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3

 

▶釋曰:應知法身幾法依止?略有三種,廣說無量.由種種佛住依止者,謂佛安住聖住`天住及與梵住故.言種種法身,爲此諸住所依,是故說名佛住依止.

▷해석한다; 법신은  가지의 법에 의지하는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간략히 말하면  가지가 있고, 자세히 말한다면 무량하다. 

‘부처님의 갖가지 안주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해탈문의 성스러움에 안주하시며, 하늘에 안주하시며, 청정에 안주함에 머무시기 때문에 갖가지라 하는 것이며,

법신은 이러한 여러 안주의 소의(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안주의 의지인 불주의지(佛住依止)라 하는 것이다.

 

或謂何用諸佛涅槃?以聲聞等,與諸如來,解脫等故.爲顯諸佛解脫殊勝,說二伽他.

혹은 말하기를 “어째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는 것인가? 성문등과 모든 여래의 해탈은 평등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든 부처님의 해탈의 수승(殊勝)함 나타내기 위해서  개의 가타(伽他, 게송)을 말하였다.

ㅡ이 질문은 다음의 게송을 해석하기 위해서 가설(假說) 것이다.

 

諸佛證得五性喜,皆由等證自界故者,謂諸如來,所得五喜由證法界,離喜都由不證此者,謂聲聞等,離五種喜,都由不證此眞法界.故求喜者,應等證者,是故欲求如此喜者,應須於此勤求正證.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쁜 성품의 오성희(五性喜) 증득하셨으니, 모두 평등히 스스로의 세계를 증득함에 의한 것이라네’는,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증득하신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 법계를 증득한 까닭이며,

‘환희를 여의는 것은 모두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성문등이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 여의는  모두는,  진정한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환희를 구하는 이는 마땅히 평등하게 증득해야 하리’는, 따라서 이와 같이 환희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것에 대해서 부지런히 구하여서 바르게 증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第二伽他,顯此五喜.由能無量及事成法味義德俱圓滿者,應知此中,能無量者,依止法身,有衆多佛,成等正覺,一切功能,悉皆平等,故能無量,由見如是能無量故,深生歡喜.及事成者,謂一如來所作,利樂諸有情事,卽等一切如來所作.由佛多故,事亦無量,是故言及.由見此故,深生歡喜.

 번째 게송은 오성희(五性喜) 나타낸 것으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무량함과 사업의 성취와 법미(法味)와 이익과 덕인 의덕(義德)이 원만하게 함께하기 때문이니,’ 중에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무량하다’는 것은, 이른바 법신에 의지해서 많은 부처님이 등정각을 성취한다면 모든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평등하기 때문에 공능(功能)이 무량하다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공능의 힘이 무량한 것을 보는 까닭에 깊은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리고, 사업의 성취’는  분의 여래께서 짓는 바이나,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은  모든 여래께서 짓는 것과 평등하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많이 계시기 때문에 사업도 역시 무량한 것이므로 ‘그리고의 급(及)’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것을 보기 때문에 깊은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由法味者,由見契經頌等法有勝滋味,深生歡喜.義德俱圓滿者,謂義圓滿,及德圓滿.應知此中,隨所思念,所有諸事,無不具足,名義圓滿.十力無畏不共法等,無不具足,名德圓滿.

‘법미(法味)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계경(契經)ㆍ응송(應頌) 등의 법에 뛰어난 재미의 승자미(勝滋味)가 있음을 보기 때문에 깊이 환희하는 것이며,

‘이익과 덕의, 의덕(義德)이 함께 원만하다’는 것은 이익의 원만인 의원만(義圓滿)과 덕원만(德圓滿)이니, 이 중에서 생각하는 바를 따라 모든 불사가 구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이익의 원만인 의원만(義圓滿)이라 이름하며,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18가지의 공통되지 않는 법의 18불공법(不共法) 등이 구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덕원만(德圓滿)이다.

 

계경(契經), 부처님의 설법, 경전
응송(應頌), 설법 끝에 총정리를 하여 마무리하는 싯구, 산문(散文)으로 된 경문(經文)의 뜻을 간결하게 묶어서 운문(韻文)으로 나타낸 것

 

得喜最勝無過失者,此喜超過三界喜故,名爲最勝. 永斷煩惱幷習氣故,名無過失.諸佛見常無盡故者,謂諸如來,見次前說,四種最勝無過失喜,窮生死際,常無有盡,至無餘依大涅槃界,亦無盡故,生殊勝喜.是故世尊,證得五喜,非聲聞等.

