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5
▷ 6. 마음은 중간에 있는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亦聞佛與文殊等諸法王子談實相時,
世尊亦言:‘心不在內亦不在外。’如我思惟,內無所見外不相知,內無知故在內不成;
身心相知在外非義。今相知故,復內無見,當在中閒。”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도 들었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문수 보살 등 모든 법왕자(法王子)들과 더불어 함께 실상(實相)을 담론하실 때,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내(心不在內)이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외(心不在外)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따라 사유하여 보니, 마음이 안에 있다면 몸의 속을 못 볼 것이고,
밖에 있다면 서로를 알지 못할 것이니,
몸의 속을 알지 못하므로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도 몸속을 못 보는 것이니, 마음은 당연히 중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ㅡ아난 존자는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근(根)과 경(境, 진塵)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아는 지(知)의 체성은 양쪽 모두에 있어야 할 것이므로, 중간에 있다는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안에 있다고 하자니 장부를 보지 못하고, 밖에 있다고 하자니 몸과 마음이 서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눈과 대상의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다.
▷ 중간의 위치를 분별하여 결정함.
佛言:“汝言中閒,中必不迷,非無所在。今汝推中,中何爲在?爲復在處?爲當在身?
若在身者,在邊非中,在中同內。若在處者,爲有所表?爲無所表?無表同無,表則無定。
何以故?如人以表表爲中時,東看則西,南觀成北。表體旣混,心應雜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중간(中間)'이란 반드시 일정한 곳이 없지 않고 미혹(애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네가 그 중간을 찾아보아라. 중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곳이 따로 있는 것인가? 너의 몸 안에 있는 것인가?
만약, 몸에 있다고 한다면,
몸 주변(변두리)이라면 중간이 아닐 것이며, 몸속이면 내장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따로 있는 곳이라 한다면, 표시를 할 수 있는가? 표시를 할 수 없는가?
표시할 수 없다면, 중간이 없다는 것이며, 표시한다 할지라도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중간에 푯말을 세워서 표시하고자 할 때,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되고,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될것이니, 그 표시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阿難言:“我所說中,非此二種。如世尊言:‘眼色爲緣,生於眼識。’
眼有分別,色塵無知,識生其中,則爲心在。”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제가 말씀드린 중간은 그러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根)과 색(色, 境)의 색진(色盡)이 인연(緣)하여서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根)에는 분별작용이 있고, 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은 아는 작용이 없으나,
그 중간에 식(識)이 생기므로, 그러한 중간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ㅡ이는 몸과 장소의 중간이 아니고 눈과 색진의 중간이라고 말한 것이다.
佛言:“汝心若在根、塵之中,此之心體爲復兼二?爲不兼二?
若兼二者,物體雜亂,物非體知,成敵兩立云何爲中?兼二不成,非知不知卽無體性,中何爲相?
是故應知,當在中閒,無有是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만약 눈(根)과 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이 마음 자체는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한 것인가?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둘을 겸한 것이라면, 색(色, 物, 塵, 대상)과 체(體, 根)이 어지럽게 섞일 뿐만 아니라,
색(色, 物, 塵, 대상)은 눈(體, 根)의 분별작용(知)이 아닌 까닭에 색(境)의 무지(無知)와 눈(根)의 분별이 서로 다르게 갈라질 것인즉, 어찌 중간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이라면, 눈(根)의 분별(知)도 색(境)의 무지(不知)도 아닌 것이니, 자체의 체성(體性)이 없으니,
중간이란 어떠한 상(相)이 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이 중간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만약 마음이 눈과 대상인 물질, 두 가지를 겸하여서 그 중간이 된다고 한다면, 대상 물질은 앎이 없고 눈은 앎이 있으니, 앎이 있는 것과 앎이 없는 것이 서로 상대겆인 것으로, 둘로 갈라질 것이니, 어떻게 이것이 화합해서 중간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7.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昔見佛與大目連、須菩提、富樓那、舍利弗四大弟子共轉法輪,常言:‘覺知分別心性,旣不在內,亦不在外,不在中閒,俱無所在。一切無著名之爲心。’則我無著名爲心不?”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 제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 부처님께서 목건련(目揵連) 존자와 수보리(須菩提) 존자 와 부루나(富樓那) 존자와 사리불(舍利弗) 존자 등의 네 제자와 함께 법륜(法輪)을 굴리시면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은 안(內)에도 있지 않고, 밖(外)에도 있지 않고, 중간(中間)에도 있지 않은 것으로, 그 어디에도 있는 곳이 없는 무소재(無所在)이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 무착(無着, Nonattachment)이 마음이라는 뜻이오니, 제가 이 무착(無着)을 마음이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ㅡ아난 존자는 안 밖, 일곱 번째로 마음은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 Cling to nothing)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본래 있을 곳이 없으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한 것인데, 지금 아난 존자는 다시 무착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다.
▷무착(無着)을 파(破)하다.
