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生滅(생멸)의 相(상)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부차분별생멸상자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또한 생멸상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麤(일자추) 與心相應故(여심상응고)

첫째는 거친 번뇌=麤이니, 이러한 추와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는 때문이며, 

二者細(이자세) 與心不相應故(여심불상응고) 

둘째는 미세한 번뇌=細이니, 이러한 미세한 것과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又麤中之麤(우추중지추) 凡夫境界(범부경계)

또 거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범부의 경계이며, 

麤中之細(추중지세) 及細中之麤(급세중지추) 菩薩境界(보살경계)

거친 가운데에서의 미세한 번뇌와 미세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보살의 경계이며,

細中之細(세중지세) 是佛境界(시불경계)

미세한 가운데의 미세한 번뇌는 바로 부처의 경계이다.

 

* 상응한다는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마음과 경계가 나뉘어져 마음과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따라 경계가 상응하여 물들기 때문이다.

高淳豪 元曉 憨山
三細 無明業相 細中細 佛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細 佛의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細 佛의 경지에서 깨달음
能見相 細中麤 보살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麤 보살이 알 수 있음 細中麤 초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깨달음
境界相
六麤 智相 麤中細 麤中細 麤中細
相續相 麤中麤 범부가 알 수 있음
執聚相 麤中麤 범부 경지에서 깨달음 麤中麤 삼계 內凡인 삼현위에서 깨달음
計名字相    
起業相        
業繫苦相        

 

此二種生滅(차이종생멸) 依於無明熏習而有(의어무명훈습이유)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해서 있는 것으로, 

所謂依因依緣(소위의인의연)

이른바 인에 의지하고 연에 의지한다.

依因者(의인자) 不覺義故(불각의고) 依緣者(의연자) 妄作境界義故(망작경계의고)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 불각(무명)의 뜻이고, 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짓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元曉[별기] : 불각의 뜻이란 근본무명이며, 잘못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현식(現識)이 나타내는 경계이다.

* 元曉[별기] : 만약 생의 인연을 널리 논한다면 모든 식에는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십권능가경≫의 설명 - 네 가지 인연이 있어야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이니, ① 자내신(自內身)임을 깨닫지 못하고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②.무시이래로 허망하게 색경계(色境界)를 분별하고 훈습하여 희론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③.식이 자성체(自性體)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④, 여러 가지 색상을 보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권능가경≫의 설명 - ①.자심이 나타낸 것을 섭수(攝受)함을 깨닫지 못한다. ②.무시로부터 경계를 경험하는 습기를 헤아려 집착한다. ③.식성(識性)이 자성인이다. ④.여러 가지 색상을 보려 한다.

원효의 해설 ①.자심이 섭수함을 깨닫지 못함 - 근본무명의 인(因)을 밝힌 것이니, 그 색경계가 거친 모양이어서 현식에 나타난 것이며, 식(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자심이 섭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색진(色塵)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②.무시로부터 헛되이 경계를 경험한 습기를 헤아려 집착함 - 무시망상훈습인을 나타낸 것이니 현식이 본래 색진에 집착함을 말하며, 이러한 습기를 내어 안식을 내어 집착하는 것이다.

③.식성(識性) - 자류인(自類因)을 나타내는 것이니, 앞서의 안식의 자성으로 인해 분별하는 것이다.

④.여러가지 생상을 보려한다. - 명언훈습인(名言熏習因)을 나타내는 것이니, 앞서의 안식이 색상을 보고 의식은 이 색상을 보는 안식을 반연하여 의언분별(意言分別)로 집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추생멸, 심생멸, 추는 거칠고 드러나는 것이고, 심은 깊은 것입니다. 

거친 번뇌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제7식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과 직접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의 뿌리는 제7식입니다.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 유전자, 저장창고에 저장된 흔적들이 ‘나’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것들이 거친것 추(麤)입니다.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일으키는 생각과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으키는 생각은 본성이 오염되어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성에 오염된 색깔이 입혀진다면 그 색깔이 입혀진 본성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깨우치고 견성하면 본성 그대로를 내놓을 것 입니다. 우리 중생은 평생 제7식과 똑같은 생각을 내놓듯이 자식도 내 자신의 업에 의해 비슷한 자식을 낳습니다. 인연에 의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부모 자식 인연은 뗄 수 없습니다. 

