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8

 

若唯內識似外境起,寧見世閒情非情物處、時、身用定不定轉?

▷묻습니다; 만약 오직 내부의 식인 내식(內識)만이 외부대상에 사현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세간의 유정과 무생물을 보는 데 장소, 시간, 유정의 몸(身), 외계대상의 작용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으로 전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만약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면 세간의 일과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제이세가괴종난(第二世事乖宗難).

 

如夢境等應釋此疑。

▷답한다;  꿈속의 대상 등과 같다고, 마땅히 이러한 의문을 해설해야 할 것이다.

 

何緣世尊說十二處?

▷묻습니다; 무엇에 연(緣)하여 세존께서 12처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제삼성교상위난(第三聖敎相違難)으로, 만약 마음 밖에 색경(色境) 등의 참다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존께서 어떻게 12() 있다고 말씀하셨는가라고 비판하여 묻는 것이다.

 

依識所變,非別實有。爲入我空說六二法,如遮斷見說續有情。爲入法空復說唯識,令知外法亦非有故。

▷답한다;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한 것으로, 별도로 참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는 아니다.

아공(我空)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62법을 말씀하셨으니, 단견(斷見)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상속하는 유정을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법공(法空)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외부대상 역시도 실유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공(二空);

아공(我空)은 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하며, 유정의 심신(心身)에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 이치 또는 그것을 깨쳐서 아집(我執)이 소멸된 경지.

법공(法空)은 법무아(法無我)라고도 하며, 외계의 사물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이치, 또는 그것을 깨쳐서 법집(法執)이 소멸된 경지.

 

此唯識性豈不亦空?

▷묻습니다; 이 유식성(唯識性)도 어찌 공이 아닌 것입니까?

→여기서 유식성(唯識性) 의타기법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으로, 원성실성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

법집(法執) 없애서 제법무아(諸法無我) 도리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유식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라면,  유식성 자체도 역시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필경공무(畢竟空無)가 아니겠는가라고 비판하여 묻는, 제사유식성공난(第四唯識成空難).

 

3성(三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이며, "fully conceptualized (완전히 개념화되다)"라고 직역되며 "imaginary nature (상상성 · 가상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질"이며, "other dependent (다른 것에 의존하는)"라고 직역되며 "dependent nature (의존성)"라고 번역되며, 연기(緣起)의 성질을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성질"이며, "fully accomplished (완전히 성취하다)"라고 직역되며 "absolute nature (절대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不爾。

답한다; 그렇지 않다.

 

如何?非所執故,謂依識變妄執實法,理不可得,說爲法空。非無離言正智所證唯識性故,說爲法空。此識若無便無俗諦,俗諦無故眞諦亦無,眞、俗相依而建立故。撥無二諦是惡取空,諸佛說爲不可治者,應知諸法有空、不空,由此慈尊說前二頌。

▷묻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답한다; 집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의 전변에 의거해서 실법에 망령되게 집착된 것을 이치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법공(法空)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언어를 떠나서 증득된 정지(正智)의 유식성이 없기 때문에 법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식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득 세속제가 없게 될 것이며, 세속제가 없게 되면 진제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니, 진제와 속제는 서로 의지해서 건립되기 때문이다.

진제와 속제의 두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악취공(惡取空)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치료할 수 없는 자라고 하셨으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하나니, 일체법은 공(空)ㆍ불공(不空)이 있으며, 이에 의거해서 미륵보살께서 앞의 두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


若諸色處亦識爲體,何緣乃似色相顯現,一類堅住,相續而轉?

▷묻습니다; 만약 모든 색처(色處, 물질계)가 역시 식으로써 자체(體)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무엇에 반연하여 색상(色相, 물질의 모습)으로 사현하고, 한 종류로 견고하게 상속해서 유전하는 것입니까?

 외부대상인 색경(色境)의 상(相) 마음이 아니지 않겠는가하고 비판하여 묻는, 제오색상비심난(第五 色相非心難).

 

名言熏習勢力起故,與染、淨法爲依處故。謂此若無,應無顚倒,便無雜染,亦無淨法,是故諸識亦似色現。如有頌言:

▷답한다; 명언훈습의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허망분별의 훈습력에 의해서, 상주하고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 색경(色境) 상(相)이라고 집착한 것으로, 이러한 훈습에 의해서  종류의 견고한 색경의 모습으로 사현하는 것일 뿐, 마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대상인 실경(實境) 아니다.

 

잡염과 청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니, 만약 이러한 색경(色境) 등의 외부대상이 없다면 마땅히 전도됨이 없어야 할 것이고, 그러하다면 문득 잡염도 없고 역시 청정법도 없게 될 것이니, 

따라서 모든 식이 역시 색법으로 사현하는 것으로,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제 4권의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다.

색경(色境) 등으로부터 잡염ㆍ청정법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왜냐하면 욕계와 색계의 유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 색경 등에 미혹되게 집착함으로써 전도(顚倒) 망심(妄心) 일으키고, 그것에 의해 번뇌ㆍ업ㆍ생() 잡염을 일으켜서 생사에서 윤회하는 것이니, 만약 색경 등이 없다면, 전도된 망심도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잡염이 없으면 청정법도 있지 않아야 할 것이.


亂相及亂體 應許爲色識, 及與非色識 若無餘亦無。

잡란(亂)의 형상인 난상(亂相)  잡란의 자체인 난체(難體)를

잡란(亂) 심왕 등을 말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전도됨의 망도(妄倒)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잡란의 형상인 난상(亂相)이란 색식(色識),  상분(相分)을 말한다.

→잡란의 자체인 난체(難體) 비색식(非色識),  모든 식의 견분(見分)을 말한다.

 

색식(色識, 상분)  색식이 아닌 비색식(非色識, 견분 등)으로 인정해야 하고, 

만약 난상(亂相) 없다면 나머지 다른 것(견분) 역시도 없어야 하리라.

→나머지 다른 것이란 잡란의 자체인 난체(難體),  견분을 가리킨다.

 

色等外境分明現證,現量所得寧撥爲無?

▷묻습니다; 색경(色境) 등의 외경(外境, 외부대상)을 현재에서 분명히 깨닫고 현량으로 인식하거늘, 어째서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외부대상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데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비판하여 묻는, 제육현량위종난(第六 現量爲宗難).

 색경(色境)  다섯 가지 외부대상은 5식의 현량으로써 분명히 깨달아 알고, 현량으로 인식하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서 조금도 오류가 없거늘, 만약 외부대상이 실유(實有) 아니라면, 현량으로써 반연하여 색경 등이라는 인식을 일으킬  없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現量證時不執爲外,後意分別妄生外想。故現量境是自相分識所變,故亦說爲有。意識所執外實色等妄計有故,說彼爲無。又色等境非色似色、非外似外。如夢所緣,不可執爲是實、外色。

▷답한다; 현량으로 깨달을 때에는 집착해서 외부대상으로 삼지 않으나, 이후의 의식(意識)이 분별하여 망령되게 외부대상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따라서 현량의 대상은 자신의 상분이고, 식이 전변된 것이기 때문에 실재(有)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식이 집착한 외부의 실재(有)의 색경 등을 망령되게 실재라고 계탁한 것이므로 그것을 비실재(無)라고 말하며,

또한 색경 등의 대상은 색경이 아니면서 색경으로 사현한 것이고, 외부대상이 아니면서 외부대상으로 사현한 것으로, 꿈속의 소연(所緣, 인식대상)과 같이 집착해서 이것은 실재(有)이고 외부의 색경인 외색(外色)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若覺時色皆如夢境不離識者,如從夢覺知彼唯心,何故覺時於自色境不知唯識?

▷묻습니다; 만약 깨어 있을 때의 색경 모두가 꿈속의 대상과 같이 식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꿈에서 깨어나서 그것은 오직 마음뿐인 유심(唯心)이라고 아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거늘, 어째서 깨어 있을 때에 자신의 색경에 대해서 오직 식뿐이라고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꿈과 깨어 있을 때의 차이점을 들어 비판하여 묻는, 제칠몸각상위난(第七夢覺相違難).

 

如夢未覺不能自知,要至覺時方能追覺,覺時境色應知亦爾,未眞覺位不能自知,至眞覺時亦能追覺。未得眞覺恒處夢中,故佛說爲生死長夜,由斯未了色境唯識。

▷답한다; 꿈에서 깨지 않았을 때에는 스스로가   없는 것으로, 반드시 깨어났을  비로소 능히 깨닫는 것과 같이, 깨어 있을 때의 대상인 경색(境色)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 무루의 참다운 지혜인 진각(眞覺)이 아닌 지위에서는 스스로   없으니, 참다운 깨달음의 진각(眞覺)에 이르렀을 때에 역시 능히 따라서  깨닫게 되나니, 참다운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 때에는 항상 꿈속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으므로, 부처님께서 생사의  밤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함으로 색경(色境)은 오직 식뿐인 유심(唯心)이라고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外色實無可非內識境,他心實有,寧非自所緣?

▷묻습니다; 외부의 색경인 외색(外色)은 참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부의 식의 대상인 내식경(內識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거늘, 어째서 자신의 인식대상인 자소연(自所緣)이 아닌 것입니까?

마음 밖의 실재 대상인 타인의 마음을 인식하는 경우를 들어 비판한, 제팔외취타심난(第八外取他心難)으로,

 외계의 색경(色境) 등은 실체가 없고 내부의 식이 전변된 것이지만, 타인의 심식은 자기 마음을 떠나서 외부에  자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 밖의 실재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타인의 마음은 자신의 인식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그러나 타심지(他心智) 같은 것은 타인의 마음을 반연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것은 마음 밖의 실재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으로서, 유식(唯識) 뜻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비판하여 묻는 것이다.

 

誰說他心非自識境?但不說彼是親所緣。謂識生時 無實作用,非如手等親執外物,日等舒光親照外境。

▷답한다; 누가 타심(他心)은 자기 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는가?

그것은 다만 친소연(親所緣)이라고 말하지 않을 뿐이니, 식이 일어날 때에는 참된 실작용(實作用)이 없어서 손 등이 직접 외부 물건을 집거나,

정량부(正量部) 논파한 것으로, 그들은 상분(相分) 건립하지 않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법이 직접 대상을 취하는 것이 마치 손(手) 등으로 외부 사물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을 논파한 것이다.

 

태양 등이 빛을 펼쳐서 직접 외부대상을 비추는 것과 같지는 않다. 

승론(勝論) 학파를 논파한 것으로, 그들은 안식이 일어날  빛을 펴서 직접 눈앞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 마치 해와  등이 빛을 펴서 직접 외부대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한 것다.

 

但如鏡等似外境現名了他心,非親能了,親所了者謂自所變,

다만 거울 등과 같이 외부대상에 사현하는 것을 타심(他心)을 요별한다고 이름하나, 직접 요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요별되는 것은 자신이 전변된 것이다.

타인의 마음은 능히 자기 식인 자식(自識) 인식대상이 되므로,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인 타심지(他心智)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인의 마음으로써 친소연연(親所緣緣, 상분)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오직 소소연연(疎所緣緣, 본질)으로 하며, 자기 마음 위에  영상인 상분을 현현하여서 그것으로써 친소연연으로 반연할 뿐이므로 유식(唯識) 뜻이 성립된다고 논증한 것이다.

 

故契經言無有少法能取餘法,但識生時似彼相現名取彼物。如緣他心,色等亦爾。

따라서 경전에서 말씀하기를 “작은 법이라도 능히 나머지 다른 법, 즉 마음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심외법(心外法)을 취하는 것은 없는 것으로, 다만 식이 일어날 때에 그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며 그 사물을 취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해심밀경' 제3권에서 말하였다.

타인의 마음을 반연한다고 '유식이십론' 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색경 등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旣有異境,何名唯識?

▷묻습니다; 이미 다른 대상이 있거늘, 어째서 유식(唯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까?

→타인의 마음 등 다른 대상이 있으므로 유식(唯識)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제구 이경비유난(第九異境非唯難)으로,  즉 친소연연(親所緣緣, 상분)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밖의 타인의 마음이라는 다른 대상인 이경(異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유식이 아닌 것이지 않겠는가하고 묻는 것이다.

 

奇哉!固執!觸處生疑,豈唯識教但說一識?

▷답한다; 기이하도다. 굳게 집착해서 닿는 곳마다 의심을 내는구나!

어째서 유식(唯識)의 가르침이 다만 나 한 사람의 식인 일식(一識)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不爾如何?汝應諦聽,若唯一識,寧有十方凡聖尊卑因果等別?誰爲誰說?何法何求?故唯識言有深意趣。識言摠顯一切有情各有八識,六位心所,所變相、見分位差別,及彼空理所顯眞如,識自相故,識相應故,二所變故,三分位故,四實性故,如是諸法皆不離識,摠立識名。

▷묻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까?

▷답한다; 그대는 마땅히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만약 오직 한 사람의 식인 일식(一識)뿐이라면 어찌하여 시방에 범부와 성인, 존귀함과 비천함, 원인과 결과 등의 차이가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위해서 법을 설하며, 어떠한 법을 어떻게 구하는 것인가?

따라서 유식(唯識)이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의 의취(意趣)가 있으니,

식(識)이라는 말은 전체적으로 모든 유정에 각각 8식, 6위의 심소, 전변된 상분ㆍ견분 분위의 차별 및 그것의 공한 이치인 공리(空理)에서 드러나는 진여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식(識)의 자상(自相)이기 때문이고, 식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심와과 심소의 두 가지가 전변된 것이기 때문이고,

심왕과 심소 및 색법의 세 가지의 삼분위(三分位)이기 때문이며,

심왕ㆍ심소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가지의 참다운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은 모두 식(識)에서 떠나지 않으니, 총체적으로 식(識)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다.

 

唯言但遮愚夫所執定離諸識實有色等。若如是知唯識教意,便能無倒,善備資糧速入法空,證無上覺,救拔含識生死輪迴,非全撥無惡取空者,違背教理,能成是事,故定應信一切唯識。

‘유(唯, 오로지)’라는 말은,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집착하듯이 반드시 모든 식을 떠나서 참으로 색법 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만약 이와 같이 유식의 가르침의 취지를 아는 사람은, 곧 능히 전도됨이 없이 복덕과 지혜의 자량(資糧)을 잘 비축하여 속히 법공의 이치에 들어가서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유정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악취공자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위배되므로 능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니, 따라서 반드시 일체가 오직 식뿐이라는 유식(唯識)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7

 

由何教理唯識義成?豈不已說?

▷묻습니다; 어떠한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해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는 것입니까?

▷답한다; 어찌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이하는 아홉 가지 문답으로써 만유유식(萬有唯識) 도리를 자세히 해설한, 구난의(九難義)이다.


雖說未了。非破他義己義便成。應更礭陳成此教理。

▷묻습니다; 말씀하셨지만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교의(敎義)를 논파함으로써, 자신의 교의가 성립되는 것은 아닌 것이니, 다시 분명하게 이 유식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말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如契經說三界唯心。又說所緣唯識所現。

'십지경(十地經)' 제8권 등의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계는 오직 마음뿐인, 유식(唯識)이라 하였으며, 또한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해심밀경' 3권과 '유가사지론' 77권에서 능연(能緣) 견분과 소연(所緣) 상분은 모두 자체분이 현현된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ㆍ심외무법(心外無法) 취지를 서술하였다.

 

又說諸法皆不離心。又說有情隨心垢淨。

또한 '능가경'에서 일체법은 모두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으며,

또한 유정은 마음을 따라 잡염되거나 청정하다고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2권에서 말씀하였다.


又說成就四智菩薩能隨悟入唯識無境。

또한  가지 지혜인 사지(四智)를 성취한 보살은 따라서 능히 오직 식(識)뿐이고 식과 독립적인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비달마경'에 나오는 문장으로, 무성(無性) '섭대승론석' 4권에 인용되어 있다.

