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3

 

何以故數息?用意亂故。何以故不得?用不識故。何以故不得禪?用不棄習盡證行道故也。

무슨 까닭으로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하는 것인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 것인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禪)을 얻지 못하는 것인가? 습(習)을  버리고 도(道)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數息爲地,相隨爲犂,止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事,乃隨道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보습이 되며, 

지(止)는 멍에가 되고, 관(觀)은 씨앗이 되며, 환(還)은 비가 되고, 정(淨)은 행함이 되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로써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數息斷外,相隨斷內,止爲止罪,行觀卻意,不受世閒爲還,念斷爲淨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으로써 바깥을 끊고, 그에 따라서 안을 끓으며, 

지(止)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관(觀)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還)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淨)이 되는 것이다.

 

意亂當數息,意定當相隨,意斷當行止,得道意當觀,不向五陰當還,無所有當爲淨也。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를 할 것이며, 

뜻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멈춤의 지(止)를 행할 것이요, 

도의(道意)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오음(五陰, 오온)을 향하지 않으면 마땅히 돌아오는 환(還)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면 마땅히 청정(淨)하여 지는 것이다.

 

多事當數息,少事當相隨,家中意盡當行止,畏世閒當觀,不欲世閒爲還,念斷爲淨也。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를 할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멈춤의 지(止)를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한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면 환(還)이 되는 것이며, 

생각이 끊어지면 깨끗한 정(淨)이 되는 것이다.

 

何以故數息?不欲隨五陰故。何以故相隨?欲知五陰故。何以故止?欲觀五陰故。何以故觀陰?欲知身本故。何以故知身本?欲棄苦故。何以故爲還?厭生死故。何以故爲淨?分別五陰不受故。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하는 것인가? 오음(五陰)을 따르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를 하는 것인가? 5음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멈춤의 지(止)를 행하는 것인가? 5음을 관(觀)하고자 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5음을 관(觀)하는 것인가? 몸의 근본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고자 하는 것인가? 고(苦)를 버고자 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돌아오는 환(還)이 되는 것인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요,

무슨 까닭에 청정한 정(淨)이 되는 것인가? 5음(陰)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便隨黠慧八種道得,別爲得所願也。行息時爲隨數,相隨時爲隨念,止時爲隨定,觀時爲隨淨,還時爲隨意,淨時爲隨道,亦爲隨行也。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道)를 얻고 또한 따로 소원을 얻게 되나니, 

숨(息)을 행할 때에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춤의 지(止)에서는 정(定)을 따르며, 관(觀)을 할 때에는 정(淨)을 따르며, 

돌이킴의 환(還)일 때에는 뜻(意)을 따르며, 정(淨)일 때에는 도(道)를 따르고 또한 행(行)을 따르며, 

 

數息爲四意止,相隨爲四意斷,止爲四神足念,觀爲五根、五力,還爲七覺意,淨爲八行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4의지(意止, 사념처)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4의단(意斷, 사정단) 되며, 

멈춤의 지(止)는 4신족념(神足念, 사신족) 되고, 

() 5() 5() 되며, 

돌이킴의 환(還) 7각의(覺意, 칠각지) 되고, () 8() 되며, 

 

得息不相隨,不爲守意;得相隨不止,不爲守意;得止不觀,不爲守意;得觀不還,不爲守意;得還不淨,不爲守意;得淨復淨,乃爲守意也。

숨을 세는 것을 얻고서도 서로 따르지 않는다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를 얻고서도 멈추지(止)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의 지(止)를 얻고서도 관(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관(觀)을 얻고서도 돌이키지(還) 않는다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의 환(還)을 얻고서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나니, 

청정함의 정(淨)을 얻고서도 다시 청정하여야 마침내 수의(守意)가 되는 것이다.


