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 -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如是衆生(여시중생)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 因無明風動(인무명풍동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 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이니,

Like so the one's original pure mind is moved by the waves of ignorance,

心與無明(심여무명) 俱無形相(구무형상) 不相捨離(불상사리)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으며 서로 버리고 떠나 있을 수 없으나,

Neither the original pure mind nor ignorance can stand alone without each other, nor have any configured form.

而心非動性(이심비동성) 若無明滅(약무명멸) 相續則滅(상속즉멸)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없으며, 만약 무명이 사라지면 상속함도 곧 사라지니,

智性不壞故(지성불괴고)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Since the nature of the wisdom in one's original pure mind is immutable and nondistructible,
if the ignorance has been removed from the original pure mind, then there will be no more succession (flow) of delusional and illusional thoughts of the mind.

 

[일체의 심식이 무명이라고 하였으나, 심식은 진여와 무명 둘 다를 떠날 수 없다. 무명으로 인하여 진여가 작용하는 것이 바로 심식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바람이 자면 곧 심식도 사라져 진여가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심식은 그 본체인 진여와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무명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진여는 본래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며, 다만 무명에 의해 동요되나 진여의 성품이 파괴된 것이 아니므로, 무명이 자면 진여는 본래의 부동이 된다.

* 憨山 : 앞에서 “불생불멸의 진여자성이 무명의 생멸과 화합하여 아리야식이 성립하였다.”고 했었다. 이 문제를 의심하는 자가 “그렇다면 이 아리야식의 생멸이 무명으로 상속하는 마음인데, 지금 상속하는 마음이 소멸하였다면 무명이 의지한 불생불멸의 진여 자체마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멸공에 떨어짐이 아니랴.”라고 이해할까봐 염려하였다.-물처럼바람처럼]

 

不思議業相者(불사의업상자) 以依智淨相(이의지정상)

불사의업상이라는 것은 지혜가 청정함=智淨相에 의지함으로써

能作一切勝妙境界(능작일체승묘경계),

능히 일체의 뛰어나고 오묘=勝妙한 경계를 만들어내나니,

When one has obtained the nature of a pure mind, then it is possible to be the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where one can be the most benevolence and excellent in practicing it.

It can be described as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所謂無量功德之相(소위무량공덕지상) 常無斷絶(상무단절)

이른바 한량없는 공덕의 모습은 항상 단절됨이 없이

隨衆生根(수중생근) 自然相應(자연상응) 種種而現(종종이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 

得利益故(득리익고)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The one with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brings endless and ceaseless benefits to all others in accordance with everyone's nature.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and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can be explained as all of our mental and intelligent interaction during life.)

 

[根=근기= 능력, 중생의 능력에 응하여 불타가 교화할 수 있다]

 

[不思議業相: 짐작할 수 없는 놀라운 작용의 모습이란, 지정상(智淨相)이 내인(內因)이 되어 갖가지 밖으로 좋은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정상이 수행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게 한다. 種種而現 得利益故도 이와 같다.

* 元曉 : 依智淨이라고 한 것은 앞의 수염본각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것을 말하니, 이 것은 시각의 지혜이다. 이 지혜의 힘에 의해 응화신을 나타내므로 無量功德之相이라고 한 것이다.

* 지운 : 지정상이나 불사의업상은 모두 진여의 불공(不空)의 모습이다. 진여불공의 지정상이 번뇌를 만나면 법력으로 작용하며 이는 지혜이다. 중생을 만나면 중생 구제로 나타나니 즉 자비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은 본각의 지(智)가 청정해짐으로서 범부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업상(業相)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무명이 사라져 본각의 지혜가 정화되어 지정상(智淨相)에 이르면 그 지혜가 중생구제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부사의업상’이라 한다. 이는 불타의 지(不思議業相), 지정상을 기초로하여 불(佛)이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불타의 활동을 ‘能作一切勝妙境界-능히 일체의 승묘한 경계를 만든다’고 하고 있다.

원효는 ‘지혜의 힘에 의하여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의 모습(無量功德之相 )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나타나는 상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상속부절(相續不絶)이기 때문에 항상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백련 전종식]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은 알기 쉽지만 견성하고 깨쳐야 볼 수 있는 본질, 진여는 알기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성질, 성품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선불교는 깨침을 화두로 주고받을 뿐이지 깨달음 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여기 대승 기신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것은 지정상(智淨相)인 지혜가 깨끗한 모양에 의지하여 일체의 수승 하고 미묘한 경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작용하는 모든 것이 부사의업상으로 표현됩니다.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모든 작용이 부사의업상입니다.-통섭불교]

 

② 性淨本覺(성정본각) - The pure nature of the Ultimate enlightenment.

復次覺體相者(부차각체상자) 亦四種大義(역사종대의)

또한 각의 본체 모습=體相에는 네 가지 큰 뜻이 있으며,

與虛空等(여허공등) 猶如淨境(유여정경) 云何爲四(운하위사)

허공과 같고 맑고 깨끗한 거울과 같으니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

The pure nature of the of the Ultimate enlightenment can be fully explained in four main meanings,
of which they are immutable and absolute truth and are as clean as a mirror, that is without manipulation and deception.

What are they?