 

사지(四智), 부처님이 갖춘 4가지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로써

①대원경지(大圓鏡智), 구경지는 제8아뢰야식을 전환하여 얻은 지혜
②평등성지(平等性智), 제7 말라 식을 전환하여 얻게 되는 지혜로써, 자타(自他) 일체의 평등을 깨닫고 대자 대비심을 일으키는 지혜이다. 정지(定智)는 평등성지(平等性智)로서 정관에 있으면서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이며, 말나식(末那識)의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을 대치하여 평등함을 관찰한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부정지(不定智)는 번뇌에 오염된 제6식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얻은 청정한 지혜이다. 모든 대상을 직접 접촉하지 않고 관찰하여, 모든 의심을 끊고 자유자재로 설법하는 지혜이다. 묘(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유자재를 뜻하고, 관찰은 모든 법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열반지(涅槃智)는 유루의 전 5식을 전회(轉廻)하여 얻는 무루지(無漏智)로써 모든 중생들을 돕는데 필요한 온갖 변화와 동작 등을 두루 갖추어 성취․완성한 경지이다. 5관(五官 : 눈·귀·코·혀·몸)의 대상에 대하여 자제하게 되며,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동작·사업을 하는 것으로, 변화신(變化神)의 지혜이다. 전 5식이 무루 종자를 의지하여 전환(轉換)하여 얻은 지혜이며, 모든 것을 완성으로 인도하는 지혜이다. - 천석

 

一相違識相智,謂於一處,鬼人、天等隨業差別所見各異。境若實有,此云何成?

첫째는 서로 다른 식의 양상을 아는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이니,  장소에 대하여서 아귀ㆍ사람ㆍ천인(天人) 등이 그 각각의 업의 차이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만약 대상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있겠는가?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다르면,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며,

예를 들면 같은 물(水)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물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보며, 천인(天人)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각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二無所緣識智,謂緣過、未夢境像等非實有境,識現可得。彼境旣無,餘亦應爾。

둘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으로 하는 식을 아는 지혜인 무소연식지(無所緣識智)이다. 

과거와 미래ㆍ꿈속의 대상ㆍ영상  실유(實有)가 아닌 대상을 반연할 때의 식은 현재에 있을  있으나  대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역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나,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三自應無倒智,謂愚夫智若得實境,彼應自然成無顚倒,不由功用應得解脫。

셋째는 스스로 전도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지혜인 자응무도지(自應無倒智)이니,  

어리석은 범부의 지혜가 만약 실제의 대상을 얻는다면, 자연히 그는 전도되지 않아야 하고, 공용(功用, 작용)에 의하지 않고 해탈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공용(功用),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 지혜를 얻을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어서, 노력이나 정진을 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을 이루게 될 것이.


四隨三智轉智:一隨自在者智轉智,謂已證得心自在者,隨欲轉變地等皆成。境若實有,如何可變?二隨觀察者智轉智,謂得勝定修法觀者,隨觀一境,衆相現前。境若是實,寧隨心轉?三隨無分別智轉智,謂起證實無分別智,一切境相皆不現前。境若是實,何容不現?

넷째는  가지 지혜을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실재한다면 다음의  가지와 같은 일은 있을  없는데, 현실적으로 이들  가지가 일어나므로, 인식대상은 실재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하나는 자재자의 지혜에 따라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인 수자재자지전지(隨自在者智轉智)이니, 이미 마음의 자재함을 증득한 8지(地) 이상의 보살이 욕구를 따라  등을 변화시켜 모두 이루는 것이니, 대상이 만약 실유라면 어떻게 전변할  있겠는가?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마음대로,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또는 모래를 금으로 변화시킬  있음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관찰자의 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인 수관찰자지전지(隨觀察者智轉智)이니, 뛰어난 선정을 증득해서 법관(法觀)을 닦는 자가 하나의 대상을 관찰할 때에 갖가지 모습이 따라서 현전하는 것이니, 만약 대상이 참된 것이라면 어찌 마음을 따라 전전할 수 있겠는가? 

지관(止觀) 닦은 요가 수행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하나는 무분별지혜에 따라서 전전하는 지혜인 수무분별지전지(隨無分別智轉智)로써, 진실을 증득한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때에는 모든 대상의 모습이  현전하지 않으니, 만약 대상이 참된 것이라면 어찌 현전하지 않을  있겠는가?


菩薩成就此四智者,於唯識理決定悟入。又伽他說:

보살로써 이 사지(四智)를 성취한 자는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니, 역시 '후엄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心、意、識所緣,皆非離自性, 故我說一切 唯有識無餘。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모두는 자성을 떠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가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此等聖教,誠證非一。極成眼等識五隨一故,

이들 성스러운 가르침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극성(極成)의 안식 등은 5식의 하나를 따르는 수일(隨一)이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극성(極成)의 안식 등이란, 공통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불극성(不極成)의 유법(有法) 가려내기 위해서 붙인 것이다.  대승의 다른 학파에서 주장하는 부처님의 안식 등과 소승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비무루(非無漏) 안식 등과 최후신(最後身) 보살의 불선(不善) 안식 등과 구별한 것으로, 그것들은 자타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자타극성(自他極成) 아니기 때문이다.

 

如餘,不親緣離自色等。

안식을 제외한 나머지 4식과 같이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色境)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하며, 

→이상 6() 인용하여 증명한 것으로, 다음은 바른 논리인 정리(正理)로써 만법유식(萬法唯識) 뜻을 논증하는 것이다.  가지 입량(立量) 열거하는데, 먼저  번째 비량(比量)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나타내면,

()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극성(極成) 안식 등은 직접 자신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색경 등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 5 중의 하나를 따르는 수일(隨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 나머지 4식과 같은 것이다.

 

餘識識故, 如眼識等,亦不親緣離自諸法。

나머지 식(識)도 식(識)이기 때문에 안식 등과 같이 직접 자신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체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하나니, 

 번째 비량(比量)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나머지 식도 역시 직접 자신에게서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을 반연하지 않아야 한다.

() 이것은 ()이기 때문이다.

() 안식 등과 같은 것이다.

 

此親所緣定非離此,二隨一故,如彼能緣。

이것의 친소연(親所緣)은 반드시 이것을 떠나는 것이 아니어야 하나니, 그것의 능연과 같이 견분과 상분의 하나를 따르는 수일(隨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 6식의 친소연(親所緣) 반드시 6식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 견분과 상분 중의 하나를 따르는 수일(隨一) 포함되기 때문이다.

()  능연(能緣) 견분 등과 같은 것이다.

 

所緣法故,如相應法,決定不離心及心所。此等正理誠證非一,故於唯識應深信受。

소연(所緣)의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과 같이 결정적으로 심왕과 심소를 떠나지 않아야 하나니, 이들 바른 논리의 진실한 증거 문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유식의 도리에 대해서 깊이 믿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번째 비량을 삼지작법으로 나타내면, 

() 6식의 친소연은 반드시 자신의 능연(能緣) 심왕과 심소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 이것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법이기 때문이다.

() 상응법과 같은 것이다.

 

我法非有,空識非無,離有離無,故契中道。慈尊依此說二頌言:

자아와 법은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이고, 공(空)과 식은 비실재의 비무(非無)이며, 실재를 떠나고 비실재를 떠났기 때문에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이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으니; 

→다음에 총체적인 결론으로서 위에서 밝힌 것을 논증하는 것으로,

먼저 바른 논리로써 증명하기를, 자아와 법은 변계소집성이고, () 원성실성이며, () 의타기성이다.

따라서 이것은 삼성대망(三性對望)하여 중도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3성(三性)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알아야 할 법 또는 알아야 할 바 즉 알아야 할 모든 앎이라는 뜻에서 소지법(所知法) 또는 줄여서 소지(所知)라고 한다. '섭대승론석' 제1권과 '성유식론' 제3권에 따르면, 소지(所知) 즉 알아야 할 바 즉 3성(三性)이란 염정(染淨), 즉 염(染)과 정(淨), 즉 잡염법과 청정법을 말한다.
이들 3성(三性) 즉 알아야 할 법 즉 모든 잡염법과 청정법은 모두 그 의지처 즉 발동근거가 제8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제8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라는 뜻에서 소지의(所知依)라고도 부른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이며, "fully conceptualized (완전히 개념화되다)"라고 직역되며 "imaginary nature (상상성 · 가상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질"이며, "other dependent (다른 것에 의존하는)"라고 직역되며 "dependent nature (의존성)"라고 번역되며, 연기(緣起)의 성질을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성질"이며, "fully accomplished (완전히 성취하다)"라고 직역되며 "absolute nature (절대성)"라고 번역되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 위키

 

다음은 성교(聖敎)로써 증명하는 것으로, 아래의 게송은 '변중변론(辯中邊論)' 1권에서 미륵보살이 말씀하신 것이다.

虛妄分別有 於此二都無, 此中唯有空 於彼亦有此。

허망분별(3계의 의타기성의 허망분별심)은 실재(有)이고, 

이것에 있어서  가지(소취所取와 능취能取 또는 자아와 법) 모두는 비실재(無)이다.

이 허망분별 중에서는 오직 공(空)이 있을 뿐이나,

그 공성에 있어서도 역시 이 허망분별이 있을 뿐이다.

 

故說一切法 非空非不空, 有無及有故 是則契中道。

그러므로 일체법은 공 아닌 비공(非空)이고, 

공성(空性) 허망한 마음의 망심(妄心) 있으므로 공(空)이 아니고, 

불공도 아닌 비불공(非不空)이라고 말하나니,

→능취와 소취 또는 자아와 법이 없기 때문에 불공(不空) 아니다.

 

허망분별, 즉 의타기성의 가유(假有)와 

2취(取), 즉 변계소집성의 실무(實無)의 비실재(無)  

실재(有)이기 때문이라.

→실재(有)는 원성실성의 실재인 실유(實有) 또는 허망분별 중에서 공성이 있다는 망중유공(妄中有空), 공성에 대해서 허망분별이 있는 공중유망(空中有妄)을 나타낸다.

 

이것이  중도에 계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만을 주장하는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과 같지 않고,

또한 오로지 실유(實有) 말하는 소승과 같지 않으며, 참으로 중도에 계합한다는 것을 말한다.

 

此頌且依染依他說,理實亦有淨分依他。

이 게송은 또한 잡염분의 의타기성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나, 실로는 역시 청정분의 의타기성에도 있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6

 

如何五俱唯一意識,於色等境取一或多?

▷묻습니다; 어째서 5식(五識, 전오식)과 함께하는 의식인 오구의식(五俱意識)에는 오직 하나의 의식(意識, 제육식)뿐인데, 색경(色境) 등에 대해서 하나 또는 여럿을 취하는 것입니까?

→비판하여 묻기를, 5식과 함께하는 의식인 오구의식(五俱意識)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것이 색경(色境)  여러 대상을 취하는가라고 한 것이다.

 

如眼等識各於自境取一或多,此亦何失?相見俱有種種相故。

▷답한다; 안식 등이 각각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하나 혹은 여럿을 취하는 것과 같이, 이것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무슨 과실이 있다는 것인가?  상분(相分, 소취상所取相)과 견분(見分, 능취상能取相) 모두가 각각으로 갖가지의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견분(見分) 하나 또는 여럿인 것은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 하나 또는 여럿인 것에 의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식 앞에 꽃ㆍ나무ㆍ나비 여러 대상이 동시에 있을 때에는 동시에 그들 여러 대상을 취한다.

견분이 상분(相分) () 응하여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하나의 의식이 여러 대상을 취하는 아무 지장 다고 답변한 것이다.


何故諸識同類不俱?

▷묻습니다; 어째서 모든 식에 있어서 같은 종류는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안식이  찰나에 둘ㆍ셋ㆍ넷  여러 안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인정할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남을 인정한다면, 같은 종류의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묻는 것이다.

 

於自所緣若可了者,一已能了。餘無用故。

▷답한다; 자기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요별할 수 있으면, 오직 하나만 요별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若爾五識已了自境,何用俱起意識了爲?

▷묻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5식이 이미 자기의 대상을 요별하였는데, 어째서 함께 의식을 일으켜서 요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까?

 

五俱意識助五令起,非專爲了五識所緣。又於彼所緣能明了取異於眼等識。

故非無用。由此聖教說彼意識名有分別,五識不爾。

▷답한다; 5식(전오식)과 함께하는 의식(意識)인, 오구의식(五俱意識)은 5식을 도와서 일어나게 하며, 오로지 5식의 대상을 요별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의식이 그것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능히 명료하게 취하는 것이 안식 등과 다르므로, 따라서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에 의거해서 성교인, '해심밀경' 제1권에서  의식을 유분별(有分別)이라 이름할 뿐, 5식(전오식)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은 것이다.

 

무분별(無分別), 전5식은 감성적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혜(慧: 판단)의 작용은 없고 심(尋)과 사(伺)의 작용만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 즉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없다'는 뜻에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유분별(有分別), 의식 즉 제6의식의 오성적 인식과 기억 또는 재인식이 더해짐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비로소 대상에 대해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가지게 되는, 즉 심(尋)ㆍ사(伺) 심소가 함께하는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있다'는 뜻에서 유분별(有分別)이라 한다.

한편 전5식의 본질적 성질로서의 무분별(無分別: 불확정적인 인식)은 반야바라밀다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위키


多識俱轉何不相應?

▷묻습니다; 여러 식이 함께 전전(展轉)한다면, 어째서 상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非同境故。設同境者彼此所依體數異故。如五根識互不相應。

▷답한다; 대상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제6식과 제8식은 많은 대상을 반연하고, 5식과 제7식은 하나의 대상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설사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이것과 그것이 의지처(감각기관)의 자체와 수(數)가 다르기 때문이니,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오식근(五根識)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 다르다는 것은, 5식은 가지 의지처인 4소의(四所依)가 있고, 

6식은 가지의  의지처인 2소의(二所依)가 있으며, 

7식과 8식은 하나의 의지처 의지처인 1소의(一所依) 갖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능변식 자체의 능변일이(能變一異)를 밝힌다.
八識自性不可言定一,行相所依、緣相應異故。又一滅時餘不滅故,能、所熏等相各異故。

8식의 자성은 반드시 하나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행상(行相, 인식작용)ㆍ소의(所依, 의지처, 감각기관)ㆍ소연(所緣, 인식대상)ㆍ상응법(相應法, 심소)이 다르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가 멸할 때에 나머지 다른 것이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능훈과 소훈 등의 양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팔식(八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 전5식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그 인식대상들을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이라 하며 이들을 5경(五境)이라 한다.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제6의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며, 다시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 - 위키


亦非定異,經說八識如水、波等無差別故,定異應非因果性故,如幻事等無定性故。

또한 반드시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니, '입능가경' 제9권에서 말씀하시기를 “8식은 마치 바닷물(제8식)과 파도(제7식) 등의 관계와 같아서 차별이 없다”고 한 때문이다. 

반드시 다른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고,

요술 등과 같이 결정적인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8식을, 파도는 제7식을 비유한다.


如前所說識差別相,依理世俗,非眞勝義,眞勝義中心言絕故。如伽他說:

앞에서 말한 식의 차별상(差別相)은 세속제에 의거한 것으로, 참다운 승의제는 아니니, 

참다운 승의제 중에서는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입능가경'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心意識八種 俗故相有別, 眞故相無別 相所相無故。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여덟 가지는

속제에 의거해서는 상(相)의 차이가 있고,

진제에 의거해서는 상의 차이가 없으니, 

작용(相)과 자체(所相)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식(識)이 전변된 것임을 밝힌, 유식소변(唯識所變)이다.
已廣分別三能變相,爲自所變二分所依。

云何應知依識所變,假說我、法,非別實有,由斯一切唯有識耶?頌曰:

이미 3 가지 능변식의 양상을 자체가 전변한 2분(分)의 의지처로 삼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해서 가정적으로 자아ㆍ법으로 말하는 것으로, 별도로 실유는 아니므로,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삼십송'의 제17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으니; 

유식상(唯識相) 밝히는 가지 분단인 대단(大段) 중에서 이상 능변식의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마치고, 이하는 식전변(識轉變) 의거해서 가아(假我) 가법(假法) 건립하는 일단(一段)이다.

 

먼저 “그것은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한다는 피의식소변(彼依識所變) 자세히 해설한다.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모든 식(識, 8식과 그것에 상응하는 심소를 포함한 것)이 전변(轉變)하여

→전변(轉變)은 개전(開轉)ㆍ변현(變現)의 뜻으로서, 심왕ㆍ심소의 자체분에서 능취(能取)의 견분, 소취(所取)의 상분이 현출(現出)됨을 의미한다.

분별(分別, 견분見分)과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 상분相分)이네.

이것에 의거해서것의 차(此, 실아實我)ㆍ그것의 피(彼, 실법實法) 모두 존재하지 않으니, 

심외(心外) 실존한다고 망집(妄執)하 ()ㆍ법() 가리킨 것으로, 범부나 외도가 집착하는 것과 같이 심외에 아ㆍ법이 실존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그것은 다만 견분ㆍ상분 위에 가립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이네. 