已念息,惡不生,復數者,爲共遮意,不隨六衰故。行相隨爲欲離六衰,行止爲欲卻六衰,行觀爲欲斷六衰,行還爲欲不受六衰,行淨爲欲滅六衰。已滅盡,便隨道也。

이미 숨을 생각하는 염식(念息)하여서 악(惡)이 생겨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쇠(衰, 육입이 쇠퇴하는 것)를 따르지 않고자 하는 때문이며,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를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고자 하는 것이요, 

멈춤의 지(止)는 6쇠의 행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며, 

관(觀)은 6쇠의 행을 끊고자 하는 것이요, 

돌이킴의 환(還)은 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는 것이며,

청정함의 정(淨)은 6쇠를 멸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道)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數息欲遮意,息中有長短,當復遮是長短意也。何以故守意?欲止惡故。惡亦可守,亦不可守。

何以故?惡已盡,不當復守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은 뜻을 막고자 하는 것으로, 숨에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하나니,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惡)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數息有三事:一者、當坐行;二者、見色當念非常不淨;三者、當曉瞋,恚、疑、嫉,念過去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가지의 삼사(三事)가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을 보고 마땅히 비상(非常)과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땅히 성냄ㆍ의심ㆍ질투함을 분명히 알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數息亂者,當識因緣所從起,當知是內意。一息亂者是外意過,息從外入故;二息亂者是內意過,息從中出故。三、五、七、九屬外意,四、六、八、十屬內意。嫉、瞋、恚疑、是三意在內;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七意及餘事屬外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어지러운 것은 마땅히 인연을 좇아 일어나는 바임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은 안의 뜻인 내의(內意)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나니,  

 번째의 일식(一息, 들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바깥 뜻인 외의(外意)의 허물이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오기 때문이요,

 번째의 이식(二息, 날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안의 뜻인 내의(內意)의 허물이니, 숨이 가운데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요,

3ㆍ5ㆍ7ㆍ9번째는 바깥 뜻인 외의(外意)에 속하고,

4ㆍ6ㆍ8ㆍ10번째는 안의 뜻인 내의(內意)에 속한다. 

질투ㆍ성냄ㆍ의심의  가지 뜻인 내의(內意)은 안에 있고,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의 일곱 가지 뜻과 나머지는 밖인 외의(外意)에 속한다.


得息爲外,不得息爲內。息從意生,念息合爲一,數息至盡數,爲一亦非一,意在外,息未盡故。譬如數錢,意在五,數爲一也。數息所以先數入者,外有七惡,內有三惡,用少不能勝多,故先數入也。

숨을 얻을  있는 득식(得息) 밖이 되고, 숨을 얻을  없는 불득식(不得息) 안이 되며,

숨은 뜻을 좇아 생기므로 생각과 숨을 합쳐 하나라고 세나, 

숨이  하면 하나를 세기도 하고  하나를 세지 않기도 하는 것은, 뜻은 밖에 있으나 미처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자면, 돈을 세면서 뜻은 다섯 번째에 있는데, 세기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숨을 세는 수식(數息)에서,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밖에는 7악(惡)이 있고 안에는 3악(惡)이 있으므로 적은 것이 능히 많은 것을 이길  없기 때문에 셈이 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數息不得者,失其本意故。本意,謂非常、苦、空、非身。失是意墮顚倒故,亦爲失師。師者,初坐時,第一入息得身安便次第行;爲失其本意,故不得息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얻지 못하는 것은  본래의 뜻인 본의(本意)를 잃었기 때문이니, 

본래의 뜻은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의 이치이니,

 본래의 뜻을 잃고 뒤바뀜의 전도(顚倒)에 떨어진 까닭에 또한 사(師)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사(師)는 처음 앉았을   번째 들이 쉬는 숨의 제일입식(第一入息)에서 몸의 편안함과 차례대로 행함을 얻는 것이니,  본래의 뜻을 잃었기 때문에 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數息,意常當念非常、苦、空、非身,計息出亦滅,入亦滅。已知是得道疾,當持非常恐意。得是意,卽得息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에 뜻으로 항상 마땅히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을 생각해야 하며,

숨이 나와도 또한 없어지고 들어가도 또한 없어짐을 헤아려야 하나니,

이것을 이미 안다면 도를 얻음이 빠를 것이니, 마땅히 비상(非常)과 공(恐)의 뜻을 가져야만 하며,

이 뜻을 얻으면 곧 숨(息)을 얻는 것이다.

