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4  9

 

有義。此意緣彼識體及相應法。論說末那,我、我所執,恒相應故。謂緣彼體及相應法。如次執爲我及我所。

난타(難陀) 등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말나식(意)   8 체(體, 자체) 상응하는 (심소, 마음작용) 반연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말나식은 나(我) 아소(我所, 나의 소유)라는 집착과 항상 상응한다고 말한 때문이니,

그것의 자체와 상응법을 반연하고 집착하여서 나(我)ㆍ나의 소유(我所)로 삼는다고 하였다

난타 견해로써,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처인 소의(所依) 생기하는 동시  그것을 대상인 소연(所緣)으로 인식작용을 한다여기서 구체적으로 아뢰야식 중의 어느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가?  아뢰야식의 자체분(自體分)인가 견분(見分)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며, 이에 인도 유식 논사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가지 학설로 정리할 수 있다

난타(難陀)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자체분을 나(我) 삼고 상응법인 심소(心所)를 나의 소유인 아소(我所) 삼는다고 하였고,

화변(火辨) 아뢰야식의 견분을 나(我) 삼고 상분을 나의 소유(我所) 삼는다고 보았으며,

안혜(安慧) 아뢰야식을 나(我) 삼고 종자를 나의 소유(我所) 삼는다고 말하였으며,

호법(護法) 아뢰야식의 견분을 나(我) 삼는다고 주장하였다

 

然諸心所不離識故,如唯識言無違失。

그런데 모든 심소(마음작용)는 식(識)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유식(唯識)이라는 말과 같이 성교(聖敎) 위배되는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

'삼십송'의 5게송에서 그것을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심소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그러나 심소(마음작용)가 심왕(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반드시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심소를 제외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有義。彼說理不應。然曾無處言緣觸等故。應言此意但緣彼識見及相分,如次執爲我及我所。相、見俱以識爲體故,不違聖說。

화변(火辨, Citrabhana)의 주장으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나, 우선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일찍이 경론의 어떤 곳에서도 촉(觸) 등을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았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말나식(제 7식)은 다만 8 견분ㆍ상분을 반연하고 다음과 같이 집착해서 나와 나의 소유로 삼는다는 것이다.

상분과 견분은 모두 (자체분) 자체로 삼기 때문에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촉(觸, sparśa) 심소는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和合)’, 즉 감각기관ㆍ대상ㆍ식의 최초의 접촉에 해당되며, 이로써 인식의 장(場)이 열리게 된다.

안근(眼根)과 색경(色境)이 연(緣)이 되어 안식을 일으키고, 세 가지(根ㆍ境ㆍ識)의 화합이 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촉심소를 일어나게 하며, 반드시 촉심소에 의해 심왕ㆍ심소가 화합하여 하나의 대상에 접촉하게 된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말나식(末那識, manas의 意, manas-vijñāna 의식 意識)은 유식유가행파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는 의(意)라고도 의역된다.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역인 의(意)라고 하지 않고 음역을 사용하여 말나(末那)라고 한다.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을 소의(所衣, 의지)로 하여 성립된 식이며 또한 제6 의식(第六意識)의 성립에 있어서 소의가 되는 식으로, 본질적인 성질은 끊임없는 사량(思量)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이끌어 내어 현행하게 함으로써 현재적인 인식이 이루어지게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6식(六識: 6가지 식)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6식이 일어나게 하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有義。此說亦不應理。五色根、境非識薀故,應同五識亦緣外故,應如意識緣共境故,應生無色者不執我所故。厭色生彼,不變色故。應說此意但緣藏識及、彼種子,如次執爲我及我所。以種卽是彼識功能,非實有物不違聖教。

안혜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제8식의 상분(相分)인 오색근(五色根)과 대상(境)은 식온(識薀)이 아니기 때문이고 5식과 같이 외부의 오경(五境)을를 반연해야 하기 때문이며, 의식과 같이 공통의 대상을 반연해야 하기 때문이고,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나의 소유로 집착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니, 물질(色)을 싫어해서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는 물질을 변현하지 않는 불변색(不變色)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 주장 역시도 바른 논리가 아닌 것이다.

대신에 이 말나식은 다만 장식과 그 종자를 반연하고 집착해서 나와 나의 소유로 삼는다고 해야 될 것이니, 

종자는   식의 공능(功能)으로서 실유(實有)가 아니므로 성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有義。前說皆不應理。色等種子非識薀故,論說種子是實有故。假應如無非因緣故。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색법 등의 종자는 식온이 아니기 때문이고, 논서,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종자는 실유라고 말한 때문이다. 

