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5

 

▶論曰:又此定中,由意識故,執有心者,此心是善`不善`無記,皆不得成,故不應理.

▷논문; 또한  선정(멸진정) 중에서 의식(意識)에 의거해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마음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釋曰:已廣廢立滅定有心,今當略顯第二頌義.若有欲除阿賴耶識,以意識故,滅定有心.此心,是善`不善`無記,皆不得成, 故不應理. 何以故?由此滅定,是善性故,且非不善`無記亦爾,威儀`工巧`變化無記定不得有.若說此是異熟無記,理卽應至阿賴耶識,除此更無第五無記.

▷해석한다; 이미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자세히 논파하였으니, 이제는 두 번째 게송의 의미를 나타내겠다.

만약 어떤 이가 아뢰야식을 부정하기 위하여 의식(意識)으로써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선ㆍ불선ㆍ무기가  성립될  없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멸진정은 선의 성품인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불선(不善)이 아니고, 또한 무기(無記)도 아닌 것이니,

사무기(四無記) 중에서 이숙무기(異熟無記)를 제외한 나머지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의 무기는 결정적으로 있을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이숙무기(異熟無記)라고 말한다면, 그 이치가 마땅히 아뢰야식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을 제외한 다섯 번째의 무기란 없기 때문이다.

 

사무기(四無記), 일체 만유의 도덕적 성질의 분류에 3성(性)이 있는 중, 선악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선악의 결과를 불러 올 힘이 없는 무기성을 네가지로 나눈 것.

① 이숙무기(異熟無記), 선악의 업종자를 증상연(增上緣)으로 하여서 얻는 과보.

② 위의무기(威儀無記),, 위의로심(威儀路心)이라고도 하며, 앉고 서고 가는 동작 등을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③ 공교무기(工巧無記)니, 공교처심(工巧處心)이라고도 하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물품을 만드는 신공교(身工巧)와, 노래를 부르는 등의 어공교(語工巧)를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④ 변화무기(變化無記), 정력(定力)으로 사람과 궁전 등을 변작(變作)하는 마음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又此定中,心若是善,應無貪等, 善根相應, 染污意滅,唯善心在, 爾時,善心所依`所緣,皆悉是有三事和合, 云何此中不生其觸? 旣有其觸,受等心法,何得不生? 如是滅定,應不得成,諸心`心法,皆不滅故.

또한  선정 중에서 심왕이 선(善)이라면 마땅히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여 염오(染污)의 의식은 멸하고 오직 선심만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니, 그 때에는 선심(善心)ㆍ소의(所依, 의지처)ㆍ소연(所緣, 인식대상) 모두가 존재하여서  가지가 화합하는 삼사화합(三事和合)하는 것이다. 

촉(觸) 심소는 근(根)ㆍ경(境)ㆍ식의 3사화합(事和合)으로 설명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 멸진정 중에서  촉의 심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만약  촉(觸)이 있다면, 어찌하여 감수작용의 수(受) 등의 심소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멸진정이 성립될  없는 것이니, 이 멸진정에서는 모든 심왕과 심소가  멸한 때문이다.


又若有執 此定是善,由心所引定前方便能引善心力所引故. 定中善心, 非無貪等,善根相應.
又三和合,若有堪能,亦能生受;若三和合,無有堪能,唯生其觸. 是故定中,雖有善心,非無貪等善根相應,亦無受等. 此義不然,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하여서, “이 선정이 선(善)인 것은 마음이 이끄는 심소인(心所引)의 선정 이전의 방편의 능인(能引)의 선심력(善心力)에 이끌린 것이기 때문에, 선정 중의 선심은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감각기관의 근(根)ㆍ대상의 경(境)ㆍ식(識)이 3사화합(事和合)한 촉(觸)을 말하는 것이니,

3사화합(事和合)에서 감당 능력의 감능(堪能)이 있으면, 능히 감수작용의 수(受)를 생겨나게 할 수 있지만, 

만약 3사화합에서 감당 능력의 감능(堪能)이 없으면 오직  촉을 생겨나게  뿐인 것이다. 

따라서 선정 중에 비록 선심이 있을지라도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지 않으며, 역시 감수작용의 수(受) 등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方便善心,旣無貪等善根相應, 從此所引等流果心, 何故不爾? 又從所依拔除能依,不應理故,心與心法,無始已來, 於一切時,互不相離,

방편의 선심은 이미 무탐 등의 선근과 상응하는데,  이끌려진 소인(所引)으로부터 등류과(等流果)의 마음은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 것인가? 

또한 소의(所依, 의지처)로부터 능히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는 아득한 무시로부터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서로 여의지 않는 것이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에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일 뿐이다.

 

今拔能依, 令離所依,必不可得. 何以故?有譬喩故.謂於世閒,從生至壞,於一切時,互不相離,無有道理拔除能依令離所依. 譬如大種與所造色,無有道理令其所造離於能造.心法亦爾, 不可令其離所依心.是故於此無心定中,無有心法,但有善心,不應道理.

