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2

 

此經多隨字,除數息相隨之隨,餘皆他本作隨

이 경에서는 따를 수(隨)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하는데, 수식상수(數息相隨)의 수(隨) 자를 생략하나, 나머지 다른 모든 본(本)에서는 수(隨) 자를 쓴다.

 

佛在越祇國舍羈瘦國,亦說一名遮匿迦羅國。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 발지국, 인도의 동북부의 릿차비족의 왕국)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時佛坐行安般守意九十日,佛復獨坐九十日者,思惟挍計,欲度脫十方人及蜎飛蠕動之類。

이 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으셔서 안반수의(安般守意, anapana-sati의 한역)를 행하시고,

다시 부처님께서 홀로 90일 동안 앉아서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의 사람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안(安)은 안나(安那, ana) 즉 들숨의 입식(入息)을 말하고

반(般)는 반나(般那, pana) 즉 날숨의 출식(出息)을 말함.

수의(守意)는 sati(사티), 즉 념(念)으로 입식과 출식에 집중하여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마음챙김.

 

復言:“我行安般守意九十日者,安般守意,得自在慈念意;還行安般守意已,復收意行念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하고 인자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어서 다시, 돌이켜 안반수의(anapana-sati)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安爲身,般爲息,守意爲道。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을 쉬는 식(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되는 것이니, 

 

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亦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息意,亦爲道也。

수(守)는 금함의 계(禁)이니,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금(禁)은 또한 보호함의 호(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의(意)는 숨쉬는 식(息)이니, 또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安爲生,般爲滅,意爲因緣,守者爲道也。

안(安)은 생겨남의 생(生)이고, 

반(般)은 멸함의 멸(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道)가 되며, 

 

安爲數,般爲相隨,守意爲止也。

안(安)은 셈의 수(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이며, 

수의(守意)는 멈춤의 지(止)이며, 

 

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염도(念道)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해결(解結)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불타죄(不墮罪)이며, 

 

安爲避罪,般爲不入罪,守意爲道也。

안(安)은 죄를 피하는 피죄(避罪)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불입죄(不入罪)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되며, 

 

安爲定,般爲莫使動搖,守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막사동요(莫使動搖)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막난의(莫亂意)이니,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서 무위(無爲)에 이르는 득무위(得無爲)인 것이다.

 

安爲有,般爲無。意念有,不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

有者謂萬物,無者謂疑,亦爲空也。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여도 도(道)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하여도 도(道)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니,

유(有)는  가지의 만물(萬物)을 말하고,

무(無)는 의심의 의(疑) 또는 공(空)이며, 

 

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亦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안(安)은 본래의 인연인 본인연(本因緣)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는 무처소(無處所)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바가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를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는 멸무처소(滅無處所)를 아는 것이 바로  수의(守意)인 것이며, 

 

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청정무위(淸淨無爲)인 것이며,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나니, 다시는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安爲未,般爲起。已未起,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若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안(安)은 아직의 미(未)이고, 반(般)은 일어날 기(起)이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뜻을 지킬 수 있는 수의(守意)이지만, 

만약 뜻(意)이 이미 일어났다면 수의(守意)로써 지켜야 하며, 

만약 뜻(意)이 이미 일어났다면, 뜻이 날뛰어서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신 것이다.

 

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안(安)은음(五陰, 오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의 신구의(身口意)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守意者,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수의(守意)란,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뜻(意)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며, 

뜻(意)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守意)가 되는 것이다.

 

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意亦不死,是爲道也。

수의(守意)는, 뜻(意)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의 생(生)으로 인하여 죽음의 사(死)가 있게 되어서 그 뜻(意)을 지킬  없으며, 

뜻(意)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意)이 또한 죽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의 지혜인 십힐(十黠)이 있으니,

들숨과 날숨을 세는 수식(數息),

호흡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

호흡과 의식이 고요히 안정되어서 하나를 이루는 지(止),

지(止)의 지혜로 관찰하는 관(觀),

마음이 고요하여서 스스로의 주체로 돌아서 적정한 환(還),

일체의 번뇌와 집착이 없는 정(淨)과 4제(四諦),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 37 조도품)'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守意,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二者、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수의(守意)란, 마치 등불과 같이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는 괴명(壞冥)이며, 둘째 밝음을 보는 견명(見明)인 것과 같이,

수의(守意)도 첫째는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여 주는 견힐(見黠)인 것이다.

 

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是爲守意也。

수의(守意)는, 뜻(意)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는, 이것이 바로 수의이며, 

 

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生;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

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守,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니, 

수(守)와 의(意)는 각각 다른 것으로,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경계에 대하여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이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나니, 이것이 수의인 것이다.

 

守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樂;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是爲四樂。法爲行,得爲道。

수의(守意)에는 네 가지의 즐거움인 사락(四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으로, 이러함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니,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의 득(得)은 도(道)가 되는 것이다.

 

守意六事爲有內外:數、隨、止是爲外,觀、還、淨是爲內。隨道也,

何以故?念息相隨,止觀還淨,欲習意近道故。離是六事,便隨世閒也。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의 수의육사(守意六事)에 안과 밖이 있으니,

숨을 세는 수식(數息)과,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와 멈추어 고요한 지(止)는 밖(外)이 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의 관(觀)과 주체로 돌아온 환(還)과 번뇌와 집착이 없는 정(淨)은 안(內)이 되어서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하는 염식(念息)과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와 

지(止)와 관(觀),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를 여읜다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數息爲遮意,相隨爲斂意,止爲定意,觀爲離意,還爲一意,淨爲守意。用人不能制意,故行此六事耳。

숨을 세는 수식(數息)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하는 정의(定意)가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의는 이의(離意)가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하는 일의(一意)가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키는 수의(守意)가 되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없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육사(六事)를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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