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1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入智相云何?多聞薰身故,非阿犂耶識所攝,如阿犂耶識種子成。寂靜思惟所攝,諸法義現相所生,可取事處,有見者意言處。

지혜의 지상(智相) 들어가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아리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나,

아리야식의 종자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정(寂靜)한 사유가 포섭하는 바로서,법과 뜻(義)과 상(相)으로 나타나고, 인식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유견식(有見識, 견분, 주관)이란 말의 뜻을 생각하는 의언(意言)인 것이다.

ㅡ 상권에서 지혜의 지상(智相)으로서 심식론과 삼성설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며,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의언(意言)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是中誰入智相?大乘所薰多聞相續身,無量諸親近得故`信欲一向故`善集善根故,善助功德智行菩薩。

그러함에서 누가 지혜의 지상(智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다문훈습이 상속하고, 무량한 부처님을 모두 친근(親近)한 때문이며, 

믿음과 의욕이 한결같으며, 선근을  쌓음으로써 공덕과 지혜를  갖춘 보살이 들어가는 것이다.

ㅡ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 중에서 1위인 자량도(資糧道) 수행을 설명한 것으로,

10주ㆍ10행ㆍ10회향(10회향의 주심住心)까지이다.

 

何處入還?彼現見法義,現相意語處,因大乘法生故;信解地中,見道行`修道行,及盡至一切法,唯記爾,隨順聞信因故`如是彼分別證因故`一切障對治及離障故。

어떠한 곳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유견식(有見識, 견분)이 법의(法義)의 상으로 나타난 그 말의 뜻을 생각하는 의어처(意語處) 원인이 되어서, 대승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신해지(信解地)ㆍ견도의 수행인 견도행(見道行)ㆍ수도의 수행인 수도행(修道行)ㆍ궁극적인 지위인 진지(盡至)인 것이며, 

일체법이 오직 식(識)임을 수순해서 듣고 믿는 원인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그가 분별하여 깨치는 증인(證因)이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려서 장애를 여읜 곳이다.

 

從何處入?善根力持故;三種相心轉明,種種莊處滅故;念法義定慧,一切時正行,及不放逸故。

어떠한 곳으로부터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선근의 힘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삼종상(三種相)으로 마음을 전환해서 밝힌 때문이며, 갖가지 장엄이 소멸한 때문이며, 법의(法義)를 인식대상으로 하는 선정과 지혜를 어느 때나 바르게 행하고 게으르지 않음으로써이다. 

 

諸世界無量,衆生類無量,念念中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初轉心者。隨所心布施等波羅蜜助集行,彼心我已得,是故我不加用諸波羅蜜,修道能滿成,第二轉明者。諸禪法成就已,死後尋得隨所須一切身事得,有障善根者,況我善修善根,得無障善根,尋卽一切諸勢不成,第三轉明者。

是中有偈:

여러 세계의 수많은 중생의 무리가 무량한 찰나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나니, 이것이  번째로 마음을 전환한 초전심(初轉心)한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따라서 보시 등의 바라밀을 돕는 행을 모두 행하여서, “그 마음을 나는 이미 얻었으므로, 따라서 나는 모든 바라밀을 더욱 가용(加用)해서 닦지 않아도 수도(修道)를 능히 원만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번째로 전환해서 밝히는 제이전명(第二轉明)인 것이며,

장애가 있는 선근을 성취한 이는 여러 선정법을 성취하여,후(死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몸(身) 갖추나니, “하물며 나는 선근을  닦아서 장애가 없는 선근을 얻었거늘, 구하고자 한다면 성취하지 못할 세력이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번째로 전환해서 밝히는 제삼전명(第三轉明)인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人類得菩提, 於念念中閒, 衆生無量故, 至時應捨行。

사람의 무리가 깨달음을 증득함이 염염(念念, 순간순간)마다 있음은 중생이 무량한 때문이니

궁극에 이르기 전에는 퇴전하여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隨心所行施, 淸淨無垢心, 彼得心止事, 勇健布施成。

마음이 보시를 행함을 따라, 청정하고 번뇌 없는 무구심(無垢心)이 되나니, 

그는 마음을 얻어서 모든 정진을 멈추지 않으니, 용맹하게 보시를 이루네.

 

善者滅身已, 自勢隨所心, 善者滅身已, 彼勢云何不

착한 선자(善者) 죽은 뒤에 스스로의 마음을 따르나니, 

착한 선자(善者) 죽은 뒤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捨聲聞`緣覺,心滅念故;於大乘中,一切有疑,無疑故滅疑或;聞思諸法,除我相我`我所相執故,滅法慢者;前所住及安一切相,不念不分別故,及滅分別者。是中有偈:

성문ㆍ연각의 마음을 버려서 생각을 멸하여, 멸념(滅念)한 때문이며, 대승에 관한 일체에 의심이 없기 때문에 의심과 미혹을 단멸하는 것이며,

듣고 사유하는 문사(聞思)의 제법에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없앰으로써 법만(法慢, 법집法執)을 멸하며,

현전(現前)에 머물러서 안립한 일체의 상을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분별을 끊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在前隨所除, 相念自住處, 智盡不分別, 得上菩提爾。

현전에 머물러, 제거한 것을 따라서 인식작용과 인식대상이 자재한 곳이네.

지혜가 다하면 분별하지 않으므로, 최상의 깨달음인 상보리(上菩提)를 얻는다네.

 

以何云何入?

무엇에 의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2위인 방편도에서의 수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가지 선근인 사구관(四求觀)과 사여식지관(四如實知觀) 닦는 단계이다.

 

彼聞習業 寂靜思惟所攝法義,現見意言

그것은 들어서 훈습되는 문습업(聞習業)이고, 고요한 사유에 포섭되는 바의 법의(法義)와 나타나는 견분(주관)의 생각 속의 의언(意言)이며,

ㅡ유견(有見, 유견식) 말하고 유상(有相) 들지 않은 것은,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四種求,名`義`性`勝安求等

 가지 사색인 사종구(四種求, 사구관四求觀)에 의한 것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으로 안립되는 사색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체의 체성)ㆍ승(勝, 모습과 작용의 차별)의 네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ㅡ여기서 () 내용면에서 차별의 의미이므로 편의상 차별이란 의역어를 사용한다.

 

四種如實知故,名`事`性`勝安性勝,如實知彼不覺見故。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아는  가지 지혜인 사종여실지(四種如實知)에 의하는 것이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에서 안립된 뛰어난 성품인 성승(性勝)의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이니, 그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때문이다.

ㅡ4여실지관(如實智觀) 가지 사색관인 사종구(四種求)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하여서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인 능취심(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하고 결정하는 관법이다.

 

如是彼菩薩唯入記故順修,彼名義現見意言,彼名意言唯正觀,彼名所依義唯意言正觀,然彼名性勝安唯觀。

於後唯意言,不覺已有名`彼義`有性`勝安。有性勝義相不見已,此四種求及四種觀見知已,彼名義現相意言中唯記入。

이와 같이  보살들은 유식(唯識)에 깨달아 들어가고자 수순하고 닦는 것이니,

명(名, 명칭)과 의(義, 대상)으로 나타난 견분(주관)의 생각 하는 바의 의언(意言) 대해서, 

명(名, 명칭)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라고 바르게 관찰하고, 

명(名, 명칭) 의지처인 대상도 오직 생각하는 바의 뜻인 의언(意言)이라고 바르게 관찰하며,

명(名, 명칭)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은 오직 안립일 뿐이라고 관찰한 다음에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만이 안립이 아니고, 명(名, 명칭)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 안립임을 깨닫는 것이다. 

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에는 대상의 상을 보지 못하나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 네 가지 사색인 사종구(四種求)와 네 가지 관찰에 의해서,  명칭과 대상으로 나타난 생각하는 바의 뜻인 의언(意言)에 대해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彼記事中入已,爲當唯入彼有相見二事及種種事入,名`義`性`勝義,六種相無義故;彼可取能取事現處故;不斷種種相義,現相所生故。

 유식의 성품에 깨달아 들어감은 다음과 같으니, 장차 유식의 성품에 들어가고, 

 유상식(상분, 객관)과 유견식(견분, 주관)의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들어가나니,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의 의미(義)에 여섯 가지 육종상(六種相)이 없기 때문이고, 

 취착된 인식대상인 가취(可取), 즉 소취(所取)는 인식주체의 성품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임없이 갖가지의 상과 의미로 사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闇中如見繩,謂蛇現相故。所謂如繩蛇不實,非衆生故。如是覺義者,非有迴蛇意,唯住繩意,彼亦微思量色`香`味`觸`相故。是中依慧,繩慧亦迴成。如是此諸六種相名現相,意言中如繩慧。六種相實義實處唯記慧,亦思量成就性慧故。

비유하자면 어둠 속에서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노끈에서 본 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살아 있는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과 같이 대상이 비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뱀이라는 지각(意)은 없어지고 오직 노끈의 지각(意)만 남게 되는 것이나, 그것 역시도 세세하게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빛깔(色, 형체)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의 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지각(慧)에 의지하면 노끈의 지각(慧) 역시도 없어지는 것이니,

이와 같이  여섯 가지의 상이 명칭으로 나타난, 오직 생각하는 바의 의언(意言)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상의 실의(實義) 실처(實處), 유식성의 지각(慧)도 노끈의 지각(慧)과 같이 사량(思量)인 것이니, 성취성의 지각(慧)이기 때문이다.

 

如是此菩薩意言現相義相事入分別性,入成唯主記入故他性。

이와 같이  보살은 생각하는 바의 언어인 의언(意言)이 대상으로 나타난 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분별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유식(唯識)을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성(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云何成就性入?迴唯記想,彼者是諸意言,聞法習者,彼爾時分別義相。菩薩一切義現相生,無有餘成。是故唯記現相亦不生。是故一切義無分別事名住,已於法界,如現見隨住。

어떻게 성취성(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오직 생각(想)하고 있는 것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각하고 있는 바의 의언(意言)과, 문법(聞法)으로써 훈습된 것과 그러함으로 그 뜻과 상을 분별(分別)한다면, 보살은 일체의 나타나는 뜻과 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 생겨날  없기 때문에식(唯識)으로 사현함도 역시 생겨날  없으므로, 일체 분별이 없는 성품의 명칭에 안주하고, 법계에서 현전에서 보는 것에 수순하여 안주하는 것이다.

 

爾時彼菩薩同等念已,生無分別念智,是故此菩薩名爲入成就性。

於中有偈:

그때  보살은 평등한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지혜인 무분별염지(無分別念智)를 일으키나니, 이로 인하여  보살이 성취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法衆生法義, 同別有性義, 不淨淨盡至, 分別名境界。

법과 중생ㆍ법과 의미ㆍ동일ㆍ차별ㆍ자성ㆍ대상ㆍ부정ㆍ청정ㆍ궁극에 이른다는 것은

명(名, 명칭)의 경계를 분별함이네.

 

如是此菩薩智及相唯記入故,名爲入成。彼入已,名爲住歡喜地,善達法界,及生如來家,得一切衆生平等心,得一切菩薩等心,是彼菩薩見道行。

이 보살은 이렇게 지혜의 지상(智相)과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므로 깨달아 들어감이 성취된다고 이름하며,

그것에 깨달아 들어가면 환희지에 안주하고, 법계를 잘 통달하며,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고,

일체 중생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얻어서, 일체 보살의 평등한 보살등심(菩薩等心)을 얻으니,

이것이 그 보살의 견도의 수행인 견도행(見道行)인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10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義增上者,復如經所說:菩薩成就三十二法故,名爲菩薩,助益樂深心故。於一切衆生,令入一切智智,稱己智滅慢故;淳厚深心故;不作恩愛,怨及非怨等心故,永親故,盡至涅槃;美言悅目先應故;不斷彼心故;所許之事不休息,不疲倦意故;聞義無厭足故.

매우 뛰어난 뜻의 의증상(義增上)이란, 경전에서 “보살이 32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보살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한 바와 같으니,

일체 중생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깊은 마음이기 때문이며, 

일체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지혜에 계합하기 때문이며, 아만을 소멸하기 때문이며,

순수하고 후덕한 순후심심(淳厚深心)이기 때문이며, 은애(恩愛)를 짓지 않기 때문이며,

원수와 원수가 아닌 이에게 평등한 마음의 등심(等心)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가까이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며, 좋은 말로 기쁘게 먼저 말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마음이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며, 

수용한 대승의 교법 대해서 쉬지 않고 피로나 권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대승의 교의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自過見患故;見他作過不說故;一切威儀行菩薩心業故;布施中不求報故;一切有道處,不著修戒故;不瞋一切衆生忍故;聚集一切善根法,以精進故;離無色界禪故;順方便智故.

스스로의 죄에 대한 허물을 보기 때문이며, 남의 잘못을 보고 들춰내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보살의 마음을 행하기 때문이며, 보시에 대해서 과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윤회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계율을 닦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인욕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근법을 섭수하고자 정진하는 때문이며, 무색계를 여의고 선정을 닦기 때문이며, 

방편에 수순하여 지혜를 닦기 때문이다.


四攝法所攝方便故;破戒`持戒不二心故;勤劬聞妙法故;樂住阿蘭若故;不樂世閒種種事故;不希樂小乘故;於大乘見大利益故;遠離惡知識故;親近善知識故;淨四梵行故.

사섭법(四攝法)에 들어가는 방편이기 때문이며,

계율을 파하는 파계(破戒)와 지키는 지계(持戒)의 두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스럽게 승묘한 법을 듣기 때문이며,

즐겁게 아련야(阿練若, 아란야)에 머물기 때문이며, 세간의 갖가지 일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대승 안에서  이익을 보기 때문이며, 

나쁜 악지식(惡知識, 악우 악惡友) 멀리하기 때문이며, 착한 선지식(善知識, 선우 善友) 가까이하기 때문이며, 

청정한 네 가지의 사범행(四梵行, 사무량심)행하기 때문이다.

 

사섭법(四攝法),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것으로,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며,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는  것이며,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신ㆍ구ㆍ의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써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며,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중생과 같이 하면서 제도하는 것이다.

아련야(阿練若),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공한정처(空閑靜處)를 말하는 것으로,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

사범행(四梵行),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말한다.


五神通遊戲故;依智故;住有行不住有行,衆生不捨故;一向定言故;重實語故;菩薩心爲首故。如是等句,初句中差別應知,助樂深心故,於一切衆生此助樂深心故。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의 오신통(五神通)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는 의지(依智)이기 때문이며, 

바른 행에 머물거나 혹은 바른 행에 머물지 않는 중생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결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며, 참다운 실어(實語)를 존중하기 때문이며, 

보살심(菩薩心)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상과 같은 문구들은  번째 문구를 분별한 것으로,

일체 중생에게 이익과 안락을 더하여 주려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有十六種作事差別應知。是中十六種作事者,轉轉行作;不退作;他所不勸,而自行作;不瞋作;不望報作,三句不望報故,有益`無益不瞋喜,乃至後生隨逐故;彼相似口業故,有二句;苦樂中,不二等作事;不怯弱作事;不退轉作事;方便攝作事.

