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5

 

阿難言:我今於此重閣講堂,遠恒河上觀日月,擧手所指縱目所觀,指皆是物無是見者。

世尊!如佛所說,況我有漏初學聲聞,乃至菩薩亦不能於萬物象前剖出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지금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와 위로는 해와 달을 보면서손으로 가리킬  있는 것과 눈이 가는 대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 모두는 물체일 , 견(見)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루(有漏) 초학(初學)의 성문이라서 그렇다고심지어 보살들의  지혜로도 일체의 물상에서 일체의 물상 앞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성품의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ㅡ만약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정밀하게 보는 정견이 있다면, 그 보는 주체가 도리어 물상과 같아서 실제로 그 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가리켜 낼 수가 있겠지만, 비록 대성이라 할지라도 일체 물상 앞에서 물상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의 물상이 아닌 정견을 가려 낸다면, 물상이 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물상을 보건대 이는 본래 허망한 것이므로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일체물별유자성(離一切物別有自性), 자성(自性)은 모든 존재가 지닌 변하지 않는 본질이며 공성(空性)이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과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도 내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주객을 떠나 있는 견(見)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참마음이고 진짜 '나'인 것이나, 견(見) 아닌 것이 없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다. 물상은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빠짐없이 골고루 보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물상과 허공 자체는 견이 아니므로,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변물무비견(辯物無非見)

佛復告阿難:“如汝所言,無有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則汝所指是物之中無是見者。

今復告汝!汝與如來坐祇陁林更觀林苑,乃至日月種種象殊,必無見精受汝所指;汝又發明此諸物中何者非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을 가려낼 수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정밀하게 보는 자성(自性) 있다면, 네가 가리키는  물상 안에는 보는 주체의 견정(見精)이 없어야 하리라. 

너에게 한   말하나니, 네가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에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의 다른 모습에서 네가 가리켜  수 있는 견정(見精)이 없다면, 

너는 다시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무엇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밝혀보아라.”

ㅡ만물은 상분(相分)으로, 견분(見分)을 떠나서는 상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상분 중에 견분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지만, 견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본다.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阿難言:“我實遍見此祇陁林,不知是中何者非見?何以故?若樹非見,云何見樹?若樹卽見,復云何樹?如是乃至若空非見,云何爲空?若空卽見,復云何空?我又思惟是萬象中,微細發明無非見者。”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저는 실재로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무가 보는 것이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나무를 본다고 하겠으며, 

만약 나무가 보는 주체라고 한다면, 어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나아가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사유(思惟)하여 보니,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주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초학 망착(罔措)

茫然不知是義終始,一時惶悚失其所守。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초학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아득하여서,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서 모두 놀라,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ㅡ부처님께서 대답하신 2가지의 이치가 정함이 없음을 의심한 까닭에 지키던 것을 잃은 듯하였다.

 

如來知其魂慮變慴,心生憐愍,安慰阿難及諸大衆:“諸善男子!無上法王是眞實語,如所如說不誑不妄,非末伽梨四種不死矯亂論議,汝諦思惟無忝哀慕。”

여래께서 그들의 넋이 변하여 놀란 아시고 가련하게 여기시어, 아난 존자와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 부처님)의 말은 진리그대로 설하는 진실어(眞實語)이며,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誑語)이며, 거짓이 없는 불망어(不妄語)이니, 말가리(末伽黎, 외도)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가지 희론인 사종불사교란논의(四種不死矯亂論議)가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히 애모(哀慕)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ㅡ부처님은 아난존자가 적상심성(寂常心性)을 물은 후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견성(見性)에 대하여 밝히셨다. 
①전진(前塵)은 스스로 어두워도 견성은 훼손되지 않음을 들어서 견성이 바로 마음임을 밝히셨고, 
②손은 스스로 쥐고 펴지만,  견성은 펴거나 쥐거나 하지 않음을 들어  견성은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셨고, 
③펴지고 오그라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서축(舒縮)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님을 들어 견성은 멸하지 않음을 밝히셨고, 
④신심(身心)은 모두 묘하게 비추고 밝고 상적(常寂)한 진심이 드러낸 물상임을 들어 견성은 잃지 않는 것임을 밝히셨고, 
⑤돌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난이 아니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난임을 들어 견성은 돌려보낼 수 없음을 밝히셨으며,  
⑥사물은 차별이 있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음을 들어 견성은 뒤섞이지 않음을 밝히셨다. ㅡ 한울림  

 

▷문수보살께서 밝혀 주시기를 청함

是時,文殊師利法王子愍諸四衆,在大衆中卽從座起,頂禮佛足合掌恭敬而白佛言:

“世尊!此諸大衆,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是非是義。世尊!若此前緣色空等象,若是見者應有所指;若非見者應無所矚。而今不知是義所歸故有驚怖,非是疇昔善根輕尟,唯願如來大慈,發明此諸物象與此見精元是何物,於其中閒無是非是。”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기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대중은 여래께서 밝혀주신 정밀하고 밝게 보는 정명(精明)과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과, 전연(前緣)의 물질(色)과 공(空)에 대하여 이것(是)인지, 이것이 아닌(非是)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전연(前緣)의 물질의 형상인 색(色像)과 공(空像)이 보는 주체라면, 마땅히 손으로 가리킬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주체가 아니라면, 당연히 볼 대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대중들은 지금 이 이치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놀라고 있을 뿐으로, 옛날부터 바른 근성의 선근(善根)이 모자란 탓은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대자(大慈)를 베푸셔서,  일체의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의 견정(精見)은 본래 무엇이라서,  중간에 그렇다고 하는 시(是)라고도 할  없고, 그렇지 않다는 비시(非是)라고도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시옵소서.”

ㅡ대중이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묘리(妙理)를 몰라서 망연해 하자 문수보살이 대중을 대신해서 청문한 것이다.
색(色)과 공(空)이 견성이라면, 만상을 마주하는 능견(能見)의 견성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색공이 견성이 아니라면 만상을 마주해도 보여지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을 모른다. 
이승보살(二乘菩薩)은 미세한 법집(法執)을 파하지 못하고고 상(相)을 여의어 견정을 깨달았으므로,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뜻을 모르고, 견분(見分)은 내분(內分)에 속하여 볼 수 없는데 법성(法性)에 들지 못한 사람은 외상(外相)만 파하고 내견(內見)을 볼 수 없어서 이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물상과 견정이 마주할 때 그 중간에 견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달라고 청문한 대목이다.ㅡ 한울림 

 

견정(見精)과 색공(色空)이 같은 것의 시(是)인가? 다른 것의 비시(非是)인가?

견정(안근/主)이 색공(색진/客)을 보고 안식이 생긴다. 그러면 견정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없는 것인가? 견정이 없으면 색공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한다면 견정을 찾아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이 견정인지 알 수가 없으니,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없다'고 한다면 색공을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볼 수 있으니 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견정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견정과 색공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사물 자체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기 때문이다.ㅡ향적법진

 

▷본체는 하나의 동체(同體)라는 것을 보이시다.

佛告文殊及諸大衆:“十方如來及大菩薩,於其自住三摩地中,見與見緣幷所想相,如虛空花本無所有。

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云何於中有是非是?文殊!吾今問汝,如汝文殊,更有文殊是文殊者?爲無文殊?”

부처님께서 문수 보살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의 여래와 뛰어난보살들이 스스로 머무시는,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가운데에서의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과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들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은 본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菩提妙淨明體)이거늘, 

어찌 이러한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수여, 너에게 묻겠으니,

 그대로가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서 이것은 문수이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있겠는가?”

견(見)이란 근(根)이고, 견연은 경계(境, 대상)이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은 식(識)이다. 근경식, 3가지가 만법을 다 포섭하고 있어서, 모든 인연법이 원래 하나의 보각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든 의심이 가시는 것이다. 즉 모양(相)을 보는 것이 망령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고, 성품을 보면 본래가 참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자성(自性)의 수능엄의 바른 선정인 수능정정(首楞正定)이다. 이 선정은 권교(權敎)와 소승의 출입이 있는 선정과 같지 않은 것이라서 자주(自住)라 하였다. 즉, 자주본지풍광(自住本地風光)은 닦아서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허공화본무소유(如虛空花本無所有),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부처님과 원돈(圓頓)보살은 변계소집(徧計所執)된 육식(六識)은 본래 공(空)이고 대상에 의존하는 근진(根塵)은 환(幻)과 같아서, 마치 눈병 걸린 사람이 보는 허공의 아른거리는 꽃과 같으며, 연(緣)에서 나와 그 본성(本性)이 없는 것니 본래 있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운하어중유시비시(云何於中有是非是),능견(能見)인 견분(見分)과 연하는 상분(相分)을 요달(了達)하는 당체(當體)가 바로 진(眞)이다. 근(根)은 능연(能緣)이고 진(塵)은 소연(所緣)이며 식(識)은 연(緣)으로 생긴다.

*원시보리묘정명체(元是菩提妙淨明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이다;

‘원(元)’이란 보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묘(妙)란 법신덕(法身德)으로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이며,

정(淨)이란 해탈덕(解脫德)으로 처염불변(處染不変)이라는 말이고,

명(明)이란 반야덕(般若德)으로 영광독요(靈光獨耀)라는 말이다.

즉 보리란 이 삼덕(三德)을 깊이 간직한 체(體)로서 시비(是非)를 초월한 것이다.-능엄경강의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는 진견(眞見)과 전상(轉相)인 견분(見分)이 서로 깊게 연이 된다. 
이렇게 망립(妄立)된 것이 망능(妄能)을 일으킨다. 
능견의 견분과 외진(外塵)인 상분(相分)이 서로 연(緣)하는 것에 비록 깊고 얕음이 있을지라도 모두가 허망(虛妄)한 상상(想相)인 것으로, 견정과 견연의 근본을 끝까지 찾아보면 모두가 묘정명체에서 발원한 것이다. 
불보살님께서 삼매정정(三昧正定)에 머물며, 제8식을 돌려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어서 8식이란 이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8식 중의 견분을 논하겠는가? 
견분이 이미 없으니 상분이 성립될 수 없다. 견상의 2분은 원래 묘정명체(妙精明體)인 진심으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희론법이 아닌 것이다. ㅡ한울림

 

“如是,世尊!我眞文殊,無是文殊。何以故?若有是者,則二文殊。然我今日非無文殊,於中實無是非二相。”

문수 보살이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이 문수이다'라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是)이 '문수이다'라고 한다면, 바로  개의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이상(二相) 있을  없습니다.”

ㅡ일진법계(一眞法界)는 본래 시(是)와 비(非)의 두 상이 없음을 밝힌 것으로,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의 이상(二相)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합현(合顯)

佛言:“此見妙明與諸空塵亦復如是,本是妙明無上菩提淨圓眞心,妄爲色空及與聞見,如第二月,誰爲是月?又誰非月?文殊!但一月眞,中閒自無是月非月。是以汝今觀見與塵,種種發明名爲妄想,不能於中出是非是,由是精眞妙覺明性,故能令汝出指非指。”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견(見)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과 모든 공(空)과 육진 경계(色)도 역시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은 무상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공(空)과 보고(見)과 듣는 문(聞)으로 변하여서, 마치 제이의 달(第二月)과 같이 되었으니, 어느 것이 달이고, 어느 것이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수여, 단지 하나의 달만이 참된 달이라 한다면, 그 중간에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주체인 견(見)과 대상 경계인 진(塵)을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것은 허망한 망상(妄想)이라 이름하나니, 그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가리켜 밝히고,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ㅡ이 문답 가운데에서 각각 셋으로 

질문의 3 가지는 '네가 문수인 것과 같이'와, '다시 문수라고 할 문수가 있는가?'와, '그러한 문수가 없는가'의 셋이고, 

그 3 가지의 대답은 '제가 참 문수 입니다'라고 한 것은 보리정명체를 성립시킨 것이고, 

'그러한 문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곧 견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나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견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 견성은 바로 진심으로, 무시이래로 망상과 혼재해 있는 것이나, 망상이 견성의 광명을 영원히 차폐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묘명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묘하고 밝은 본시묘명(本是妙明), 원래 그러한 것으로,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 무시이래로 진심은 천변만화하는 망상 중에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맑은 정(淨)’이라 하고, 이 진심이 변화하지는 않지만 천변만화하는 망상을 따라 끝없이 많은 작용을 나타내는 까닭에 원만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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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엄경(首楞嚴經) 2 4

 

▷견성(見性)은 대소(大小), 내외(內外), 서축(舒縮), 명암(明暗), 통하고 막힘의 통색(通塞) 등에 있지 않다. 

佛告阿難:一切世閒大小內外諸所事業各屬前塵,不應說言見有舒縮。譬如方器,中見方空,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거나 작다는 대소(大小)나, 안이나 밖이라는 내외(內外)의 여러가지 작용인 사업(事業) 각각의 앞의 경계인 전진(前塵)에 달려 있을 뿐이니보는 성품이 펴지고 움츠려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느니라. 

비유하자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같은 것이다.

ㅡ일체세간은 중생과 기계(器界), 대소(大小)와 내외(內外)는 한 세계, 한 집안 등이며,  여러가지 사업은 펼쳐지고 움츠러들며, 좁고 단절되는 등의 유(類)를 말한다. 이것은 만법이 다 전진(前塵)에 속하여서 나의 영각(靈覺)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진은 크고 작음이 있지만 보는 주체는 서축(舒縮)하지 않다는 것이다. 

 

吾復問汝,此方器中所見方空,爲復定方?爲不定方?若定方者,別安圓器空應不圓;若不定者,在方器中應無方空。汝言不知斯義所在,義性如是云何爲在。

내가 다시 너에게 묻겠으니,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모나게 정해진 정방(定方) 이겠는가?

모나게 정해지지 않은 부정방(不定方) 이겠는가?

만약 정해진 모남의 정방(定方)이라면,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정해진 모남이 아닌 부정방(不定方)이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할 것이

네가 말한 ‘그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 뜻의 내용인 의성(義性) 이러한 것이니,

능히 보는 견성(見性)이 큰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작은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릇은 전진(前塵)을 비유한 것이고, 허공은 보는 주체를 비유한 것이다. 

견성(見性)은, 만유의 본체로써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으로, 일체가 평등하고 불생불멸하여 변화가 없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며,  
연(緣)을 따라 일(事)을 일으키는 동작이 있는 불변(不變)의 진여(眞如)는 그 자체가 변치 않는 것이지만, 외연(外緣)을 만나면 만유를 내는 불변수연(不變隨緣)으로,
이러한 수연불변(隨緣不變)과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두 가지 공능이 있음을 밝혔다

 

阿難!若復欲令入無方圓,但除器方空體無方,不應說言更除虛空方相所在。

아난아만약 둥글고 모남이 없는 무방원(無方圓)으 들어가게 하려면단지 모난 그릇만 없애 될 것이지만,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남 없애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생각을 버림

若如汝問,入室之時縮見令小,仰觀日時汝豈挽見齊於日面?若築牆宇能夾見斷,穿爲小竇寧無竇迹?是義不然。

네가 질문한 대로, 방에 들어갔을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지는 것이라면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  때에는, 그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진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은 흔적이 없는 것인가?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ㅡ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ㅡ결론지어 나타내다.

一切衆生從無始來迷己爲物,失於本心爲物所轉,故於是中觀大觀小;

일체 중생들이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스스로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본신(本心) 잃고 물체를 따라 굴러 온 까닭에,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ㅡ일체 중생들이 무시로부터 자신을 모르고 불질을 자기라고 여겨서, 즉 마음 속의 의식이 마치 밖의 물질처럼 나타나는 자신의 마음을 밖의 물질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은 오직 마음 속의 의식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무성섭론(無性섭攝論)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인식하는 성품은 허망한 것이고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이니, 이것이 참다운 자기(自己)이다. 

 

마음은 상주진심(常住眞心)이고청정해서 모양이 없고 공적해서 허공과 같은 성정명체(性淨明體)이다.

그릇() 육진경계이고허공()   아는 성품인 견성(見性) 비유하고 있다.

허공이 네모 또는 둥근 모양이 없듯이 견성도 모양이 없다.

허공은 모양이 없으므로 축소되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아난은 (眼根) 견정(見精)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 크기를 말하고 있다

눈은 카메라 렌즈와 같은 기관일 뿐이고보고 아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견성(見性) 크기가 없으나견정(見精) 시력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눈에는 380nm~780nm 사이의 가시광선만 보인다고 한다. 향적법진

 

若能轉物則同如來,

만약, 물체를 굴릴  있다면여래와 같아서, 

ㅡ약능전즉동여래(若能轉物則同如來), 물체를 굴리는 전물(轉物)의 공은 반드시 묘지(妙智)에 의지하여서 원만한 이치​를 깨닫고, 법집(法執)을 파하고, 마음 밖에 한 법(法)도 없는, 법법(法法)이 유심(唯心)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 것이다. 
만물을 자기로 돌려 천지와 내가 동근(同根)으로, 만물이 모두 나와 한 몸임을 아는 것이 사법계(事法界)에서 깨달아, 이법계(理法界)로 들어가는 것이다.

