받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

만약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에 각각 속하는 바가 있어서 이러한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이치 또한 바른 것이 아닌 것으로, 업(業)과 과(果)  몸(身)은 모든 자아와 합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속하지만 거기에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의 정리(正理)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해탈할 때, 모든 사람이 해탈해야 하며, 닦고 증득한 법이 그 모든 자아와 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中亦非理,所以者何?我體常住,不應隨身而有舒卷,旣有舒卷,如橐籥風應非常住。又我隨身應可分析,如何可執我體 一耶?故彼所言如童豎戲。

 번째의 주장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니니, 자아는 본체가 상주한다고 말하는 까닭 몸(身)을 따라 펴지고 감기는 것 있어서는  되는 것이. 

펴고 감는 일이 있다고 말한 까닭 자루나 피리 속의 바람처럼 상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자아는 몸(身)을 따른다고 말하는 까닭에 분석할  있는 것이어야 것이니, 어떻게 자아의 본체가 하나라고 집착할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 노비들이 모래밭에서 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린 노비들이 모래밭에서 씨름하며 놀 때, 비록 매우 애를 쓰지만 실제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실아(實我)도 역시 그러하다는 조롱어린 신랄한 비판이다.


後亦非理,所以者何?我量至小如一極微,如何能令大身遍動?若謂雖小而速巡身,如旋火輪似遍動者,則所執我非一非常,諸有往來非常一故。

 번째의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니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자아의 크기가 지극히 작아서 하나의 극미와 같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능히  몸의 대신(大身) 두루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작기는 하지만 신속히 몸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횃불을 돌려서 바퀴 모양과 같은 원형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두루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집착된 자아는 하나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나니, 왕래가 있는 모든 것은 상주하거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유정의 신체는 1만 6천 유순(由旬)의 큰 몸의 대신(大身)이라 하는데, 자아의 크기가 극미(極微)와 같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한다면, 한 찰나 중에 어떻게 큰 대신을 두루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비판이다.


又所執我復有三種:一者卽薀,二者離薀,三者與薀非卽非離。

또한 집착된 자아에 다시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의 범부들이 자아의 체(體)가 오온(五蘊)이라고 집착하는 견해의 5온에 즉하는 자아의 즉온아(卽蘊我)이고,

둘째는온과 별개의 자아인 이온아(離蘊我, 異蘊我)이며,

여기서 이(離)는 이(異)의 뜻으로, 자아의 체는 5온과 달리 별도로 있다고 집착하는 외도들의 견해로써, 그들이 온(蘊)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보면 역시 온(蘊)에 해당하는 것이다.

셋째는온에 즉함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자아의 비즉비이온(非卽非離蘊)이다.

소승의 독자부(犢子部)와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한 것으로, 자아의 체는 5온도 아니고 그렇다고 5온을 떠나서 별도의 체가 있는 것도 아닌, 다만 5온을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해서 상속ㆍ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初卽薀我,理且不然,我應如薀,非常一故。又內諸色定非實我,如外諸色有質礙故。心、心所法 亦非實我,不恒相續,待衆緣故,餘行、餘色,亦非實我,如虛空等,非覺性故。

 번째의 오온에 즉하는 자아의 즉온아(卽蘊我)라는 주장 또한 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아가 () 같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상주하는 것이거나 하나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내부의 모든 색법, 즉 오근의 승의근과 그 부진근(扶塵根) 반드시 실아(實我) 아닌 것이니,

외부의 모든 색법처럼 장애함이 있기 때문이며,  

5온(蘊중에서 먼저 색온(色蘊)의 자아(我)를 논파한 것이다.

6식의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법 역시도 실아(實我)가 아니니, 항상 상속하지 않으며

또한 안식(眼識)은 9연(緣), 이식(耳識)은 8연(緣) 등의 중연(衆緣)을 기다려서 심법이 현기(現起)하는 것과 같이, 여러(衆)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나머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나머지 색법인 오경(五境)과 무표색(無表色) 역시 실아가 아니니,

허공 등과 같이 인식주체의 성질인 각성(覺性)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각(覺)은 심왕과 심소의 총칭이다.