종자가 임시적인 가(假)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인연이 아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又此識俱薩迦耶見任運一類,恒相續生。何容別執有我、我所?無一心中有斷常等二境,別執俱轉義故。亦不應說二執前後。此無始來一味轉故。

또한  식과 함께하는 아견,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자연적이고  종류인 것으로써 항상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이거늘, 어찌 별도로 나ㆍ나의 소유가 있다고 집착함을 허용하는 것인가?

일심(一心) 중에는 단멸과 상주 등의  가지 대상이 있어서 별도로 집착하여 함께 전전하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ㆍ나의 소유의  가지 집착인 이집(二執)이 앞뒤로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되는 것이니,

제 7식은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종류인 일미(一味)로 전전한 때문이다.

 

應知此意但緣藏識見分非餘。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말나식(제 7식)은 다만 장식(제 8식)의 견분(見分, 주관)만을 반연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상분과 견분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 또는 견분의 인식작용의 결과로서의 자체분보다는, 아뢰야식의 실제적인 인식상황 속의 주체인 견분이 자아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彼無始來,一類相續,似常一故,恒與諸法爲所依故。此唯執彼爲自內我,乘語勢故說我所言。

그것(자아, ātman)은 아득한 옛적부터  종류로 상속하여서 상주함의 상(常)과 유일한 하나의 일(一)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항상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ātman)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 띠는 존재이다. 그런데 말나식의 입장에서   아뢰야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끊임없이 상속되었기 때문에 항상되고(常) 유일한(一) 것으로 착각되며,

또한 7전식을 비롯하여 모든 현상적 존재가 그것을 근본적인 의지처로 하므로 주재(主宰)한’ 것으로 오인되는 것이다.

이 제7식은 오직 그 제8식을 집착하여 자신의 내면의 자아인 자내아(自內我)로 삼는데, 용어의 편리를 따라서 나의 소유인 아소(我所)라고 말하는 것이다.

 

或此執彼是我之我故。於一見義說二言。若作是說,善順教理。多處唯言有我見故,我、我所執不俱起故。

혹은 이 제 7식이 그 제 8식이 나(我), 즉  제6식이 집착하는 가아(假我)의 나(我), 즉 제7식이 계탁(計度)하는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하나의 견분(주관)에 대하여 두 가지의 뜻, 즉 나(我)와 아소(我所, 나의 소유)로 말하나, 사실은 다만 하나의 아견(我見)일 뿐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성교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수순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와 '현양성교론' 제17권에서 오직 아견(我見)이 있다고만 말한 때문이고, 나(我)와 아소(我所) 대한 집착이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未轉依位,唯緣藏識。旣轉依已亦緣眞如及餘諸法。平等性智證得十種平等性故。知諸有情勝解差別,示現種種佛影像故。

아직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지위인, 초지(初地) 이전에서는 오직 장식(藏識)만을 반연하고,

전의를 이룬 이후에도 역시 진여  다른법을 반연하나니, 

평등성지(平等性智)는  가지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모든 유정의 이해하는 근기의 차이를 알아서 갖가지로 부처님의 불영상(佛影像)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전의(轉依, 변형, 질적 변형, 질적 전환, āśraya-parāvṛtti)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방법과 그 방법에 의해 성취되는 상태에 대한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으로, 유식리(唯識理) 즉 유식의 궁극적인 진리인 유식성(唯識性, vijñapti-mātratva) 즉 진여(眞如, tathatā)와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불교로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성유식론' 제1권에서는 전의(轉依)의 성취 즉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성취가 유가유식행파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의(轉依)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
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는 소의이전(所依已轉) 또는 변주(變住)라고도 하는데,

소의이전(所依已轉)은 소의(所依)가 이미 변형되었다는 뜻이고

변주(變住)는 변형이 완료되어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此中且說未轉依時。故但說此緣彼藏識。悟迷通局理應爾故,無我我境遍不遍故。

그런데 여기서는 우선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초지(初地) 이전의 시기에 관한 것이므로, 다만 장식만을 반연한다고 하는 것이니, 깨달음과 미혹이 통함과 국집됨이 있으므로, 논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며,  

무아와 자아의 경계가 두루함(무아)과 두루하지 못함(자아)이 있기 때문이다.

 

如何此識緣自所依?如有後識卽緣前意,彼旣極成。此亦何咎?

어떻게  식(識)이 자신의 의지처인 자소의(自所依)를 반연하는 것인가?

다음 찰나의 식인 제6식이 이전 찰나의 의식인 제6식(등무간의근)을 반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거늘,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가?

 

頌言“思量爲性相“者,雙顯此識自性、行相。意以思量爲自性故。卽復用彼爲行相故。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사량하는 것을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은,  식의 자성인 자증분(自證分)과 행상의 견분(見分)을 이중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말나식(제 7식)은 사량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고,  사량함을 행상(行相, 작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4체성행상문(體性行相門)이다.