 

入息、出息所以異者,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用是爲異,道人當分別是意也。

들이쉬는 입식(入息)과 내쉬는 출식(出息)이 다른 까닭은, 내쉬는 출식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출식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입식은 식음(識陰)이 되나니

이러한 까닭에 다른 것이니, 도인(道人)은 마땅히 이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入息者爲不受罪,出息者爲除罪,守意者爲離罪。入息者爲受因緣,出息者爲到因緣,守意者爲不離因緣也。
들이쉬는 입식은 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요, 내쉬는 출식은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요,

뜻을 따르는 수의(隨意)는 죄를 여의기 위함이며,

들이쉬는 입식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내쉬는 출식은 인연에 이르기 위함이요,

뜻을 따르는 수의(隨意)는 인연을 여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2

 

此經多隨字,除數息相隨之隨,餘皆他本作隨

이 경에서는 따를 수(隨)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하는데, 수식상수(數息相隨)의 수(隨) 자를 생략하나, 나머지 다른 모든 본(本)에서는 수(隨) 자를 쓴다.

 

佛在越祇國舍羈瘦國,亦說一名遮匿迦羅國。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 발지국, 인도의 동북부의 릿차비족의 왕국)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時佛坐行安般守意九十日,佛復獨坐九十日者,思惟挍計,欲度脫十方人及蜎飛蠕動之類。

이 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으셔서 안반수의(安般守意, anapana-sati의 한역)를 행하시고,

다시 부처님께서 홀로 90일 동안 앉아서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의 사람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안(安)은 안나(安那, ana) 즉 들숨의 입식(入息)을 말하고

반(般)는 반나(般那, pana) 즉 날숨의 출식(出息)을 말함.

수의(守意)는 sati(사티), 즉 념(念)으로 입식과 출식에 집중하여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마음챙김.

 

復言:“我行安般守意九十日者,安般守意,得自在慈念意;還行安般守意已,復收意行念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하고 인자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어서 다시, 돌이켜 안반수의(anapana-sati)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安爲身,般爲息,守意爲道。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을 쉬는 식(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되는 것이니, 

 

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亦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息意,亦爲道也。

수(守)는 금함의 계(禁)이니,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금(禁)은 또한 보호함의 호(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의(意)는 숨쉬는 식(息)이니, 또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安爲生,般爲滅,意爲因緣,守者爲道也。

안(安)은 생겨남의 생(生)이고, 

반(般)은 멸함의 멸(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道)가 되며, 

 

安爲數,般爲相隨,守意爲止也。

안(安)은 셈의 수(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이며, 

수의(守意)는 멈춤의 지(止)이며, 

 

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염도(念道)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해결(解結)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불타죄(不墮罪)이며, 

 

安爲避罪,般爲不入罪,守意爲道也。

안(安)은 죄를 피하는 피죄(避罪)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불입죄(不入罪)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되며, 

 

安爲定,般爲莫使動搖,守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막사동요(莫使動搖)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막난의(莫亂意)이니,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서 무위(無爲)에 이르는 득무위(得無爲)인 것이다.

 

安爲有,般爲無。意念有,不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

有者謂萬物,無者謂疑,亦爲空也。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여도 도(道)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하여도 도(道)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니,

유(有)는  가지의 만물(萬物)을 말하고,

무(無)는 의심의 의(疑) 또는 공(空)이며, 

 

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亦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안(安)은 본래의 인연인 본인연(本因緣)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는 무처소(無處所)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바가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를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는 멸무처소(滅無處所)를 아는 것이 바로  수의(守意)인 것이며, 

 

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청정무위(淸淨無爲)인 것이며,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나니, 다시는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安爲未,般爲起。已未起,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若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안(安)은 아직의 미(未)이고, 반(般)은 일어날 기(起)이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뜻을 지킬 수 있는 수의(守意)이지만, 

만약 뜻(意)이 이미 일어났다면 수의(守意)로써 지켜야 하며, 

만약 뜻(意)이 이미 일어났다면, 뜻이 날뛰어서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신 것이다.

