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以故(하이고) 是心眞如相(시심진여상) 卽示摩訶衍體故(즉시마하연체고)
是心生滅因緣相(시심생멸인연상)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상은 마하연(대승)의 본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마음의 생멸인연의 상은 능히 마하연 스스로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Here is the reason, as the mind has two aspects, one is the suchness itself (thusness, Bhtatathata) that attributes the substance of Mahayana, and the other, the mind, is the phenomenal of birth-and-death (Samsara) which attributes itself of the substance, the form and the function.
[元曉 : 심법(心法)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진여문 중에 대승의 체가 있고, 생멸문 중에 체의 상(相)과 용(用)이 있다고 하였다. 대승의 뜻이 이 세 가지에 지나침이 없기에 일심에 의해 대승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能示摩訶衍自體'라 한 것은 바로 생멸심 내의 본각심이니 생멸의 체와 생멸의 인이며, 그러므로 생멸문 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여문 중에서는 摩訶衍體라고 말하고, 생멸문 중에서는 自體라고 한 것은 깊은 까닭이 있다.
* 여래나 중생이나 그 본체는 같다. 이를 진여상이라고 한다. 출세간법이다. 세간법은 그 진여가 나타난 현상과 작용이니 이는 여래와 중생이 다르다. 대승법이라고 한 것은 중생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지, 진여문에서는 차별상이 없으므로 대승법이라고 할 것도 없다. 즉, 크다 작다는 말이 필요 없다.-물처럼바람처럼]
[중생심의 진여의 상은 그것이 바로 대승의 본체이며, 중생심의 생멸 인연의 상은, 대승 스스로의 체상용(體相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중생심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진여는 실재(實在)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진여는 tatathâ의 의역(意譯)이며, 마음의 진실한 실재라 함은 마음에서 무명(無明, 染)이 멸하여 불타의 마음이 된 상태를 말한다. 중생심에 있어서는 무명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진여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이를 멸할 수 있는 것이다. 불타의 마음은 열반과 합일되어 영원한 상으로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중생구제의 자비행을 행하고 있어 시간적인 면과, 시간을 초월한 면 등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이 시간을 초월한 면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대승의 체(體)가 표시되는 것이다. 이것이 심진여문(心眞如門)이다. 심법(心法)은 하나 이지만 두 문〔二門〕이 있는데 그 두번째가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중생심의 생멸인연(生滅因緣)의 상은 마음이 연기(緣起)의 도리로, 즉 연을 만나면 생멸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상은 마음의 영원한 모습으로서, 마음의 실재성(實在性)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적 비교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대승의 체(體)만을 일컫는다. 체에 대비된 상(相)과 용(用)을 들지 않는다. 마음 그 자체는 염정(染淨)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나,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정(淨)만을 말한다. 염(染)은 영원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혹은 마침내 멸하기 때문이다. 진여는 영원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작용(作用)을 가지고 활동한다. 진여는 무위(無爲)이고 영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動)을 떠난 정(淨)이 아니며 동(動)에 포함된 정(淨)인 것, 즉 유위(有爲)와 하나로 된 무위(無爲)이다.
진여는 인격을 초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인격에 상즉(相卽)하고 있다.
마음의 생멸인연상은 대승 자체(自體)의 체상용(體相用)으로 표시하여 설해진 것으로서 이것은 시간적 세계 즉 현상의 세계에서의 중생심의 존재를 일컫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은 절대(絶對)가 배후에 숨어 있으며, 상대(相對)가 표면에 나타난 존재 형태이다. 이 생멸문의 체는 상대적이기 때문에「자체(自體)」라고 말한다. 심진여문에서는 여래장을 「부화합(不和合)」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래장은 염심(染心)속에 있으므로 화합(和合)을 갖고 있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생멸문에서의 여래장심은 인격이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그 체(體)에 대하여 상(相)과 용(用)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스스로의 체와 상과 용을 나타낸다」라고 설해진 것이다. 이 경우의 체는 생멸문 속에 있는 본각(本覺)이며, 이 본각은 고뇌와 화합되어 있으면서 번뇌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청정한 성질이 있다. 이것이 정(淨)이라고 일컬어지는 상(相)이다. 또한 이 본각에는 수염(隨染)의 업용(業用)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용(用)이다. 다시 말하면 번뇌와 화합하여, 또는 불타가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 그 작용이 수염(隨染)의 업용(業用)이다.
이상은 본문의 내용을 해설한 것이지만 본란의 목적은 입의분(立義分)에서 세우는 법(法)과 의(義)에 대하여 중생심의 진여상(眞如相)과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을 해명함으로서, 대승을 중생심이라고 정의한데 대한 이유를 밝히는데 있다.
본란은 그 이유에 대하여「이 중생심의 진여상(眞如相)은 마하연[대승]의 체(體)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어서「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은 대승 스스로의 체상용(體相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의 설명에 의하여 지금까지 전통적 주석가들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이문(二門)을 모두 대승의 법(法)으로 배당하고, 대승의 의(義)에 대하여는「말하는바 의(義)라고 하는 것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로서 일체법의 진여(眞如)를 말한다..... 둘째는 상대(相大)로서 여래장(如來藏)을 말한다..... 셋째는 용대(用大)로서.....」라는 구절에 따라 심생멸문 중 삼대의(三大義)만을 대승의 의(義)에 배당시키고 있어 초학자(初學者)로서는 법(法)과 의(義)를 구별하는데 다소 혼란스러운점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종식]
[The mind as suchness;
What is meant by the mind as suchness(bhutatathata) is the oneness of the totality of things (dharmadhatu), the great all-including whole, the quintessence of the Doctrine. For the essential nature of the mind is uncreate and eternal.
