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경각(究竟覺) - The Ultimate Enlightenment
如菩薩地盡(여보살지진) 滿足方便(만족방편) 一念相應(일념상응)
보살지를 다한 것과 같은 이는, 방편이 만족하여 일념이 상응하고,
覺心初起(각심초기) 心無初相(심무초상) 以遠離微細念故(이원리미세념고)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起을 깨달아,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어, 미세한 망념=念을 멀리 여읜 때문에,
得見心性(득견심성) 心則常住(심즉상주) 名究竟覺(명구경각)
마음의 본성= 心性을 볼 수 있게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구경각이라 이름한다.
When one has fulfilled the Bodhisattva status, as like Bodhisattvas, that they are satisfied by using an expedience for helping people wholeheartedly for their discipline.
They are vigilant over the very moment of their mind that they are about to stir up something,
and have obtained the state of which there are no delusional thoughts rising at all.
As a result, they can perceive the real nature of their mind by leaving behind all delusional and illusional thoughts.
That is to say, it is an ultimate enlightenment since their nature mind is always with him.
[菩薩地盡 : 보살의 경지를 마침, 보살 십지(十地)의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法雲地)를 마친 것.
滿足方便 : 수행에 필요한 모든 방편을 다 완성함.
一念相應 : 일념이 진여 즉 본각과 하나가 됨.
覺心初起 心無初相 :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 그 처음 일어나는 상도 없음. 처음 일어나는 상이란 곧 무명으로 인해 처음 상이 생김을 말한다.
心則常住 : 마음이 늘 如如하여 변함없음.-물처럼바람처럼]
[이 4단계의 구경각(究竟覺)은 각(覺)의 최고 단계로서 마음의 본체에 있어서의 영원 불변의 원리와 현상계에 있어서의 생멸변화하는 원리를 완전히 통달한 경지이다.
보살지진(菩薩地盡)은 보살지의 최후인 제10지(第十地)의 만심(滿心)으로서 이 경지에는 아주 미세한 번뇌를 끊고, 불타가 되는 온갖 방편(方便)이 충만되어 있어, 일념이 상응하여 최후의 번뇌가 차단되고, 망념이 떠나 진심(眞心)이 되어,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이 합일(合一)되는 것이다. 이 일념(一念)은 다른 것과 비교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념(無念)과 같다.
이때 지금까지 무시이래(無始以來) 미망(迷妄)을 계속시킨 망념의 근원을 보게 된다. 이것은 망념을 일으키는 근원(根源)이므로 이것을 심초기(心初起)라 하고, 이때 망심발기(妄心發起)의 최초인 무명업상(無明業相), 즉 망념의 생상(生相)을 알아 마음의 초기(心初起)를 깨달음으로서, 망념분별은 일어나지 않는다.
망념은 그것이 망념이라는 것을 알때 소멸되는 것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때, 거기서 꿈은 끝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망념, 무명도 이와 같아서, 그 망념의 처음 일어나는 근원[初起]을 볼 수 있을 때, 그 망념은 사라지는 것이다. 망분별(妄分別)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그 망분별을 떠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망분별의 실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세한 망념을 볼 수 있는 것은 제 10지까지의 보살지를 완성한 보살이나 불타만이 가능한 것으로서, 이같은 망념 초기(初起)즉 그 근원을 깨닫는 것이「염(念)의 초상(初相)이 없다」는 의미이다. 망심의 최후의 미세한 염이 사라져 무념(無念)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때 마음의 본성인 심성(心性),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스스로 힘을 발휘하여 심성(心性)을 보기때문에 마음의 분별은 정지되고 마음의 생멸은 사라져, 마음이 상주(常住)하는 것이다.
이때 시각(始覺)이 완성되는 것이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구경각은 지혜가 완성되어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의 세계로서, 마음이 주객(主客)으로 분열되지 아니하고, 자성청정심 그것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인식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 같은 불지(佛智)에는 전세계,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진다.