 

身心圓明不動道場,於一毛端遍能含受十方國土。

신심(身心) 뚜렷이 밝고 원만하여서, 부동(不動)의 도량에서,

하나의 털 속에 시방국토를 두루 머금어 들일  있느니라.”

ㅡ이것은 체자재(體自在)를 밝힌 것으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에 속한다. 
이미 만물을 운전하여서 몸은 법성신(法性身)으로 두루 비추고 임하며, 마음은 묘명심(妙明心)으로 영명통철(靈明洞徹)하여서 만물과 신심이 본래 하나의 체(體)이니, 즉 신심(身心)이 바로 법계(法界)로써, 부동(不動)의 도량(道埸)인 것이다.

  

*견성이 사각형에 있으면 사각형이고, 원형에 있으면 원형이 되는 이것이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뜻이다.
사각형의 안도 허공이고 원형의 안도 허공이다. 사각과 원은 다르지만 허공은 다르지 않은 이것이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이다.
허공은 원래 방원이 없으나 용기(用器)를 따라 방원(方圓)이 있어지는 것이니, 용기를 없애면 허공은 본래의 허공으로 돌아간다. 방에 들어갈 때 방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견성이 작다고 할 수 없으나, 일체중생이 무시래(無始來)로 본래 광대하고 원명하고 묘한 마음을 모르고, 맑음에 따라 견정(見精)을 이루고 색을 취하여서 근(根)을 이루어 분주한 것이니,
이렇게 하여서 안으로는 부진근(浮塵根)에 막히고, 밖으로는 기계(器界)에 갇힌다.
업식(業識)을 따라 오음과 4대(四大)가 화합한 것이 분단신(分段身)이다.
묘하고 밝은 진성(眞性)은 갇히고 나뉘어서 안으로 몸이 되고 밖으로는 경계가 된다.
만약 진성이 법계에 변만(遍滿)함을 깨달으면 안으로의 심신에서 해탈하고 밖으로의 세계에 꺼둘리지 않는다. 
묘성은 원통(圓通)하고 육근이 호용(互用)하고, 부진(浮塵)과 세계(世界)는 하나의 법계를 이룬다. 
몸은 법성신(法性身)이고 원명(圓明)한 앎은 무상지각(無上知覺)이다.
부동도량(不動道場)인 몸은 시방에 편재(遍在)하고, 한 터럭 끝에 무변(無邊)의 국토를 머금고 있으나,
일체중생은 자기의 참된 견성을 모르고 밖으로 대소방원(大小方圓)에 분망할 뿐이다.ㅡ 한울림

 

▷보는 주체가 대상 경계와 함께 묘체(妙體)이다. 

阿難白佛言:世尊!若此見精必我妙性,令此妙性現在我前,見必我眞,我今身心復是何物?而今身心分別有實,彼見無別分辨我身,若實我心令我今見,見性實我,而身非我,何殊如來先所難言:‘物能見我?’唯垂大慈開發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만약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 틀림없는 저의 미묘한 성품의 묘성(妙性)이라면 묘성(妙性, 견정) 지금 바로  앞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앞에 있는 보는 정기(견정)가 분명한 저의 진실한 성품이라면지금의  몸과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지금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나

저의 견정(見精)은 따로이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약, 참으로 앞에 있는 견정(見精)이  마음이라면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셨으니

견성(見性) 실제로 '나'이나 몸은 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전에 ‘물체도 나를   있으리라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대자(大慈)로써 깨닫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시소서.”

 

ㅡ묘성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라서 몸 과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다'라고 한 것은, 마음은 분별함이 있겠지만 보는 주체는 분별함이 없어서 몸과는 분리되어 다른 물상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보는 주체가 물상에 있고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물상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는 미혹한 마음으로 깨닫기 어렵다는 말이다. 

 

견성실아(見性實我), 이신비아(而身非我),

견성(見性)이 진실로 '나'라고 한다면, 몸은 내가 아니고 하나의 물건이 된다.

물능견아(物能見我), 견성(見性)이 만약 물건이라면, 물건은 마땅히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나 물건은 볼 수가 없다.
견(見)은 대상이 아니다
의식(意識, 마음)은 항상 주객(主客)으로 나누어지고, 주관이 객관을 본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 견식(見識), 주(主) →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 상식(相識), 객(客)이니,

따라서 보는 것도 마음이고, 보이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니, 마음이 주객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경각(究竟覺)의 상태를 말할 때,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을 말한다.

마음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고 보니, 마음에는 처음의 모습이 없더라.

만약 처음의 초상(初相)이 있다면, 견분(주)이 상분(객)을 보듯이,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구경각은 주객이 없는 상태라야 한다.
참선요지(參禪要旨)에서는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보는 것을 각조(覺照)라고 한다.

마음이 공(空)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 가지의 경계가 사라진다. 보는 마음과 대상인 공성이 하나가 되고, 이를 분명하게 항상 아는 마음인 요료상지(了了常知)라고 한다. 이 앎은 주객이 없는 상태, 이것이 진짜 '나'이다.ㅡ향적법진

 

▷비실(非實)임을 밝히시다.

佛告阿難:今汝所言:見在汝前是義非實。若實汝前,汝實見者,則此見精旣有方所非無指示。且今與汝坐祇陁林,遍觀林渠及與殿堂,上至日月前對恒河,汝今於我師子座前,擧手指陳是種種相,陰者是林,明者是日,㝵者是壁,通者是空,如是乃至草樹纖毫大小雖殊,但可有形無不指著。若必有見現在汝前,汝應以手礭實指陳何者是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지금 네가 말한 견정(見精)이  앞에 있다고  뜻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참으로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 견정(見精)은 장소가 있는 것일테이니 장소를 가리켜 보일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 강을 두루 보고 있으니너는 이제  사자좌(師子座앞에서 손을 들어  가지가지 모양을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이며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모양이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견정(見精)이 분명히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어느 것이 견정(見精)인가?

ㅡ아난 존자가 견성(見性)과 신심(身心)이 다른 각체(各體)라고, 잘못되게 집착하여서 견성이 앞에 있다고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신심(身心)과 견성(見性)이 둘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阿難!當知若空是見,旣已成見,何者是空?若物是見,旣已是見,何者爲物?汝可微細披剝萬象,析出精明淨妙見元,指陳示我,同彼諸物分明無惑。

아난아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허공을 견정(見精)이 한다면, 허공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약 물상을 견정(見精)이 한다면, 물상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 헤치고 벗겨서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일체의 물상들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보여서 저 물상과 같이 분명하게 의혹이 없도록.”

ㅡ처음에 견정(見精)을→ 다음에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을→ 나중에 정밀하게 보는 주체인 정견(精見)을 말하였다  

이것은 모는 주체가 미묘하고 정밀하게 밝은 정명심(精明心)에 근본하였으므로 총합하여 '정(精)'이라 하였으며, 마음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것이므로 보는 근원인 '견원(見元)'이라 하시고, 작용에 의한 응용본체(應用本體)를 가르키는 것이므로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라 하였으며, 본체에 의하여 쓰임을 가리켜서 정밀하게 보는 '정견(精見)'이라 한 것이다.

 

만상(萬象)을 풀어헤쳐서 분석하여서 이 정명정묘(精明淨妙)한 견원(見元)을 골라내어 보아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靜•明•淨•妙은 견원의 모습은, 즉 본각(本覺)이 갖추고 있는 성(性)의 공덕상(功德相)이다. 
정(精)은 만상이 혼탁하게 할 수 없음이고, 
명(明)은 덮을 수 없음이며, 
정(淨)은 오염시킬 수 없음이고, 
묘(妙)는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므로 견원(見元)이라 하는 것이다. 
견원(見元)을 견정(見精),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식정원명(識精元明)과 같은,

두 근본 중에 진본(眞本)은 물상(物象)과 동체(同体)인 것이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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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3

 

▷모든 물상에 임하여서 진성을 결택(決擇)하다

阿難言:“我雖識此見性無還,云何得知是我眞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비록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은 돌려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어떻게 하여  견성(見性) 저의  성품인 진성(眞性)이라는 것을   있겠습니까?”

ㅡ비록 견정(見精)을 돌려보낼 곳이 없음을 알면서도 현재 사물과 섞여 있으므로 밝게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아난 존자는 아직 반연심(攀緣心)을 버리지 못한 상태로써, 비록 견성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알지만, 외경과 분별할 수 없어서 어느 것이 망경(妄境)이고 어느 것이 진성(眞性)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佛告阿難:“吾今問汝,今汝未得無漏淸淨,承佛神力,見於初禪得無障㝵;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 번뇌가 없는 청정한 경지인 무루청정(無漏淸淨)을 얻지 못하였으나, 

나의 신통력인 신력(神力)으로 초선천(初禪天)을 걸림 없이 보았느니라.

ㅡ아난 존자는  아라한의 지위인 초과(初果)를 얻어서 견혹을 끊고 장애(障礙)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무루청정(無漏淸靜)은 얻지 못하였다. 

 

而阿那律見閻浮提,如觀掌中菴摩羅菓;諸菩薩等見百千界;十方如來窮盡微塵淸淨國土無所不矚。衆生洞視不過分寸。

아나률(阿那律, 아니룻다, 십대제자이며 천안제일)은 염부제(閻浮提, 사바세계)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망고) 열매처럼 볼 수 있으며, 보살들은  천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시방의 여래는 미진(微塵)과 같이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본다고 할지라도 분촌(分寸, 한 치, 우리가 사는 세계)에 지나지 않느니라.

아나률(阿那律, Aniruddha, 아니룻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부처님의 6촌 동생으로서 잠이 너무 많아서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7일 동안 무리하게 자지 않아서 두 눈을 잃었으나 후에 수행하여 천안통(天眼通)을 이루어 천안제일이 되었다.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시고, 난타(난다), 라훌(라후라)를 시작으로 석가족의 청년 5백 명이 출가하게 되었는데, 아나률은 형을 대신해서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층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이발사였던 우파리가 왕자인 아나률보다 먼저 출가했는데, "먼저 제자가 된 사람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부처님 교단의 의례에 따라 아나률 등 왕자들이 우파리에 예배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잘해냈다. 석가족의 교만한 마음을 멸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나률은 부처님의 입멸에 통곡하며 비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아난 존자에게 지시해서 쿠시나가라의 맛라(Mahla)족에게 부처님의 장의 준비를 시켰다고도 설해진다.

 

*여기에서는 견정(見精)이 보는 한계를 반연(攀緣)하는 경계를 말하고 있다. 
초선천(初禪天), 색계의 탐욕을 벗어난 천계을 보는 것은 유학인(有學人)의 혜안(慧眼)이 볼 수 있고, 
염부제를 보는 것은 무학인(無學人, 벽지, )의 천안(天眼)을 닦아서 대천세게를 볼 수 있고, 
백천계(百千界)를 보는 것은 보살의 법안(法眼)의 견량(見量)이고, 
미진국(微塵國)을 보는 것은 여래의 불안(佛眼)의 견량(見量)이고,   
종이 한 장이 막힌 것도 볼 수 없는 분촌(分寸)만을 보는 것은 중생의 육안(肉眼)의 견량(見量)이다. 

 

阿難!且吾與汝觀四天王所住宮殿,中閒遍覽水陸空行,雖有昏明種種形像,無非前塵分別留㝵,汝應於此分別自他。今吾將汝擇於見中,誰是我體?誰爲物象?

아난아, 내가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 수미산의 제석천을 호위하는 동서남북의 4 호법신)이 머무는 궁전을 보고, 중간에 물과 육지와 허공을 다니는 것들을 두루  보았을 때,

비록 어둡고 밝은 갖가지의 형상이 있었으나, 그러한 것들은 눈 앞의 대상으로서, 구분되고 걸리고 장애되는 것이 없었으니, 너는 거기에서 나(自)와 내가 아닌 타(他)를 분별해 보아라. 

나는 지금 너에게 보는 작용 가운데 무엇이 나(自)의 자체인, 아체(我體)이고,

무엇이 다른(他) 것 물상인지를 가려내리라.

 

사천왕(四天王)은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하며,

비파를 들고 있으며, 동쪽을 수호하는 동방지국천왕은 황금타(黃金埵)에 살며,   
검을 들고 있으며, 남쪽을 수호하는 남방증장천왕은 유리타(琉璃埵)에 살며, 
용과 영의주를 들고 있으며, 서쪽을 수호하는 서방광목천왕은 백은타(白銀埵)에 살며, 
왼손에는 우산 오른 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으며, 북쪽을 수호하는 북방다문천왕은 수정타(水晶埵)에 산다. 

 

▷즉물결택(卽物決擇)

阿難!極汝見源,從日月宮,是物非汝;至七金山周遍諦觀,雖種種光亦物非汝;

漸漸更觀雲騰、鳥飛、風動塵起、樹木山川、草芥人畜,咸物非汝。

아난아, 너의 보는 주인공의 근원을 끝까지 추구해 보아라! 일월궁(日月宮)까지도 이것은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또한 칠금산(七金山, 금산)에 이르기까지도 두루 살펴보아라. 비록 갖가지로 광채가 다를 뿐, 역시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다시 이렇게 점점 나아가, 뜬구름과 나는 새들과 부는 바람과 날리는 먼지와 숲과 나무와 산과 내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짐승들을 보아라. 모두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일월궁의 아래에 지쌍산(持雙山), 지축산(持軸山), 담목산(擔木山), 선견산(善見山), 마이산(馬耳山), 상비산(象鼻山), 어취산(魚嘴山)의 7개의 산이 있는데, 모두 금으로 되었며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에 향수해가 있다.

 

▷견성을 바로 보이시다.

阿難!是諸近遠諸有物性,雖復差殊,同汝見精淸淨所矚,則諸物類自有差別,見性無殊,此精妙明誠汝見性。

아난아,  멀고 가까운 모든 물체의 물성(物性)이 비록 여러가지로 다를지라도, 너의 보는 견정(見精)이 한결같이(同) 청정하게 보는 것이니라. 

여러 종류의 물체에 자연히 스스로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으니,  보는 견정(見精) 묘한 밝음이 진실한 너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니라.

진성(眞性)이 추하고 흐린 것을 보아도 섞이지 않는 것을 '정(精)'이라 하고, 일체의 다른 것들을 모두 거치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것을 '묘(妙)'라 하며, 멀거나 가깝거나 한 가지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현량(現量) 중의 견정(見精)을 밝힌 것으로, 보고 분별하는 것은 모두 망심(妄心)이고,

보고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 견정(見精)이다. 
원근의 크고 작은 물상은 다르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으며,
분별하는 것을 되돌아 보고 보이는 물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 견정이다. 
견성(見性)은 법계에 두루 주변(周徧)한 것으로, 거울이 항상 밝게 비추는 것에 비유된다.
 

▷보는 것은 물상이 아님을 밝힘 - 사약장(四若章)

①若見是物,則汝亦可見吾之見?

만약 보는 주체가 곧 물(物)이라면, 너 또하 내가 보는 주체를 볼 수 있어야 하리라.

ㅡ물상이라면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앞에서 '모두가 물상이지 네가 아니다'라고 한 것을 이어서 거듭 밝히는 것이다.

 

②若同見者名爲見吾;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

만약 함께 보는 동견(同見)을 나의 보는 작용(見)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불견(不見)일 때에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너는 보지 못하는 것인가?

ㅡ'함께 본다는 동견(同見)'은 물상에 의한 자취이고,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물상에서 벗어난 실체(體)이다. 만약 나와 네가 같이 한 물상을 보는, 이것을 나의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자취일 뿐이니, 마땅히 내가 물상을 벗어나서 보지 못할 때에는 그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 이미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응당 이것은 물상이 아닌 것이다.


③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만약 보지 못하는 견불(見不)을 본다고 한다면, 자연 저것은 보지 못할 불견(不見)의 상(相)이 아닌 것이니라.

ㅡ비록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능히 본다고 한다면, 마침내 '자연히 보지 못할 상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대개 볼 수 없는 상을 보는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보지 않는 곳을 아난이 본다면 그것은 보이는 물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견성은 보이는 물상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과 같이, 아난의 견성을 부처님이 볼 수 없고, 부처님의 견성을 아난이 볼 수 없다. 그 자리는 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아난도 물상은 볼 수 있지만, 물상을 보는 주체인 견성은 보지 못한다. 견성은 마음이지 물상이 아니다. 물상은 서로가 볼 수 있으나 견성 그 자체는 볼 수 있는 물상이 아니므로 서로가 보지 못하는,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인 것이다.ㅡ향적법진 

 

④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

만약 내가 보지 못하 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연 물상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네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ㅡ보는 것이 이미 물상이 아니므로 이는 곧 진실한 너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ㅡ만약 네가 나의 보지 않는 자리를 못 본다면, 이 보는 견성은 자연히 보여지는 물체가 아닌 것이니, 어찌 너 자신이 아니겠느냐?ㅡ한울림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네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히 물상이 아닌데, 

그렇다면 그것이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견성은 물상이 아니다. 견성이 너의 마음이다.ㅡ향적법진   

 

사약장(四若章)으로, 만약의 약(若)이라는 글자가 네 번 나오면서, 견성(見性)이 물상(物象)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견성(見性)은 물체를 보지만 견성(見性)은 보지 못한다. 물체는 상도 있고 있는 곳도 있지만, 견성(見性)은 상도 처소도 없어서 견성(見性)을 못 보는 것이다. 
체성(體性)은 존재의 참모습으로서, 유정(有情)의 체성은 견(見)이고, 무정(無情)의 체성은 물상(物象)이다. 

