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5 권 3
云何應知此第七識離眼等識有別自體?聖教、正理爲定量故。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제7식은 안식 등을 떠나서 별도의 자체가 있다는 것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로써 정량(定量)을 삼기 때문이다.
이하는 제2능변식에 관한 장행석(長行釋)을 크게 둘로 나눈 이대단(二大段) 가운데 제2의 2교(敎) 6리증(理證)으로, 제7식이 별도의 자체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먼저 경전의 문구에 의해 증명하는 2교증(敎證)으로서 '입능가경(入楞伽經)'과 '해탈경(解脫經)'을 인용한다.
謂薄伽梵處處經中說,心、意、識三種別義。集起名心,思量名意,了別名識,是三別義。如是三義雖通八識,而隨勝顯。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종류를 다른 뜻을 말씀하셨으니,
적집해서 일어나는 집기(集起)를 심(心)이라 이름하고,
사량하는 것을 의(意)라 하며,
요별하는 것을 식(識)이라고 이름하셨으니, 이것이 세 가지의 다른 뜻이며,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은 제 8식에 공통되지만 뛰어나게 나타나는 것을 따르는 것이다.
第八名心,集諸法種起諸法故。第七名意,緣藏識等恒審思量爲我等故。餘六名識,於六別境麤動閒斷了別轉故。如'入楞伽' 伽他中說:
제8식을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제법의 종자를 적집하고 제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제7식을 의(意)라 이름하나니, 장식 등을 반연하여 항상 살피고 사량해서 자아 등으로 삼기 때문이며,
나머지를 육식(六識)이라 이름하나니, 여섯 가지 다른 대상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작용하고 잠깐씩 단절됨이 있으나, 요별하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입능가경' 제 9권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藏識說名心 思量性名意, 能了諸境相 是說名爲識。
장식(藏識)을 심(心)이라고 이름하고,
사량하는 성질을 의(意)라고 이름하고,
모든 대상의 경상(境相)을 능히 요별하는 것을 식(識)이라 이름한다.
又大乘經處處別說有第七識,故此別有。諸大乘經是至教量,前已廣說,故不重成。
또한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별도로 제7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따라서 이 제 7식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대승경전이 지교량(至敎量)이라는 것은 본 논서의 제3권의 제8식에 대한 5교증(敎證) 부분에서 대승경전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일곱 가지 근거(因)로써 증명하는 것을 이미 자세하게 말한 때문에 거듭 말하지 않기로 한다.
지교량(至敎量, śabda)은 성교량(聖敎量)ㆍ성언량(聖言量)이라고도 하며, 인도 사상계에서 제시된 바른 인식방법의 양(量, pramāṇa) 중의 하나로서, 성인이나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량(量, pramāṇa)의 한자어의 뜻은 '헤아리다' 또는 '추측하다'이며, 불교 용어로써
동사로 쓰일 때에는 '헤아려 아는 것'을 뜻하고,
명사로 쓰일 때는 인식방법 또는 지식의 근거를 뜻한다.예를 들어, 정량(正量) 또는 정량(定量)은 지식의 바른 근거를 뜻하고, 이 뜻은 일반 사전적인 뜻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의 경우, 보통 현량(現量) · 비량(比量) · 비량(非量)의 3량(三量) 또는 현량(現量) · 비량(比量) · 성교량(聖教量)의 3량(三量)을 든다.
현량(現量, pratyakṣa-pramāṇa)은 직접적 인식인 지각(知覺)을 뜻하고,
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은 간접적 인식인 추리(推理)를 뜻하고,
비량(非量, apramāṇa)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즉 착오적인 지각과 추리를 뜻하고,
성교량(聖教量, āgama-pramāṇa, āgama): 성인의 진술 특히 고타마 붓다의 진술이나 부처의 진술을 뜻한다.
'解脫經' 中亦別說有此第七識,如彼頌言:
'해탈경'에서도 역시 별도로 이 제7식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곧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해탈경(解脫經)'은 대승과 소승에서 공통적으로 받드는 경전으로, 이 경전은 '범천청문경(梵天請問經)' 등과 같이 4아함경 중에 수록되지 않았으며, 본문의 게송은 '유가사지론' 제16권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교증(敎證)으로 삼은 것이다.
染污意恒時 諸惑俱生滅, 若解脫諸惑 非曾非當有。
염오의(染污意)는 항상 모든 미혹과 함께 생멸하며,
만약 모든 미혹으로부터 해탈할 때에는, 예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장차 있을 것도 아닌 것이다.