거기에는 하등의 선입견(先入見)도 없고, 편견(徧見)도 없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대로의 일들이 불지(佛智)의 인식계와 완전히 합일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는 그것에 응하여 올바른 지혜의 활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불(佛)의 세계를, 크고 넓은 바다의 해면(海面)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과 비유하여, 화엄경에서는 이를 해인삼매(海印三昧)라 부른다.-백련 전종식]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관계
The Relation between the Just attained realization and the Ultimate enlightenment
是故修多羅說(시고수다라설) 若有衆生(약유중생)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되, 만약 어떤 중생이
能觀無念者(능관무념자) 則爲向佛智故(즉위향불지고)
무념을 관할 수 있으면, 부처를 향하는 지라고 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So, the Sutra says that the one is on the right path to Buddha wisdom if anyone can observe the nature of mind without delusion and illusion.
[元曉 : 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은 인지(因地)에 있을 비록 미세한 념을 아직 여의지 못했지만, 무념의 도리를 잘 보는 것이니, 잘 보는 이것이 불지(佛智)를 향함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又心起者(우심기자) 無有初相可知(무유초상가지)
또한 마음이 일어남=心起에는 그 처음 모습=初相을 알수 없으나,
It is hard to perceive when the thought is about to come to mind,
but if I say that I know the thought is about to come to mind, it means that the stillness status of the natural mind that is free from delusion and illusion.
而言知初相者(이언지초상자) 卽謂無念(즉위무념)
'초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하는 것이다.
Again, the thought comes to mind when ignorance affects the Suchness of natural mind,
and one cannot perceive the very moment of the mind's movement.
If one says that he knows the very first movement of mind, this means that one knows the Suchness of natural mind which is the still and free from any defilement.
[元曉 : 又心起者란 위에서의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 깨달았을 때 초상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無有初相可知라고 한 것이며, 그러면서도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초상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방향을 알았을 때에 서쪽이 동쪽인 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가 깨달았을 때, 처음의 동상(動相)이 바로 본래 고요한 것인 줄 아는 것이기 때문에 卽謂無念을 말한다고 한 것이다.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초상(初相)이란 진여가 무명의 영향을 받아 처음 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 안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이 무념인 것을 안다는 뜻이다.]
是故一切衆生(시고일체중생) 不名爲覺(불명위각)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이름에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으며,
以從本來(이종본래) 念念相續(념념상속)
본래부터 생각과 생각이 서로 망념으로 이어져
Naturally, a thought and a thought lead the mind to be delusional and illusional,
未曾離念(미증이념) 故說無始無明(고설무시무명).
일찍이 그 망념을 떠나지 못한 까닭에, 시작도 없는 무명이라 설하는 것이다.
once the one cannot be free from the defiled mind, that is so called Ignorance.
[중생은 망념이 이어져 그치지 않으니, 즉, 무념이 아니기 때문에 각이라고 하지 않는다.-물처럼바람처럼]
若得無念者(약득무념자) 則知心相生住異滅(즉지심상생주이멸)
만약 무념을 얻게 되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는 것이며,
If one can attain the stillness of nature mind, that is as to say,
the one has realized the four aspects of rising, staying, changing and disapearing of the thoughts.
以無念等故(이무념등고) 而實無有始覺之異(이실무유시각지이)
그것은 무념과 같은 것으로, 실로 시각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And that is as same as the status of stillness of nature mind, which it is not different from the Just attained enlightenment.
[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며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본체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념(無念)과 같다고 하였다.
* 實無有始覺之異(실무유시각지이) : 무념에 이르게 되면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다는 것.]
以四相俱時而有(이사상구시이유) 皆無自立(개무자립)
생주이멸의 사상은 동시에 함께하여 자립할 수 없으니,
Each of those four aspects of minds cannot stand alone but be concurrent each other's.
本來平等(본래평등) 同一覺故(동일각고)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과 같기 때문이다.
Since they are equal and same as the Enlightenment.
[사상(四相)은 위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말한다. 생주이멸은 마음의 본체에서 나온 것으로 사상이 자립하지 못하면 무념과 같으므로 각(覺)과 같다고 하였다.]
