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0

 

云何惛沈?令心於境無堪任爲性。能障輕安、毘鉢舍那爲業。

무엇이 혼침(惛沈)심소’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자재하지 못하게, 무감임(無堪任)하게 하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경안과 위빠사나(毗鉢舍那, 관觀)를 장애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혼침(惛沈, styāna)심소는 인식상황 속에서 심왕을 어둡고 답답하게 하는 심리 작용으로, 그리하여 경안(輕安)과 위빠사나를 장애한다.

위빠사나(毗鉢舍那, vipayan)는 관(觀)으로 번역하며, 미세하고 분명하게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


有義惛沈癡一分攝。論唯說此是癡分故,惛昧沈重是癡相故。有義惛沈非但癡攝。謂無堪任是惛沈相。一切煩惱皆無堪任。離此無別惛沈相故。雖依一切煩惱假立,而癡相增但說癡分。有義惛沈別有自性。雖名癡分而是等流,如不信等非卽癡攝。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였으며, 혼미하고 어두워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치심소의 인식활동이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다만 치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자재하지 못한 것이 혼침의 인식활동으로, 모든 번뇌심소는  자재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을 떠나서는 별도로 혼침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假立)하지만, 치심소의 인식활동이 증성하므로 다만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제3사(第三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이다.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이름하지만, 이것은 등류이기 때문에 불신 등과 같이  치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隨他相說名世俗有。如睡眠等是實有性。惛沈別相謂卽瞢重。令俱生法無堪任故。

다른 것의 인식활동인 행상(行相)을 따라서 세속유라고 이름하나니, 수면(睡眠) 등과 같이 이것은 실유의 속성이며,

혼침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이란, 곧 답답하고 무거운 것을 말하며,

함께 일어나는 심왕과 심소법으로 하여금 자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若離煩惱無別惛沈相,不應別說障毘鉢舍那。故無堪任非此別相。此與癡相有差別者,謂癡於境迷闇爲相,正障無癡而非瞢重。惛沈於境瞢重爲相,正障輕安,而非迷闇。

만약 번뇌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혼침심소의 인식활동이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혼침이 위빠사나(觀)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자재하지 못한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행상인 별상이 아니며,

이것이 치(癡)심소의 인식활동과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치심소는 대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인식활동의 상(相)으로 하고, 바로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지만 답답하고 무거운 것은 아니며, 

혼침은 대상에 대해서 답답하게 무거운 것을 인식활동의 상(相)으로 하고, 안(安)심소를 장애하지만 미혹하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云何不信?於實、德、能、不忍樂欲,心穢爲性。能障淨信墯依爲業。謂不信者多懈怠故。不信三相翻信應知。

무엇이 ‘불신(不信)심소’인가? 참다운 존재(實)ㆍ덕(德)ㆍ능력(能)에 대하여,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고,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청정한 믿음을 장애하여 게으름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믿지 않는 사람은 게으름이 많기 때문이니, 불신의 세 가지 행상은 신(信)심소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불신(不信, aśraddhā)심소는 신(信)의 반대 심소로서, 믿음을 장애하여 심왕을 오염케 하는 심리작용으로, 그리하여 해태(懈怠)심소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然諸染法各有別相。唯此不信自相渾濁,復能渾濁餘心、心所。如極穢物自穢穢他。是故說此心穢爲性。由不信故於實、德、能,不忍樂欲。非別有性。若於餘事邪忍樂欲,是此因、果非此自性。

모든 잡염법은 각각 별도의 인식활동이 있으나, 오직 이 불신만이 그 자성이 혼탁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를 혼탁하게 하나니, 매우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신은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한다고 말하며, 불신에 의거하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實)ㆍ덕(德)ㆍ능력(能)을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으며, 별도로 다른 체성(體)이 있는 것은 아니니,

만약 다른 잡염법에 대해서 삿되게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한다면, 불신의 삿되게 인정하게 된 원인과 삿되게 즐거워하고 욕구하는 결과가 될 뿐, 이 불신의 체성(體)은 아니다.

만약 다른 잡염법 등에 대해서 삿되게 인정하고 즐거워하며 욕구한다면, 자체가 사욕(邪欲)ㆍ사승해(邪勝解)가 되는 것이다.


云何懈怠?於善惡品修斷事中懶墯爲性。能障精進增染爲業。謂懈怠者滋長染故。於諸染事而策勤者亦名懈怠。退善法故。於無記事而策勤者,於諸善品,無進退故,是欲、勝解非別有性。如於無記忍可樂欲,非淨非染,無信、不信。

무엇이 ‘해태(懈怠)심소’인가? 선품(善品)을 닦고 악품(惡品)을 끊음에 대해서 게으른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정진을 장애하여 잡염을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게으른 사람은 잡염법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잡염법의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도 역시 해태 심소라고 이름하나니, 선법을 퇴전시키기 때문이다.

무기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은 모든 선품(善品)에 대해서 나아가게도 물러나게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욕(欲)ㆍ승해(勝解) 심소가 되며,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니, 

무기에 대해서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하는 것이 청정도 잡염도 아니므로 신(信)심소도 아니고 불신(不信)심소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해태(懈怠, kausīdya)심소는 ‘게으름’의 심리로서 근(勤)심소의 반대이다. 선을 닦지 않고 악을 방지하지 않으며, 당장은 안락하지만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된다. 성불을 향한 수행을 장애하는, 이것은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일부분이며 따로 체(體)가 없다.