이러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마음 때문에 16가지의 16종작사(十六種作事)의 차이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여기서 16종작사(十六種作事)란,

첫째는,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행작(轉轉行作)이고, 둘째는 퇴전이 없는 불퇴작(不退作)이며,

셋째는 남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행하는 자행작(自行作)이며, 넷째는 성내지 않는 불진작(不瞋作)이며,

다섯째는 과보를 바라지 않는 불망보작(不望報作)으로, 이에 과보를 바라지 않는 삼구(三句)가 있으니, 유익(有益)에도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으며, 무익(無益)에도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으며, 나아가생(後生)에도 따르는 것이다.

여섯째는 서로 비슷한 구업과 신업이니, 이에  가지 문구의 차이가 있으며, 

일곱째는 즐거움(樂)에 대해서도 괴로움(苦)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한 등작사(等作事)이고,

여덟째는 겁약(怯弱)하지 않는 불겁약작사(不怯弱作事)이며,

아홉째는 퇴전하지 않는 불퇴전작사(不退轉作事)이고,

열째는 방편으로 섭수하는 방편섭작사(方便攝作事)이며,


除障作事,二句,相續不斷念彼心作事;勝至作事,七句,六波羅蜜正修行,及攝取行正事;成就行作正事,六句,親近知識`聽聞正法`樂蘭若`捨惡覺心`正念功德二句`大乘功德二句;成就作事三句,無量淸淨`得益力`得證功德;彼令住作事四`將衆功德`除疑教受`財法攝取心故`不雜心故。

열 한째는 장애를 제거하는 제장작사(除障作事)이니, 두 가지의 다름이 있는 문구가 있으며,

열 두째는 상속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의 작업이고,

열 셋째는 뛰어나게 이르는 승지작사(勝至作事)로써, 이에 일곱 가지의 다름이 있으니, 6바라밀의 바른 수행이고, 보살이 중생을 네 가지로 인도하는 4섭법(攝法) 바른 정사(正事)인 것이다.

열 넷째는 가행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에 6 문구가 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정법을 청해 들으며, 아련야를 좋아하고, 나쁘게 헤아리는 것을 버리는 바른 생각의 공덕이니 이에 다른 두 가지가 있으며, 대승의 공덕이니 또한 이에  가지의 차이가 있으며,

열 다섯째는 성취작사(成就作事)이며, 세 가지의 다름이 있으니, 무량 청정하고, 위력을 얻으며, 증득하는 공덕이다.

열 여섯째는 그것을 안주하게 하는 것에 가지 차이가 있으니,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고, 의혹을 없애는 것이며, 가르치는 것이며, 재물과 법을 포섭하는 마음이니, 잡염심이 없기 때문이다.


如是等句,與初句解釋差別應知。如經說:依於初句故,句別有功德;依於初句故,句別義別爾。如是智相釋已。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는  번째 문구의 차별된 해석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경전에서 “최초의 문구에 의지하기 때문에 문구를 구별하는 공덕이 있는 것이며,

최초의 문구에 의지하기 때문에 문구의 구별과 의미의 구별도 그러한 것이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지혜의 지상(智相) 해석한 것이다.

 

攝大乘論卷上 終 섭대승론 상권을 마침.

 

아상가 또는 무착(無着)(Asanga, 300년 ~ 390년?)은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이며, 북서 인도 간다라 지방(현대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 부루사부라성의 브라만 집안에서 3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우실카(kausika), 어머니는 비린치(Vrinci)였으며, 형제 3명 중 장남이었다. 그의 동생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세친) 역시 불교 사상가이며, 성장하여 소승불교의 유부(有部)에 출가했으나, 후일 중인도 아유차국으로 가서, 유식파로 전향해서 대승의 유가행에 힘썼다.

<공(空)>의 교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자살하려고 고민했을 때, 동방, 비데하국(현재의 비하르주 북부)의 핀돌라(Pindola) 아라한을 만나서 겨우 소승의 공관(空觀)도 체득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는 아상가는 인도 중부의 아요딘야(현, 아우드)에 가서 대승불교의 수행의 하나인 유가행에 노력했다. 거기에서 마이트레야(미륵)에게서 대승의 공(空)사상을 공부하고, 대승불교도가 되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이트레야가 직접 『유가사지론』을 설교하도록 요청하고, 아상가는 해탈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식(唯識)사상 유포의 단서가 되었다. 또한 그는 마아트레야에게서 일광삼매를 배웠는데, 대승의 교의를 용이하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대승을 비방하는 동생 바스반두를 아요디야에 불러서 위대한 대승불교자로 키웠다.전설에 의하면, 아상가는 수행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이에 의해 《유가사지론》 ·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을 전지강설(傳持講說)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들 저서는 아상가가 아유차국에서 유가행의 스승이었던 마이트레야로부터 받은 학설로서, 후세에 마이트레야가 미륵보살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미륵보살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식설을 조직 ·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밖에 《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순중론》(順中論)·《현양성교론》·《대승아비달마집론》 등을 저술하여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論師)로 꼽혔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9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如常無常不二,如是苦樂不二`淨不淨不二`空不空不二`有我無我不二`定不定不二`有性無性不二`有生不生不二`滅不滅不二`永定不永定不二`性滅不性滅不二`世閒涅槃不二,如是等句差別,諸佛一切密語,以此三種性句隨順,應知如常等諸句中說。
於中有偈:

상주(常住)ㆍ무상(무無常)ㆍ상주도 무상도 아닌 것과 같이,

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과 

청정(不淨)ㆍ부정(淨)ㆍ청정도 부정도 아님과 공(空)ㆍ불공(不空)ㆍ공도 불공도 아님과 

자아ㆍ무아ㆍ자아도 무아도 아님과

고요함의 정(定)ㆍ고요하지 않음의 부정(不定)ㆍ고요함도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님과,

자성이 있는 유성(有性)ㆍ자성이 없는 무성(無性)ㆍ자성이 있음도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님과, 

생겨남의 유생(有生)ㆍ생겨나지 않음의 불생(不生)ㆍ생겨남도 생겨나지 않는 것도 아님과  

소멸의 멸(滅)ㆍ불멸(不滅)ㆍ소멸도 불멸도 아님과, 

영원히 고요한 영정(永定)ㆍ영원히 고요지 않은 불영정(不永定)ㆍ영원히 고요함도 아니고 영원히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님과, 

자성적멸의 성멸(性滅)ㆍ자성적멸이 아닌 불성멸(不性滅)ㆍ자성적멸도 아니고 자성적멸이 아닌 것도 아님과, 

세간ㆍ열반ㆍ세간도 열반도 아닌  역시 그러하나니,

이와 같은 문구의 차별은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뜻의 말씀이니, 이  가지 자성의 문구로써 마땅히 수순해야 하나니, 상주 등의 모든 문구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如諸法所無, 及如見非一, 如是法非法, 不二義所說。

제법이 존재하지 않으나, 지금  종류가 아닌 것과 같이, 즉 법은 실재하지 않으나 무량한 종류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법이고 법이 아닌 것이니,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뜻에서 말하는 바이네.

 

彼一分事故, 亦說名爲事, 二分不名事, 非事眞實說。

  부분의 일분(一分)에 의거함으로써, 역시 존재라고 말하나니, 

 부분의 이분(二分)에서 보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네.

 

如見非如有, 是故說爲見, 如是彼亦見, 是故說爲無。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나, 본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그것은 역시   있으므로,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무(無) 말하는 것이네.


自體自無故, 自事中不住, 取者本亦無, 故說爲無性。

자체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므로, 자체에 머물지 않으며,

취하는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므로,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라 말하네.


無性義故成, 上上依義故, 無生亦不滅, 永寂性滅故。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의 뜻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다음다음의 의지처의이기 때문이네.

생겨남도 없고 역시 소멸함도 없으며, 영원히 고요하여 자성이 적멸한 성멸(性滅)이기 때문이네.


然有四種意趣故,及有四種密語漸次,一切佛語隨順解釋應知。一者法同意趣故,所謂我是無量無邊時,號曰毘婆尸正眞正覺;二者時節意趣,所謂若稱多寶如來名者,卽定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無量壽經說,若有衆生願取無量壽世界卽生爾.

그런데  가지의 취지인 사종의취(四種意趣)와  가지 비밀스런 말인 사종밀어(四種密語)의 순서가 있으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마땅히 수순해서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첫째는 법이 동등한 취지인 법동의취(法同意趣)이니, 이른바 “나는 무량한 옛적에 비바시정진정각(毘婆尸正眞正覺)이라 이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둘째는 시절의 취지인 시절의취(時節意趣)이니, 소위 “만약 다보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이는 결정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또한 '무량수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량수세계를 발원하면  왕생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三者義中閒意趣,如經所說,供養若干如許恒沙等,供養親近已得解大乘義爾;

四者順衆生心意趣,所謂或有衆生讚行布施,彼者復謗毀說。如是布施,如是持戒,及餘者說修事。是以故,說四種意趣。

셋째는 의미 중에서 다른 취지인 의중간의취(義中閒意趣)이니, 경전에서 “조금만 공양해도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친근함과 같으며, 대승법의 의미를 해석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넷째는 중생의 마음에 수순하는 취지인 순중생심의취(順衆生心意趣)이니,  어떤 중생을 위해서 보시를 찬탄하고 다시 비방함과 같으니, 보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지계와 나머지 수행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까닭에  가지 취지의 사종의취(四種意趣)를 말하는 것이다.


四種密語漸次,一者勸發漸次,所謂或聲聞乘,或大乘中衆生法性勝故,順世諦理所說;二者相漸次,隨所法相說中示現;三者對治漸次,隨所說八萬四千衆生行;四者發願漸次,隨所異義言音聲字義餘說隨所。有偈:

 가지 비밀스런 말의 사종밀어(四種密語)의 순서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권하여 일으키는 순서인, 권발점차(勸發漸次)이니, 성문승에서 혹은 대승에서 중생과 법의 자성인 법성(法性)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세속제의 도리에 수순해서 말한 바이며,

둘째는 상의 순서인 상점차(相漸次)이니, 이러함으로써 제법의 상(相)을 나타내 보이며,

셋째는 다스림의 순서인 대치점차(對治漸次)이니, 이곳에서 8만 4천 가지의 중생행을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발원의 순서인 발원점차(發願漸次)이니, 여기에서는 별도의 의미로써 언어ㆍ음성ㆍ문자의 뜻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으니, 


非實而作實, 顚倒中善住, 煩惱善染故, 得無上菩提。

견고하지 않음의 비실(非實)을 견고함의 실(實)로 삼아서 전도됨에  머물며

번뇌에  물들기 때문에 최상의 무상보리를 얻네.


欲解釋大乘經者,彼應以三種相差別故,略作解釋:一者因緣說`二者因緣所生諸法相說`三者以說聞義故說。

대승경전을 해석하려는 이는 마땅히 대략  가지 상(相)의 차이에 의거해서 해석해야 하나니,

첫째는 인연(因緣)을 말하고, 

둘째는 인연에 의해 생겨난법의 상을 말하며, 

셋째는 의미를 말하나니, 들음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是中因緣集說者,如說言習所生法,彼如是還彼報識,順識中迭互緣故生。

 중에서 인연을 모아서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법, 그것은 다시 그것의 보식(報識, 과보식)에 수순하는 순식(順識, 전식)이 다시 서로 조건이 되어 생겨나네”라고 말한 바와 같으며,

순식(順識), 제8 아리야식을 제외한 일곱 가지 식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생기식(生起識)ㆍ전식(轉識)이라고 한다.

 

彼復順識相諸法,同念見識性。然彼憶持相分別相及法體相,是以此示現三種性相成。如說同念見者,彼知三相爾。

 수순하는 순식상(順識相)법은  같이 염식(念識, 유상식有相識, 상분)과 견식(見識, 유견식有見識, 견분) 있는 자성(性)이며, 그것은 생각하여 지니는 억지(憶持) 상이고, 분별의 상이며, 법의 자체인 상인 법체상(法體相)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가지 자성의 삼종성상(三種性相成) 나타내는 것이니,  

 같이 염식(念識, 유상식有相識, 상분)과 견식(見識, 유견식有見識, 견분) 있으니,   가지상(三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云何復彼相解釋分別相者,他性中無,成就性中有,彼二有無。有覺無覺`有見無見,眞實同時,彼他性中,依非衆生分別,衆生成就者,行彼覺故,彼不覺,如說分別,他性中成就,彼處有不覺及覺故。略說彼二邊.

또한  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분별상은 의타성 중에서는 비존재의 무(無)이고, 

성취성은 존재하는 유(有)이니, 그  가지의 유무(有無)와

인식할  있음의 각(覺)과 인식할  없음의 무각(無覺)과 

진실을 보지 못하는 유견(有見)과 진실을 보는 무견(無見)이 동시에 있으니,

 의타성 가운데 중생의 분별성은 존재하지 않으나, 중생의 성취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작용(行)할  그것을 인식(覺)하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각(不覺)이니,

게송에서 “망분별성과 의타성 가운데에 성취성이 있네. 

인식하지 못하는 불각(不覺)함과 인식의 각(覺)이 있기 때문에 간단히   가지 극단의 이변(二邊)을 말한다네”라고  바와 같은 것이다.


所說義解釋,所謂先已說句,餘句示現彼分別,或功德增上故`或義增故。功德增者,所謂說佛功德善覺慧,不二行無相法,究竟佛行行故。得一切佛法,到無障道,不退轉法,無障境界,不思住.

설하여진 내용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먼저 문구(句)를 말하는 것이고, 다음에 나머지 문구로써 분별하여 나타낸 것이며, 혹은 공덕이 매우 뛰어난 때문이고, 혹은 의미가 매우 뛰어난 때문이다.

공덕의 매우 뛰어남이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니, 매우 청정한 깨달음의 선각혜(善覺慧)이고,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 불이행(不二行)이며, 무상법(無相法)이고, 부처님의 행을 궁극적으로 모두 행하는 구경불행행(究竟佛行行)이며, 모든 불법을 증득한 득일체불법(得一切佛法)이고, 장애가 없는 도에 이른 도무장도(到無障道)하신 것이다.

외도 등에 의해 퇴전하지 않는 불퇴전법(不退轉法)으로서 장애가 없는 경계이고, 불사의함에 안주하는 것이다.

ㅡ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 최청정각最淸淨覺) 설한 후에 21가지의 별덕(別德) 들어서 원만함을 나타낸다.


達三世,遍一切世界身,一切法無疑,知一切成就慧無疑,諸法知,無分別知。一切菩薩正受智,不二佛行得最究竟,不離如來解脫智盡,至無邊中佛地,通達法界,最虛空界盡爾。

삼세에 통달하고, 모든 세계에 두루 몸을 나타내는 변일체세계신(遍一切世界身)이며,법에 대해서 의심이 없으며, 일체를 아는 지혜를 성취하셨으며,

제법에 대한 지혜가 의혹이 없는 무의(無疑)이고,분별(無分別)을 아는 것이며, 

모든 보살이 바로 수용하는 지혜인 정수지(正受智)인 것이다. 

 가지가 아닌, 불이(不二)의 부처님의 행으로 최상의 궁극적인 최구경(最究竟)을 증득하였으며, 

여래의 해탈 지혜를 떠나지 않고 다 이루나니, 중간과 이변(二邊) 없는 부처님 지위에 이르러서, 

법계를 통달하며, 최허공계(最虛空界)를 이루어 미래 세상을 다하는 것이다.


