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4

 

數息不得,有三因緣:一者、罪到;二者、行不互;三者、不精進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얻지 못함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에 이른 죄도(罪到)요, 둘째는 행이 서로 함께하지 않은 행불호(行不互)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는 불정진(不精進)인 것이다.


入息短,出息長。無所從念爲道意,有所念爲罪;罪惡在外,不在內也。

들이쉬는 입식(入息) 짧고 내쉬는  출식(出息) 길며, 

따라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罪)가 되나니, 죄는 밖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안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數息時,有離意爲喘息長,得息爲喘息短,不安行息爲長,定爲短。念萬物爲長息,無所念爲短息。未至十息,壞復更數爲長息,得十息爲短息。得息爲短,何以故?止不復數故。得息亦爲長,何以故?息不休,故爲長也。喘息長自知,喘息短自知;謂意所在爲自知長短,意覺長短爲自知,意不覺長短爲不自知也。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정(定)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숨이 되고,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休)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며,

숨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道人行安般守意欲止意,當何因緣得止意?聽說安般守意。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를 얻고자 하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를 얻는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何等爲安?何等爲般?安名爲入息,般名爲出息,念息不離,是名爲安般。守意者,欲得止意。

무엇이 안(安)이 되고, 무엇이 반(般)이 되는가? 

안(安)은 들이쉬는 입식(入息)이라 하고, 

반(般)은 내쉬는 출식(出息)이라 하나니,

생각(念)과 숨(息)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인 지의(止意)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在行者、新學者,有四種安般守意行,除兩惡十六勝,卽時自知,乃安般守意行,令得止意。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신학자(新學者)에게는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가지의 악(惡)을 제거하면 16승(勝)을 스스로 즉시 알게 되어서,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인 지의(止意)를 얻게 되는 것이다.


何等爲四種?一爲數,二爲相隨,三爲止,四爲觀。

무엇이  가지인가? 첫째는 호흡을 세는 수식(數息)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요, 

셋째는 멈추는 지(止)요, 넷째는 관(觀)하는 것이다.


何等爲兩惡?莫過十息,莫減十數。

무엇이  가지 악(惡)인가?  번째 숨을 넘어가지 않는 것과  번보다 덜하지 않는 것이다.


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長;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內無所復思,喘息自知;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是爲十六卽時自知也。

무엇이 16승(勝)인가? 스스로의 숨이 긴 것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짧음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몸을 움직임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미세(微細)함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상쾌함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멈춤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멈추지 않음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곧바로 아는 것,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서 다시 숨을 얻을  없음을 스스로가 곧바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하는 바가 없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곧바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지 못하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러함이 스스로 곧바로 아는 열여섯 가지인 것이다.


問:何等爲莫過十數、莫減十數?

報:息已盡未數是爲過,息未盡便數是爲減。失數亦惡,不及亦惡,是爲兩惡。

묻겠습니다; 무엇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숨이 이미 다하였음에도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세는 것이  하는 것이다. 

셈을 넘어서 놓친  또한 악(惡)이요, 미치지 못하는  또한 악이니, 이것이  가지의 악이 되는 것이다.


至二息亂爲短息,至九息亂爲長息,得十息爲快息。相隨爲微,

意在長便轉意;我何以故念長?意在短,卽時覺不得令意止,止爲著。

 번째 숨에 이르러서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의 단식(短息)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서 어지러운 것은  숨의 장식(長息)이 되며, 

 번째의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의 괘식(快息)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되나니,

뜻이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멈추면 집착이 되는 것이다.

 

放棄軀命者,謂行息。得道意,便放棄軀命;未得道意,常愛身故,不放棄軀命也。息細微爲道,長爲生死,短息動爲生死,長於道爲短,何以故?不得道意,無知見,故爲短也。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하는 행식(行息)이라 하나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구명(軀命)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하였다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구명(軀命)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道)가 되고,  장식(長息)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단식(短息)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도(道)보다 길면 짧음이 되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되는 것이다.


數息爲單,相隨爲複,止爲一意,觀爲知意,還爲行道,淨爲入道也。

숨을 세는 것은 단(單)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複)이 되며, 

멈춤의 지(止)는 뜻을 한결같은 일의(一意)가 되고, 관(觀)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의 환(還)은 도를 행하는 행도(行道)가 되고, 청정함의 정(淨)은 도에 들어가는 입도(入道)가 된다.


數時爲念,至十息爲持,是爲外禪;念身不淨隨空,是爲內禪也。

 때에 생각이  번째 숨에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함을 생각하고 공(空)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禪法惡來不受,是名爲棄。閉口數息,隨氣出入,知氣發何所,滅何所。意有所念,不得數息;有遲疾、大小,亦不得數;耳聞聲亂,亦不得數也。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를 ‘버린다’고 하며,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있어서 기(氣)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 가를 알아야 하나니,

뜻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어도 또한 세지 못하나니, 


數息,意在息,數爲不工,行意在意乃爲止。數息,意但在息,是爲不工。當知意所從起、氣所滅,是乃應數因緣盡,便得定意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뜻이  세는 것에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뜻을 행함이 뜻에 있어야 멈춤의 지(止)가 되며,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 또한 공교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氣)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게 되는 것이다.


守意者,念出入息,已念息不生惡,故爲守意。息見因緣生,無因緣滅;因緣斷,息止也。數息爲至誠,息不亂爲忍辱。數息氣微,不復覺出入,如是當守一念止也。息在身,亦在外,得因緣息生,罪未盡故有息;斷因緣,息不復生也。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서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惡)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되는 것이니,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수식(數息)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세는 수식(數息)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깨닫지 못해여야만, 이에 마땅히  생각을 지켜서 멈추는 지(止)가 되는 것이니,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는 것으로, 인연을 얻어서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는 것이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數息以爲隨第二禪。何以故?用不待念故,爲隨第二禪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제2선(禪)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며, 


數息爲不守意,念息乃爲守意。息從外入息未盡,息在入 意在盡,識在數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만으로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그 숨은 들어오는 중이며, 뜻은 다한 것이며, 식(識)은 수를 세는 것에 있는 것이다.


十息有十意爲十絆,相隨有二意爲二絆,止爲一意爲一絆。

 가지 숨의 십식(十息)에  가지의 뜻이 있어서  개의 묶임인 십반(十絆)이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  가지의 뜻이 있어  개의 묶임인 이반(二絆)이 되며, 

멈춤의 지(止)에  가지 뜻이 있어  개의 묶임인 일반(一絆)이 된다.


不得息數爲惡意不可絆;惡意止,乃得數,是爲和調可意絆也。

 세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조화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있는 것이다.


已得息棄息,已得相隨棄相隨,已得止棄止,已得觀棄觀,莫復還;莫復還者,莫復數。息亦使意,意亦使息也;有所念爲息使意,無所念爲意使息也。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을 버리며, 

이미 멈춤의 지(止)를 얻었으면 멈춤의 지(止)를 버리고, 

이미 관(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아야 하며,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서 뜻(意)을 부리거나, 또한 뜻(意)이 숨을 부리지 않는 것이니,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意)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意)이 숨을 부리는 것이다.


息有四事:一爲風,二爲氣,三爲息,四爲喘。有聲爲風,無聲爲氣,出入爲息,氣出入不盡爲喘也。

숨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람(風), 둘째는 기운(氣), 셋째는 숨(息), 넷째는 헐떡거림의 천(喘)이니,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風)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氣)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息)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의 천(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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