‘환희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과실이 없다’는 것에서,  

 환희는 삼계의 환희를 초월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이라 하고, 

영원히 번뇌와 습기를 단절한 까닭에 ‘과실이 없는 무과실(無過失)이다’고 하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하지 않는 무진(無盡)을 보기 때문’이란, 앞에서 말한  가지의 최승(最勝)으로서 과실이 없는 환희는 생사를 다하여 항상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고, 무여의 대열반에 들지라도 역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기 때문에, 모든 여래께서는 뛰어난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니,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를 증득하나 성문등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由種種受用身依止等者,謂佛法身與受用身,爲所依止.何故復須如是依止?但爲成熟諸菩薩故,由若離此,已入大地,諸菩薩衆,應不成熟.由種種變化身依止等者,謂佛法身與變化身,爲所依止.何故復須如是依止?多爲成熟聲聞等故,由若離此,下劣信解,諸聲聞等,應不成熟.言多爲者,應知攝取勝解行地諸菩薩衆.

‘갖가지 수용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등은 부처님의 법신은 수용신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러한 의지처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다만 모든 보살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만약 이러한 수용신을 여읜다면, 이미 지위에 들어간 보살 대중들도 성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갖가지 변화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등은 부처님의 법신은 변화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러한 의지처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많은 성문등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이 변화신을 여읜다면 신해(信解)가 하열한 성문등이 마땅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많음을 위한, 다위(多爲)’라고 말하는 것은, ‘많은 성문등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를 줄인 말이며,

‘등(等)’은 승해행지(勝解行地)의 보살 대중도 포함시키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應知法身,由幾佛法之所攝持?略由六種:一由淸淨,謂轉阿賴耶識,得法身故;二由異熟,謂轉色根,得異熟智故;三由安住,謂轉欲行等住,得無量智住故;四由自在,謂轉種種攝受業自在,得一切世界無㝵神通智自在故;五由言說,謂轉一切見聞覺知言說戲論,得令一切有情,心喜辯說智自在故;六由拔濟,謂轉拔濟一切災橫過失,得拔濟一切有情,一切災撗過失智故.應知法身,由此所說,六種佛法之所攝持.

▷논문; 법신은  가지의 불법에 의해서 섭지(攝持)된다고 알아야 하는가? 대략 여섯 가지에 의해서이니,

첫째는 청정(淸淨)에 의해서이니,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숙(異熟)에 의해서이니,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을 전환해서 이숙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며,

셋째는 안주(安住)에 의해서이니, 탐욕행 등의 안주를 전환해서 무량한 지혜의 안주를 얻기 때문이며,

넷째는 자재(自在)에 의해서이니, 갖가지 섭수업(攝受業)의 자재를 전환하여 모든 일체 세계의 걸림없는 무애신통지(無㝵神通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언설(言說)에 의해서이니, 일체의 보고 들음의 견문(聞覺)ㆍ감각하고 아는 각지(覺知)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하여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변설지(辯說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여섯째는제(拔濟, 구제)에 의해서이니,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함을 전환해서 모든 유정의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 

법신은 여기서 말한 여섯 가지의 육종불법(六種佛法)에 의해서 섭지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由是佛法攝持法身,今當顯示.由淸淨者,謂由淸淨佛法攝持法身.如是法身,證得淸淨,由轉何法?謂轉阿賴耶識,得法身故者,謂轉滅彼阿賴耶識, 得法身淸淨, 卽法身淸淨,說名淸淨.由異熟者,謂由異熟佛法攝持法身.轉色根者,謂轉眼等色根.得異熟智故者,謂轉彼故,得異熟智.