유식(唯識) 이치를 판별한 것이다.

 

‘식이 전변한 것의 식소변(識所變,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의 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식(能變識)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으로, 곧 제8식이며, 대부분 이숙성(異熟性)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며,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식(能變識)이라 이름한다. -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 권 4


論曰:是諸識者,謂前所說三能變識及彼心所。皆能變似見、相二分,立轉變名。

논하여 말한다. ‘이 모든 식, 제식(諸識)’이란 앞에서 말한  가지의 능변식(三能變識)  그것의 심소(心所, 마음작용)를 말하는 것으로, 모두 능히 전변하여 견분ㆍ상분으로 사현하므로 전변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다.

먼저 안혜와 호법의 해설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안혜와 호법은  같이 () 자체분으로부터 견분과 상분을 변현한다고 설명하면서도, 2() 가실(假實)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안혜에 의하면,  전변된 견분과 상분은 변계소집성으로서 자체(體) 없는 법으로, 다만 의타기성의 ()처럼 사현할 뿐이며, 자체분만이 의타기성으로서 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중기 유식학파의  가지 사조(思潮) 중에서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 nir-kra-vijnavda) 입장으로서, 식의 표상화 작용  자체를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표상은 인식의 본질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서 사량 분별을 떠난 인식의 본질은 형상이 없는 ‘비춤  자체’, ‘순수한 조출성(照出性)’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방법은 중관학파와 비슷하다.

이에 반하여 호법은 견분과 상분을 의타기성의 자체가 있는 법으로 설명한다. 식의 자체분이 전변하여 의타기성의 2() 현현하고 그것이 변계소집의 ()ㆍ법() 비슷하므로 여기에 ()ㆍ법() 모습을 가립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 skra-vijnavda) 입장으로서, 식상(識上) 형상은 의타기성이라서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 간주된다. 

이와 같이 인식상황 속의 형상의 진실성을 인정한 이유는 유식학의 심식론을 인식논리인 인명(因明)으로써 설명하고 증명함으로써,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所變見分說名分別,能取相故。所變相分名所分別,見所取故。

전변된 견분(見分)을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나니, 능히 상(相) 취하기 때문이며,

전변된 상분을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이라 이름하나니, 견분에 취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분에서 세친(世親) 식전변설을 수립한 의도가 나타난다.

그는 식전변설의 체계 속에 인식성립의 역학적 구조를 담고 싶었던 것으로, 식(識) 본래의 기능은 분별,  대상 인식작용이다. 종래의 ‘식=분별’에 세친은 분별하게 되는 원리로서 전변의 개념을 도입하여 =전변=분별’ 설명하였다.

식전변(識轉變) 단순히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7식과 현상적 존재가 생겨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변의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능변식(8식과 이에 수반되는 심소) 견분(見分, 능취상能取相) 상분(相分, 소취상所取相) 변현시키는 것이다.


由此正理彼實我、法離識所變,皆定非有。離能、所取無別物故。非有實物離二相故。是故一切有爲、無爲若實若假皆不離識。唯言爲遮離識實物,非不離識心所法等。

이러한 바른 이치인 정리(正理)에 의거해서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은 식이 전변된 것을 떠나서는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떠나서는 별도의 사물이 결정코 없기 때문이며,  

실유로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가지 상을 떠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위법(有爲法, 식이 전변된 식소변識所變)ㆍ무위법(無爲法, 식의 체성體性)은 실법(實法)이건 가법(假法)이건 간에 모두 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삼십송'의 제17게송에서 ‘유(唯, 오직)’이라는 말은 식을 떠난 실체의 사물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식을 떠나지 않는 심소법 등은 아닌 것이다.


或轉變者,謂諸內識轉似我、法外境相現。此能轉變卽名分別,虛妄分別爲自性故。謂卽三界心及心所。此所執境名所分別。卽所妄執實我、法性。由此分別變似外境假我、法相,彼所分別實我、法性決定。皆無前引教理已廣破故。

혹은 ‘전변(轉變)’은 내부의 모든 식이 전환해서 자아와 법이 외부대상의 외경상(外境相)으로 사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능전변을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나니,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며, 계의 심왕(心王, 마음)과 심소(心所, 마음작용)를 말한다. 

이것의 집착된 대상을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망령되게 집착하는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의 성(性)이며, 이 분별이 변하여 외부대상의 가아(假我)ㆍ가법(假法)의 양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에  분별되는 것인 실아ㆍ실법의 체성은 결정적으로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본 논서 제1권ㆍ제2권에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을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인용하여 이미 자세하게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난타(難陀) 견해로써,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그는 이분가(二分家)로서 자체분(自體分) 건립하지 않고, 견분의 식이 의타기(依他起) 상분을 전변하여 ()ㆍ법()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사현한다고 말한다.

다만 견분과 상분이 같이 의타기법(依他起法)이긴 하지만, 가실(假實) 차이가 있어서 견분은 참다운 실(實)이고, 변현된 상분은 허망한 가(假)이다.

상분도 역시 참다운 것이라고 하면,  유식(唯識) 의리(義理)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是故一切皆唯有識。虛妄分別有極成故。唯旣不遮不離識法故,眞空等亦是有性。

由斯遠離增、減二邊,唯識義成契會中道。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것에서 오로지 식(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니, 허망분별로써 존재(有)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유(唯, 오직)’라고 말하는 것은 식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면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참다운 진공(眞空) 등도 역시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극단을 멀리 떠나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결론 맺은 것으로,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심외법(心外法)이란 없기 때문에 증익(增益) 극단을 부정하고, 허망한 마음이 존재하므로 손감(損減) 극단을 막음으로써, 유식(唯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5

 

此定初起唯在人中。佛及弟子說力起故,人中慧解極猛利故。後上二界亦得現前,'鄔陁夷經'是此誠證,無色亦名意成天故。於藏識教未信受者,若生無色不起此定。恐無色心成斷滅故。已信生彼亦得現前,知有藏識不斷滅故。

 선정(멸진정)을 처음 일으키는 것은 오직 인간세상에서이니,  

부처님과 제자들의 설법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고, 

인간이 반드시계의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끊어야 비로소  선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두 상계(上界)에서도 역시 현전할 수 있으니, '오타이경(鄔陀夷經)'에서 이를 진실하게 증명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욕계에서 일어나고, 반드시 불환과(不還果) 등을 얻기 때문에 무색계도 역시 의성천(意成天)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장식(藏識)에 관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무색계에 태어나서는 이 선정을 일으키지 못하나니, 색법과 심법이 없으므로 단멸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장식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그곳에 태어나서도 역시 현전할 수 있으니, 장식이 있으므로 단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의성천(意成天),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은 의사(意思)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의성천(意成天)이라고 한다.

 초선천(初禪天)부터 사선천(四禪天),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삼십삼천(三十三天), 육욕천(六欲天), 범천(梵天), 도리천(忉利天), 무량천(無量天)… 등, 불교에서는 수없이 많은 하늘을 말하지만, 이 하늘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선정이 깊은 사람들이 의식으로 만들어낸 하늘이기 때문에 이 모두가 의성천인 것이다. - 아미산

 
要斷三界見所斷惑,方起此定。異生不能伏滅有頂心、心所故。此定微妙,要證二空。隨應後得所引發故。

반드시 삼계의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끊어야 비로소 이 선정을 일으키나니, 범부는 유정천의 심왕ㆍ심소를 조복 단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범부는 유정천(有頂天) 견소단(見所斷) 심왕ㆍ심소를 복멸(伏滅)  없기 때문에 하부 지위의 8() 견혹(見惑) 모두 조복할  없으나, 오직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만을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최후로 반드시 복단(伏斷)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선정은 미묘하므로 반드시 아공ㆍ법공의 이공(二空)의 이치를 증득하며, 상응한 것을 따라 후득지에 이끌려 일어나기 때문이다.

2()  선정에 들어갈 때에는 오직 아공(我空) 증득하는 후득지(後得智)로써 이끌려 일어나고,

보살과 부처님이 이 선정에 들어갈 때에는 아공ㆍ법공의 후득지로써 모두 이끌려 일어날  있다. 

 

후득지(後得智) 또는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 가행(加行: 노력, 방편) 즉 선정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진여의 무분별지의 일부로서의 갖가지 무루혜를 가행지(加行智) 또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라 하며, 가행지는 근본지를 깨쳐 후득지가 드러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대승기신론》등의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 계열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을 본질의 입장에서 본각(本覺)이라 하고,

증득의 입장에서 범부가 최초로 증득하는 무루혜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하고,

성자가 선정 수행 즉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중간의 갖가지 무루혜를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성자가 근본무명을 끊고 진여를 완전히 깨쳐 본각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위키

 

有義下八地修所斷惑中要全斷欲,餘伏或斷然後方能初起此定。欲界惑種二性繁雜障定强故。

唯說不還三乘無學及諸菩薩得此定故。彼隨所應生上八地皆得後起。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수혹(修惑)에 관하여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욕계로부터 무소유처정까지의 하지(下地)의 8지(地)는 수도(修道)에서 단멸되는 미혹 중에서 반드시 완전히 욕망을 끊고 나머지를 조복하고, 미혹을 단멸한 후에야 바야흐로 능히 처음으로 이 선정을 일으킬 수 있으니,

욕계의 미혹의 종자는 불선과 유부무기의 이성(二性)이 번잡해서 선정을 장애함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직 불환과(不還果)와 3승의 무학 및 여러 보살만이 이 선정을 얻을 수 있으니, 그가 상응한 바에 따라서 상지(上地)의 8지(地)인 색계의 사선(四禪)과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인 사무색정(四無色定)을 얻고난 후에야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有義要斷下之四地修所斷惑,餘伏或斷然後,方能初起此定。

變異受俱煩惱種子障定强故,彼隨所應生上五地,皆得後起。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반드시 하지(下地)인, 욕계와 색계의 제3선천까지의 4지(地)의 수도(修道)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끊고 다른 것을 조복하거나, 혹은 단멸한 연후에 바야흐로 능히 처음에 이 선정을 일으키나니,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우수(憂受)ㆍ희수(喜受)의 변이수(變異受)와 함께하는 번뇌의 종자는 선정을 장애함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응한 바에 따라서 상부 지위의 5(地)에 태어나서 나중에 모두 일으킬 수 있으니, 색계의 제3선천 이하의 미혹은 이미 조복된 까닭에 그곳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若伏下惑能起此定,後不斷退生上地者,豈生上已卻斷下惑?

▷묻습니다; 만약 하지(下地)의 미혹을 조복하여 능히 이 선정을 일으킨다고 말한다면, 나중에 단멸하거나 퇴전하지 않고,

상지(上地)에 태어나는 자는, 어떻게 상지(上地)에 태어난 이후에 도리어 하부 지위의 미혹을 단멸한다고 합니까?

무루(無漏)로써 종자를 단멸하지 않고, 또한 퇴전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심소가 작용하지 않는 지위인 비상지(非想地) 태어나는 사람이 그곳에 태어나서 도리어 4선천 등의 미혹을 단멸하겠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斷亦無失。如生上者斷下末那俱生惑故。然不還者對治力强,正潤生位不起煩惱。

但由惑種潤上地生。雖所伏惑有退不退,而無伏下生上地義。故無生上卻斷下失。

▷답한다;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에도 역시 과실이 없으니, 상지(上地)에 태어나는 자가 하지(下地)의 말나식과 함께 생겨나는 미혹을 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환과를 이룬 자는 다스리는 힘이 강하므로 바로 태어남을 촉진하는 지위에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니, 다만 미혹의 종자에 의해 상지에 태어남을 촉진할 뿐이며,

그 조복된 미혹은 퇴전과 불퇴전이 있지만, 하지를 조복하고 상지에 태어나는 뜻은 없으므로, 따라서 상지에 태어나서 도리어 하지의 종자를을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이미 조복하긴 하지만 오히려 종자가 있어서 상지(上地) 태어남을 장애하므로, 그곳에 태어나는 뜻이 없다.

하지(下地) 종자를 단멸하고 나서 상지(上地) 태어날 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나서 다시 도리어 하지의 종자를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다는 의미이다.

 

若諸菩薩先二乘位已得滅定,後迴心者一切位中能起此定。若不爾者,或有乃至七地滿心,方能永伏一切煩惱。雖未永斷欲界修惑,而如已斷能起此、定論說已、入遠地菩、薩方能現起滅盡定。故有從初地卽能永伏一切煩惱如阿羅漢,彼十地中皆起此定。經說菩薩前六地中,亦能現起滅盡定故。

만약 모든 보살에 있어서, 먼저 2승의 지위에서 멸진정을 증득한 후에 마음을 대상으로 전향한 점오(漸悟)의 보살은 3대겁(大劫) 중에서의 모든 지위에서 이 선정을 일으킬 수 있으나, 

만약 그렇지 않은 돈오(頓悟)의 보살이라면, 혹은 어떤 사람은 7지(地)의 만심(滿心)에 이르러 바야흐로 능히 영원히 모든 번뇌를 조복하며, 아직 욕계의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을 영원히 단멸하지는 않지만, 이미 단멸한 것과 같이 능히 이 선정을 일으키나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62권에서 이미 10지(地) 중의 제7지인, 원행지(遠行地)에 들어간 보살이 바야흐로 멸진정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초지(初地)에서부터 곧 능히 모든 번뇌를 영원히 조복하는 것이 아라한과 같아서, 10지 가운데에서 모두 이 선정을 일으키나니, 경전, '불설십지경(佛說十地經)'의 제5권에서 보살은 앞의 6지 가운데에서도 역시 능히 멸진정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신 때문이다.

 

無心睡眠與悶絕者,謂有極重睡眠悶絕,令前六識皆不現行。疲極等緣所引身位,違前六識故,名極重睡眠。

'제16게송에서' 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지위인 무심위(無心位)와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라는 것은,

매우 깊은 수면과 기절한 경우에는 6식(六識)이 모두 현행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니,

매우 피곤한 것 등의 연(緣)에 이끌린 몸의 상태에서 6식(六識)에 거스르기 때문에 ‘매우 깊은 수면인 극수면(極睡眠)’이라 하는 것이다.

 

此睡眠時,雖無彼體,而由彼似彼故,假說彼名。風熱等緣所引身位,亦違六識故,名極重悶絕。

或此俱是觸處少分。除斯五位意識恒起。

이러한 수면의 시기에는 그 수면(睡眠)심소의 자체(體)가 없지만 그것에 의거하고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그 명칭을 말하는 것이며,

바람이나 열(熱) 등의 연(緣)에 이끌려진 몸의 상태에서도 역시 6식(六識)을 거슬리기 때문에 ‘매우 깊이 기절함인 극민절(極悶絶)’이라하는 것으로, 혹 무심위(無心位)의 수면과 기절한 경우의 극민절(極悶絶) 모두는 촉처(觸處)의 일부이다.

총체적으로 결론 맺는다면, 이러한 다섯 지위를 제외한 의식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正死生時亦無意識,何故但說五位不行。有義死生,及與言顯。

참으로 태어나고 죽을 때에도 역시 의식이 없거늘, 어째서 다만 오위(五位)에서만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무심의 5() 요간(料簡)하는  가지 중에서 먼저 태어나고 죽는 경우를 묻는 것이다.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죽고 태어나는 경우는 (제16게송에서) ‘및(급及)’, ‘와(여與)’라는 말로써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견해에 의하면, 무심위(無心位) 5(), 죽음의 순간인 사위(死位), 태어나는 순간의 생위(生位) 7위가 되지만, 다만 '삼십송'의 16게송에서 죽음과 태어남의 가지 () 말하지 않은 것은 게송 중의 ‘및(급及)’, ‘와(여與)’ 글자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彼說非理。所以者何?但說六時名無心故。謂前五位及無餘依。

應說死生卽悶絕攝。彼是最極悶絕位故。說及與言顯五無雜。此顯六識斷已後時,依本識中自種還起。

由此不說入無餘依。

제2사(第二師)가 말하는 것은 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다만 여섯 순간의 육시(六時)만을 무심이라고 '유가사지론'의 제13권에서 말한 때문이니, 곧 앞의 오위(五位)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을 말한 것이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이숙(異熟) 괴로움의 과보인 5온화합의 신체까지 모두 멸하는 것으로, 이제는 의지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는 것이다.