네가 지금 물상을 볼 때, 네가 이미 물상을 보고 있고, 물상도 또한 너를 본다면, 둘의 체성이 분란하고 혼잡하게 된다. 체성이 분란하고 혼잡하면 견성과 물상이 뒤섞여서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물상이 혼잡하면 유정물과 무정물을 구분할 수 없고, 또 사람이 혼잡하면 너의 견과 나의 견을 분간할 수가 없다. ㅡ향적법진   

 

又則汝今見物之時,汝旣見物物亦見汝,體性紛雜,則汝與我幷諸世閒不成安立。

또한 네가 이제 물상을 볼 때에 네가 이미 물상을 보았으면, 물상 또한 너를 보아야 할 것이리라. 

그러면 보는 자체(體)와 성품(性), 즉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너와 나와 모든 세상은 제자리의 질서의 안립(安立)을 이루어서 성립하지 못할 것이니라.

ㅡ보는 주체가 물질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만약 보는 주체가 곧 물질이라면, 물질이 응당 볼 수 있어서 정(情)이 있는 것과 정이 없는 것과의 실체(體)와 성품(性)이 뒤섞여서 분별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세간의 제세간(諸世閒)은 중생과 기계(器界)를 말하는 것으로, 정이 있는 것과 정이 없는 것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다.

 

▷결답(結答)

阿難!若汝見時是汝非我,見性周遍非汝而誰?云何自疑汝之眞性,性汝不眞取我求實。”

아난아, 만약 네가 물상을 볼 때, 그 보는 것이 바로 네 자신일 뿐, 내가 아니거늘,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이 두루 원만한 자체가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어찌하여 너의 진실한 성품의 진성(眞性)이 너의 참된 성품으로서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하여서, 나를 상대로 진실을 찾으려는 것인가?”

 

▷명견진체(明見眞體)는 무량한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若此見性必我非餘,我與如來觀四天王勝藏寶殿居日月宮,此見周圓遍娑婆國;退歸精舍只見伽藍,淸心戶堂但瞻簷廡。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저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 틀림없이  자신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의 승장보전(勝藏寶殿)과 일월궁(日月宮, 일궁과 월궁)을 볼 때에는, 그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 두루 원만해서 사바세계(一界일계)에 두루 퍼졌다가, 

정사(精舍)로 돌아왔을 때에는 단지 가람(伽藍)만 보였을 뿐이며, 

마음을 닦는 청심호당(淸心戶堂)에 있을 때에는 처마 끝과 행랑만 보였습니다.

*승장보전(勝藏寶殿), 사천왕궁은 진보(珍寶)를 저장하는 곳으로, 부처님께서 사천왕이 부처님께 전법륜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을 때, 아난 존자가 부처님을 따라 가서 사천왕궁을 보았다.

*일천 세계= 1소천세계, 1천 소천세계= 1중천세계, 1천 중천세계= 1 대천세계. 
1대천세계가 1불국토 또는 사바세계이며, 한 세계마다 한 사천왕천이 있다. 
여기에서 먼저 사천왕천을 함께 본 후, 사바국에 두루 임하였다고 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사바국은 대천세계가 아닌 한 세계를 뜻한다.

*청심호당(淸心戶堂), 스님들이 도(道)를 닦는 곳.

 

世尊!此見如是,其體本來周遍一界,今在室中唯滿一室,爲復此見縮大爲小?

爲當牆宇夾令斷絕?我今不知斯義所在,願垂弘慈爲我敷演。”

세존이시여,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자체가 본래 일계(一界,  세계)에 두루 원만하다가,

지금 이 방안에서는 오직 이 방에만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까?

 보는 성품이  것을 작게 축소하여서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이나 지붕에 끼이거나 막혀서 단절 되거나 끊어진 것입니까?

저는 지금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광대한 자비를 내리시어 설하여주옵소서.”

 

여래께서 견성이 주변(周徧)한 것을 들어서 진성(眞性)이 원만함을 밝히셨다. 
이에 아난존자는 견성이 이미 물체와 뒤섞이지 않는 불변의 체(體)이거늘, 어찌하여 한 나라에 있으면 한 나라만 보고, 한 집에 있으면 한 집만 보고, 방 안에 있으면 방만 보게 이유를 모르는 까닭에, 

어떻게 견성은 물체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방원(方圓)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한 것이다. 
이는 물체는 대소와 방원이 있으나, 견성(見性)은 대소방원(大小方圓)이 없음을 모르는 까닭에 의심하는 것이다. 
정명(精明)한 견성(見性)은 물체가 오면 모양이 드러나고 물체가 가면 사라진다. 
물체를 따라 상(相)이 드러나나, 물체와 뒤섞이지 않는, 불변(不變)의 이체(理體)이며, 묘명정견(妙明精見)인 것이다. 
이는 상분(相分)도 견분(見分)도 아니며,
반연(攀緣)된 월영(月影)을 마음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니,

제2월인 견정(見精)도 모르면서 어찌 식정원명(識精元明)한 진체(眞體)를 알겠는가? 
그래서 다시 큰 자비를 내려서 묘리(妙理)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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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2

*제법(諸法)은 유심(唯心)의 소현(所現)이다.

 

阿難卽從座起禮佛,合掌長跪白佛:

“世尊!若此見聞必不生滅,云何世尊名我等輩遺失眞性顚倒行事?願興慈悲洗我塵垢。”

아난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장궤합장(長跪合掌)을 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참 성품의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된 전도사(顚倒事)를 행하는가!’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자비를 내리시어 저희들의 번뇌인 진구(塵垢)를 씻어주시옵소서!”

ㅡ부처님과의 문답으로 인하여 도리어 의심이 일어나서, '진성이 나고 죽음이 있는 것이라면, 진정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미 나고 죽음이 없는 것이라면, 무엇을 잃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라고 질문 한 것이다. 

 

장궤(長跪),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무릎을 꿇거나 혹은 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는 것.

 

▷비류(比類)
卽時,如來垂金色臂,輪手下指示阿難言:“汝今見我母陁羅手爲正爲倒?”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금색비 金色臂)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키시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모다라(母陀羅: 印手 인수)의 손을 보아라. 

지금의 이 ‘바로인 정(正)’이라 하겠는가?

‘거꾸로인 도(倒)’라고 하겠는가?”

ㅡ이는 제불과 중생들이 동일한 체성이라서, 진실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만 거꾸로 봄으로 인하여 잃었다고 말한 것이다. 근본으로부터 관찰해 본다면 처음부터 잃은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바르고 거꾸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바른 것이고, 어느 것이 거꾸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모다라(母陀羅), 인상(印相), 상인(相印), 밀인(密印), 계인(契印), 수인(手印), 인계(印契), 인(印)이라고도 하며, 모다라(母陀羅, 半陀羅)라고 음역한다.


阿難言:“世閒衆生以此爲倒,而我不知誰正誰倒。”

아난 존자가 말씀 드리기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인 도(倒)’라고 할 것입니다만,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를 모르겠습니다.”


佛告阿難:“若世閒人以此爲倒,卽世閒人將何爲正?”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거꾸로인 도(倒)’라고 한다면, 

어떠한 것을 ‘바로인 정(正)’이라 하겠는가?”


阿難言:“如來豎臂,兜羅緜手上指於空,則名爲正。”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 팔을 세우셔서 도라면(兜羅綿)의 손을 위로 올리시고 허공을 가리키신다면 ‘바로’라고 할 것입니다.”


佛卽豎臂,告阿難言:“若此顚倒首尾相換,諸世閒人一倍瞻視,

부처님께서  팔을 세우시고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의 전도(顚倒)는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뀐 전도수미상(顚倒首尾相)일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시    잘못 보는 일배첨시(一倍瞻視)가 되는 것이니라. 

 

▷전도의 소재를 물음

則知汝身與諸如來淸淨法身比類發明,如來之身名正遍知,汝等之身號性顚倒,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너의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아는 지혜의 정변지신(正遍知身)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성전도신(性顚倒身)이라 하는 것이다. 

ㅡ팔과 몸은 본래 하나인데, 마음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망령되게 분별하며, 법신은 본래 같지만, 바로 또는 거꾸로 된 것으로 말미암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의 집착을 잊고 바로 또는 거꾸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버린다면, 팔과 몸은 자연 그대로이고, 법신도 둘이 아닐 것이다.

 

▷한 배나 더 전도된 것과 합해짐

隨汝諦觀汝身佛身,稱顚倒者名字何處號爲顚倒?”

于時,阿難與諸大衆瞪瞢瞻佛目精不瞬,不知身心顚倒所在。

 몸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너의 몸을 여래의 몸에 비교하여서 뒤바뀌었다고 하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자 아난 존자와 대중들은 몸과 마음의 뒤바뀐 곳이 어디인가를 몰라서 눈을 치켜 뜬채 깜박이지도  멍하게 부처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ㅡ전도된 근본을 추구하고 궁구하여서 깨닫기를 바랐으나, 대중들이 혼미하여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佛興慈悲哀愍阿難及諸大衆,發海潮音遍告同會:

“諸善男子!我常說言:‘色心諸緣及心所使諸所緣法,唯心所現。’

부처님께서 자비심을 내시어서 아난 존자와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어, 바다의 조수(潮水)와 같은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 응하여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과 마음의 색심(色心) 모든 인연의 제연(諸緣)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의 심소사(心所使)와 일체 인연의 경계 법인 소연법(所緣法)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것의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고 설하였느니라.

 

유심(唯心), 우주의 종극적 실재는 마음 뿐인 것으로,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의 변현(變現)이다.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만유의 현상에 속한 심식(心識)에 대하여 입론(立論)하서, 심식의 식(識)을 네 가지로 세웠다.

우리들이 인식하는 대경(對境)의 객관은 인식 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경(實境)이 아니고,

견분(見分)에 의하여 마음 속에 비틴 상분(相分), 곧 본질을 연(緣)으로 인하여 생긴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제8 아뢰야식에 함장(含藏)된 종자로부터 생긴 것이므로 마음으로 만든 것이다.

일체의 사물은 모두 심식으로 변현한 것으로, 3계(界)는 유식만이 종극의 실재요, 그밖에 별법(別法)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기신론(起信論)'과 '화엄종' 등에서는 만유의 본체인 진여심(眞如心)으로서, 만유는 모두 일심진여(一心眞如)가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여심에는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이 있어서, 진여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불변(不變)하는 것이지만,

염정(染淨)의 연을 따라서 갖가지의 차별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수연(隨緣)이다.

그러므로 만상은 일심진여의 현현으로서, 그 체(體)는 진여를 여읜 것이 아니다. ㅡ참고 마음공부도량 붇다사

*해조음(海潮音), 바다의 조수(潮水)와 같은 음성. 요청을 받지 않고도 교화할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설법하는 것이 마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에 비유한 것.

 

汝身汝心皆是妙明眞精妙心中所現物,云何汝等遺失本妙圓妙明心寶明妙性,認悟中迷

 몸(身)과 마음(心)은 이렇게 묘하고 밝은 묘명(妙明)한 것이고, 진실하고 정밀한 진정(眞精)하며, 심오한 묘심(妙心)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본래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본묘원묘명심(本妙圓妙明心)의 보배와 같이 밝고 묘한 성품의 보명묘성(寶明妙性)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인가!

ㅡ마음(心)이란 육식과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팔식을 말하는 것이다.

묘한 마음은 하나인데, 명칭이 많고 다른 것은 법(法)에 의지하여서 따라서 작용하는(用)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밝은 마음에 나타난 물질이 거울과 같은 까닭에 묘명진정(妙明眞精)이라 한 것이고, 또한 근본을 모르고 끝을 따라 가는 것을 밝힌 까닭에 본묘명심(本妙明心)이라 한 것으로, 본묘(本妙)란 본래 스스로 묘해서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心)과 성품(性)은 체(體)와 용(用)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은 묘함으로부터 밝음을 일으켜, 원만하게 밝고 나아가 묘하여서 마치 거울의 본체와 같으므로 보명묘성(寶明妙性)이라 한 것이다.

 

晦昧爲空,空晦暗中結暗爲色,色雜妄想想相爲身,聚緣內搖趣外奔逸,昏擾擾相以爲心性。

미혹한 회매(晦昧)와 어둠의 회암(晦暗)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의 회암(晦暗) 가운데에서 어둠이 맺혀 색(色, 색진)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상(相) 몸(身)으로 여기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며,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심성(心性)으로 삼는 것인가!

ㅡ반야에 미한 까닭에 회매(晦昧)라 하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미망함에 집착하여서 허공이 생긴다는 것이며, 

변화되는 집착과 변화시키는 무명의 두 법이 화합하여 4대의 의보인 외경의 물질을 이루는 까닭에 '어둠이 맺혀 색진이 된다'고 한 것으로, 이른바 생각이 엉켜서 국토를 이룬다는 것이다

 

색(色, rūpa)

(1) 심법(心法)에 대하여 물질을 색법이라 하며, 변괴(變壞)ㆍ질애(質礙)의 두 가지 뜻이 있는 물질의 총칭이다.

5위(位), 5온(蘊)의 하나이며, 구사론(俱舍論)에서는 5근(根)ㆍ5경(境)ㆍ무표색(無表色)의 11로 나누고,

유식종에서는 5근(根)ㆍ5경(境)ㆍ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의 11로 나눈다.

(2) 최근의 해석으로는 형상과 색채를 합한 것으로서 감각적 직관적인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정신적 요소에 대립한 물질이 아니고, 존재하는 한 방면인 물질적 성질을 가리킨다.

 

一迷爲心,決定惑爲色身之內,不知色身外洎山河虛空大地,咸是妙明眞心中物。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唯認一浮漚體,目爲全潮窮盡瀛渤。汝等卽是迷中倍人,如我垂手等無差別,如來說爲可憐愍者。”

瀛 바다 영, 渤 바다 이름 발, 발해 발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서 마음으로 여기는 일미위심(一迷爲心)은, 현혹되게 몸의 색신(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는, 

색신(色身)과 밖의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 모두가 다 묘하고 밝은  마음의 묘명진심(妙明眞心) 가운데의 사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비유하자면, 맑고 깨끗한 백천대해(百千大海)를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물거품인 일부구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서, 바닷물 전체의 전조(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인 영발(瀛渤)을 끝끝내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손을 아래로 향한 것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에서 한   미혹한, 미중배인(迷中倍人)의 사람들이니,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는 것이니라.”

 

▷혼탁함을 분별함
阿難承佛悲救深誨,垂泣叉手而白佛言:“我雖承佛如是妙音,悟妙明心元所圓滿常住心地;而我悟佛現說法音,現以緣心允所瞻仰,徒獲此心未敢認爲本元心地。願佛哀愍宣示圓音,拔我疑根歸無上道。”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서 가련하게 여겨서 구해주시는 깊은 가르침의 심회(深誨)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마주잡는, 차수(叉手)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비록 부처님의 이와 같은 묘음(妙音)을 받들어서 묘하고 밝은 마음의 묘명심(妙明心)이 원래 원만한 것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원만상주(圓滿常住)가 항상 머무는 마음자리인 상주심지(常住心地)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제가 지금 부처님의 설법하시는 설법음(說法音)을 깨달았을지라도, 그것은 현재에서 인연하는 마음의 연심(緣心)이며, 진실로 우러러 볼지라도 단지  마음을 얻을 뿐이니, 아직은 감히 본원(本元)의 심지(心地)를 안다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원만한 법음의 원음(圓音, 범음 梵音  일음 一音)을 베푸시어,  의혹의 뿌리를 뽑아주시고, 더없이 높고 바른 무상도(無上道)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ㅡ법음을 들음으로 인하여 묘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원만하여 전혀 유실됨이 없음을 깨달은 까닭에 '항상 머무는 마음자리인 상주심지(常住心地)'라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밝지 못하여서, 들음으로 반연하는 마음을 본성(本性)을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는 평소의 생각에 혼탁한 의혹들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뽑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 뽑아 주시기를 희망한 것이다.

원음(圓音)은 범음(梵音) 또는 일음(一音)이라고도 하며,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 즉 부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반연하는 것을 인정하여 참된 것을 잃음
佛告阿難:“汝等尚以緣心聽法,此法亦緣非得法性。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히려 인연하는 마음의 연심(緣心, 반연심)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법도 인연인 연법(緣法)일 뿐, 법의 본성을 얻은 것이 아니니라. 

