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自性淸淨 - 깨끗한 제 성품
自性淸淨章第十三 - 자성청정장 제십삼
世尊(세존) 生死者依如來藏(생사자의여래장)
세존이시여, 생사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이니,
以如來藏故(이여래장고) 說本際不可知(설본제불가지)
여래장인 까닭으로 그 비롯한 때=本際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世尊(세존) 有如來藏故說生死(유여래장고설생사) 是名善說(시명선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음으로 해서 생사를 설하는 것은 善說=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하겠습니다.
世尊(세존) 生死生死者(생사생사자) 諸受根沒(제수근몰)
세존이시여, 생사=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바깥 것을 받아들이는 감각 기관=根이 없어지고,
次第不受根起(차제불수근기) 是名生死(시명생사)
받아들이는 근(감각 기관)이 차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을 생사라 합니다.
世尊(세존) 死生者(생사자) 此二法是如來藏(차이법시여래장)
세존이시여, 죽음과 태어남의 이 두 가지 법이 곧 여래장이며,
世閒言說故(세간언설고) 有死有生(유사유생) 死者謂根壞(사자위근괴)
세간의 언어로 말하기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감각 기관=根이 부서지는 것이며,
生者新諸根起(생자신제근기) 非如來藏有生有死(비여래장유생유사)
태어남은 새로운 감각 기관=根이 생기는 것이나, 여래장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如來藏者離有爲相(여래장자이유위상) 如來藏常住不變(여래장상주불변)
여래장은 有爲相=함이 있는 현실을 여의었으므로, 여래장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是故如來藏(시고여래장) 是依是持是建立(시의시지시건립)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하는 바이며, 거두어 지니는 바이며, 건립=세워 일으키는 바가 됩니다.
世尊(세존) 不離不斷不脫不異不思議佛法(불리불단불탈불이불사의불볍)
세존이시여, 이것은 여의지 않고, 끊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 부사의한 불법이므로,
世尊(세존) 斷脫異外有爲法依持(단탈이외유위법의지)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고 달라지는 여러 가지 유위법의 의지가 되고 거두어 지니고
建立者是如來藏(건립자시여래장) 세워 일으키는 것이 곧 여래장입니다.
[태어나거나 죽는 현상은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불교는 생사(生死)라는 고통을 벗어나 안락(安樂)을 얻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생사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로 여래장이 있으므로 나고 죽는 생사가 전개된다는 것으로, 생사라는 현상계를 만드는 근본당처(根本當處)가 여래장이란 말입니다. 인연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유위(有爲)의 생사는 태어났다가 죽어 없어지기를 무수히 반복하지만 여래장은 현상을 초월해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무위(無爲)의 불가사의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한 여래장의 세계에 안주하면 바로 극락정토(極樂淨土)입니다. 깨달은 부처와 미혹(迷惑)한 중생의 경계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생사의 현실 속에 살지만 상주불변하는 여래장 속에서 살 수 있으면 깨친 사람이요, 생사 문제에 집착하고 함몰돼서 허덕이면 중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남전(南泉)스님은 오도송에서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둥글게 깨달은 부처님 세계는 어딘가?” 하고 묻고는 답으로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현재 나고 죽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살림살이를 잘 살아서 여래장의 이치를 깨친 사람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출세간법(出世間法) 아래서 안락하지만 탐·진·치(貪瞋癡)와 생사에 집착하면서 연연하면 어딜 가더라도 생사윤회를 거듭하며 고통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현상에만 얽매여서 생사가 있는 줄 알지만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연히 아는 것이 깨침의 세계입니다.
<금강경>에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여래는 어디서 온데가 없으며, 역무소거(亦無所去) 고명여래(故名如來), 또한 가는 데가 없으니 그런고로 여래니라“라고 했습니다. 오고 감이 없는 여래장을 우리의 현상계에서 찾는 일이 불교의 수행이요, 목표입니다. 여래장이 있음을 알기에 열반을 구하고 안락정토를 찾지, 만약 여래장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열반도 구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혜총스님, 불교신문]
世尊(세존) 若無如來藏者(약무여래장자)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不得厭苦樂求涅槃(불득염고락구열반) 何以故(하이고)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왜냐하면
於此六識及心法智(어차육식급심법지) 此七法剎那不住(차칠법찰나불주)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六識과 이 알음알이 지혜의 의식작용=心法智의 일곱 가지 법은 찰나적인 존재임에 잠깐도 머무르지 않으며,
不種衆苦(불종중고) 不得厭苦(불득염고) 樂求涅槃(낙구열반)
갖가지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世尊(세존) 如來藏者(여래장자) 無前際不起不滅法(무전제불기불멸법)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과거=前際가 없어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법이므로
種諸苦得厭苦(종제고득염고) 樂求涅槃(낙구열반)
모든 괴로움을 심으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합니다.
