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8
故'瑜伽'言若此六識爲彼六識等無閒緣,卽施設此名爲意根。若五識前後定唯有意識,彼論應言。若此一識爲彼六識等無閒緣。或彼應言若此六識,爲彼一識等無閒緣。旣不如是。故知五識有相續義。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 52권에서, 만약 이 6식을 그 6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면, 곧 이를 시설해서 의근(意根)으로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5식의 전후 찰나에는 오직 의식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논서에서는 곧 만약 이 일식(一識, 의식)을 그 6식의 등무간연으로 한다거나, 혹은 거기에서 만약 이 6식을 그 일식(一識, 의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고 말하였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와 같지 않으니, 그러므로 5식은 상속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五識起時必有意識,能引後念意識令起。何假五識爲開導依?無心睡眠、悶絕等位,意識斷已。後復起時藏識、末那,旣恒相續,亦應與彼爲開導依。若彼用前自類開導,五識自類何不許然?此旣不然彼云何爾?
5식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의식(意識)이 있어서, 능히 다음 찰나의 의식(意識)을 이끌어 일어나게 하나니, 어째서 5식을 의뢰해서 개도의(開導依)로 삼는 것인가?
무심위의 수면ㆍ기절 등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단절되며, 이후에 다시 일어날 때에는 장식과 말나식이 이미 항상 상속함으로써, 역시 그 제6식의 개도의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를 사용해서 열어서 인도하는 개도(開導)한다고 한다면, 오식의 자류(自類)는 어째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 5식이 이미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그 제 6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7식과 8식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서 극히 친밀하여 불가분(不可分)하다. 의장(依仗)의 입장에서 말하면 말나식은 능의(能依)가 되고 아뢰야식은 소의(所依)가 된다. 8개식(八個識)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은 모두 소의(所依, 의지처)가 있으니 소의(所依)에는 3종(三種)이 있다.
① 종자의(種子依), 인연의(因緣依)라고도 하며, 제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지해야 생기(生起)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밖에 환경조건을 연(緣)이라 하여서 이를 종자의(種子依)라 한다.
② 증상의(增上依), 구유의(俱有依)라고도 하며,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③ 무등간연의(無等間緣依), 개도의(開導依)라고도 하며,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같아서 등이라 하고 상속(相續)하여 부단(不斷)하므로 무간이라 한다. 이는 전념이 후념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됨을 말한 것으로 생각이란 전념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곧 지난 과거의 관념에 의해 생기(生起)함을 뜻한다. 만약에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틈이 생긴다면 생각이 재생(再生)할 수 없고 전현(轉現)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개도(開導)란 전념이 후념을 개도한다는 뜻이니 과거의 잘못을 귀감삼아서 미래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ㅡ 월제
平等性智相應末那初起,必由第六意識。亦應用彼爲開導依。圓鏡智俱第八淨識,初必六、七方便引生。又異熟心,依染污意。或依悲願相應善心。旣爾必應許第八識,亦以六、七、爲開導依。由此彼言都未究理。
평등성지(平等性智)와 상응하는 제7식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제6의식에 의지하며, 역시 그 제 6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아야 하며,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함께하는 제8청정식은 처음에는 반드시 제6식과 제7식의 방편에 이끌려 생겨나며,
또한 이숙심은 염오의(染汚意)에 의지한다고 '섭대승론석' 제3권에서 말하며,
또는 비원(悲願)과 상응하는 선심(善心, 착한 심왕)에 의지한다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5권에서 말하나니,
그러하다면 반드시 제8식은 역시 제6식과 제7식으로 개도의로 삼는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의 주장은 모두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모든 것을 알게 됢으로써 자타(自他)가 평등하며 둘이 아닌 불이(不二)라는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로서, 이 지혜에서 발현되는 마음은 평등(平等)과 불이(不二)의 앎에서 조건 없이 일어나는 대자비심(大慈悲心), 즉 무연대비(無緣大悲: 인연이 없어도 자비를 베풀음, 즉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으로서의 자비심), 즉 모든 유정의 성불을 염원하고 실천하는 모든 부처와 여래의 대자비(大慈悲)와 대비원(大悲願)의 마음이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일체종지(一切種智) 즉 우주의 모든 것을 아는 불지(佛智) 즉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한다. -위키
應說五識前六識內隨,用何識爲開導依。第六意識用前自類,或第七、八爲開導依。第七末那用前自類,或第六識爲開導依。阿陁那識用前自類,及第六、七,爲開導依。皆不違理。由前說故。
5식은 이전 찰나의 6식 속에서 수순하여 어떤 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제 6의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나 혹은 제7식과 제8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으며,
제 7말나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나 혹은 제6식을 사용해서 개도의로 삼으며,
아타나식(무구식)은 이전 찰나의 자기 부류와 제6식과 제7식을 개도의로 삼는 것이라 하는 것은 모두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으니, 앞에서 말한 것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아타나식(阿陀那識, ādāna-vijñāna)은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발음하기도 하고 타나식(陀那識)이라고도 하며, 집지식(執持識)이라고 한다.