中離薀我理亦不然,應如虛空,無作、受故。

 번째의 5온과 별개인 자아라는 이온아(離蘊我, 異蘊我)라는 주장 역시도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허공과 같이 업을 짓거나 과보를 받음 없기 때문이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5온을 떠나서 어딘가에 실재하며 항상하고 편재한 것으로, 마치 허공과 같은 절대적인 자아는 변화와 생멸이 없는 것으로, 신체를 따라 업을 짓고 고락(苦樂) 등의 과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참다운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으로, 실아(實我)의 관념인 절대성은 지니지만, 현실적인 작용성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자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後俱、非我理亦不然,許依薀立,非卽離薀,應如甁等,非實我故。

 번째의 5온에 즉함도 아니고 별개도 아닌 자아의 비즉비이온(非卽非離蘊)이라는 주장도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온에 의하여 건립되기는 하지만, 5온에 즉함도 아니고 5온과 별개도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등의 물체와 같이 실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又旣不可說有爲、無爲,亦應不可說是我非我。故彼所執實我不成。

또한 유위법(有爲法)이라고도 무위법(無爲法)이라고도 말할  없다면, 역시 자아(我)라고도, 자아가 아닌 비아(非我)라고도 말할  없어야 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들이 집착한 실아(實我)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독자부(犢子部)가 주장하는 3세장(世藏)ㆍ무위법장(無爲法藏)ㆍ불가설장(不可說藏)의 5법장(法藏) 중에서 불가설장을 논파한 것이다.


又諸所執實有我體爲有思慮,爲無思慮?若有思慮。應是無常。非一切時,有思慮故。若無思慮,應如虛空,不能作業。亦不受果。故所執我理俱不成。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주의깊게 생각하는 사려(思慮)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사려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상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니, 어느 때나 항상 사려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수론(數論)학파의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만약 사려가 없다고 말한다면, 허공과 같이 업을 지을  없어야 하고 역시 과보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승론(勝論)학파 등의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따라서 집착된 자아라는 집아(執我) 모두는 바른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又諸所執實有我體,爲有作用,爲無作用?

若有作用,如手足等,應是無常。若無作用,如兔角等,應非實我。故所執我二俱不成

또한 대부분 집착하듯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아의 본체는 작용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작용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손이나 발처럼 무상(無常)한 것이어야 하며,

만약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토끼의 뿔처럼 실아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집착된 자아의 작용(作用) 무작용(無作用),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1

성유식론(成唯識論, 산 Vijnaptimatratasiddhi­sastra, 비즈냐프티마트라타싯디 샤스트라),  인도 대승불교 유가유식파의 세친(世親, c. 320~400)이 저술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기반으로 한 논서.

歸敬頌(귀경송)

 

稽首唯識性,滿分淸淨者。
我今釋彼說,利樂諸有情。

유식의 성품인 유식성(唯識性, 법보法寶)와 원만하게 청정하신 부처님(佛寶, 불보)와

부분적으로 청정하신 보살(僧寶, 승보)께 큰절을 올립니다.

저 세친(世親, Vasubandhu)은 오늘 날 그분의 저술인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해설하여서 많은 유정(有情, 중생)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겠습니다.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경례 드리는 게송인 귀경송(歸敬頌)으로서 종전경서분(宗前敬敍分)이라 하며,

안혜(安慧)와 호법(護法) 등 논사들이 세친(世親)의 '삼십송'을 해설할 때, 각각 '삼십송'의 앞부분에는 귀경송(歸敬頌)을, 뒷부분에는 회향송을 첨가하였으며,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 의하면 위 게송은 안혜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유식성(唯識性)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일미진여(一味眞如)로서, 네 가지 지혜의 참다운 성품인 사지실성(四智實性)이며, 법보(法寶)의 총칭이다.