▷해석한다; 이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섭지법신(攝持法身)을 나타내는 것이니,

‘청정(淸淨)에 의한다’는 것은, 청정한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신의 청정을 증득하는 것은 어떠한 법을 전환해서 증득하는 것인가? ‘아뢰야식을 전환해서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그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멸하고 법신의 청정을 증득하는 것으로, 곧 법신의 청정을 청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숙(異熟)에 의한다’는 것은, 이숙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을 전환한다’는 것은, 안근  감각기관을 전환하는 것이며,

‘이숙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란, 이른바 그것을 전환함으로써 이숙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숙(異熟)은 이숙의 과보로서 5근(根) 등의 몸을 말하며, 여기서 5식의 의지처인 5근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기 때문에 이숙이라 하며, 이숙은 수행단계인 인위(因位)에서의 명칭이지만, 우선 예전의 5근에 의지해서 이숙의 명칭을 가설한 것이다.


由安住者,謂由安住佛法攝持法身.轉欲行等住者,謂轉世閒欲行等住得佛法住.得無量智住故者,謂由此故,住種種住.由自在者,謂由自在佛法攝持法身.轉種種攝受業自在等者,謂轉世閒殉利務農種種事業自在,得一切世界無㝵神通智自在故.

‘안주(安住)에 의한다’는 것은 안주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탐욕행 등의 안주를 전환한다’는 것은 세간의 탐욕행 등의 안주(즐거움)를 전환해서 불법의 안주를 얻게 하는 것이며,

‘무량한 지혜의 안주를 얻기 때문’이란, 이것에 의거함으로써 갖가지의 안주에 머무는 것이며, 

‘자재(自在)에 의한다’는 것은 자재한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며,

‘갖가지 섭수업(攝受業)을 자재로 전환한다’는  등은 세간의 이익을 따라 농사에 힘쓰는 등, 갖가지 사업의 자재를 전환해서 모든 세간의 걸림없는 무애신통지(無㝵神通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由言說者,謂由言說佛法攝持法身.轉一切見聞覺知,說戲論等者,謂轉世閒見聞覺知言說戲論,得於見聞覺知自在,由此證得能令一切有情心喜智自在故.由拔濟者,謂由拔濟佛法攝持法身,轉拔濟一切災橫過失等者,謂如世閒,有王家等,逼惱事起,由親友力,財寶力等,而能拔濟.由轉此故,證得拔濟一切有情,一切災橫過失智故,由此智力,能除一切災橫過失.

‘언설(言說)에 의한다’는 것은 언설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을 말하며,

‘일체의 보고 들음의 견문(聞覺)ㆍ감각하고 아는 각지(覺知)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한다는 것’ 등은 세간의 보고 들음ㆍ감각하여서 아는 것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해서 보고 들으며, 감각하고 아는 것의 자재를 얻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능히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지혜의 자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발제(拔濟, 구제)에 의한다’는 것은 구제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함을 전환한다’는  등이란,

세간에서 왕실 등의 핍박이 일어나서 친구의 힘이나, 재물과 보석의  등에 의해서 능히 구제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것을 전환함으로써 모든 유정의 일체의 재난과 과실을 구제하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지혜의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재난과 과실을 제거하는 것이다.

 

▶論曰:諸佛法身,當言有異`當言無異?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마땅히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ㅡ제불 법신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 말하는 것이다.

 

依止意樂業無別故,當言無異;無量依身現等覺故,當言有異.如說佛法身,受用身亦爾,意樂及業,無差別故,當言無異;不由依止無差別故,無量依止差別轉故.應知變化身如受用身說.

의지신(依止身)ㆍ의욕ㆍ업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나,

무량한 의지신이 등각(等覺)을 현현하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의 법신을 말하는 것과 같이 수용신 역시도 그러하나니, 의욕ㆍ업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의지신의 무차별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량한 의지신이 차이 있게 전전하기 때문에, 변화신도 수용신에 대하여 말한 바와 같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無量依止差別轉故者,謂受用身,無量依止差別而轉,是故但由意樂及業無差別故,當言無異,依身事別,當言有異.此中意樂無差別者,應知皆爲利益安樂一切有情.業無別者,應知皆同現等正覺般涅槃等種種作業.

해석한다; ‘무량한 의지신은 차이가 있게 전전하기 때문’이란, 수용신의 무량한 의지는 차이 있게 전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다만 의욕과 업이 무차별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하며, 

의지신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의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며,

‘업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로 등정각과 반열반 등을 시현하는 갖가지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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