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顚倒眞實 - 뒤바뀐 법과 진실한 법
顚倒眞實章第十二(전도진실장제십이)
不思議是滅諦(불사의시멸제) 過一切衆生心識所緣(과일체중생심식소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諦이니, 온갖 중생들의 心識所緣=마음으로 반연할 바를 뛰어넘었으며,
[반연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하여 알아지는 대상이 아닌, 이른바 능소(能所)의 관계로 주객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떤 인식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유무(有無)를 판단하고 시비(是非)의 장(場)을 생각 속에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안스님]
亦非一切(비일체) 阿羅漢辟支佛智慧境界(아라한벽지불지혜경계)
또한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들의 지혜로도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譬如生盲不見衆色(비여생맹불견중색) 七日嬰兒不見日輪(칠일영아불견일륜) 嬰 갓난아이 영,
비유하면, 마치 날 때부터의 소경=生盲이 갖가지의 빛깔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태어난 지 7일되는 아기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같으니,
苦滅諦者(고멸제자) 亦復如是(역부여시) 고가 멸한 진실한 법=苦滅諦 역시 그와 같아서
非一切凡夫心識所緣(비일체범부심식소연) 亦非二乘智慧境界(역비이승지혜경계)
온갖 범부들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의 지혜로 헤아릴 경계도 아닙니다.(이승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경계도 아닙니다.)
[열반에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는 것처럼 멸제(滅諦)에도 미완의 멸(滅)과 완전한 멸(滅)이 있다고 승만경에서 말한다. 고(苦)가 완전히 없어진 진실한 고멸제(苦滅諦)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혜로도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했다. 눈을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범부들은 마음으로 멸제를 반연하기가 어렵다고 비유를 들어 말했다.]
[범부들이 멸성제(苦滅諦)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뒤바뀐 소견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고가 멸한 진실한 법(苦滅諦)이 있는데 장님이 날 때부터 빛깔을 보지 못하고 갓난아기가 해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뒤바뀐 소견 때문에 고(苦)가 멸한 진실한 법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凡夫識者二見顚倒(범부식자이견전도)
범부의 마음(심식)은 뒤바뀐=顚倒된 두 가지 소견=二見(극단적인 견해)이요,
一切阿羅漢辟支佛智者(일체아라한벽지불지자) 則是淸淨(즉시청정)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는 곧 청정한 것이니,
邊見者(변견자) 凡夫於五受陰(범부어오수음)
치우친 견해=邊見이라는 것은, 범부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受陰에 대하여
我見妄想計著生二見(아견망상계착생이견) 著 드러날 저, 저축할 저, 붙일 착,
我見= 나라는 妄想=허망한 소견으로 고집하여 두 가지 소견을 내는 것을 말함이며,
是名邊見(시명변견) 所謂常見斷見(소위상견단견)
邊見=치우친 견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과 단견이 그것입니다.
[변집견(邊執見, 산스크리트어: anta-grāha-dṛṣṭi, 팔리어: anta-ggāhikā, 영어: extreme views, extreme view)은 단(斷)과 상(常)의 두 극단[邊]에 집착하는 견해, 즉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말한다. 줄여서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며, 2가지 변견이라는 뜻에서 2변(二邊)이라고도 하며, 변견(邊見)을 번역하여 극단적인 견해라고도 하고 2변(二邊)을 번역하여 두 극단이라고도 한다.
단견(斷見)=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단견(斷見)은 윤회가 존재하며 무위법인 열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단견(斷見)은 단멸된다는 극단 또는 단멸된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단변(斷邊)이라고도 한다.
즉 우리의 생이 금생(今生)으로 끝이고, 우리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을 모두 부정(不定)하는 견해(見解).
상견(常見)=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상견(常見)에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상견(常見)은 유위법을 무위법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이다. 상견(常見)은 영원하다는 극단 또는 영원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상변(常邊)이라고도 한다. 즉 단견(斷見)과 달리, 나라는 존재(存在)가 항시(恒時)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見解).]