ㅡ음성으로 인하여 분별하는 것은 연심(緣心)이지 참마음이 아니며, 대상 경계를 인하여 망령되게 보는 것은 연법(緣法)이지 법성은 아니다. 

 

如人以手指月示人,彼人因指當應看月;若復觀指以爲月體,此人豈唯亡失月輪,亦亡其指。何以故?以所摽指爲明月故。豈唯亡指,亦復不識明之與暗。何以故?卽以指體爲月明性,明暗二性無所了故。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면,  사람은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할것이니, 만약 손가락을 보고  그 자체로 여긴다면,  사람은 어찌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도 잃은 것이니라!

왜냐하면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로 여긴 까닭이니라. 

어찌 손가락만 잃었다고 하겠는가. 밝음과 어둠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의 월명성(月明性)으로 여겨서, 밝고 어두운 명암(明暗)의  성질을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대상 경계로 인하여 잘못 인식하면 점점 미혹하게 되어서 더더욱 참됨을 잃는다. 

 

▷반연하는 것은 무성(無性)이다.

汝亦如是,若以分別我說法音爲汝心者,此心自應離分別音有分別性。譬如有客寄宿旅亭,暫止便去終不常住,而掌亭人都無所去名爲亭主;此亦如是,若眞汝心則無所去。云何離聲無分別性?

너희도 역시 이와 같으니, 만약 나의 설법소리인 법음(法音)을 분별하여서 네 마음으로 삼는다면,  마음은 마땅히 소리를 분별하는 것을 떠나서 다시 분별하는 성품의 분별성(分別性)이 있어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여정(旅亭, 여관)에 기숙(寄宿)한 나그네는 잠시 머물었다가는 이내 떠나서 끝내 상주(常住)하지 않으나, 

여정을 맡은 사람은 전혀  곳이 없으니 여정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만약 진실한  마음인 진심(眞心)이라고 한다면,  곳이 없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소리(聲)를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는 것인가?

ㅡ분별하는 연심(緣心)은 물질을 여읜다면 성품이 없으니, 나그네와 같은 것이고, 상주하는 진심은 갈 곳이 없으니 여관의 주인과 같은 것이다.

 

斯則豈唯聲分別心,分別我容離諸色相無分別性,如是乃至分別都無非色非空。拘舍離等昧爲冥諦,離諸法緣無分別性,則汝心性各有所還,云何爲主?”

어찌 소리를 분별하는 마음의 성분별성(聲分別性)만 그러하겠는가!

나의 모습을 분별하는 마음의 상분별성(相分別性)도 일체의 색상(色相,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니라. 

이렇게 나아가 분별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므로, 구사리(拘舍離, 외도)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명제(冥諦, 본성)라고 하는 것이니라.

제법의 인연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심성(心性)은 각각 인연을 따라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것이 될것이니, 어떻게 주인이 되겠는가?

ㅡ음성을 분별하는 마음이란 음성의 반연으로 생긴 연심(緣心)을 말하며, 일체는 없는 것이므로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나' 외도만이 어두워서 명제라고 한다. 

명제(冥諦), 수론외도(數論外道)가 내세운 25가지 제(가운데 첫 번째를 물질적 본체. 이것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명막무제(冥漠無際)한 것이므로 명초(冥初) · 명성(冥性)이라고도 한다. 또 만물의 모든 법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성(自性) · 본성(本性) · 승성(勝性)이라고도 하며, 또 이것이 모든 법의 시초이므로 명초(冥初)라고도 한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명()과 혼돈(混沌)이라는 말은 겁()의 한계에 부딪힌 모습입니다. 

 

▷팔경(八境)에 의하여 견성(見性) 돌아갈 곳이 없음을 보이다.
阿難言:“若我心性各有所還,則如來說妙明元心云何無還?唯垂哀愍爲我宣說。”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만약  심성(心性)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인 묘명원심(妙明元心)은 어찌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이치를 설하여 주시옵소서!”

 

ㅡ묘명원심(妙明元心)은 곧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다.
佛告阿難:“且汝見我見精明元,此見雖非妙精明心,如第二月非是月影,汝應諦聽,今當示汝無所還地。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은 밝은 근원의 견정명원(見精明元)이다. 

 견정(見精)이 비록 미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의 묘정명심(妙精明心)이 아닐지라도, 

눈을 비비면서 달을 보면 두 개의 달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닌 것이다. 

너는 자세히 듣거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자리가 없는 까닭을 보여 줄것이니라.

ㅡ묘한 마음과 견정은 본래 두 개의 상이 없다. 진실한 달은 묘정명심(妙精明心)을 비유한 것이고,

제 2의 달은 견정명원(見精明元)을 비유한 것이며, 물 속의 달은 연진의 분별을 비유한 것으로, 즉 진심은 알기가 어려운 까닭에 견정을 가탁해서 방편으로 보여준 것이다. 

 

阿難!此大講堂洞開東方,日輪昇天則有明耀,中夜黑月雲霧晦暝則復昏暗,戶牖之隙則復見通,牆宇之閒則復觀擁,分別之處則復見緣,頑虛之中遍是空性,鬱𡋯之象則紆昏塵,澄霽斂氛又觀淸淨。

隙 틈 극, 鬱 답답할 울, 울창할 울, 紆 굽을 우

아난아,   강당의 문이 동쪽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하늘에 해가 뜨면 밝은 (明) 보고, 

그믐의 한밤중에 구름이 잔뜩 끼면 캄캄한 어둠의 암(暗) 보며, 

문과 창틈으로 (通)함을 보고, 담과 지붕에서는 막힘의 색(擁)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여러 인연의 연(緣) 보고,   곳에서는 두루 (空)함의 공성(空性)을 보며, 

안개에 묻혀 내리는 흙비의 모양에서는 어둠에 쌓인 티끌의 혼진(昏塵)의 울(鬱) 보며, 

날씨가 맑게 개어서, 먼지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맑음의(淸) 볼 것이니라.

 

*팔환변견(八還辨見), 밝은(明), 어둠(暗), 통(通), 막힘(擁), 인연(緣), 허공(空), 티끌의 울(鬱), 청(淸)의 여덟 가지


阿難!汝咸看此諸變化相,吾今各還本所因處。云何本因?

阿難!此諸變化明還日輪。何以故?無日不明,明因屬日,是故還日;暗還黑月;通還戶牖;擁還牆宇;緣還分別;頑虛還空;鬱𡋯還塵;淸明還霽。則諸世閒一切所有,不出斯類。

아난아, 너는  변화하는 변화상(變化相)들을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 그것들을 본래의 원인한 자리인 본소인처(本所因處)로 각각 돌려보내리라.

본래 원인하였던 자리인 본소인처(本所因處)는 어느 곳이겠는가?

아난아,  여러 변화하는 변화상(變化相)들 가운데, 밝음은 해로 돌려보내는 명환일륜(明還日輪)하나니,  까닭은 해가 없으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밝은 원인은 해에 속한 것이니, 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둠은 그믐의  밤중에 돌려보내고, 통(通)함은 문과 창틈으로 돌려보내며, 

막힘(擁)은 담과 지붕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인연(緣)은 분별로 돌려보내며, 

 빈곳은 허공(空)으로 돌려보내고, 안개 쌓인 흙비는 티끌(塵)로 돌려보내며, 

맑은 기운은 개인 날씨의 청정(淸淨)으로 돌려보내리라.

 세상의 모든 변화는 밝은(明), 어둠(暗), 통(通), 막힘(擁), 인연(緣), 허공(空), 티끌의 울(鬱), 맑음 청(淸)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汝見八種,見精明性當欲誰還?何以故?若還於明,則不明時無復見暗,雖明暗等種種差別,見無差別;諸可還者自然非汝,不汝還者非汝而誰?則知汝心本妙明淨。汝自迷悶喪本受輪,於生死中常被漂溺,是故如來名可憐愍。”

너는 이러한 여덟 가지의 팔종(八種)을 두루 보나니, 그 두루 다 보는 견정(見精)의 밝은 성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는가?

만약 밝음(明)으로 돌려보낸다면 밝지 않을 때는 어둠(暗)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니,

비록 밝고 어두운 명암(明暗) 등에는 가지가지의 차별이 있으나,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돌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네 마음은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한 본묘명정(本妙明淨)인 것이나,

네 스스로가 미혹하여서 본성을 잃고 윤회하면서 항상 생사 가운데에 빠져서 흘러 다니는 것이니,

그래서 여래는 불쌍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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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

*팔환변견(八還辨見)을 밝힘

 

▷경가가 그 뜻을 서술함

爾時,阿難及諸大衆聞佛示誨身心泰然,念無始來失卻本心,妄認緣塵分別影事,今日開悟如失乳兒忽遇慈母,

이때 아난 존자와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져서 생각해 보았다.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본심(本心)을 잃어버리고 인연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그림자인 분별영사(分別影事)를 본심으로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서야 여래를 만나 깨닫게 되었으니, 마치  먹이 아기가 잃어버린 자애로운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과 같이 기뻤다. 

 

*연진(緣塵), 대상 물질인 색성향미촉법 등의 육진(六塵)을 반연하여서 진성(眞性)이 현혹되기 때문에 연진(緣塵)이라 한 것이다.

*분별영사(分別影事), 나누는 분(分) 분별하는 별(別)하여서 그림자 즉 사물이 영사(影事)이다.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나누어져 있지 않고 상호의존의 관계로 존재하며, 상호의존한다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나누고 구별하여서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으로 이렇게 구별하여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사을 영사(影事)라 한다 
분별(分別)이란 구분해서 식별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진짜 마음이 아니고, 망상(妄想)이고, 반연심(攀緣心)이고,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다. 이 마음은 늘 변한다. 분별은 가지가지로 일어나지만, 항상 아는 놈은 진짜 내 마음이다. 진짜 마음이라면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이어야 한다.  

 

合掌禮佛,願聞如來顯出身心眞妄虛實 現前生滅與不生滅二發明性。

아난 존자는 대중과 함께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는, 

부처님께서 이 몸과 마음의 신심(身心)에서 진실한 실(實)과 망상의 허(虛)와 지금 눈앞에 있는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의 이치를 드러내시어서, 이러한  가지의 바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를 원하였다.

ㅡ앞에서는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여기고, 움직이는 것을 대상 물질로 여겨서, 생각마다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여서 진성(眞性)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 두 가지를 분별할 능력이 없으므로 두 가지 뜻을 나타내어 분명하게 밝혀 주시기를 원한 것이다. 

 

▷몸은 변화하여 달라지지만, 생멸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밝힘

波斯匿王起立白佛:“我昔未承諸佛誨勅,見迦旃延毘羅胝子,咸言:‘此身死後斷滅,名爲涅槃。’我雖値佛今猶狐疑,云何發揮證知此心不生滅地?今此大衆諸有漏者咸皆願聞。”

이때 바사닉왕(波斯匿王, prasenajit)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단멸(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여 이러한 의심을 해결하여서 불생멸의 경지(地) 확실하게 증지(證知)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중 가운데의 번뇌가 있는 모든 이들이 듣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바사닉왕(波斯匿王, prasenajit)로 승군왕(勝軍王)이라는 뜻이다. 석존과 같은 시대의 슈라바스티(śrāvastī, 舍衛國사위국)의 열여섯 대국왕 가운데의 왕이며, 이름이 월광(月光)이었다. 

*여기에서의 가전연(迦旃延)은 나형외도로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이며, 오늘날의 자이나교도입니다. 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며, 오래전부터 있던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자이나교를 성립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를 내세우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를 제정하였다

*비라지자(毗羅胝子)는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이며, 닦아 익히되 공(空)을 집착하여 도(道)로 삼고 몸은 멸하면 체(體)가 없고 죽음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법을 득도(得道)라고 말하느니라.

*호의(狐疑), 의혹을 뜻하며, 여우는 의심이 많은 짐승이므로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

 

▷문답(問答)으로 환망(幻妄)을 분별함
佛告大王:“汝身現存,今復問汝,汝此肉身爲同金剛常住不朽?爲復變壞?”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으니, 내가 다시 너에게 물어보리라. 

대왕, 그대의 육신은 금강과 같이 견고한 것으로, 영원히 머물 것이며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世尊!我今此身終從變滅。”

대왕이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의  몸이 끝내에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佛言:“大王!汝未曾滅,云何知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몸이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멸한다는 것이라고 아는 것인가?”


“世尊!我此無常變壞之身雖未曾滅,我觀現前念念遷謝新新不住,如火成灰漸漸銷殞殞亡不息,決知此身當從滅盡。”

왕이 말씀드리기를, 

“저의  무상(無常)하게 변하여 무너지는 몸이 비록 이전에 멸한 적은 없으나, 생각생각마다 옮겨가면서 달라지고, 계속 새롭게 새롭게 변하여 멈추지 않으며, 불에 타는 땔감이 재가 되듯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쉬지않고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며서, 장차  몸은 결국에는 멸하여 사라질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佛言:“如是,大王!汝今生齡已從衰老,顏貌何如童子之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합니다. 대왕이여! 지금 그대는 나이가 들어 이미 쇠약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얼굴의 모습은 동자 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世尊!我昔孩孺膚腠潤澤,年至長成血氣充滿,而今頹齡迫於衰耄,形色枯悴精神昏昧,

髮白面皺逮將不久,如何見比充盛之時。”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에는 피부부(膚)와 살갗주(腠)이 부드럽고 윤택하였으며, 

그 보다 조금 더 자랐을 때에는 혈기가 왕성하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나이로 거의 쇠약한 늙은이의 쇠모(衰耄)가 되어서, 형색은 말라서 초췌한 고췌(枯悴)하게 되었으며, 정신은 멍하여 혼미하며, 머리는 하얗게 변하였고, 얼굴은 쭈그러져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거늘, 어떻게 혈기 충만한 젊은 시절과 비교할  있겠습니까!”

해(孩), 뼈가 겨우 생긴 것,

유(孺), 사람의 양육을 필요로하는 아기,

부(膚), 피부의 표면, 

주(腠), 살결 퇴(頹), 해가 기울어지는 것과 같은, 늙으막을 의미한다.


佛言:“大王!汝之形容應不頓朽。”
朽 썩을 후, 썩은 냄새 추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몸과 얼굴은 일시에 한꺼번에 쇠약한, 돈추(頓朽)하지 않았으리라.”


王言:“世尊!變化密移我誠不覺,寒暑遷流漸至於此。

何以故?我年二十雖號年少,顏貌已老初十年時;三十之年又衰二十;于今六十又過于二;觀五十時宛然强壯。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변하여 달라짐이 은밀하게 가만히 옮겨 간 것이니, 참으로 제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한서(寒暑, 세월)의 옮겨가는 흐름과 함께 점차로 이렇게 늙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은,  나이 스무  때에는 비록 젊은 나이라고 하였으나, 저의 안모(顏貌, 얼굴)는 이미 이전의 열 살이었을 때보다 늙었으며, 서른이 되었을 때에는 스무 살이었을 때보다 늙었으며, 

지금의 예순두 해를 보낸 나이이니, 쉰  때를 돌아보건데,   이었을 때가 훨씬 건장하였습니다.


世尊!我見密移雖此殂落,其閒流易且限十年,若復令我微細思惟,其變寧唯一紀二紀,實爲年變;豈唯年變,亦兼月化;何直月化,兼又日遷;沈思諦觀剎那剎那,念念之閒不得停住,故知我身終從變滅。”

殂 죽을 조

세존이시여, 저는 가만히 은밀하게 바뀌어  대강 보고, 비록 이렇게 폭삭 늙었다고 한 것으로, 

 동안 흘러 바뀌어  기간을 그저 10년씩 잡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자세히 사유하여 본다면,  변함이 어찌 일기(一紀, 12년), 이기(二紀, 24년)뿐 이었겠습니까! 

사실, 해마다 변하여 왔습니다. 

어찌 오직 해마다 변할 뿐이었겠습니까! 실은 매달 변하여 온 것입니다. 

어찌 다만 매달 변할 뿐이었겠습니까! 실은 매일 변하여 온 것입니다. 

더욱 더 세밀하게 곰곰이 살펴보면, 찰나찰나(剎那剎那)마다,

생각생각의 염념(念念)마다 변하여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몸이 마침내에는 변하여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조락(殂落),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폭삭 늙은 것을 뜻하였다. 

일기(一紀), 12년을 한 단위로 함.

찰나(剎那),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가랑잎이 땅에 닿기 직전의 땅과 종이 한 장 사이의 짧은 시간을 말한다.

 

▷환상으로 인하여 진(眞)이 있음을 밝힘
佛言:“大王!汝見變化遷改不停,悟知汝滅;亦於滅時,知汝身中有不滅耶?”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변화(變化)하고, 옮기면서 바뀌어 달라지는 천개(遷改)하여서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는,

 몸이 끝내에는 멸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멸하는 가운데에서도  가운데 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波斯匿王合掌白佛:“我實不知!”