[경전에는'만약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觀)하면 그 관(觀)은 불(佛)을 향한 지(智)이다'라고 설해져 있다. 여기에서 인용된 경전은 능가경(愣伽經)을 말한다. 이 경전의 의미는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적 마음은 모두가 망분별(妄分別)의 계속으로서 망념을 차단코저하면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망념을 낳고, 망념을 끊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망분별이 있는 마음의 진실된 모습을, 본래 무념(本來無念)이라고 관할 할 수 있다면, 그곳에는 아직 무념(無念)이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그 노력은 불타를 향하여 올바로 나아가는 지혜'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마음에서 망념이 일어나는 최초의 모습인 초상(初相)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망념이 일어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이 초상(初相)을 안다면 이는 곧 무념(無念)을 아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망념이 일어나는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자기의 망심이 일어나는 최초의 시기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애당초 망념이 일어나는 구조가 어떤 것인가를 안다는 의미로서 그것을 알면, 일어나는 망념을 끊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망념의 초상(初相)을 안다는 것은 초각(初覺)으로서의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게 된다.
무념(無念)은 망념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 망념이 없어지면 마음이 '너와 나'를 구별하는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어지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인식의 세계를 비추어 알고 또한 출현시키는 것이다. 무념의 세계는 불타의 세계이다. 일체중생은 망념의 세계속에 있기 때문에 시각(始覺)의 완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일체중생을 각(覺)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체 중생은 무시이래(無始以來)영원한 과거로부터 망념이 계속 상속되어 지금까지 망념을 끊은 일이 없다. 또한 무념(無念)을 실현시킨 적이 없다.
따라서 일체중생에는 시작없는 무시(無始)의 무명(無明)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며, 망념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라 불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무념(無念)을 깨달으면, 마음의 변화하는 모습인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차별을 알 수 있게 되고, 깨달음의 지혜가 진전(進展)됨에 따라 멸상(滅相)에서 이상(異相), 주상(住相), 생상(生相)으로 망념을 끊어 가면서 그 망념의 구조를 알아 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네가지 모습을 파악함으로서 무념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무념을 이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불타가 된 것이다. 무념을 이룩한 불타의 입장에서는 무념과 망념은 본래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중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무념을 알 수 없는 중생이, 무념과 망념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기신론」에서 말하는 것들은 본각문(本覺門)의 입장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시각문(始覺門)에 있어서의 수행(修行) 과정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상에서 시각(始覺)에서 본각(本覺)에 이르는 과정을
①멸상(滅相)으로부터 시작하여 ② 이상(異相) ③ 주상(住相) ④ 생상(生相)등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단계적 깨달음으로 구분, 설명하고 있다.
① 불각(不覺)으로 구분한 제 1단계의 멸상(滅相)의 깨달음은, 범부라 하더라도 인과(因果)의 원리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과거에 일어났던 그릇된 망념을 깨달아 앞으로는 그러한 악(惡)의 망념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멸(滅)하겠다고 하는 정도의 깨달음이다. 원효는 이 악을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등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들고 있다. 그래서 최초로 시작하는 각(覺)의 출발점이므로 이를 불각(不覺)〔망념의 멸상을 각함〕이라 부르고
② 상사각(相似覺)으로 구분한 제 2단계의 이상(異相)의 깨달음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등 이승(二乘)수행자들과 방금 수행의 길에 들어선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등은 또다른 망념(異相)인 탐(貪), 진(瞋), 치(癡)등 의업(意業)의 그릇된 모습을 깨닫고 크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버리는 것이므로 이를 각(覺)이라 부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지혜가 미완성이므로 상사각(相似覺)〔망념의 이상을 각함〕이라 부르며,
③ 수분각(隨分覺)으로 구분한 제 3단계의 주상(住相)의 깨달음은 법신보살(法身菩薩) (초지 ~ 십지까지의 수행보살)은 그동안 망념속에 머물러 있던「나와 너」를 분별하는 분리된 차별심을 버릴 수 있게 깨달아, 거의 깨달음을 완성하였으므로 이를 수분각(隨分覺)〔망념의 주상을 각함〕이라 부르고
④ 마지막으로 구경각(究竟覺)으로 구분한 제 4단계의 생상(生相)의 깨달음은 제 3단계까지의 망념이 제거되어 「나와 너」를 분별하지 않는 지혜는 생겼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망념의 뿌리〔生相〕, 망념의 근본을 이 4단계에서 완전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시각(始覺)이 완성되는 것, 이를 구경각(究竟覺)〔망념의 생상을 각함〕이라 부른다.