이제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를 떠나게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생(生)으로부터 멸(滅)하기까지의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서로를 떠나지 않는 것이니, 도리적으로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를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4대(大)와 4대로 이루어진 물질(色)과 같으니, 그 이루어진, 소조(所造)로 하여금 능히 이루는 것의 능조(能造)로부터 떠나게 하는 도리가 없는 것이니,

심소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그것으로 하여금 의지처인 심왕을 떠나게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심정 중에서 심소의 심법(心法)은 없고 다만 선심(善心)만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若有復謂,令拔能依令離所依,雖不應理,然想及受能障此定, 於方便中,厭患彼故. 唯二不行,餘法不爾, 亦得現行, 不應道理. 何以故? 如非遍行,此不有故.

만약 어떤 이가 다시, “지금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지처)를 부정하여 소의(所依, 의지처) 떠나게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나, 그러나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는 능히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방편에서 그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오직 이  가지만은 작용하지 않지만 다른 심소는 그렇지 않아서 역시 현행할  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변행(遍行)은 이라고도 하며, ①작의(作意), ②촉(觸), ③수(受), ④상(想), ⑤사(思) 심소이다.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51가지 심소법 가운데 변행심소 이외의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의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8식에 언제나 상응하여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이다.  심소는 선ㆍ악ㆍ무기의 3 모두에 두루 일어나는 일체성(一切性)이며, 삼계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일체지(一切地)이며, 유심ㆍ무심의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일체시(一切時)로써, 변행의 다섯 심소는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인 것이다.  

 

非遍行者,此中可滅,二是遍行,故不可滅.遍行若滅,心亦隨滅,無別因故.是故此中言有心者,是異熟識,定非意識.

변행심소가 아닌 것은  선정 중에서 멸하지만,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 변행심소이기 때문에 멸하지 않으며, 

변행심소가 멸한다면 심왕도 따라서 멸하나니, 별도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 중에서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숙식일 뿐, 결코 의식이 아닌 것이다.

 

▶論曰:若復有執色心無閒生是諸法種子,此不得成,如前已說.

又從無色`無想天沒,滅定等出,不應道理.又阿羅漢後心不成,唯可容有等無閒緣.

▷논문;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의 색심(色心)이 끊임없이 제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성립될 수 없으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때문이다.

또한 무색계(無色界)나 무상천(無想天)에서 죽거나 멸진정(滅盡定)에서 나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이 성립되지 않으니, 오직 등무간연(等無墾緣)이 있음이 인정될 뿐인 것이다.

ㅡ신체의 물질(色)과 마음(心)이 끊임 없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釋曰:若復有執色心無閒生,是諸法種子者, 謂若有執前剎那色,能爲種子,後剎那色因彼而生, 前識後識相望亦爾.此前已破.

▷해석한다; ‘만약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色)과 마음(心)이 중단됨 없이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란, 만약 어떤 이가 집착으로, “앞 찰나의 물질(色)이 종자가 되어서,  찰나의 물질(色)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겨나며, 앞의 식(識)과 그 뒤 (識)이 서로 배대되는 것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이미 앞에서 논파하였다.

 

又無色沒,色復生時,色久斷滅,何有種子?無想天沒,或復從於滅定等出,心復生時,心久斷滅,何有心因?

若如是者, 諸阿羅漢,終不應得無餘涅槃, 色心兩因,永無盡故. 前剎那色,望於後色,

前剎那識,望於後識,應知容有等無閒緣,無有因緣.

또한 무색계에서 죽어서 물질(色)이 다시 생겨날 때, 물질(色)이 오래전에 단멸했는데 어떻게 종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무상천에서 죽거나 혹은 다시 멸진정에서 나와서 마음(心)이 다시 생기할 때, 마음이 오래도록 단멸했는데, 어떻게 마음의 원인인 심인(心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러하다면 모든 아라한은 마지막에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갈  없는 것이니, 신체(色)와 마음(心)의  원인(因)이 영원히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물질(色)을 그 뒤 찰나의 물질(色)에 배대하고, 

 찰나의 식(識)을 그 뒤 찰나의 식(識)에 배대하는 것은 등무간연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 인연(因緣)이 아닌 것이다.


▶論曰: 如是若離一切種子,異熟果識,雜染`淸淨,皆不得成.是故成就如前所說相,阿賴耶識決定是有.

▷논문; 이와 같이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을 떠나서는 잡염과 청정 모두가 성립될 수 없으니,

따라서 앞에서 말한 상(相)의 아뢰야식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由前所說,無量道理,是故成就阿賴耶識決定是有.

▷해석한다; 앞에서 수많은 도리를 말한 것으로 인하여 아뢰야식이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論曰:此中三頌:

논문;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菩薩於淨心, 遠離於五識, 無餘心轉依, 云何汝當作?