 

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안(安)은음(五陰, 오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의 신구의(身口意)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守意者,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수의(守意)란,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뜻(意)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며, 

뜻(意)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守意)가 되는 것이다.

 

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意亦不死,是爲道也。

수의(守意)는, 뜻(意)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의 생(生)으로 인하여 죽음의 사(死)가 있게 되어서 그 뜻(意)을 지킬  없으며, 

뜻(意)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意)이 또한 죽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의 지혜인 십힐(十黠)이 있으니,

들숨과 날숨을 세는 수식(數息),

호흡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

호흡과 의식이 고요히 안정되어서 하나를 이루는 지(止),

지(止)의 지혜로 관찰하는 관(觀),

마음이 고요하여서 스스로의 주체로 돌아서 적정한 환(還),

일체의 번뇌와 집착이 없는 정(淨)과 4제(四諦),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 37 조도품)'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守意,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二者、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수의(守意)란, 마치 등불과 같이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는 괴명(壞冥)이며, 둘째 밝음을 보는 견명(見明)인 것과 같이,

수의(守意)도 첫째는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여 주는 견힐(見黠)인 것이다.

 

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是爲守意也。

수의(守意)는, 뜻(意)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는, 이것이 바로 수의이며, 

 

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生;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

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守,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니, 

수(守)와 의(意)는 각각 다른 것으로,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경계에 대하여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이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나니, 이것이 수의인 것이다.

 

守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樂;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是爲四樂。法爲行,得爲道。

수의(守意)에는 네 가지의 즐거움인 사락(四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으로, 이러함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니,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의 득(得)은 도(道)가 되는 것이다.

 

守意六事爲有內外:數、隨、止是爲外,觀、還、淨是爲內。隨道也,

何以故?念息相隨,止觀還淨,欲習意近道故。離是六事,便隨世閒也。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의 수의육사(守意六事)에 안과 밖이 있으니,

숨을 세는 수식(數息)과,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와 멈추어 고요한 지(止)는 밖(外)이 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의 관(觀)과 주체로 돌아온 환(還)과 번뇌와 집착이 없는 정(淨)은 안(內)이 되어서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하는 염식(念息)과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와 

지(止)와 관(觀),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를 여읜다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數息爲遮意,相隨爲斂意,止爲定意,觀爲離意,還爲一意,淨爲守意。用人不能制意,故行此六事耳。

숨을 세는 수식(數息)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하는 정의(定意)가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의는 이의(離意)가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하는 일의(一意)가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키는 수의(守意)가 되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없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육사(六事)를 행하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1

강승회(康僧會) 서문(序文)
 

강승회(康僧會, ?-280년)는 중국 삼국시대 오(吳) 나라의 강거(康居)출신의 역경승이다. 지겸에 이어 3세기 중반부터 활동한 역경승이며, 오의 손권(孫權)에 이어 손호(孫皓)에 이르기까지 수도였던 건업(建鄴,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강승회의 조상은 강거사람으로 인도에 살고있었다. 승회의 아버지는 상인으로 베트남으로 건너가 정착하였으며, 승회는 부모와 사별한 후 출가수도를 시작했다. 또한 천문학, 참위학(讖緯学)에도 밝아서. 적오10년(247년)에 오의 수도 건업 (建業)으로 들어가 손권(孫権)의 지지를 얻어 강남지방에 최초의 불교사원 건초사(建初寺)를 건립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단 강승회보다 앞서 지겸(支謙)이 이미 20년전에 강남에서 선교 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건초사에 대한 에피소드는 승회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속설로 생각된다.
그 후 경전을 한역하는 일에 종사하며 그중에서도 『육도집경(六度集経)』은 역경된것이 아니라 강승회 자신의 저술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손권 손호(孫皓)와의 사이에 펼쳐진 인과응보에 관한 대론이 그 전기에 기제되고있어 초기의 중국 불교와 유교적인 관념과의 접촉, 교섭의 단서로서 주목할만 하다. 서진(西晋)의 태강원년(280년)에 원적(円寂). 저서로는 『육도집경』외에 『오품경(呉品経)』、『잡비유경(雑譬喩経)』등이 있다.