마땅히 죽음과 태어남의 경우는 곧 기절한 민절(悶絕)에 포함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지극한 기절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16게송에서 ‘및(급及)’, ‘와(여與)’라고 말을 한 것은 다섯 가지가 잡란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는 6식이 단절된 이후에 근본식 중의 자신의 종자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남을 나타낸 것으로, 이것에 의거해서 무여의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무여의열반에 들어가는 지위를 말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다.

 

此五位中異生有四,除在滅定。聖唯後三。於中如來自在菩薩,唯得有一,無睡悶故。

이 오위(五位) 중에서 범부에게는 네 가지가 있으니, 멸진정에 들어 있는 경우는 제외한 것이다.

성인에게는 오직 뒤의 세 가지, 즉 멸진정ㆍ수면ㆍ기절한 경우뿐이니, 그 중에서 여래와 자재한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멸진정)만이 있으니, 수면과 기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是故八識一切有情,心與末那二恒俱轉。若起第六則三俱轉。

餘隨緣合起一至五,則四俱轉乃至八俱。是謂略說識俱轉義。

이상과 같으므로 8식(八識)은 모든 유정에 있어서 제8식과 말나식의 둘은 항상 함께 전전하나니,

제6식을 일으킬 때에는 곧 셋이 함께 전전하며, 나머지는 연(緣)의 화합을 따라 하나에서부터 다섯에 이르기까지를 일으킬 때에는, 곧 네 가지가 함께 전전하는 것으로, 나아가 여덟 가지가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을 식이 함께 전전하는 뜻을 간략히 말한 것이다.

 

이하는  가지 능변식(能變識) 요간(料簡)하는 삼능변분별(三能變分別)로써, 먼저 8식이 함께 전전하는 관계를 밝힌다.

若一有情多識俱轉如何說彼是一有情?若立有情依識多少,汝無心位應非有情。

又他分心現在前位,如何可說自分有情?

▷묻습니다; 만약 하나의 유정에게 여러 식이 함께 전전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그를 하나의 유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욕계에서 6식이 색계의 선정을 일으킬 때, 만약 () 의해서 유정을 판별한다면 이것은 항상 색계의 유정일 뿐, 욕계의 유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 것인가?라고 반대로 질문한 것이다.

만약 유정을 건립하는 것이 식(識)의 많고 적음에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말하는 무심위는 마땅히 유정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분위인 타분(他分), 즉 상지(上地)의 다른 세계 분위인 계분(界分)이나 다른 무루 분위인 무루분(無漏分)의 심왕이 현전하는 지위를 어떻게 자기 분위인 자분(自分)의 유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타분(他分), 설일체유부에서 비판하기를 유정에서 ()이란 () 의미하고, 여러 식의 자체(自體) 있다면 많은 유정이 되는 것으로, 하나의 유정이라고 말할 없지 않겠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然立有情,依命根數或異熟識,俱不違理。彼俱恒時唯有一故。

▷정의한다; 그런데 유정을 건립하는 것은 명근(命根) 혹은 이숙식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 바른 논리에 위배되지 않으니, 그 명근(命根) 혹은 이숙식은 항상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명근(命根) 소승에서는 실유(實有) 말하지만, 대승에서는 그것을 종자에서 가립하여 말한다.

 

一身唯一等無閒緣,如何俱時有多識轉?

旣許此一引多心所,寧不許此能引多心?又誰定言此緣唯一說?多識俱者,許此緣多故。

▷묻습니다; 일신(一身)에는 오직 하나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있을 뿐이니, 어떻게 동시에 여러 식이 전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답한다; 이미 이 하나가 여러 심소를 이끈다는 것을 인정하였거늘, 어째서 이것이 능히 여러 심왕을 이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누가 결정적으로 이 등무간연이 오직 하나라고 말했는가? 여러 식이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등무간연도 여러 가지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연(因緣) · 소연연(所緣緣) · 증상연(增上緣) · 등무간연(等無間緣)의 4연(四緣)에서, 

인연은 인(因) 즉 직접적인 원인에 해당하고 

소연연 · 증상연 · 등무간연은 연(緣) 즉 간접적인 원인에 해당한다.-위키

 

又欲一時取多境者,多境現前,寧不頓取?諸根境等和合力齊,識前後生不應理故。

又心所性雖無差別,而類別者許多俱生,寧不許心異類俱起?

또한 일시(一時)에 여러 대상을 취하고자 할 때에는, 여러 대상이 현전하는데 어찌 단박에 취하지 않는가?

여러 감각기관과 대상 등이 화합하는 힘을 같이하는 것을, 식이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심소(心所, 마음작용)의 체성이 차별이 없지만, 부류가 다르면 여럿이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하면서, 어찌 종류가 다른 심왕이 함께 일어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심소법은 모두 심왕에 소속된 법으로서 동일한 능연(能緣) 체성임을 말한 것이다.

 

又如浪像依一起多。故依一心多識俱轉。又若不許意與五俱取,彼所緣應不明了。如散意識緣久滅故。

또한 비유하자면 하나의 파도나 거울에 의해 많은 파도나 여럿의 영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의 심왕에 의지해서 여러 식이 함께 전전하는 것이다.

또한 의식(意識)이 5식과 함께한다고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 5식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취하는 것이 명료하지 않아야 하나니, 산란된 의식이 과거의 구멸(久滅)을 반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4

 

有義彼天常無六識。聖說彼無轉識故。說彼唯有有色支故。又說彼爲無心地故。

1(第一師)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무상천(無想天)에는 항상 6식(六識)이 없으니, 성스러운 가르침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에서 그곳에는 전식이 없다고 말한 때문이며,

그곳에는 오직 물질적 요소인 유색지(有色支), 즉 5(만이 있다고 유가사지론 10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또한 그곳은 6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지위인 무심지(無心地)라고 유가사지론 13권에서 말한 때문이다."라 하였으며,


有義彼天將命終位,要起轉識然後命終。彼必起下潤生愛故。󰡔瑜伽論󰡕說後想生已,是諸有情從彼沒故。然說彼無轉識等者,依長時說非謂全無。

2(第二師)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무상천(無想天)에서 장차 목숨이 다하려는 지위에서는 반드시 전식(轉識)을 일으킨 연후에 목숨이 다하며, 그곳에서는 반드시 하지(下地) 태어남을 촉진하는 애착을 일으킨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9권에서 윤생(潤生) 애착을 일으킨다고 말하기 때문에 6식이 존재함을 안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의 56권에서 '후에 ()심소가 일어나고 나서  모든 유정이 그곳에서 목숨이 다한다' 말한 때문이나,  

앞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2 등에서는그곳에 전식이 없다는 등으로 말한  오랜 기간에 의거해서 말한 것으로,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식(七識) 즉 7가지의 식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로써,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 또는 전7식(前七識)이라 한다.


有義生時亦有轉識。彼中有必起潤生煩惱故。如餘本有初必有轉識故。󰡔瑜伽論󰡕說若生於彼,唯入不起。其想若生,從彼沒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태어날 때에도 역시 전식이 있으며, 무상천 중유(中有)에서는 반드시 태어남을 촉진하는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다른 하늘의 본유(本有) 초기와 같이 반드시 전식(轉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제12권에서 말하기를 '만약 색계 4선천에 태어날 때에는 오직 무심위에 들어갈 때에만 무상정을 일으키지 않으니, 만약  ()심소가 일어날 때에는 그곳에서 목숨이 다한다' 말한 때문이다."고 하였다.

유가사지론 제 12권의 본문 의미하는 것은, "무상천에 태어날 때에는 무심위에 들어갈 때만 심왕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무심위에 들어 있지 않을 때에는 심왕을 일으킨다

이것은 태어나는 최초이므로 () 최초에는 전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죽을 때에는 심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이다

 

중유(中有)는 죽은 뒤로부터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사이, 즉 사유(死有)와 생유(生有) 중간의 생존상태이다.

본유(本有), 생을 받은 뒤에 죽을 때까지의 사이, 즉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의 중간의 생존상태이다. 

참고로, 여기서 유(有)는 bhava의 번역어로서 중생의 생존을 말한다. 중생이 미혹의 생사세계를 윤회하는 한 기간의 생존상태를 4분(分)하여서 4유(四有)라고 하며,  

생유(生有), 각각의 세계에 생을 받는, 전세의 인연으로 해서 중생이 모태에 몸을 붙이는 택태(托胎)와 결생(結生)의 한 찰나와  본유(本有), 임종할 찰나의 사유(死有)중유(中有)이다.

 

彼本有初若無轉,識如何名入?先有後無乃名入故。「決擇分」言所有生得心、心所滅名無想故。

그곳의 본유(本有)의 초기에 만약 전식(轉識)이 없다면, 어떻게 들어간다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는 있었는데 나중에 없게 됨을 이름하여 들어간다고 하기 때문이니,

'섭결택분'에서 “모든 선천적인 심왕ㆍ심소를 멸하는 것을 무상이라고 이름한다”고 유가사지론 제53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此言意顯彼本有初有異熟生轉識蹔起,宿因緣力後不復生。由斯引起異熟無記分位差別說名無想。如善引生二定名善。不爾轉識一切不行。如何可言唯生得滅?故彼初位轉識蹔起。

 말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으니, 그곳의 본유(本有)의 초기에는 이숙생의 전식(轉識)이 잠시 일어나지만, 과거에 무심정을 익힌 인연의 세력 의해 나중에는 다시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에 의해 이숙무기의 분위의 차이를 이끌어낼  무상정이라고 이름하며, 선(善)에 이끌려 생겨나므로  가지 선정을 선(善)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식은 일체에 행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니, 어떻게 오직 선천적인 것만을 멸한다고 말할  있겠는가? 

따라서 무상천 초기의 지위에서는 전식이 잠시 일어나는 것이다.

 

이숙무기(異熟無記) 즉 이숙과(異熟果)는 대체적으로 과보로서의 타고난 몸과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말하지만 보다 엄밀하게는, 제7말나식은 4번뇌와 항상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有覆)이며 또한 이숙습기가 아닌 등류습기에 의한 등류과인데 등류과를 포함한 모든 과보의 유형은, 고 · 낙 혹은 불고불락인데 고 · 낙 · 불고불락은 그 자체로는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有覆無記), 즉 무부무기가 아니며 따라서 무부무기의 일종인 이숙무기도 아니다.

8식 중 나머지 제8아뢰야식 · 제6의식 · 전5식은 이숙무기인데, 특히 제8아뢰야식이 이 성질이 뚜렷하므로 그냥 이숙(異熟) 또는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제6의식은 이숙(異熟) 즉 '다르게 익음'의 과정의 결과물로서의 고와 낙을 감수하는 것 즉 '이숙에 의해 생겨난 이숙생(異熟生)'일 뿐이므로 진정한 이숙인, 진이숙(眞異熟)인 제8아뢰야식과 구분하여 제6의식을 이숙생(異熟生)이라고 한다

 

彼天唯在第四靜慮。下想麤動難可斷故。上無無想異熟處故。卽能引發無想定思,能感彼天異熟果故。

 하늘은 오직 제4정려(第四靜慮, 제4선정, 4선)에만 있는 것으로, 아래의 지위인 색계(界)의 3선(三禪)까지는 상(想)심소가 두드러지게 작용하여서 끊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색계 제4선천 중의 오정거천(五淨居天)인, 상지에서는 상(想)심소가 없으니, 이숙처가 없기 때문이다. 

 무상정을 이끌어   있는 사(思)심소가 능히  하늘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색계 제4선천 중의 오정거천(五淨居天),  성문4과(聲聞四果) 가운데 제3과인 불환과(不還果) 즉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한 수행자가 거주하는 색계의 5가지 청정한 처소를 통칭하며, 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3계 또는 3유는 6도(六道) 28천(二十八天) 등으로 나뉘지만, 수행론과 번뇌론에서는 흔히 9지(九地)로 나뉜다. 9지 중 색계 또는 색유에 해당하는 것은 제2지인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부터 제5지인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까지의 4가지의  4지(四地)이며, 이들 4지(四地)의 각각을 순서대로 초선(初禪) · 2선(二禪) · 3선(三禪) · 4선(四禪)이라고도 하고,
또는 초선천(初禪天) · 제2선천(第二禪天) · 제3선천(第三禪天) · 제4선천(第四禪天)이라고도 하며,
혹은 초정려(初靜慮) · 제2정려(第二靜慮) · 제3정려(第三靜慮) · 제4정려(第四靜慮)라고도 한다.

*3계9지(三界九地)와 색계(色界);
욕계(欲界) 또는 욕유(欲有) - 선정(禪定)의 상태가 아닌 산란(散亂)의 상태;

①오취잡거지(五趣雜居地) - 욕계산지(欲界散地) 또는 산지(散地)
색계(色界) 또는 색유(色有) - 4선(四禪) 또는 4정려(四靜慮)
②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 초선(初禪) · 초선천(初禪天) 또는 초정려(初靜慮)
③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 2선(二禪) · 제2선천(第二禪天) 또는 제2정려(第二靜慮)
④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 3선(三禪) · 제3선천(第三禪天) 또는 제3정려(第三靜慮)
⑤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 4선(四禪) · 제4선천(第四禪天) 또는 제4정려(第四靜慮)
무색계(無色界) 또는 무색유(無色有) - 4무색정(四無色定) 또는 4공정(四空定)
⑥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 -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⑦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⑧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 -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⑨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ㅡ 위키

 

及無心二定者,謂無想滅盡定。俱無六識故名無心。無想定者謂有異生伏遍淨貪未伏上染,由出離想作意爲先,令不恒行心、心所滅想滅爲首,立無想名,令身安和故亦名定。

제16게송에서 ‘급(及) 무심의  선정’이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을 말하는 것으로,

무상정과 멸진정, 둘  6식(六識)이 없기 때문에 무심정(無心定)으로 이름하며,

‘무상정’은 어떤 범부가 색계 제3선천의 제3천인 변정천(遍淨天)까지의 탐욕을 조복하고 아직 제4선정 이상의 상지의 잡염을 조복하지 못하였으며,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심소를 우선으로 함으로써,

항상 행하지 않는 심왕ㆍ심소를 멸하고, 상을 멸하는 것을 첫째로 삼아 무상(無想)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며, 

몸을 편안하고 조화롭게 하기 때문에 역시 선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변정천(遍淨天), 색계 제3선천의 제3천으로, 이 하늘은 맑고 깨끗하며 쾌락이 가득 찼다는 뜻으로 변정천이라고 이름한다.
*무상정(無想定)은 무상멸정(無想滅定) 또는 무상등지(無想等至)라고도 하며,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무상정에서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는 마치 물고기가 얼음 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나 혹은 벌레가 땅속에서 겨울을 나면서 정지 상태로 있는 것과 같지만, 무상정은 번뇌를 억제하거나 약화시키기는 하나 단멸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성과(聖果)에 들게 하지는 못한다. 즉 무상정을 닦아 6식의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무상정은 번뇌를 단멸하는 무루혜(無漏慧)를 증득한 것이아니기 때문에 성지가 시작되는 견도위(見道位)에 들지는 못한다.ㅡ위키

 

 

修習此定品別有三。下品修者現法必退,不能速疾還引現前。後生彼天,不甚光淨形色廣大,定當中夭。中品修者現不必退,設退速疾還引現前。後生彼天雖甚光淨形色廣大而不最極。雖有中夭而不決定。

 선정을 닦고 익히는  품류(品類)를 구별하자면  부류가 있으니,

하품(下品)의 닦는 수자(修者)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는 것으로,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수가 없으며, 나중에  하늘에 태어나서는 매우 빛나고 청정하거나 형색이 광대하지도 않으며, 반드시 중간에 일찍 죽게 되며,

중품(中品)의 닦는 수자(修者)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지는 않으며, 설사 퇴전하였을지라도 재빨리 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하며, 나중에  하늘에 태어나서는 매우 빛나고 청정하며 형식이 광대하지만,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닌 것으로, 중간에 일찍 죽긴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上品修者現必不退,後生彼天最極光淨形色廣大。必無中夭,窮滿壽量後方殞沒。

상품의 닦는 수자(修者) 현재법에서 결코 퇴전하지 않으며, 나중에  하늘에 태어나서는 가장 뛰어나게 빛나고 청정하며 형식이 광대하며, 중간에 일찍 죽지 않고, 수명의 길이를 끝까지 가득 채운 후에야 비로소 죽는다.

