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6

 

數息欲疾,相隨欲遲;有時數息當安徐,相隨時當爲疾。

何以故?數息意不亂當安徐,數亂當爲疾,相隨亦同如是也。

숨을 세는 수식을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를 느리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세는 수식을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를 빠르게 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수를 세는 수식을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니, 서로 따르는 상수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第一數,亦相隨所念異,雖數息,當知氣出入,意著在數也。數息,復行相隨。止觀者,謂不得息;前世有習,在相隨止觀。雖得相隨,止觀當還從數息起也。

번째로 세는 수식 또한 서로 따르는 상수가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이니,

비록 숨을 세는 수식을 할지라도 마땅히 () 나고 듦을 알아서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 행한다면, 이른바 쉬는 것을 얻지 못하나, 전생의 ()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과 () 있는 것이니, 

비록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과 관을 얻었을지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을 세는 수식으로부터 일으켜야 하는 것이.

 

數息意不離,是爲法離,爲非法數息,意不隨罪,意在世閒,便墮罪也。數息爲不欲亂意故,意以不亂復行相隨者,證上次意知爲止。止與觀同,還與淨同也。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 뜻(意)을 여의지 않으면, 이는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수식을 할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고자 하는 것이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상수를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 뜻을 증득하고 멈춤의 지(止)를 아는 것이라.

멈춤의 지(止)는 () 같고 돌이킴의 환(還) 청정한 () 같은 것이다.

 

行道得微意當倒意者,謂當更數息。若讀經已,乃復行禪微意者,謂不數息及行相隨也。

도(道)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뜻이 어긋나게 된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는 수식을 하거나 경(經)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禪)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면,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를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佛有六潔意,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六事能制無形也。

부처님께는 여섯 가지의 깨끗한 뜻의 육결의(六潔意)가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수식(數息)과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이라.  여섯 가지로써 능히 형체 없는 무형(無形)을 제어하시는 것이다.


息亦是意,亦非意。何以故?數時,意在息爲是;不數時,意息各自行,是爲非意。從意生息已,止無有意也。

숨(息)은 또한 뜻(意)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때에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에는 뜻과 숨이 각각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는 것이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人不使意,意使人。使意者,謂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是爲使意;人不行道,貪求隨欲,是爲意使人也。

사람이 뜻(意)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와 지(止)는 관(觀) 환(還)과 정(淨) '37품경(37 조도품)'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으로,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면서 욕심을 따른다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息有垢,息垢不去,不得息。何等爲息垢?謂三冥中最劇者,是爲息垢。何等爲三冥?謂三毒起時,身中正冥,故言三冥。三毒者;一爲貪婬,二爲瞋恚,三爲愚癡。人皆坐是三事死,故言毒也。數息時,意在數息;未數時,有三意:有善意、有惡意、有不善不惡意。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때의 구(垢)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하나니, 무엇이 구식(垢息)인가?

탐진치의 3명(三冥) 가운데에서 가장 극심한 것이  구식이다. 

무엇이명(三冥) 인가? 3독(毒)이 일어날 때의 몸 속은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하는 것이니,

3독이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의 진에(瞋恚), 셋째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가지로 인하여 죽는 까닭에 독(毒)이라 하는 것이다.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에는 뜻이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에는  가지의 뜻인 삼의(三意)가 있으니, 선한 뜻의 선의(善意)도 있고, 악한 뜻의 악의(惡意)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불선불악의(不善不惡意) 있는 것이다.


欲知人得息相者,當觀萬物及諸好色,意不復著,是爲得息;相意復著,是爲未得,當更精進。行家中意欲盡者,謂六情爲意家,貪愛萬物皆爲意家也。

사람이  쉬는 식상(息相)을 얻었음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觀)하여서 뜻이 그러한 것에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쉬는 식상(息相)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 각각)의 뜻을 행하는 것을 없애고자 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6정(情)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인 것이다.


相隨者,謂行善法,從是得脫,當與相隨;亦謂不隨五陰、六入、息與意相隨也。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서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음(陰)과 6입(入)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問:第三止何以故止在鼻頭?