善覺佛者,此句餘句所解釋應知。如是善說法體成。善覺慧者,此善覺慧諸佛如來,十九種諸佛功德攝成應知。

매우 청정한 깨달음의 선각(善覺)의 부처님이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문구는 나머지 문구로써 해석되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법의 체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매우 청정한 깨달음의 지혜인 선각혜(善覺慧)란, 부처님 여래의 매우 청정한 깨달음이니, 이것에 19 가지의 불공덕이 포섭되는 것이다.


智中一向無障,無分別功德,事`非事二相眞如最淨,說自然佛所作不休息行功德`法身中身心業無分別功德`一切障對治功德`降伏一切外道功德`世閒生世閒法不能染功德`法住功德,受記功德`一切世界中示現報身應身功德`決疑功德,種種行入功德`未來生法智功德`隨信示現功德`無量身化衆生行功德`同法成波羅蜜功德`異佛世界隨信示功德`三種佛身說法不斷功德,乃至世閒際一切衆生助成一切樂及無量功德,因此說故。

지혜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가 없는 지중일향무장(智中一向無障)이고, 

분별이 없는 무분별공덕(無分別功德)이며, 

존재와 비존재의  가지의 이상(二相)이 없는 진여의 가장 청정함에서 자연스럽게 불사(佛事)를 지으며,

쉬지않고 행하는 공덕이며, 법신의 의지처(身)ㆍ심(心)ㆍ업(業)에 대해서 분별이 없는 무분별공덕(無分別功德),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일체장대치공덕(一切障對治功德),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법에 오염되지 않는 공덕, 정법에 안주하는 법주공덕(法住功德), 수기(授記)하는 공덕, 

일체 세계에서 보신과 응신을 나투는 공덕, 의심을 완전히 끊은 결의공덕(決疑功德),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미래에 법의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믿음을 따라 시현하는 공덕, 

무량신(無量身)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가행 공덕, 평등한 법으로 바라밀을 성취하는 공덕, 

믿음을 따라 다른 불세계를 시현하는 공덕,  가지 불신의 설법이 중단되지 않는 공덕, 

나아가 세간이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도와서 일체의 즐거움을 이루는 공덕, 

다함이 없는 무량(無量)공덕이니, 이로 인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8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復有十種分別:一根本分別,所謂阿犂耶識;二相分別,所謂色等識;三念現相分別,所謂同依眼識等識;

四念異分別,所謂老等`樂受貪等`他所惱時轉變等`趣及欲界等異故;

五念現相異事分別,所謂所說如是等異相彼異相,他所將分別,所謂不聞正法及聞正法者,所有分別.

또한 모든 의미를 포섭하면  가지 분별이 있으니,

첫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소위 아리야식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형상의 분별인 상분변(相分別)이니, 소위 색식(色識) 등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식대상(念)의 현현하는 모습의 분별인 염현상분별(念現相分別)이니, 소위 안식 등이 함께 의지하는 식(識)이며,

넷째는 인식대상(念)이 변이하는 것의 분별인 염이분별(念異分別)이니, 소위 늙음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 등ㆍ 탐욕 등 ㆍ남으로부터의 핍박ㆍ시절의 전변 등ㆍ윤회의 취(趣)ㆍ욕계 등의 변이(變異)를 말하며,

다섯째는 인식대상(念)으로 나타난 모습이 변이한 염현상이사분별(念現相異事分別)이니, 앞에서 말한 변이와 같이,  변이한 이상(異相)을 말하는 것이며, 남이 이끄는 타소장분별(他所將分別)이니, 소위 정법을 듣지 않거나 정법을 들은 이의 분별이다.


六不寂靜思惟,所謂不聞正法者,謂諸外道;七寂靜思惟,所謂聞正法同法者;八妒分別,所謂不正意思量身見,等六十二見,同順彼分別。散分別.

여섯째는 고요하지 않은 불적정사유(不寂靜思惟)이니, 소위 정법을 듣지 않은 모든 외도를 말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고요한 적정사유(寂靜思惟)이니, 소위 정법과 같은 법을 듣는 것을 말하며,

여덟째는 집착의 분별인 투분별(妬分別)이니, 소위 바르지 않은 사량으로서 신견(身見) 등의 62 종의 국집된 삿된 견해에 수순하는 분별이며, 산란된분별(散分別)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남이 이끄는 분별인 타인분별(他引分別) 여섯째로 하여 가지를 들고 있으나, 불타선다 역본에서는 남이 이끄는 분별인 타소장분별(他所將分別) 여섯째로 않고 번호에서 제외되었으며,

현장의 역본의 일곱째를 여섯째로 하고 있으며, 아홉째, 열째 또한 명확하게 하지 .


謂諸菩薩有十種分別,非事相散故`事相散故`正安散故`毀謗散故`一向事散故`異事散故`性散故`隨名義散故,及隨義名散故。此諸十句散事中對治故,說無分別智 一切諸般若波羅蜜中說:如是彼障及對治,具足般若波羅蜜應知。

모든 보살에  가지 산란된 분별이 있으니, 비존재 양상의 비사상산(非事相散)이기 때문이고, 

존재양상의 사상산(事相散)이기 때문이며, 바르게 안립함의 산란인 정안산(正安散)이기 때문이고, 

비방함의 산란인 훼방산(毀謗散)이기 때문이며, 한결같은 성품의 산란인 일향사산(一向事散)이기 때문이고, 

다른 성품의 산란인 이사산(異事散)이기 때문이며, 자성의 산란인 성산(性散)이기 때문이고, 

명칭에 수순하는 대상의 산란인 수명의산(隨名義散)이기 때문이며, 

대상에 수순하는 명칭의 산란인 숭의명산(隨義名散)이기 때문이다. 

  가지 십구(十句) 산란된 성품을 대치하여 다스리기 위해서 무분별지혜를 설하며, 모든 반야바라밀 중에서 설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이와 같은 장애에 대한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게 하는 것이다.


若是傍名義他性相三種性成, 云何三種性無差別不成?

隨彼傍義他性者,非彼妄分別`非成就。隨彼傍義妄分別者,非彼他性`非成就。

隨彼傍名成就者,如是非彼他性`非妄想。

만약 다른 명칭인 방명(傍名)의 의한다면 의타성(의타기성)에 세 가지의 삼종성(三種性) 성립되나, 어찌하여  가지의 삼종성(三種性)의 무차별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다른 의미인 방의(傍義)에 따르면 의타성(의타기성)은 그 망분별성(변계소집성)이 아니고 성취성(원성실성)도 아니니,

 다른 의미인 방의(傍義)에 따르면 그 망분별성(변계소집성)은  의타성이 아니고 성취성이 아니다. 

 다른 명칭인 방명(傍名)에 따르면 성취성(원성실성)은 이와 같이  의타성이 아니고 망분별성 아닌 것이다.


云何復知如他性相,妄分別性事現故,非如是體性爾?

本名離慧故,及自滅因故`多名故`多身相違因故`不定名穢身相違因故。是中有偈:

또한 의타성(의타기성)과 같이 망분별성(변계소집성) 현현할지라도 체성과 같지 않음을 어떻게   있는 것인가?

본명에 지각(慧)이 없어서 스스로의 원인을 멸하는 자멸인(自滅因)이기 때문이고, 

명칭이 많은 다명(多名)이라서 의지처가 많은 다신(多身)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며, 

명칭이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명(不定名)이라서 의지처의 잡염인 예신(穢身)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本名無慧故, 多及不定故, 成彼自多身, 穢身相違故。

본명에 지각이 없는 무혜(無慧)이기 때문이고, 다명(多名)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며,

 자체를 이룸과 의지처가 많은 다신(多身), 의지처의 잡염인 예신(穢身)에 위배되기 때문이네.


覺見諸法事, 及見染淨等, 如幻應當知, 及如虛空等。

제법 자체를 인식하며, 잡염과 청정 등을 보나니, 

마땅히 알지니, 요술과 같을 뿐만 아니라, 허공 등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復以何義故,有如是所說事他性相一切事不成?彼無已成就性及無故,如是一切事不成。

他性及成就性無故,染淨無事患,應見染淨,是故非一切無。是中有偈:

또한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한 의타성의 상(相) 일체가 전혀 비존재가 아닌 것인가? 

그것이 비존재이면 성취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의타성과 성취성이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과실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나, 잡염과 청정을 보기 때문에 일체 모두가 비존재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他性旣無, 成就一切, 無事常時, 於諸染淨。

의타성이 비존재이면, 성취성도 비존재이네.

일체가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도 항상 없는 것이네.


所有此諸佛如來大乘,方廣中說,彼說中,云何妄分別性應知? 無傍名義說可知。他性相云何知?幻`焰`夢`鏡像`光明`響`水中月`應化等諸喩應知。成就性云何知?有四種淨法。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대승의 방광(方廣)의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망분별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명칭과 대상이 비존재라고 아는 것이며,

의타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비유하자면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거울의 영상ㆍ그림자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와 같은 것이며,

성취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가지의 청정법이 있으니, 


說中知四種淨法者,性淨故,所謂眞如`空`實際`無相`眞實義及法界是;離垢淨,所謂如是彼離一切障垢;彼得行淨,所謂一切菩提分法及波羅蜜等;彼生因念淨,所謂說大乘法。如是彼淨因故,非妄想,淨法界因氣故,非他性。如是此諸四法攝,成一切諸淨法。於中有偈:

 가지의 청정법이란,

첫째는 자성청정한 성정(性淨)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진여ㆍ공ㆍ실제ㆍ무상(無相)ㆍ진실의(眞實義)ㆍ법계이며,

둘째는 번뇌를 여읜 청정함의 이구정(離垢淨)이니, 이와 같이 모든 장애의 번뇌를 여읜 것이며,

셋째는 그것을 증득한 청정한 수행의정(行淨)이니, 이른바 모든 보리분법과 바라밀 등이며,

넷째는 그것이 생기하는 원인의 청정한 인식대상의 인염정(因念淨)이니, 이른바 대승을 말하는 교법이다. 

이와 같이  청정한 원인 때문에 허망한 망상(妄想)이 아니며, 청정한 법계를 원인으로 하는 성품이므로 의타성이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은  가지의 법에 일체의 청정법이 포섭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幻等說故生, 妄計無有說, 於諸四淨中, 說爲眞實淨。

요술의 환(幻) 등은 생겨남을 말하는 것이고, 허망된 계탁의 망계(妄計)는 비존재의 무유(無有)라 하네.

 가지 청정 중에서는 진실의 청정을 말하네.


淨性離垢行念故,彼淨諸攝四種義故。

자성청정의 성정(性淨), 번뇌를 여읜 청정함의 이구정(離垢淨), 수행의 청정인 행정(行淨), 인식대상의 청정인 인염정(因念淨) 때문이며, 그러한 청정 모두는  가지의 의미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復以何相故,他性相如所說幻等喩中明?餘者於他性相中,迴妄顚倒取意故。云何復餘者於他性相中,顚倒疑意成?如是餘者作是意:云何無此義現境界成?爲彼除疑迴義,故說爲如幻。云何無義諸心,心數順義成?迴疑義,說如焰喩。云何無此無義,而受愛不愛事?迴彼疑義故,說如夢。

또한 어떤 상(相) 때문에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타성을 요술 등의 비유로 밝히는 것인가? 

다른 이가 의타성에 대해서 갖는 허망되고 전도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이며,

또한 다른 이들이 어떻게 의타성에 대해서 전도된 의심을 갖는 것인가? 다른 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의 비유를 말하는 것이며,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수순하는 의미가 성립되는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하였다.


云何無此義而有淨不淨業`愛不愛果`順不順事?迴彼疑故,說如鏡像。云何無義,而有種種識順事?迴彼疑義故,說如光。云何無此義,而有種種假名,語言順事?迴彼疑義故,說如響。云何無此義,實能取三昧境界順事?迴彼疑意義故,說如水中月。云何無此義,而諸菩薩故,取意不顚倒?作衆生益義故受生?迴彼疑意義故,如應化事。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의 업과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못함의 결과가 따르고, 따르지 않음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의 영상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갖가지 식이 수순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갖가지 명칭과 언어를 가립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삼매의 경계를 실제로 능히 인식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모든 보살은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애써 하기 위해서 생을 받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化)의 비유를 말하였다.


有何義故,如『梵王經』中說:我不見世閒`不證涅槃。他相性中妄分別,及成就性因故,說世閒及涅槃事無異事故。如是彼他性相妄分別分故,說爲世閒,成就分故,說爲涅槃。

무슨 의미가 있기에 '범왕경(梵王經)'에서 “나는 세간을 보지 않고 열반을 증득하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 가운데 망분별성과 성취성의 원인(因)이 있으므로 세간과 열반이 차이가 없는 무이사(無異事)라고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의타성은 망분별성 때문에 세간을 말하고, 성취성 때문에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如佛阿毘曇中說:有三法,是染分`淨分`彼二分。

有何義故說?他性中妄想性是煩惱分, 成就性是淨分,還彼他性彼二分,以此義故說。

부처님께서 '대승아비담경'에서 “세 가지의 법이 있으니, 잡염분과 청정분과 그 이분(二分)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고 하셨으니,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 중에서 망분별성은 번뇌분이고, 성취성은 청정분이며, 다시 의타성은   부분의 이분(二分)이니, 이러한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此義中何者說? 金藏土示現?所謂如金藏土中,有三事可見:一地塵`二土`三金。是中有地塵故,見土及見有金,若入火時不見土唯見金。地塵者,見土時非正見,見金時非如實見,是故地塵有二分。
就性事故見,妄分別性事故不見。是故所有妄分別識他性相二分成,如金藏泥地塵爾。

이러한 뜻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 것인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의 비유로 나타내나니, 마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서 세 가지 사물을 볼 수 있음과 같으니,

첫째는 지진(地塵)이고, 둘째는 흙이며, 셋째는 금이다.

이 중에서 지진이 있기 때문에 흙을 보고 금을 보게 되며, 만약 이것을 불에 넣으면 흙은 볼 수 없으나, 다만 금만 볼 수 있으니, 지진을 흙으로 본다면,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고, 금으로 보는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지진에 이 이분(二分)이 있는 것이다.

 

如是此無分別智火觸彼識已,彼識虛妄分別性事見,成就性事故不見。無分別智火觸彼識已,彼識實成

이와 같아서 이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識)에 닿지 않으면 그 식의 망분별성이 나타나고 성취성이 현현하지 않으나,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에 닿으면, 그 식의 진실된 성취성이 현현하고 망분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망분별식인 의타성에 이분(二分)이 있는 것이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있는 지진과 같다.