집지(執持)는 산스크리트어 아다나(ādāna)의 번역어이며, 집지(執持)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붙잡아 유지한다'이며, 아타나식 또는 집지식은 제8식 즉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으로, 유루 · 무루의 모든 종자와 신체인 색근(色根)을 유지해서 무너지지 않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아타나식이라는 명칭은 뢰야3위 가운데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에 관련하여 사용되며, 이 때의 아타나(阿陀那) 즉 집지(執持)는 오로지 순(純)무루의 종자만을 상속 · 유지한다는 뜻이며, 오직 불과(佛果) 즉 여래지(如來地)인 부처의 경지에서만 존재하며, 이러한 무루 · 청정의 뜻에서는 아타나식은 제8식의 다른 명칭인 무구식(無垢識)과 동의어이다.
한편, 구역가(舊譯家)의 입장은 위와 같은 법상종 등의 신역가(新譯家)와 달리, 아타나를 집아(執我: '나'라고 집착한다)의 뜻으로 해석해서 아타나식을 제7말나식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한다.- 위키
有義。此說亦不應理。開導依者謂有緣法爲主,能作等無閒緣。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주장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개도의(開導依)는 인식대상, 즉 소연(所緣)을 갖는 유연법(有緣法), 즉 능연(能緣)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개도의(開導依)가 되어서 심(尋) 심소를 인생(引生)할 수 없다는, 곧 색법ㆍ불상응행법ㆍ무위법은 개도의가 될 수 없음을 말하며,
소연을 갖는 유연법(有緣法)이 주(主)가 되어서 자재하는 힘이 있어야 능히 심(尋) 심소를 인생(引生)하는 등무간연(개도의)이 되는 것을 말한다.
곧 이것은 의(疑)심소법은 개도의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종류의 식, 타인의 식, 후시(後時)의 심왕을 전시(前時)의 심왕에 배대한 것으로, 구시(俱時)의 심(尋)심소라는 주장을 논파한 것이다.
此於後生心、心所法,開避引導名開導依。此但屬心非心所等。
개도의(開導依)는 소연을 갖는 유연법(有緣法)ㆍ주체가 되는 위주(爲主)ㆍ등무간연의 세 가지 뜻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이 후에 생겨나는 심왕과 심소법에 대해서 열어 피하하는 개피(開避)하고 인도(引導)하므로 개도의라 이름하며,
이것은 다만 심왕에만 속하고 심소(마음작용) 등이 아닌 것이다.
若此與彼無俱起義,說此於彼有開導力。一身八識旣容俱起,如何異類爲開導依?
만약 이 전념(前念)의 심왕(마음)이 그 후념(後念)의 심왕ㆍ심소(마음작용)와 함께 일어나는 뜻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그것에 대해서 열고 인도하는 힘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한 몸에 8식이 함께 일어난다고 이미 허용하였거늘, 어찌 다른 부류의 8식을 개도의로 삼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말한 주장을 논파한 것으로, 다른 종류의 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 없다면, 다른 종류의 식이 개도의(開導依)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며,
다른 종류의 식이 함께 일어난다면, 다른 종류의 식에 개도의의 뜻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따라서 둘 다 건립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若許爲依,應不俱起。便同異部心不竝生。
만약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개도의로 삼는다고 인정한다면, 8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곧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에서 심왕(마음)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며,
又一身中,諸識俱起,多少不定,若容互作等無閒緣,色等應爾。便違聖說,等無閒緣唯心、心所。
또한 일신(一身)에서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어느 정도 일정하지 않으므로,
만약 서로 등무간연이 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색법 등도 그러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유가사지론' 제38권의 성교(聖敎)에서 등무간연은 오직 심왕과 심소뿐이라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然'攝大乘'說色亦容有等無閒緣者,是縱奪言。謂假縱小乘色心,前後有等無閒緣,奪因緣故。不爾,等言應成無用。
그런데 '섭대승론'에서 색법에도 역시 등무간연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 것은, 수순하고 부정하는 종탈(縱奪)의 말이니, 소승에서 신체와 마음의 색심(色心)이 전후하여 등무간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가정적으로 좇아서 인연을 부정한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등무간연'의 등(等)이라는 말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若謂等言,非遮多少,但表同類,便違汝執異類識作等無閒緣。是故八識,各唯自類爲開導依,深契教理。自類必無俱起義故。心所此依應隨識說
만약 '등(等)'이라는 말이 다소(多少)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다만 같은 종류임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곧 그대들이 다른 종류의 식이 등무간연이 된다고 국집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8식은 각자 오직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로써 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성교(聖敎)와 바른 논리에 깊이 계합하나니,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니,
심소(마음작용)의 이 의지처는 식을 따라 말해야 하는 것이다.
雖心、心所異類竝生,而互相應。和合似一定俱生滅。事業必同。一開導時餘亦開導。故展轉作等無閒緣。諸識不然。不應爲例。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는 다른 종류로서 나란히 일어나기는 하지만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화합해서 하나가 된 것과 비슷하며, 반드시 함께 생멸하는 것이나, 하는 일이 반드시 같은 것이다.