바사닉왕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그러한 이치를 참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佛言:“我今示汝不生滅性。大王!汝年幾時見恒河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불생멸의 성품인 불생멸성(不生滅性) 보여주리라! 

대왕이여, 그대가 몇 살때 처음으로 항하의 강물을 보았는가?”


王言:“我生三歲,慈母攜我謁耆婆天,經過此流。爾時卽知是恒河水。”

왕이 말씀드리기를, 

“제 나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데리고 기바천(耆婆天)의 사당(祠堂)을 참배(알 謁)하러 가실 때, 

 강물을 건너게 되어서, 그것이 바로 항하의 강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바천사당(耆婆天祠堂), 기바천(耆婆天)은 장수천(長壽天)으로, 기바천에 가서 아이를 위하여 빌면 장수한다고 하여서 인도에는 사당이 많다.


佛言:“大王!如汝所說,二十之時衰於十歲,乃至六十,日月歲時念念遷變,則汝三歲見此河時,至年十三其水云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하기를 ‘스무  때에는   때보다 늙었었고, 또한 예순 살은  살보다 늙었으며,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찰나마다, 생각마다 옮기고 변하는 천변(遷變)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처음   강물을 열세 살이 되어서   강물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다른가?”


王言:“如三歲時,宛然無異,乃至于今年六十二,亦無有異。”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  때 본 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예순  살이 된 금년에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ㅡ어리고 장성하고 늙음의 갖가지로 변화하여도 보는 주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생멸하는 가운데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佛言:“汝今自傷髮白面皺,其面必定皺於童年,則汝今時觀此恒河,與昔童時觀河之見有童耄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의 백발(白髮)과 쭈그러진 얼굴의 면추(面皺)를 스스로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분명히 그대의 얼굴도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져 있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觀) 것과 예전의 동자 때에 강물을 본(觀) 것에,

따로이 동자와 늙은이의 봄에 다름이 있는가?”


王言:“不也,世尊!”

왕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佛言:“大王!汝面雖皺,而此見精性未曾皺,皺者爲變、不皺非變,變者受滅、彼不變者元無生滅,云何於中受汝生死,而猶引彼末伽梨等都言此身死後全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이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보는 정기의 성품인 견정성(見精性)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추(皺)는 변하는 것일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불추(不皺)의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생사를 받아들이고는, 오히려  말가리(末伽梨)들이 주장하는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신사후전멸(身死後全滅)이다’라는 주장을 받아 들였던 것인가!


王聞是言,信知身後捨生趣生,與諸大衆踊躍歡喜得未曾有。

왕은 이 말씀을 듣고는, 이 몸이 죽게 되면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며,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미증유(未曾有)의 법을 얻어서 크게 뛸 듯이 기뻐하였다.

 

*견성(見性)은 진심(眞心)이 가지는 본래의 능력으로서 자성본용(自性本用)이다. 모든 중생은 견문각지(見聞覺知) 할 줄 아는 자성본용을 가지고 있는 즉, 볼 것이 없어도 볼 줄 아는 성능을 말한다.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는 허명(虛明)한 성질과 같은 것이다.

견정(見精)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능력으로서 수연응용(隨緣應用)이다. 사람이 볼 수 있는 범위와 동물이 보는 범위는 다르다. 거울의 모양(오목·볼록) 에 따라 비추는 것이 다른 것과 같다.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의 자상을 여의고, 진견이 드러나면 망견(妄見)이 사라져서  견정(見精)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견(眞見)이 망견(妄見)에 응하는 것을 견정(見精)이라 하고 견정이 망견을 여의면 진견(眞見)이라 한다.
그러므로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이 아니다
① 견성(見性) - 진심(眞心) - 자성본용(自性本用) - 무연지(無緣知) 
② 견정(見精) - 망심(妄心) - 수연응용(隨緣應用) - 반연심(攀緣心) 
견성(見性) → 견정(見精) → 견망(見妄)
견문각지는 전부 성(性)이 있는 육성(六性)으로, 사람의 몸을 타고 났으니 정(精)이 있는 육정(六精)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망(妄)이으로, 즉 육망(六妄)이 된다. 그러므로 육망(六妄)이 우리 중생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견성과 견정은 볼 줄 아는 지(知)의 면에서는 그 성질이 똑같으나, 견성은 인연이 없어도 존재하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이고, 견정은 인연 따라 나타나는 수연응용(隨緣應用)으로서 망심(妄心)이다.
진심(무연지)과 망심(유연지)은 24시간 항상 작용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작용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진심(무연지)은 인연이 없는 것이므로 바뀌지 않으나,

망심(유연지)은 인연 따라 일으키는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빨간 것을 볼 때와 파란 것을 볼 때, 볼 줄 아는 것은 같지만, 생각이 달라지니 망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심(妄心)을 묘용(妙用)이라 하며, 우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수연응용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변하지 않는 진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견견지시(見見之時) 견비시견(見非是見)
①견정으로 시각현상(견정-육진-안식)을 볼 때에
②시각 현상을 보는 것을 아는 견성은 견정이 아니다
보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견(見)은 명과 암을 인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영광독요(靈光獨耀) 마음자리(견성)는 홀로 밝아서 형탈근진(迥脫根塵) 육근(눈)과 육진(명암 등 대상)과 상관없다
능탈(陵奪)은 서로 충돌하는 상극(相剋)으로, 해가 뜨면 달빛이 안 보이는 것과 같이 해와 달은 서로 상극이다.ㅡ참고 향정법진과 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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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8

 

▷대상 불질에 의지하여 티끌(塵)을 보이심

卽時,如來於大衆中屈五輪指,屈已復開,開已又屈,謂阿難言:“汝今何見?”

즉시,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시고, 폈다가 다시 구부리시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阿難言:“我見如來百寶輪掌衆中開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저는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보배무늬 손의 백보륜장(百寶輪掌) 펴시고 구부리시는 것을 봅니다.”


佛告阿難:“汝見我手衆中開合,爲是我手有開有合?爲復汝見有開有合?”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대중 가운데 손을 펴고 구부리는 본다고 하였으니, 

 손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작용(見)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阿難言:“世尊!寶手衆中開合,我見如來手自開合,非我見性自開自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께서 보배의 손인 보수(寶手)를 대중 가운데에서 펴시고 구부리시니, 

저는 여래의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리는 보았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려지지 않았습니다.”


佛言:“誰動誰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는 동(動)이며?

무엇이 고요한 정(靜)인가?”


阿難言:“佛手不住,而我見性尚無有靜,誰爲無住。”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부처님의 손이 움직이는 불주(不住)이었을 뿐이나, 

저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애초에 고요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움직이는 무주(無住)라 할 수 있겠습니까?”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ㅡ거친 추미혹(麤迷惑)운 대상 경계를 따라 생기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손을 대상 경계에 비유한 것이다. 

처음에 폈다 쥐었다 한 것을 물어서 동요하는 대상 물진(塵)을 밝힌 것이고, 다음에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물어서 무물지 않지 나그네를 밝힌 것으로, 모두가 대상 경계에 있고 성품(性)에 있지 않은 것이다.

 

▷미세한 의혹을 보이심
如來於是從輪掌中飛一寶光在阿難右,卽時阿難迴首右𥌊,又放一光在阿難左,阿難又則迴首左𥌊。

여래께서 손바닥으로 한 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오른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오른 쪽으로 머리를 돌려서 보았고,

 한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왼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서 보았다.

 

佛告阿難:“汝頭今日何因搖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머리가 어찌하여 좌우로 움직였던 것인가?”


阿難言:“我見如來出妙寶光來我左右,故左右觀,頭自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 미묘한 보배의 광명을 저의 왼쪽과 오른쪽에 날려 보내시니, 

저는  광명을 보느라고 저절로 머리가 좌우로 움직인 것입니다.”


“阿難!汝𥌊佛光左右動頭,爲汝頭動?爲復見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여래의 광명을 보느라고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다고 하였는데,

 머리가 흔들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인 견(見) 흔들린 것인가?”


“世尊!我頭自動,而我見性尚無有止,誰爲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머리가 혼자서 움직였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멈춘 일도 없었는데, 어찌 움직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ㅡ미세한 미혹은 몸과 함께 생기기 때문에 아난 존자의 머리에 광명을 좋아서 일깨워 주신 것이묘, 이것도 동요하는 진(塵)과 머물지 않는 나그네가 모두 눈에 있는 것일 뿐, 성품(性)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품(性)은 가만히 있는 것조차 아닌데, 어찌 움직였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於是如來普告大衆:“若復衆生,以搖動者名之爲塵,以不住者名之爲客,

汝觀阿難頭自動搖見無所動,又汝觀我手自開合見無舒卷,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중생이 흔들림읜 요동(搖動)을 티끌의 진(塵)이라 하고,

머물지 않음의 불주(不住)를 나그네인 객(客)이라 한다면,

너희들 모두는 아난을 보거라. 머리가 단독으로 움직였을 뿐, 보는 성품은 움직이지 않았느니라.

 너희들은 나를 보아라.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렸을 뿐, 보는 성품은 구부리거나 펴지지 않았느니라.

 

云何汝今以動爲身、以動爲境,從始洎終念念生滅,遺失眞性顚倒行事,性心失眞認物爲己,輪迴是中自取流轉?”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지금 움직임의 동(動)을 몸(身)으로 삼고,

흔들림의 동을 경계(境)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생각마다 생(生)하고 멸(滅)하는 가운데에서 진실한 성품의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전도(顚倒)되게 일을 행하는 것인가!

이렇게 심성(心性)이 진실을 잃고 사물을 자신으로 앎으로써, 그 안에서 윤회하면서 스스로 흘러 다니는, 자취유전(自取流轉)할 뿐인 것이니라.”

ㅡ아난 존자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객진(客塵)을 인정하고 자성을 잃어 버린 것을 꾸짖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눈과 대상 물질이 움직이는 망념에 집착하고 자성의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진성(眞性)에 어두운 까닭에 부처님께서 손을 펴고 쥐고 하시면서 동요하는 것이 대상 물질에 있고 성품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 좌우로 머리를 돌리게 하는 것으로 동요함이 눈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한 다음에 교진여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이 되게 하여서 경책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이다.

 

The Buddha taught the assembly; Why do you who cosider motion to be the body, taken motion to be the external environment since beginning to end, who continuously have this thought after that thought, arising and falling, upside-down crazy. You lose your true nature, take the motion as yourselves and accept the cycle of six realms. 

부처님께서 회중에게 가르치시기를, 왜 너희들은 움직임을 몸으로 여기고,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부 환경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이 생각과 저 생각을 하여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거꾸로 전도되어 있는 것인가?

너희들은 참된 본성을 잃고, 움직임을 자신으로 여기고, 육근(六根)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We fall into the situation of either brightness or darkness(of the eye), either motion or stillness (of the ears), either bland or taste (of the tongue), either a combination or separation (of the nose), either touch or untouching (of the body), either arising or falling (of consciousness). 즉, 우리는 밝음과 어두움의 (눈), 움직임과 고요함의 (귀), 싱겁고 맛있는 것의 (입), 배합되고 분리된 냄새의 (코), 만지고 만져지는 촉의 (몸),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의식)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If we detach the six active faces of six worldly objects, such as if we detach from the brightness (of the eye), motion (of the ear), bland (of the tongue), combination (of the nose), touch (of the body), arising (of consciousness), we will cling to the other side of six objects, such as darkness (of the eye), stillness (of the ears), separation (of the nose), taste (of the tongue), lack of touch (of the body), falling (of consciousness). All these faces are conditional and illusory.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세속의 경계의 대상에 대한 육근(六根)의 활동적인 면을 떼어낼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밝음의 (눈), 움직임의 (귀), 밋밋함의 (혀), 배합된 것의 (코), 촉감의 (몸), 일어남의 (의식)을 떼어낸다면, 여섯 가지 대상의 다른 면, 즉 어둠의 (눈), 고요함의 (귀), 분리의 (코), 맛의 (혀), 촉감 없음의 (몸), 멸함의 (의식)에 집착하게 될 것이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조건적이고 환상일 뿐입니다.If we covered six active face of six faculties, then in the tranquil state of the six stillnesses, the faces of six faculties appear.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능력의 여섯 가지 활동적인 기능을 덮어서 가려버린다면, 여섯 가지가 정지된 고요한 적정의 상태에서 여섯 가지 능력의 면이 나타날 것입니다.However, over all, it is also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distinguishes the external scene, i.e., the false thinking or imagining of the illusory object shadows our true mind.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것을 구별하고 있는 그 자체도 정신적 의식(마음)인 것으로, 즉, 허황된 대상에 대한 허위의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의 진정한 마음의 진심(眞心, 정심 淨心)을 가리는 것입니다.The habit of giving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is still false thinking, the external scene, and it is not the true mind. We must be aware and live surely with the essence of bodhi on the seeing, listening,and knowing. That is the purpose of the Surangama Sutra. ㅡ Dr. Bhikkuni Gioi Huong이렇게 하나의 물상에 대한 영상으로부터 다른 영상으로 끊임없 옮겨가면서 잡아채는 우리의 버릇(습관) 역시 여전히 ​​허황된 생각의, 외적인 것으로 참된 마음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고, 듣고, 아는 것에 대한 보리(菩提)의 본질을 활실히 알고 살아야 한다는 그것이 능엄경의 목적인 것입니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一終 대불정만행수능엄경 제 1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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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7

 

▷아난 존자의 애청(哀請)

阿難聞已,重復悲淚五體投地,長跪合掌而白佛言:“自我從佛發心出家,恃佛威神,常自思惟無勞我修,將謂如來惠我三昧,不知身心本不相代,失我本心,雖身出家心不入道,譬如窮子捨父逃逝,今日乃知雖有多聞,若不修行與不聞等,如人說食終不能飽。

아난 존자가  말을 듣고  다시 슬피 울면서 온몸을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후, 장궤합장(長跪合掌)을 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믿고 항상 홀로 ‘내가 수고롭게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저에게 삼매(三昧)를 내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본래 몸과 마음이 서로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저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道)에 들지 못하였으니, 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치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말할지라도 끝내 배부를  없는, 설식종불능포(說食終不能飽, 그림의 떡)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ㅡ'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본심(本心)을 잃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궤(長跪),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무릎을 꿇거나 혹은 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는 것.

 

▷거듭청하는 중청(重請)

世尊!我等今者二障所纏,良由不知寂常心性。唯願如來哀愍窮露發妙明心,開我道眼。”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에 얽매인 까닭은, 고요하고 영원한 심성의 적상심성(寂常心性)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헐벗고 궁핍한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어서, 밝고 묘한 마음을 밝히셔서 도안(道眼)을 열어주시옵소서.”

 

*이장(二障)=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번뇌장(煩惱障)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열반(涅槃)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 즉 해탈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소지장(所知障)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보리(菩提)의 발현을 장애하는 번뇌, 즉 완전한 깨달음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적상(寂常), 열반의 이치이며, 번뇌가 없음을 '적(寂)'이라 하고, 생멸이 없을 '상(常)'이라 한다. 

 

*궁자(窮子), 법화칠유(法華七喩) 중 하나이며,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제4에 나오는 비유이다.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출하여서 50년 동안 가난과 싸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하며 유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자 아버지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알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갈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직감한 장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를 자신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인해서는,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마침내는 장자의 출납을 담당하는 회계로 키우고, 그 이후 집사로 성장시켰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입니다.
못난 아들이 아버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것은 궁자경악 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
화엄경을 설한 때이고, 
그 다음에 집으로 유인을 당해서, 거름을 치고 청소를 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면서 일당을 조금씩 받아오는 것은 제분전가 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 아함경을 설한 때이며, 
그 다음 세월이 흘러서 그 집에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를 출입자재 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 방등경을 설할 때가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정도이며,   
그 다음에 영지보물 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 보물을 다 알게 되었을 때는 반야경을 설하신 때이다. 
반야부 경전이 내용에 있어서 중간에 위치하지만, 그 보다 낮은 교리와 높은 교리의 모두를 아우르고 근본이 되는 것이 반야부 경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훌쩍 한 단계 뛰어넘어서 , 전부가업 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라 해서 집안의 모든 재산과 살림살이 일체를 전부 물려받는 시기가 법화경을 설하던 때이라고 배대를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 21일, 그 다음에 아함경 12년, 방등경 8년, 반야부 경전 21년, 법화열반 8년 동안 설하신,

아함십이(阿含十二) 방등팔(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최초 화엄삼칠.ㅡ 무비스님

 

*We solve one problem and then we continue to grasp others, nonstop. The conditional mind has dozens, hundreds of thoughts that it grasps and relies on. Taking refuge in or relying on and clinging to something outside becomes our habit and forms the Karma wheel. 