보살은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으로 5식(識)을 멀리 여의거늘, 

다른 것이 없는 마음의 전의(轉依)를 그대는 장차 어떻게 이루고자 하는 것인가?

 

전의(轉依), 문자 그대로의 뜻은 '소의(所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꾸는 전(轉)'으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transformation)시키는,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는 소의이전(所依已轉) 또는 변주(變住)라고도 하는데, 소의이전(所依已轉)은 소의(所依)가 이미 변형되었다는 뜻이고 변주(變住)는 변형이 완료되어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ㅡ 위키


若對治轉依, 非斷故不成, 果因無差別, 於永斷成過.

만약, 다스림의 대치전의(對治轉依)라면,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고, 

결과와 원인에 차별이 없어서, 영원히 단멸함에 있어서 과실을 이룰 뿐이라네.


無種或無體, 若許爲轉依, 無彼二無故, 轉依不應理.”

만약 종자가 없는 무종(無種)이거나, 혹 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전의라고 인정한다면

  가지 없음의 이무(二無)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의라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네.


▶釋曰:如住轉識,轉依不成,三頌顯示.菩薩於淨心者,是於出世對治相應善意識義. 遠離於五識者,謂此遠離眼等五識. 言無餘者,無善有漏雜染意識. 已擧淨心,復擧無餘, 爲欲遮遣善有漏識.

해석한다; 전식(轉識)에 있어서는 전의(轉依)가 성립되지 않음을  개의 게송으로 나타내 보였으니,

‘보살은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이란, 출세간의 대치(對治, 다스림)과 상응하는 착한 성품의 의식의 의미이며,

‘5식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안식 등의 5식을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하며,

‘다른 것이 없는’것이란, 착한 성품의 유루잡염(有漏雜染)의 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미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을 말하고, 다시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착한 성품의유루식(善有漏識)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전식(轉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가지의 식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른다. 또한 이들 7가지 식들을 전7식(前七識)이라고도 한다.


言心轉依云何作者, 若汝信有阿賴耶識,可作一切雜染種子, 無種子義, 名心轉依. 若不爾者, 云何當作?若對治生,名爲轉依,此不應理.何以故?若對治轉依非斷故,不成雜染.永斷故,名轉依,非能對治卽是永斷, 由此但是永斷因故.

‘마음의 전의(心轉依)를 어떻게 이루는 것인가?’란, 만약 그대가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종자가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종자가 없다는 뜻을 마음의 심전의(心轉依)전의로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짓겠는가? 

만약 다스림의 대치로 생겨나는 것을 전의로 이름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다스림의 대치전의라면 단멸이 아니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잡염이 영원히 단멸되기 때문에 전의(轉依)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능히 다스려서 대치한다는 것은 영원히 단멸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다만 영원히 단멸의 원인이 될 뿐인 것이다. 

 

若必爾者,便至果因無差別過.果是永斷說名涅槃,因是對治說名聖道.

若能對治,卽是永斷,應至果因一體之過,纔生對治應卽涅槃.

만약 그렇다면, 문득 결과와 원인의 차이가 없는 과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결과는 영원히 단멸한 것으로서, 열반이라 이름하고, 

원인은 대치(對治, 다스리는)하는 것으로서 성도(聖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다스리는 능대치(能對治)가 영원히 단멸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결과와 원인이 하나의 체(體)라는 과실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다스림의 대치가 생겨나게자말자  열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無種或無體,若許爲轉依者,若於轉識,作無種子,或卽無體許爲轉依.無彼二無故,轉依不應理.雜染轉識,此定位中,不得有故,亦無種子可令作無.無二可無而名轉依,不應道理.

‘만약 종자가 없는 무종(無種)이거나, 혹 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전의라고 인정한다면’이란,

만약 전식에 대해서 종자가 없다면, 무종자(無種子)라 하고, 혹은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를 인정해서 전의라고 한다면,

그 두 가지의 없음의 이무(二無)이기 때문에 전의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잡염의 전식은 이 선정의 단계에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종자가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면, 무종(無種),  무체(無體)의 두 가지도 없을 수 없으니, 전의로 이름하는 것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ㅡ소의(所依, 의지처) 종자가 없고, 능히 의지하는 능의(能依) 의식도 없다면 의지처를 전환한다는 전의(轉依)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若決定有阿賴耶識,雜染轉識, 此定位中, 雖不得有, 而彼種子一切, 住在阿賴耶識, 可能作其無種無體.

由汝轉依不應道理,故應信有阿賴耶識.

만약 결정적으로 아뢰야식이 있는 것이라면, 잡염의 전식이 이 선정의 단계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의 모든 종자가 아뢰야식에 존재하며, 능히 그 종자도 없는 무종(無種)과 자체도 없음의 무체(無體)를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전의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아뢰야식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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