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9

 

云何爲慳?耽著財、法不能慧捨,秘悋爲性。能障不慳,鄙畜爲業。謂慳悋者,心多鄙澀,畜積財、法,不能捨故。此卽貪愛一分爲體。離貪、無別慳相用故。

무엇이 ‘(, mātsarya)심소가? 재물과 법에 탐착해서 베풀지 못하고 감추고 아끼는 것을 체성()으로 삼으니인색하지 않음의 불간(不慳) 능히 장애하여 비루하게 비축함을 ()으로 삼는다.

인색한 사람은 마음이 비루하게 많이 머뭇거리나니, 재물과 법을 축적해서 능히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하나니탐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심소 인색’,  자신의 재산ㆍ가정ㆍ사회적 지위 나아가 수증과(修證果) 지나치게 아까워하여서 남에게 베풀지 않고 몰래 감추어 두려는 심리작용으로, 이것은 ()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誑?爲獲利譽,矯現有德,詭詐爲性,能障不誑,邪命爲業。謂矯誑者,心懷異謀,多現不實邪命事故。此卽貪、癡一分爲體。離二無別誑相用故。

무엇이 광(誑, śaṭya)심소’인가?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교묘하게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서 속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속이지 않음의 불광(不誑)을 능히 장애하여 삿되게 살아가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은 마음에 다른 음모를 품고, 대부분 진실치 못한 삿된 생계수단의 일을 나타내며, 이것은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하나니, 탐ㆍ치 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광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광(誑)심소는 ‘속임’, 즉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덕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심리작용으로, 그리하여 정직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諂?爲網他故,矯設異儀,險曲爲性,能障不諂、教誨爲業。謂諂曲者,爲網帽,他,曲順時宜,矯設方便,爲取他意,或藏己朱,不任師友正教誨故。此亦貪、癡一分爲體。離二無別諂相用故。

무엇이 첨(諂)심소’인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묘하게 다른 행동을 보여서 진실하지 못하게 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아첨하지 않음의 불첨(不諂)과 가르침의 교회(敎誨)를 능히 장애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아첨해서 굽히는 사람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 굽혀서 적절한 시기에 따라 교묘하게 방편을 시설해서 남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혹은 자기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 스승과 친구의 바른 가르침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ㆍ진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니, 탐ㆍ진 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첨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첨(諂, māya)심소는 ‘아첨’, 즉 자기 본심을 숨겨 두고서 남에게 거짓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남에게 아첨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심리작용이다.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害?於諸有情,心無悲愍,損惱爲性,能障不害,逼惱爲業。謂有害者,逼惱他故。此亦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害相用故。瞋、害別相,准善應說。

무엇이 ‘해(害)심소’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고 손해를 끼치고 괴롭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해롭게 하지 않음으니 불해(不害)를 능히 장애하여 핍박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핍박하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며, 진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해(害)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진(瞋)ㆍ해(害) 심소의 개별적인 모습의 별상(別相)은 선심소에 견주어서 말해야 한다. 

 

해(害, vihiṃsā)심소는 ‘해침’, 즉 모든 유정에게 연민의 정을 갖지 못하고 손해를 입히며 괴롭히는 심리작용으로,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진(瞋)ㆍ해(害) 심소의 개별적인 모습의 별상(別相)

진(瞋)심소는 11 가지 선심소 중에서 무진(無瞋)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자(慈)를 장애하고,  

해(害)심소는 선의 심소 중에서 불해(不害)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비(悲)를 장애하고,

진(瞋)심소는 자주 남의 목숨을 괴롭히고 끊게 하며,

해(害)심소는 오직 남을 괴롭히는 작용을 한다.


云何爲憍?於自盛事,深生染著,醉傲爲性,能障不憍,染依爲業。謂憍醉者,生長一切雜染法故。此亦貪愛一分爲體。離貪無別憍相用故。

무엇이 교(憍)심소’인가? 자신의 번성한 일에 대해서 깊이 탐착심을 일으켜서 취하여 방자(교만)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방자하지 않음의 불교(不憍)을 능히 장애하여 잡염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으니, 방자한 사람은 모든 잡염법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며, 탐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교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교(憍, mada)심소는 ‘방자함’, ‘교만’, 즉 자신이 지닌 우월한 특성(미모ㆍ혈통ㆍ학식 등)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심리작용으로서, 이에 특별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며, 탐(貪)심소의 일부분이다.

 

무참 · 무괴, 두 가지 중수번뇌인 중수혹(中隨惑) 체성과 업을 해설한다.

云何無慚?不顧自、法,輕拒賢善爲性,能障㝵慚生長惡行爲業。

謂於自法無所顧者,輕拒賢善,不恥過惡,障慚生長諸惡行故。

무엇이 ‘무참(無慚)심소’인가? 자신과 법을 돌아보지 않고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善法)을 거부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참(慚)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을 거부하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慚)심소를 장애하여 모든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무참(無慚, āhrīkya)심소는 참(慚)의 반대 심소로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부끄러움을 내지 않으며, 현인과 선법을 경시하는 심리작용이다.