Consciousness is the false thoughts following the external conditions, which we wrongly consider as our mind. So when the shadows of the six objects show up, we catch; then another shows up, we give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The shadow is destroyed, another objet appears. We are movable and attach to the rising-falling objects without direction.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도 끊임없이 다른 문제들에 파고듭니다. 조건부적 마음은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을 따라 움켜잡고 의지하고자 합니다. 외부의 무언가에 의지하여서 위안을 받고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 되고 또한 윤회를 형성합니다.

의식은 외부 조건에 따르는 거짓된 생각이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대상의 그림자, 육경(六境)이 나타나면 바로 받아 들여서 집착하고, 다시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면, 이 그림자를 포기하고, 다른 그림자를 받아 들여서 집착해서 다시 이 그림자는 파괴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면서, 일정한 방향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대상에 집착할 뿐입니다.

ㅡ Dr. Bhikkuni Gioi Huong


卽時如來從胸卍字涌出寶光,其光晃昱有百千色,十方微塵普佛世界一時周遍,遍灌十方所有寶剎諸如來頂,旋至阿難及諸大衆。

즉시 여래께서는 가슴의 만자(卍字)에서 보배로운 광(寶光)을 놓으시니, 백천 색으로 어우러진  찬란한 광명이 일시에 시방의 미진과 같이 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퍼져서, 시방 일체의 보배로운 국토인 보찰(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아난 존자와 모든 대중을 비추었다.

 

'만자문(卍字紋)', 영원한 법과 복덕의 상징이며,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 문양은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나타내며,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일반적으로 왼쪽 방향(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좌만자(卍)가 주로 사용되며, 고대 인도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卍은 불경과 함께 중국에 전해졌으며, 후진의 구마라습과 당나라의 현장은 이를 '덕(德)'으로 번역했지만 북위 시대의 보리류지(菩提流支)는 '만(萬)'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만덕(萬德)의 의미를 가진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卍은 '만(萬)'으로 읽도록 정했는데 이는 길상만덕(吉祥万徳)이 모인다는 뜻이다.ㅡ나무위키

 

▷아난 존자의 요청에 응하심.

告阿難言:“吾今爲汝建大法幢,亦令十方一切衆生,獲妙微密性淨明心得淸淨眼。

阿難!汝先答我見光明拳,此拳光明因何所有?云何成拳汝將誰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으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위대한법(大法)의 깃대(幢)를 세우리니, 따라서 시방의 일체중생에게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인 미묘밀성(妙微密性)의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 얻게 하여서 청정한 안목의 청정안(淸淨眼)을 밝히도록 할 것이니라.”

아난아, 네가  전에 나에게 ‘광명이 빛나는 광명권(光明拳) 본다’고 답하였는데, 

 주먹의 광명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또한 너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깃대(幢)이란 삿된 것을 꺾고 올바른 것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밝혀서 삿된 것을 꺽고 항복받아서 올바른 지견(智見)을 얻게 하신 것이 대법의 깃대(幢)를 세운 것이다. 지견(知見)이 바르게 되면,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얻게 되는 것이니, 중생과 여래가 다같이 가지고 있으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을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의 미묘밀성(妙微密性)이라 하였고,

때가 능히 더럽힐 수 없고 어두움이 능이 어둡게 할 수 없는 것을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이라 하였으며,

봄에 있어서 눈병을 벗어나 환하고 뚜렷하게 보는 것을 말고 깨끗한 눈을 청정안(淸淨眼)이라 한다.


阿難言:“由佛全體閻浮檀金赩如寶山,淸淨所生故有光明,我實眼觀五輪指端屈握示人,故有拳相。”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은 부처님의  몸이 보배 산과 같이 붉어서 청정한 빛을 내시는 까닭에 광명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저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섯 손가락의 오륜지(五輪指)을 구부려 쥐시고 사람들에 보여주신 까닭에 주먹의 모습인 권상(拳相)이 있는 것입니다.”

염부단금(閻浮檀金), 염부나무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나오는 사금(沙金), 또는 염부나무 밑에 있다고 하는 금.


佛告阿難:“如來今日實言告汝,諸有智者要以譬喩而得開悟。

阿難!譬如我拳,若無我手不成我拳;若無汝眼不成汝見。以汝眼根例我拳理,其義均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오늘 진실한 말로써 네게 알려주리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비유로 반드시 깨달을  있을 것이니,

아난아, 비유하자면 나의 주먹과 같은 것이다. 

만약 내 손이 없다면  주먹을 만들  없었을 것이며, 

 눈이 없다면 너는   없었을 것이니라. 

이와 같은 이치로  눈을  주먹에 비교한다면  뜻이 같은 것이 겠는가?”


阿難言:“唯然,世尊!旣無我眼不成我見,以我眼根例如來拳,事義相類。”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눈이 없다면 저는   없었을 것이므로, 

 눈을 여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실제와 뜻이 서로 같은 사의상류(事義相類)인 것입니다.”

ㅡ눈(眼)을 주먹(拳)에 비유한 것은 이치가 비슷하지 않으나, 아난 존자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슷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정택진견(正擇眞見)

佛言阿難:“汝言相類,是義不然。何以故?如無手人拳畢竟滅;彼無眼者非見全無。所以者何?汝試於途詢問盲人:‘汝何所見?’彼諸盲人必來答汝:‘我今眼前唯見黑暗,更無他矚。’以是義觀,前塵自暗,見何虧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서로 같다고 하였으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니,

 까닭은 만약 손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주먹을 만들  없으나,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유를 말할 것이니, 네가 시험 삼아 길거리로 가서 맹인(盲人)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맹인들은 ‘나는 지금 눈앞에 캄캄한 것만을 볼 뿐,  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니라. 

이러함으로 본다면, 앞 경계가 스스로 어두울 뿐, 보는 작용에는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라.”


阿難言:“諸盲眼前唯睹黑暗,云何成見?”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맹인들의 눈앞이 캄캄함을 어찌하여 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佛告阿難:“諸盲無眼唯觀黑暗,與有眼人處於暗室,二黑有別?爲無有別?”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기능이 없는 맹인들이 보는 캄캄함과 눈의 기능이 있는 사람이 암실(暗室)에서 보는 캄캄함을 비교한다면, 

이러한 두 캄캄함인 다른 것이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이겠는가?”

ㅡ두 어두움이 다르지 않다면, 어두움은 곧 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만 보는 대상이 어두운 것일 뿐이다.


“如是,世尊!此暗中人與彼群盲,二黑挍量曾無有異。”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암실에 있는 사람을  맹인들과 비교한다면,  캄캄함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阿難!若無眼人全見前黑,忽得眼光還於前塵,見種種色名眼見者;彼暗中人全見前黑,忽獲燈光,亦於前塵見種種色,應名燈見。若燈見者,燈能有見自不名燈,又則燈觀何關汝事?是故當知燈能顯色。如是見者是眼非燈,眼能顯色,如是見性是心非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 눈빛을 얻어서, 앞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하는 것이라면, 

 암실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빛을 얻어서,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면, 당연히 등(燈)이 본다고 해야 하리라. 

만약 등이 본다고 한다며, 등(燈)에게 보는 능력이 있으므로 등(燈)이라 이름할  없을 것이며, 

 등(燈)이 보는 것이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등(燈)은 빛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작용은  눈(眼)이요, 등(燈)이 아니며, 

눈은 색(色)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성품은  마음(心)이요 눈이 아닌 것이니라.”

ㅡ모는 주체는 성품(性)이라는 것이다. 

 

*견()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눈> 이 아니고 <마음> 이다. 

캄캄한 방에 촛불을 켜면 환하게 보인다고해서 촛불이 보는 것인가? 

환한 것을 아는 것은 촛불이 아니고 마음(眞心)이며, 눈(眼根)은 기관일 뿐이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은 전부다 마음이다.
등(燈) ―― 물체 ―― 눈(眼)
눈(眼) ―― 물체 ―― 마음
등과 눈을 비교하여 등이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과 같이,

눈과 마음을 비교하여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보는 것이다.ㅡ향적법진

 

▷아난 존자가 아직 깨닫지 못함
阿難雖復得聞是言,與諸大衆口已默然心未開悟,猶冀如來慈音宣示,合掌淸心佇佛悲誨

이러한 말씀을 듣자 아난 존자는 대중들과 함께 비록 입으로는 이미  말이 없어졌으나, 마음으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오로지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설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여 마음을 비운, 합장정심(合掌淸心)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릴 뿐이었다.

ㅡ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조금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으나 아직 의심은 남아 있다.

 

▷객진번뇌를 떨쳐버림 - 추문하여 깨닫게 함.
爾時,世尊舒兜羅緜網相光手,開五輪指,誨勅阿難及諸大衆:“我初成道於鹿園中,爲阿若多五比丘等及汝四衆言:‘一切衆生不成菩提及阿羅漢,皆由客塵煩惱所誤。’汝等當時因何開悟今成聖果?”

이때 세존께서 그물 모양처럼 무늬 진, 도라면(兜羅綿, 깨끗하고 부드러운 솜)과 같이 부드럽고 광명이 빛나는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시면서, 아난 존자와 대중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 녹원(鹿園)에서 아야다(阿若多, 得解, 앎의 뜻, 교진여)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보리(菩提)와 아라한(阿羅漢)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잘못 때문이니라’고 하였 때, 당시에 너희들은 무엇을 근거로 깨달았기에 거룩한 과위의 성과(聖果)를 이룬 것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파를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여서 전법륜(轉法輪)이라 하며,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과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 콘단냐(Kondanna, 교진여, 아야다)· 아사지(Assaji, 아설지) · 마하나마(Mahanama, 마하남) · 밧디야(Bhaddhiya, 바제) · 바파(Vappa, 바파)에서 초전법륜을 하였다. 이들은 처음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에 아버지 숫도다나가 아들을 호위하라고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싯다르타의 인간됨을 보고 따랐던 그의 수행 시절 동료였다고도 전한다. 

*객진번뇌(客塵煩惱)와 자진번뇌(自塵煩惱),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
객진번뇌는 외부 환경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번뇌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타인의 비판, 물질적 손실, 사회적 갈등 등 외부 자극에 반응해서 생기는 분노, 시기, 불안 등으로, ‘객(客)’은 ‘손님’을 뜻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특성을 지닙니다.
자진번뇌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번뇌를 가리키며, 예를 들어,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등 삼독(三毒)과 같은 선천적 습관이나 무명(無明)으로, ‘자(自)’는 ‘스스로’를 의미하며,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심층적인 문제로 간주됩니다.

대처 방식으로는; 
객진번뇌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조절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마음챙김(念)이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의 흐름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비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상대방의 해석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자진번뇌: 내면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修行)이 필요합니다. 명상, 계율 준수, 지혜 함양 등을 통해 무명을 벗어나고 삼독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탐욕의 뿌리를 찾아 집착을 버리는 과정입니다. ㅡ향림

 

▷교진여가 뜻을 밝힘.
時,憍陳那起立白佛:“我今長老於大衆中獨得解名,因悟客塵二字成果。

이때 교진나(憍陳那, 아야다)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 홀로 ‘잘 아는 사람의 득해(得解)’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객진(客塵)의  글자를 깨닫고 과(果, 과위, 불과)를 성취한 까닭에서 입니다.

 

世尊!譬如行客投寄旅亭,或宿或食,食宿事畢,俶裝前途不遑安住;若實主人自無攸往。

如是思惟不住名客、住名主人,以不住者名爲客義。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그네가 여정(旅亭)에서 머물러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자고 먹는 일이 끝나면,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짐을 싸서 길을 떠나지만, 주인은 멀리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인 객(客)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主)이니, 

머물지 않는 것을 객(客)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又如新霽淸暘昇天光入隙中,發明空中諸有塵相,塵質搖動虛空寂然。

如是思惟澄寂名空,搖動名塵,以搖動者名爲塵義。”

또한 날씨가 맑게 개인 아침에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을 때,  빛이 틈새로 들어와서 빈틈의 티끌(塵)을 밝게 비추면, 티끌은 흔들리지만,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보면, 맑고 고요한 자체는 허공의 공(空)이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塵)이니, 흔들리는 것을 진(塵)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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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6

 

▷혼미한 이류를 전체적으로 보이심

佛告阿難:“一切衆生從無始來種種顚倒,業種自然如惡叉聚,諸修行人不能得成無上菩提,

乃至別成聲聞、緣覺,及成外道、諸天魔王及魔眷屬,皆由不知二種根本,錯亂修習,

猶如煮沙欲成嘉饌,縱經塵劫終不能得。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가지로 뒤바뀐 전도(顚倒)된 업의 종자가 악차(惡叉)의 열매가 쌓인 덩어리와 같은 것으로,

수행자들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지 못하고, 따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이 되거나, 일체의 외도(外道)와 모든 하늘과 마왕(魔王)과  권속(眷屬)이 되어 버리는 것은,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섞이게 수습(修習)하는 때문이니라.

이러한 수행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아무리 오랜 겁 동안을 노력할지라도 성취할  없는 것이니라.

ㅡ중생들의 업종(業種)은 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수행하는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반연심과 청정체의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닦고 익히는 까닭이니, 모름지기 결택(決擇)을 잘하여야 하는 것이다. 

반연심이란, 앞의 칠처(七處)에서 망령되게 인식하는 것이고, 청정심이란 바르게 분별하여 밝히는 것이다.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생사에 간섭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는데, 물둘지도 않고 간섭되지도 않으므로 본래 청정한 본체(本體)라 한 것이다. 

 

*악차(惡叉, rudra-akṣa) 과일의 이름으로, 그 씨로 염주를 만들며, 이것을 금강자(金剛子)ㆍ천목구(天目球)라고 하며,  과일이 땅에 떨어지면  장소에 많이 쌓이기 때문에,  장소에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할  흔히 이것으로 비유한다.

 

*자사욕성가(煮沙欲成嘉饌), 모래를 삶아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노력을 말한다.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든다는 뜻의 증사작반(蒸沙作飯),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사상누각(沙上樓閣), 공중에 떠있는 누각이라는 공중누각(空中樓閣)과 비슷한 말이다. 증사작반은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말로서 전체 글은 다음과 같다. 부지런히 수행을 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간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쌀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고 한다. 누구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구나.

 

ㅡ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본성(本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심(眞如心)이 있다. 아뢰야식은 진심(眞心)과 무명(無明)인 망심(妄心)이 화합한 것으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 이라고 한다. 화합을 깨뜨리면 본성(本性)이 저절로 나타난다.
반연하는 마음으로 보면, 대상은 ①고정되어 보이고 ②분리되어 보이고 ③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인식하는 마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이다. 또한 이러한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바로 마음이 만든 대상이다. 즉, 망막에 맺힌 "영상" 을 보고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인식한다. 실제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연심(返緣心)이고 육식(六識)이고 무명(無明)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껍질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이 반연심이다.- 향적법진

 

云何二種?阿難!一者無始生死根本,則汝今者與諸衆生,用攀緣心爲自性者;

二者無始菩提涅槃元淸淨體,則汝今者識精元明,能生諸緣緣所遺者。

由諸衆生遺此本明,雖終日行而不自覺,枉入諸趣。

무엇을  가지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난아, 첫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나고 죽는 생사(生死)의 근본으로서, 네가 지금 모든 중생과 함께 반연하는 마음의 반연심(攀緣心)을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自性)으로 아는이며, 

둘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보리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인 보리열반원청정체(菩提涅槃元淸淨體)이니, 네가 지금 식정(識精)의 원래 밝음으로 모든 인연을 내기도 하여서, 그 인연으로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원래의 밝은 본체(本體)인 본명(本明)을 잃어버린 까닭에, 비록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게 여러 갈래의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우리는 조건화된 외부 사물(대상)으로부터 고통, 기쁨, 사랑, 괴로움 등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반연심(攀緣心)을 따르는 까닭에 생사를 거듭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상호를 우러러 본 것과 마탕가의 아름다움에 빠진 것도, 아난 존자는 칠처징심 중에서외부 대상에 대한 육근의 반연심을 스스로의 자성(自性)으로 잘못 안 까닭에 부처님께서 7 가지로 마음이 소재를 물었을 때,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반연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六根, 주체)이 육경(六境, 객체)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육식(六識)으로 말미암아 반연심(攀緣心, 망상, 분별심)을 일으켜서 본명(本明)을 잃어 버리고,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반연(攀緣), 반(攀) 더위잡을 반, 무엇을 붙잡고 오르는 것, 
                    연(緣) 가선 연, 연줄 연, 인연 연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라는 뜻으로, 마음의 대상에 의지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인데,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번뇌란 의미로도 쓰이고, 인식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대경(​對境,대상 경계)을 의지하는, 즉 대상이 나타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휘감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마치 칡넝쿨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나는 것으로, 마음은 대경을 반연 하는 것이다. ㅡ해가지니 달이뜨네

*식정(識精), 중생의 진심(眞心), 즉 정명한 지식을 말한다.

