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아뢰야식과 상응하는 5변행심소(遍行心所), 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을 설명함
此識與幾心所相應?常與觸、作意、受、想、思相應。阿賴耶識,無始時來,乃至未轉,於一切位,恒與此五心所相應。以是遍行心所攝故。
이 식(識)은 몇몇 심소(心所)와 상응하는가?
항상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와 상응하며, 아뢰야식은 아득한 옛부터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를 이루기 이전의 금강무간도(金剛無間道)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위에서 항상 이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와 상응하나니,
이것은 두루 작용하는 심소인 변행심소(遍行心所)이기 때문이다.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 수행에 의해 ‘소의(所依, 의타기依他起)를 전환시키는 것’을 말하는, 즉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 의타기성, 8식 혹은 지종의持種依인 아뢰야식)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로부터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번뇌에 오염된 8식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되는 전식득지(轉識得智)하여서, 아뢰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5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된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8식 모두에 언제나 상응해서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으로, 이 심소는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 모두에 두루 일어나며, 3계(界)ㆍ9지(地)의 일체제(一切地)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으로,
유심무심(有心無心)의 모든 순간의 일체시(一切時)에 일어나고, 변행의 5심소는 언제나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이다. 이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가 있다.
촉(觸, sparśa) 심소
觸謂三和、分別變異,令心、心所,觸境爲性,受、想、思等所依爲業。
‘촉(觸, sparśa)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세 가지의 화합인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달라지는 변이(變異)하여서 분별(分別)하는 것을 말하며,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체성(體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는다.
체성(性)은 직접적인 작용을, 업용(業)은 간접적인 작용을 말하며, 이하에서는 심소의 해설에 있어서 모두 이 체성과 업의 두 작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촉(觸, sparśa) 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즉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최초의 접촉에 해당되며, 이로써 인식의 장(場)이 열리게 된다.
안근(眼根)과 색경(色境)이 연(緣)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고, 세 가지(根ㆍ境ㆍ識)의 화합이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촉심소를 일어나게 하며, 반드시 촉심소에 의해 심왕ㆍ심소가 화합하여 하나의 대상에 접촉하게 된다.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란 감각기관인 소의근(所依根)ㆍ식은 능연식(能緣識)ㆍ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으로, 여기서 촉(觸, sparśa)심소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촉은 결과(果)이고, 세 가지의 화합은 원인(因)이며,
삼사화합(三事和合)가 화합하는 곳에서 촉이 생겨난다고 하는 삼화생촉설(三和生觸說)은 설일체유부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경량부는 삼화성촉설(三和成觸說)을 주장하여서 세 가지가 화합하는 곳이 바로 촉이며 별도로 새롭게 촉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변이(變異)의 뜻은,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이 각각 별도로 있을 때에는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나, 셋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각자의 작용을 현현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세 가지가 화합될 때는 뛰어난 작용을 일으켜서 이전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여기에서 변이(變異)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분별(分別)은 상사(相似)의 의미로서, 일반적인 사유분별에서의 분별이 아니며, 본문에서 변이(變異)한 것에서 분별한다는 뜻은, 즉 세 가지 근경식(根ㆍ境ㆍ識)이 화합하여 촉이 생겨나고, 이 때의 셋은 화합 이전과 크게 다른 변이(變異)한 것으로써 생겨난 촉은 다시 셋의 화합을 강화시켜서 모두 대상에 접촉하게 한다.
이 때에는 촉이 원인(因)이고 셋의 화합은 결과(果)가 되며,
본문에서 분별, 즉 상사(相似)란 첫째, 세 가지의 화합된 상태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고,
둘째, 세 가지의 화합으로써 촉을 생겨나게 한 것과 비슷하게 수(受) 등을 일으키는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작용을 가리킨다.