佛告阿難:“汝言覺知分別心性俱無在者,世閒虛空水陸飛行,諸所物象名爲一切。
汝不著者,爲在爲無?無則同於龜毛兔角,云何不著?有不著者不可名無,無相則無,
非無則相,相有則在,云何無著?是故應知,一切無著名覺知心,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바대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이 어디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면,
세상과 허공의 물과 육지에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일체의 물상을 일체(一切)라고 하거늘,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 거북이의 털인 귀모(龜毛)와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이, 있을 수 없는것이 거늘,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일체가 있음(有)에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 집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니,
무상(無相)이라면, 곧 아무것도 없는 무(無)이고,
없지 않은 비무상(非無相)이라면, 곧 상(相)이 있는 것이며, 상(相)이 있으면 마음이 있는 것이니,
어찌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에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을 깨닫고 아는 마음의 각지심(覺知心)이라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지금까지 아난 존자의 주장은 마음의 소재에 대하여 있다(有)와 없다(無)의 유무(有無) 두 가지였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설명하실 때 항상 ‘관계성(연기성 緣起)’으로 말씀 하셨으니, 있다 없다라는 것은 고정된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항상하지 않은 이 세계는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 유무(有無)의 고정된 실체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으나, 아난 존자는 망심(妄心)을 진심(眞心)으로 잘못알고 7 곳을 대답하였다. 부처님서는 아난 존자의 틀린 부문을 지적하셨으나, ‘마음의 소재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 파사(破邪)만 하시고 현정(顯正)은하지 않으셨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은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 洗心堂
마음(心)의 소재(所在)에 관한 아난 존자의 잘못된 대답의 칠처징심(七處徵心);
① 아난 존자의 첫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안(身內, The mind is in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② 두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의 밖(身外, The mind is out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③ 세 번째의 주장으로는 눈의 뒤(안구의 뒤)에 숨어서, 잠복근이(潛伏根裏, The mind is behind the eyes)하고 있는 것,
④ 네 번째 주장으로는,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으로, 마음은 어두운 몸 속에 있는, 장암(藏暗, Closing the eyes to see darkness, that is to see it)하는 것이라 하였다.
⑤ 다섯 번째의 주장으로는 경계(대상)를 따라 합하는 곳에서 생기는 수합(隨合, it exists in response)하다는 것.
⑥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는 것,
⑦ 일곱 번째로, 안 밖,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반연심(攀緣心)과 청정체(淸淨體)의 두가지 근본(根本, The two fundamental roots)
爾時,阿難在大衆中卽從座起,偏袒右肩右膝著地,合掌恭敬而白佛言:
“我是如來最小之弟,蒙佛慈愛,雖今出家猶恃憍憐,所以多聞未得無漏,不能折伏娑毘羅呪,
爲彼所轉溺於婬舍,當由不知眞際所指。唯願世尊大慈哀愍,開示我等奢摩他路,令諸闡提墮彌戾車”
作是語已,五體投地。及諸大衆傾渴翹佇,欽聞示誨。
그러자 아난 존자가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무릎을 세우는 우슬착지(右膝著地)하여서, 합장하고는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입고 비록 지금 출가하였으나, 오히려 사랑하여 주시는 것만을 믿고, 많이 들어서 알기만 하였을 뿐, 여태껏 무루(無漏)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비가라주(娑毗迦羅呪, 수론외도의 주문)를 꺾지 못하고, 마등가(摩登伽)의 홀림을 당하여 음실(婬室)에 빠졌으니, 이것은 진실한 경지의 진제(眞際, 깨달음)로 가는 길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열어 보여 주시고,
모든 천제(闡提, 부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 마저도 추악한 성격의 미려차(彌戾車, 악견)을 헐어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체(五體, 온몸)을 땅에 던져 대중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마음은 물과 같아서 가만히 있지 않으면 밝아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마타의 길로 진제에 나아가기를 구하였는데, 만약 진제가 나타나면 망심의 때는 저절로 없어진다.
천제(闡提, icchantika, ecchantika), 일천저가(一闡底迦) · 일전가(一顚迦) · 일천제가(一闡提柯)라고도 음역하고, 단선근(斷善根) · 불신구족(不信具足) · 극욕(極欲) · 대욕(大欲) · 무종성(無種性)이라고 의역한다.
icchantika를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 풀이하면 ‘욕구하는 자’를 뜻하기 때문에 그 유래를 고대 인도의 쾌락주의자에서 찾을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의지가 없어 성불의 소질과 인연이 결여된 자들을 가리킨다. 즉 일천제는 선근(善根)이 끊겨서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자, 아무리 수행해도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자를 말한다.ㅡ다움
미려차(彌戾車, Mleccha믈레차), 낙구예인(비루한, 하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의역하며,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치우친 견해·삿된 견해와 같이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미려차는 ‘변경(邊境)의 사람’, ‘타국인·외국인’, ‘야만인’ 등을 뜻하는 말로, 불교의 경론(經論)에서는 사견(邪見)·악견(惡見) 등 ‘바르지 못한 견해’나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 등을 가리킵니다. ㅡ운곡원포
▷상서로운 광명을 얼굴로부터 발하시다.
爾時,世尊從其面門放種種光,其光晃耀如百千日,普佛世界六種震動,如是十方微塵國土一時開現;
佛之威神令諸世界合成一界,其世界中所有一切諸大菩薩,皆住本國合掌承聽。
이때, 세존께서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으시니, 그 광명이 백 천의 햇살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비치자, 드넓은 부처님의 세계인 보불세계(普佛世界)가 여섯 가지로 육종진동(六種震動)하면서, 시방(十方)의 미진과 같은 많은 세계가 일시에 열리어 나타났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이 모든 세계를 합하여 한 세계를 이루시니,
그 세계의 보살들은 그들의 본토에 머문 그대로 합장하여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육종진동(六種震動), 동(動), 기(起), 용(湧), 후(吼), 격(擊). 인도의 풍습에서 큰 경사가 있을 때면 대지가 진동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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