云何放逸?於染淨品不能防修,縱蕩爲性。障不放逸增惡損善所依爲業。謂由懈怠、及貪、瞋、癡,不能防修染淨品法,摠名放逸。非別有體,雖慢、疑等,亦有此能,而方彼四勢用微劣。障三善根、遍策法故。推究此相如不放逸。

무엇이 ‘방일(放逸)심소’인가? 잡염품을 방지할 수 없거나 청정품을 닦을 수 없고 방탕하게 흐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불방일(不放逸)을 장애하여 악을 증장하고 선법을 훼손하는 것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다.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 때문에 잡염품을 방지하거나 청정품의 법을 닦을 수 없는 것을 총체적으로 방일이라고 이름하며,  별도의 자체는 없는 것이다.

만(慢)ㆍ의(疑)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작용이 있지만,  그러한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 심소의 세 가지 선근과 정진의 변책(遍策)의 법을 장애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인식활동을 추정하는 것은 불방일 심소와 같은 것이다

 

방일(放逸, pramāda)심소는 흐트러진 심리로서 선행을 하고 악행을 방지할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방탕하며 함부로 행동하려는 심리이다. 이것은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일부분으로서 따로 체(體)가 없다.

 

云何失念?於諸所緣不能明記爲性。能障正念,散亂所依爲業。謂失念者,心散亂故。

무엇이 ‘실념(失念)심소’인가?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음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을 장애하여 산란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실념(失念, muṣitasṁṛtitā)심소는 기억하지 못하는 심리작용으로서,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기분이 산만하여 선법을 지속적으로 상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염(念)과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有義失念念一分攝。說是煩惱相應念故。有義失念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癡令念失故名失念。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염(念)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것을 염(念)심소라 하나니,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며, 치심소가 기억하는 것을 잃게 하기 때문에 실념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有義失念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염(念)ㆍ치(癡) 심소의 두 가지를 갖춘(俱)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두 문장에 그림자처럼 생략해서 말한 것에 의한 때문이고, 또한 논서에서는 이것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云何散亂?於諸所緣令心流蕩爲性。能障正定惡慧所依爲業。謂散亂者發惡慧故。

무엇이 ‘산란심소’인가?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하여서 심왕(心)을 방탕하게 흐르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른 정(定)심소를 장애하여 악혜(惡慧)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삼으니, 산란한 사람은 악혜(惡慧)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산란(散亂, vikṣepa)심소는 심왕을 갖가지 대상으로 치달리게 하고 흩뜨려서 정정(正定)을 장애하고 악혜(惡慧)를 일으킨다.


有義散亂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有義散亂,貪、瞋、癡攝,󰡔集論󰡕等說是三分故。說癡分者遍染心故。謂貪、瞋、癡令心流蕩,勝餘法故說爲散亂。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탐ㆍ진ㆍ치 심소에 포함되는 것으로,  '대승아비달마집론' 제 1권과 '대승광오온론' 등에서 이것이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설한 내용을 회통하자면,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한 것은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탐ㆍ진ㆍ치 심소가 심왕을 방탕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 만(慢)심소 등의 다른 법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산란이라 말하는 것이다.


有義散亂別有自體。說三分者是彼等流,如無慚等非卽彼攝。隨他相說名世俗有。散亂別相謂卽躁擾。令俱生法皆流蕩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별도로 자체가 있으니,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이고, 무참(無慚) 등과 같이 곧 탐ㆍ진ㆍ치 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승아비달마집론' 제1권 등의 내용을 회통하자면, 다른 것의 인식활동을 따라서 세속유(世俗有)라 이름하고, 산란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은 조급하고 어지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함께 일어나는 구생법(俱生法)으로 하여금 모두 방탕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若離彼三無別自體,不應別說障三摩地。掉擧、散亂二用,何別?彼令易解,此令易緣。雖一剎那解、緣無易,而於相續有易義故。染污心時,由掉、亂力常應念念易解易緣。或由念等力所制伏如繫猿猴。有暫時住故,掉與亂俱遍染心。

만약  탐ㆍ진ㆍ치 심소의 세 가지를 떠나서 별도의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삼마지(三摩地, 등지)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도거와 산란, 이 둘의 작용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도거는 이해(解)를 바뀌게 하고, 산란은 연(緣)을 바뀌게 하는 것으로, 이해(解)와 연(緣)을 한 찰나에 바뀌게 하지는 않지만, 상속함에 있어서는 바꾸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염오심의 시기에는 도거와 산란의 세력에 의해서 항상 생각생각마다 이해를 바꾸고 연(緣)을 바꾸는 것이니, 혹은 염(念)심소 등의 힘으로 억제하고 조복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를 묶어 놓은 것과 같아서 잠시 안주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도거와 산란 심소는 함께 잡염심에 두루하는 것이다.

 

삼마지(三摩地, samdhi)는 등지(等持)로 번역하며, 선정을 닦아서 마음을 한 대상에 안주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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