彼經自釋此頌義言:‘有染污意從無始來與四煩惱恒俱生滅,謂我見、我愛及我慢、我癡,對治道生,斷煩惱已,此意從彼便得解脫。爾時此意相應煩惱,非唯現無,亦無過未,過去未來無自性故。’如是等教諸部皆有。恐厭廣文,故不繁述。
그 경전에서 직접 이 게송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으니,
염오의(染污意)가 있어서 아득한 무시로부터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생멸하였으니, 사번뇌(四煩惱)는 아견ㆍ아애ㆍ아만ㆍ아치를 말하며,
다스리는 도의 대치도(對治道) 즉, 무학위(無學位)가 생겨나서 번뇌를 단멸할 때, 이 말나식은 그것을 따라 곧 해탈할 수 있으니, 그 때에는 이 말나식과 상응하는 번뇌는 오직 현재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없게 되는 것이니,
과거와 미래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종류의 가르침은 모든 여러 부파에 있으니, 긴 문장을 싫어할까 염려되므로 번잡하게 서술하지 않기로 한다.
이하는 제7말나식이 별도의 자체가 있음을 6 가지의 바른 논리로써 논증하는 6리증(六理證)이다.
已引聖教,當顯正理。謂契經說,不共無明微細恒行,覆蔽眞實。若無此識,彼應非有,謂諸異生於一切分,恒起迷理不共無明,覆眞實義,障聖慧眼。如伽他說。
앞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인용하여 증명하였고, 이제는 바른 논리인 정리(正理)를 나타내리라.
'분별연기초승법문경(分別緣起初勝法門經)'의 하권에서 말씀하시기를,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미세하고 항상 작용하여서 진실을 은폐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 제 7식이 없다면, 그것이 있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모든 범부는 일체의 분위(分位)에서 항상 무아의 도리에 미혹한 불공무명을 일으키고, 참된 대상인 진실의(眞實義, 진여경 眞如境)을 덮고 성스러운 지혜의 눈을 장애하나니,
'섭대승론본' 제1권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설하였으니;
6리증(理證) 가운데 먼저 제1불공무명증(不共無明證)으로, 불공무명은 심소법의 일종이므로, 이에 상응하는 심왕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제7식이 없다면 경전에서 불공무명의 항행(恒行)ㆍ불공성(不共性)을 설명한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며,
제6의식도 불공무명과 상응하지만, 잠깐씩 단절됨이 있으므로 항상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제8식은 번뇌와 상응하는 식이 아니므로, 따라서 경전에서 말하여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제7식이 반드시 별도로 있어야 한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眞義心當生 常能爲障礙,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참된 대상인 진의(眞義)를 반연하는 마음인, 진여경(眞如境)을 반연하는 능연(能緣)의 무루지(無漏智)만이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것을 항상 장애하여서 모든 분위(分位)에서 함께 작용하는 그것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是故契經說,異生類恒處長夜,無明所盲,惛醉纏心,曾無醒覺。若異生位有暫不起此無明時,便違經義。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무리들은 항상 생사윤회의 긴 밤에 머물면서 무명에 눈이 멀어 혼미하게 취해서마음을 얽어 매어서 일찍이 깨어 있을 때가 없다고 하였으며,
만약 중생의 지위에서 잠시라도 이 무명을 일으키지 않을 때가 있다면, 곧 경전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俱異生位迷理無明有行不行,不應理故。此依六識皆不得成,應此閒斷彼恒染故,許有末那便無此失。
모두 중생의 지위인 이생위(異生位)이므로, 도리에 미혹한 무명이 작용할 때와 작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니,
이 불공무명(不共無明)을 6식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모두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왜냐하면, 이 불공무명은 잠깐씩 단절됨이 있어야 하고, 제6식과 같이 항상 잡염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나,
말나식(제 7식)이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곧 이러한 과실이 없게 되는 것이다.
불공무명(不共無明)은 소의(所依, 의지처)인 식(識)을 따르는 것이므로, 그 식이 6식이라면 단절됨이 있기 때문에 이 불공무명도 잠시 단절됨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그 6식은 무명과 항상 함께하는 것이므로 염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독두무명(獨頭無明) · 상응무명(相應無明)의 2무명(二無明) 가운데 하나이다.
독두무명은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고도 하고 상응무명은 공무명(共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無明)은 탐(貪) · 진(瞋) · 만(慢) · 치(癡, 無明) · 의(疑) · 견(見, 惡見)의 6근본번뇌 가운데 하나인데,
무명은 나머지 5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면서 생기(生起)할 수도 있고, 이들과 상응하지 않고 그 자체로 홀로 생기할 수도 있으며, 홀로 생기하는 무명(無明)을 독두무명 또는 불공무명이라 한다.
불공(不共)의 개념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染意恒與四惑相應,此俱無明何名不共。有義此俱我見、慢、愛非根本煩惱,名不共何失?