 

此定唯屬第四靜慮,又唯是善。彼所引故下上地。無由前說故。四業通三,除順現受。有義此定唯欲界起。由諸外道說力起故。人中慧解極猛利故。

‘무상정’은 오직 제4선정에만 속하고 또한 오직 선(善)이다. 그곳에서 이끌려지기 때문에 하지와 상지에는 없으니, 앞에서 설명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가지의 사업(四業)에 있어서는  가지의 에 공통된 금생에 받는 업인 순현수(順現受)를 제외한다.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무상정 오직 욕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모든 외도가 설교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며, 인간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강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사업(四業)은 순현수업(順現受業)ㆍ순생수업(順生受業)ㆍ순후수업(順後受業)ㆍ부정수업(不定受業)이다.
 

有義欲界先修習已,後生色界能引現前。除無想天至究竟故。此由厭想欣彼果入故,唯有漏非聖所起。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욕계에서 먼저 닦아 익힌 사람은 나중에 색계에 태어나서도 능히 이끌어 현전케 하나, 무상천을 제외하는 것이니, 구경에 이르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想)심소를 싫어하고  결과를 기뻐하여 들어가기 때문에 오직 유루이고, 성인이 일으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고 하였다.

 

滅盡定者,謂有無學或有學聖,已伏或離無所有貪。上貪不定。由止息想作意爲先,令不恒行恒行,染污心、心所滅,立滅盡名。令身安和故亦名定。由偏厭受想亦名滅彼定。

‘멸진정(滅盡定)’은 어떤 무학 혹은 유학의 성인이 무색계 4천 가운데의 제3천인 무소유처까지의 탐욕을 이미 조복하였거나 혹은 떠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으로서 3계의 맨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인 상지(上地)의 탐욕은 일정하지 않으니, 상(想)을 멈추는 지식(止息) 하는 미세한 심소를 우선으로 함으로써, 전6식(前六識)이 항상 작용하지 않는 것과 제7식이 항상 작용하는 것의 염오의 심왕ㆍ심소를 멸하게 하므로 멸진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이다. 

2() 6식의 유루의 사려(思慮)함을 싫어하거나 혹은 무루심이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나, 보살은 무심적정의 열반에 비슷한 공덕을 발생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다.

몸을 평안하고 조화롭게 하기 때문에 역시 선정이라고 이름하며,

집중적으로 수(受) 심소와 상(想) 심소를 싫어함에 의거해서, 특히 강하게 싫어하는 것에 의거해서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이름하며, 다른 심왕과 심소도 멸하며, 역시 그 수(受)ㆍ상(想) 심소를 멸하는 선정을 멸진정 또는 멸수상정이라고 이름한다.

 

무학(無學)은 구해탈(俱解脫)을 이룬 사람으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떠나서 지혜와 선정에 있어서 자재를 얻은 아라한을 말한다.

멸진정(滅盡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마찬가지로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멸진(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이다. 무상정은 이생범부(異生凡夫)가 닦고 득(得)하는 선정임에 비해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하기를 바래서 닦는 선정으로, 특히 선정의 장애를 멀리 떠난 부처와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그 지닌 바 역량을 바탕으로 득(得)하는 선정이다.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위키

 

修習此定品別有三。下品修者現法必退,不能速疾還引現前。中品修者現不必退,設退速疾還引現前。上品修者畢竟不退。

멸진정의 선정을 닦고 익히는  품류(品類)를 구별하자면  부류가 있으니,

하품(下品)의 닦는 수자(修者)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며, 신속히 되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없으며,

중품(中品)의 닦는 수자(修者)는 현재법에서 반드시 퇴전하지는 않으며, 설사 퇴전하였을지라도 신속히 되돌아가서 이끌어 현전케   있으며,

상품(上品)의 닦는 수자(修者) 구경에 이르러 퇴전하지 않는다.

 

此定初修,必依有頂遊觀無漏,爲加行入。次第定中最居後故。雖屬有頂而無漏攝。若修此定已得自在,餘地心後亦得現前。雖屬道諦而是非學非無學攝。似涅槃故。

이 선정을 처음 닦는 사람은 반드시 유정천(有頂天)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가행심(加行心)으로 하는 유관(遊觀)의  미혹을 단멸하지 않고, 진리를 관찰하지 않는 후득지(後得智)의 유관무루(遊觀無漏)에 의지해서 가행으로 삼아 들어가며, 

아홉 가지 순차적인 선정에 차례로 들어가는 수행자가 초선(初禪)부터 점진적으로 승진해 들어가서 8유정유관무루(有頂遊觀無漏)로부터 9멸진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유관무루로써 가행(加行) 삼는다고 한 것이다.

순차적인 선정인 구차제정(九次第定) 중에서 가장 나중에 머물기 때문이다.

유정천에 속하긴 하지만 무루에 포함되며, 이 멸진정을 닦아서 이미 자재를 얻은 사람은 하지(下地)의 7지(地)의 심왕 이후에도 역시 현전할 수 있으며,

도제(道諦)에 속하지만 유학도 무학도 아닌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 포함되나니, 열반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구차제정(九次第定), 유루의 선정인 4선 · 4무색정 · 멸진정의 9가지 선정을 차례 대로 간격 없이 수행하여 최후의 멸진정(滅盡定)에 드는 것을 말한다.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 공무변처해탈(空無邊處解脫) →

식무변처해탈(識無邊處解脫) → 무소유처해탈(無所有處解脫) →

비상비비상처해탈 (非想非非想處解脫) →  멸수상정해탈(滅受想定解脫) → 멸진정(滅盡定)

즉  색계의 초선에서 시작하여 차례대로 선(初禪) · 2선(二禪) · 3선(三禪) · 4선(四禪)의 4지(四地)와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과 멸진정을 말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3

 

'莊嚴論'說復云何通?如彼頌言: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제5권에서 말하는 것을 어떻게 회통할 수 있겠는가?그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許心似二現 如是似貪等, 或似於信等 無別染善法。

심왕이 둘로 사현(似現)한다고 인정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탐(貪)심소 등으로 사현하고

혹은 신(信)심소 등으로 사현하는 것으로, 별도의 잡염ㆍ선(善)의 법은 없는 것이다.

게송은 현재 유통되는 대승장엄경론에는 없으며, 게송에서 별도로 ()심소 등의 잡염법과 ()심소 등의 선법(善法) 자체(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심소법이 별도의 자체가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라는 취지이다.


若卽是心分位差別,如何聖教說心相應?他性相應非自性故。又如何說心、與心所俱時而起,如日與光?󰡔瑜伽論󰡕說復云何通?彼說心所非卽心故。如彼頌言:

만약 이것이 심왕의 분위(分位)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입능가경(入楞伽經) 제9권과 제10권에서는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심왕과 상응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는 다른 체성과 상응하고, 자성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어째서 입능가경 제7권에서는 심왕과 심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비유하면 태양과 빛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 56권에서 말하는 것을 어떻게 회통할 수 있겠는가? 

유가사지론에서는 심소는  심왕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니,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왕을 떠나서 심소의 자체(體)가 없다는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五種性不成 分位差過失, 因緣無別故 與聖教相違。

다섯 종류 오종성(五種性, 오온)의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 

분위로써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과실이 있는 것으로,  

인연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오직 ()뿐으로서 심소(心所) 없다고 말한다면, 어떤 인연의 차이가 있어서 하나의 식에 많은 행상(行相, 인식작용) 있고 분위(分位) 다르게 되겠는가?라는이다.


應說離心有別自性。以心勝故說唯識等。心所依心勢力生故,說似彼現。

非彼卽心。又識心言亦攝心所。恒相應故。唯識等言及現似彼,皆無有失。

마땅히 심왕(心)을 떠나서 별도의 자성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심왕(心)이 뛰어나기 때문에 오직 식(識)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왕(心)과 심소(心所, 마음작용, 의식작용)의 관계에서 전자인 심왕이 주체가 되고, 의지처이며, 인식작용이 총체적이고 항상 결정적이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심소(心所, 마음작용, 의식작용)는 심왕(心)에 의지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심소(心所), 그것으로 사현(似現)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심왕(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식(識)이나 심(心)이라는 말에는 역시 심소도 포함되나니,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등이라는 말과 그것으로 사현한다고 말하는 것 모두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此依世俗。若依勝義,心所與心非離非卽。諸識相望應知亦然。是謂大乘眞俗妙理。已說六識心所相應。云何應知現起分位?頌曰:

이것은 세속제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나, 만약 승의제에 의해서 말한다면, 심왕과 심소는 별개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난비즉(非難非卽)이니, 모든 식(識)을 배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대승의 진제와 속제의 미묘한 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6식(六識)이 심소와 상응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였으니,

현행하는 분위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삼십송의 제15ㆍ16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나니;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근본식에 의지하니, 5식은 연(緣)을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혹은 함께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는 것으로, 파도가 바닷물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근본식에 의지하는 것은 3능변식을 설명하는 9() 중에 소의문(所依門)이고, 

이 게송은 9의(九義) 중에 구불구전문(俱不俱轉門)이다.

본문에서 ‘5식’만을 들었지만, 사실 제6의식은 5식 중의 1식(識)이라도 일어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동시에 구기(俱起)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안식이 생기하려면, 공간ㆍ빛ㆍ감관(根)ㆍ경(境)ㆍ작의(作意)ㆍ제6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ㆍ종자의 9연(九緣)을 필요로 한다.

식(識)은 빛을 제외한 공간ㆍ감관ㆍ대상ㆍ작의ㆍ제6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ㆍ종자등 8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비식ㆍ설식ㆍ신식은 공간과 빛을 제외한 감관(根)ㆍ경(境)ㆍ작의(作意)ㆍ제6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ㆍ종자의 7을 필요로 한다.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絕。

의식(意識)은 항상 일어나는 것으로, 무상천에 태어나는  무심의  선정과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제외한다.

 

이 게송은 9의(九義) 중의 기멸분위문(起滅分位門)으로, 제6의식이 5위무심(位無心)을 제외하고 항상 일어나는 이유는 연(緣)을 가자(假藉)함이 적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①부정심소인 심(尋)ㆍ사(伺)와 상응하기 때문에 스스로 능히 사려할 수 있으며,

②타(他)에 이끌려서 생기하지 않고 스스로 생기하며,

③내(內)ㆍ외문전(外門轉)의 식(識), 즉 외계의 두드러진 구체적 사물인 추사(麤事)에 대해서도 일어나지만, 또한 내계의 세사(細事, 심법心法ㆍ이성理性)에 대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緣)이 구족되는 것이 용이하므로 간단(間斷)하는 일이 매우 적어서 거의 항시(恒時)에 현기(現起)하나, 다만 오위무심이라 하여 무상천에 태어남과 무상정ㆍ멸진정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의 경우에는 제6의식이 생기하지 않는 것이다.


論曰:根本識者阿陁那識。染淨諸識生根本故。依止者謂前六轉識。以根本識爲共親依。

▷논하여 말하다; ‘근본식’이란 아타나식이니, 잡염ㆍ청정의 모든 식이 현행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의(依)’란 6전식(轉識)을 말하는 것으로, 근본식, 즉 현행 제8식이 6식 모두의 의지처이므로 공통적인 의지처인 공의(共依)와 직접적인 의지처인 친의(親依)로 삼는다.

6() 소의(所依, 의지처) 밝힌, 육식소의문(六識所依門).

 

직접적인 의지처인 친의(親依)는 공통되지 않는 의지처인 불공의(不共依)라는 의미로서 종자의 근본식을 가리키며, 6식은 각각의 자기 종자를 그 친인연(親因緣)으로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유정이 제8식을 가지고 있지만 의미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명칭하는 것으로,

먼저 심(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갖가지의 법으로 인하여 훈습된 종자가 모여진 곳이기 때문이며,

혹은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이름하나니, 종자와 몸의 색근(色根)를 유지해서 무너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혹은 소지의(所知依)라고 이름하나니, 소지(所知)인 여러 잡염법ㆍ청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혹은 종자식(種子識)이라고 이름하나니, 세간ㆍ출세간의 여러 종자를 능히 두루 맡아 지니기 때문이니,

이러한 여러 명칭은 제8식의 모든 지위에 통하는 것이다. ㅡ 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5


五識者謂前五轉識。種類相似故摠說之。隨緣現言顯非常起緣,謂作意、根、境等緣。謂五識身內依本識外隨作意、五根、境等,衆緣和合方得現前。由此或俱或不俱起。外緣合者有頓漸故。如水濤波隨緣多少。此等法、喩廣說如經。

‘5식(五識)’은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의 5전식(五轉識, 전오식)을 말하는 것이니, 부류가 비슷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그것을 말한다. 

“연(緣)을 따라 일어난다는 수연현(隨緣現)”이라는 말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님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의 연(緣)이란 작의(作意)ㆍ감각기관(根)ㆍ대상(境) 등을 말한다.

5식은 안으로는 근본식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작의ㆍ오근(五根)ㆍ대상(境) 등의 여러 연(緣)의 화합을 따라 비로소 일어날  있으나, 이것에 의해서 혹은 함께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으니,  

외부세계의 외연(外緣)이 화합하는 것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과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바닷물의 파도가 연(緣)을 따라 많고 적음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법과 비유를 구체적으로 많이 설하는 경전은, 해심밀경 제1권이다.

5식(五識)이 ()을 따라 함께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음을 밝힌, 구불구문(俱不俱門).

 

5식(五識)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 같이 감각기관에 의지한다.

둘째, 물질계의 대상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셋째, 오직 현재법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5식은 과거와 미래의 법을 인식대상으로 할 수 없다.

넷째, 현량지(現量知)이니, 5식은 비량(比量) 등의 작용이 없다.

다섯째, 잠시 중단됨이 있다.


由五轉識行相麤動。所藉衆緣時多不具故,起時少不起時多。第六意識雖亦麤動,而所藉緣無時不具。由違緣故有時不起。第七、八識行相微細,所藉衆緣一切時有。故無緣㝵令摠不行。

전식(五轉識)은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의지하는 갖가지 연(緣)을 때로는 거의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날 때가 적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기도 하다.

제6의 의식(意識)도 역시 두드러지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의지하는 연(緣)을 갖추지 못할 때는 없으나,

5위(位)의 무심(無心)인 경우에는 거스르는 연의 위연(違緣)에 의거함으로써 어떤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7식과 제8식은 인식작용이 미세하고 의지하는 여러 중연(衆緣)이 언제나 있으므로, 따라서 연(緣)으로서 장애하여 전체적으로 행하지 않게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다음에 일어나고 멸하는 분위를 밝힌, 기멸분위문(起滅分位門).

 

의식(意識)을 제6식(第六識), 제6 의식(第六意識) 또는 제6의식(第六意識)이라고도 함.


又五識身不能思慮,唯外門轉,起藉多緣。故斷時多,現行時少。第六意識自能思慮,內外門轉不藉多緣。唯除五位常能現起。故斷時少現起時多。由斯不說此隨緣現。

또한 5식(五識)에는 심(尋)ㆍ사(伺) 심소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사려(思慮)할  없고, 오직 감각기관인 외문(外門)에서 전전하며, 일어날 때에는 여러연(衆緣)에 의지하므로, 따라서 작용이 중단될 때가 많고 현행할 때가 적다. 

제6의식(第六意識)은 스스로 사려할  있고, 내면과 외부의 감각기관에서 전전하며, 많은 중연(衆緣) 의지하지 않는다. 

무상천(無想天)ㆍ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ㆍ극수면(極睡眠)ㆍ극민절(極悶絶)의 5 가지 무심위(無心位)를 제외한다면 항상 일어날  있으므로, 따라서 중단될 때는 적고 현행할 때가 많은 것이다. 이상에 의거해서 이것은 연(緣)을 따라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五位者何?生無想等。無想天者謂修彼定,厭麤想力生彼天中。

違不恒行心及心所想滅爲首,名無想天。故六轉識於彼皆斷。

▷묻습니다; 다섯 지위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무상천에 태어나는 등으로, 무상천(無想天)은  선정을 닦아서 6식(六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想)심소를 싫어하는 힘에 의해  하늘에 태어난다.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심소를 싫어한다는 것은, 모든 외도들이 상을 생사(生死)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여기에 비중을 두어 그것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이며, 이것은 6식의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想)으로, 7식과 8식에서의 미세한 상심소는 아니다.

전6식(前六識)이 멸하여 작용하지 않는 심왕ㆍ심소에 거스르는 상(想)을 멸함을 첫째로 삼기 때문에 무상천이라 이름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거기에서는 6전식이 모두 단절된다.