見諸行無常(견제행무상) 是斷見非正見(시단견비정견)
모든 변천하는 법=諸行이 항상함이 없는=無常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단견으로 바른 소견=正見이 아니며,
見涅槃常(견열반상) 是常見非正見(시상견비정견)
涅槃常=열반이 항상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으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니,
妄想見故(망상견고) 作如是見(작여시견)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탓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인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모습=色,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受, 바깥세상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여 상상하는 마음=想,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하는 의지=行, 분별하는 의식=識의 다섯 가지가 화합하여 모인 오수음(五陰=五蘊)에 대하여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을 가져 그릇된 견해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승만부인은 불교의 수행에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빠짐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기 때문에 허망하고, 허망하기 때문에 멸성제(滅聖諦)를 터득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범부, 우리들은 곧잘 이념적 성향에 빠져 변견(邊見)에 떨어져, 자기 생각이 우월하다는 자만에 빠진다.여기에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상반된 견해가 나온다. 단견이란 없다고 부정하는 무(無)에 집착된 소견이요, 상견은 있다고 긍정 일변도의 유(有)에 집착하는 소견이다. 중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때로는 유를 말하기도 하고 무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부득이한 방편일 뿐 궁극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상(斷常) 이견(二見) 둘 다 편견(偏見)을 이루어 중도를 상실한다고 한다. 단견이나 상견에 빠지는 것을 불법 밖의 외도, 불법(佛法)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외도(外道)란 말이다.
외도도 세 종류가 있어 불법(佛法) 밖의 외도가 있고, 불법에 기생하는 외도(附佛法外道)가 있고, 불법을 배우면서도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학불법외도(學佛法外道)가 있다 하였다.
불법의 근본 대의가 중도(中道)다. 사성제(四聖諦)나 연기법이 결국 중도의 대의를 천명한 교리이다. 유무(有無)의 견해나 일이(一異)의 견해를 다 같이 뛰어넘어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일비이(非一非異), 나아가 다시 이를 뛰어넘는 비비유비비무(非非有非非無)에 이른다. 이를 중현(重玄)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사구절백비(離四句節百非)’라는 말과 비슷하다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사구(四句)가 미치지 못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일(一), 이(異)는 단원론(單元論)과 다원론(多元論)이다. 중도가 언어도단의 경지이고 깨달음이 바로 중도(中道)라는 말이다. 승만경에서 말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멸(滅)이 곧 중도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난 배경에는 부파불교의 사변적 논리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수온(受陰)은 오온(五蘊)을 말하는 것으로 5가지 망상이 성립하여 중생이 과보받는 것을 총괄하여 수(受)라 하여 오수음(五受陰)이라 한 것이다. 때로는 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이 이 다섯 가지를 취하여 자신의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능엄경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아난아, 이 오수음은 5가지 망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음이 망상으로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망상이 번뇌이므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이 된 경지가 승만경의 멸성제이다.-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현대불교신문]
[단견과 상견은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견해, 변견(邊見)입니다. 부처님은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의 바른 길을 설하셨습니다. 중도(中道)는 중정(中正)의 도(道)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중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생각은 고여서 썩게 되고, 뚫을 수 없는 벽이 됩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각을 가두지 않아야 되는데 유(有)에 치우치고, 공(空)에 치우치면 우주의 실상(實相)이나 부처님의 법계(法界)와는 멀어집니다.
단견은 우주의 모든 존재, 만유(萬有)는 무상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공무(空無)에 돌아가 다시 뒷세상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입니다. 또 상견은 사람은 죽지만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하여 그치거나 끊어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양극단의 변견에 떨어지면 중도(中道)와 멀어집니다. 유무(有無)의 한쪽에 치우쳐 고집하기 때문에 범부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멸성제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인 아라한, 벽지불의 청정한 지혜라는 것도 모든 앎의 경계와 여래(如來)의 법신에 대하여는 본래 보지 못한 바이기에 최상승의 경계인 멸성제를 헤아릴 경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멸성제(滅聖諦)에 갖추어진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열반 4덕(四德)을 모르고 오음(五陰)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을 하지만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뒤바뀐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於身諸根分別思惟(어신제근분별사유) 現法見壞(현법견괴)
이 몸의 諸根=여러 감각 기관에 대하여 분별하여 사유=생각하되, 現法=현재의 존재가 부서짐만을 보아
於有相續不見(어유상속불견) 起於斷見(기어단견) 妄想見故(망상견고)
윤회 생존의 계속함=有相續을 보지 못하므로 단견을 일으키나니, 그것은 망상으로 보는 탓이며
於心相續愚闇(어심상속우암) 不解不知(불해불지)
마음의 상속에 대하여서는 캄캄하여 이해하거나 알지 못하고,
刹那間意識境界起於常見(찰나간의식영계기어상견) 妄想見故(망상견고)
찰나(잠깐) 사이의 의식 작용(경계)를 알지 못하므로 상견을 일으키는 것이니,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탓입니다.