[여래장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죽는 생사가 있다고 한 이 말은 영원한 것이 있으므로 무상한 현상이 있다는 일반적인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상계 배후에 본체계가 있다는 말이다. 또 무위법에서 유위법의 차별이 나타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 여래장이 불가사의한 불법(佛法)이라 하고 여래장이 없으면 열반을 구할 수 없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여래장이 없으면 불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강조하는 여래장이 바로 불성(佛性)이며 진여(眞如)다. 이를 경전에 따라서 원각(圓覺),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 일진법계(一眞法界), 반야(般若) 등으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여래장’이라는 말의 가장 중요한 뜻은 중생이 여래의 씨앗이므로 여래가 될 수 있는 기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곧 중생 누구나 불성의 가치를 똑같이 지니고 있으므로 이 불성만 계발(啓發)하면 열반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마치 진금(眞金)이 오물 속에 떨어져 있어도 그대로 진금이며, 아무리 비천한 여자라도 귀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데에 비유하기도 한다. 〈여래장경〉에는 모든 중생이 여래장이란 한 가지 사실을 9가지 비유로 설해 놓은 9유설(九喩說)이 나온다. 비유의 대상인 여래장을 더하여 때로는 10유(十喩)라고도 말한다. 여래장을 꿀에 비유한 이야기도 나온다.
“선남자여, 비유하건대 절벽 위의 나무에 순수한 꿀이 있고 수많은 벌이 그 꿀을 지키고 있을 때 그 꿀을 취하려면 먼저 벌들을 꿀에서 떠나게 한 후에 꿀을 취하여 먹고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처럼 일체중생이 여래장인 것은 저 순수한 꿀과 같고 모든 번뇌에 덮여 가려진 것은 벌떼가 꿀을 지키는 것과 같느니라.”
〈불성론〉에는 여래장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모든 중생은 여래의 지혜에 섭수된다는 소섭의(所攝義)가 있다. 둘째, 여래의 법신이 중생에게는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은부의(隱覆義)가 있다. 셋째, 중생의 마음에 여래의 과덕(果德)이 거두어져 있다는 능섭의(能攝義)가 있다고 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여래장에 의해 있게 되고 괴로움과 즐거움도 여래장에 의해서 있게 된다는 경문의 말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여래장이라는 것을 밝히는 말이다. 발심을 하는 것도 여래장이고 수행을 하는 것도 여래장이다.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은 여래장 계통의 경전이 성립된 5세기부터 유식 사상과 융화되어 발전한 7세기를 거쳐 밀교화 되는 시기인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널리 퍼지며 더욱 발전된 교설이 나왔다. 이를 여래장 사상의 발전 3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생의 마음이 여래장의 마음이므로 여래장심(如來藏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생의 참마음인 진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안스님, 현대불교신문]
世尊(세존) 如來藏者(여래장자) 非我非衆生(비아비중생) 非命非人(비명비인)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나'가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목숨(생명)'도 아니고, '사람'이 아니므로
[여래장이 ‘나’가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 미묘하다. 법성게(法性偈)의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無名無相絶一切)”는 말과 똑같은 뜻이다. 만유의 현상은 상대적인 연기의 세계이지만 부처님의 정각의 경계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을 초월한 절대의 세계다. 여기에는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무분별의 세계라서 그야말로 선(禪)에서 말하는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갈 곳이 없는(節言語路 滅心行處)” 세계이다.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말은 〈금강경〉의 즉비(卽非) 논리에 의해 자주 해온 말이다.]
如來藏者(여래장자) 墮身見衆生(타신견중생) 顚倒衆生(전도중생)
여래장은 몸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 빠진 중생이나, 전도된 중생이나,
空亂意衆生(공란의중생) 非其境界(비기경계)
공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래장은 내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고 목숨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므로 여래장은 몸이란 소견에 떨어진 중생이나 뒤바뀐 중생이나 공한 데 뜻이 어지러워진 중생이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라는이 말은 <금강경>의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을 말한 것과 같습니다.]
世尊(세존) 如來藏者是法界藏(여래장자시법계장)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곧 법계장이며,
法身藏出世閒上上藏(법신장출세간상상장) 自性淸淨藏(자성청정장)
법신장이며, 출세간 상상장이며, 자성청정장입니다.
[여래장은 법신이요, 청정한 성품이요, 또한 일체 법계를 다 포함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중생의 경계도 부처의 경계도 모두 여래장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여래장이 우리 곁에 있음에도 무명(無明)에 가려져 모르고 있습니다. 착함도, 착하지 않은 마음도 번뇌에 물들지 않기에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난 본래 청정한 자성입니다. 그런데 본래 청정한 성품이 여러 인연을 만나 번뇌에 물드니 묘한 일입니다.]
此性淸淨如來藏(차성청정여래장) 而客塵煩惱(이객진번뇌)
이 성품이 청정한 여래장이 객진 번뇌와
[而客塵煩惱(이객진번뇌) 객진(客塵)이란 것은 우연적 부착을 나타냄. 번뇌는 마음속의 고유한 것이 아닌, 마음에 부착한 독성이기 때문에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함. 외부에서 와서 청정한 마음을 더럽힌 번뇌.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객과 같은 번뇌. 그것은 분별에 의해 생긴다.]
