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三界唯心(삼계유심)
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시고삼계허위유심소작)
離心則無六塵境界(리심즉무육진경계)
그러므로 삼계(일체법)는 허위로써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것이며, 마음을 여의면 육진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삼계(三界)= 욕계(欲界)는 남녀의 구별이 있고 탐욕과 성욕이 있는 세계
색계(色界, 몸이 있는 세계)는 욕망을 떠나 선정에 들어간 세계로서, 마음이 통일되어 외계의 인식이 없어지고 신체의 안락을 받는 세계이다.
무색계(無色界, 몸이 없고 마음만 있는 세계)는 선정체험이 심화되어 육체의 인식이 사라지고 마음 만을 경험하는 세계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세계(三界)가 있다고 보고, 여기에는 우주, 일체의 생물의 세계가 모두 포함된 것으로 파악한다.
허위(虛僞)= 실재가 아니고 마음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의미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경계
[三界(삼계) : 탐욕의 세계인 욕계(欲界), 탐욕을 벗어났지만 물질적인 속박이 있는 색계(色界), 물질적인 속박을 벗어난 정신적인 세계인 무색계(無色界).
元曉 : 是故 아래는 세 번째 ‘마음에 의한다’는 뜻을 결론 맺어 밝혔다. … 처음에 是故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식(業識 ~ 相續識) 등이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런 뜻이므로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십지경(十地經)≫에서 “불자야. 삼계는 다만 일심이 지은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물처럼바람처럼]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 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통섭불교]
[기신론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식의 세계를 업식, 의식(意識) · 전식(轉識) · 현식(現識) · 지식(智識) · 상속식(相續識)의 다섯 가지 식(識)이 각기 독립된 체(體)가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들은 모두가 무명의 활동결과로 본다. 따라서 자기가 인식하여 판단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속의 일에 불과한 것이며, 일심이 무명에 따라 바뀌어 움직인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비친 삼계는 허위, 허망이며 일심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이 마음을 떠나면, 육진(六塵) 육경(六境)으로서의 마음에 나타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망심(妄心)으로 나타난 세계로서, 있는 그대로의 외계의 실재를 나타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부의 인식세계는 망심에 의한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망상의 세계이지만, 불타가 인식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를 비추이는 세계이므로, 실재이다,
그러나 삼계가 모두 허위라고 하지만, 우리의 외계에 대한 인식에는 객관성이 있어 일상적으로 연속성이 있으며,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을 새로운 사물에 적용시킨다 하더라도 타당성이 있다. 이성의 판단으로도 확실성이 있고 타인과의 관계나 상호 이해에도 연대성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일상적 경험까지도 어찌하여 마음이 만들어 내는 ‘유심소작(唯心所作)’일 것인가? 유심(唯心)이라 하더라도 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불타가 인식하는 실재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유심소작(唯心所作),삼계허망(三界虛妄)’은 단지 범부가 경험하는 내용을 범부의 마음이 나타내는 것일 뿐,실재의 외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필자(전종식)의 견해로는 망심소작(妄心所作)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離心則無六塵境界 마음을 떠나면 곧 육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서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외계는 경계상(境界相)이 현식(現識)에 비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식에 외계를 비치는 힘이 없어진다면, 예를 들어 안근()이 손상되어 없다면 빛깔이 없듯이, 자기에 있어서의 외계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계는 자기의 마음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마음으로 보는 외계에 공통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현식의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의, 타인이 인식한 그대로의 인식은 있을 수 없다. 붉은 색을 본 여러 사람이 동일한 붉은 색을 보았다 하더라도 시력의 차이에서 차별이 있고 색맹이 본 붉은 색은 다른 사람이 본 붉은 색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전종식]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一切法(이일체법) 皆從心起(개종심기)
妄念而生(망념이생) 一切分別(일체분별) 卽分別自心(즉분별자심)
心不見心(심불견심) 無相可得(무상가득)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일체의 법은 모두 마음따라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가히 얻을 수 있는 상이 없는 것이다.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다. 경계상이라는 것도 마음이 무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것이며, 무엇인가 보았다면 그것은 모두 마음을 분별한 것이 된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거니와 그 본체가 공하여 무엇을 보았다면 그것은 모두 망념이다.
心不見心 無相可得 :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다. 일체의 분별이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므로 본래 볼 수 없는 것을 분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얻을 수 있는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다.