謂根、境、識更相隨順故,名三和。觸依彼生,令彼和合,故說爲彼。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이 다시 서로 수순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화합인 삼화(三和)라고 이름하며,
촉(觸)심소가 그 근경식(根ㆍ境ㆍ識)에 의해서 생기(生起)하고, 그 셋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촉(觸)을 세 가지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말한 뜻을 다시 부연 설명한 것으로,
첫째, 촉이 근경식(根ㆍ境ㆍ識)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는 셋의 화합인 삼화(三和)를 원인(因)으로 하며,
둘째, 근경식(根ㆍ境ㆍ識)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는 경우는 셋의 화합인 삼화(三和)를 결과(果)로 한다.
이와 같이 인과(因果)에 따라서 촉을 세 가지의 화합인 삼화(三和)라고 말한다.
三和合位,皆有順生心所功能,說名變異。觸似彼起故,名分別。根變異力,引觸起時,勝彼識、境故,集論等,但說分別根之變異。
그러므로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그것을 삼사화합이라고 하며, ㅡ'아함경'에서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셋이 화합된 것이 촉이라는 근경식 삼사화합 촉(根境識 三事和合 觸)”라고 말씀하셨다.ㅡ
삼사가 화합(和合)하는 단계(位)에서 모두 수순하여 심소를 일으키는 작용인 공능(功能)이 있는 것을 변이(變異)라 이름하며,
촉이 그 삼사화합에 비슷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분별(分別)이라 이름하며,
감각기관의 변이(變異)의 힘이 촉을 이끌어 일어나게 할 때, 근(根)의 작용이 그 식(識)ㆍ대상(境)보다 뛰어나므로 '집론(集論)' 등에서 다만 감각기관의 변이(變異)에서 분별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다른 논서와의 차이점을 회통한 것으로, 세 가지의 화합 작용에 비슷하게 됨으로써 변이(變異)하여 분별하게 한다고 말하면, 어째서 '집론(集論)' 등에서 감각기관(根)의 변이에 있어서 분별하는 것으로써 체(體)로 삼는다고 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 여기서 답변한 것이다.
즉 사실은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셋이 모두 촉을 이끌어 내지만, 그 중에서 감각기관의 변이의 힘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집론' 등에서는 다만 그 뛰어난 측면만을 말한 것일 뿐, 본 논서와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회통한 것이다.
和合一切心及心所,令同觸境,是觸自性。旣似順起心所,功能故,以受等所依爲業。‘起盡經’說受、想、行薀,一切皆以觸爲緣故。
모든 심왕과 심소를 화합하여서 다 같이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이 촉의 자성이며,
이미 수순해서 심소를 일으키는 작용, 즉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식(識)의 화합의 작용인 삼화공능(三和功能)에 비슷하게 됨으로써 수(受)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니,
'기진경(起盡經)'에서 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의 모두, 즉 수(受)ㆍ상(想)ㆍ행(行)의 3온(蘊)에 포함되는 모든 심소가 한결같이 촉을 연(緣)으로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한 것으로,
촉의 자성(體性), 즉 직접적인 작용은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화합을 강화해서 대상에 접촉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촉의 업용(業用), 즉 간접적인 작용은 세 가지의 화합이 촉의 심소를 생겨나게 했듯이, 촉이 이미 수순해서 그 작용에 비슷하게 되는 상사(相似), 즉 분별하여서 수(受) 등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되는 것을 말한다.
由斯故,說識、觸、受等,因二、三、四和合而生。
그러므로 식(識)ㆍ촉(觸)ㆍ수(受) 등은 둘(根境)ㆍ셋(根境識)ㆍ넷(根境識觸)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하나니,
식(識)은 감각기관(根)과 대상(境)의 두 가지,
촉(觸)은 근(根)ㆍ경(境)ㆍ식(識)의 세 가지,
수(受)는 근(根)ㆍ경(境)ㆍ식(識)ㆍ촉(觸)의 네 가지가 화합하는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瑜伽但說與受、想、思爲所依者,思於行薀,爲主勝故,擧此攝餘。
'유가사지론'에서 촉이 다만 수(受)ㆍ상(想)ㆍ사(思) 심소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된다고 말한 것은,
사(思)심소가 행온(行蘊) 중에서 주가 되고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이것을 거론하여서 다른 것을 포함시킨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논서와의 차이점을 회통하는 부분으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3권과 제55권에서 촉(觸)이 수(受)ㆍ상(想)ㆍ사(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된다고만 말하고, 어째서 다른 심소의 소의가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점에 대한 것을 회통한 것이다.