 

如來或說一切法常`或說一切法無常`或說非常非無常。以何意故說常?他性相成就,分別故說常`妄分別故非常`彼二分故非常非無常,以是意故說。

여래께서 혹은 일체법이 상주한다고 말씀하시고, 혹은 일체법이 무상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일체법이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떠한 뜻으로 상주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은 성취분에 의해서는 상주함이고, 망분별성에 의해서는 무상한 것이며, 그 두 부분에 의거해서는 상주도 무상도 아닌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7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唯彼意識,種種行故得彼名,亦如身口等。餘者行一切身中,如畫師二種現相行:唯彼塵現相故,及分別現相故。一切處觸現相故,行色塵身依故,彼意識彼餘色相身依故。
是中有偈:

오직  의식(意識)이 여러 가지로 전전함으로써 그들의 명칭을 얻나니, 역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등으로 이름하는 것와 같으며, 

모든 의지처(身)을 전전함에 있어서 마치 화사(畫師, 화가)와 같이 견분(見分, 주관)과 상분(相分, 객관)의 두 가지가 갖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전전하는 것이니, 오직  대상(塵)이 나타내는 상의 진현상(塵現相) 분별현상(分別現相)일 뿐인 것이다. 

또한 일체의 모든 곳에서도 접촉하는 촉현상(觸現相)이 전전하나니, 색계에서  의식은 몸(身) 의지하기 때문이며,  나머지 감각기관이 몸(身)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遠至獨行故, 無身窟所依, 能調不調心, 我說爲淨行。

멀리 작용하거나 홀로 작용하는 까닭에, 몸이 없는 무신(無身)의 동굴을 의지처로 삼으니, 

나는 조복하기 어려운 마음을 능히 조복하는 것을 청정한행(淨行)이라 말한다네.


如說此諸五根,意識境界緣受成。然是彼者,意是依止爾。復如說十二入經中,六種識種識是意入爾。

또한 경전에서 바와 같이  5근(根)의 경계를 의식(意識)이 반연하여 수용하나니, 의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며,

또한 경전에서 바와 같이 12입설(入說)에서는식(六識)을 의근의 포섭처인 의입(意入)이라 하였다.


若有阿犂耶識識塵識分別安是中, 諸餘一切識彼念想識, 唯意識識同身彼見應知,

彼如是唯念想諸識彼見生因故, 如塵現相見彼生同依作事成。如是此諸識唯識住事成。

만약 아리야식의 식을 대상의 식인 진식(塵識)으로 분별하여 안립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은  상분의 식인 염상식(念相識이나, 오직 의식(意識)의 식과 의지처는  견분의 식이며, 

이와 같은 그 상분(객관)의 염상식의 제식(諸識)이 견분(주관)의 색이 생기게 하는 생인(生因)인 까닭에 

대상(塵)을 현상으로 나타 낼 때,  견분의 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식은 유식에 머무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云何有見塵而說無有義成?如佛所說: 菩薩成就四法,一切諸識解通無義事:

대상(塵)을   있음에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보살이 사법(四法) 성취하면, 일체가 모두 식으로서, 대상의 비존재성에 통달할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ㅡ네 가지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 도리를 깨달을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相違識相智故,亦如餓鬼`畜生`人及諸天等,同事中見旣別。

첫째는, 다른 자의 식상(識相)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이기 때문이니, 역시 아귀ㆍ축생ㆍ사람  여러 하늘인 제천(諸天)과 같이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보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 같은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하늘세계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또는 파도로 보는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러한 일은 있을  없는 것이다.

 

不念見覺識故,亦如過去`未來夢現相念故。

둘째는, 대상이 없음에도 인식하는 불념견각식(不念見覺識)하기 때문이니, 과거ㆍ미래ㆍ꿈에서 나타난 모습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불념견각식(不念見覺識),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加意中間顚倒同順智故,所謂有塵念,彼念識不顚倒,應得不加眞智。

셋째는, 노력하는 중간과 뒤바뀜의 전도(顚倒)가 똑같이 따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가의중간전도동순지(加意中間顚倒同順智)이기 때문이니, 어떤 대상 중에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마땅히 전도됨이 없음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진실한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의중간전도동순지(加意中間顚倒同順智),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이나 정진을 하지 않고서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及隨順三種智知故.

넷째는,  가지 지혜에 수순함을 아는 수순삼종지(隨順三種智知)이 때문이다.

수순삼종지(隨順三種智知), 다음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如是諸菩薩及得禪定者,得心自在憶持力故,現如是事;及得舍摩他,諸行人觀法順故,唯憶念現見故;

及得無分別智,彼處住已現一切義。如是此三種智隨順義故,彼義本四諸相釋成無有義。

이와 같이 보살로서 선정을 얻고 마음의 자재를 얻은 이는 생각하여 지니는 힘에 의해 이와 같이 사물을 현현시키기 때문이며, 

사마타(舍摩他, 지止ㆍ정定)를 얻어서 법의 관찰을 수행하는 이는 오직 생각하면  대상이 현현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혜를 얻은 이는 그곳에 안주하여 일체를 나타내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에 수순하 때문이며,

그러한 의미의  가지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유(無有)의 뜻이 성립되는 것이다.

 

若是唯識義現見依者,他性相云何?他性以何義故,說爲他性?自習種子生故,緣他性 生已剎那後自不住,有力故說他性。

만약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이 대상을 사현(似現)하는 의지처라면 의타성이 어떻게 의타기를 이루며?

어떠한 의미로써 의타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스스로의 훈습인 자습(自習)의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고, 다른 것을 반연하는 성품인 연타성(緣他性)이며,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으며,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 하는 것이다.

현장의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작용의 힘이 없고 자연히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는, 생찰나후무유공능자연주고 명의타기(生刹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名依他起)”라 하였다.

불타선다의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고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 하는, 생이찰나후자주유력고설타성(生已刹那後自住有力故說他性)이 하여 현장 역본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彼是妄想分別,非性非所依,未曾有塵見故。彼云何妄分別?以何義故,彼名爲妄分別?無量相妄分別,顚倒相生故。妄分別者,無自相,唯妄見故,說爲妄相。

 허망된 생각의 분별이 자성(의타성)을 의지처로 하여 일찍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대상으로 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허망되게 분별하는 것이며? 무슨 까닭에 그것을 허망된 분별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무량한 인식작용인 상(相)은 허망한 분별의 전도된 상(相)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허망된 분별이라고 이름하며,

자상(自相)은 존재하지 않으나, 오직 허망된 망견(妄見)이기 때문에 허망된 망상(妄相)이라 말하는 것이다.


若是成就相者,彼永無自性相,彼云何成就?以何義故,說爲成就?不以義故,說爲成就,緣淨念一切善根妙義因故,亦是上義故,名爲成就。

만약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이 영원히 분별성의 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성취성을 이루는 것이며?

무슨 인연으로 성취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변이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성취성을 이루고, 청정한 정념(淨念)을 반연하여 모든 선근의 승묘함의 원인인 묘의인(妙義因)이기 때문이며, 또한 최상의 의미이기 때문에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復有分別及無分別,說分別性。是中何者分別?何等分別?何等分別性?意識分別,以能分別。然彼自語言習種子及一切識語言習種子故,是無量諸相分別故,行一切處分別,妄想分別故,說爲分別。

또한 분별과 분별되어지는 것이 있어서 분별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함에서 무엇이 분별이며? 무엇이 분별되어지는 것이며? 무엇이 분별성인 것인가? 

의식(意識)이 분별이니, 능히 분별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신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고, 모든 식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며, 그것은 무량한 인식작용으로 제상(諸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모든 곳을 전전하면서 분별하고 허망된 망상(妄想)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이라 말하는 것이다.


復他性妄想念,隨所有性。他性妄想者,是彼處妄想自性。
以何相?以何義故?先已釋。

云何復妄分別?以何分別?以何念?以何念取?以何慢?以何假名?以何安義名?

以念故,他性中彼念取見,彼慢分別起口業。見等四種世閒行故,非有義而言有安故,分別妄想。

또한 의타성(成就相, 원성실상)을 허망된 생각의 망상(妄想)이라 하나니, 반연된 모든 대상의 자성을 따른 타성(他性)의 허망된 망상(妄想)이고, 그 곳이 망상(妄想)의 자성인 것이다. 

어떠한 상(相)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 때문인가? 이것은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또한 무엇이 허망되게 분별하는 것이며? 무엇을 분별하는 것인가? 

어떠한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을 취하는 것인가? 

무엇에 의지해서 집착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지해서 명칭을 가립(假立)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지해서 대상과 명칭을 안립하는 것인가?

생각(念) 때문에 타성(他性) 중에서  생각(念)으로써 견해를 취하며, 그로 인하여 분별하여 구업을 일으키며, 

보는  등의  가지 세간의  때문에 비존재인 비유(非有)에 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여 안립한 까닭에 분별된 망상(妄想)을 하는 것이다.


此諸三性,爲同行? 爲別行? 爲別不別? 應說傍義故,他性相,他性傍義故。彼亦是妄分別傍義故,彼亦是成就。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의 이러한  가지 자성은 같이 작용하는 것인가? 르게 작용하는 별행(別行)인 것인가?

다르게도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별부별(別不別)인 것인가?

다른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은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을 이루고,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허망된 분별성의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을 이루며,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을 이루는 것이다.

 

有何傍名義?是以他性?他性習種子,生他性因故。有何傍名義?以是彼如是妄分別,及妄分別, 及諸分別因故。有何義故,隨彼如是妄分別, 如所分別,如是彼永無義故。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이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 이루는 것인가? 

타성(他性)의 훈습의 종자가 의타성의 원인을 일으키는 원인(因)이기 때문이며,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그것이 이처럼 허망된 분별성의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을 이루는 것인가? 

이는 그것의 그러한 여시망분별(如是妄分別)과 망분별(妄分別)과 모든 분별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니,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그것을 따라와 같은 여시망분별(如是妄分別)을 하나, 그 분별의 대상과 같이 그 망분별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즉 뜻이 없는 영무의(永無義)이기 때문이다.

 

有幾種他相?略有二種:一薰種子他相`二染淨性不成他相。如是此二種他相故,說爲他相。

妄分別性亦有二種:一者性分別`二者勝分別故。以爲分別,成就性,亦有二種:一者性成就故`二者淨成就故。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에 몇 가지가 있는 것인가? 의타상에 대략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훈습된 종자의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이고, 

둘째는 잡염과 청정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이니, 

이와 같이, 이러한  가지의 의타상 때문에 의타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에도 역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분별인 성분별(性分別)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차별의 분별인 승분별(勝分別)이기 때문이니, 이로 인하여 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성취성의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에도 역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성취인 성성취(性成就)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청정의 성취인 정성취(淨成就)이기 때문이다.


分別復有四種:一者性分別`二勝分別`三覺分別`四不覺分別。覺分別者,解義事善巧故。不覺分別者,不解義事不善巧故。

분별(分別)에 다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분별인 성분별(性分別)이고, 둘째는 차별의 분별인 승분별(勝分別)이며, 

셋째는 각분별(覺分別)이고, 넷째는 불각분별(不覺分別)이니,  

각분별(覺分別)은 의미를 훌륭하게 이해하기 때문이고, 불각의 분별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復有五種:一名所依義分別,所謂此名有是義爾;二義所依名性分別,所謂此義有此名爾;三名依名性分別者,所謂不決定義名分別故;四所依義性分別者,未決定名義分別故。彼二依彼分別,所謂此義,如是身如是名爾,攝一切義故。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에 의지해서 대상(義)을 분별하는, 명소의분별(名所依義分別)이니, 이러한 명칭에 이러한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하는, 의소의명성분별(義所依名性分別)이니, 이러한 대상에 이러한 명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명칭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하는, 명의명성분별(名依名性分別)이니, 결정하지 않은 대상의 명칭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대상의 자성을 분별하는 소의의성분별(所依義性分別)이니,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명칭의 대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지해서 두 가지의 자성을 분별하는, 이의피분별(二依彼分別)이니, 이러한 것은 이러한 명칭이며, 이와 같이 모든 뜻을 포섭한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6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復喩相幻`焰`夢`患目等。彼阿犂耶識彼時無故,虛妄分別種子故,相事不成。彼復同相別相,具有縛者同相,世閒離欲者壞相

學者聲聞及諸菩薩一義一處除相,阿羅漢`辟支佛`諸如來煩惱障具除相`煩惱障智障及具除相。如順彼無漸次煩惱滅事。

또한 비유의 유상(喩相)이 있으니, 요술(幻)ㆍ불꽃(焰)ㆍ꿈(夢)ㆍ안질 걸린 눈의 환목(患目) 등으로,  

 아리야식이 없으면 허망된 분별의 종자 때문에 자체를 반연함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공통된 동상(同相)과 개별적인 별상(別相)이 있으니,

속박을 갖추는 자는 공통된 동상(同相)이고, 세간의 욕망을 여의는 자는 멸하는 괴상(壞相)이다. 

유학의 성문과 보살은 일부분의 의미와  곳에서 제거하는 제상(除相)이며,

아라한ㆍ벽지불과 모든 여래는 번뇌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구제상(具除相) 번뇌장ㆍ지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구제상(具除相)이다.

수순하는 바와 같이, 이 아리야식이 없다면, 점차 번뇌가 소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以何義故,善不善諸法報中,不定無記報?如是無記,善不善不相違。善不善事迭互相違,善不善事煩惱轉事不成。是故唯不定無記是報識。已說智依.

선과 불선의법은 어떻게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 있는가? 

부정무기(不定無記, 무부무기 無覆無記)의 과보이니, 이와 같이 무기는 선불선(善不善)과 서로 위배되지 않으나,  

선과 불선은 서로 위배되는 것이므로,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번뇌가 전전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보식(報識, 과보식) 오직 부정무기(무부무기)인 것이다. 

이상으로 지혜의 의지처인 지의(智依)를 설명하였다.


智相復云何知?彼略有三種:一他性相`二妄想分別相`三成就相。

또한 지혜의 양상인 지상(智相)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타성상(他性相), 즉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이고, 

둘째는 망령된 생각의 분별상(分別相, 변계소집상)이며, 

셋째는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이다.

ㅡ지혜의 양상인 지상(智相), 현상계와 본체계의 전개양상을 의타상ㆍ분별상ㆍ성취상의 가지인 삼자성(三自性)으 분류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현장의 역본은 의타기상(依他起相)ㆍ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ㆍ원성실상(圓成實相)으로 되어 있다.


是中何者他性相?所有阿犂耶識種子中,虛妄分別所攝識。彼復何等?身與受用識`彼所受用識`受用識`時識`數識`方處差別假意識`自他分別善道惡道生滅識。

 중에서 무엇이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인가? 

아리야식의 종자에 있어서 허망된 분별에 포섭되는 식이니, 다시 그것이 무엇인가? 

안근(眼根)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신식(身識)

번뇌에 오염된 식 여식(與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신자식 身者識)

의근(意根)인 수용식(受用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수자식 受者識), 

색식(色識) 등의 6식(識), 즉 그 수용되는 식인 소수용식(所受用識)과 

안식 등 6식, 즉 수용하는 수용식(受用識), 

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시식(時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세식世識),

하나 내지 아승기수(阿僧祇數)의 수식(數識),

자연계인 기세간(器世間)을 말하는 방처식(方處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처식處識),

감각ㆍ지각 작용의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모든 언설에 의한 것이라는 차별가의식(差別假意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언설식 言說識),

자신과 타신(他身)이 의지하는 차별식의 자타분별식(自他分別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

여러 종류의 생사의 차별인 차별선도악도생멸식(善道惡道生滅識)이다.