 

夫安般者,諸佛之大乘,以濟衆生之漂流也。其事有六,以治六情。情有內外:眼、耳、鼻、舌、身、心,謂之內矣;色、聲、香、味、細滑、邪念,謂之外也。經曰諸海十二事,謂內外六情之受邪行,猶海受流。

안반(安般, anapana, 안나반나, 수식관)이라는 것은 여러 부처님들의  가르침인 대승(大乘)으로, 세속에서 표류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안반의 선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것으로 6정[六情]을 다스리는 것이다.

정(情)에는 안과 밖의 내외(內外)가 있으니,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마음(心) 안(內)이고,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감의 세활(細滑) ⋅ 사념(邪念)은 바깥(外)이라 한다. 

경(經)에서 “여러 바다의 12가지 현상의 십이사(十二事)”라고  것은, 안과 바깥의 6정이 삿된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바다가  세상의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안반(安般) : 범어 ‘anapana’를 음사한 말로 아나파나(阿那波那) 혹은 안나반나(安那般那)로 표기되던 것을 줄여 안반이라 고 한 것이다. 같은 말로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하는데, 수를 헤아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집중시키는 관법이다.

 

餓夫夢飯,蓋無滿足也。心之溢盪,無微不浹;怳惚髣髴,出入無閒;視之無形,聽之無聲;逆之無前,尋之無後;深微細妙,形無絲髮。梵釋僊聖所不能照明,默種于此化生乎。

굶주린 사람이 꿈에서도 밥을 먹는 것은 대개 만족하지 못한 때문이니, 

마음이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작은 것에도 6정이 작용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습은 너무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며,  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아도 그것을 그릴  없고, 들어도 소리로 나타낼  없으며, 

이것을 맞닥뜨려서 알고자 하여도  앞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좇아서 탐구한 뒤에도 남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은밀하고 너무나 오묘하여서  모습을 터럭만큼도 형용할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범천(梵) · 제석(釋) ·신선(仙) · 성자(聖)도 육정(六情) 실체를 밝힐  없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나, 마음에 심어져서 고요히 생겨난 것이다.

 

彼非凡所睹,謂之陰也,猶以晦曀種夫深芬,闓手覆種,孳有萬億,旁人不睹其形,種家不知其數也。一朽乎下,萬生乎上,彈指之閒,心九百六十轉;一日一夕,十三億意。意有一身,心不自知,猶彼種夫也。

육정의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엿볼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음(陰)’이라 하나니, 

마치 그늘진 곳에 농부가 땅을 깊게 파서 손수 씨앗을 덮어주면 씨앗이   없을 만큼의 열매를 맺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이루어진 과정을   없고, 씨를 뿌린 사람도  수(數)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래에서 하나가 썩어도 위에서는  가지가 생겨나는 것과 같이, 

손가락을   튕기는 짧은 시간의 탄지지간(彈指之閒)에도 마음은 960번을 변하는 것이니, 

하루 밤낮이면 13억의 생각(意)이 생겨나는 것이다. 

생각생각마다 하나의 몸통인 일신(一身)이 있으나 마음(心)은 스스로가  수가 없으니, 씨를 뿌린 농부와 같은 것이다.

 

是以行寂,繫意著息,數一至十;十數不誤,意定在之;小定三日,大定七日,寂無他念,怕然若死,謂之一禪。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이 날뛰지 않게  붙잡고 호흡을 시작하여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세는 것이니, 열을  때까지 잘못되지 않으면 생각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자리를 찾은 것이다. 