세(細)는 제8식 아뢰야식의 영역으로 오염된 업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麤中之麤 거친 중에 거친 번뇌’는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모든 생각입니다. ‘麤中之細, 거친 가운데 미세한 번뇌’, ‘細中之麤, 미세한 가운데 거친 번뇌’는 보살의 경계로 제8식 아뢰야식을 본 사람, 견성한 사람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본질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것입니다. 그 거대한 황하강의 근원을 살펴보면 히말라야산 중턱에서 솟는 작은 샘에서 흘러나온 물로 시작됩니다. 무명을 일으키는 그 하나의 점 그것이 미세하고 미세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부처의 경계에 가야 합니다.-통섭불교]

 

[생멸상(緣滅相)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하여 생멸하는 ‘모습’이다.

생멸상의 두 가지 종류란, 첫째는 마음의 거친 생멸상이다. 육염의 집상응염(執相應染), 즉 육상 중 집취상(執取相) · 계명자상(計名字相)의 번뇌와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즉 상속식의 번뇌 및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즉 지식이 일으키는 번뇌가 여기에 속하며, 이는 마음과 서로 대응하는 생멸의 모습이다.

둘째는 미세한 생멸상이며, 육염 중 현식(現識)의 작용인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전식(轉識)의 작용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업식(業識)의 작용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의 셋이며, 이는 마음과 서로 대응하지 않는 불상응(不相應)의 생멸상이다.

상응염과 불상응염은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거친 염심으로 구분된 셋은 상응염으로서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 주관이 객관에 작용하는 마음의 활동이 명확하고, 진폭(震幅) 또한 크고 복잡하다.

미세한 염심인 불상응염(不相應染)은 주객의 분열이 아직 없으며, 주관과 객관의 대응이 성립되지 않아 불상응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 ‘麤中之麤, 추중의 추’는 가장 거친 심작용(心作用)으로서 범부의 마음을 말하며, 육염(六染) 중의 여섯 번째의 집상응염(集相應染)이 이에 속한다. 이는 자아의식으로 말미암아 대상에 집착하고, 그러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대상을 인식하며, 인식된 대상 그대로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그 대상에 애착이나 혐오를 일으켜 집착하고, 자기가 보고 있는 외계(外界)가 오직 마음이 만들고 있다는 유심소작(唯心所作)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범부의 경계라 일컬어진다.

둘째는 '細中之麤, 추중의 세'의 염심으로 육염 중 부단상응염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다. 이는 보살의 경계로서, 이 두가지는 본능적 인식이나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함되며,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것이므로 인식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집(法執)의 세계이다. 분별지상응염은 제 2지인 구계지로부터 부분적으로 분리되어,  7지인 무상방편지에서 완전히 분리제거 되는 것이므로, 이 염심은 ‘추중의 세’에 속하는, 부단상응염과 더불어 분별지상응염은 보살의 경계가 된다.

셋째는 ‘細中之麤, 세중의 추’이다. 육염 중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불상응염(能見不相應染)이 이에 속하며, 이 두 불상응염은 앞서 설명한 상응염과 비교하면 미세한 것이지만, 최후의 근본업부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과 비교하면 거칠기 때문에 이를 ‘세중의 추’라 한다. 현색불상응염은 무명에 의하여 기동된 마음이 외계를 비추어 내는 모습, 즉 경계상이다. 이는 현식(現識)으로 식(識)이 나타난 것이며 제8지인 색자재지()에서 분뢰된다. 능견심불상응염은 동심()가운데 주관적 존재로서, 이 염심(染心)은 제9지인 신자재지(色自在地)에서 제거된다.

추중의 세’와 ‘세중의 추’는 보살의 수행단계에서 깨달아 제거되는 것이므로 이를 보살의 경계라고 한다.-전종식]

 

若因滅則緣滅(야인멸즉연멸) 因滅故(인멸고) 不相應心滅(불상응심멸)

만약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멸하고, 

緣滅故(연멸고) 相應心滅(상응심멸)

연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元曉 : 若因滅則緣滅은 어느 자리(位)에 따르더라도 대치하게 될 때 무명인(無明因)이 멸하면 경계연(境界緣)이 따라 멸하는 것이다.