上煩惱所染(상번뇌소염) 不思議如來境界(불사의여래경계)
부수적 번뇌=上煩惱에 오염되는 것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경계입니다.
[여래장이 객진번뇌(客塵煩惱)와 상번뇌(上煩惱)에 물이 든다는 것은 번뇌가 없던 여래장에 홀연히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다에 본래 파도가 없었는데 파도가 생긴 것처럼 번뇌도 그와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객진이라 하는 것은 본래 없었으므로 우연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생겼기 때문에 찾아온 손님에 비유해 하는 말이고, 상번뇌(上煩惱) 수번뇌(隨煩惱)를 말하는 것으로 근본번뇌에 따라서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何以故(하이고) 刹那善心非煩惱所染(찰나선심비번뇌소염)
왜냐하면 찰나의 착한 마음=善心은 번뇌에 물든 것이 아니며, 찰나의 착하지 않은 마음 역시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刹那不善心亦非煩惱所染(찰나불선심역비번뇌소염)
찰나의 나쁜 마음=不善心도 번뇌에 물든 것이 아니니,
煩惱不觸心(번뇌불촉심) 心不觸煩惱(심불촉번뇌)
번뇌는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접촉하지 않하는 것이나,
云何不觸法(운하불촉법) 而能得染心(이능득염심)
접촉하지 아니하는 법으로 어떻게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世尊(세존) 然有煩惱(연유번뇌) 有煩惱染心(유번뇌염심)
세존이시여, 그러나 번뇌도 있고 번뇌가 마음을 물들이는 일도 있사오니,
自性淸淨心而有染者(자성청정심이유염자) 難可了知(난가요지)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自性淸淸心이면서도 물듦이 있음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唯佛世尊(유불세존) 實眼實智爲法根本(실안실지위법근본)
오직 불세존만이 진실한 눈이시며, 진실한 지혜로서 법의 근본이 되시며
爲通達法(위통달법) 爲正法依(위정법의) 如實知見(여실지견)
법을 통달하시어 바른 법의 의지처가 되었으므로 실제와 같이 (올바르게) 아시는 것입니다.
[여래장을 선지식들이나 경전에서 불성(佛性), 진여(眞如), 원각(圓覺), 진법계(眞法界), 우리의 고향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해가 지면 밤이라 하는데 밤과 낮이 과연 다른가 생각해 봅시다. 밝음이 없기에 밤이라 하고 어둠이 없으면 낮이라 할 뿐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식들께서 죽음은 없다, 생사는 없다고 합니다. 여래장의 입장에서는 불생불멸이요, 상주불멸입니다. 가고 옴이 없는 여래만 있을 뿐입니다. 여래장을 여실히 알았기에 부처님은 여든에 돌아가시지만 당신은 죽지 않음을 아신 것입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 하고 죽음에서 해방되신 것입니다.
깨친 사람에게는 죽음도 삶의 한 현상일 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이 결코 공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듯이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참 묘하고 누구나 알려고 하지만 알기 어려운 여래장의 세계입니다. 참으로 멋진 불교의 세계가 아닙니까? - 혜총스님, 불교신문]
[여래장사상의 대표적인 전거(典據)가 되는 〈승만경〉은 여래장에 대한 설명을 매우 심도 있게 전개해 나간다. 여래장이란 결국 불생불멸하는 불성 자체를 달리 표현하는 말이다. 이 장에서는 여래장이 법계장, 법신장, 출세간상상장, 자성청정장이라 하였다. 이 여래장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미래 어느 때에 가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하면서도 이것에 의해 온갖 고통이 심어지며 열반을 구하기도 한다 하여 부처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가 모두 여래장의 세계임을 밝힌다. 그러나 여래장 자체는 모든 것을 떠난 것으로 중생의 경계도 부처의 경계도 아니라고 했다.
부사의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부처님의 경계는 중생이 식심으로 분별하는 사유의 차원이 아니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원각경〉에 사유심으로써 여래의 원각 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여래장의 장(藏)은 만유 제법을 모두 저장하는 창고라는 뜻과 모든 것을 출생시킨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화엄경〉에는 나오는 무진장(無盡藏)이라는 말처럼 법계장, 법신장, 출세간상상장, 자성청정장이란 말도 무진장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들이다. 다시 말해 〈승만경〉에서 말하는 여래장이 〈화엄경〉의 무진장이다. 〈불명경(佛名經)〉에는 ‘나무무진장불(南無無盡藏佛)’이라 하여 부처님을 무진장이라 하였다. 또 무진장보살이라는 보살의 명호도 있다. 그러나 이 무진장인 여래장이 본래는 어떤 현상의 영역에 소속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하였다. - 현대불교신문]
'승만경(勝鬘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9 (1) | 2023.03.02 |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8 (0) | 2023.03.01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6 (2) | 2023.02.27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5 (1) | 2023.02.26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24 (1) | 202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