이상과 같이 시각(始覺)은 불각(不覺)에서 시작하여 차차로 본각을 향하여 상승해 가는 것으로서 이를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적용, 번뇌를 차단해 가는 과정을 원효(元曉)는 그의 소(疏)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해설하고 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은 소승(小乘)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이 설한 교리로서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한 찰나에 생상(生相), 주상(住相), 이상(異相), 멸상(滅相)의 사상(四相)을 거친다는 것이다. 생긴 것은 머물다가 변화하면서 반드시 멸한다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서,「기신론」은 이 사상(四相)의 교리를 차용(借用)하여 번뇌의 크고 작음, 거칠고 미세함 등을 적용시켜 독특한 해석을 해가고 있다.
시각(始覺)은 불각(不覺)의 멸상(滅相)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사각(相似覺)의 이상(異相), 수분각(隨分覺)의 주상(住相), 구경각(究竟覺)의 생상(生相)을 깨닫는 것으로서 완성되는 것이지만,「기신론」은 이들 사상(四相)에 대하여 범부(凡夫), 이승(二乘)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및 법신보살(法身菩薩)등의 시각(始覺)과 관련시켜 그들이 갖고 있는 번뇌를 차단해가는 과정을 설하는데 있어, 범부는 전에 일어났던 악을 깨닫고, 이승(二乘)과 초발의보살은 망념의 이상(異相)을 깨달으며, 법신보살은 망념의 주상(住相)을 깨닫고 마침내 보살진지(菩薩盡地)에서 마음의 초상(初相)을 깨달아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들 사상(四相)의 번뇌에 대하여「기신론」은 추분별(麤分別), 추념(麤念), 미세념(微細念)등으로만 표시할 뿐 구체적인 망념의 내용을 담고있지 않지만 원효는 그의 소(疏)에서 생삼(生三), 주사(住四), 이륙(異六), 멸칠(滅七)을 말하고 이를 번뇌의 차단과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멸칠(滅七)은 멸상(滅相)의 일곱가지 악에 대한 깨달음 즉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등 신(身)구(口)의 악업을 버리는 것이며,
이륙(異六)은 이상(異相)의 여섯가지 즉 탐(貪) 진(瞋) 치(癡) 만(慢)의(疑) 견(見)의 번뇌차단을, 주사(住四)는 주상(住相)의 네가지, 즉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애(我愛), 아만(我慢)의 번뇌차단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생삼(生三)은 생상(生相)의 세가지로서 업상(業相: 無明業相), 전상(轉相: 能見相), 현상(現相: 境界相)을 들고 있다. 그러나 원효가 생상(生相)을 세가지로 본 것은 그것을 동일한 아리야식으로 보고 설한 것 같으나, 뒤에 설하는 육염(六染)과 염심(染心)의 이탈지점을 살펴볼 때, 생상(生相)은 무명업(無明業)이 발생한 시초의 구조를 알아 깨닫는 것이므로 무명업상(無明業相)하나만 이어야 하고, 나머지 둘인 능견상[轉相]과 경계상[現相]은 주상(住相)의 자리에 해당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상[境界相]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으로서 제8지인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염심이 이탈되고, 전상[能見相]은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으로서 제9지인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이탈되며, 제10지인 보살진지(菩薩盡地)에서는 오직 업상(無明業相)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만이 이탈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시각(始覺)은 불각(不覺)에서 생기어 차차로 상승하여 본각(本覺)에 귀일(歸一)하는 것이지만, 본각에 합일된 시점에서 본다면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은 별도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시각(始覺)을 네단계[四相]로 구별하는 것도 이 입장에서 본다면 인지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러나 실재로는 시각(始覺)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도 파악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이 다르지 않는 시본불이(始本不二)의 관계에서 본다면 네가지 모습이 함께 있다는 사상구시(四相俱時)는 당연한 것이고 모두 홀로 자립(自立)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은 동시에 있으며 상호 도와가면서 성립되는 것이며, 이들 네가지 번뇌는 가장 미세한 번뇌로부터 거칠고 큰 번뇌로 이전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동시에 상조(相助)하면서 망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에 합일된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각(覺)은 본래 평등하고 동일한 각(覺)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각(同一覺)이라 함은 시각(始覺)은 본래 동일본각(同一本覺)이라는 의미이다. 깨달음의 지혜는, 그 본질에 있어, 그 어디에 있으나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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