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7
第五還棄結者,謂棄身七惡;第六淨棄結者,爲棄意三惡,是名爲還。還者,爲意不復起惡;惡者,是爲不還也。
다섯 번째 돌이키는 환(還)이라는 것은, 묶임의 결(結)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의 칠악(七惡)을 버리는 것이며,
여섯 번째의 청정한 정(淨)은, 묶임의 결(結)을 버리는 것이니, 뜻의 세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돌이키는 환(還)이라 하며,
돌이키는 환(還)이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돌이킴의 환(還)이 아닌 것이다.
還身者,謂還惡。得第五還,尚有身亦無身。何以故?有意有身,無意無身,意爲人種,是名爲還。還者,謂意不復起惡;起惡者,是爲不還。
몸을 돌이킨다는 환신(還身)이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으로,
다섯 번째인 돌이킴의 환(還)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을 이름하여 ‘돌이킴의 환(還)'이라 하며,
돌이키는 환(還)이란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의 환(還)이 아닌 것이다.
亦謂前助身,後助意。不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爲助身;不嫉、瞋恚、癡,是爲助意也。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나니,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조신(助身)이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조의(助意)가 되며,
還五陰者,譬如買金得石,便棄捐地不用;人皆貪愛五陰,得苦痛便不欲是,爲還五陰也。
5음(陰)을 돌이킨다 환오음(還五陰)을 비유하자면,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의 환오음(還五陰)이 된다.
何等爲便見滅盡處,謂無所有是爲滅處。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보는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問:已無所有,何以故爲處者?
無所有處有四處:一者、飛鳥以空中爲處;二者、羅漢以泥洹爲處;三者、道以無有爲處;四者、法在觀處也。
묻겠습니다; 이미 소유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면 무슨 까닭에 ‘곳(處)’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처(處)를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처(處)를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처(處)를 삼고,
넷째 법은 관(觀)으로 처(處)를 삼는다.
出息、入息受五陰相者,謂意邪念,疾轉還正以生覺斷,爲受五陰相。
言受者,謂受不受相也。以受五陰相,知起何所,滅何所。
滅者,爲受十二因緣,人從十二因緣生,亦從十二因緣死;
不念者,爲不念五陰也。
내쉬는 출식과 들이쉬는 입식에서 5음의 상(相)을 받는다는 수오음상(受五陰相)이라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 각 覺)가 생겨서 오음의 상을 받는 수오음상(受五陰相)인 것이다.
받는다는 수(受)라는 것은, 상(相)을 받지 않음을 받는 수불수상(受不受相)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아는 것이며,
소멸한다는 멸(滅)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며,
생각하지 않는다는 불념(不念)이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知起何所、滅何所,謂善惡因緣起便復滅,亦謂身,亦謂氣生滅。念便生,不念便死,意與身同等,是爲斷生死道。在是生死閒,一切惡事皆從意來也。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는 것이며,
또한 몸과 기(氣)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도, 생각을 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으로,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나니, 이 생사의 도를 끊음이 이 생사 가운데 있는 것이며,
일체의 악한 악사(惡事) 모두가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今不爲前、前不爲今者,謂前所念已滅,今念非前念;亦謂前世所作,今世所作,各自得福;亦謂今所行善,非前所行惡;亦謂今息非前息,前息非今息也。
현재는 과거가 아니고 과거는 현재가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앞에서 생각하였던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福)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하는 바의 선(善)은 앞에서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쉬고 있는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에 쉬었던 숨은 지금 쉬고 있는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爲生死分別者,爲意念生卽生,念滅卽滅。故言生死,當分別萬物及身。過去、未來福爲索盡。
何以故?盡以生便滅,滅便盡;已知盡,當盡力求也。
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란,
뜻(意)은 생각이 생겨나면 곧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다한 것이기 때문이니,
다하는 것임을 이미 알았다면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하는 것이다.
視上頭無所從來者,謂人無所從來,意起爲人;亦謂人不自作來者,爲有所從來;人自作自得,是爲無所從來也。
앞을 봄에 좇아서 온 바가 없다는 것이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온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라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오는 유소종래(有所從來)인 것이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얻는 자작자득(自作自得)이 바로 좇아서 온 바가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인 것이다.
生死當分別者,謂知分別五陰,亦謂知分別意生死 人意爲常,知無有常,亦爲分別也。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5음(陰)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과 함께 무상(無常)을 분별하여 안다는 것이다.
後視無處所者,爲今現在不見罪人在生死,會當得,無有脫於罪故。言後視無有處所。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람이 생사를 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未得道迹不得中命盡,謂已得十五,意不得中死;要當得十五意便墮道,亦轉上至阿羅漢也。
아직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이미 열다섯 가지의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서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르는 것이다.
中得道亦不得中命盡,爲息意身,凡三事,謂善惡意要當得道迹,亦復中壞;息死復生善意起復滅,身亦不得中死也。
중도에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으며,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숨(息)과 뜻(意)과 몸(身)의 세 가지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었다가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何等爲淨?謂諸所貪欲爲不淨,除去貪欲是爲淨。
何等爲五陰相?譬喩火爲陰,薪爲相也。
무엇이 정(淨)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淨)이 되며,
무엇이 5음(陰)의 상(相)인가? 비유하자면, 불은 음(陰)이 되고 땔감은 상(相)이 되며,
從息至淨,是皆爲觀;謂觀身相隨止觀還淨,本爲無有。內意數息,外意斷惡因緣,是爲二意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으로부터 정(淨)에 이르기까지의 이 모두가 관(觀)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이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는 수식(數息)이고, 밖의 뜻으로 나쁜 악인연을 끊음이 바로 두 가지 뜻이 되는 것이다.
問:何以故不先內外觀身體,反先數息、相隨、止、觀、還、淨?
報:用意不淨故,不見身,意已淨,便悉見身內外道。行有十九行,用人有十九病故,亦有十九藥。觀身念惡露,是爲止貪婬藥;念四等心,是爲止瞋恚藥;自計本何因緣有,是爲止愚癡藥;安般守意,是爲多念藥也。
묻겠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을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뜻이 청정하지 않은 부정(不淨)한 까닭에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의 도(道)가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열아홉 가지 행이란,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의 진에(瞋恚)를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가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가?를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의 우치(愚癡)를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되는 것이다.
內外自觀身體。何等爲身?何等爲體?骨肉爲身,六情合爲體也。何等爲六情?謂眼合色,耳受聲,鼻向香,口欲味,細滑爲身,衰意爲種,栽爲癡,爲有生物也。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觀)해야 하나니, 무엇이 신(身)이고? 무엇이 체(體)인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정(情)이 합하여 체가 되나니,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운 것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되는 것이다.
內外身體所以重出者何?謂人貪求,有大小,有前後。謂所欲得當分別觀。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에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觀)해야 하는 것이다.
觀者見爲念,念因見觀者爲知也。
관(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은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하여 보이게 되나니,
관(觀)한다는 것은 즉 아는(知) 것이다.
身觀止者,坐念起,起念意不離,在所行意所著爲識,是爲身觀止也。
신체를 관 (觀) 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서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識)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觀)하여 멈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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