因滅故 不相應心滅은 세 가지 불상응심이 바로 무명인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무명이 멸할 때 또한 따라서 멸하는 것이다. 緣滅故 相應心滅은 세 가지 상응심이 경계연을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경계가 멸할 때 따라서 멸하는 것이다.

* 憨山 : “추상(麤相)과 세상(細相)인 두 종류 생멸상이 무명을 의지해서 있다.”함은 이 육염심이 인과 연을 의지해서 나왔으므로 역시 인과 연을 의지해서 사라짐을 나타내었다. 최초 근본무명의 불각으로 인해 삼세의 생멸상(生滅相)이 나왔고, 삼세상 가운데는 추상인 경계상이 연이 되어 육추로 생멸하는 모습[六麤相]이 증가해서 자라나게 되었다.

지금 근본무명인이 사라졌다면 경계연도 역시 사라진다. 때문에 무명의 인이 사라지면 삼세상이 사라지고, 연이 사라지면 육추상이 사라진다.

* 무명이 사라지면 불상응심과 상응심이 모두 사라지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체득을 해야 한다.

* 지운 : 근본무명[因]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업식이 일어났다. 업식을 지말무명이라고 한다. 업식에서 능견상과 경계상이 일어나니 능견상은 주관이고 경계상은 객관이다. 이 세 가지는 아리야식의 작용 모습이다. 경계상이 다시 아리야식에 영향을 주어 지식(智識)과 의식(意識)이 일어났으며, 지식과 의식이 경계상[緣]을 인식하면서 갖가지 식이 일어난다. 따라서 근본무명을 타파하면 모든 심식 현상은 사라지지만, 근본무명을 없앨 수 없다면 우선 연(緣)이 되는 경계상을 타파해야 한다. 근본무명 타파로 바로 들어가는 수행법이 바로 화두참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하는 것으로, 내 생각도 생했다가 멸하고 이 우주도 생했다가 멸합니다. 이것은 무명의 훈습에 의해 생멸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과 연기가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깨우치신 내용이 연기입니다. 연기를 거시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 풀어쓰면 인연과법칙입니다. 인(因)은 주체적인 원인이라면 연(緣)은 비교적 부수적인 것입니다. 이 인연이 합해져서 과(果)를 일으킵니다. 만약 땅에 수박씨를 심는다고 했을때 수박씨는 인이고 땅은 연에 해당합니다. 수박이 열리는 것이 과입니다. 하지만 땅이 비옥하면 수박이 잘 열릴 것이고 척박하면 잘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씨앗이 상태가 안 좋으면 아무리 땅이 비옥해도 잘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이 직접적으로 크게 작용하고 연은 부수적으로 적게 작용합니다. 중생은 어리석게 도 남 탓을 많이 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문제해결은 쉽습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본인은 맞다고 생각하여 죽어도 자신을 바꾸지 않습니다. 자꾸 상대방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은 그냥 바뀌어 버립니다. 여기서 본인은 인이고 남은 연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만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불편한 점이 사라지게 되면 상대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묘한 이치입니다. 집착, 탐욕, 무지를 멈추면 상대방의 진가가 나름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처가 되면 이 세상은 전부 다 부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것은 7지보살 이상의 단계입니다. 내가 인(因) 이라면 내 주변의 모든 것은 연(緣)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미루고 핑계를 대지만 결국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인입니다. 죽지 않는 한 의지가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은 가만히 놔두고 연만 핑계대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에 물들어 불각의 상태에 있습니다. 불각의 상태에 있으면 끝없이 경계를 일으킵니다. 무명 때문에 불각의 상태에 있는 것은 인(因)이고 불각의 상태에서 끝없이 경계를 일으키는 것은 연(緣)입니다. 인이 주체, 나, 뿌리라면 연은 주체에 의해 일어 나는 작용들, 대상, 가지 줄기입니다.]

 

問曰(문왈) 若心滅者(약심멸자) 云何相續(운하상속)

문나니,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若相續者(약상속자) 云何說究竟滅(운하설구경멸)

만약 상속한다면 마침내 어떻게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答曰(답왈) 所言滅者(소언멸자) 唯心相滅(유심상멸) 非心體滅(비심체멸)

답하나니, 멸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현상=心相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본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응심과 상응심이라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음의 현상이 사라짐을 말하지, 심체가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심상이 사라졌다하여도 단멸(斷滅)이 아니지만, 심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마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고 묻는 것도 심상이 사라졌으므로 맞지 않는다.

