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8

 

出息、入息念滅時,何等爲念滅時?謂念出入氣盡時,意息滅。

出息、入息念滅時,譬如畫空中,無有處 生死意道意俱爾也。

出息、入息念滅時,亦不說息,意息說滅時。出息、入息念滅時,物從因緣生,斷本爲滅時也。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하는 때가 되는 것인가? 

나고 듦의 출입(出入)을 생각하여 기(氣)가 다하였을 때가 뜻과 숨이 소멸하는 의식멸(意息滅)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비유하자면,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자 하여도 그릴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그러한 것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숨과 뜻의 의식(意息)을 설명할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하는 때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는 것이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하는 때가 되는 것이다.

 

內外痛痒見觀者,爲見痛痒所從起,便觀是,爲見觀也。

內外痛痒者,謂外好物爲外痒,外惡物爲外痛;內可意爲內痒,內不可意爲內痛。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되며,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으로 뜻이 맞는 내양(內痒)이 되고, 안으로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내통(內痛)이 된다.

 

在內爲內法,在外因緣爲外法;亦謂目爲內,色爲外;耳爲內,聲爲外;鼻爲內,香爲外;口爲內,味爲外;心爲內,念爲外。見好細滑,意欲得,是爲痒;見麤惡意,不用是爲痛。俱墮罪也。

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痒)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통(痛)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痛痒觀止者,若人臂痛,意不作痛,反念他一切身痛如是,以意不在痛,爲止痛;

亦可念,亦不可念,念痛無所著。自愛身,當觀他人身;意愛他人身,當自觀身,亦爲止也。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일체의 스스로의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이 멈추나니,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집착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몸을 아껴서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서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 또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內外痛痒所以重出者何?

謂人見色愛有薄厚,其意不等觀,多與少異故。重分別觀道,當內觀有癡,當外觀以自證也。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의 색(色)을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으니,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서 관함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관하는 도를  가지로 분별하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하는 것이다.

 

身心痛痒各自異,得寒熱、刀杖痛極,是爲身痛;得美飯、載車、好衣,身諸所便,是爲身痒。

心痛者,身自憂,復憂他人及萬事,是爲心痛;心得所好及諸歡喜,是爲心痒也。痒 가려울 양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각 다른 것이니, 

춥고 더운 것과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통(身痛)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양(身痒)이 되며, 

마음의 통(痛)이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가지의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심통(心痛)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양(心痒)이 된다.

 

意相觀者,有兩因緣,在內斷惡念道。一者,謂五樂六衰當制斷之。

뜻의상(意相)을 관하는 것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락(樂)ㆍ6쇠(衰)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觀者自觀身,身不知麤細,以得乃覺,是爲意意相觀。意意相觀,息亦是意,數亦是意;數時觀息,爲意意相觀也。

관(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麤)와 세(細)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이 되며,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을 하면,  또한  뜻이요, 세는  또한  뜻이니,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이 된다.

 

意觀止者,欲婬制,不爲欲瞋恚制,不怒欲癡制,不作欲貪制,不求諸惡事,一切不向,是爲觀止;亦謂以知『三十七品經』,常念不離爲止也。

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의관지(意觀止)라는 것은, 음심(婬)을 일으키면 제지하여 멈추며,

진에(瞋恚)를 일으키면 제지하여 멈추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면 제지하여 멈추며, 

탐하면 제지하여서 구하지 않게 멈추어서, 모든 악한 악사(惡事)에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되며,

또한 '37품경(37 조도품)'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되는 것이다.

 

出息、入息盡定便觀者,盡謂罪盡,定謂息止意。

숨을 내쉬고 들이쉴  다하여 진(盡)하고, 정(定)하여서 편안히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진(盡) 죄가 다하는 것을 말하고, 정(定)은 숨이 뜻을 멈추게 하는 식지의(息止意)를 말한다.

 

定觀者,謂觀止還淨也;盡止者,謂我能說是、曉是、遍更是,是爲盡止也。

所起息,若布施作福 一切善法,已起便滅,更意念耶?向習罪行亦無數,古世今世,意不如是相隨;他人亦爾,已知覺,當斷已斷,爲內外意意觀止也。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추는 진지(盡止)라는 것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을지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되며,

숨을 일으켜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생각는 의념(意念)하는 것이니,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추는 내외의의관지(內外意意觀止)가 되는 것이다.

 

內外法法者,內法謂身,外法謂他人;有持戒法,有不持戒法,是爲內外法法也。

안팎의 법의 법인 내외법법(內外法法)이라는 것은, 

안의 법인 내법(內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인 외법(外法)은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의 법인 내외법법(內外法法)이다.

 

內法謂行黠不離『三十七品經』,一切餘事,意不墮中,行道得道,是爲內法。外法謂墮生死,謂生死行,便得生死。不脫一切,當斷已斷,爲內外法觀止也。

안의 법인 내법(內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37 조도품)'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인 내법(內法)이 되며,

밖의 법인 외법(外法)은, 생사를 따라서 생사를 행한다면 문득 생사를 얻어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하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추는 내외법관지(內外法觀止)가 되는 것이다.

 

法觀止者,一切人皆自身爲身,諦挍計非我身。何以故?有眼有色,眼亦非身,色亦非身。何以故?人已死,有眼無所見,亦有色無所應。身如是,但有識亦非身。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법관지(法觀止)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몸을 자기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나의 몸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또한 몸이 아니고  또한 몸이 아니며,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識)만이 있을 뿐, 몸이 아닌 것이니, 

 

何以故?識無有形,亦無所輕止,如是計眼、耳、鼻、舌、身、意亦爾,得是計爲法觀止,亦謂不念惡爲止。念惡爲不止,何以故?意行故也。

왜냐하면, 식(識)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은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법관지(法觀止)인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의 지(止)가 되나,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終 불설대안반수의경 상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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