報:用數息、相隨、止、觀、還、淨,皆從鼻出入,意習故處,亦爲易識,以是故著鼻頭也。

惡意來者斷爲禪,有時在鼻頭止,有時在心中止;在所著爲止。邪來亂人意,直觀一事,諸惡來,心不當動,心爲不畏之哉也。

묻겠습니다; 세 번째의 멈춤의 지(止)는,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는 것입니까? 

답한다;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 모두가 코로부터 들고 나는 것이니, 뜻으로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의 악의(惡意)가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禪)이니, 

어떤 때에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에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서 그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사(邪)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가지의 일사(一事)로 똑바로 관하여서,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止有四:一爲數止,二爲相隨止,三爲鼻頭止,四爲息心止。

멈춤의 지(止)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수지(數止)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상수지(相隨止)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비두지(鼻頭止)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식심지(息心止)이다.


止者,謂五樂六入,當制止之也。入息至盡鼻頭止,謂惡不復入至鼻頭止;出息至盡著鼻頭,謂意不復離身行向惡,故著鼻頭;亦謂息初入時,便一念向不復轉,息出入亦不復覺,是爲止也。

멈춤의 지(止)란, 이른바 5락(樂)과 6입(入)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니,

들이쉬는 입식(入息)이 코끝에 이르러서 모두 그치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추는 것이요, 

내쉬는 출식(出息) 코끝에 이르러서 모두 멈추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추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문득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止者,如如出息、入息,覺知前意出,不覺後意出。覺前意爲意相觀,便察出入息見敗,便受相畏生死,便卻意,便隨道意相也。莫爲相隨者,但念著鼻頭,五陰因緣不復念,罪斷意滅,亦不喘息,是爲止也。

멈춤의 지(止)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서 그 뜻을 서로 관(觀)하여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나, 만약 실패한다면 문득 상(相)을 받아들여서 생사를 두려워하면서 그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相)을 따르는 것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고서 5음(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며,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숨을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莫爲相隨者,謂莫復意念出入,隨五陰因緣,不復喘息也。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이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다시 숨을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第四觀者,觀息敗時,與觀身體異息,見因緣生,無因緣滅也。

 번째의 관(觀)이라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心意受相者,謂意欲有所得,心計因緣會當復滅,便斷所欲不復向,是爲心意受相也。

마음과 뜻의 심의(心意)로 상(相)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이른바 뜻에는 얻고자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는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한다는 것을 헤아려서 곧바로 욕망하는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심의수상(心意受相)인 것이다.


以識因緣,爲俱相觀者 謂識知五陰因緣,出息亦觀,入息亦觀;觀者謂觀五陰,是爲俱觀。亦應意意相觀,爲兩因緣,在內斷惡、念道也。

인연을 인식하여 상(相)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5음(陰)의 인연을 인식하고 알아서, 내쉬는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또한 관하는 것이니,

관(觀)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가지 인연이 되어서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觀出息異、入息異者,謂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隨因緣起便受陰,意所向無有常,用是故爲異,道人當分別知。是亦謂出息滅,入息生;入息滅,出息生也。

내쉬는 출식 다르고, 들이 쉬는 입식 다름을 관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내쉬는 출식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입식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출식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입식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는 것이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陰)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러함을 분별하여 알아야 하며,

또한 내쉬는 출식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입식이 생기는 것이라 하며, 

들이쉬는 입식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출식 생기는 것이라도 한다.


無有故者,謂人意及萬物,意起已滅,物生復死,是爲無有故也。

연고가 없다는 무유고(無有故)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는 것이니, 이를 바로 연고가 없는 무유고(無有故)라 하는 것이다.


非出息是入息,非入息是出息;非謂出息時意不念入息,入息時意不念出息,所念異故言非也。

내쉬는 출식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입식이며, 들이쉬는 입식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출식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中信者,謂入道中、見道因緣、信道,是爲中信也。

중신(中信)이란, 이른바 도(道) 가운데에 들어가서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中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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