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5

 

數息斷外,相隨斷內,數從外入爲斷外,亦欲離外因緣,數從中出爲欲離內因緣。外爲身離,內爲意離;身離、意離是爲相隨,出入息是爲二事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바깥을 끊는 단외(斷外)요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안을 끊은 단내(斷內)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세는 것은 바깥을 끊는 단외(斷外)요,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고자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에서 나올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바깥(外)은 몸을 여읨이 되고안(內)은 뜻을 여읨인 것이니,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가 되며나고 드는 출입식(出入息)의 숨은  가지의 이사(二事)가 된다.


數息爲欲斷內外因緣。何等爲內、外?謂眼、耳、鼻、口、身、意爲內,色、聲、香、味、細滑、念爲外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니무엇이 안과 밖인가

()ㆍ이()ㆍ비()ㆍ구()ㆍ신()ㆍ의() 안(內)이 되고

()ㆍ성()ㆍ향()ㆍ미()ㆍ세활(細滑)ㆍ염() 밖(外)이 되는 것이니, 


行息爲使意向空,但欲止餘意。何以爲向空?息中無所爲故也。

 쉼을 행하는 행식(行息) 뜻을 ()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니,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고자 할 뿐이라 어떻게 공으로 향할 수 있겠는가 가운데는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數息意走不?卽時覺者,罪重意輕,罪引意去疾,故不覺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뜻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던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行道已得息,自厭息意,欲轉不復欲數,如是爲得息。相隨止觀亦爾也。

() 행하여 이미  쉬는 것을 얻은 득식(得息)이라면 저절로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을 것이니이와 같은 것이  쉬는 것을 얻은 득식(得息)이요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 또한 그러한 것이다.


知出入息滅,滅爲得息相;知生死不復用,爲得生死相。已得四禪,但念空爲種道栽。

나고 드는 출입식(知出入)의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상(相) 얻고

생사(生死)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상(相) 얻는다면이미 4() 얻은 것이니

다만 () 생각하여 () 심어야 하리라.


行息已得定,不復覺氣出入,便可觀。一、當觀五十五事;二、當觀身中十二因緣也。

숨 쉼을 행하는 행식(行息) 행하여 이미 () 얻어서 다시 ()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  있으니첫째로는 마땅히 55를 관해야 하고둘째로는 마땅히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問:息出入,寧有處不?

報:息入時是其處,出息時是其處。數息身坐,痛痒、思想、生死、識止不行,是爲坐也。念息得道,復挍計者,用息無所知故。

痛痒통양 1. 사물이 자신에 직접 미치는 영향을 이르는 말  2. 아픔과 가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의 출입식(知出入)에 있어서, 나고 드는 곳이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生)ㆍ사(死)ㆍ식(識)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坐)이 되나니,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으나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問:念息得道,何以爲無所知?

報:意知息,息不知意,是爲無所知。人不能得挍計意,便令數息,欲令意定。雖數息,但不生惡。無有黠智。,當何等行得黠慧?從一至十,分別定亂,識對行藥;已得定意,便隨黠慧,得挍計爲墮觀也。

묻겠습니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나니, 이를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비록 숨을 셀지라도 다만 악(惡)이 생겨나지 않을 뿐, 지혜가 없으니, 

마땅히 어떠한 행으로써 지혜를 얻어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는 약(藥)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觀)을 따르는 것이다.

 

問:何等爲數?

報:數者謂事。譬如人有事更求,是爲數罪。道人數福,何以故正爲十?一意起爲一,二意起爲二,數終於十,至十爲竟,故言十數爲福。

묻겠습니다; 무엇이 세는 것의 수(數)인 것입니까? 

답한다; 센다는 것은 사(事)를 말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사람이 어떤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나,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에 이르기까지를 정하여   뜻을 일으키면  번째가 되고,   뜻을 일으키면  번째가 되어, 세기를  번째에서 마치니,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復有罪者,用不能壞息,故爲罪;亦謂意生死不滅,墮世閒已,不斷世閒事爲罪也。六情爲六事,痛痒、思想、生死、識,合爲十事,應內十息;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嫉妒、瞋恚、癡,應外十息,謂止不行也。

또한 죄가다는 것은, 능히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뜻(意)의 육정(六情)의 여섯 가지에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을 합한  가지는 안의  번째의 숨인 내십식(內十息)에 응하고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번째까지의 숨인 외십식(外十息)에 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問:何等爲十六事?

報:十事者謂數,至十六者,謂數、相隨、止、觀、還、淨,是爲十六事,爲行不離,爲隨道也。

묻겠습니다; 무엇이 열여섯 가지의 십육사(十六事)입니까? 

답하나니; 열여섯 가지의 십육사(十六事)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숨을 세는 수식(數息)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을 열여섯 번째에 이르기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問:數息念風爲隨色,何以應道?

報:行意在數不念色,氣盡便滅,墮非常、知非常爲道也。道人欲得道,要當知、坐行二事:一者爲坐,二者爲行。

묻겠습니다;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色)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應)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뜻(意)을 행함이 세는 있고, 색과 기(氣)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으로 이것이 도가 되는 것이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한다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가지를 알아야만 하나니, 

첫째는 앉음의 좌(坐)이고, 둘째는 행함의 행(行)이다.