ㅡ소수용식(所受用識)을 현장의 역본에서는 소수식(所受識), 진제의 역본에서는 응수식(應受識)이라 하였.

ㅡ수용식(受用識)을 현장의 역본에서는 능수식(能受識), 진제의 역본에서는 정수식(正受識)이라 하였.

ㅡ차별선도악도생멸식(善道惡道生滅識)을 현장의 역본에서는 선취악취(善趣惡趣) 생사식(生死識), 진제의 역본에서는 선악양도차별식(善惡兩道差別識)이라 하였.


是中所有身與受用識及彼所用識,及受識`所有時`數`分別假識者,彼語言習種子因生故。所有自他分別識,彼身見習種子因故。所有善道惡道生死者,彼爲因緣習種子因故。

 중에서 신식(身識)ㆍ여식(與識)ㆍ수용식(受用識)ㆍ소수용식(所受用識)ㆍ수용하는 수용식(受用識)ㆍ시식(時識)ㆍ수식(數識)ㆍ방처식(方處識)ㆍ차별가의식(差別假意識)은 언어훈습의 종자로 인하여 생기하며,

자타분별식(自他分別識)은 신견훈습의 종자에 의해서 생기하고, 

선도악도생멸식(善道惡道生滅識)은 인연훈습의 종자에 의해서 생기한다.


此諸識,一切塵一切道煩惱所攝。說他性相者,虛妄分別現見成,此別現見成。此諸識中,所有虛妄分別所攝唯識事,非有妄,取義依見,此是他性相。

 모든 식으로 인하여 모든 대상과 모든 윤회세계의 번뇌에 포섭되는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의 허망분별이 현현할  있으며, 이 모든 식은 허망된 분별에 포섭되는 것으로 유식의 성품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허망되게 취한 대상이 현현하는 의지처이니, 이것이 의타상(依他相)인 것이다.

 

의타상(依他相)은 현장의 역본은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의타기상(paratantra-svabhāva)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의타기(依他起)의 속성을 지니는 법의 양상이다.

그것은 일체법의 연생(緣生)의 자성,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며, 의타기상은 변계소집상처럼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소생법이므로 상주실유(常住實有)가 아니고 세속제(世俗諦)에서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의타기상은 인연소생법이므로 5위100법(五位百法) 가운데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위(位) 94가지 법이 포섭되지만, 식일원론의 입장인 유식학에서 의타기상은 결국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是中何者妄分別相?若非有塵,唯彼識作塵現取故。

 중에서 무엇이 허망된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인가?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나, 오직  식만이 존재하여서 대상의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망분별상(妄分別相), 현장 역본은 변계소집상이며, 변계소집상(parikalpita-svabhāva)에서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하는 주변계도(周遍計度)의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계탁함으로써 잘못 보이는 집착된 대상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미혹의 근원을 특히 명칭이나 언설에서 찾는 것으로, 변계소집상은 명칭에 의해 가정적으로 안립된 자성차별이다. 그것은 허망분별에 의해 실체, 즉 실아실법(實我實法)으로 착각되고 집착된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인 가법(假法)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범부들은 미혹하여 허망된 견해를 내어서 마음 밖에 실법(實法)이 존재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한다.

변계소집상은 범부들의 허망된 견해에 의해 인연소생의 가아가법(假我假法) 위에 오인되어진 실아실법에 대한 미혹된 집착으로, 공허한 환상과 같은 것이라서 체성(體性)이 전혀 없다.


是中何者成就相?若還彼他性相中,微塵相永無有事。

 중에서 무엇이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인가?  의타상 가운데에서 대상의 상(相)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성품이다.

 

성취상(成就相), 현장 역본은 원성실상(圓成實相)이며, 원성실상(pariniṣpanna-svabhāva)은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성품의 원만성취진실성(圓滿成就眞實性)의 법상이다.

현상계의 모든 법의 본체인 진여이며, 진여는 모든 법에 두루하고(圓),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으며(成),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된 법이 아닌 실(實)이며,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이다.


是中身與受用識等六內,眼等塵應知。彼所受用識者,六外塵色等應知。彼能受用識者,六種眼識等塵 應知。此諸識,餘識差別應知。復此諸識唯識無義故.

마땅히 알지니,  중에서 신식ㆍ여식ㆍ수용식 등은 안근 등의 여섯 가지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수용되는 식은 색경(色境) 등의 여섯 가지이며,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능히 수용하는 식은 안식  여섯 가지이며,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식은 나머지, 즉 여식(餘識)의 차별이며,

또한  모든 식은 오직 식만 있을 뿐인 유식(唯識)으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餘處有何見?夢等見應知,所謂夢中,離塵唯識。如是種種色聲香味觸`屋宅林地風諸山塵,現相事故見,然彼處無塵義。如是見者,一切唯識,隨義通達應知。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꿈 등으로 나타내나니, 이른바 꿈속에서는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갖가지 빛깔과 형체의 색(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ㆍ옥택(屋宅, 집)ㆍ숲(林)ㆍ땅(地)ㆍ산(山) 등의 대상으로 사현(似現)하지만, 그곳에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타내는 보이는 모든 것은 오직 식인 유식(唯識)이니, 뜻에 수순해서 통달해야 하는 것이다.

 

言等者,幻`焰`鹿渴`患目等應知。然彼如夢覺者`一切亦如是識。何以故?如夢中唯識意生,如是彼處亦不行。行眞實知覺已,故行眞實。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요술ㆍ아지랑이ㆍ사슴의 목마름, 즉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ㆍ안질 걸린  등으로한다. 

그러나, 꿈 속에 있을 때, 어느 곳에서나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꿈에서 깨어나서는 마치 꿈에서는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깨닫는 것과 같이, 그렇게 전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진실한 지혜를 깨달으면 진실이 전전하는 것이다.

 

未覺者唯識事,云何得知?從阿含及解釋順義中,是『中阿含』如『佛十地經』所說,三界唯心作。

아직 깨닫지 못한 이가 유식성을 어떻게   있는 것인가? 

경전, 아함(阿含)의 가르침과 해석에 수순하는 의미 때문이니, 여기에서 경전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십지경'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이 짓는다는 삼계유심작(三界唯心作)”이라고 말씀한 바와 같으며, 

ㅡ교증(敎證) 이증(理證) 말한다.


『相續解脫經』中,
彌勒菩薩問佛言: 世尊!所有彼三昧境界中見像,彼爲於心異`爲不異?’

佛言:彌勒!不異。何以故?彼念唯識。所明識我說。

世尊!若是彼三昧境界形像心中不異者,云何以彼心而取彼心?

또한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으니,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삼매의 경계에서 보는 영상, 그것은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르지 않소. 무슨 까닭에서인가?  인식대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니, 나는 식이 나타난 바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삼매 경계의 형상이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까?’


佛言:彌勒!無有法而能取法,然彼心如是生,以如是生故,如是見。譬如緣像故,唯見像,而言我見像。以是義,中閒不離彼像,中閒像相似見。如是生彼心,如是中閒而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어느 법도 능히 취할  있는 법은 없느니라. 

그러나  마음이 이와 같이 일어나면  이와 같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영상(像)을 반연함으로써, 오직 영상을 보고 내가 영상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영상을 떠나서는 영상의 모습이 사현함이 보이지 않는 것이니,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이와 같으며, 본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如是此阿含將證成,如是入定心時,隨所靑等,知所有見像,還見彼心離塵靑等。如是順釋已,菩薩於一切識中如是測量取唯識,中無彼靑等憶念持識前已,彼念所見聞思修,亦隨所憶事識,彼亦念過去故。彼現相唯識,得以此喩證故。菩薩雖眞智未覺已,應思量唯覺事。

 아함의 가르침에 의해서 논리의 증명이 성립되나니, 이와 같이 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이 보는 바를 따라 시체의 푸르딩딩하게 청어(靑瘀)한 것 등의 모든 영상을 보는 것이나, 다만  마음을 보는 것일 뿐이니, 

이렇게 수순하는 해석에 의해서 보살은 모든 식에 대해서 이와 같이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경계가 없음을 미루어 알아야 하며, 

또한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 등은 생각하여 지니는 억념지식(憶念持識)이 아닌 것이니, 현전에  인식대상이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마음이 보고 듣고 사유하고 닦아서 이룬 것 역시도 생각하는 바를 따라 지니는 수소억사식(隨所憶事識)이니, 그것 역시 과거를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난 영상은 오직 식(識)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비유로써 증명을 삼기 때문에 보살은 비록 진실한 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마땅히 유식의 도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隨此如夢說種種諸識,彼識順成唯識。眼識等諸識,眼等諸識復有諸色,云何得知唯識事?彼亦有阿含及順釋,如前說。若是唯彼諸識者,何故色事 及現見相事久住體?行顚倒等煩惱染處因故。餘時非塵,爲塵妄不成。旣無彼事,煩惱障`智障染事不成。彼旣無淨事不成,是故如是彼順義成。
是中有偈:

갖가지의 모든 식은 꿈과 같다고 말하나니, 그 식(識)은 수순하여 유식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안식 등의 모든 식에는 이미 물질(色)이 있거늘, 어떻게 오직 식만이라는 유식사(唯識事)을 알  있는 것인가? 그것도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아함의 가르침과 해석에 수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식이 오직 유식(唯識)이라면, 무슨 까닭에 물질의 속성과 오랫동안 머무르는 주체로 보이는 것으로 현현하는 것인가? 전도 등의 번뇌의 잡염처(雜染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시기에 대상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삼는 허망됨이 성립되지 않으며,

그것이 없다면 번뇌장과 지장(智章)의 잡염도 성립되지 않으며,

이미 그것이 없는 것이므로 청정법도 성립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그것은 이렇게 수순하는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妄念及妄想, 說爲諸色識, 及無非色識, 有彼非餘者。

허망된 인식의 망상(妄想)과 허망된 생각의 망념(妄念)을 모든 물질인 식(色識)과

물질이 아닌 비색식(非色識)이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도 없다네.


何故時等種種如說者行?無時世閒流不絕故`無量衆生界因故`無量佛世界因故`無量所作事迭互假名分別因故`無量攝取受用差別因故。無量愛不愛業果報受用差別因故`無量受生死差別因故。

무슨 까닭에 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시식(時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세식世識) 등의 갖가지 식은 앞에서 말 것과 같이 작용하는 것인가? 

무시이래로 세간이 유전하여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고, 무량한 중생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무량한 불세계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지어지는 소작(所作)의 많은 일들이 서로 가명(假名)으로 분별하는 분별인(分別因)이기 때문이고, 

무량하게 섭취하고 수용하는 차별하는 차별인(差別因)이기 때문이며,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업의 과보의 수용하는 차별인(差別因)이 무량하기 때문이며,

무량하게 생사를 받는 차별인(差別因)이기 때문이다.

 

云何復此諸識唯識作事成?略說有三種相:一者但彼無義因故`二事同念見識因故`種種事畫師所生因故。如是彼一切諸識無塵故,唯如是同見相。眼識等色等念故,及彼識見乃至身識見唯意識。一切眼等法盡識,同念意識識同見分別故,於意識及一切識,生現相故。
是中有偈:

또한 어떻게 이 모든 식이 유식(唯識)의 성품을 이루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의 상(相)이 있으니,

첫째는 다만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인(無義因)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두 가지 성품에 의거하는 것이니,염식(念識, 유상식有相識, 상분)과 견식(見識, 유견식有見識, 견분)이 함께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갖가지 성품에 의거하는 것이니, 화사(畫師, 화가)가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모든 식은 대상, 즉 진(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식(唯識)으로, 이와 같이 견분(見分, 주관)과 상분(相分, 객관)과 함께하는 것이다. 

안식 등은 색식(色識) 등으로써 상분(주관)을 삼기 때문이고, 그 식을 견분(객관)으로 삼으며, 나아가 신식(身識)으로써 견분(주관)을 삼으며,

오직 의식(意識)은 안식 등과 법식의 모든 식으로써 색등념(色等念, 상분)으로 삼고, 의식의 식으로써 견분(객관)으로 삼으니, 의식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식의 상(相)으로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ㅡ염식(念識, 유상식有相識)과 견식(見識, 유견식有見識), 현장의 역본에서는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인 인식상황 속에서 식은 주관적인 식과 객관적인 식으로 이분됨으로써 인식작용이 이루어진다.

유상식은 객관적인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으로 현현한 식, 즉 상분(相分)이고,

유견식은 주관적인 능연식(能緣識), 즉 견분(見分)을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唯彼二種事行者入意識唯入彼心已彼力所成此。

유식(唯識)과   가지의 성품에 관행자의 의지가 들어가나니, 

오직  마음을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세력이 이것을 이루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5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彼所有彼聞習,彼爲是阿犂耶識性`爲不?若是阿犂耶識性者,是中云何彼對治種子成?若是非如是性者,是以彼聞習種子有何依身可見?

 모든 문훈습은 아리야식의 자성인가? 자성이 아닌 것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자성이라면,  중에서 어떻게  다스림의 대치종자(對治種子) 이루어지겠는가? 

만약 이와 같은 자성이 아니라면, 그 문훈습의 종자는 어떠한 의지처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諸佛得菩提已,所有彼聞習,隨心身現,彼共同事,報識中行亦如乳水,然非彼阿犂耶識,彼對治種子故。是中依微習故,生中習,依中習故,上習生,多以聞思修順義故。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보리(菩提)를 증득하심에 이르기까지,  문훈습은 몸과 마음의 심신(心身)을 좇아서  공통된 성품의 공동사(共同事)를 나타내고, 보식(報識, 과보식) 중에서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문훈습(聞熏習)은 아리야식이 아닌, 그 다스림의 대치종자(對治種子)이기 때문이며,  

 중에서 미약한 훈습의 미습(微習)에 의지해서 중품의 훈습인 중습(中習)이 생겨나게 되고, 중품의 훈습인 중습(中習)에 의지해서 상품의 훈습인 상습(上習)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니,

많이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에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然彼聞思修種子,雖微中上,然是法身種子,應知阿犂耶識相違,非阿犂耶識所攝,出世閒善淨法界因氣事故世閒,及出世閒心作種子。

또한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 종자의 미약함ㆍ중품ㆍ상품은 법신의 종자로서 아리야식과 서로 다른 것으로, 아리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세간의 매우 청정한 법계를 원인으로 하는 기운의 성품(事)이기 때문에, 세간이지만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의 종자인 것이다.


然彼未得出世閒心時,現氣煩惱對治`隨惡道對治,消滅作一切惡對治,隨順親近諸佛菩薩。世閒亦諸新學者法身所攝,應知諸菩薩;解脫身所攝,聲聞`緣覺。彼阿犂耶識,法`解脫身所攝。

또한  출세간의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기운을 나타내서 번뇌를 다스리고, 괴로움의 세계를 다스리며, 모든 악업을 소멸하여 다스리며, 

또한 모든 불보살에게 수순하고 가까이하는 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여러 신학(新學)의 보살들은 역시 법신에 포섭된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고, 모든 성문과 독각은 해탈신에만 포섭되나니,

 아리야식은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되는 것이다.