염오의가 항상 사혹(四惑, 사번뇌)과 상응한다면, 이것과 함께하는 무명을 어째서 불공무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것과 함께하는 아견ㆍ아만ㆍ아애는 근본번뇌가 아닌 것으로, 불공무명으로 이름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다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무명은 근본번뇌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不共)으로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有義彼說理教相違,純隨煩惱中不說此三故,此三六、十煩惱攝故。處處皆說染污末那與四煩惱恒相應故。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가 말하는 것은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순수한 수번뇌(隨煩惱) 중에서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의 세 가지를 말하지 않은 때문이다.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 이 셋은 여섯 가지 육번뇌(六煩惱)와 열 가지 십번뇌(十煩惱)에 포함되는 것으로,
'유가사지론' 제63권 등의 여러 곳에서는 염오의 말나식은 사번뇌와 항상 상응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서는 근본번뇌로서 탐(貪)ㆍ진(瞋)ㆍ치(癡)ㆍ의(疑)ㆍ악견(惡見)의 6 가지를 들고,
'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이 악견(惡見)을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5 가지로 구분하여 근본번뇌를 10 가지로 말한다.
應說四中無明是主,雖三俱起亦名不共,從無始際,恒內惛迷,曾不省察,癡增上故。此俱見等,應名相應,若爲主時,應名不共。如無明故,許亦無失。
사번뇌(四煩惱) 중에서 무명(아치)이 주체가 되므로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의 셋과 함께 일어나기는 하지만, 역시 불공(不共)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아득한 무시로부터 항상 안으로 혼미하여 일찍이 성찰하지 않아서 아치(我癡)가 증상(增上)한 때문이다.
아치(我癡)와 함께하는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 등을 상응이라 이름해야 하며,
만약 6식에 상응하는 아견 등이 주체가 될 때에는 불공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으로, 무명과 같기 때문에 그렇다고 인정하여도 역시 과실이 없는 것이다.
有義此癡名不共者,如不共佛法,唯此識有故。若爾,餘識相應煩惱此識中無,應名不共。依殊勝義立不共名,非互所無皆名不共。
제3사(第三師)의 주장, 즉 계현(戒賢, Śilabhadra)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아치(我癡)를 불공(不共)으로 이름하는 것은 부처님께만 불공법(不共法)이 있는 것과 같이 오직 제 7식에만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부처님께만 18불공법이 있는 것과 같이, 제7식에 상응하는 무명(無明)은 제7식이 취하는 독특한 것이므로, 즉 다른 식과 상응하는 번뇌도 이 식에는 없는 것이므로 불공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나,
뛰어난 뜻의 수승의(殊勝義)에 의거해서 불공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지, 서로 없다고 해서 모두 불공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불공법(不共法)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辟支佛)ㆍ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만이 갖추고 계신 법이라는 뜻으로,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념주(念住)ㆍ대비(大悲)의 10불공법(不共法)이 있다.
謂第七識相應無明,無始恒行障眞義智,如是勝用餘識所無,唯此識有,故名不共。旣爾,此俱三亦應名不共。
제7식과 상응하는 무명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항상 작용하여 진여를 반연하는 무분별지혜인 진의지(眞意智)를 장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뛰어난 작용은 다른 식에는 없으나, 오직 제 7식에만 있으므로 불공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그러하다면 이것과 함께하는 세 가지 번뇌도 역시 불공으로 이름해야 할 것이다.
외인(外人)의 비판.
無明是主,獨得此名。或許餘三亦名不共,對餘癡故,且說無明。
무명이 주체이므로 홀로 이 명칭을 붙인 것이니,
혹은 다른 세 가지 번뇌도 역시 불공으로 이름한다고 인정할 수도 있으며, 제 6식의 아치(我癡)에 상대하기 때문에 우선 무명만을 말한 것이다.
논주가 회통해서 답변한 것으로, 아견ㆍ아만ㆍ아애도 역시 불공으로 이름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제6식의 무명 등에 상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제7식의 무명만을 불공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이다.
不共無明摠有二種:一恒行不共,餘識所無;二獨行不,共此識非有。
전체적으로 불공무명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항상 작용하는 항행불공무명(恒行不共無明)으로, 다른 식에는 없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홀로 작용하는 독행불공무명(獨行不共無明)으로 제 7식에는 없는 것이다.
故'瑜伽'說:‘無明有二:若貪等俱者名相應無明;非貪等俱者名獨行無明。’是主獨行唯見所斷。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설하히기를, 무명에 두 종류가 있으니
만약 탐욕 등과 함께하면 상응무명(相應無明)이라 이름하고,
탐욕 등과 함께하지 않으면 홀로 작용하는 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주체로서 홀로 작용하는 주독행불공무명(主獨行不共無明)은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것이다.
如契經說諸聖有學,不共無明已永斷故,不造新業。非主獨行亦修所斷,忿等皆通見修所斷故。恒行不共餘部所無,獨行不共此彼俱有。
'연기경(緣起經)'의 하권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성스러운 유학은 불공무명을 이미 영원히 단멸한 까닭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주체로서 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비주독행불공무명(非主獨行不共無明, 상응무명相應無明)은 역시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이며,
분(忿)심소 등은 모두 견도에서 단멸되는 공통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 작용하는 항행불공무명(恒行不共無明)은 다른 부파에서 언급되지 않는, 즉 소승은 제7식을 건립하지 않으므로 언급하지 않으며,
홀로 작용하는 주독행불공무명(主獨行不共無明)은 대승과 소승 모두가 모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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