集論等說爲受依者,以觸生受近而勝故。謂觸所取,可意等相與受所取,順益等相,極相鄰近,引發勝故。
'집론' 등에서 수(受)의 의지처가 된다고 말한 것은, 촉이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데 가깝고 뛰어나기 때문이며,
촉의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가의(可意) 등의 모습과 수(受)의 인식대상의 순익(順益)등의 모습이 서로 아주 가까워서 이끌어 내는 인발(引發)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집론(集論)' 등에서 촉이 오직 수(受)의 의지처가 된다고 말한 뜻을 회통한 것으로,
촉의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가의(可意)ㆍ불가의(不可意)ㆍ구상위(俱相違)의 상과
수(受)의 인식대상의 순익(順益)ㆍ손해(損害)ㆍ구상위(俱相違)의 상이 매우 비슷하고,
촉(觸)이 수(受)를 이끌어 내는 것이 다른 심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회통한다.
然觸自性是實非假。
그런데 촉의 자성은 참된 실(實)이며, 임시적인 가(假)가 아니니,
경량부에서 삼화성촉설(三和成觸說), 즉 셋이 화합하는 곳이 바로 촉(觸)이라고 하여서 촉이 가법(假法)으로서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하고, 촉은 실법(實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六六法中,心所性故,是食攝故能爲緣故,如受等性,非卽三和。
6식(識)ㆍ6촉(觸)ㆍ6수(受)ㆍ6상(想)ㆍ6사(思)ㆍ6애(愛)의 여섯 가지의 6법(六法) 중에서 심소의 자성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식(識)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능히 연이 되는 능연(能緣)이 되기 때문이고, 수(受) 등의 체성과 같이 세 가지 화합 그 자체가 곧 촉이 아닌 것이다.
촉(觸)이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하는 네 가지 음식작용물인 사식(四食),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 중의 하나임을 가리킨 것으로, 4식(食)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2권 10리증(理證) 중의 4식증(食證) 부분에서 다루었다.
작의(作意, manasikāra)심소
作意謂能警心爲性,於所緣境引心爲業。謂此警覺應起心種,引令趣境故名作意。雖此亦能引起心所,心是主,故但說引心。
‘작의(作意, manasikāra)심소’는 능히 심왕을 경각(警覺)시키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하고,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 쪽으로 심왕을 이끄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하며,
이것이 일으켜야 하는 심왕의 종자인 과구유(果俱有)를 경각시키고 이끌어서 대상으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의(作意)라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은 심소도 능히 이끌어 일으키지만, 심왕이 주체이기 때문에 다만 심왕을 이끈다고 말한다.
작의(作意, manasikāra)는 경각(警覺)의 뜻으로, 이 경각에는 종자경각(種子警覺)과 현행경각(現行警覺)의 두 가지가 있으며,
종자경각(種子警覺)은 작의(作意)의 종자가 다른 심왕ㆍ심소의 종자를 경각하여 현행시키는 것을 말하고,
현행경각(現行警覺)은 작의가 현행하여 다른 심왕ㆍ심소의 현행을 경각시켜서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有說令心迴趣異境,或於一境持心令住故,名作意。彼俱非理。應非遍行不異定故。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11권에서는 작의(作意)가 심왕을 다른 대상으로 돌려서 향하게 한다고 말하며,
'대법론(對法論)' 제1권에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심왕을 지녀서 머물게 하기 때문에 작의(作意)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모두는 옳지 않은 것으로, '순정리론(順正理論)'의 견해는 변행심소가 아니며,
'대법론(對法論)'에서 잡집사(雜集師)의 견해는 정(定)심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수(受, vedāna) 심소
受謂領納順、違、俱非境相爲性,起愛爲業。能起合、離、非二欲故。
‘수(受, vedāna)심소’는 수순함(順)과 거슬림(違), 수순도 거슬림도 아닌 구비(俱非)의 대상인 경상(境相)을 받아들이는 것을 체성(性, 직접적인 작용)으로 삼고,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업(業, 간접적인 작용)으로 삼으며, 능히 화합과 떠남의 합리(合離) 및 화합도 떠남도 아닌 비합리(非合離)의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수(受, vedāna)심소는 ‘감수작용’ ‘느낌’의 심소이며, 고(苦)ㆍ낙(樂)ㆍ사(捨)의 3수(受)가 있다.