*정과(正果), 불법을 닦는 사람이 정진하고 수련하여서 성과(聖果)를 얻는 것을 증과(證果)라고 하는데, 이는 외도와 다른 것이다.  

 

▷바로 결정하여 선택함의 정여결택(正與決擇)
“阿難!汝今欲知奢摩他路願出生死,今復問汝。”

아난아,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제 다시 네게 묻겠으니!”

 

卽時,如來擧金色臂屈五輪指,語阿難言:“汝今見不?

즉시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보고 있는가?”


阿難言:“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예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何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았는가?”


阿難言:“我見如來擧臂屈指,爲光明拳,曜我心目。”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어 올리시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드셔서, 제 마음과 눈에 비추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將誰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阿難言:“我與大衆同將眼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대중(大衆)들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佛告阿難:“汝今答我。如來屈指爲光明拳,耀汝心目,汝目可見。以何爲心,當我拳耀?”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나에게 답하기를 ‘여래가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너의 마음과 눈에 비춰 주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눈은 본다고 하겠으나, 무엇을 마음이어서,  주먹의 비치는 아는 것인가?”

 

▷아난 존자의 망령된 대답.
阿難答言:“如來現今徵心所在,而我以心推窮尋逐,卽能推者,我將爲心。”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여래께서 방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자, 저는 마음으로 추궁하여 찾아보았으니, 저는  추궁하는 자체를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佛言:“咄!阿難!此非汝心。” 
咄 꾸짖을 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咄), 아난아, 그것은  마음이 아니니라.”


阿難矍然避座合掌,起立白佛:“此非我心,當名何等?”

 말을 듣자 아난 존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비진(非眞)을 보이심. 
佛告阿難:“此是前塵虛妄相想惑汝眞性。由汝無始至于今生認賊爲子,失汝元常故受輪轉。”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네 앞의 경계인 전진(塵虛)의 허망한 상(相) 인연하는 생각이며, 너의  성품인 진성(眞性)을 미혹시킨 번뇌이니라. 

너는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너의 본래 영원한 마음을 잃어버린 까닭에, 생사의 윤회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육근(六根, 주체, 감각기관) + 육경(六境, 객체, 인식하는 대상, 경계) =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 

안근(眼根, 눈) 시각 기관 + 색경(色境) 눈이 인식하는 색깔 = 안식(眼識) 눈의 분별 인식 작용
이근(耳根, 귀) 청각 기관 + 성경(聲境) 귀가 인식하는 소리 = 이식(耳識) 귀의 분별 인식 작용

비근(鼻根, 코) 후각 기관 + 향경(香境) 코가 인식하는 냄새 = 비식(鼻識) 코의 분별 인식 작용
설근(舌根, 혀) 미각 기관 + 미경(味境) 혀가 인식하는 맛 = 설식(舌識) 혀의 분별 인식 작용
신근(身根, 몸) 촉각 기관 + 촉경(觸境) 몸이 인식하는 촉감 = 신식(身識) 몸의 분별 인식 작용
의근(意根, 마음) 정신적 인식 기관 + 법경(法境)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 즉 생각, 개념, 정신적 대상 = 의식(意識) 마음의 분별 인식 작용

 

*인적위자(認賊爲子) ① 도둑을 아들로 생각하다 ② 부정당한 견해를 진실로 여기다.

여기에서는 마음, 즉 망심을 자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은 진심이 아니다.

 

阿難白佛言:“世尊!我佛寵弟,心愛佛故令我出家,我心何獨供養如來,乃至遍歷恒沙國土,承事諸佛及善知識,發大勇猛,行諸一切難行法事皆用此心;縱令謗法永退善根亦因此心。若此發明不是心者,我乃無心同諸土木,離此覺知更無所有。云何如來說此非心?我實驚怖,兼此大衆無不疑惑,唯垂大悲開示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귀여운 아우로서, 마음 깊이 부처님을 연모하여 출가하였으나, 

어찌 제 마음만이 홀로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겠습니까! 

나아가 항하(恒河)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받들어 섬기거나,  용맹을 일으켜서 일체의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난행법사(難行法事)를 행하는 것 모두가 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가령 법을 비방하여 영원히 선근(善根)에서 물러난다 할지라도, 역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밝히신다면, 저는 바로 마음이 없는 흙과 나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깨달아 아는 마음을 떠나서는  이상 아무것도 없을 것인 즉,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혼자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기의  대중들도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시유진심(示有眞心), 진심이 있음을 보이시다.
爾時,世尊開示阿難及諸大衆,欲令心入無生法忍,於師子座摩阿難頂而告之言:

“如來常說諸法所生唯心所現,一切因果世界微塵因心成體。

阿難!若諸世界一切所有,其中乃至草葉縷結,詰其根元咸有體性,縱令虛空亦有名貌,

何況淸淨妙淨明心性一切心而自無體?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이시고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시고자,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항상 ‘제법이 생겨나는 제법소생(諸法所生) 오로지 마음에 나타난 경계인 유심소현(唯心所現)이며, 

일체의 인과(因果)와 세계 미진(微塵)은 마음으로 자체를 이루는 인심성체(因心成體)이다’라고 설해 왔느니라.

아난아! 만약 모든 세계의 일체 존재인 일체소유(一切所有)에서 조그마한  잎새나 가느다란  가닥까지도  근원을 따져보면, 그 모두 자체의 성품이 있고, 허공일지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거늘,

더욱이 청정하고 미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일체 마음의 본성인 청정묘정명심성(淸淨妙淨明心性, 본성)이 어찌하여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겠는가?

 

▷망령된 집착을 분별하여 물리침
若汝執悋分別覺觀,所了知性必爲心者,此心卽應離諸一切色、香、味、觸,諸塵事業別有全性,如汝今者承聽我法,此則因聲而有分別,縱滅一切見聞覺知,內守幽閑猶爲法塵分別影事,

만약 네가 분별(分別)하고 깨닫고 살피는 각관(覺觀, 추측하여 헤아리는 마음)으로, 분명하게 아는 성품에 굳게 집착하여서, 그것이 틀림없는 마음이라 한다면, 

 마음은 마땅히 색(色, 모습)을 보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알고 닿음(觸)을 느끼는 일체경계를 떠나서, 따로이 완전한 스스로의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니라. 

네가 지금 나의 설법을 받들어 듣고 있을지라도 소리를 따라 분별하고 있는 것이니, 가령 일체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작용이 멸하여 안으로 고요한 경계를 지킬지라도, 오히려 법의 경계인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그림자의 분별영사(分別影事) 일 뿐이니라. 

 

각관(覺觀),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각관(覺觀)은 심사(尋伺)이며, 심(尋)은 찾아 헤매는 마음과 사물에 대한 개략적인 사고 작용, 

사(伺)는 그보다 세심한 분별 작용을 가리킨다. 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隨煩惱)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선정=定도 무의식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이 있다. 그러나 심사와 다른 점은 선정은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고 심사는 바르지 못한 것이며, 이 각관(覺觀), 즉 심사(尋伺)를 버려야 2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非勅汝執爲非心,但汝於心微細揣摩,若離前塵有分別性卽眞汝心;若分別性離塵無體,斯則前塵分別影事,塵非常住若變滅時,此心則同龜毛兔角,則汝法身同於斷滅,其誰修證無生法忍?”

卽時阿難與諸大衆默然自失。

나는 네게 굳이 마음이 아님을 고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그저 마음으로 자세히 헤아려 보거라. 

만약 앞의 경계(塵)를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진실한 너의 마음인 진심(眞心)이라 하겠는가?

만약 분별하는 성품의 경계(塵)를 떠나서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면, 

이것은  앞의 경계를 분별하는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니라. 

경계는 영원히 머무는 상주(常住)의 진리가 아니니, 만약 변하여 사라질 때의 그 마음이 곧 거북의 털인 귀모(龜毛)나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은 것이라면, 너의 법신(法身)도 끊어져 없어지는 단멸(斷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하다면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아난과 대중은 무엇을 잃어버린  말없이 잠자코 있는 묵연자실(默然自失)하였다.

 

▷망령되고 잘못됨이 이루어진 것임을 결론 지음.
佛告阿難:“世閒一切諸修學人,現前雖成九次第定,不得漏盡成阿羅漢,皆由執此生死妄想誤爲眞實。

是故汝今雖得多聞不成聖果。”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고 배우는 수학인(修學人)들이 현재 비록 아홉 단계의 선정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성취할지라도, 번뇌를 다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生死)의 허망한 생각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비록 많이 들어 아는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성인의 과위인 성과(聖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불성과 여래장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체가 없다.

불성·여래장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씨앗을 의미할 따름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의하면 공성(空性)이 모든 상(相)을 없애고 궁극에는 부처를 이루게 하므로 이를 불성이라고 설하고 있다. 공성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중도(中道)이며, 모든 견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병을 깨트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공(空)이 아니라 병 그대로 공(空)이라고 설한다. 그렇다면 어찌 공성(空性)을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열반(涅槃)의 4덕(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도 힌두교의 아트만(ātman)처럼 아(我)가 명시돼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힌두교의 아트만은 고정불변의 유아(有我)인 반면에 공(空)이란 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보성론(寶性論)과 불성론'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상락아정의 아(我)는 자체성품이 없는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다.
한때 인도의 힌두수행자 라마나 마하리쉬에 의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상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화두참구법의 하나인 <이뭣고>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탐구하는 전제는 자아(自我)이다. 자아를 전제로 자아를 탐구하면 그 결과는 자아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뭣고>의 전제는 자아가 아닌 말과 생각을 떠난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본래 말과 생각을 떠나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그러나 불성조차 실체적 개념으로 파악될 여지가 있으므로 화두(話頭)라는 말로 바꾸어서 간(看)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해서 <참나>를 깨쳤다면 그 <참나>는 무아(無我)의 아(我)이므로 힌두교의 아트만인 <참자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어느 시민선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도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이뭣고>합니다”라고 말한 뒤 죽비치고 좌선에 들어갔다. 좌선시간이 끝나는 죽비를 치니까 한 사람이 일어서면서 “이뭣고가 사람잡네”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무작정 <이뭣고>만 하라고 하니 이것을 염불처럼 외우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말을 깊이 사유하라는 것인지 도통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그 분이 “이뭣고가 사람잡네”라는 말을 왜 했을까 쉽게 짐작이 간다.
참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수행은 진전될 수 없다. 무아로서의 불성을 깨닫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수행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꼼꼼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대중들이 불교를 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첩경이기도 하다.ㅡ향적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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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5

 

▷ 6. 마음은 중간에 있는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亦聞佛與文殊等諸法王子談實相時,

世尊亦言:心不在內亦不在外。如我思惟,內無所見外不相知,內無知故在內不成;

身心相知在外非義。今相知故,復內無見,當在中閒。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저도 들었습니다만부처님께서는 문수 보살  모든 법왕자(法王子)들과 더불어 함께 실상(實相) 담론하실 때,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내(心不在內)이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외(心不在外)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을 따라 사유하여 보니마음이 안에 있다면 몸의 속을  볼 것이

밖에 있다면 서로를 알지 못할 것이니,

몸의 속을 알지 못하므로 안에 있다고   없고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도 몸속을  보는 것이니마음은 당연히 중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ㅡ아난 존자는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근(根)과 경(境, 진塵)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아는 지(知)의 체성은 양쪽 모두에 있어야 할 것이므로, 중간에 있다는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안에 있다고 하자니 장부를 보지 못하고, 밖에 있다고 하자니 몸과 마음이 서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눈과 대상의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다. 

 

▷ 중간의 위치를 분별하여 결정함. 

佛言:汝言中閒,中必不迷,非無所在。今汝推中,中何爲在?爲復在處?爲當在身?

若在身者,在邊非中,在中同內。若在處者,爲有所表?爲無所表?無表同無,表則無定。

何以故?如人以表表爲中時,東看則西,南觀成北。表體旣混,心應雜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중간(中間)'이란 반드시 일정한 곳이 없지 않고 미혹(애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네가 그 중간을 찾아보아라중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곳이 따로 있는 것인가? 너의 몸 안에 있는 것인가?

만약, 몸에 있다고 한다면

 주변(변두리)이라면 중간이 아닐 것이며몸속이면 내장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따로 있는 곳이라 한다면, 표시를 할  있는가? 표시를 할  없는가?

표시할  없다면, 중간이 없다는 것이며표시한다 할지라도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중간에 푯말을 세워서 표시하고자 할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되고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될것이니그 표시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阿難言:我所說中,非此二種。如世尊言:眼色爲緣,生於眼識。

眼有分別,色塵無知,識生其中,則爲心在。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제가 말씀드린 중간은 그러한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根)과 (色, 境)의 색진(色盡) 인연(緣)하여서 안식(眼識) 생긴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根)에는 분별작용이 있고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은 아는 작용이 없으나,

그 중간에 () 생기므로, 그러한 중간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것입니다.”

ㅡ이는 몸과 장소의 중간이 아니고 눈과 색진의 중간이라고 말한 것이다.


佛言:汝心若在根、塵之中,此之心體爲復兼二?爲不兼二?

若兼二者,物體雜亂,物非體知,成敵兩立云何爲中?兼二不成,非知不知卽無體性,中何爲相?

是故應知,當在中閒,無有是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만약 눈(根)과 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마음 자체는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한 것인가?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둘을 겸한 것이라면, 색(色, 物, 塵, 대상)과 체(體, 根) 어지럽게 섞일 뿐만 아니라

색(色, 物, 塵, 대상)은 눈(體, 根) 분별작용(知) 아닌 까닭에 색(境)의 무지(無知) 눈(根)의 분별이 서로 다르게 갈라질 것인즉, 어찌 중간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이라면눈(根)의 분별(知) 색(境)의 무지(不知) 아닌 것이니, 자체의 체성(體性) 없으니,

중간이란 어떠한 상(相)이 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이 중간에 있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만약 마음이 눈과 대상인 물질, 두 가지를 겸하여서 그 중간이 된다고 한다면, 대상 물질은 앎이 없고 눈은 앎이 있으니, 앎이 있는 것과 앎이 없는 것이 서로 상대겆인 것으로, 둘로 갈라질 것이니, 어떻게 이것이 화합해서 중간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7.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昔見佛與大目連、須菩提、富樓那、舍利弗四大弟子共轉法輪,常言:覺知分別心性,旣不在內,亦不在外,不在中閒,俱無所在。一切無著名之爲心。則我無著名爲心不?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제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부처님께서 목건련(目揵連) 존자와 수보리(須菩提) 존자  부루나(富樓那) 존자 사리불(舍利弗) 존자 등의  제자와 함께 법륜(法輪) 굴리시면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은 안(內)에도 있지 않고밖(外)에도 있지 않고중간(中間)에도 있지 않은 것으로, 그 어디에도 있는 곳이 없는 무소재(無所在)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 무착(無着, Nonattachment) 마음이라는 뜻이오니제가  무착(無着)을 마음이라 한다 어떻겠습니까?

ㅡ아난 존자는 안 밖, 일곱 번째로 마음은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 Cling to nothing)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본래 있을 곳이 없으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한 것인데, 지금 아난 존자는 다시 무착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다. 

 

▷무착(無着)을 파(破)하다.

佛告阿難:汝言覺知分別心性俱無在者,世閒虛空水陸飛行,諸所物象名爲一切。

汝不著者,爲在爲無?無則同於龜毛兔角,云何不著?有不著者不可名無,無相則無,

非無則相,相有則在,云何無著?是故應知,一切無著名覺知心,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바대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이 어디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면

세상과 허공의 물과 육지에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일체의 물상을 일체(一切)라고 하거늘,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일체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거북이의 털인 귀모(龜毛)와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이, 있을 수 없는것이 거늘,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일체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집착하지 않는다고   없을 것이니,

무상(無相)이라면, 곧 아무것도 없는 무(無)이고

없지 않은 비무상(非無相)이라면, 곧 상(相) 있는 것이며, 상(相) 있으면 마음이 있는 것이니

어찌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에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 깨닫고 아는 마음의 각지심(覺知心)이라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지금까지 아난 존자의 주장은 마음의 소재에 대하여 있다(有)와 없다(無)의 유무(有無) 두 가지였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설명하실 때 항상 ‘관계성(연기성 緣起)’으로 말씀 하셨으니, 있다 없다라는 것은 고정된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항상하지 않은 이 세계는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 유무(有無)의 고정된 실체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으나, 아난 존자는 망심(妄心)을 진심(眞心)으로 잘못알고 7 곳을 대답하였다. 부처님서는 아난 존자의 틀린 부문을 지적하셨으나, ‘마음의 소재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 파사(破邪)만 하시고 현정(顯正)은하지 않으셨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은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 洗心堂 

 

마음(心)의 소재(所在)에 관한 아난 존자의 잘못된 대답의 칠처징심(七處徵心); 

① 아난 존자의 첫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안(身內, The mind is in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② 두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의 밖(身外, The mind is out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③ 세 번째의 주장으로는 눈의 뒤(안구의 뒤)에 숨어서, 잠복근이(潛伏根裏, The mind is behind the eyes)하고 있는 것,

④ 네 번째 주장으로는,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으로, 마음은 어두운 몸 속에 있는, 장암(藏暗, Closing the eyes to see darkness, that is to see it)하는 것이라 하였다. 