'유식삼십송'의 16게송에서 “무상천에 태어나는 무심의 선정과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제외한다”라는 구절을 해석한한 오위무심(五位無心)이다.

 

무상천(無想天), 색계 제4선천 중의 광과천(廣果天)을 가리켜서 별도로 무상천(無想天)이라고 이름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2

 

有義尋伺亦五識俱。論說五識有尋、伺故。又說尋、伺卽七分別,謂有相等。

'雜集'復言任運分別謂五識故。有義尋、伺唯意識俱。論說尋求、伺察等法,皆是意識不共法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尋)ㆍ사(伺) 심소는 역시 5식(五識)과도 함께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 5식에 심(尋)ㆍ사(伺) 심소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또한 심(尋)ㆍ사(伺) 심소는  7 가지의 칠분별(七分別)이라고 말하나니, 즉 형상이 있음의 유상(有相), 형상이 없음의 무상(無相), 자연히 일어남의 임운(任運), 찾아 구함의 심구(尋求), 보고 살피는 사찰(伺察), 잡염됨의 염오(染汚), 잡염되지 않음으니 불염오(不染汚) 등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에서 다시 자연히 일어나는 분별은 5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尋)ㆍ사(伺) 심소도 오직 의식과 함께하나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1권에서 심(尋)ㆍ사(伺) 등의 법은 일곱 가지의 칠분별(七分別)은 심(尋)ㆍ사(伺) 심소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모 의식의 불공법(不共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又說尋、伺,憂、喜相應,曾不說與苦、樂俱故。捨受遍故可不待說。何緣不說與苦、樂俱?雖初靜慮有意地樂,而不離喜摠說喜名。雖純苦處有意地苦,而似憂故摠說爲憂。

또한 심(尋)ㆍ사(伺) 심소는 우수(憂受)ㆍ희수(喜受)와 상응할 뿐이라고 말하나, 일찍이 고수(苦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사수(捨受)는 두루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나, 무슨 까닭으로 고수(苦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초선천에서는 의식의 낙수(樂受)가 있지만, 희수(喜受)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전체적으로 희수(喜受)라고 명칭하며,

순전히 고통만 있는 곳에서는 의식의 고수(苦受)가 있지만, 우수(憂受)와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우수(憂受)라고 말하는 것이다.


又說尋、伺以名身等、義爲所緣。非五識身以名身等、義爲境故。然說五識有尋、伺者,顯多由彼起,非說彼相應。

또한 심(尋)ㆍ사(伺) 심소는 명칭의 명신(名身), 즉 명칭 등은 능전(能詮)이고 의(義, 뜻)은 소전(所詮)으로서,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한다고 유가사지론 제5권에서 말하며,

5식(五識)은 명칭의 명신(名身) 등과 의(義, 뜻)으로써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5식에 심ㆍ사 심소가 있다고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 말한 것은 대부분 그것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그것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雜集'所言,任運分別謂五識者,彼與'瑜伽'所說分別義各有異。彼說任運卽是五識,

'瑜伽'說此是五識俱分別意識相應尋伺。故彼所引爲證不成。由此五識定無尋、伺。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 2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분별은 5식을 가리킨다는 것은 유가사지론에서 말한 분별과는 다른 뜻으로,

잡집론에서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5식이라고 말하고, 유가사지론에서는 이것이 5식과 함께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임운분별(任運分別) 상응하는 심ㆍ사 심소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가 인용한 것은 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이에 의하여 반드시 5식에서는 심(尋)ㆍ사(伺) 심소가 없는 것이다.

 

有義惡作憂捨相應。唯慼行轉。通無記故。睡眠喜、憂、捨受俱起,行通歡、慼中庸轉故,尋伺憂喜、捨、樂相應。初靜慮中意樂俱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오작(惡作)심소는 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하는 것으로, 오직 근심의 작용에서만 전전하므로 희수(喜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하지 않으니, 무기에 통하기 때문에 따라서 사수(捨受)와 함께한다.

면(眠)심소는 희수(喜受)ㆍ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작용이 기쁨ㆍ슬픔ㆍ기쁨도 슬픔도 아닌 것에 공통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이며,

심ㆍ사 심소는 우수ㆍ희수ㆍ사수ㆍ낙수와 상응하나니, 초선천 중에서는 의식의 낙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부정심소와 5()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수구불구문(受俱不俱門)


有義此四亦苦受俱。純苦趣中意苦俱故。四皆容與五別境俱。行相、所緣不相違故。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회(悔)ㆍ면(眼) 심소와 심(尋)ㆍ사(伺) 심소의  가지 심소는 역시 고수(苦受)와도 함께하나니, 순전히 고통만 있는 세계에서는 의식의 고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심소는 모두 다섯 가지 별경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는 것이니, 행상(行相, 인식작용)도 소연(所緣, 인식대상)도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와 별경심소의 상응관계를 밝힌, 별경상응문(別境相應門).


悔、眠但與十善容俱。此唯在欲無輕安故。尋、伺容與十一善俱。初靜慮中輕安俱故。

회(悔)ㆍ면(眼) 심소는 다만 10 가지 선(善)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니, 이것은 오직 욕계에서만 있고, 경안(經安)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尋)ㆍ사(伺) 심소는 11 가지 선(善)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니, 초선천 중에서는 경안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와 선심소의 상응관계를 밝힌, 선구문(善俱門).

 

悔但容與無明相應。此行相麤貪等細故。睡眠、尋、伺十煩惱俱。此彼展轉不相違故。

회(悔)심소는 다만 무명과 상응하는 것이 인정되나니, 이것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탐(貪)심소 등은 미세하기 때문이며,

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11 가지 번뇌의 심소와 함께하나니, 이것과 그것은 전전하여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와  가지 번뇌심소의 상응관계를 밝힌, 십번뇌구문(十煩惱俱門).


悔與中、大隨惑容俱。非忿等十各爲主故。睡眠、尋、伺二十容俱。眠等位中皆起彼故。此四皆通善等三性。於無記業亦追悔故。

회(悔)심소는 중수번뇌(中隨煩惱)와 대수번뇌심소(大隨煩惱心所)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 분(忿) 등의  가지는 아니니, 각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와 수번뇌심소의 상응관계를 밝힌, 수혹구전문(隨惑俱轉門).

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스무 가지 수번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니, 수면 등의 지위 중에서 분(忿)심소 등 20 가지 수번뇌심소 모두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가지 심소는 모두  불선 무기 등의  삼성(三性) 통하나니, 무기의 업에서도 역시 뉘우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의 3() 관계를 밝힌, 삼성문(三性門).

 

51 가지의 심소법(心所法)에서 20 가지의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를 이루는

10 가지의 소수번뇌심소(小隨煩惱心所) · 2 가지의 중수번뇌심소(中隨煩惱心所) · 8 가지의 대수번뇌심소(大隨煩惱心所)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2가지 마음작용을 중수번뇌(中隨煩惱) 또는 중수혹(中隨惑)이라 한다.

有義初二唯生得善。行相麤鄙及昧略故。後二亦通加行善。攝聞所成等,有尋、伺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처음의  가지, 회(悔)ㆍ면(眼)심소는 오직 선천적으로 착한 성품의 생득선(生得善)으로,

회(悔) 심소는 행상(行相, 인식작용) 두드러지고 자신을 낮추며,

면(眼)심소는 어둡고 빼앗기 때문이다. 

뒤의 2 가지 심(尋)ㆍ사(伺) 심소는 역시 가행선(加行善)에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들어서 이루는 지혜인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에 심ㆍ사 심소가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有義初二亦加行善。聞思位中有悔眠故。後三皆通染、淨無記。惡作非染解、麤猛故。四無記,悔唯中二。行相麤猛非定果故。眠除第四。非定引生,異熟生心亦得眠故。尋、伺除初。彼解微劣不能尋察名等、義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의, '처음의 둘인 회(悔)ㆍ면(眼) 심소도 역시 가행선으로, 문혜(聞慧)ㆍ사혜(思慧)의 지위 중에 회ㆍ면 심소가 있기 때문이고,

뒷부분의 셋은 모두 잡염의 유부무기(有覆無記)와 청정의 무부무기(無覆無記) 통하나,

회(悔)심소는 잡염이 아니니, 이해가 두드러지고 맹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숙(異熟)ㆍ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의 청정의 사(四)무기 중에서 회심소는 가운데  가지의 위의무기와 공교무기이니,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두드러지고 맹렬하며, 선정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면(眼)심소에서는  번째의 변화(變化)무기만을 제외하나니, 선정에 이끌려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제6식의 이숙생의 심왕에도 역시 수면이 있을  있기 때문이다.

심ㆍ사 심소는  번째의 이숙무기만을 제외하나니, 그 이숙심은 이해가 미세하고 열등해서 명칭 등과 의미를 심구ㆍ사찰할  없기 때문이다.


惡作、睡眠唯欲界有,尋、伺在欲及初靜慮。餘界、地法皆妙靜故。悔、眠生上必不現起。

尋、伺上下亦起下上。下上尋伺能緣上下。

회(悔)ㆍ면(眼) 심소는 오직 욕계에만 있고, 심(尋)ㆍ사(伺) 심소는 욕계와 초선천에 있으니, 

색계와 무색계와 제2선천(第二禪天) 이상의 지위의 법은 모두 승묘하고 적정하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는 상지(上地)에 있을 때는 반드시 일으키지 않으나,

심ㆍ사 심소는 상지(上地)와 하지(下地)에 있으면서 역시 상지ㆍ하지를 일으키는 것으로,  

상지와 상지의 심ㆍ사 심소는 능히 상지ㆍ하지를 반연하는 것이다.

부정심소가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를 밝힌, 계박문(界繫門).

 

有義悔、眠不能緣上。行相麤近極昧略故。有義此二亦緣上境。有邪見者悔修定故。夢能普緣所更事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회(悔)ㆍ면(眼) 심소는 상지(上地) 반연할  없으니, 회심소는 행상(行相, 인식작용) 두드러지고 가까우며, 면심소는 매우 어둡고 빼앗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가지의 회(悔)ㆍ면(眼) 심소도 역시 상지(上地) 대상을 반연하나니, 삿된 견해가 있는 자는 상지의 선정을 닦는 것을 얕보 때문이고 꿈속에서는 능히 널리 바꾸어진 대상을 반연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悔非無學,離欲捨故。睡眠、尋伺皆通三種。求解脫者有爲善法,皆名學故。學究竟者有爲善法,皆無學故。

회(悔)심소는 무학(無學)은 아니니, 욕망을 떠날  버리기 때문이며,

회(悔)ㆍ면(眼)ㆍ심(尋)ㆍ사(伺) 심소는 모두  종류에 통하나니,

해탈을 구하는 자의 유위의 선법을 모두 유학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경지를 배우는 자의 유위의 선법은 모두 무학이기 때문이다.

부정심소와 유학(有學) 등의 관계를 밝힌, 학등삼문(學等三門).


悔眠唯通見修所斷,亦邪見等勢力起故。非無漏道親所引生故。亦非如憂深求解脫故。若已斷故名非所斷,則無學眠非所斷攝。

회(悔)ㆍ면(眼) 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하며,  

부정심소가 어떤 ()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 견등소단문(見等所斷門).

또한 사견 등의 세력에 의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며, 

회ㆍ면 심소는 소승에서는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수소단(修所斷)이라고 말하나,

유식학에서 그것은 사견(邪見) 등의 세력에 의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에도 포함된다고 한다.

무루도(無漏道)에서 바로 이끌려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고근(苦根) 무루(無漏) 아니지만 무학(無學)에서 성취하므로 부단(不斷)이라고 이름한다면, ()심소도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것에 대하여 답변하는 것이다.

또한 우근(憂根)이 깊이 해탈을 구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근(憂根) 무학(無學) 아니지만, 22() 중에서 부단(不斷)으로 이름하나니, 어째서 ()심소 등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

만약 무학에서 이미 단멸되었기 때문에 단멸해야  것이 아닌 비소단(非所斷)이라고 이름한다면,

 무학의 면(眠)심소도 단멸해야  것이 아닌 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尋伺雖非眞無漏道,而能引彼,從彼引生故,通見、修,非所斷攝。

심ㆍ사 심소는 참다운 무루도의 무분별지혜가 아니지만, 능히 그것을 이끌고 그것에 따라서 이끌려 생겨나기 때문에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단멸해야  것이 아닌 것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有義尋伺非所斷者,於五法中唯分別攝。'瑜伽'說彼是分別故。

有義此二亦正智攝。說正思惟是無漏故。彼能令心尋求等故。又說彼是言說因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尋)ㆍ사(伺) 심소는 단멸해야  것이 아닌 것은 다섯 가지 법, 즉 일체법의 자성을 분별한 오법(五法)인 형상(相)ㆍ명칭(名)ㆍ분별ㆍ정지(正智)ㆍ여여(如如, 진여) 중에서 오직 분별에만 포함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권에서 그것은 분별이라고 말한 때문이다' 고 하였으며,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尋)ㆍ사(伺) 이  가지는 역시 5법(法) 중의 정지(正智)로서, 무루(無漏)의 후득지(後得智)인 정지(正智)에 포함되는 것으로,

정사유(正思惟)의 자체(體)가는 곧 심(尋)심소이고 무루라고 현양성교론 제2권에서 말하기 때문이고,

그 정사유는 능히 심왕(心)으로 하여금 찾아 구하는 심구(尋求) 등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유가사지론 제29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언설의 원인이라고 십지경론(十地經論)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다.'고 하였다.


未究竟位於藥病等未能遍知,後得智中爲他說法,必假尋伺。非如佛地無功用說。故此二種亦通無漏。

아직 궁극적으로 깨치지 못한 인위(因位)의 2승(乘)과 10지(地) 보살의 지위에서는치(能治)의 약(藥)과 소치(所治)의 병(病) 등에 대해서 능히 두루   없으므로, 후득지 속에서 타인을 위하여 법을 때에 반드시 심(尋)ㆍ사(伺) 심소에 의지하는 것이니, 부처님 지위인, 유위(有爲)의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심(尋)ㆍ사(伺),  가지는 역시 무루에도 통하는 것이다.

 

雖說尋、伺必是分別,而不定說唯屬第三。後得正智中亦有分別故。餘門准上如理應思。

심(尋)ㆍ사(伺) 심소는 반드시 분별(分別)이라고 말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오직 5법(法) 중에 제3분별에 속한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니, 5법 중에 제4정지(第四正智)의 후득의 바른 지혜 중에도 역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유루ㆍ무루를 반연하는 것, 자체가 있는 대상의 유사(有事)와 자체가 없는 대상의 무사(無事)를 반연한 것 등은 이상에 견주어서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如是六位諸心所法,爲離心體有別自性,爲卽是心分位差別?
▷묻습니다; 이상과 같은 6위의 모든 심소법은 심왕의 자체인 심체(心體)를 떠나서 별도의 자성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심왕의 분위의 차이인 것입니까?

다음에 심왕법과 심소법이 별도의 자체인가, 아니면 분위(分位) 차이인가를 밝힌, 왕소일이(王所一二).


設爾何失?二俱有過。若離心體有別自性,如何聖教說唯有識?又如何說心遠獨行,染淨由心,士夫六界?
▷답한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에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둘 다 과실이 있으니, 만약 심체(心體)를 떠나서 별도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성스러운 가르침인 십지경론 제8권에서 오직 식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어째서 심왕이 멀리 홀로 작용한다고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4권에서 말하는 것이며?

잡염법ㆍ청정법은 심왕에 의거한다고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2권에서 말하며?

어찌하여 유가사지론 제56권에서 유정은 이 6계(界)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심소가 유정을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반문反問한 것)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7 1

 

已說二十隨煩惱相。不定有四,其相云何?頌曰:

이상과 같이 20 가지 수번뇌(隨煩惱) 심소의 상(相)을 말하였고,

부정심소(不定心所)에 4 가지가 있으니, 그 상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14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부정의 심소는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이니, 이 둘에 각각 둘이 있네.


論曰:悔、眠、尋、伺於善染等,皆不定故,非如觸等定遍心故,非如欲等定遍地故,立不定名。

▷논하여 말한다;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선(善)과 잡염 등에 대해서 모두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촉(觸)심소 등과 같이 반드시 심왕에 두루하지 않기 때문이며,

욕(欲)심소 등과 같이 반드시 모든 지위(地)에 두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부정(不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이다.