짧은 입정인 소정(小定)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며,

소정(小定)은 3일을 하고,  입정의 대정(大定)은 7일 동안 하는데, 

고요히 다른 생각의 염(念)이 없어지고 죽은 듯이 생각이 맑아지나니, 이를  번째 선인 일선(一禪)이라 하며, 

 

禪棄也,棄十三億穢念之意。已獲數定,轉念著隨,蠲除其八。正有二意,意定在隨,由在數矣!垢濁消滅,心稍淸淨,謂之二禪也。

선(禪)은 버린다는 뜻이니, 13억의 더러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수를 세어 생각을 고요히 하였으면, 

뜻(念)을 바꾸어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르니, 더러운 생각은 열에 여덟이 제거되어서,

바로  가지 생각의 이의(二意)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이 고요하여지고 뜻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게 되는 것은, 수를 세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가고 마음이 점점 맑아지게 되나니, 이를 일러  번째 선인 이선(二禪)이라 하며, 

 

又除其一,注意鼻頭,謂之止也。得止之行,三毒、四走、五陰、六冥,諸穢滅矣,㷡然心明踰明月珠。婬邪污心,猶鏡處泥穢垢污焉;偃以照天,覆以臨土;聰睿聖達,萬土臨照。雖有天地之大,靡一夫而能睹,所以然者,由其垢濁。衆垢污心,有踰彼鏡矣!

다시  나머지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코끝인 비두(鼻頭)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지(止)라 한다. 

이렇게 생각을  곳에 집중하는 지(止)의 선법을 얻으면,

탐진치의 삼독(三毒)과 마음이 사방으로 치닫는 상태 등의 사주(四走)와、

색(色)ㆍ 수(受)ㆍ 상(想)ㆍ행(行)ㆍ식(識)의 오음(五陰, 오중)과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의 육명(六冥) 등의 모든 더러운 것이 소멸하게 되어서, 찬란하게 빛나는 마음의 밝은 빛이 명월주(明月珠)의 빛보다  밝을 것이니,

음탕하고 거짓된 더러운 마음은 거울이 아주 더러운 진흙탕에 놓인 것과 같은 것으로, 눕히면 하늘을 비출 것이고 엎어두면 땅만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스러우며 이치에 통달한 마음은  세상을 비출 것이니, 하늘과 땅이 광대하여서 평범한 사람은 엿볼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직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혼탁해져 있기 때문이니, 일체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은  진흙탕에 놓인 거울보다 심한 것도 있는 것이다.

 

육명(六冥) : 직역하면 여섯 가지 어둠을 뜻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전의 번역에서는 6도(六道)로 번역해 두었으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육도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若得良師剗刮瑩磨,薄塵微曀,蕩使無餘;擧之以照,毛髮面理,無微不察;垢退明存使其然矣!

情溢意散念,萬不識一矣。猶若於市,馳心放聽,廣採衆音;退宴在思,不識一夫之言。心逸意散,濁翳其聰也。若自閑處,心思寂寞,志無邪欲,側耳靖聽,萬句不失,片言斯著,心靖意淸之所由也。行寂止意,懸之鼻頭,謂之三禪也。

만약 좋은 스승을 얻어서 더러운 것을 깎아내고 마음을  닦아내면, 마음에 남아 있던 흠과 아주 작은 얼룩까지도 시원하게 씻기어 남은 것이 없게 되나니, 

이러한 마음을 들어서  세상을 비춘다면 터럭과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이치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음에 뭏어있던 흠들이 없어지고 밝은 마음만이 남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정(情)은 생각(意)을 요동치게 하고, 뜻(念)을 어지럽게 하여서,  가지의 이치 중에서 하나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시장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들으면 많은 소리들을 들으나, 집에 돌아와서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의 말도 제대로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풀어지고 생각(意)이 흩어지면  총명함이 흐려지고 어두우나,

만약 스스로 조용한 곳에 머물면서 마음과 생각(意)을 고요하게 한다면, 

그 뜻(志)에 거짓된 욕망이 없게 되고, 귀를 기울여 고요히 듣게 되어서, 들은 불법의 모든 구절의 만구(萬句)를 조금도 잃지 않게 되며, 

부처님의  마디 말씀인 편언(片言)까지도 분명하게 깨우칠 것이니, 

마음(心)이 고요하여지고, 생각(意)이 맑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생각을 모아서 코끝에 집중하는 것, 이것을  번째의 선인 삼선(三禪)이라 하며, 

 

還觀其身,自頭至足,反覆微察;內體污露,森楚毛豎,猶睹膿涕。於斯具照天地人物,其盛若衰,無存不亡。信佛三寶,衆冥皆明,謂之四禪也。

다시  몸을 관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반복하여 세밀히 살펴보면,  안의 더러운 농과 빽빽하게 곤두선 머리털을 마치 눈물이나 고름처럼   있을 것이니,

이러한 방법으로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과 사물(物)을 모두 관찰하여 본다면, 

 흥성함은 쇠망함과 같은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쇠망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나니, 

부처님의 삼보(三寶)를 믿게 되고, 모든 어두움의 명(冥)은 전부 밝아질 것이니, 이를 일러  번째의 선인 사선(四禪)이라 하는 것이다.