진여심(bhutatathatata)이 의미하는 것은 사물의 전체성 (dharmadhatu)의 단일, 모든 전체를 포함하는 위대한 것, 교리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요한 본성(진여)은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All things, simply on account of our confused subjectivity (smrti), appear under the forms of individuation. If we could overcome our confused subjectivity, the signs of individuation would disappear, and there would be no trace of a world of (individual and isolated) objects.
모든 것은, 단순히 우리의 혼란된 주관성(smrti) 때문에, 개별화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만약 우리가 혼란스러운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다면 개성화의 흔적은 사라질 것이고, (개별적이고 고립된) 사물의 세계는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Therefore all things in their fundamental nature are not namable or explicable. They cannot be adequately expressed in any form of language. They are without the range of apperception. (They are universals.) They (things in their fundamental nature) have no signs of distinction. (They are not particulars.) They possess absolute sameness (samata). (They are universals) They are subject neither to transformation, nor to suchness is another designation. Therefore they cannot be (fully) explained by words or exhausted by reasoning.
그러므로 그들의 근본적인 본성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명명 할 수 없고 설명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언어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으며, 통각의 범위가 없다. (그들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근본적인 본성에 있는 것들) 구별의 흔적이 없다. (그들은 상세한 사항들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동일성 (사마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보편적이다) 그들은 변형의 대상이 아니며, 그러한 것은 또 다른 명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히) 말로 설명하거나 추론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While all words and expressions are nothing but representations and not realities, and their existence depends simply on our confused subjectivity, suchness has no attribute (of particularity) to speak of. But the term suchness is all that can be expressed in language, and through this term all other terms may be disposed of. The essence of suchness, there is neither anything which has to be excluded, nor anything which has to be added.
모든 언어적인 표현은 현실이 아니라 묘사일 뿐인 동시에, 그 (언어적 표현) 존재는 단순히 우리의 혼란스러운 주관성에 달려 있고, 진여는 설명할 수 있는 (특수성의) 속성이 없다. 그러나 진여는 언어로 표현 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 조건을 통해 다른 모든 용어는 폐기 될 수 있습니다. 진여의 본질에는 배제되어야 할 어떠한 것이나, 추가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a twofold aspect in suchness if viewed from the point of its explicability. The first is 'Trueness as negation' (cunyata), in the sense that it is completely set apart from the attributes of all things unreal, that it is the real reality. The second is 'Truness as affirmation (acunyata), in the sense that it contains infinite merits, that it is self-existent.
그것의 설명 가능성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현실적인 모든 것의 속성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부정으로서의 진실성'(cunyata)이다. 두 번째는 '긍정으로서의 진실(아쿠냐타)'인데, 무한한 장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And again by 'Trueness as negation' we mean that in its (metaphysical) origin it has nothing to do with things defiled (i.e., conditional), that it is free from all signs of distinction existing among phenomenal objects, that it is independent of unreal, particularising consciousness.더욱 '부정으로서의 진실성'을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원에서 그것이 오염된 것들 (즉, 조건적인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하는 현상적인 대상들 사이에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며,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의식과는 독립적이다.Thus we understand that suchness (bhutatathata) is neither that which is existence, nor that which is not-existnce, nor that which is at once existence and non-existence, nor that which is not at once existence ant non-existence; that it is neither that which is unity, nor that which is plurality, nor that which is at once unity and plurality, nor that which is not at once unity and plurality.
따라서 진여 (bhutatathata)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시적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것은 단일성도 아니고 복수성도 아니며, 동시적인 단일성과 복수성도 아니며 동시적이지 않은 단일성이나 복수성도 아닙니다.
In a word, as suchness cannot be comprehended by the particularising consciousness of all being, we call it the negation (or nothingness, cunyata).
한 마디로, 진여는 모든 존재의 고정된 사고방식에 의해 이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 (또는 무, cunyata)이라고 부릅니다.
The truth is the subjectivity does not exist by itself, that the negation (cunyata) is also void (cunya) in its nature, that neither that which is negated (viz., the external world ) nor that which negates (viz., the mind) is an independent entity.
진실 그 자체는 주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cunyata) 것 또한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 (cunya)이며, 부정된 것 (즉, 외부 세계)도 부정하는 것 (즉, 마음)도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By the so-called trueness as affirmation, we mean that (as soon as we understand) subjectivity is empty and unreal, we perceive the pure soul manifesting it self as eternal, permanent, immutable and completely comprising all things that are pure. on that account we call it affirmation (or reality, or nenemptiness, acunyata). Nevertheless, there is no trace of affirmation in it, because it is not the product of a confused subjectivity, because only by transcending subjectivity (smrti) can it be grasped. - Teitaro Suzuki
소위 "진실"을 단정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바로 이해하는 그 즉시) 주관성이란 비어 있는 비현실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순수한 영혼 그자체는 영원하고, 영구적이며, 불변하며, 순수한 모든 것을 완전히 포함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언(또는 현실, 또는 공허함, acunyata)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긍정의 흔적이 없는 것은, 그것이 혼란스러운 주관성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주관성(smrti)을 초월해야만 그것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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