부정심소(不定心所)라는 명칭을 건립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 해당되는 심소들은 3(性:선ㆍ악ㆍ무기) 중에서  성품이 일정하지 않고, 3()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모든 식과 상응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심소(不定心所)라고 이름한 것이다.


悔謂惡作。惡所作業追悔爲性,障止爲業。此卽於果假立因名。先惡所作業後方追悔故。悔先不作亦惡作攝。如追悔言,我先不作如是事業是我惡作。

회(悔)심소’는 오작(惡作)을 지은 것을 말하며, 소작(所作)의 업(業) 미워하고 후회함을 체성(體)로 하고, 사마타(止)를애하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곧 이것은 결과에 대해서 원인의 명칭을 가립한 것으로, 먼저 지은 업인 소작업(所作業)을 미워하고, 나중에 비로소 후회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는 것도 역시 오작(惡作)에 포함되며, 후회하면서 내가 이전에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오작(惡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悔, kauktya)심소는 뉘우침’, 후회’, 이전에 지은 업을 후회하고 싫어하는 심리작용으로, 오작(惡作)이라고도 한다. 뉘우쳐서 행동을 ()의 수행으로 가게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선행(善行) 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을 더욱 괴롭히기도 한다.

 

별도로 부정심소의 자체(體)를 설명한다.

眠謂睡眠。令身不自在昧略爲性,障觀爲業。謂睡眠位身不自在心極闇劣,一門轉故。昧簡在定,略別寤時,令顯睡眠非無體用。有無心位假立此名。如餘蓋纏心相應故。

면(眠)심소’는 수면(睡眠)을 말하는 것으로, 자재하지 못하고, 어둡고 빼앗기게 함을 체성(體)으로 하고, 위빠사나(觀)를 장애함을 업(業)으로 하며,

수면 상태에서는 몸으로 하여금 자재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매우 어둡고 용렬하게 하며, 오직 하나의 의식(意識)에만 상응해서 일문(一門)에서만 전전하기 때문이다. 

매(昧, 어두움)하다는 것은 선정에 들어 있는 것과 구분하며, 빼앗는다는 것은 깨어 있을 때와 구별하며,

영(令, 하게 함)은 면(眠)심소가 자체와 작용의 체용(體用)이 없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무심의 지위에 있어도  명칭을 가립하기도 하나니, 다른 것과 같이 개(蓋, 덮어서 가리움), 전(纏, 얽힘)으로써 심왕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세간과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무심위(無心位) 수면(睡眠)으로 이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가립(假立)으로, 실제의 수면은 별도로 존재한다. 이것은 심왕을 덮고 얽어매기는 개전(蓋纏)하기 때문이다. 덮고 얽어매는, 개전(蓋纏)이란 것은 반드시 심소법으로서 자체(體) 없는 법이 아니다.

 

면(眠, middha, nidra)심소는 ‘수면(睡眠)’, 즉 숙면의 상태로 유도하는 심소이다. 일단 숙면 상태가 되면 면(眠)심소는 더 이상 상응하지 않으며, 수면은 신체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암매(闇昧)하게 만들어서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된다. 적당한 수면은 체력을 충전하여 활달하게 하지만, 지나친 잠은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有義此二唯癡爲體。說隨煩惱及癡分故。有義不然。亦通善故。應說此二染癡爲體,淨卽無癡。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회(悔)심소와 면(眼)심소, 두 가지는 오직 치심소를 자체(體)로 하는 것으로, 수번뇌와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역시 선품(善品)에도 통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것으로, 회(悔)심소와 면(眼)심소, 두 가지는 잡염법이라면 치심소를 자체(體)로 하여야 하고, 청정법이라면 곧 무치(無癡)라고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論依染分說隨煩惱及癡分攝。有義此說亦不應理。無記非癡無癡性故。應說惡作思、慧爲體。明了思擇所作業故。睡眠合用思、想爲體。思想種種夢境相故。

논서에서는 잡염분에 의지해서 수번뇌(隨煩惱)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된다고 말하였으니,

다음과 같은 견해는,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무기(無記)는 치(癡)ㆍ무치(無癡)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것으로, 

'오작(惡作)은 사(思)ㆍ혜(慧) 심소를 자체(體)로 하나니, 지은 업을 명료하게 생각해서 간택하기 때문이고,

면(眠)심소는 합하여 사(思)ㆍ상(想) 심소를 사용해서 자체(體)로 삼나니, 갖가지 꿈의 경계에서의 상(相)들을 유지하고 표상하기 때문이다.'


論俱說爲世俗有故。彼染污者是癡等流。如不信等說爲癡分。有義彼說理亦不然。非思、慧、想、纏彼性故。應說此二各別有體。與餘心所行相別故,隨癡相說名世俗有。

제3사(第三師)의 견해로는,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둘 다 세속유라고 말하기 때문이니, 그것의 염오인 치(癡)심소의 등류이며, 불신(不信) 등과 같이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라고 하였으며,

호법(護法)의 정의(正義)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호법의 견해 역시도 이치에 맞지 않은 것으로,

사(思)ㆍ혜(慧)ㆍ상(想) 심소는 얽어매는 전(纏)의 속성으로, 회심소와 면심소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것이니, '회심소와 면심소는 각각 별도로 자체가 있으며, 나머지 심소와 행상(行相)이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양상에 따라서 세속유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삼지작법(三支作法) 인명논리를 세울  있다.

() 잡염의 ()ㆍ면() 심소는 ()ㆍ혜()ㆍ상() 아니어야 한다.

() 이것은 얽어매는 전(纏) 속성이기 때문이다.

() 무참(無慚)심 등과 같은 것이다.

() 청정의 회ㆍ면 심소도 역시 ()ㆍ혜()ㆍ상() 아니어야 한다.

() 이것은 회ㆍ면 심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잡염의 회ㆍ면 심소와 같은 것이다.


尋謂尋求。令心悤遽於意言境麤轉爲性。伺謂伺察。令心悤遽於意言境細轉爲性。此二俱以安、不安住身心分位所依爲業。竝用思、慧一分爲體。於意言境不深推度,及深推度義類別故。若離思、慧尋、伺二種體類差別不可得故。

‘심(尋)심소’는 찾아 구하는 심구(尋求)하는 것을 말하며, 심왕(心)을 바쁘고 급하게 의언(意言, 의식)의 대상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전전하게 함을 체성(體)으로 하며,

사(伺)심소’는 보면서 살피는 사찰(伺察)하는 것을 말하며, 심왕(心)을 바쁘고 급하게 의언(意言, 의식)의 대상에 대해 미세하게 전전하게 함을 체성(體)으로 한다.

심(尋)심소와 사(伺)심소, 모두는 평안과 불안에 머무는 몸과 마음의 분위(分位)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서, 몸과 마음이 평안할 때에는 천천히 느린 것을 업으로 하고, 불안할 때에는 바쁘고 급한 것을 업으로 하며,

심(尋)심소와 사(伺)심소, 둘 다 사(思)ㆍ혜(慧) 심소의 일부분을 사용해서 자체(體)로 삼으며,

심(尋)심소는 의식의 대상인 의언경(意言境)에 대해서 깊이 헤아리지 않으니, 사(伺)심소와 같이 깊이 헤아리는 뜻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며, 

사(思)ㆍ혜(慧)심소를 떠나서는 심(尋)ㆍ사(伺) 심소의 두 가지가 체(體)와 종류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尋, vitarka)심소는 ‘심구(尋求)’, 즉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하는 심리작용이다.

의언(意言, manojalpa)은 의지(意地)의 심사(尋思) 또는 제6의식을 의미한다. 의언(意言)의 대상인 의언경(意言境)은 제6의식의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으로서의 일체법을 가리킨다.

사(伺, vicāra)심소는 ‘사찰(伺察)’, 즉 대상의 뜻과 이치를 세밀하게 분별하여 사찰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 또는 불안이 있게 되는 것이다.


二各二者,有義尋、伺各有染、淨二類差別。有義此釋不應正理。悔、眠亦有染、淨二故。應說如前諸染心所,有是煩惱隨煩惱性。此二各有不善無記,或復各有纏及隨眠。

'삼십송'의 제14게송에서, “둘에 각각 둘이네”라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제1사(第一師)의 견해로는, 심(尋)ㆍ사(伺) 심소에 각각 잡염과 청정의 두 종류의 차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하였고,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이 해석은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회(悔)ㆍ면(眼) 심소에도 역시 잡염과 청정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마땅히 앞에서와 같이 모든 잡염의 심소에 번뇌ㆍ수번뇌심소의 속성이 있으며, 뇌와 수번뇌심소의 두 가지에각각 불선과 무기가 있으며,  혹은 다시 각각에 얽어맴의 전(纏)과 수면이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有義彼釋亦不應理。不定四後有此言故。應言二者顯二種二。一謂悔、眠,二謂尋、伺。此二二種種類各別故,一二言顯二二種。

안혜(安慧)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해석도 역시 바른 논리가 아닌 것으로, 부정의  가지 심소의 뒷부분에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에, ‘둘(二)이라는 것은  가지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는 회(悔)ㆍ면(眼) 심소이고, 다른 하나는 심(尋)ㆍ사(伺) 심소이다

  가지의 종류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둘이라는 말은 둘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정의(正義) 삼는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7권 본에 의하면, 이 두 가지의 두 종류에 대해서 열 가지 의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회(悔)ㆍ면(眠)은 오직 욕계뿐이고, 심(尋)ㆍ사(伺) 심소는 초선(初禪)에도 통한다. 

②회ㆍ면 심소는 자체가 별도로 있고, 심ㆍ사 심소는 사(思)ㆍ혜(慧) 심소에 의지한다. 

③회ㆍ면 심소는 실유(實有)이고, 심ㆍ사 심소는 가유(假有)이다. 

④심ㆍ사 심소는 색계의 제4선정을 증득하여 단멸하고, 회심소는 분리단(分離斷)이며, 면심소는 아라한에서 영원히 단멸한다. 

⑤제2선정을 얻으면 하지(下地)의 심ㆍ사 심소를 일으키고, 상지(上地)는 반드시 욕계의 회ㆍ면 심소를 일으키지 않는다. 

⑥심ㆍ사 심소는 선지(禪支)이고, 회ㆍ면 심소는 그렇지 않다. 

⑦회ㆍ면 심소는 덮고 얽어매는 개전(蓋纏)이며, 심ㆍ사 심소는 그렇지 않다. 

⑧심ㆍ사 심소는 언어의 작용이고, 회ㆍ면은 그렇지 않다. 

⑨심ㆍ사 심소는 선정과 산란의 지위에 모두 있고, 회ㆍ면은 오직 산란의 지위에만 있다. 

⑩심ㆍ사 심소는 유루와 무루에 통하고, 회ㆍ면은 오직 유루이다.


此各有二,謂染、不染。非如善、染各唯一故。或唯簡染故說此言。有亦說爲隨煩惱故。爲顯不定義,說二各二言。故置此言深爲有用。

여기에 각각  가지가 있으니, 염(染, 잡염)과 불염(不染, 잡염되지 않음)으로, 선과 잡염(染)이 각각 오직 하나인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직 잡염(染) 가려내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였으니,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는 역시 수번뇌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정(不定)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유식삼십송'의 제14게송에서 ‘둘에 각각 이라고 말한 것으로,

따라서  말을 시설한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유식삼십송'의 제14게송에서 “둘에 각각 둘이 있네, 이각이(二各二)”라는 설명을 시설한 이유를 밝힌 것으로,

그것에 세 가지 이유가 있어서,

첫째, 회(悔)ㆍ면(眼) 심소와 심(尋)ㆍ사(伺) 심소, 두 가지의 두 종류에는 잡염ㆍ잡염되지 않음의 양쪽에 통한다. 이것은 선심소는 오직 선(善)이고, 번뇌ㆍ수번뇌심소는 오직 잡염뿐으로서, 잡염과 선(善)에 통하지 않는 것과 다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분(忿) 등 오직 잡염의 심소를 가려내기 위한 것으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부정심소의 네 가지를 말하고 수번뇌심소라고 한 때문에, 수번뇌심소와 같이 이것에는 오직 잡염뿐일 것으로 생각할까 염려되어 이 말을 시설한 것이다. 

셋째, 이 두 가지의 두 종류는 그 성품이 일정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四中尋、伺定是假有。思、慧合成聖所說故。悔、眠有義亦是假有。'瑜伽'說爲世俗有故。

회(悔)ㆍ면(眼) 심소와 심(尋)ㆍ사(伺) 심소의 네 가지 중에서 

()ㆍ사(심소는 반드시 가유(假有)이고, ()ㆍ혜(심소와 합해서 이룬다는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말한 바이기 때문이다.

회ㆍ면 심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것 역시 자체가 없는 존재이니,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세속유라고 말한 때문이다.

 

有義此二是實物有。唯後二種說假有故。世俗有言隨他相說。非顯前二定是假有。又如內種體雖是實,而論亦說世俗有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둘은 실물유(實物有)이다

오직 나중의 심(尋)ㆍ사(伺) 심소,  가지만 가유(假有)라고 말한 때문이며, 세속유라는 말은 치(癡)심소의 일부분 상을 따라서 말한 것이다.

앞의 두 가지도 반드시 가유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 비유하자면 내부세계의 종자는 실유(實有)이지만, 논서, '유가사지론' 제52권에서 역시 세속유라고 말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부정심소들이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밝힌 유상응문(有相應門).
四中尋、伺定不相應。體類是同,麤細異故。

 가지 중에서 심(尋)ㆍ사(伺) 심소는 반드시 상응하지 않으니, 자체와 종류의 체류(體類)는 같으나, 두드러짐과 미세함의 추세(麤細)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체(體) 같다는 것은 ()ㆍ사(심소가 모두 ()ㆍ혜(심소를 자체로 삼음을 말하는 것이고,

종류(類) 같다는 것은  심소가 모두 헤아리는 추도(推度)의 작용을 함을 가리킨다.

 

依於尋伺有染離染,立三地別,

심ㆍ사 심소가 잡염(染)이 있는 것과 잡염을 떠난 것(不染)에 의해서 유정이 머무는  가지 지위 삼지(三地) 차이를 건립하며,

비록 자체(體)와 종류(類)는 같지만, 상이 두드러짐과 미세함의 추세(麤細)에 차이가 있는  법은 함께 일어날  없기 때문이다.

 

不依彼種現起有無,故無雜亂。

그것의 종자와 현행이 있고 없음에 의한 것이 아니니, 따라서 복잡하지 않다.

설일체유부가 비판하기를, 심ㆍ사 심소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  가지 지위의 삼지(三地) 건립할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俱與前二容互相應,前二亦有互相應義。四皆不與第七八俱。義如前說。悔、眠唯與第六識俱。非五法故。  

심(尋)ㆍ사(伺) 심소가 모두 앞의 회(悔)ㆍ면(眼) 심소 서로 상응하는 것이 인정되고,

앞의  가지도 역시 서로 상응하는 뜻이 있다고 해야 하며,

회(悔)ㆍ면(眼) 심소와 심(尋)ㆍ사(伺) 심소의 네 가지 심소가 모두 7식ㆍ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으니,  뜻은 앞의 본 논서 제3권과 제4권 가운데 제8식과 제7식의 심소상응문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회ㆍ면 심소는 5식은 그렇지 않으나, 오직 6식과 함께하는 것이.

부정의 심소와 8식과의 상응관계를 밝힌 식상응문(識相應門).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2

 

小七、中二,唯不善攝。小三、大八,亦通無記。

소수번뇌(小隨煩惱) 심소 중의 첨ㆍ광ㆍ교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 7 가지와 

2 가지 중수번뇌(中隨煩惱)는 오직 불선의 성품에 포함된다.

수번뇌심소와 3성(三性) 관계를 판별한 삼성문(三性門).

 

小七、中二,唯欲界攝。誑、諂欲、色,餘通三界。

소수번뇌심소  첨ㆍ광ㆍ교 심소의 3 가지와 8 가지 대수번뇌(大隨煩惱) 심소는 역시 무기에도 통하나,

소수번뇌  7 가지와 2 가지의 중수번뇌는 오직 욕계에만 포함된다. 

광ㆍ첨 심소는 욕계와 색계에 있으며, 나머지 교(憍)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의 8 가지는계에 통한다.

수번뇌심소가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를 밝힌 계박문(界繫門).

