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 7 장 여래장(如來藏)
如來藏章第七
聖諦者(성제자) 說甚深義(설심심의) 微細難知(미세난지) 非思量境界(비사량경계)
聖諦=성스러운 진리란 매우 깊은 뜻을 설하는 것이며, 현묘하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성스러운 진리=聖諦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 것이므로 매우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성제는 그 의미가 매우 미묘하고 심원하여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각[思慮分別]으로는 도저히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습니다[心行處滅].-혜경스님]
是智者所知(시지자소지) 一切世閒所不能信(일체세간소불능신)
이는 지혜로운 이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이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지혜를 얻은 이[智者]라야 알 수 있습니다. 일체 세간의 중생들은 감히 그것이 깊고 오묘한 진리라는 사실을 믿지도 못할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此說甚深如來之藏(차설심심여래지장)
왜냐하면, 이는 매우 깊은 여래의 씨앗=如來藏을 설하기 때문입니다
如來藏者(여래장자) 是如來境界(시여래경계) 非一切聲聞緣覺所知(비일체성문연각소지)
여래장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경계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성제는 매우 심오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래장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은 여래의 경계(境界)이므로 일체 모든 성문과 연각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如來藏處(여래장처) 說聖諦義(설성제의) 如來藏處甚深故(여래장처심심고)
여래장의 차원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여래장의 차원이 매우 깊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래장의 자리에서 성스러운 진리인 성제를 설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안주하시는 여래장의 경지는 매우 심오합니다.]
說聖諦亦甚深(설성제역심심) 微細難知(미세난지) 非思量境界(비사량경계)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 역시 매우 깊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是智者所知(시지자소지) 一切世閒所不能信(일체세간소불능신)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지혜를 갖춘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일체 세간의 중생들은 감히 그 깊고 오묘한 여래장의 경지를 믿지도 못합니다.]
[여래장(如來藏)」이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agata-garbha)의 번역으로, 모든 사람들의 번뇌 속에 덮여 있는(藏), 본래는 청정한[自性淸淨] 여래 법신을 말한다. 따라서
(1) 모든 사람은 여래가 될 성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2) 모든 사람은 여래의 아들, 여래의 태아(胎兒)로서 여래라고 하는 모태(타타가타․가르바, 여래태(如來胎) 속에 감추어져 있다라고 하는 뜻이다.
앞에서 4성제관(四聖諦觀)에 관해서 여래와 성문․연각 사이의 차이(差異)를 지적했으나 이 장에서는 그 서로 다름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우선 성제(聖諦)에는 깊고 깊은 뜻이 있으므로 그 진의(眞意)를 미세(微細)하게 아는 것은 어려워서 2승의 무리가 사의(思議)할 경계가 아니고 지자(智者)만이 잘 알 수 있는 세계이다. 두 번째 점은 그 이유로서 ‘성제는 심심한 여래장을 설하기 때문’이라 설하고 있다. 여기에 『승만경』에서 여래장이라는 술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원래 진리는 작증(作證)되어서 비로소 진리가 된다. 진리가 단순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만의 것이 아님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는 불․세존이 스스로가 도달하고 작증한 세계이며 4제최승(四諦最勝)의 법은 그 작증한 내경(內景)에서 솟아난 교설이다. 무릇 가르침을 설하는 경우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하여 세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조작을 가지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이것은 장미꽃이다」라고 설명하면 누구라도 이해되며 또한 인식될 것이다. 그렇지만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와 같은 것의 내경(內景)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다」라고 설명해도 실제로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면 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다. 체인(體認)이라든가 체해(體解)라는 말은 신체로 요해(了解)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몸을 가지고 요득(了得)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진리의 내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설하려고 하는 경우 아무래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의 말로 이것을 「세간언설(世間言說)」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형식을 취하지 않고는 남에게 전달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승만경』본문에 성제는 ‘심심한 뜻을 설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라고 갈파한 것은 참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알았다, 깨달았다는 성문․연각의 단계에서는 엄밀히 말해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본번뇌를 끊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을 첫째 점이라 한다면 둘째 점은 거듭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즉 깊고 깊은[甚深] 뜻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의 장(藏)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여래장은 여래의 경계여서 일체의 성문․연각이 알지 못한다, 라고 명언한다. 여기서 여래장이라는 말에 대해 약간의 해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래장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스크리트어의 타타가타․가르바의 한역이다. 그것은 여래(tathagata)와 태(胎)․장(藏; garbha)과의 합성어이다. 가르바는 본래 태의 의미이므로 여래태라고 해야할 것이다. 장은 감추다, 숨기는 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태, 모태(母胎)가 아이를 감추는 것과 똑같이 태라 하여도 장이라 해도 같은 의미이다.