此妄想見於彼義(차망상견어피의)
이렇게 허망한 생각으로 보는 것이 저 참 뜻에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若過若不及作異想分別(약과약불급작이상분별) 若斷若常(약단약상)
異想=잘못된 생각으로 분별하거나, 斷=끊어졌다고 하거나, 常=영원하다고 생각하여서
顚倒衆生(전도중생) 於五受陰(어오수음) 無常常想(무상상상)
전도된 중생들은 오수음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苦有樂想(고유낙상) 無我我想(무아아상) 不淨淨想(부정정상)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나라고 할 것이 없는=無我를 나라고 생각하며,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一切阿羅漢辟支佛淨智者(일체아라한벽지불정지자) 모든 아라한, 벽지불들의 청정한 지혜를 가진 이도
於一切知境界及如來法身(어일체지경게급여래법신) 本所不見(본소불견)
일체지(一切知)의 경계와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서는 본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세 가지로 말하는 삼지설(三智說)이 있다. 이 삼지설은 경론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 일체지(一切智)와 도종지(道種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 세 가지를 말한다.
사람에 따라 시력 차이가 있는 것처럼 수행의 정도에 따라 지혜 도수(度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체지는 일체법의 총상(總相)을 아는 지혜로 그림을 그릴 때 전체의 구도를 잡는 것과 같은 지혜를 말한다. 번뇌가 현저히 줄어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이 실감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의 지혜는 성문과 연각 곧 이승(二乘)들의 지혜라고 한다.
도종지는 일체법의 개별적인 도법을 아는 지혜로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 쓰는 지혜라 한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도의 종류와 그 차이를 두루 아는 지혜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얻는 지혜라고 하기도 한다.
일체종지는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다 같이 통달한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그런데 때로는 일체지를 일체종지로 같이 써서 부처님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사찰에서 새벽예불 시, 행선축원(行禪祝願)에 ‘구경원성살바야(究竟願成薩婆若)’라는 송구가 있다. “구경에 살바야를 이루기 원하옵니다”라는 말인데 이 살바야(薩婆若)라는 말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는 말이다. 범어 어원은 사르바즈나(sarvajna)인데 번역하면 일체지 혹은 일체종지이다. 불교는 진리에 대한 무지를 고통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지혜가 강조된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등장한 경전이 반야부 경전이다. 반야(般若)라는 말이 경전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반야의 지혜를 내세운 것이 대승불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승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으로 등장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이다. 물론 육바라밀 전체를 아울러서 보살의 수행덕목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이를 대승의 수행자로 보았다. 반야바라밀이 육바라밀의 마지막에 나오는 바라밀이지만 반야바라밀이 보시나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을 떠받치고 있는 바라밀이다. 선종의 선수행에도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육조단경에 설해진 혜능 대사의 법문을 혜능 자신이 직접 반야바라밀다 법문이라고 밝힌 말도 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마하를 붙여 마하반야바라밀이라 하기에 이르렀고 부처님을 ‘마하대법왕’이라 하였다. 이른바 부처를 심왕(心王)으로 보고 한 말이다. 이런 4구송도 있다.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마하대법왕은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네
본래비조백(本來非遁白) 본래 검거나 희지도 않으면서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곳을 따라 푸르고 노란 색을 나타내도다
승만경의 내용을 여래장사상이라고 요약해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마하반야바라밀법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문이 지혜를 종(宗)으로 하는 반야법문이기 때문이다. 반야가 바로 깨달음의 실상을 보여주는 최고의 지혜이고, 도(道) 그 자체요, 부처 그 자체다. “어떤 이치도 아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는 것을 반야라 한다”고 하였다.- 지안 스님(반야불교연구원장) 현대불교신문]
'승만경(勝鬘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7 (1) | 2023.02.28 |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6 (2) | 2023.02.27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4 (1) | 2023.02.25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3 (2) | 2023.02.24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2 (0) | 2023.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