*유정(有情)은 산스끄리뜨인 사뜨와(sattva)의 번역어로서 ‘정식(情識)을 갖고 있는 자’라는 뜻으로, 구역(舊譯)에서는 중생이라고 한다.

 

이하는 저술의 취기(緣起, 취지 또는 이유)
今造此論,爲於二空有迷謬者生正解故,生解爲斷二重障故。由我、法執,二障具生,若證二空,彼障隨斷。斷障爲得二勝果故。由斷續生煩惱障,故證眞解脫,由斷礙解所知障故,得大 菩提。

지금 이 논서를 짓는 취지(趣旨), 즉 '성유식론'을 저술하는 동기 내지 목적인 동시에 유식사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공(二空)인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대하여 미혹하여서 오류가 있는 이들, 구체적으로 성문(聲聞)ㆍ독각(獨覺)ㆍ외도로써 오류에 빠진 자와 중관학파 중에서 허무주의에 빠진 일부 악취공자(惡取空者)들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란, 두 가지의 무거운 장애인 이중장(二重障), 즉 번뇌장(아집)ㆍ소지장(법집)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아(自我, ātman)와 법(法, dharma)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의 무거운 이중장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니, 이러한 이공(二空)을 증득하면, 그러한 장애도 따라서 끊게 되며,

장애를 끊는 것은 두 가지의 뛰어난 증과인 열반과 보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공(我空)의 도리를 깨쳐서 번뇌장을 끊으면 해탈, 즉 열반을 증득하며,

법공(法空)의 도리를 깨쳐서 소지장을 끊으면 곧 큰 깨달음의 대보리(大菩提)를 성취하여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니, 

윤회의 삶, 즉 생(生)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煩惱障)을 끊음으로써 참다운 해탈인 진해탈(眞解脫)의 열반(涅槃, nirvāṇa)을 증득하며,

이해를 장애하는 애해(礙解)의 소지장(所知障)을 끊음으로써 큰 깨달음의 대보리(大菩提)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이상의 내용은 안혜(安慧, Sthiramati) 등이 논서를 저술하는 취지라고 한다.

 

*이공(二空);

아공(我空)은 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하며, 유정의 심신(心身)에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 이치 또는 그것을 깨쳐서 아집(我執)이 소멸된 경지.

법공(法空)은 법무아(法無我)라고도 하며, 외계의 사물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이치, 또는 그것을 깨쳐서 법집(法執)이 소멸된 경지.

 

*자아(我, ātman)는 상주(常主)ㆍ독일(獨一)ㆍ주와(主王)ㆍ사재(司宰)의 특성을 갖으며, 자재(自在)를 자성으로 하며, 유정의 심신(心身) 어디에도 이러한 주체가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의 이치이다.

 

*법(法, dharma)은 궤지(軌持), 즉 갖추어 말하면 임지자성(任持自性) 궤생물해(軌生物解)의 뜻으로, 자성을 보존하고 본보기로 하여 그 사물에 대한 요해심(了解心)을 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법 역시도 인연가화합(因緣假和合)하여 상주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중장(二重障); 두 가지 무거운 장애는 번뇌장과 소지장이다. 이것은 아집과 법집의 두 가지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아집(我執)은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자아(我, ātman 또는 人, pudgala)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법집(法執)은 외계 사물 또는 존재의 구성요소인 법(法, dharma)이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아집에 의해 번뇌장(煩惱障)이 생기고, 법집에 의해서 소지장(所知障)이 생기며,

이 두 장애로 인해서 유정은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又爲開示謬執我法迷唯識者,令達二空,於唯識理如實知故。

▷화변(火辨, Citrabhāna) 등이 논서를 짓는 취지를 나타낸 부분; 또한 그릇되게 자아와 법에 집착하여서 궁극적인 진리(眞理) 이전의 식(識)의 관념인 유식(唯識)에 미혹한 자에게 열어 보여서,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을 통달함으로써 유식의 궁극적인 진리인 유식리(唯識理)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유식(唯識)’에는 궁극적인 진리(眞理)에 도달하기 이전의 유식관(唯識觀)에서 식(識)의 관념으로서의 ‘유식’과