隨所隨所微中上,漸次增長,如是如是,報識亦微劣身,亦轉明,一切時身亦轉明。一切時轉身已,彼報識一切種子離種子成。及一切時滅已,彼復云何阿犂耶識如乳水?若爾,非阿犂耶識同事而行一切時壞,如鵝水中飮乳。或入世閒厭,或入定習滅故,入定習增長,如轉身。

처소에 따라 미약함ㆍ중품ㆍ상품으로 점차 증장하면서, 이러하고 이러하게 보식(報識, 과보식) 미약하고 열등한 의지처(身)가 점차 지혜로 전환되는 전명(轉明)을 이루나니, 일체시에 의지처가 지혜로 전환되며, 일체시에  의지처의 전환을 이룬 뒤에는 그 보식(報識, 과보식) 일체 종자식은 종자를 여의고 영원히 단멸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아리야식은 마치 물과 우유와 같은 것이니, 어떻게 아리야식이 아닌 것과 동일한 성품으로 작용하겠는가? 

일체시에 멸하였으니, 마치 거위가  속에서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세간을 혐오함에 들어가고, 혹은 선정의 훈습이 멸(滅)함에 들어가고, 혹 선정의 훈습이 증장함에 들어감으로써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을 얻음과 같은 것이다.


及入諸滅盡定,雖不著識,故彼中唯執不離成,非滅盡定彼對治可取生。

非彼起已更復生,報識已斷,非餘處可取順成。若復計言:滅盡定有心,彼亦是心善不善,彼無記事故不生成,彼亦不成。

또한, 모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비록 식(識)에 집착하지 않을지라도 그 식은  안에서 떠나지 않음이 성립되나니,  멸진정은 그 아리야식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 멸진정에서 나와서도 다시 생기하지 않으니, 보식(報識, 과보식)이 중단되면 다른 곳에서 취해서 수순할  없는 것이다.

만약 헤아려서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역시 선ㆍ불선ㆍ무기의 성품이 생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 역시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ㅡ도리에 수순함에 관한 장이다.

 

若復言:色心後生者,諸法種子事分別前未生,亦不生色`無色。滅已及從滅盡定起,彼不成。及阿羅漢後心,亦不成。除唯次第緣事可成。

만약 “신체의 물질과 마음인 색심(色心)이 나중에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생겨나지 않음을 앞에서 분별하였으며,

또한 색계나 무색계에서 죽거나 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 역시도 성립되지 않으나,

오직 차제연(次第緣)만이 성립될  있을 뿐인 것이다.

ㅡ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如是一切種子報識中閒無染無淨成。是故釋成彼無,及隨所相說。是中說偈:

이와 같이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떠나서는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으므로, 따라서  해석과 상의 설명이 성립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한다.


菩薩淨心, 離諸五識, 離餘轉事, 心云何作?

보살은 청정한 정심(淨心)으로 5식(五識)을 여의네.

마음이 어떻게 나머지를 여의는 전의를 이루는 것인가?


對治迴轉, 無量不成, 因果分別, 彼滅應順。

다스림의 대치(對治)로써 전의하는 것이면, 무량한 것이므로 성립되지 않으며, 

원인과 결과를 분별한다면, 마땅히 멸함을 수순해야 하네.

 

離子非事, 若取轉事, 彼事二無, 轉事不成。

종자를 여의고서는 자체가 없음을 인정해서 만약 전의로 삼는다면

  가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전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네.


何者復此阿犂耶識差別事?

어떠한 것이 이 아리야식의 차별인가?

아리야식의 품류의 차이에 관하여 논한다.


略有三種及四種應知。是中三種者,以三種習差別故,一言說習差別`二身見習差別`三因緣習差別。

간략하게 말한다면  가지 혹은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여기서  가지란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니,

첫째는 언설훈습인 언설습(言說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신견훈습인 신견습(身見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인연훈습인 인연습(因緣習)의 차별이다.

ㅡ현장의 역본은 명언훈습(名言熏習)ㆍ아견훈습(我見熏習)ㆍ유지훈습(有支熏習)으로 되어 있다.

 

四種習差別,一取時差別`二報差別`三念事差別`四相差別。

 가지 훈습의 차별이란,

첫째는 취하는 시기인 취시차별(取時差別)이고, 

둘째는 과보의 보차별(報差別)이며, 

셋째는 자체를 반연하는 염사차별(念事차差別)이고, 

넷째는 양상의 상차별(相差別)이다. 

ㅡ현장의 역본은 인발차별(引發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연상차별(緣相差別), 상모차별(相貌差別) 되어 있다.


是中取時差別者,所有諸習生。彼無故,行緣識及取緣有不成。

是中報差別者,所有行有緣故。諸道受報,彼無故無子後生,諸法生事不成。

念事差別者,所有彼意我相念事。彼意無,己身念取事不成。

是中相差別者,所有彼同相`不同相`離受生種子相`同受生種子相。

 중에서 취하는 시기의 취시차별(取時差別) 모든 훈습이 생겨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행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행연식(行緣識)과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취연유(取緣有)가 성립되지 않는다.

과보의 보차별(報差別)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과보를 받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종자가 없게 되며, 다음 존재인 후생의 모든 법이 생겨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체를 반연함의 염사차별(念事차差別)이란  염오의(意)가 아상(我相)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 의(意)가 없으면  염오의가 자아라고 반연하여 집착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양상의 상차별(相差別)  공통된 동상(同相)과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의 상(相)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의 상(相) 등이다.


同,所有器世閒種子。不同者,所有內入種子。所有同者,彼離受生種子。對治生,不同者障滅。及同者,他所妄想分別取見淨。諸行人一事中種種信,如種見得。 是中偈:

공통된 동상(同相)은 자연계인 기세간(器世間)의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내부의 종자이며,

공통된 동상(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생겨나면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장애가 멸하고,

공통된 동상(同相) 다른 망상 분별을 취하여서 청정만을 보나니, 

관행을 닦는 사람들이 하나의 사물 중에서 갖가지의 믿음과 갖가지의 소견을 얻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難滅證縛, 說爲同事, 行人亂心, 自念外壞。

단멸하거나 증득하기 어려운 속박을 공통된 성품의 동사(同事)라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산란된 마음으로, 스스로 외부를 반연하여 무너뜨리며,


淨不相違, 眞實見淨, 佛戒淸淨, 諸佛見淨。

청정한 사람은 위배되지 않아서, 진실로 청정을 보나니, 

부처님의 계율은 청정한 것이라서 모든 부처님이 청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所有不同,彼同受生種子。彼無故,器世閒衆生世閒順勝事不成。復麤澀相`安相。麤澀相者,所有煩惱及使種子。安相者,有漏善法種子。彼無故,報作不作勝身中不成。

그것과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ㆍ공통된 동상(同相)ㆍ감각 지각작용이 있는 종자, 그러한 것이 없으면 자연계와 중생 세간이 수순하는 차별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거칠고 껄끄러운 추삽상(麤澀相)과 평안함의 안상(安相) 있으니,

거칠고 껄끄러운 추삽상(麤澀相) 번뇌와 수번뇌의 사종자(使鍾子)이고,

평안함의 안상(安相) 유루 선법의 종자이니,  

그것이 없다면 과보를 지음과 짓지 않음의 의지처의 차별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復受`不受相。受相者,所有熟報善不善種子。不受相者,所有言道習種子,無量分別順種子故。彼無者,作不作善惡業得時,不受用義不成;新語言習生事不成。

또한 수용하는 수상(受相)과 수용하지 않음의 불수상(不受相)이 있으니,

수용의 수상(受相)은 이숙보(異熟報)의 선ㆍ불선의 종자이고,

수용하지 않음의 불수상(不受相)은 언어로 훈습된 종자이니, 무량한 분별에 수순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짓거나 짓지 않은 선악업의 과보를 받을 때 수용하지 않는 불수(不受)의 뜻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새로운 언어훈습이 생기하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수용의 수상(受相)이란 종자의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하며,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는 바가 없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4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以分別明,此阿耶識,傍名及相,復云何得知,唯是阿耶識,如是傍名說及如是相,而非是六種轉順識爾?如是中閒差別安阿耶識已,是故不成染淨事:煩惱事及業事`生染事不成;世閒`出世閒淨事不成。

이와 같이 아리야식의 다른 명칭과 상(相)을 분별하여 안립하였다

이러한 다른 명칭과 이러한 상(相) 오직 아리야식에만 있고 여섯 가지의 수순하는 육전식(六轉識)에는 그렇지 않음을 어떻게   있는가

이렇게 아리야식을 분별하여 안립하지 않으면 잡염과 청정이 성립되지 않으니,

번뇌의 잡염인 번뇌염사(煩惱染事)나 업의 잡염인 업염사(業染事)나 생의 잡염도인 생염사(生染事)가 성립되지 않고

세간의 청정도 출세간의 청정도 성립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ㅡ앞에서 말한 이문(異門) 상들이 오직 아리야식에만 있고 다른 식에는 없으므로 아리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 그것을 번뇌의 잡염ㆍ업의 잡염ㆍ태어남의 잡염ㆍ세간의 청정ㆍ출세간의 청정ㆍ도리에 수순함이 성립되는 순서대로 설명한다.

 

云何煩惱染事不成?是以六識身中煩惱染習種子,作事不成。如是,彼眼識貪煩惱使等同生滅,彼是彼者薰有子及非與。眼識滅已,餘識中閒,以非習及不見習,所依旣無`眼識前滅,眼境中閒,同貪等生無故,是故過去者不成。如過業果報生.

어째서 번뇌의 잡염인 번뇌염사(煩惱染事)가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육식(六識)에서는 번뇌와 잡염의 훈습이 종자가 되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使) 등과 함께 생멸하고, 그것의 훈습으로 인하여 종자를 이루며, 다른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안식은 이미 멸하였고 다른 식과의 중간에는 훈습이 없으며 훈습의 의지처도   없으니, 이미 안식과 이전에 멸한 빛깔ㆍ형체가 없어서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겨남이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ㅡ아리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수번뇌(隨煩惱)는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분노의 분(忿)ㆍ원한의 한(恨)ㆍ질투의 질(嫉)ㆍ속임의 광(誑)ㆍ아첨의 첨(諂)ㆍ게으름의 해태(懈怠)ㆍ혼침(婚沈)ㆍ들뜸의 도거(掉擧) 등으로 20가지를 말한다.

 

然彼眼識貪等同生故,習不成,彼貪所依故,及貪不堅。非餘諸識,別體故,諸識同時生滅無故。非自性餘性可有同生滅。如是故,非眼識貪等煩惱及使薰成,非彼識及識所薰。如眼識,如是餘六轉順識等,如順釋應知。

또한  안식(眼識)이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남도, 훈습도 성립되지 않으니, 그 탐욕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탐욕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의 식도 아닌 것이니, 모든 식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고 모든 식이 동시에 함께 생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이 아니나, 다른 것의 성품은 함께 생멸하는 일이 있을  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에 훈습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식은 식의 훈습처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안식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여섯 가지의 수순하는 전식(轉識)도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所有非想以上滅已,此處生煩惱染。彼初生識,彼亦無種子生,同依止彼習過無故。以生煩惱對治識,彼餘一切世閒識滅已,中閒阿犂耶識煩惱及使種子,彼對治識中,不成於諸煩惱,性解脫故,及同生滅無故。後復更生世閒識故,久滅無已,同依彼習,應離種子生中閒阿犂耶識。是故中閒阿犂耶識,煩惱染事不成。

또한 비상천(非想天, 무상천無想天) 등의 상부 지위에서 죽어서 이곳에 태어나면 번뇌의 잡염이 있으니, 그것이 처음 생기하는 식에는 또한 종자가 함께 생겨나지 않으니, 의지처와 그것의 훈습은 이미 과거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를 다스리는 대치식(對治識)이 생기하고 나서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멸한다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대치식(對治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니, 

모든 번뇌에 대해서  다스리는 대치식(對治識) 자성 해탈이기 때문이고,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세간식(世閒識)이 생기하기 때문이니, 만약 아리야식이 없다면 의지처와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없는 것이기 때문에 종자가 없어서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 따라서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云何業染不成?行緣識不順義故。彼無,取緣有亦不順故。

 업의 잡염인 업염(業染)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행(行)의 지분이 식(識)의 지분에 조건인 연(緣)이 되는 것에 수순하는 뜻이 없기 때문이고, 

이것이 없으면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인 연(緣)이 됨에도 역시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업의 잡염품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云何生染不成?取後身身不順義故。不入定地中滅,已在中陰,念雜染意識取後身。然彼雜染意識中陰中滅已,彼以歌囉囉故,母腹中託。若唯意識託者,託已彼依力故,母腹中,應有依識行.

어째서 태어남의 잡염인 생염(生染)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다음 생의 의지신인 후신(後身)을 취함에 있어서 신(身)에 수순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정이 아닌 지위에서 죽어서 중음(中陰)에 머물면서 잡염의 의식을 반연하여 다음 생의 의지신인 후신(後身)을 취하면,  잡염의 의식은 중음 안에서 멸한다. 

그것은 가라라(歌囉囉, 수태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로써 모태 안에 의탁하나니,

만약 오직 의식(意識)이 의탁한다면, 의탁한 후에는 그 의지하는 세력 때문에 마땅히 모태 안에서 식(識)에 의지해서 작용해야 한다.

아리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 잡염인 생염(生染)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중음(中陰)은 중유라고도 하며, 4유(有) 가운데 하나로서, 죽은 뒤에 다음의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가라라(歌囉囉), 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갈라람(羯羅藍),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요소인 사대(四大)가 화합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된다.

 

是以二種意識,從母胎應有,同有故,而非彼所託意識。意識事成,上以雜染身故,及隨順意識念,雖有彼意識託;

旣休託意識,彼爲一切種子`爲當隨彼身依行者?若隨彼所託彼是一切種子者,是故唯阿犂耶識。是傍名差別,安成依識爾。

그러므로, 두 가지 의식(意識)이 모태 안에서 동시에 있어야 하므로  의탁한 것은 의식(意識)이 아니고, 또한 의식의 성품인 의식사(意識事)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잡염의 의지신인 잡염신(雜染身)이기 때문이고, 의식의 인식대상에 수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의식(意識)에 의탁한다 할지라도  의탁한 의식을 일체 종자식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인가? 

장차  의지신을 따라서 의지하여 작용하는 것이겠는가?

만약  의탁한 것이 일체 종자식이라면 그것은 오직 아리야식이니, 다른 이름으로 안립하여 의지하는식(依識)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然若依彼故,一切種子者,彼以何依事? 作因識者 彼非一切種子。若所依作果事者,彼一切種子此義不成。是故此釋成, 所有彼託識,彼非意識,是報識。彼一切種子故, 以取後身,以認取餘色根。何者報識而認不可?見上意`意識,及不堅牢固。彼諸餘識取色根,無非色可成。

만약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 종자식이라 한다면, 그것은 어또한 의지처인가? 

원인으로서의 식(識)이 일체 종자식이 아니니, 만약 의지처의 과보의 성품인 과사(果事)가 일체 종자식이라면 그 의미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해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의탁하는 식인 탁식(託識)은 의식(意識)이 아닌 보식(報識, 과보식)이니, 그것이 일체 종자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 생의 의지신인 후신(後身)을 취하고서 무엇이 감각기관을 집취하는 것인가?