⑤ 다섯 번째의 주장으로는 경계(대상)를 따라 합하는 곳에서 생기는 수합(隨合, it exists in response)하다는 것.

⑥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는 것, 

⑦ 일곱 번째로, 안 밖,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반연심(攀緣心)과 청정체(淸淨體)의 두가지 근본(根本, The two fundamental roots)

 

爾時,阿難在大衆中卽從座起,偏袒右肩右膝著地,合掌恭敬而白佛言:

我是如來最小之弟,蒙佛慈愛,雖今出家猶恃憍憐,所以多聞未得無漏,不能折伏娑毘羅呪,

爲彼所轉溺於婬舍,當由不知眞際所指。唯願世尊大慈哀愍,開示我等奢摩他路,令諸闡提墮彌戾車

作是語已,五體投地。及諸大衆傾渴翹佇,欽聞示誨。

그러자 아난 존자가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무릎을 세우는 우슬착지(右膝著地)하여서, 합장하고는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사랑 입고 비록 지금 출가하였으오히려 사랑하여 주시는 것만을 믿고, 많이 들어서 알기만 하였을 뿐, 여태껏 무루(無漏)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비가라주(娑毗迦羅呪, 수론외도의 주문) 꺾지 못하고마등가(摩登伽) 홀림을 당하여 음실(婬室) 빠졌으니이것은 진실한 경지의 진제(眞際, 깨달음) 가는 길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대비(大悲) 내리시어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사마타(奢摩他) 길을 열어 보여 주시고

모든 천제(闡提, 부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 마저도 추악한 성격의 미려차(彌戾車, 악견) 헐어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체(五體, 온몸) 땅에 던져 대중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마음은 물과 같아서 가만히 있지 않으면 밝아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마타의 길로 진제에 나아가기를 구하였는데, 만약 진제가 나타나면 망심의 때는 저절로 없어진다. 

 

천제(闡提, icchantika, ecchantika), 일천저가(一闡底迦) · 일전가(一顚迦) · 일천제가(一闡提柯)라고도 음역하고, 단선근(斷善根) · 불신구족(不信具足) · 극욕(極欲) · 대욕(大欲) · 무종성(無種性)이라고 의역한다.
icchantika를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 풀이하면 ‘욕구하는 자’를 뜻하기 때문에 그 유래를 고대 인도의 쾌락주의자에서 찾을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의지가 없어 성불의 소질과 인연이 결여된 자들을 가리킨다. 즉 일천제는 선근(善根)이 끊겨서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자, 아무리 수행해도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자를 말한다.ㅡ다움

미려차(彌戾車, Mleccha믈레차), 낙구예인(비루한, 하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의역하며,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치우친 견해·삿된 견해와 같이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미려차는 ‘변경(邊境)의 사람’, ‘타국인·외국인’, ‘야만인’ 등을 뜻하는 말로, 불교의 경론(經論)에서는 사견(邪見)·악견(惡見) 등 ‘바르지 못한 견해’나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 등을 가리킵니다. ㅡ운곡원포

 

▷상서로운 광명을 얼굴로부터 발하시다.

爾時,世尊從其面門放種種光,其光晃耀如百千日,普佛世界六種震動,如是十方微塵國土一時開現;

佛之威神令諸世界合成一界,其世界中所有一切諸大菩薩,皆住本國合掌承聽。

이때, 세존께서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으시니,  광명  천의 햇살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비치자드넓은 부처님의 세계인 보불세계(普佛世界) 여섯 가지로 육종진동(六種震動)하면서, 시방(十方) 미진과 같은 많은 세계가 일시에 열리어 나타났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모든 세계를 합하여  세계를 이루시니

 세계의 보살들은 그들의 토에 머문 그대로 합장하여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육종진동(六種震動), 동(動), 기(起), 용(湧), 후(吼), 격(擊). 인도의 풍습에서 큰 경사가 있을 때면 대지가 진동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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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4

 

▷ 4. 어두운 곳에 감추어진 장암(藏暗)이 마음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今又作如是思惟:‘是衆生身,府藏在中竅穴居外,有藏則暗有竅則明”

今我對佛,開眼見明名爲見外,閉眼見暗名爲見內,是義云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씁드리기를, 

“세존이시어, 제가 다시 생각해 보니, 중생의 몸을 보면 5장(藏)ㆍ6부(腑)는속에 들어있고,

규혈(竅穴, 구멍)들은 밖에 있으므로,

마음이 부장(腑藏)에 있는 것이라면 어두우나, 구멍에 있는 것이라면 밝은 것이 되겠습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마주하여서 눈을 뜨고 그 밝음을 보는 것을  밖을 보는 견외(見外)라 하고,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은 몸속을 보는 견내(見內)라고 한다면, 이러한 뜻은 어떻습니까.”

아난 존자의 네 번째 주장으로,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으로, 마음은 어두운 몸 속에 있는, 장암(藏暗)하는 것이라 하였다. 

 

장암(藏暗)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파(破)하다.
佛告阿難:“汝當閉眼見暗之時,此暗境界爲與眼對?爲不對眼?若與眼對,暗在眼前云何成內?若成內者,居暗室中無日月燈,此室暗中皆汝焦府?若不對者,云何成見?若離外見內對所成,合眼見暗名爲身中,開眼見明何不見面?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둠을  때, 그 어두운 경계가 눈과 상대하여 마주 하는가? 

눈과 상대하여 마주하지 않는가?

만약 눈과 상대하여 마주한다면, 어둠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어떻게 몸속이 성립될 수 있겠으며?

만약 눈앞의 어두움으로 몸속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해와 달과 등불도 없는 암실(暗室)에 있을 때,  방안의 어둠은 온통 너의 내장인 초부(焦腑)이겠구나!

만약 어둠이 눈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만약 바깥을 보는 것을 떠나서 안을 마주하는 것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을 몸속을 보는 것이라 할 것이며,  

눈을 뜨고 밝음을  때에는 어찌하여 스스로의 얼굴을  보는 것인가?

ㅡ눈 앞의 경계를 밖을 보는 것이라 하고, 몸 속(身內)의 경계를 안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앞에서는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써 맊이라 하여서 안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비록 밖으로 보는 것을 떠나고 안을 마주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이는 곧 눈이 되돌아 보는 것이다. 또 눈을 감았을 때, 몸 속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눈을 떴을 때에는 마땅히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若不見面,內對不成。見面若成,此了知心及與眼根乃在虛空,何成在內?

若在虛空,自非汝體。卽應如來今見汝面亦是汝身,汝眼已知身合非覺,必汝執言身眼兩覺應有二知,

卽汝一身應成兩佛。是故應知汝言:‘見暗名見內者。’無有是處。”

만약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안을 마주하여 본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으리라!

스스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성립된다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은 눈과 함께 허공에 있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몸 속을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만약 허공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체로써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여래가 지금  얼굴을 보는 것도, 마땅히  몸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다면 허공에 있는  눈이 이미 알아차렸을지라도, 몸은 아직 깨닫지 못해야 할 것이나, 

네가 끝까지 고집하여 몸과 눈,   알아차린다고 한다면, 당연히  개의 아는 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니,

네 한 사람이 마땅히  부처를 이뤄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돌이켜 보는 이치가 없음을 반복하여 밝힌 것으로, 너의 눈은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몸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허공에 있으므로 자연히 너의 몸이 아닐 것이거늘, 만약 둘 다 지견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두 몸이 되는 것이다. 

 

*눈을 감고 보는 어두움도 하나의 경계일 뿐이다.   

 

▷5.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이 있는 수합(隨合)하는 것이다. 
阿難言:“我常聞佛開示四衆:‘由心生故,種種法生;由法生故,種種心生。’

我今思惟,卽思惟體實我心性,隨所合處心則隨有,亦非內、外、中閒三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종종법(種種法)이 생기고, 

법이 생긴 까닭에 여러 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이 생긴다’고 하시는 것을 제가 항상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말씀을 사유(思惟)하였으며,  사유하는 자체가 바로 저의 심성(心性)으로, 

저의 육근과 경계(육경, 대상)가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도 있는 것이므로, 

안이나 밖이나 중간의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ㅡ아뢰야식의 한 생각이 망령되면, 이 것이 변하여 몸(身)과 세계(器界)가 생겨 나는 것이니, 마음이 생김으로 인하여 법이 생기고, 또 경계의 바람이 움직이면, 의식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는 법이 생김으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과 법이 서로 생겨나면 경계를 따라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본체인 것이니, 그래서 마음과 법이 어울리는 곳이 마음이 있다고 한 것이다. 

 

ㅡ아난 존자의 다섯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경계(대상)를 따라 합하는 곳에서 생기는, 수합(隨合)하는 것으로, 

마음은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이 합할 때 생기는 것인데, 아난 존자는 눈이 경계를 보고 안식(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였다.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에서, 육식은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반연심으로, 좋은 것을 보고 좋아하고, 나쁜 것을 보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과 같이, 육진경계를 따라 변하고 생주이멸하는 것으로써 상주진심이 아니다.

마음이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이거나,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닌, 주관(육근)과 객관(육경 대상)이 합칠 때 떠오르는 생각의 육식(六識)을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ㅡ여기에서의 법은, 해당 사물에 대한 앎의 해(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을 낳게 하는 뜻으로,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법칙적 관계를 뜻한다. 

 

▷수합(隨合)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다. 
佛告阿難:“汝今說言,‘由法生故種種心生,隨所合處心隨有’者,是心無體則無所合。

若無有體而能合者,則十九界因七塵合。是義不然!若有體者,如汝以手自挃其體,汝所知心爲復內出?

爲從外入?若復內出還見身中;若從外來先合見面。’”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법(法, 여기에서의 법은 대상, 사물, 경계)이 생겨나는 까닭 여러 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이 생기는 것으로, 그 육근과 육경이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면 합할없을 것이며, 

만약 없는 것일지라도 합할  있다고 한다면, 19계(界)가 7진(塵, 경境)을 따라 합한다는 말이되는 것이니,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자체가 있는 유체(有體)라면, 손으로  몸을 찔러 보아라. 아는 마음이 안에서 나오는 것인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인가?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몸의 안속을 보아야 할 것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면 마땅히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다.”

ㅡ생각하는 그 자체를 마음이라고 한 것은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므로 그 본체가 있고 없음을 힐난하신 것이다. 가령 마음의 본체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갓 이름만 있는 것이니, 어는 곳을 따라 어울린다고 하겠는가? 십구계(界)나 칠진(塵, 경境)과 같아서 다만 헛된 이름일 뿐이다. '만약 본체가 있다고 한다면, 어는 곳에 있겠는가?'라고 물으시면서 몸을 찔러서 징험하게 하여서 마음의 본체가 사실은 없는 것임을 밝히셨다. 

 

ㅡ19계(界)가 아닌,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의 18계이고,

7진(塵)이 아닌 6진(塵, 육경)인 것이다.

 

阿難言:“見是其眼,心知非眼,爲見非義。”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보는 것은 눈이지만, 마음으로 아는 것은 눈이 아닌데, 마음이 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ㅡ아난 존자의 해명으로, 마음은 다만 능히 알기만 하는 것이므로 본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보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 눈만으로는 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佛言:“若眼能見,汝在室中門能見不?則諸已死尚有眼存應皆見物。若見物者,云何名死?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눈만으로 능히 보는 것이라 한다면, 네가 방안에 있을 때, 문(門)으로 능히   있는가?

그러하다면, 이미 죽은 사람도 아직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물건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니,

만약 물체를 볼 수 있다면 어찌 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ㅡ문은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에 있음을 비유하였고, 죽은 것은 눈만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이 있음을 자세히 밝힘.

阿難!又汝覺了能知之心若必有體,爲復一體?爲有多體?今在汝身,爲復遍體? 爲不遍體?

아난아, 또한, 만약 너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분명한 체(體) 있는 것이라면, 

 체는 하나인 일체(一體)인가? 여럿의 다체(多體)인가? 

지금  몸에 두루  편체(遍體)인가?

두루 하지 않은 불편체(不遍體)인가? 

 

若一體者,則汝以手挃一肢時,四肢應覺,若咸覺者,挃應無在。若挃有所,則汝一體自不能成。

만약 그 체가 하나인 일체(一體)이라면, 네가 손으로 한쪽 팔을 찔렀을 때,

너의 4지(四支)가  같이 그것을 느껴야 할 것이고, 

만약 너의 사지가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찌른 곳이 따로 없을 것이며,  

그러나 찌른 곳이 따로 있다면, 체가 하나란 뜻은 저절로 성립될  없을 것이다. 

ㅡ한 개의 몸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있는 곳이 없다는 무재(無在)는 정해진 곳이 없음은 말한 것이다.

 

若多體者,則成多人。何體爲汝?

만약 체가 여럿의 다체(多體)라면,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거늘, 어느 체를 '너'라고 할 수 있겠는가?

 

若遍體者,同前所挃。

만약  몸에 두루  체(遍體)라고 한다면, 앞에서와 같이 한쪽 팔을 찔렀을 때,  전체가  느껴야  것이며,

 

若不遍者,當汝觸頭,亦觸其足,頭有所覺,足應無知。

今汝不然,是故應知,隨所合處心則隨有,無有是處。”

만약  몸에 두루 하지 않은 불편체(不遍體)라면, 너는 머리를 부딪치고, 또 발도 부딪쳤을 때, 머리가 느낌이 있어야 할 것이만, 발은 당연히 아무 느낌도 없어야 할 것이나, 

이와 같지 않으므로, 그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법(法), 불교에서의 법의 뜻은 매우 복잡하게 여러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설(敎說)이나 성전(聖典)의 교법(敎法),
최고의 진리나 깨달음의 내용, 
일체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로 존재하게 하고 있는 법칙과 기준의 법칙(法則),
인간이 실천하여 생활해야 할 도리 · 도(道) 또는 규정으로서의 도리(道理),
존재, 실체: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또는 존재,
법(법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유형 · 무형, 심적 · 물적의 일체 존재(存在, 현상),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一切法)으
로도 사용되는데, 이와 같이 법을 일체의 존재 또는 모든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다방면의 연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원시불교에 이은 부파불교의 시대에서는 모든 존재(일체법)를 분석하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뚜렷히 밝히는 작업이 크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분석법은 후대의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파의 유식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위키.

‘법(法)’은 인연가화합(因緣假和合)으로 상주의 실체가 없는 것이나, 자성을 지키고 알게 하는 궤지(軌持), 즉 자성을 보존하고 본보기로 하여서 그 사물에 대한 요해심(了解心)을 내게 하는 것을 말하며,
자아(我)와 법(法), 그 둘은 모두 갖가지의 모습들로 바뀌어 생겨나는(轉) 것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1

 

*18계(十八界)에서 계(界, dhātu, dhātu, 영어: realm)는 법(法)의 종류(種類, gotra) 또는 종족(種族)의 뜻이다.

18계는 하나의 산(山)에 금(金) · 은(銀) · 동(銅) · 철(鐵) 등의 다양한 광물이 있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몸(所依身소의신)에 18종의 법(法)인 실체 또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각 사람의 인생의 흐름, 즉 5온의 상속(相續)에서도 이들 18종 법(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6근(六根): 주관의 작용 기관
안계(眼界): 시각 기관, 즉 눈
이계(耳界): 청각 기관, 즉 귀
비계(鼻界): 후각 기관, 즉 코
설계(舌界): 미각 기관, 즉 혀
신계(身界): 촉각 기관, 즉 몸
의계(意界): 마음(6식, 심왕, 심법)의 작용 기관, 즉 의근(意根)
6경(六境): 객관
색계(色界): 시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색깔이나 형태(모양과 크기)를 가진 물질 일반, 즉 소리 · 냄새 · 맛 · 감촉을 제외한 모든 물질적 성질
성계(聲界): 청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소리
향계(香界): 후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냄새
미계(味界): 미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맛
촉계(觸界): 촉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감촉
법계(法界): 마음작용 및 마음작용의 대상
마음작용으로는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 탐욕 없음 · 성냄지 않음 등이 있으며, 마음작용의 대상에는 특히 무위법(열반 · 진여 · 법성 등)이 포함되며,
무위법을 제외하면 마음작용의 대상은 대체로 개념(또는 비물질적 사물)이라 할 수 있다.
6식(六識): 마음(6식, 심왕, 심법), 주관
안식계(眼識界): 색깔과 형태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시각
이식계(耳識界): 소리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청각
비식계(鼻識界): 냄새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후각
설식계(舌識界): 맛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미각
신식계(身識界): 감촉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촉각
의식계(意識界): 법계(法界, 전5식의 대상을 제외한 기타)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제6식 또는 제6 의식 ㅡ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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