궁극적인 진리(진여, 무분별지혜)로서의 ‘유식(唯識)’ 두 가지가 있으며, 지금은 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식(唯識, vijñapti- mātra)의 갖춘 이름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이며, 오직 식(識)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식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는 대상의 존재는 부정되며,

그것은 다만 식이 전변하여 사현(似現)된 것이기 때문에 실체성이 없으며,

인식상황 속에서 식이 전변(轉變)하여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분화될 때, 우리는 그릇되게 견분(見分)을 실아(實我)로, 상분(相分)을 실법(實法)으로 집착하는데, 사실 그것은 사아(似我)와 사법(似法)으로서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되는 객관인 소취(所取)는 비존재성이므로, 인식하는 주관인 능취(能取)도 비존재성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경식구민(境識俱泯)이라고 한다.

 

*유식리(唯識理)는 일반적으로 유식성(唯識性, vijñaptimātra- tā)으로 말해지는, 곧 진여(眞如, tathatā)와 무분별지(無分別智)이며, 이것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치를 깨쳐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소멸하고, 열반(涅槃)과 보리(菩提)를 증득한 상태, 즉 다시 말하면 전의(轉依)로써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어서 여덟 가지 식(識)이 네 가지의 지혜로 전환된 상태이다.


復有迷謬唯識理者,或執外境如識非無,或執內識如境非有,或執諸識用別體同,或執離心無別心所。

爲遮此等種種異執,令於唯識深妙理中得如實解,故作斯論。

▷호법(護法, Dharmapāla) 등이 논서를 저술하는 취지를 나타낸 것;

또한 유식의 궁극적인 진리에 미혹하여서 잘못 알고 있는 이가 있으니,

혹은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 등에서 주장하는 삼세실유 법체항유설(三世實有法體恒有說)과 같이 외부대상인 외경(外境)은 식(識)과 같이 없는 것이라고 집착하며,

혹은 '성유식론술기'와 같은 중관학파의 청변(淸辨, Bāviveka) 등의 악취공(惡取空)의 견해로는,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은 마치 외부대상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집착하며,

혹은 대승의 일부 보살들은 8식체일설(識體一說), 즉 모든 식의 작용은 다르나 그 자체는 같은 동체(同體)이라고 집착하며,

혹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 설일체유부의 각천(覺天) 등의 주장과 같이 식별작용을 비롯한 정신현상의 주체로서의 심왕(心王, citta), 구체적으로는 8식(識)에서 떠나서 별도의 심소(心所)는 없으나, 다만 수(受)ㆍ상(想)ㆍ사(思)의 세 가지 심소를 인정할 뿐이라고 집착하나니, 

이러한 갖가지의 집착들을 없애고, 유식의 심오하고 미묘한 도리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게 하고자 이 논서를 짓는 것이다.

 

*심소(心所, caitta)는 심왕에 수반되는 심리작용으로, 유식학에는 모두 51가지 심소가 있으며, 심왕과 심소는 체(體)를 달리하나, 상응하여 함께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정종분(正宗分)의 의교광성분(依敎廣成分)


若唯有識,云何世閒及諸聖教說有我法?頌曰:

만약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유식(唯識)이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세간의 범부와 외도와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의 성교(聖敎)인 경전에서 자아와 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식삼십송'의 제1송ㆍ제2송 반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나니;

본 논서의 정종분(正宗分)인 의교광성분(依敎廣成分)이다. 유식상(唯識相)을 밝히는 가운데 먼저 총체적인 대전제(大前提)를 나타내는 총표(總表)이다.


由假說我法,有種種相轉,

자아(我)와 법(法)을 가설(假說)함으로 인하여, 갖가지로 자아와 법의 상(相)들이 생겨나나니, 


彼依識所變。此能變唯三,

가설(假說)된 자아(我)와 법(法), 그것은 식이 전변한 식소변(識所變)의 견분(見分, 주관)과 상분(相分, 객관)에 의지하며, 이 능변식은 오직 세 종류이니, 

자아(ātman)와 법(dharma)을 나타내는 표현이 다양하고 가설적(假說的, upacāra)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식이 전변한 식소변(識所變)에 의한다는 의미이다.