보식(報識, 과보식)이 아니면 의(意)와 의식(意識)에서는   없으니,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므로  나머지 식이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을 집취함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是識及滅色迭互相依,如葦束順義故行,彼亦不成中閒報識。食事義故,不成諸大。衆生非報識,中閒諸六識隨所三界中生諸大,衆生作食所見。

또한  식과 멸색(滅色, 명색)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수순하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며, 

보식(報識, 과보식)이 아니면 그것 역시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보식(報識, 과보식) 식식(識食)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중생은 보식(報識, 과보식) 아니면 육식(六識)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삼계에 태어난 중생들의 음식작용의 식소견(食所見)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멸색(滅色), 다른 역본에서는 ‘명색(名色)’으로 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명색을 사용한다.

식식(識食), 4식(食)의 하나로써, 이것은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이다. 

①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는 분분단단(分分段段)으로 먹어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하고,

②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6식에 상응하는 심소(心所, 심리작용)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며,

③ 의사식(意思食 또는 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기 때문이며,

④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從此滅已,雖入生定,以雜染不入定,意識取後身。然彼不入定心,彼地中雜中閒報識,以種子不成。

죽어서 비록 선정의 지위에서 태어날지라도, 선정이 아닌 지위의 잡염의 의식으로써 다음 생의 의지신인 후신(後身)을 취하나니, 그 선정이 아닌 지위의 마음은  지위의 잡염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보식(報識, 과보식) 떠나서 다른 것의 종자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然生在無色界中,中閒一切種子報識雜染善根覺者,無有種子,無所可依 得雜染善根心,還彼處現出世閒心,諸餘世閒心謝已,彼行應得迴生。非有想非無想生者,現不用處出世閒心時,應得迴彼二道。彼出世閒識非有想非無想至所依,非有用處行所依`涅槃道所依成。

또한 무색계에 태어나서 머물 때,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없으면 잡염과 선근의 마음은 종자가 없어야 하고, 잡염과 선근의 마음의 의지처가 없어야 하며,

또한 그곳에서 출세간의 마음이 현전한다면, 나머지 세간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기 때문에,  작용 또한 마땅히 없어야 한다.

또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태어나거나 불용처(不用處, 무색계의 무소유처천)의 출세간의 마음이 현전할 때에는 마땅히   세계를 여의어야 하나니,

 출세간의 식은 비유상비무상처를 의지처로 삼지 않고, 불용처를 의지처로 삼지 않으며, 열반을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며, 무색계의 제4천이다. 이 하늘은 삼계의 최고 위치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칠은 표상작용(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인 진열반처(眞涅槃處)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불용처(不用處), 무색계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을 말한다.

 

欲捨身時,或造善不善,若上若下,漸次依迹滅毒得淸涼,不應成中閒有阿犂耶識。是故生染中閒一切種子報識中不成。

또한 육신을 버리고자   혹은 선과 불선을 지어서 혹은 위로부터 혹은 아래부터 의지처가 점차 차가워지며, 독이 소멸하고 청량하여 지나니, 아리야식이 없으면 이러한 일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없으면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云何世閒淨事不成?如是離諸欲者,未得色界心,唯得欲界善心,於欲生厭離。然是欲界中心,後用行色界心,不共同生滅,彼不薰此,種子者不成。

어째서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이 모든 욕망을 떠나려는 이가 아직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오직 욕계의 선심(善心)을 얻으며, 욕계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욕계의 가행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므로, 따라서 이것의 종자가 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아리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非彼色界心,過去無量生所隔,彼入定心作種子不成。旣無彼,已釋 成此所有彼入定色界心一切種子報識久時轉轉來,後因緣故`是彼善行習故,彼心增上緣。如是一切厭離地行中隨順,如義應知。如是世閒淨事,中閒一切種子報識不成。

또한  색계심(色界心)은 과거의 수많은 생(生)에 간격지워져서  선정에 드는 마음의 종자가 되지 못하나니, 이미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은 설명하였다. 

 선정에  색계의 마음인 색계심(色界心)은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오랫동안 전전해 와서 지금의 인연이 되고,  선행의 습기 때문에  마음이 증상연이 된다. 

이와 같이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러한 뜻에 수순해야 하나니, 이러한 세간의 청정은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云何出世閒淨事不成?如佛所說,外聞他聲音,以內寂靜思量,因彼事故,得生正見?以聞彼聲響音念故,或薰耳識`或薰意識`或薰彼二?是中彼諸法寂靜思惟憶念故,耳識爾時不行,意識亦餘識所隔雜故。若寂靜思惟行生時,彼久滅無常意識`聞習所薰`同習旣無,何處復彼種子心?

어째서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밖으로 남의 말을 듣고 내면적으로 고요히 사유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남의 음성을 듣고 생각하는 것은 이식(耳識)에 훈습되는 것인가? 

의식(意識)에 훈습되는 것인가? 

아니면 양쪽 모두에 훈습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그법을 고요히 사유해서 잊지 않고 지닌다면, 그 때에는 이식(耳識)은 작용하지 않으며,

의식(意識) 역시도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되는 것이다. 

고요히 사유하는 작용이 생겨날 때에는,  오래 전에 멸하여 무상한 의식과 문훈습(聞熏習)은 이미 자체가 없게 되나니, 어떻게 다시  종자의 마음이 나중에 고요히 사유하는 작용이 생겨나게 하겠는가!

ㅡ아리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장이다.

 

後時寂靜思惟行,而生所有彼寂靜思惟修行世閒心,彼正見同順出世閒心,或時同生滅,是故彼不薰。以不薰故,彼種子不成。是故出世閒淨,中閒一切種子報識不成。是中閒習者,彼種子攝不順故。

또한  고요하게 사유하는 수행은 세간의 마음이고,  바른 견해와 함께 수순함은 출세간의 마음으로, 어떠한 때에도 함께 생멸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훈습되지 않으며,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출세간의 청정은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이 중의 문훈습이  종자를 섭수하는 것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復云何一切種子與報識作染因成,彼對治出世閒心種子事不成?出世閒心,是未曾有,是故彼習本無。旣無彼習已,有何種子生?彼應說善淨法界盡,唯以聞習種子生。

또한 어떻게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는 출세간의 마음의 종자가 되지 않는 것인가?

출세간의 마음은 일찍이 없는 것이므로 그 훈습이 본래 없으며, 이미 그 훈습이 없거늘, 무슨 종자로부터 생겨나겠는가?

그것은 마땅히 매우 청정한 법계이고 오직 문훈습의 종자로써 생겨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3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김묘주 번역

 

何者復彼阿犂耶識中,染等諸法種子,爲當分別住`爲不分別?

彼非如物分別彼處住,非不分別。然如是生彼阿犂耶識,彼生勝力故,說爲一切種子。

또한  아리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의 종자는 마땅히 분별해서 머무는 것인가? 분별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사물을  머무는 처소와 분별하는 것과는 달라서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처럼  아리야식을 생기하게 하고, 그것의 뛰어난 세력을 생겨나게 하므로 일체 종자식이라 하는 것이다.

ㅡ아리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 논한 장이다.


云何彼阿犂耶識及諸染法同時見迭互作因事?所謂如燈,焰及炷生燒因同時,迭互作因。及如葦束迭互人捉故同時,不墮地中,此亦如是迭互作因事應知。亦如阿犂耶識諸染法作因,諸染法與阿犂耶識,如是因緣差別事,不見有餘因緣。

 아리야식과 모든 잡염법이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는 것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자면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원인으로서 동시에 서로의 원인이 되는 것 같으며,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땅에 쓰러지지 않음과 같으니,

마땅히 알지니,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서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리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잡염법이 아리야식에 대해서도 그러하니,

이렇게 인연을 안립하여서, 다른 인연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에 관한 장이다.


云何無分別種種習而與有分別,種種諸法因成?所謂如種種色染衣已,不見種種色。若彼衣浸在器中,爾時彼諸色種種差別見,非一器中故。如是阿犂耶識種種習薰,習薰時雖非種種,能生果時向色器已,無量種種相現諸法種種事。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의 갖가지 훈습이 어떻게 분별이 있는 유분별(有分別)의 종종 법의 원인을 이루는 것인가?

이른바 갖가지 색깔로 물들여진 옷과 같으니, 처음에는 갖가지의 색을 보지 못하지만,  옷을 염색 담궜을 때에는 갖가지 색깔의 차이를 보게 되므로 하나가 아닌 것이니, 아리야식의 갖가지 훈습도 이와 같은 것이다. 

훈습할 때에는 여러 가지가 없지만, 결과를 일으킬 때는 염색된 것과 같이 갖가지의 수 많은 법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ㅡ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도 개별이 아닌 속성을 것에 관한 장이다.


此是大乘中,甚微最細因緣,有二種:一者性差別` 二者愛不愛果差別。

是中所有依此阿犂耶識,生諸法者,此是性差別, 種種性分別現緣故。

이것은 대승 가운데 심오하고 매우 미세한 인연법(因緣法)으로, 이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성의 차별한 성차별(性差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결과의 차별인 과차별(果差別)이다. 

 중에서  아리야식에 의지해서법이 생기는 것은 성차별(性差別)이니, 갖가지 자성의 분별이 조건인 연(緣)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是中迷初因緣者,於阿犂耶識中,或言性因事`

 중, 첫 번째 인연에 미혹한 이는 아리야식에 대해서 말하기를, 혹은 자성이 원인의 성품이라는 성인사(性因事)를 말하고,

인도의 6파철학(派哲學) 중 하나인 상캬(Sākhya)학파의 주장으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인 승인(勝因) 등의 의미이다.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즉 神我(신아, 순수 청정한 정신성)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하였으며, 그 중 프라크리티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중의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였. 

프라크리티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 붓디(buddhi:, )→아만→5유량(唯量, 色 ㆍ聲 ㆍ香 ㆍ味 ㆍ觸)5(大, 地ㆍ水ㆍ火ㆍ風ㆍ空)11(根, 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 전개된다고 하였.

 

或言本作因事` 

혹은 과거의 지은 것이 원인의 성품인, 본작인사(本作因事)라고 말하며,

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 주장으로,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이 있을 , 현재의 노력 결과를 초감할  없다고 하였다.

 

或言自在應化因事` 

혹은 자재천의 변화가 원인의 성품인 자재응화인사(自在應化因事)라 말하고,

자재천(自在天)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논파한 것으로,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 () 주관한다고 하며, (혹은 욕계의 6천주(天主)라고도 한다).  ()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하였으며,  자재천의 ()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하였.

 

或言自身我因相事` 

혹은 실체의 자아가 원인의 성품인 자신아인상사(自身我因相事)라 말하고,

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이다.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인 육구의(六句義),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 大有性대유성)ㆍ특수성(異, 동이성同異性)ㆍ내재성(화합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을 떠나서 별도로 상주의 체(體) 있다고 인정하였다.

 

或言無因無緣事。第二因緣迷者,復自身計爲作者`食者。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말하였으며,

 번째 인연에 미혹한 이는 또한 자신을 계탁하여 짓는자(作者)와 받는 수자(受者)로 삼는다.

ㅡ인연법에 관한 장이며, 

 원문에 ‘식자(食者)’로 되어 있으나, ‘수자(受者)’의 오자로 보아야 한다.

 

譬如衆生盲人彼未曾見象,爲彼盲人將示象,諸生盲者,或捉象鼻,或牙或耳或足或尾或背。

彼示已,問象何相?或說言如`或言如杵`或言如簸箕`或言如碓臼`或言如苕帚`或言如石山。

비유하자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한 맹인들에게 어떤 이가 코끼리를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선천적인 맹인들은 혹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기도 하고혹은 이빨이나 혹은 귀ㆍ다리ㆍ꼬리 등을 만져보기도 하고는,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질문하면혹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혹은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혹은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혹은 절구 같다고도 하며혹은 빗자루 같다고도 하고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석산(石山) 같다고도 하였.

석산(石山), 능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돌이며, 보통 산석(山石)이라 한다.


如是不通達,不知此二種因緣故。無明障故,如生盲,或計爲性`或本因`或自在`或自身`或無因`或作者`或計爲食者。阿犂耶識如象,性相自體不知故。略說阿犂耶識因事及果事報識一切種子性已,是故三界中,攝一切身及一切道。

이와 같이   가지의 인연을 통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의 장애로 인하여 마치 선천적인 맹인과 같이 혹은 생각으로 헤아려 자성으로 삼고혹은 과거에 지은 것의 원인혹은 자재천ㆍ혹은 실체의 자아인 자신(自身)ㆍ혹은 원인이 없는 무인(無因)ㆍ혹은 짓는 작자(作者)ㆍ혹은 받는 수자(受者)라고 말하는 것이니,

아리야식도 코끼리의 경우와 같이 체성(性)ㆍ체상(相)ㆍ자체(自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아리야식의 원인의 성품인 인사(因事)와 결과의 성품인 과사(果事)는 과보식인 보식(報識)의 일체 종자의 성품인 일체종자성(一切種子性)이기 때문에 삼계에서의 일체신(一切身)과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도(一切道)를 포섭하는 것이다.


是故說五偈:

그러므로 다섯 게송으로 설하나니, 


內外不分明而說相順事彼一切眞實說爲六種子。

외부와 내부는 명료하지 않고서로 수순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세속의 모든 것과 진실이니, 여섯 가지 종자인 육종자(六種子)를 말하는 것이네.


空及同諸大彼亦說隨順定而忘諸緣及自果將來。

()을 비롯한 모든 요소와 함께 하며, 또한 그것은 수순한다고 말하나니, 

결정적이고, 여러 조건의 제연(諸緣) 필요로 하며, 스스로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네.

 

彼見而無記或順彼無餘薰彼非餘處然彼是習相。

그것이 보는 것과 무기성혹은 그것과 수순하여 남음이 없으며,

그것을 훈습함은 다른 곳이 아니니, 그것이 훈습의상(習相)이네.


六無有順義二別相違故諸念無同故 生餘隨順故。

여섯 가지 식에는 수순의 의미가 없으니,  가지 차별로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며,

모든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고나머지를 일으켜서 수순하기 때문이네.


內外諸種子彼說爲生因不續取盡故自然壞遍故。

내부와 외부의 모든 종자그것이 생겨나게 하는 생인(生因)이라고 말하나니,

상속하지 않고 취하여 다하기 때문이고자연스럽게 두루 멸하기 때문이라네.

 게송 이후에 현장 역본과 진제 역본급다 역본 등에는 내부 종자와 외부 종자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산문과 함께  게송이 이어지고 있으나  역본에는 빠져 있다.


所有餘六轉順識,彼一切身道處受果報應知。如中『邊分別論』說。

나머지 여섯 가지 전식(轉識)  모든 신체와 윤회세계의 과보를 수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바와 같다.


一是作緣識第二受果報分別受報者同發諸心爾。

첫째는 인연을 짓는 작연식(作緣識, 아리야식)이고

ㅡ아리야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식이 전변 생기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보를 수용하는 수과보(受果報, 전식)의 식(識)이니, 

ㅡ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 하며,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전식(轉識)이다.

분별하고 과보를 수용하는 것이 여러 심리작용() 함께 일으키네.

ㅡ여기서 () 심소법(心所法심리작용) 의미한다.