 

生在下地,容起上十一。耽定於他,起憍、誑、諂故。

하부 지위인 하지(下地)에 태어나 살면서 상부 지위인 상지(上地)의 11 가지 심소를 일으킨다고 인정되나니,

선정에 탐착해서 다른 곳에 대해서 교ㆍ광ㆍ첨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상지(上地)와 하지(下地)에서 어떤 수번뇌의 심소를 일으키는가를 밝힌, 하상생기문(下上生起門)의 제이자문(第二子門).

 

若生上地,起下後十。邪見、愛俱容起彼故。

상지(上地)에 태어나서 하지(下地) 뒷 부분의 무탐(無貪)ㆍ무진(無瞋)과 대수번뇌의 심소 8 가지를 합한 10 가지 심소를 일으키기도 하나니, 사견ㆍ탐 심소와 함께 그것을 일으킨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小十生上,無由起下。非正潤生,及謗滅故。中二、大八,下亦緣上。上緣貪等相應起故。

10 가지 소수번뇌는 상지(上地)에 살면서는 하지(下地) 일으키는 것에 의하지 않으니,

진정으로 태어남을 촉진하고 멸(滅)함을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가지 중수번뇌와 8 가지 대수번뇌는 하지(下地) 있으면서 역시 상지(上地) 반연하나니,

상지(上地) 반연하는 탐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가 상부 지위와 하부지위에서 서로 반연하는 것을 밝힌 상하상연문(上下相緣門)의 제삼자문(第三子門).


有義小十下不緣上。行相麤近不遠取故。有義嫉等亦得緣上。於勝地法生嫉等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10 가지 소수번뇌는 하지(下地) 있으면서 상지(上地) 반연하지 않으니,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가까워서 멀리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로는, 질(嫉)ㆍ간(慳)ㆍ교(憍) 심소 등은 역시 상지(上地) 반연할  있으니,

뛰어난 지위와 법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大八諂、誑上亦緣下。下緣慢等相應起故。梵於釋子起諂、誑故。憍不緣下,非所恃故。

8 가지 대수번뇌(大隨煩惱)와 첨ㆍ광 심소는 상지(上地) 있으면서 역시 하지(下地) 반연하는 것으로, 하지(下地)를 반연하는 만(慢)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범천왕이 석존의 제자에 대해서 첨ㆍ광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교심소는 하지(下地) 반연하지 않으니,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등(馬騰) 비구가 4대종(大種) 멸진한 지위를 알고 선정에 들어 사왕천(四王天) 대중들에게 물었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하여서, 마침내 범천왕(梵天王)에게 물었으나  역시도 모르는데 문득 교묘하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는  대중 중에서 대범(大梵)이고, 자재하며 일체를 만들어내는 작자(作者)이고, 변화시키는 화자(化者)이며, 생겨나게 하는 생자(生者)이고, 기르는 양자(養者)이며, 모든 것의 어버이이므로, 따라서 나는 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중 밖으로 나와서 마등 비구의 손을 잡고 아첨의 말을 하고서 돌아가서 부처님께 여쭈었으니, 이것은 본질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만약 영상(影像)이라면 모두 오직 자기 지위일 뿐이니, 자기 마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二十皆非學、無學攝。此但是染彼唯淨故。

20 가지 수번뇌심소는 모두 유학과 무학에 포함되지 않으니,

수번뇌는 다만 잡염법뿐이고, 유학 등은 오직 청정법뿐이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와 유학(有學) 등의 포함관계를 밝힌 학등문(學等門).

 

後十唯通見修所斷與二煩惱相應起故。

20 가지 중에서 뒷부분의 10 가지 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이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와 (俱生起)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두 가지 번뇌심소와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수번뇌심소가 어떤 ()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 삼단문(三斷門).

 

見所斷者隨迷諦相,或摠或別煩惱俱生。故隨所應皆通四諦。迷諦親疏等皆如煩惱說。

견도(見道)에서 단멸되는 것은, 4성제의 상에 혹 미혹하거나  총체적이거나 혹 개별적으로 미혹한 번뇌의 심소에 따라서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따라서 상응하는 것을 따라서 모두 4제(四諦) 통하며,

4제(四諦)에 미혹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등은 모두 번뇌심소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前十有義唯修所斷。緣麤事境任運生故。

20 가지 중에서 앞부분의 10 가지 수번뇌에 대해서 제일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오직 수도(修道)에서 단멸될 뿐이니, 두드러지는 현상의 추사(麤事)의 대상을 반연하여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有義亦通見修所斷。依二煩惱勢力起故,緣他見等生忿等故。見所斷者隨所依緣,摠別惑力,皆通四諦。

호법의 정의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역시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하는 것으로,

구생(俱生)과 분별(分別)의 2 가지 번뇌심소의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악견 등을 반연하여 분(忿)심소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은 소의(所依 의지처)ㆍ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총체적이거나 개별적인 미혹의 세력을 따라서 모두 4성제에 통한다고 하였다


此中有義忿等但緣迷諦惑生,非親迷諦。行相麤,不深取故。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분(忿)심소 등은 다만 4성제에 어두운 미혹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4성제에 미혹한 것은 아니니, 행상(行相,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얕아서 깊게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有義嫉等亦親迷諦,於滅道等生嫉等故。然忿等十但緣有事。要託本質方得生故。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소수번뇌의 심소 중에서 부(覆)ㆍ광ㆍ첨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의 질(嫉)심소 등도 역시 직접 4성제에 미혹한 것으로, 멸제ㆍ도제 등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忿) 등의 10 가지 심소는 다만 본질이 있는 대상인 유사(有事)만을 반연하나니, 반드시 본질에 의탁해서 바야흐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가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가 등을 판별한 유사등분별문(有事等分別門)으로, 여기에서 본질은 나(我)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견(我見과 함께하지 않는 심왕 등을 유사(有事)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아견과 함께하는 심왕 등을 무사(無事)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忿)   가지 소수번뇌의 심소는 아견(我見) 함께하지 않으므로, 본질이 있는 대상인 유사(有事)를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중수번뇌의 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의 10 가지는 유사(有事) 무사(無事) 통하지만,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緣有漏等准上應知。

유루 등을 반연하는 것도 이상의 내용에 견주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수번뇌심소가 유루와 무루를 반연하는 누무루문(漏無漏門)으로, 명칭에 의한 대상과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 명경사경문(名境事境門) 등은 문의  내용에 견주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말한다.

 

成唯識論卷第六 終 성유식론 제 6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1

 

云何不正知?於所觀境謬解爲性。能障正知毀犯爲業。謂不正知者多所毀犯故。

무엇이 부정지(不正知)심소’인가?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르게 아는 정지(正知)를 장애하여 계율 등을 훼범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훼범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부정지(不正知, asamprajñānya)심소는 대상을 잘못 이해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정지(正知)를 장애하며, 혜(慧)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有義不正知慧一分攝。說是煩惱相應慧故。有義不正知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令知不正名不正知。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부정지(不正知)는 혜(慧)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혜(慧)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부정지(不正知)는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며,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을 부정지(不正知)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有義不正知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

호법의 정의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부정지는 혜(慧)와 치(癡) 심소의  가지가 함께하는(俱) 것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앞에서 인용한  문장에서 그림자처럼 생략해서 말한 때문이며,

다시 논서에서 이것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與、幷、及言,顯隨煩惱非唯二十。󰡔雜事󰡕等說貪等多種隨煩惱故。隨煩惱名亦攝煩惱。是前煩惱等流性故。煩惱同類餘染污法,但名隨煩惱非煩惱攝故。唯說二十隨煩惱者,謂非煩惱唯染麤故。此餘染法或此分位或此等流,皆此所攝。隨其類別,如理應知。

'삼십송'의 제13ㆍ제14 게송에서, ‘더불어 여(與)’, ‘아울러 병(幷)’, ‘미칠 및의 급(及)’이라는 말은 

수번뇌(隨煩惱)심소가 오직 스무 가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잡사경(雜事經)',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 8권 등에서   많은 종류의 수번뇌를 말한 때문이며,

수번뇌라는 명칭하는 것은 역시 번뇌도 포함한다는 것이니, 앞에서의 번뇌심소와 등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제62권에서, 번뇌와 같은 종류인 다른 염오법은 다만 수번뇌라고 이름하나니, 번뇌심소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번뇌(隨煩惱)가 오직 20 가지 뿐이라고 말한 것은 번뇌심소가 아닌, 오직 잡염이며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에 나머지 잡염법은 이것의 분위기이거나 혹은 이것의 등류이므로 모두 여기에 포함되며, 그 종류의 차이에 따라서 논리에 맞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삿된 욕구인 사욕(邪欲) 등의 나머지를 수번뇌심소에 포함시키지 않고 폐지(廢止)하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오직 20 가지를 수번뇌심소라고 말한 것은, 이 20 가지가 번뇌심소인 본혹(本惑)이 아닌, 잡염이며, 두드러짐의  가지 뜻에 의해서 수번뇌심소로 말한 것이다. 

20 가지 이외의 사욕(邪欲) 등은 모두  20 가지의 분위(分位)이고 등류성이므로, 20 가지 수번뇌에 포함되는 것이다.


如是二十隨煩惱中,小十、大三定是假有。無慚、無愧、不信、懈怠定是實有。教、理成故。掉擧、惛沈、散亂三種,有義是假,有義是實。所引理、教如前應知。

이상과 같이 20 가지 수번뇌(隨煩惱) 중에서 소수번뇌(小隨煩惱)심소 10 가지와 대수번뇌(大隨煩惱) 심소 중의 3 가지인 실념(失念)ㆍ방일ㆍ부정지(不正知) 심소는 반드시 가유(假有)이며,

무참ㆍ무괴ㆍ불신ㆍ해태 심소는 반드시 실유(實有)이니,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다. 

도거ㆍ혼침ㆍ산란의 3 종류는 가유라는 견해도 있고, 실유라는 견해도 있으니, 인용되는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 중에서 실유(實有) 가유(假有) 판별하는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이다.


二十皆通俱生、分別。隨二煩惱勢力起故。

20 가지 수번뇌심소가 모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와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 통하나니, 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 2 가지는 번뇌심소의 세력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구생분별문(俱生分別門)

 

此二十中,小十展轉定不俱起。互相違故,行相麤猛各爲主故。

이 20 가지 수번뇌 중에서 10 가지 소수번뇌(小隨煩惱)심소는 전전(展轉)하여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으니,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고,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각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 자류상응문(自類相應門)

 

中二一切不善心俱。隨應皆得小、大俱起。論說大八遍諸染心。展轉小、中,皆容俱起。

2 가지의 중수번뇌(中隨煩惱)심소는 모든 불선심과 함께하는 것인, 상응한 바를 따라서 소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 함께 일어날  있으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8 가지 대수번뇌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였으며, 전전하여서 소수번뇌나 중수번뇌심소와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하였다.


有處說六遍染心者。惛、掉增時不俱起故。有處但說五遍染者,以惛、掉等,違唯善故。此唯染故非第八俱。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는 혼침ㆍ도거(掉擧) 심소를 제외한, 6 가지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하다고 말하였으니, 혼침ㆍ도거 심소가 증성할 때에는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에서는 단지 불신ㆍ해태ㆍ혼침ㆍ도거ㆍ방일 심소의 5 가지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는 것은, 혼침ㆍ도거 심소 등이 안(安)ㆍ행사(行捨) 등의 선법(善法)에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것은 오직 잡염뿐이기 때문에 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 수번뇌심소와 8식과의 상응관계를 밝힌, 제식구문(諸識俱門).

 

第七識中唯有大八。取捨差別如上應知。

본 논서의 제5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7식 중에는 오직 여덟 가지 대수번뇌심소만이 있으며, 취하고 버리는 것의 차이는 본 논서 제3권에서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알아야 한다.

 

第六識俱容有一切。小十麤猛五識中無。中、大相通,五識容有。由斯中、大,五受相應。

제6식과 함께하는 것에는 모든 수번뇌가 있음이 인정되는 것으로, 10 가지 소수번뇌심소는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5식 중에는 없으며,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는 불선(不善)과 잡염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행상이 통하므로 5식에도 있다고 인정되며,

이상에 의거한다면,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는 5수(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수번뇌심소와 5수(受)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수구문(受俱門).


有義小十,除三忿等唯喜憂捨三受相應。諂、誑、憍三四俱,除苦。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10 가지 소수번뇌는 첨ㆍ광ㆍ교(憍) 심소의 3 가지를 제외하고, 분(忿)심소 등은 오직 희수(喜受)ㆍ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하며,

첨ㆍ광ㆍ교(憍) 심소는  가지 느낌인 사수(四受)와 함께하며 고수(苦受)를 제외한다고 하였다.

 

有義忿等四俱除樂。諂、誑、憍三,五受俱起。意有苦受前已說故。此受俱相如煩惱說。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다음과 같으니, 분(忿) 등의 심소는  가지 느낌인 사수(四受)와 함께하며 낙수(樂受) 제외하나니, 첨ㆍ광ㆍ교 심소는 5(五)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지옥에서의 의지(意地) 고수(苦受)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때문이다. 

 느낌(受)과 함께하는 인식 활동은 번뇌심소에서 말한 바와 같고 하였다.


實義如是。若隨麤相, 忿、恨、惱、嫉、害,憂、捨俱。覆、慳,喜、捨,餘三增樂。中、大隨麤亦如實義。

참다운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이와 같으니, 두드러진 양상의 추상(麤相)을 따라서 말한다면, 분ㆍ한ㆍ뇌ㆍ질ㆍ해(害) 심소는 우수(憂受)와 사수(捨受)만 함께하며,

부(覆)ㆍ간(慳) 심소는 희수ㆍ사수와 함께하고,

나머지 첨ㆍ광ㆍ교  가지심소는 낙수가 증성하며,

대수번뇌와 중수번뇌는 두드러진 양상의 추상(麤相)을 따라서도 역시 참다운 의미와 같다.


如是二十與別境五皆容俱,起不相違故。

이와 같은 20 가지 수번뇌심소는 5 가지 별경심소와 모두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는 것이니,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 수번뇌심소와 별경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별경상응문(別境相應門)

 

染念、染慧,雖非念、慧俱,而癡分者亦得相應故。

잡염의 염(念)심소와 잡염의 혜(慧)심소는 염ㆍ혜 심소와 함께하지는 않지만, 치(癡)심소의 일부분인 실념(失念)ㆍ부정지(不正知) 심소와는 역시 상응할  있기 때문이며,

망념(妄念)이 어떻게 염(念)심소와 함께하며, 악혜(惡慧)가 어떻게 혜(慧)심소와 함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念亦緣現、曾習類境,忿亦得緣剎那過去故,忿與念亦得相應。

염심소는 역시 현재와 예전에 익힌 대상의 종류를 반연하고,

분(忿)심소는 역시 찰나의 과거도 반연할  있기 때문에 분심소는 염심소와 역시 상응할  있다.

(忿)심소는 현재를 반연하고, ()심소는 예전에 익힌 것을 반연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둘이 함께 일어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染定起時,心亦躁擾。故亂與定相應無失。

잡염의 정(定)심소가 일어날 때에는 심왕도 역시 조급하고 어지러워지므로, 따라서 산란은 정심소와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심소는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고, 산란심소는 많은 () 취하거늘, 어떻게  심소가 함께 일어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한 것이다.

 

수번뇌심소와 번뇌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근본상응문(根本相應門).
中二、大八,十煩惱俱。小十定非見疑俱起。此相麤動,彼審細故。忿等五法容慢、癡俱,非貪、恚竝。是瞋分故。慳癡、慢俱,非貪、瞋竝,是貪分故。憍唯癡俱,與慢解別,是貪分故。覆、誑與諂,貪、癡、慢俱。行相無違,貪癡分故。

2 가지 중수번뇌와 8 가지 대수번뇌는 열 가지 번뇌심소와 함께하며,

10 가지 소수번뇌는 반드시 악견ㆍ의(疑)심소와는 함께 일어나지 않으니, 이 소수번뇌는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것이며, 살피고 미세하기 때문이다.

분(忿) 등의 5 가지 심소법은 만ㆍ치 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니, 분 등은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으니, 이 분 등은 진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간(慳)심소는 치ㆍ만 심소와는 함께하나,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으니,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교심소는 오직 치심소와 함께하나니, 만 심소와는 이해가 다르고,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부ㆍ광ㆍ첨 심소는 탐ㆍ치ㆍ만 심소와 함께하나니, 행상(行相, 인식활동)이 거스르지 않으므로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