謂異熟思量,及了別境識。
능변식은
이숙식(異熟識)과 사량식(思量識) 및 요별경식(了別境識)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世閒、聖教說有我、法,但由假立,非實有性。

논하여 말한다;  세간과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자아(我)와 법(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임시적인 가설(假)로 건립된 비실유성(非實有性)으로, 자성(自性)을 가지며 실유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실제로 체성(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我, ātman)는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지니는 인격적 실체를 의미하며, 유정(有情)ㆍ명자(命者)ㆍ예류(預流)ㆍ일래(一來) 등 다양하게 표현되며,

사실 이들은 찰나마다 생멸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식(識)의 흐름인 식상속(識相續)으로서, 존속적인 실체가 없으며,

법(法, dharma)은 객체적 존재로서 온(蘊)ㆍ처(處)ㆍ계(界)ㆍ실(實)ㆍ덕(德)ㆍ업(業) 등으로 표현되며, 사실 법은 식의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자아(我)와 법(法)으로 상정된 것들은 실체가 없음에도, 세상과 성전(聖典)에서 가설적으로 방편상 그렇게 개념 지은 것일 뿐이다.

 

我謂主宰,法謂軌持。彼二俱有種種相轉。我種種相,謂有情、命者等,預流、一來等。

‘자아(我)’는 주재(主宰)하는 것을 말하며,

‘법(法)’은 인연가화합(因緣假和合)으로 상주의 실체가 없는 것이나, 자성을 지키고 알게 하는 궤지(軌持), 즉 자성을 보존하고 본보기로 하여서 그 사물에 대한 요해심(了解心)을 내게 하는 것을 말하며,

자아(我)와 법(法), 그 둘은 모두 갖가지의 모습들로 바뀌어 생겨나는(轉) 것이며,

자아(我)의 갖가지 모습은 유정(有情)ㆍ살아 있는 명자(命者) 등과 예류(預流)ㆍ일래(一來) 등을 말하며, 

 

*명자(命者)는 살아 있는 자, 즉 유정이라는 뜻으로, 색심(色心)이 상속하는 것이다.

*예류(預流); 성문(聲聞)의 위계를 예류(預流)ㆍ일래(一來)ㆍ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4과(果)로 나눈 가운데에서

예류(預流, srota-āpanna, 須陀洹 수다함)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有身見ㆍ戒禁取見ㆍ疑)를 끊고 성스러운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말하며,

견도(見道)의 15심(心, 이 기간은 預流向이라고 함) 이후의 제16심, 즉 수도위(修道位)에 들어가게 된 지위를 예류과라고 한다.

*일래(一來, sakṛd-āgamin, 斯陀含사다함)는 예류과 다음으로서, 세 가지 번뇌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3독심(毒心)도 약화시켜서, 이 세상에 한 번만 돌아와서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9품(品) 중 앞의 6품을 끊은 성자이며, 이 과(果)를 얻으면 우선 인간 세상에 한 번 왔다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 장차 열반에 들어가는 것으로, 반드시 인간 세상과 천상을 한 번 왕래하기 때문에 일래(一來)라고 한다.

 

法種種相謂實、德、業等,蘊、處、界等。轉謂隨緣施設有異。如是諸相若由假說,依何得成?彼相皆依識所轉變而假施設。

법의 갖가지 양상은 실체의 실(實)ㆍ속성인 덕(德)ㆍ행위인 업(業) 등과 온(蘊)ㆍ처(處)ㆍ계(界) 등을 말하며,

게송에서 ‘변하여 생겨난다는 전(轉)’이라는 것은 연(緣)에 따라 시설해서 차이가 있으니,

이와 같은 여러 모습을 만약 가설(假說)한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성립되는 것인가?

