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者(칠자) 爲示專念方便(위시전념방편) 生於佛前(생어불전)
必定不退信心故(필정불퇴신심고)
일곱째는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나타내 보여, 불전에 왕생하여, 물러섬이 없는 신심을 반드시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Seventh, by showing the means of devotion on Mahayana to the all sentient being, to acquire absolute immovable Mahayana faith, and let them be reborn in the pure Buddha land.
[일곱째 이유는, 아둔한 열근기(劣根機)의 사람 가운데에서도, 상품(上品)의 사람들은 자력으로 깨달을 이근(利根)은 없으나, 악의 업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방편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아미타불(阿彌陀佛) 앞에 반드시 태어나, 구원받는 몸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물러서지 않는 신심을 획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중 최후의 염불왕생(念佛往生), 불퇴방편(不退方便) 부분을 설하는 이유를 나타낸다.-전종식]
八者(팔자) 爲示利益(위시이익) 勸修行故(권수행고)
여덟째 이익을 나타내 보여 수행을 권유하기 위한 까닭이다.
Eighth, by disclosing the benefits of believing in the Mayahaya, to encourage all sentient beings to practice Mahayana
有如是等因緣(유여시등인연) 所以造論(소이조론)
이와 같은 인연 등이 있으므로 논을 짓는 것이다.
These are the reasons for writing this treatise.
[여덟 번째의 이유는, 이 대승의 법[一心 : 인간 심성의 위대성]을 믿으면, 그에 따른 이익이 광대함을 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을 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5장「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하는 이유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 논을 저술하는 것이지만 이는 본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열거함과 동시에, 뒤에 계속되는 논설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부터 여덟째까지의 자세한 내용들이 이후부터 전개되는 이 기신론의 내용들이다.-물처럼 바람처럼]
2) 論(논)의 특색 Characteristic of the treatise
問曰(문왈) 修多羅中(수다라중) 具有此法(구유차법) 何須重說(하수중설)
물어 말하나니, 수다라 경에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해야 는가?
Asking, if all of these doctrines are sufficiently written in the Mahayana Sutras, what is the reason for repeating it yet again?
[修多羅(수다라:sutra)= 경전.
* 이 기신론에서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에 다 설해져 있다. 그런데 왜 다시 이 기신론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答曰(답왈) 修多羅中(수다라중) 雖有此法(수유차법)
以衆生根行不等(이중생근행부등) 受解緣別(수해연별)
대답하여 말하나니, 수다라(경)에 이 법이 있을지라도,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같지 아니하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연(조건)이 다르니,
Answering, even though these doctrines have fully been expounded in the Sūtra,
yet as the predispotion and levels of self-discipline are various, and their terms of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are various.
所謂(소위) 如來在世(여래재세) 衆生利根(중생이근) 能說之人(능설지인)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如來在世에는, 중생의 근기도 뛰어난=利根으로서,
At the time of the Tathagata, predispositions and inclinations of people were excellent,
色心業勝(색심업승) 圓音一演(원음일연)
능히 설하는 사람=부처님은, 색신과 마음=色心의 업이 뛰어나서, 원만한 말씀=圓音으로 설하시면,
Buddha, as the one who is transcendent in both mind and body, as an adept eloquent orator made an eloquent speech in his harmonious tone,
異類等解(이류등해) 則不須論(즉불수론)
서로 다른 사람=異類가 다 같이 해득하였으므로 논이 필요하지 않았느니라.
All different from each other who could easily grasped the noble meanings, therefore there was no need of writtings in Sutra.
[衆生利根(중생이근) : 利는 예리하다는 뜻이다. 즉 중생들의 근기가 둔한 것이 아니라 뛰어나다는 뜻이다.
* 能說之人(능설지인) : 설하는 사람이므로 여기서는 부처님을 가리킨다.
* 圓音一演(원음일연) : 원만한 소리(圓音)는 그 말씀이 원만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좋다는 뜻이다.
* 異類等解(이류등해) : 듣는 사람들의 수준이 서로 달랐지만=異類, 부처님의 설법이 뛰어나 다 같이 이해했다=等解.
* 元曉[요약] : 원음(圓音)은 일음(一音)이니, 여기에 대한 여러 논사들의 설이 있다.
㉮.부처는 제일의신(第一義身)이니 만상(萬像)을 영원히 끊어 형체와 소리가 없으나 다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한량없는 형체와 소리를 나타낸다.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소리가 없으니 일음이지만 중생의 편에서 보면 근기에 따라 하나가 아니다. 이는 경에 ‘그 무리들의 음에 따라 중생에게 널리 알려준다.’고 한 것과 같다.
㉯.부처님 편에서 말한다면 실로 형체와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가 다름이 없이 일음이며, 원만하여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이 원음이 증상연(增上緣)이 있기 때문에 근기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로 나타난다. 이는 ≪유마경≫에 ‘부처가 일음으로 법을 연설할 때에는 중생이 무리에 따라 각각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다.
㉰. 여래가 실로 많은 음성이 있어서 모든 중생이 가진 언음(言音)이 여래의 법륜의 음성에 포섭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부처의 음성은 장애가 없어서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일음이라 하고, 하나가 곧 일체이기 때문에 원음이라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일체 중생의 말하는 법을 여래가 한 말로 연설하여 다하여 남음이 없다. 모두 정밀한 음을 알아듣게 하고자 하시니, 보살이 이로 인하여 처음 발심하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다.