하나(심왕, 마음)가 열고 인도할 때에는, 다른 것(심소, 마음작용)도 역시 열고 인도하므로, 따라서 전전하여 등무간연이 되나, 모든 식(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 예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然諸心所非開導依。於所引生無主義故。若心、心所等無閒緣各唯自類,第七、八識初轉依時,相應信等此緣便闕。則違聖,說諸心、心所皆四緣生。
그런데 모든 심소(마음작용)는 개도의가 아니니, 이끌려 생겨나는 인생(引生)한 것에 대해서 주체의 뜻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심왕(마음)과 심소(마음작용)의 등무간연은 각자 오직 자기 부류뿐이라고 말한다면,
제7식과 제8식이 처음 전의(轉依)할 때에 상응하는 신(信)심소 등에는 이 연(緣)이 없게 되며,
만약 그러하다면 곧 성교(聖敎)에서 모든 심왕과 심소는 네 가지의 사연(四緣)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씀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無心睡眠、悶絕等位,意識雖斷,而後起時,彼開導依卽前自類。閒斷五識應知亦然。無自類心於中爲隔,名無閒故。彼先滅時,已於今識爲開導故。何煩異類爲開導依?
무심위의 수면과 기절 등의 상태에서 의식은 단절되긴 하지만, 이후에 일어날 때 그것의 개도의는 곧 이전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이며, 단절됨이 있는 5식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의 심왕(마음)에 중간의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이전에 멸할 때에는 이미 지금의 식에 대해서 개도(開導)가 되었기 때문이니,
어찌 번거롭게 다른 종류로써 개도의로 삼겠는가?
然聖教中,說前六識互相引起,或第七、八依六、七生,皆依殊勝增上緣說,非等無閒。故不相違。
그런데 성스러운 가르침인 성교(聖敎)에서 6식이 서로 이끌어 내며, 혹은 제7식과 제8식은 제6식과 제7식에 의지해서 생겨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수승한 증상연에 의지해서 말한 것일 뿐, 등무간연이 아니므로 따라서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瑜伽論'說若此識無閒諸識決定生,說此爲彼等無閒緣。又此六識爲彼六識等無閒緣,卽施設此名意根者,言摠意別亦不相違。故自類依深契教理。
'유가사지론' 제 85권에서 말하기를, 만약 제 8식의 다음 찰나에 모든 식이 결정적으로 생겨난다면, 이것을 그 제 8식의 등무간연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 6식을 그 6식의 등무간연으로 삼으니, 곧 이것을 곧 시설해서 의근(意根)이라고 이름하는 것에서, 의근(意根)이라는 그 말(言)은 총체적이나, 뜻(意)은 개별적이므로 역시 위배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로써 의지처(개도의)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교(聖敎)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깊이 계합하는 것이다.
傍論已了應辯正論。此能變識雖具三所依,而依彼轉言,但顯前二。爲顯此識依、緣同故。又前二依有勝用故。或開導依易了知故。
▷정의한다; 기타의 방론(傍論)은 이미 요별하였고, 마땅히 정론(正論)을 판별하리라.
이 능변식(能變識)에 비록 (이숙식, 사량식, 요별경식) 세 가지 의지처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는 “제8식에 의지해서 유전한다”고 한 것은 다만 앞의 인연과 증상연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능변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같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앞의 두 가지 의지처는 수승한 작용이 있기 때문이며, 혹은 개도의는 알기 쉽기 때문인 것이다.
識所變相雖無量種,而能變識類別唯三:一謂異熟,卽第八識,多異熟性故;二謂思量,卽第七識,恒審思量故;三謂了境,卽前六識,了境相麤故。及言顯六合爲一種。此三皆名能變識者。
‘식이 전변한 것의 식소변(識所變,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의 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식(能變識)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으로, 곧 제8식이며, 대부분 이숙성(異熟性)이기 때문이며,
(유식삼십송의 제1ㆍ2 게송 중 앞의 본 논서 제1권에서 말한 “이 능변식……”의 세 구를 설명한다)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며,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식(能變識)이라 이름한다. 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 권 4
능변(能變, pariṇāma)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변화시킬 수 있음'이며, 파리나마는 다음의 뜻을 갖는다.
변화(change), 변경(alteration), 변형(transformation), 발달(development), 진화(evolution)
익음(ripeness), 성숙(maturity), 음식의 변질(alteration of food), 소화(digestion)
시듦(withering), (색이) 점점 희미해짐 또는 바램(fading), (시간의) 경과(lapse [of time])
(나이가 들어) 쇠퇴함(decline [of age]), 늙어감(growing old), 결과(result, consequence), 결말(issue, end) - 위키
如是已說此識所依,所緣云何?謂卽緣彼。彼謂卽前此所依識。聖說此識緣藏識故。
이상과 같이 이 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말하였는으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그것을 반연한다”고 말한 것에서 ‘그것’이라는 것은 곧 앞에서 말한 제 7식의 의지처인 제 8식이며, 이 식은 장식을 반연한다고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와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의 성교의 가르침인에서 말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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