元曉 : 此義云下 이하는 널리 해석한 것인데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제법이 없지 않지만 있지 않음을 밝혔고, 나중에 제법이 있지 않지만 아주 없지는 않음을 밝혔다. 처음에 以一切法 皆從心起 妄念而生이란 모든 법이 나타남이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心不見心 無相可得이라 한 것은 모든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 만약 꿈 가운데 보는 모든 일처럼, 이와 같은 소견(所見)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능견과 소견의 두 가지 상이 있을 것이나, 그 꿈 가운데에는 실로 두 가지 법이 없다. 삼계의 모든 마음이 다 이 꿈과 같으니 마음을 떠난 밖에는 분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一切分別 卽分別自心이라 한 것이다. 또한 자심에 나아가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이 칼이나 손가락 같은 것이 (칼) 스스로를 자르거나 (손가락 스스로를) 가리키지 못함과 같기 때문에 心不見心이라 한 것이다. 이미 볼 만한 대상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볼 수 없으니, 소견이 없기 때문에 능견도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능과 소의 두 가지 상이 모두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無相可得이라 한 것이다.]
[‘以一切法 皆從心起 일체법은 모두 마음 따라 일어나고, 妄念而生 망념으로 생기며, 一切分別 일체의 분별은 바로 卽分別自心 스스로의 마음이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외계의 삼라만상이 현식에 반영되는 것은 무명망념(無明妄念)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지만, 이것은 다시 지식(智識)에 의하여 호오(好惡), 애증(愛憎), 희비(喜悲) 등의 분별세계가 전개된다.
일체의 분별은 무명이 그 원인이기 때문에 무명이 없어지면, 분별이 없는 일심(一心)의 세계가 실현된다.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일체의 분별은 바로 스스로의 마음이 분별하는 것’이므로 ‘心不見心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면’ 이는 보려는 주관의 마음과 보이는 객관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일심의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법계일상(法界一相)의 마음의 세계가 성립되어 ‘無相可得 얻어질 수 있는 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當知世間一切境界(당지세간일체경계) 皆依衆生無明妄心(개의중생무명망심) 而得住持(이득주지)
마땅히 알라.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들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물러 있게 된다.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如鏡中像無體可得(여경중상무체가득) 唯心虛妄(유심허망)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실체)를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오직 마음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以心生則種種法生(이심생즉종종법생) 心滅則種種法滅故(심멸즉종종법멸고)
마음이 생겨 나면 갖가지의 법이 생겨 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의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지만, 현상으로 없는 것도 아니다.
* 憨山 : 실로 진여일심은 본래 생멸이 없지만, 최초의 일념무명이 망심으로 요동하기 때문에 이윽고 광대하여 차별적인 모습 없는 진여일심이 삼계의 허망한 차별법으로 되었다. 이야말로 삼계의 모든 허망한 법이 일심에서 일어나 망념을 따라 나온 것이다. - 중략 - 이 논서는 일심이 곧바로 진여임을 지적하여 견성성불을 하게하였다. 다만 일념무명의 실재하는 세상이 없음을 오해(悟解)하기만 하면 바로 불지가 발현하리라. 이는 이른바 “무념임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불지를 향한다.”고 했던 경우에 해당한다.
* 元曉 : 當知 이하는 있지 않으나 없지도 않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當知世間 ~ 無體可得 唯心虛妄은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以心生則法生 이하는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무명의 힘에 의해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내지 일체의 경계 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心生則種種法生고 한 것이다. 만약 무명의 마음이 사라지면 경계가 따라서 사라지며, 모든 분별심이 모두 따라서서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心滅則種種法滅이라고 말한 것이니 찰나를 기준으로 생멸을 밝힌 것이 아니다.]
[법장은 심불견심(心不見心)을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면’이라는 것은 이미 경계의 모습이 없어지고 식(識)도 스스로의 연(緣)이 없어져, 그 때문에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식(識)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능소(能所) 즉 보려는 마음(망념)과 보이는 마음(진심)이 모두 고요해지기 때문에 ‘얻어질 상이 없게 된다’고 하여, 심불견심의 경계를 능소(能所) 즉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경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음에는 ‘보려는 마음’ 그것은 망심이고 그 망심이 끝내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불심이고 진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심, 불심을 보려고 수행을 계속해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마음(망심)으로 하여금 마음(진심)을 보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르며, 그는 이미 보려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이 사라진 것이므로 불타의 경계에 들어 선 것이다.
기신론에 따르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정확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본성을 보려고 하는 한 영원히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그 마음(본성)을 보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성불할 수 있는, 반드시 주관과 객관이 사라져야 만이 성불할 수 있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마음은 보려는 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외계가 바로 그 마음에 그대로 비치는 것이나, 우리 중생심은 그와 다르기에 세간의 일체 경계가 망심에 의하여 변형(變形) 유지(維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체 경계는 개개인의 마음 그 자체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지속되는 경계에 대한 분별에 의하여 외계의 인식이 연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법은 거울 속에 비쳐진 허상(虛像)과 같이 실체가 아닌 것이며, 오직 마음이 만들러 낸 허망에 의하여 보는 것이다. 현식(現識)에 비치어 경험하고 있는 일체는, 실체같이 나타날 뿐, 실체가 아닌 것이며, 마음에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마음에서 생기면 바로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에서 멸하면 바로 여러 가지 법이 멸하는 것’이라고 본문이 설하는 것이다.-전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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