* 增上緣(증상연:Adhipati-pratyaya) -은정희 해설 - 네 가지 연의 하나. 다른 것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어 돕는 여력증상연(與力增上緣)과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부장증상연(不障增上緣)의 2종이 있다.]
[앞에서 논을 짓는 여덟 가지 이유를 표시하였으나, 다시 본론의 특색인「짧은 글(論)속에 많은 의미를 포함한」점을 문답(問答)체로 밝히고 있다.
물어 말하기를「불타가 설한 경전(수다라 Sūtra의 음역) 가운데에는 이 논이 설하고 있는 법(法) 즉 여래장설등 모두 설해져 있다. 그럼에도 왜 다시 설하려 하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확실히 여래가 설한 경전 속에는 모두 이 법이 설하여져 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 중생의 근기(根機)에는, 이둔(利鈍)의 구별이 있고, 수행 방법도 각기 차이가 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누구로부터 받는가의 기연(機緣) 또한 같지가 않다. 수행자의 희망이나 기호도 각기 다르다.
따라서 설하는 내용은 같으나, 설하는 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 재세시에는, 중생의 능력과 소질도 뛰어났으며, 거기에다가 설법자는 불타이고, 가르침을 설하는 여래의 신체나 마음의 활동이 뛰어나, 불타의 완전한 설법이 한 번 이루어지면 한 목소리(圓音)로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해득하였기 때문에, 한번의 가르침으로 그 이상 논을 설할 필요가 없었다.]
1. 若如來滅後(약여래멸후) 或有衆生(혹유중생)
能以自力(능이자력) 廣聞而取解者(광문이취해자)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라면, 혹 어떤 중생은 능히 자력으로 널리 듣고 알 수 있는 중생도 있고,
After the Nirvana of the Buddha, some have excellent intellectual abilities of grasping the noble meanings only after broadly reading and studying.
[元曉 : 널리 경을 들음으로써 부처의 뜻을 알게 되어 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
2. 或有衆生(혹유중생) 亦以自力(역이자력) 少聞而多解者(소문이다해자)
혹 어떤 이는 역시 자력으로서 조금 듣고서 많이 이해하며.
Others, who also have excellent intellectual abilities of grasping the noble meanings even though their reading and studying is less than others.
[元曉 : 널리 경을 듣지 않았지만 경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역시 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或有衆生(혹유중생) 無自心力(무자심력) 因於廣論(인어광론) 而得解者(이득해자)
혹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심력이 없어, 널리 논한 것=廣論을 의지하여 해득하며,
Also, there are others who do not have their own intellectual ability to understand the meanings of sutras, but only through the assistance of elaborate commentaries.
[元曉 : 불경에만 의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심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고 ≪지도론≫≪유가론≫ 등의 논을 들음으로써 알게 된다고 말하였다.]
4. 或有衆生(혹유중생) 復以廣論文多爲煩(부이광론문다위번) 心樂摠持少文(심락총지소문) 而攝多義(이섭다의) 能取解者(능취해자)
혹 어떤 중생은 또한 널리 논한=廣論의 글이 많다고 번거롭게 여기고, 다 갖춘 총지는 적은 글이지만 많은 뜻을 거두고 있음을 마음으로 즐겨 능히 해득하여 취하며,
Also, some people consider extensive commentaries as a great deal of hassle but take delight in studying and perusing Sutras that are composed of compact writings and elaborate fruitful meanings.
[摠持(총지:dharani) :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하면 다라니(陀羅尼)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뜻과 내용 및 의리 등을 잃지 않고 다 지니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요점 또는 핵심을 말한다.
* 元曉 : 근기가 예리하기는 하지만 번거로움을 참지 못해 오직 글이 간략하면서 뜻이 풍부한 논에 의해서만 불경에서 설한 뜻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如是此論(여시차론)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위욕총섭여래광대심법무변의고) 應說此論(응설차론)
이와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이 없는 뜻을 모두 거두어 담는=총섭하는 것이므로 그에 응하여 마땅히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
For these reasons, this treatise embraces immensely and profoundly, Buddha's law, therefore I ought to expound it.
[元曉 : 此論 이하는 따로 네 번째 사람에 대한 것이니, 반드시 기신론을 지어야만 하는 뜻을 결론지어 밝힌 것이다.
즉 원효대사에 따르면 이 기신론이 필요한 사람은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 기신론을 읽으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래의 열반 후에는, 근기가 뛰어난 사람[利根]도 있지만, 근기가 낮은 둔근(鈍根)의 사람도 있다.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가의 수해(受解)의 연(緣)도 모두 뒤떨어지므로, 그에 따르기 위한 경(經)과 논(論)도 다함께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네 종류 사람으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자력으로 널리 경전에 있는 법을 듣고 연구하여, 불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동일하게 자력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경전의 법을 조금만 들어도 많은 뜻을 이해하는 사람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경(經)에 의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의 일부 사람들은, 경전을 자력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이 주석해 놓은 논(論)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은 여러 논문을 연구하여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네 번째 사람들은, 여러 논문의 문장이 너무 길고 번잡하여, 견디기 어려운 이유로, 문장이 간단하고 내용이 풍부한 논문으로 불법을 이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 기신론은 짧은 논문으로서 글귀가 적지만, 여래의 광대미묘한 교법(敎法)의 여러 가지 의미가 총망라되어 있어 마지막 부류인 네 번째(4) 근기의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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