이 여래장을 여래의 태로 보는 것도 여래인 태, 여래즉태(如來卽胎)로 볼 수도 있으나 여래의 모태를 의미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여래장이라 하는 사상의 위치함이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어 온다.
『승만경』이 대승경전 중에서도 특히 여래장 사상을 강조한 까닭을 찾아가면 『대승열반경』의 모든 것은 부처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라는 사상과 관계하고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부처가 되는 가능성(佛性)을 감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나 그 불성을 여래장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번뇌에 덮여져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여래가 되는 성질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즉 불성과 여래장과는 동의이어(同義異語)로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한 여래의 태는 그 의미에서 여래를 낳는 모태이며 여래즉태(如來卽胎)는 우리 인간은 여래의 아들로서 여래인 태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혜경스님, 제주불교신문]
[불교는 마음이 삶을 창조한다고 가르친다. 무신론인 불교는 신을 찾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마음을 찾을 뿐이다. 삶의 주체가 마음이고 깨달음의 주체가 마음이라는 것이다. 곧 삶과 깨달음, 그리고 나와 마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본성을 주제로 한 경전이 여래장 3부경(〈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이다.
여래장 사상은 인간은 본래 마음속에 여래가 될 가능성인 여래장(如來藏),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모든 사람은 여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론에서처럼 마음 작용에 관한 이론의 다양한 전개보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제일 중시하고 있다. 마음이 진여이고 여래장이며 그 사상을 건립하는 것이 여래장 3부경의 핵심사상이며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여래장경〉은 불교사에서 최초로 여래장이라는 용어를 창안해 부처님 가르침을 선창한 경전으로, 모든 중생이 번뇌 속에 뒤덮여 있지만 여래장을 갖고 있으므로 영원히 더럽게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껍질이 씌워져 있는 곡물이나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진금(眞金)에 비유하며 번뇌의 누더기를 벗으면 깨끗한 여래장이 나온다고 말한다. 〈여래장경〉은 세존께서 성도하신 10년 뒤, 세존을 모시고 영취산에서 법회를 시작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금강혜 보살이 묻고 세존이 여래장에 관해 답변하고 있다. 그리고 세존은 많은 보살과 대중에게 상서로운 기적을 시현하는 데 바로 이것이다. 연꽃의 꽃잎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불(化佛)이 앉아계시는데, 연꽃은 순식간에 시들어버리지만, 화불은 변함없이 그대로 앉아계시는 기적을 보여 그것을 증명하였다. 모든 사람의 안에는 법성·법계인 여래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관계없이 상주불변이라고 하였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은 한자로 불과 3,000자를 조금 넘는 아주 짧은 소부(小部)의 경전이지만, 여래장 사상사에 있어서는 참으로 중요하다.
〈여래장경〉이 단순하게 중생의 성불의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발견하고 이것을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라면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의 성질이나 번뇌와의 관계 등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교리적으로 체계화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매개로 하여 중생과 법신을 일치시키고 있다. 미혹한 중생과 깨달음의 법신은 둘 다 함께 여래장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법신의 자리에 서든 중생의 자리에 서든 어느 쪽이든 둘 다 함께 평등이라고 말한다. 중생 성불의 가능성을 마음속의 여래장에서 구하며 더 나아가 그 발현을 연설하고 그것을 근거로 중생·보살·여래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래장경보다 상당히 진보한 것이라고 본다.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이라는 원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승만경〉은 승만 부인이 사자후로 최고의 진리인 일승 대방편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 경전, 여래장 사상을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한 여래장 3부경 중 으뜸 경전이다.
〈유마힐소설경〉이 청신사인 위말라끼르띠 거사가 진리를 진술한 것이라면, 이 경전은 청신녀인 슈리말라 왕비가 거룩하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서 진리를 진술한 것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인도는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데, 2600년 전 인도에서 재가 여성 불자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설했다는 것부터 대단히 혁신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슈리말라 왕비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먼저 10가지 서원을 세우고, 또 이 10가지 발원을 3대원으로 함축하여 실천할 것을 부처님께 맹세하는 것 또한 〈승만경〉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여래장을 갖추고 있으니 실천을 통해 여래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다.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위로받기 위해 신(神)이나 불보살(佛菩薩)에게 의지하며 기도하기도 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기도 한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 경전 특히 여래장 3부 경전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여래장, 즉 깨달음을 얻어 여래,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 바탕, 가능성이 깃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알아차리지 못할 뿐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은 여래(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존재,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는 바탕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라는 학설로, 2천 년 불교 사상사의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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