云何無愧?不顧世閒崇重暴惡爲性,能障㝵愧,生長惡行爲業。謂於世閒,無所顧者崇重暴惡,不恥過罪,障愧生長諸惡行故。不恥過惡,是二通相。故諸聖教假說爲體。

무엇이 ‘무괴(無愧)심소’인가? 세간을 돌아보지 않고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기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괴(愧)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세간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겨서 죄과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심소를 장애하여 여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니,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무참 · 무괴  가지의 공통된 양상이다. 

따라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가정적으로 말해서 자체로 삼는 것이다.

여러 경론에서 무참(無慚)ㆍ무괴(無愧)심소의 자체를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불취(不恥)로 설명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회통하여 불치(不恥)   가지 심소의 공통된 상임을 밝힌 것이다.

 

무괴(無愧, anapatrāpya)심소는 괴(愧)의 반대 심소로서, 남을 고려하지 않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이 포악하며, 악덕인(惡德人)을 따르는 심리작용이다.

 

若執不恥爲二別相,則應此二體無差別。由斯二法應不俱生。非受想等有此義故。若待自、他,立二別者,應非實有。便違聖教。若許此二,實而別起,復違論說俱遍惡心。不善心時,隨緣何境,皆有輕拒善及崇重惡義故。此二法俱遍惡心,所緣不異,無別起失。

만약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불취(不恥)에 집착해서  가지 개별적인 이별상(二別相)으 삼는다면, 곧  둘의 자체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종래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참과 무괴,  법은 함께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과 남을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별상(別相) 건립한다면,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만약 그러하다면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가 실유(實有)로서 전후(前後)하여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이 있으므로 () 두루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만약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가 실유로서 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또한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함께 악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니, 불선심(不善心)의 시기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선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악을 받드는 뜻이 있기 때문에,   법은 모두 악심에 두루하고,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然諸聖教說不顧自、他者,自、法名自,世閒名他。或卽此中拒善崇惡,於己益損名自他故。而論說爲貪等分者,是彼等流非卽彼性。

그러나,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인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自)라고 이름한 것이고, 세간을 타(他)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가운데에서 선법을 거부하고 악을 받든다고 말하였으니, 자기에 대해서 이롭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을 자타로 이름하기 때문이나,

그런데 논서,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탐심소 등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인 것으로, 그것의 체성(性)은 아닌 것이다.

 

云何掉擧?令心於境不寂靜爲性。能障行捨、奢摩他爲業。

무엇이 도거(掉擧)심소’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고요하지 않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행사(行捨)와 사마타(奢擧他)를 장애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도거(掉擧, auddhatya)심소는 ‘들뜸’, 즉 심왕을 들뜨게 하여 어수선하며, 고요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행사(行捨)심소와 사마타를 장애한다.

사마타(奢摩他, amatha)는 지(止)ㆍ적정(寂靜)ㆍ지식(止息) 등으로 번역하며, 심왕을 거두어 연(緣)에 안주하여 산란을 떠난 것을 말한다.


有義掉擧貪一分攝。論唯說此是貪分故,此由憶昔樂事生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탐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니, 이것은 과거의 즐거웠던 일을 생각함에 의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有義掉擧非唯貪攝。論說掉擧遍染心故。又掉擧相謂不寂靜。說是煩惱共相攝故。掉擧離此無別相故。雖依一切煩惱假立而貪位增。說爲貪分。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오직 도거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논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과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도거심소는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다. 

또한 도거심소의 인식활동의 행상(行相, 작용)은 적정(寂靜)하지 않음을 말하며, 이것이 번뇌의 공상(共相)에 포함된다고 말한 때문이니, 도거심소는 이것을 떠나서 별도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하지만, 탐욕에서 증장되므로 탐심소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며, 


有義掉擧別有自性。遍諸染心如不信等,非說他分體便非實。勿不信等亦假有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별도로 체성이 있어야 하나니, 모든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에, 불신 등과 같이 다른 것의 일부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도거심소 자체가 문득 실유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불신 등도 역시 가유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며, 


而論說爲世俗有者,如睡眠等隨他相說。掉擧別相謂卽囂動。令俱生法不寂靜故。若離煩惱無別此相,不應別說障奢摩他。故不寂靜非此別相。

그런데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세속유(世俗有)라고 말한 것은 수면(睡眠) 등과 같이 다른 것의 인식활동에 따라 말한 것이니, 도거심소의 개별적인 별상(別相)이란,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말하며, 함께 일어나는  심왕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적정치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를 떠나서 별도의 별상(別相)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사마타(奢摩他)를 장애한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적정하지 않은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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