彼諸識迭互作緣故,『大乘阿毘曇修多羅』有偈:

다시 그 모든 식이 서로 () 되기 때문에 '대승아비담수다라(大乘阿毘曇修多羅)'에서 게송으로 설하기를, 


一切諸法依如是彼諸識迭互作果事一切及因事。

일체의법이 의지하고 모든 식도 그러하나니, 

서로 결과의 성품인 과사(果事)가 되고일체가 원인의 성품인 인사(因事)가 되네.


若此諸識迭互作因緣果者,初因緣及彼第二因緣有何緣?謂增上緣。然此六識有幾緣所生?增上``次第等緣生是。此餘三種因緣,世閒者`至愛不愛道,及受果報者,四緣成。

만약  모든 식이  번째의 인연(因緣)에서 서로 인연의 결과가 된다면 번째 인연에서는 어떤 () 있는 것인가증상연(增上緣)이다

그러하다면, 육식(六識)  가지 조건의 연(緣)으로부터 생겨나는 연생(緣生)인가

증상연(增上緣)ㆍ염연(念緣, 소연연)ㆍ차제연(次第緣, 등무간연등의 연생(緣生)이다

 나머지  가지 인연 세간이 다할 때까지 계속하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윤회세계수용하는 과보는  가지 조건의 사연(四緣) 이루는 것이다.

ㅡ사연(四緣) 관한 장으로,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이 발생함에 있어서  () 인연ㆍ증상연ㆍ염연(念緣)ㆍ차제연의  가지로 분류하였다.

 

증상연(增上緣)은 그것이 생겨나는 데 외부로부터 도와주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2 가지는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는 조건(緣)인 유력(有力) 증상연과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조건의 무력(無力) 증상연이 있다 

염연(念緣), 여기서 염(念)은 생각 속의 인식대상, 즉 소연(所緣)의 의미이다. 

현장의 역본에는 소연연(所緣緣)으로 되어 있으며, 소연연은 소연(所緣), 즉 마음의 대경(對境)이 마음의 연(緣)이 되어 활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인 대경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식이 생기하기 때문에 그 인식대상을 연(緣)으로 삼는 것이다.

차제연(次第緣), 현장의 역본은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한역하였다. 등무간연은 전찰나의 생각이 사라지면서 다음 찰나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전 찰나의 식이 멸하여 다음 찰나의 식에 그곳을 주지 않으면 식이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전 찰나의 식을 등무간연이라 이름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2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김묘주 번역

 

彼以何義故名阿陁那識? 依一切色相故,及取一切依身事故。

如是彼依諸色等根不壞者,乃至命不盡,隨順故,未來取身。彼能生取身,是故彼名阿陁那識。

무슨 뜻으로 그것을 아타나식(阿陀那識, 제8식)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감각기관을 유지하기 때문이고, 모든 의지처의 자체를 취하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그것에 의지해서 모든 감각기관이 파괴되지 않고,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순하기 때문이며,  

미래의 몸(身)을 취하나니, 그것이 능히 생기해서 몸을 취하는, 취신(取身)을 하는 것이므로 아타나식이라 하는 것이다.

 

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彼亦名心, 如佛所說心意識爾。

그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부처님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ㅡ이하는 ()ㆍ의()ㆍ식() 명칭을 해석한다.

 

是中意有二種:依近作緣事故,近滅識依,與意識作生因。

여기에서 의(意)에  가지 의지처가 있으니,

첫째는 근작연(近作緣) 성품이니, 가까이에서 멸한 식과 의식이 생기하는 의식생인(意識生因)의 의지처이며,

ㅡ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되어 있다.

 

第二意雜四種煩惱,常共同身見`我慢`愛身及無明,彼是依識所染生。

若以一身所生識,第二是染境界,識義故`取近義故,及不分別義故,明二意。

 번째 의(意)는  가지 번뇌인 신견(身見)ㆍ아만(我慢)ㆍ애신(愛身)ㆍ무명(無明)과 항상 함께 하나니, 그것은 식이 잡염되어 생기하는, 식염생(識染生)의 의지처인 것이다. 

식(識)은  번째는 몸을 의지처로하여 생기하는 신소생(身所生)이며,

 번째로는 잡염된 경계의 염경계(染境界) 의미이니, 가까운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며, 대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로 이의(二意)를 밝히는 것이다.

ㅡ급다 역본과 진제 역본, 현장 역본에는 어째서 염오의(染汚意) 있는가에 대하여 문답 형식의 설명이 있으나, 역본에서는 부분이 없이 바로 게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是中有偈: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雜染障無明, 同法及諸五, 三昧或勝事, 說中應誠患。

잡염된 장애의 무명인 잡염장무명(雜染障無明)과 같은 법인식(五識),

삼매 혹은 뛰어난 승사(勝事)설하는 가운데에서 마땅히 근심 이루네.

 

잡염장무명(雜染障無明), 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독행무명(獨行無明)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으로 되어 있다. 무명은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누며,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無想而起我, 生順行無窮, 近順起我相, 一切是不成。

무상천에서 아상을 일으켜서, 태어남이 계속되어 끝이 없으니, 

가까이 수순해서 아상(我相)을 일으켜서 일체가 성립되지 않네.


離染無心事, 二三是相違, 彼無一切處, 執成我等義。

염오의 마음의 성품인 심사(心事)가 없으면

불공무명과 오식(五識)의 두 가지가 없고,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의 세 가지가 상위(相違)하나니, 

그것이 없다면, 일체의 모든 곳에서 아집을 이루는 등의 뜻이 없을 것이네.


心順正義故, 常順不相違, 一切是同行, 說無明不離。

마음이 정의(正義) 수순하는 까닭에 항상 수순하여 위배되지 않으니, 

모든 부분과 함께 작용하므로, 무명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心及身`第三,離阿犂耶識更餘處無。以是義故,釋成阿犂耶識是心事。隨種子行彼意及意識。以何義故,說爲心?種種法種子習薰聚義故。

 번째로 심(心)의 자체는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곳에 없으니,

이러한 뜻으로 아리야식이 심사(心事)를 이룬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심사(心事)를 종자로 삼아서  의(意)와 의식(意識)이 작용하나니,

무슨 까닭에 심(心)이라고 하는 것인가? 갖가지 법의 종자가 훈습하여 쌓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佛以何義故,『小乘經』中,彼心不說爲阿犂耶識及阿陁那識?攝甚微細智義故。彼諸聲聞不修學,行一切智人智故,是故彼中閒釋說智,復說釋成解脫,故不說。諸菩薩者,修行一切智人智故,爲彼說此識;若不說者,離彼識不得解行一切智人智。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소승경전에서  심(心)을 아리야식이나, 아타나식이라고 말하지 않으신 것인가?

심오하고 미세한 지혜의 경계에 포섭되기 때문이요,

 모든 성문은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배우고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지혜를 풀어서 말하고, 다시 해탈을 말하여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았으나,

일체지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수행하는 여러 보살들을 위해서는  식(識, 아리야식)을 설하셨다.

만약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식을 부정한다면, 일체지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알고 행하기 어려우리라.

ㅡ성문승에도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8식을 말함을 밝히는 가운데, 우선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然復異名,『小乘經』說彼識,如『增一阿含』中說:喜樂阿犂耶世閒;及著阿犂耶,阿犂耶所成,幷求阿犂耶
;滅阿犂耶故,說法時親近正聽,起隨順心許,取法及次法。

또한 소승경전에서는 다른 명칭으로  식(識, 아리야식)을 말하였으니,

'증일아함경'에서 “세간에서는 아리야(阿犁耶)를 즐기고, 아리야와 아리야로 이루어진 것에 집착하며, 아리야를 구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리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법을 말할  친근(親近)하고 바르게 들어서 수순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법을 구하고 법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8식을 말하는 것을 밝힌다.


如來出世閒時,世閒說此希有法故。『如來出思益經』中說,以此義故,『小乘經』亦異名說此阿犂耶識。大僧祇『增一阿含經』中,亦說彼爲根本,如樹依根住故。彌沙塞僧中亦說言:乃至世閒陰不斷。如是異名,亦說彼識。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세간에서  희유한 법을 말씀하셨으니, '여래출사익경(如來出思益經)'에서 이러한 뜻을 말한 것이며, 

소승경전에서도 역시 다른 명칭으로  아리야식(阿犁耶識)을 말씀하셨으니, 대중부의 '증일아함경'에서도 역시 그것을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 것으로,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지부(미사새부彌沙塞部)에서도 역시 말씀하셨으니,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 즉 내지세간음부단(乃至世間陰不斷)이라 하신 것이다.

ㅡ내지세간음부단(乃至世間陰不斷), 급다의 역본에는 궁생사취(窮生死聚), 진제의 역본에는 궁생사음(窮生死陰)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궁생사온(窮生死蘊)으로 되어 있다.

 

如是異名,亦說彼識。

이와 같이 다른 명칭으로 역시  식(識, 아리야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或有時節中,色及心斷時,非阿犂耶識有斷義。彼是種子,是故所有彼智所依,阿陁那識事`心事 阿犂耶事`根本識事,乃至世閒陰事,說彼阿犂耶識。此阿犂耶識轉明勝,如王大道。

혹 어떤 때에는 물질(色)과 마음(心)이 단절될지라도 아리야식에는 단절의 의미가 없으니, 그것이 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의지처인 지소의(智所依)는 아타나식의 체성인 아나타식사(阿陁那識事)이고, 심의 체성인 심사(心事)이며, 아리야식의 체성인 아리야사(阿犂耶事)이고, 근본식의 체성인 근본식사(根本識事)이며,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의 체성인 오음사(五陰事)이니, 그것은 아리야식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야식의 흐름은 분명하게 뛰어나서 마치 대왕의 길과 같은 것이다.


餘者復作是言:心意識是一義,唯文異。然彼義不成,意及識中,義有見異故,是放逸心亦應有異義成。

또한 다른 부류들이 말하기를, 심의식(心意識)은 하나의 의미이고 다만 글자가 다를 뿐이라 하였다

그러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의(意)와 식(識)에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心)도 마땅히 다른 의미가 있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復有餘者言:如來阿含中所說,喜樂阿犂耶世閒,如是等句者,謂五陰是阿犂耶。

餘者復言:同貪等樂受是阿犂耶識。或復言:身見是阿犂耶。然彼於阿犂耶識, 迷癡故,或從聞及解釋故,

作如是說,依小乘經教分別安故。然彼者此分別安事不成,彼愚癡故。

如是分別已, 阿犂耶識轉勝,成如是差別說故。

다시 다른 부류는 여래께서 '아함경'에서 말씀하신  “세간은 아리야를 즐기고……” 등의 문구는 5음을 아리야라고 말한다고 하였으며,

다시 다른 부류는 탐욕 등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가 아리야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말하기를 신견(身見)이 아리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야식에 대해서 미혹하기 때문이고, 혹은 듣거나 해설한 것에 의거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니, 소승경전과 분별에 의지해서 안립한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분별로 안립한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렇게 분별한 것이다.

이렇게별해서 아리야식을 말한다면 뛰어난 것이 되는 것이다.

ㅡ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云何轉勝? 明如是彼五陰, 於惡道生處, 一向受苦時厭成 ,彼旣是一向厭故, 不成有厭樂事, 如是彼常求厭離。

同貪樂受者, 從四禪已上無, 復成厭離, 如是彼衆生中, 依止事不成 身見亦同,

此法中信無我者厭離成,是故此亦彼者,依止不成。然阿犂耶識至內身許事受。

어째서 뛰어나게 전승(轉勝)하는 것인가? 

그것이 5음이라면 살기 괴로운 악도(惡道)에 태어난 곳에서는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을  혐오하게 되며, 이미 한결같이 혐오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항상 싫어해서 떠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아리야식이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동탐낙수(同貪樂受)라면, 제4선(禪)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역시 싫어해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 가운데에서의 의지처는 성립되지 않으며, 신견 역시도 마찬가지이니,  

  가운데 무아를 믿는 자는 혐오해서 떠나게 되기 때문이며, 이것 역시도 그러해서  의지처가 성립되지 않으나,  

그러나 아리야식이 내면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 인정되는 것이다.


一向苦道處,生者及苦陰幷求解脫者,阿犂耶識中,皆自身相,彼解脫不應有。從第四禪以上生者,雖有同貪樂厭離,阿犂耶識起我相愛等。如是此諸同法,信無我者,雖有厭離身見,而阿犂耶識作愛自身相。如是分別阿犂耶識已,轉勝明智。是阿犂耶說,傍名及異名,分別安事。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는 세계에 태어나는 자는 괴로움의 5음에서 해탈하기를 구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자아로 보는 상이 있어서  해탈이 상응하지 않으며,

제4선 이상에 태어나는 자는 비록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동탐락(同貪樂)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상(我相)과 아애(我愛) 등을 일으키며,  

이와 같이 이 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는 자는 비록 신견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애(我愛)를 짓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리야식을 분별해서 뛰어난 밝은 지혜의 승명지(勝明智)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아리야식의 비슷한 이름과 다른 명칭들을 분별하여 안립한 것이다.


然復此相分別事云何得知?彼略有三種:一自相差別處`二因事差別相`三果差別相。

是中阿犂耶識自相義者,依一切染等法習故,彼有生因相,種子攝取義故。

是中因事差別義者,還彼染等諸法中,彼阿犂耶識,如是一切種子,一切時作因事現成。

是中果差別者,阿犂耶識中所有,彼諸染法,依無始以來習生事。

또한 이것의 상(相)을 분별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체의 자상(自相)을 차별하고,

둘째는 원인의 인상(因相)을 차별하며,

셋째는 결과의 과상(果相)을 차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아리야식의 자체의 자상(自相)의 의미(義)란, 모든 잡염법의 훈습에 의지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의 인상(因相)과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차별하는 의미(義)란, 그 모든 잡염법에 대해서 그 아리야식이 일체 종자로서 언제나 원인이 되어 현전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이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 차별이란, 아리야식 중에서 그 모든 잡염법이 아득한 옛적부터의 훈습(熏習)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ㅡ아리야식의 상(相)에 관한 장이다.

 

何者是習?而以習名說?此有何義? 依彼法同生滅故, 所有彼生相事,此是說。

所謂如華薰胡麻同生滅,胡麻故生彼香,因事故生。或多貪欲者有貪習,貪等同生滅,有彼心故,彼因相似生。

或復多聞者有多聞習,彼聞憶念已同生滅,心中彼說因相事生故。

是以有此習義故,說爲法器,亦名持法。如是阿耶識中亦如是。

무엇을 훈습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 법에 의지해서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성품인 생상사(生相事)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꽃이 호마(胡麻, 참깨)를 훈습하고 호마와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 향기의 원인의 성품으로 생겨남과 같은 것이다.

혹은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의 훈습이 있으며, 그것이 탐욕 등과 함께 생멸하며서 그 마음이 그 원인의 인상(因相)으로 생기하며,

혹은 많이 듣는 다문자(多聞者)는 많이 듣는 다문(多聞)의 훈습이 있고, 그렇게 들어서 지니는 생각과 함께 생멸하나니, 마음에서 그 원인의 인상(因相)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훈습의 의미 때문에, 마치 법의 그릇인 법기(法器)를 법을 지니는 것이라고 이름하듯이 아리야식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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