 

由斯兼釋所立別名,能審思量名末那故。未轉依位恒審思量所執我相。已轉依位亦審思量無我相故。

이에 의하고 겸하여서 건립된 다른 명칭을 해석하고 능히 살피고 사량하는 것을 말나(末那)라고 이름하나니, 전의(轉依)를 이루지 못한 초지(初地) 이전의 지위에서는 항상 살펴서 집착된 자아의 양상을 사량하고,

전의를 이룬 지위에서는 역시 살펴서 무아상(無我相)을 사량하기 때문이다.

 

이하는 5심소상응문(心所相應門) 관한 해설.

此意相應有幾心所?且與四種煩惱常俱。此中俱言顯相應義。謂從無始至未轉依,此意任運恒緣藏識,與四根本煩惱相應。

 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선  가지의 번뇌와 항상 함께하는 상구(常俱)하나니, 여기에서 ‘함께한다는 구(俱)’라는 말은 상응의 의미를 나타니며, 아득한 무시로부터 아직 전의를 이루지 못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말나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장식을 반연하고  가지의 근본번뇌와 상응한다.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 root kleshas)는 근본혹(根本惑) 또는 본혹(本惑)이라고도 하며, '근본번뇌'를 줄여서 그냥 번뇌(煩惱)라고도 하고,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의 6가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이들 중 무명(無明)은 치(癡)라고도 하고, 견(見)은 악견(惡見) 즉 부정견(不正見)을 뜻하는,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五見)을 말한다.

근본번뇌로부터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를 수번뇌(隨煩惱)라 한다. 예를 들어,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 따르면 질(嫉)은 근본번뇌 가운데 진(瞋: 미워함, 손상시키고 싶어함, 성냄)으로부터 생겨나는 수번뇌이다.근본번뇌는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번뇌(根本煩惱) 또는 수면(隨眠)이라고 하며, 이들 6가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6가지 번뇌(煩惱)를 6근본번뇌(六根本煩惱) 또는 6수면(六隨眠)이라고 한다. 한편 유식유가행파의 소의 논서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66권에서는 탐(貪) · 진(瞋) · 치(癡)를 3근본번뇌 또는 3종근본번뇌(三種根本煩惱)라고 칭하고 있다. ㅡ 위키

 

其四者何?謂我癡、我見,幷我慢、我愛。是名四種。我癡者謂無明。愚於我相迷無我理,故名我癡。

  가지란 무엇인가?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말하는 것으로, 

  가지를 근본번뇌라 이름한다.

‘아치(我痴)’는 무명을 말하며, 자아의 아상(我相) 어리석어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하므로, 아치라 이름하며,

아치(我痴, ātmamoha) 자기 본질의 이치인 무아(無我)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  무명(無明)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와 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이지만, 

 걸음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痴)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하였다.

 

我見者謂我執。於非我法妄計爲我。故名我見。

‘아견(我見)’은 아집을 말하며, 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서 망령되게 계탁하여 자아로 삼는 것이므로,  따라서 아견이라 이름하며,

아견(我見, ātmadi) 자아(ātman)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으로서, 살가야견(薩迦耶見, satkāya-di, 유신견有身見)이라고도 한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ㆍ아소(我所) 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我慢者謂倨傲。恃所執我令心高擧。故名我慢

‘아만(我慢)’은 거만함을 말하며, 집착된 자아를 믿어서 심왕을 높이 올리는 것이므로, 따라서 아만이라 이름하며,

아만(我慢, ātmamāna) 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소의(所依, 의지처)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고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ㆍ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뜻하였으나,

유가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我愛者謂我貪。於所執我深生耽著。故名我愛。

‘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을 말하며, 집착된 자아에 대해서 깊이 탐착(耽着)을 일으키므로 따라서 아애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애(我愛, ātmasneha)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고, 또한 죽음의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幷表慢愛有見慢俱,遮餘部執無相應義。

'삼십송'의 제5게송에서 ‘아울러의 병(幷)’이라고 말한 것은, 아만(我慢)과 아애(我愛)가 아견(我見)ㆍ아만(我慢)과 함께하는 일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다른 부파, 즉 설일체유부가 상응하는 뜻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此四常起擾濁內心,令外轉識恒成雜染。有情由此生死輪迴不能出離。故名煩惱彼。

아치(我痴)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아만→아애의 순서로, 이 네 가지가 항상 일어나서, 

안으로는 심왕(제7식과 제8식)을 어지럽히고 혼탁하게 하며, 밖으로는 전식(6식)을 항상 잡염되게 하나니, 

유정이 이러함으로 인해서 생사에 윤회하여 벗어날 수 없으므로, 번뇌라 이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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