또는 3수에 우수(憂受)ㆍ희수(喜受)를 더하여 5수(受)를 말하기도 하며,
능히 수순ㆍ거슬림ㆍ중용의 대상을 받아들여서 심왕으로 하여금 기쁨이나 괴로움 등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낙수(樂受)에 있어서는 아지 얻지 못한 미득(未得)의 낙(樂)에는 합하기를 바라는 (구하는) 욕(欲),
이미 얻은 이득(已得)의 낙(樂)에서는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고수(苦受)에 있어서는 미득(未得)의 고(苦)에는 합하지 않기를 좋아하고(樂),
이득(已得)의 고(苦)에는 떠나기를 좋아하며,
둘 다 아닌 불락불고(不樂불不苦)에 대해서는 앞의 두 가지가 아닌 것을 말한다.
有作是說。受有二種:一境界受謂領所緣;二自性受,謂領俱觸。唯自性受是受自相,以境界受共餘相故。
'아비달마순정리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나니,
수(受)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경계수(境界受)로써 인식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자성수(自性受)이니, 함께 일어난 촉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오직 자성수가 수(受)의 자상(自相)이니, 경계수는 다른 법(다른 심왕ㆍ심소)과 공통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彼說非理。受定不緣俱生觸故。若似觸生名領觸者,似因之果應皆受性。又旣受因應名因受,何名自性?
위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수(受)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구생촉(俱生觸)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촉에 비슷하게 생겨난다고 해서 촉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름한다면, 원인(因)에 비슷한 결과인 등류과(等流果)는 모두 수(受)의 자성이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이미 원인을 받아들이므로 인수(因受)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어떻게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촉(觸)은 능히 수(受)를 일으키므로 수(受)의 원인이다. 따라서 원인(因)을 받아들이는 영납(領納)이므로 인수(因受)라고 이름해야지,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하지 않아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若謂如王食諸國邑,受能領觸所生受體名自性受,理亦不然。違自所執,不自證故。
만약 국왕이 나라의 모든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수(受)가 능히 촉에 의해 생겨난 수(受)의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성수라고 이름하는 것 역시도 논리가 그렇지 않은 것이니, 자신이 집착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나라의 모든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것은 직접 고을의 땅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생겨난 쌀 등을 먹는 것이며, 의지처인 소의(所依)인 땅에 따라서 고을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受, 즉 王)가 능히 촉(觸,고을)이 생겨나게 한 수(受)의 자체(쌀 등)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지처인 촉에 따라서 촉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수(受)가 수의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니, 그대는 이것을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하는 것이나, 이것은 그대가 주장하듯이 심왕 등은 자체를 반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위배된다고 논파한 것이다.
若不捨自性名自性受,應一切法皆是受自性。故彼所說但誘嬰兒。
然境界受非共餘相。領順等相定屬己者,名境界受,不共餘故。
만약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성수(自性受)라고 이름한다면, 제법은 한결같이 수(受)의 자성이어야 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다만 어린아이를 유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경계수(境界受)는 다른 법(심왕ㆍ심소)과 공통되지 않는 것이니, 수순(順) 등의 모습을 받아들여서 반드시 자신에게 소속시키는 것을 경계수라고 이름하는 것이므로 다른 것에는 공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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