 

問:坐與行爲同、不同?

報:有時同,有時不同。數息、相隨、止、觀、還、淨,此六事有時爲坐,有時爲行。何以故?數息意定是爲坐,意隨法是爲行;已起意不離爲行,亦爲坐也。

묻겠습니다; 앉음의 좌(坐)와 행함의 행(行)은 같은 것입니까? 같지 않은 것 입니까? 

답하나니;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 등의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를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意)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앉음의 좌(坐)가 되고, 

뜻(意)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行)이 되며, 

이미 뜻(意)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行)도 되고 또한 앉음의 좌(坐)도 되는 것이다.

 

坐禪法,一不數二,二不數一。一數二者,謂數一息未竟便言二,是爲一數二,如是爲過精進;二數一者,謂息已入二甫言一,是爲二數一,如是爲不及精進。

좌선(坐禪)하는 법은,  번째에서  번째를 세지 않고,  번째에서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닌,

 번째에서  번째를 센다는 것은,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번째에서  번째를 세는 것으로,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되며,  

 번째에서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들어왔는데 겨우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번째에서  번째를 세는 것이니,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되며, 

 

從三至四、五至六、七至八、九至十,各自有分部,當分別所屬;在一數一,在二數二,是爲法行,便墮精進也。

 번째에서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에서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에서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번째에 있어서는  번째를 세고,  번째에 있어서는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有三坐墮道:一爲數息坐,二爲誦經坐,三爲聞經喜坐,是爲三也。

앉음의 좌(坐)로써 도를 따르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니, 이것이  가지다.

 

坐有三品:一爲味合坐,二爲淨坐,三爲無有結坐。何等爲味合坐?謂意著行不離是爲味合坐。何謂爲淨坐?謂不念爲淨坐。何等爲無有結坐?謂結已盡爲無有結坐也。

앉음의 좌(坐)에 3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요, 둘째는 정좌(淨坐)요,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니, 

무엇이 미합좌(味合坐)인가? 뜻이 행에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이며,

무엇이 정좌(淨坐)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이며,

무엇이 무유결좌(無有結坐)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인 것이다.

 

息有三輩:一爲雜息,二爲淨息,三爲道息。不行道,是爲雜息;數至十息不亂,是爲淨息;已得道,是爲道息也。

숨(息)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니,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雜息)이요, 

세어서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淨息)이요,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道息)이며, 

 

息有三輩:有大息,有中息,有微息。口有所語,謂大息止;念道,中息止;得四禪,微息止也。

숨에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니,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大息)이요, 

멈추어서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中息)이요, 

멈추어서 4선(禪)을 얻는 것은 미식(微息)이다.

 

問:佛何以教人數息守意?

報:有四因緣,一者、用不欲痛故;二者、用避亂意故;三者、用閉因緣,不欲與生死會故;四者、用欲得泥洹道故也。

묻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서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까?

답한다; 네 가지의 이유(인연)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이 어지러운 난의(亂意)를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 열반도)를 얻게 하고자 하신 까닭이다.

 

譬喩說日無光明者,有四因緣:一者、用有雲故;二者、用有塵故;三者、用有大風故;四者、用有煙故。數息不得,亦有四因緣:一者、用念生死挍計故;二者、用飮食多故;三者、用疲極故;四者、用坐不得更罪地故。

비유하자면, 해의 광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네 가지의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숨 세는 수식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네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此四事來皆有相:坐數息,忽念他事失息意,是爲念挍計相;骨節盡痛,不能久坐,是爲食多相;身重意瞪瞢,但欲睡眠,是爲疲極相;四面坐,不得一息,是爲罪地相。以知罪,當經行;若讀經文坐,意不習罪,亦禍消也。

이 네 가지의 사사(四事) 모두에 상(相)이 있으니,

앉아서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교계상(挍計相)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서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식다상(食多相)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서 다만 잠을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피극상(疲極相)이요,

4면(面)으로 앉아 있기만 할 뿐, 한 숨(息)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상(罪地相)이니,

만약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는다면 화(禍)가 소멸될 것이다.

 

道人行道當念本。何等爲本?謂心意識是爲本。是三事皆不見,已生便滅,本意不復生,得是意爲道意;本意已滅,無爲痛更因緣生便斷也。定意日勝日勝爲定意,有時從息得定意,有時從相隨得定意,有時從止得定意,有時從觀得定意,隨得定因緣直行也。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하여야 하나니, 무엇이 근본인가?

심(心)ㆍ의(意)ㆍ식(識)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보이지 않으나 이미 생겼다가 곧바로 멸하는 것으로, 근본의 뜻인 본의(本意)가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되며,

근본의 뜻인 본의(本意)가 이미 소멸하였다면 고통이 없는 것이나,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지는 것으로,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定意)가 되는 것이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의 상수를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의 지(止)를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觀)을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나니,

정(定)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하는 것이다.

 

行息亦墮貪,何以故?意以定便喜故。便當計出息、入息、念滅時,息生,身生;息滅,身滅。尚未脫生死苦,何以故?喜已計,如是便貪止也。

숨 쉬는 행식(行息)을 행하여도 역시 탐(貪)에 떨어지나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곧바로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고, 몸이 생겨나며,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지는 것이니,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왜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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