 

攝心還念,諸陰皆滅,謂之還也。穢欲寂盡,其心無想,謂之淨也。得安般行者,厥心卽明,擧明所觀,無幽不睹。往無數劫,方來之事,人物所更,現在諸剎,其中所有;世尊法化、弟子誦習,無遐不見,無聲不聞;怳惚髣髴,存亡自由;大彌八極,細貫毛氂。制天地,住壽命;猛神德,壞天兵;動三千,移諸剎,八不思議,非梵所測;神德無限,六行之由也。

마음을 다잡아서 고요히 하고 바른 뜻(念)으로 돌아간다면, 모든정의 음(陰)이  소멸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환(還)이라 하며,  

그리고 더러운 욕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  마음은 곧바로 대상을 구분하여서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의식 작용의 상(想)이 없어지게 되나니, 이것을 정(淨)이라 하나니,

안반의 선법을 얻은 사람은  마음이 곧장 밝아지고,  밝음으로  세상을 관찰한다면 아무리 깊이 감추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관찰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니, 

  없는 겁(劫)의 지나온 시간, 현재와 미래의 일들, 사람(人)과 사물(物)의 변화, 현재 존재하는 방방곡곡의 모든 세상인 제찰(諸刹), 그리고  가운데 있는 것들을 모두   있으며,

또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교화와 그 제자들이  가르침을 외고 학습하는 것을 보지 못함이 없으며,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없게 되어서, 6정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모습도, 존재와 소멸의 시작과  이유도 깨닫게 되나니,

그것이 커지면  세상의 팔극(八極)에 두루 미치게 되고, 가늘어지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모희(毛釐)도   있으며,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수명(壽命)을 주관하며, 거룩한 신덕(神德)을 발휘하고, 수 많은 군사의 천병(天兵)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세상의 방방곡곡을 옮겨 다닐 수 있으니,

 여덟 가지의 팔불사의(八不思議)는 범천도 측량할  없는 것이니, 이런 신묘한 덕의 무한함은 안반의 여섯 가지 선법인 육행(六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世尊初欲說斯經時,大于震動,人天易色,三日安般,無能質者。於是世尊化爲兩身,一曰何等、一尊主,演于斯義出矣。大士、上人、六雙、十二輩,靡不執行。

세존께서 처음  경전을 말씀하시고자 하실 때,  진동(震動)이 있어, 사람과 천신이 얼굴색을 바꾸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였으며, 세존께서는 3일 동안 안반(安般)의 선법을 하셨으며,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바로잡는 질(質, 질정 質正)이 없게 되었다. 

 때에 세존께서 변화되어  몸이 되셨으니, 하나는 하등(何等)이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존주(尊主)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일로 인하여 그 뜻이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大士), 상인(上人), 육쌍(六雙), 십이배(十二輩) 모두가 안반의 선법을 굳게 행하였다.

 

십이배(十二輩)는 십이천(十二天)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십이천은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이란 의미로 그곳을 지키는 열두 신(神). 사방(四方), 사유(四維)의 팔천(八天)에 상, 하의 2천(天) 및 일(日), 월(月)의 2천(天)을 더한 것이다.

곧 동에 제석천(帝釋天), 동남에 화천(火天), 남에 염마천(閻魔天), 서남에 나찰천(羅刹天), 서에 수천(水天), 서북에 풍천(風天), 북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에 대자재천(大自在天), 상(上)에 범천(梵天), 하(下)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 월천(月天)을 이른다.