* 元曉 : 법 가운데 “없어진다.”는 것은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갈 때 모든 식이 없어진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만 거친 식의 모습만 없앨 뿐이며 아리야식의 마음 바탕을 없앤 것은 아니다. 그르므로 “오직 마음의 모습만 없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또 다시 위에서 “인(因)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 없어진다.”고 한 것은 다만 마음 가운데 업상(業相) 등만 없어진다고 말할 뿐이며 근본 성품인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因)이 멸하면 연(緣)도 멸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이지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생각이 평생 연(緣)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데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 중에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불평합니다. 잘된 것이 있으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긍정이란 원인을 자신에게 찾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줍니다. 다시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는 말로 돌아가서 뿌리가 죽으면 다 죽습니다. 주체가 소멸하면 주위의 대상은 없습니다. 인이 멸하면 제8식 불상 응심이 없어집니다. 무명의 뿌리가 없어지면 나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연이 멸하면, 일어나는 경계, 작용들을 세세히 알면 상응심 제7식, 제6식 이것들이 없어집니다. 멸한다는것은 결국 아는것과 같은 말입니다. 만약 누가 부처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누군가 내 앞에 있네.”도 되고 “이 스크린 화면이 누구 앞에 있네.”도 될 것입니다. 7 곱하기 7은 49도 맞고 6 곱하기 6은 36 도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를 보면 즉 견성을 하면 뿌리를 알게 됩니다. 알면 다 맞지만 모르면 다 틀린 답입니다. 그래서 불상응심이 멸한다고 하는 것은 제8식 아뢰야식을 알아서 견성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번뇌와 망상, 집착을 멸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상속한다면 어떻게 멸하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에서 마음이 멸해도 마음의 뿌리까지 멸한 상태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如風依水而有動相(여풍의수이유동상)

(이를 비유하면) 마치 바람이 바닷물에 의지하여 (파도를) 움직이는 현상이 있는 것처럼,

若水滅者(약수멸자) 則風相斷絶(즉풍상단절) 無所依止(무소의지) 以水不滅(이수불멸)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서(사라지니) 의지할 바가 없어서 그치겠지만(파도는 없어지지만), 바닷물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風相相續(풍상상속) 唯風滅故(유풍멸고) 動相隨滅(동상수멸) 非是水滅(비시수멸)

바람의 모습이 상속되는 것이다. 오직 바람이 멸하였기 때문에 (물의) 움직임도 따라서 멸하였지만 바닷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명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지하여 움직이지만,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끊어져서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무명만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 바람이 움직이는 현상을 보기위해서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바람의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를 물이 없으면 바람의 모습이 사라진다고 하여 물에 비유하였다. 물도 물 그 자체가 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람 때문에 파도를 만든다. 만약 바람이 자면 파도도 잔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상(心相)은 마음이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심체(心體)는 마음의 체로 뿌리에 해당합니다. 멸한다고 했을 때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의 모양들만 없어지는 것이지 뿌리가 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람은 일반적으로 고기압과 저기압 때문에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공기도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게 되고 이것이 바람입니다. 만약 어떤 곳에 바람이 분다고 한다면 고기압과 저기압이 형성되어서 부는 것입니다. 이 바람 때문에 바닷물이 파도를 일으켜 철썩철썩 바위를 칩니다. 바람이 없다면 물결이 일렁여 파도를 일으켜 물결을 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바람이 안불면 바닷물만 있고 파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닷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심상만 없어지는 것이지 심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이 우주에 충만해있는 일심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멸한다는 것은 심상만 없어지는 것이지 심체가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없으니 파도만 없는 것처럼 보이지 바다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람이 비유하는 무명이 없어지면 심상은 멸하지만 심체, 일심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일심은 없어지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을 뿐입니다.
결국 바닷물은 본체, 자성청정심을 의미하고 파도는 지성을 의미하고 바람은 무명을 의미합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칩니 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치지 않습니다만 바닷물이 있는 한 바람이 불면 또 파도가 칩니다. 무명풍에 의해 우리 몸이 생기고 여러 가지가 생겨나지만 본체, 청정한 본래 마음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는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무명에 의해 물들어 있지만 본체, 일심은 없어지지 않고 우주에 충만해 있을 뿐입니다.]