그 모든 상(相)들은 식이 전변된 식소변(識所變)에 의지해서 가상으로 시설된 것이다.

 

*실(實)ㆍ덕(德)ㆍ업(業)은 인도의 중세 정통 육파철학(六派哲學) 중 하나인 승론(勝論)학파에서 주장한 6구의(句義, 여섯 가지 범주) 중 셋이다.

실(實, dravya)은 질료적(質料的) 원인 즉 속성(德)이나 행위의 업(業)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말하며,

덕(德)은 속성ㆍ성질의 의미로서, 실체의 수동적이고 정적(靜的)인 성질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업(業, karma)은 실체에 속한 행위ㆍ운동을 말한다.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의 3과(科), 즉 일체법을 세 부류로 총합한 것으로,

5온은 유위법에 한정되고 12처와 18계는 유위법과 무위법에 통한다.

*온(蘊, skandha)은 흔히 ‘쌓임’으로 번역되며, 근간적인 부분ㆍ요소라는 뜻으로, 색(色, 물질적인 형체)ㆍ수(受, 감수작용)ㆍ상(想, 표상작용)ㆍ행(行, 유지 결합작용)ㆍ식(識, 식별작용)의 5온으로 구성된다.

*처(處, āyatana)는 들어감의 입(入)ㆍ입처(入處)라는 뜻이며, 일체를 12처(處), 즉 여섯 가지 인식기관인 육내입처(六內入處, 6根)과 여섯 가지 인식대상인 육외입처(六外入處, 六境)으로 분류한다.

*계(界, dhātu)는 부류의 유(類)ㆍ층(層)ㆍ종족(種族)이라는 뜻이며, 일체를 6근계(根界)ㆍ6경계(境界)ㆍ6식계(識界)의 18계로 분류한다.

 

識謂了別,此中識言亦攝心所,定相應故。變謂識體,轉似二分,相、見俱依自證起故,依斯二分施設我、法,彼二離此無所依故。

‘식(識, 위냐나 vijñāna)’이란 요별하는, 즉 ‘식별작용’ ‘식별작용을 지닌 주체’를 말하며,

또한 이 게송 중에서 식(識)이라는 말은 또한 심소(心所)도 포함하나니, 식(識)과 전변(轉變)의 개념으로, 반드시 상응하기 때문이며,

‘변(變)’이라 말한 것은, 식의 자체인 식체(識體)가 전변하여서 두 가지의 심분(心分)인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으로 사현(似現, 인식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나니,

객관으로서의 식인 상분(相分)과 주관으로서의 식인 견분(見分)은 모두 자증분(自證分)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2분(二分)에 의지해서 자아(我)와 법(法)을 시설하나니, 

자아(我)와 법(法), 이 두 가지는 견분과 상분을 떠나서는 의지처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이기 때문이다.

식체(識體), 즉 자체분(自體分)이 변현하여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되며, 이 2분(分)을 식소변(識所變)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견분과 상분의 자체의 유무(有無)에 관하여 안혜와 호법의 견해 차이가 있다.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안혜(安慧)는 일분가(一分家)로서, 오직 자체분만이 의타기성의 유체법(有體法)이고, 견분ㆍ상분은 변계소집성의 무체법(無體法)으로 간주하고 이를 총무(總無)라고 하며, 이 총무(總無)인 견분과 상분에 의해 별무(別無)인 자아ㆍ법을 가립한다고 하였고,

호법(護法)은 3분(分)이 모두 의타기성의 유체법(有體法)으로서, 이 유체인 견분ㆍ상분에 의해 자아ㆍ법을 가립한다고 하였다.

 

*사현(似現, pratibhāsa)의 현현(顯現ㆍ변사 變似)라고도 하며, 식이 인식대상을 닮은 형상을 띠는 작용을 말한다. pratibhāsa는 원래 물에 비친 달 등의 영상을 의미하는 용어였는데, 유식교학에서는 마음속에 나타난 사물의 영상 또는 주체 쪽의 인식작용을 의미하게 되었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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