 

有菩薩名安淸,字世高,安息王嫡后之子。讓國與叔,馳避本土;翔而後集,遂處京師。其爲人也,博學多識,貫綜神摸、七正、盈縮、風氣、吉凶、山崩、地動、鍼脈諸術。睹色知病,鳥獸鳴啼,無音不照。懷二儀之弘仁,愍黎庶之頑闇。先挑其耳,卻啓其目,欲之視明聽聰也。徐乃陳演正眞之六度,譯安般之秘奧,學者塵興,靡不去穢濁之操,就淸白之德者也。

이름이 안청(安清)이라는 보살이 있었는데, 자(字)는 세고(世高)이며, 고대의 이란계 왕국인 파르티아의 왕인, 안식왕(安息王)의 정실 왕후의 자식이었다. 

그는 나라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는 상이후집(翔而後集)하다가,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니,  

신묘한 모사의 신모(神摸) ⋅ 천체 운행의 칠정(七正) ⋅ 세상의 온갖 변화하는 현상의 영축(盈縮) ⋅ 풍기(風氣) ⋅ 길흉(吉凶) ⋅ 산사태의 산붕(山崩) ⋅ 지진의 지동(地動) ⋅ 침술의 침맥(鍼䘑) 등의 여러 기술에 통달하여서,

얼굴 빛을 보면 병을 알았고,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떤 짐승인지   있었으며,

또한 하늘과 땅, 양과 음의 이의(二儀)와 같이 넓고 어진 마음으로 백성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걱정하여서,

먼저 스스로의 귀를 세우고 스스로 눈을 열어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자 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천천히 백성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정진(正眞)의 6도(六度, 육바라밀)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고, 안반의 비밀스럽고 오묘한 뜻을 번역하여 주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으며, 그들의 더럽고 탁한 생각이 모두 없어지면서 맑고 깨끗한 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다.

 

* 상이후집(翔而後集) :『논어』「향당(鄕黨)」의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는 내용에서 나온 말.

* 칠정(七正) : 일(日)ㆍ월(月)과,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성(五星)인데, 순 임금이 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길흉을 판단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한다.

* 영축(盈縮) : 진퇴(進退)ㆍ굴신(屈伸)ㆍ다소(多少)ㆍ장단(長短)ㆍ수요(壽夭)ㆍ영허(盈虛) 등 온갖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余生末蹤,始能負薪,考妣殂落,三師凋喪;仰瞻雲日,悲無質受;睠言顧之,潛然出涕。宿祚未沒,會見南陽韓林、穎川皮業、會稽陳慧。此三賢者,信道篤密,執德弘正;烝烝進進,志道不倦

。余從之請問,規同矩合,義無乖異。陳慧注義,余助斟酌,非師所傳,不敢自由也。言多鄙拙,不究佛意,明哲衆賢,願共臨察;義有肬腨加聖刪定,共顯神融矣。

나는 말세에 태어나 땔감을 짊어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을 여의었고, 세 분의 스승님도 모두 돌아가셨으니, 구름과 해를 우러러보았지만 슬프게도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는, 질정(質正)을 받을 곳이 없게 되었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복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선생님,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선생님, 회계(會稽)의 진혜(陳慧)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세 분의 현자(賢者)들은 독실하고 철저하게 불도를 믿으셨고, 넓고 바른 덕을 지니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정진하셨으며 불도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내가 이 분들을 좇아 물음을 청하면, 세 분의 대답은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았고 그 의미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그리고 지혜를 베푸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내가 불도를 따져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나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비루한 데가 많고, 부처님의 뜻을 궁구하지도 못하였기에, 삼가 명철한 많은 현인들께서 함께 꼼꼼히 살펴봐주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함에도 군더더기가 많으니, 성인들께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서 감추어진 부처님의 신묘한 뜻을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 이었다. :『시경(詩經)』「대동(大東)」에 “주나라가 가는 길은 숫돌처럼 판판하여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길이요 소인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내가 머리를 돌려 그 길을 돌아보며 줄줄 눈물을 흘리노라.[周道如砥 其直如矢 君子所履 小人所視 睠言顧之 潸焉出涕]”라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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