 

[元曉 : 처음에 與虛空等이라고 한 것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猶如淨境이라고 한 것은 때를 없애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 앞의 수염본각(隨染本覺)은 염오(染汚)에 따른 본각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의 성정본각(性淨本覺)은 본각 그 자체를 설명한 것이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을 밝히다. 각체상(覺體相: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에는 네 가지의 큰 뜻이 허공과 같으며, 마치 깨끗한 거울과 도 같다.” 이제는 작용이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진여의 모양이나 깨달음의 모양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참선해서 깨쳐야 각체상의 감이 잡힐 것입니다. 여기서는 깨달아 부처님같은 마음으로 진여의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해놓았습니다. 대부분 경전에서 본질을 표현할 때 허공이란 표현을 많이 씁니다. 우리가 상상할 때 허공이란 어떻게 조작을 해도 그냥 허공입니다. 아무리 변화시켜도 허공은 그대로이고, 어떤 행위를 하여도 여여 (如如)한 것이 허공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거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거울은 뭔가 보이면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다르지만 똑 같은 성격입니다.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허공이라면 조작과 속임이 없는 것이 깨끗한 거울입니다. 진여의 세계를 잘 표현한 것입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진여의 세계와 같습니다. 깨달음 속에서 보는 진여의 세계도 원인과 결과가 작용합니다. 성정본각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데 여실공경, 인훈습경, 법출리경, 연훈습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 다. 여기서 여실공경, 인훈습경은 원인에 해당하고 법출리경, 연훈습경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금으로 금목걸이를 만듭니다. 금목걸이를 만들면 가격이 매겨집니다. 금은 체이고 금목걸이는 상이고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용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행위 를 하든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잘하려면 체상용의 관계를 잘 생각해보면 됩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들은 밤을 새며 공부했지만 성적은 좋지 않습니다. 체상용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본질의 구조와 작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해봐야 알지 무턱대고 움직여서는 잘 할 수 없습니다. 기도나 참선도 그렇습니다. 지금 필요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참선을 통해 뭔가 잘될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작용을 일으키려면 모양을 제대로 알아야겠고 모양은 본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효와 사복의 일화를 봅시다. 어떤 과부가 남편도 없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아이가 바로 사복입니다. 아이는 12살이 넘도록 말을 못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말을 하게 됩니다. 사복은 고선사에 있는 원효를 찾아 가서 원효에게 말했습니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주자.”고 하니 원효가 좋다고 합니다. 사복이 말한 암소가 바로 환생한 사복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사복이 원효더러 천도법문을 하라고 하니 원효는 법문을 해줍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이렇게 법문하니까

사복이 “무슨 법문이 그렇게 긴가.” 그러자 원효가 다시 법문을 해줍니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재가 끝나고 사복은 “석가 부처님처럼 나도 이제 연화장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연화장 세계의 문이 열리더니 사복은 그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구에서 팔지보살의 경지까지 이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원효 대사가 팔지보살의 경지인데 사복은 공덕이 그와 비슷했던 것입니다. 사복은 원효에게 계급장을 다 떼고 말합니다. 본질, 진리, 깨달음에 대한 세계를 대화로서 풀어내고 보여준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가 사복이 들어간 연화장의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이라는 말은 원효(해동소,海東疏)가 창안한 용어를 법장(의기, 義記)도 따라 쓴 용어로서, 기신론의 해당부분에서 주제(主題)로 활용되고 있다. 성정본각은 본각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각의 본성이 청정한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하게 된것이다.

여기에서는 본각의 체(體)와 상(相)을 밝은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거울은 외계에 있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으로서 호오(好惡)를 구별하지 않는다. 본각의 진리성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그 지혜는 세상만사를 분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기 때문에 밝고 맑은 거울로 비유하는 것이다.

본각의 체상(體相)을 거울과 비유하여 공경(空鏡), 불공경(不空鏡), 정경(淨鏡) 수용경(受容鏡) 등 네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즉 체(體)와 상(相), 또는 체대(體大)와 상대(相大)가 동시에 있는 것이므로, 본론에서 체대는 곧 진여이며, 상대는 그 진여의 ‘무량한 공덕’을 의미하고, 이 둘이 합하여 불(佛)의 법신(法身)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각은 불의 법신일 뿐이며, 이 본각, 법신은 허공과 같아서 세상 어디에나 두루 퍼져 있으며, 그 지혜(지智)는 발고 맑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본각의 네 가지 의미 중 첫째는 여실공경으로, 여실 공경은 여실공 즉 번뇌가 전혀 없는, 번뇌가 공무(空無)한 ‘진여의 이체(理體)’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본각은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그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중생의 마음 속에는 희로애락(喜怒愛樂)의 심상(心想)이 있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천차만별의 대상세계가 있지만, 본각은 그와 같은 일체의 마음과 경계의 상(相)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과 경계의 상(相)은 모두가 망념이 일으키는 세계이며, ‘나’라는 주관과 ‘너’라는 객관 모두는 망심(妄心)의 소산이며, 이 같은 망념이 일으키는 일체의 심경계상(心境界相), 즉 망법은 본각자체에는 없다.

법장은 ‘있는 것이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망법은 진리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울이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토끼의 뿔이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본문에서는 ‘각(覺)이 비쳐주는 뜻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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