 

無明亦爾(무명역이) 依心體而動(의심체이동)

무명 또한 그와 같아서 심의 본체=心體에 의지하여 움직이지만, 

若心體滅(약심체멸) 則衆生斷絶無所依止(중중생단절무소의지)

만약 심체가 사라지면 중생도 단절되어 의지할 바 대상이 없지만, 

以體不滅(이체불멸) 心得相續(심득상속)

심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唯癡滅故(유치멸고) 心相隨滅(심상수멸) 非心智滅(비심지멸)

오직 어리석음(무명)만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현상=心相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마음의 지혜=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입의분 가운데서, "이 마음이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했던 것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일심진여는 본래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는데 무명의 생멸로 인하여 삼추와 삼세의 무명과 이혹(二惑)과 육염심으로 그 양상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육염심의 망념을 분별하는 생멸의 양상에 거친 마음의 상응과 미세한 마음의 불상응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으로 지상(智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 등 세 가지 거친 양상은 외경(外境)이 있어 심법(心法)과 상대적으로 호응하기 때문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미세한 생멸의 양상으로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은 심법(心法)과 외경(外境)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아 외경이 심법과 더불어 아직은 상대적으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생멸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집상응염심(執相應染心)은 삼계 안의 범부인 삼현위(三賢位)가 깨달을 경계입니다.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과 나아가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과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십지(十地)보살이 깨달을 경계이며, 그리고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주관과 객관이 아직 나뉘지 않고 생멸로 진행하는 양상도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경계라고 하였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거친 마음의 의식과 미세한 마음의 의식이란 2가지 분별생멸양상의 의식(意識)은 모두가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를 의지하고 일어나 훈습(薰習)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를 구별해서 말한다면 이른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인(因)을 의지하여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을 내고 경계의 연(緣)을 의지하여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相應染心)을 냅니다. 여기서 인(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근본무명불각 때문에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을 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연(緣)을 의지한다는 것은 경계의 반연(攀緣)함을 의지하여 망심으로 세 가지 거친 양상의 경계를 일으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를 수행으로 대치하여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지면 무명으로 일으킨 현식(現識)의 경계인 연(緣)도 따라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해서 일어난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지고, 경계의 반연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여 일어난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집니다.

상응(相應)한다는 것은 분별지·집취상·계명자상의 세 가지 거친 양상입니다. 이는 밖으로 오진(五塵)의 경계상이 있어 심법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호응하고, 다시 심왕(心王, 인식의 주체)과 심소(心所, 인식작용)도 서로 따라서 호응을 합니다. 불상응(不相應)은 심법과 경계상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나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삼추와 삼세로 생멸하는 모습을 논변하였고, 다음은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오염된 마음의 번뇌를 끊어 가는 수행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두 염심은 거친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양상이므로 삼계내범(三界內凡)인 삼현위(三賢位)에서 깨달을 경계입니다. 분별지상과 상속상은 거친 양상 가운데서는 미세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며,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의 두 염심은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는 거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므로 이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깨달을 경계입니다. 근본무명업상의 경우는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도 미세한 양상에 해당하므로 부처님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육염심을 깨달아 여의어 가는 대체적인 단계입니다.

"거친 의식의 양상과 미세한 의식의 양상인 두 가지 생멸(生滅)하는 양상이 근본무명을 의지해서 있다"는 것은 이 육염심이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나왔으므로 역시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최초에 근본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해서 세 가지 미세한 생멸하는 양상이 나왔고, 세 가지 미세한 양상 가운데는 거친 양상인 경계상(境界相)이 연(緣)이 되어 여섯 가지 거친 생멸하는 양상이 증가해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요인이 사라졌다면 경계의 반연(攀緣)도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의 요인이 사라지면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이 사라지고, 반연(攀緣)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거친 양상이 사라집니다. 이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형세입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12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상기해 보면 무명(無明)이 명(明)이 되는 것과 같이 불각(不覺)이 각(覺)이 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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