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眞我)-참나에 대한 이해>

'진아(眞我)', ‘참나’란 초기경전에는 나오지 않은 말이다. 대승불교에서 생산된 용어로 그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의 하나로서 열반의 체()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그 작용이 자유자재하므로()’라 한 것을 말한다. , 열반사덕인 상()ㆍ락()ㆍ아()ㆍ정()에서()’는 망상에 집착하는 아집(我執)의 나[가아(假我)]를 버린 참나(진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선 여기서 논의하는진아’는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가아(假我)인 에고(ego)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가아인 에고가 주인노릇 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진아인 양심이 한 번씩 작동할 때마다 가아를 자신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반성하기도 하고 새롭게 결심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의 진아는 아트만(atman) 계열이 아닌 도덕적인 개념으로서의 아()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아인 에고가 주인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 뿐이다. 찰나에 가아로 돌아서버린다.

    따라서 진아란 망상(내 생각)에 집착하는(我執) 가아를 버리는 수행의 길이며, 곧 열반은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나 청정한 자성을 얻음을 말한다.

    짜 나’는 과거(전생)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을 내 것으로 삼고, 이것을 통해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기적)이다. 이 가아는 진아가 알음알이, 지식, 고정관념, () 등의 옷을 입은 것이다. ‘진짜 나’는 옷을 입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양()이 없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짜 나’는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으므로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자기 자신(진짜 나)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진아’와가아’는 몸은 한 몸이지만 작용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될 수가 없으며, ‘가아’의 모습도진아’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아’를 인식하지 못하고가아’가 행한 모든 행위가아의 작용은 자아의식[이기적인 아집(我執)]이 개임됨으로써 삶의 찌꺼기[()]가 돼 남게 되고, 그 업은 윤회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진아(도덕적인)’의 작용으로 한 행위는 자아의식[아상(我相), 무명(無明)]과 취착(取着)을 여읜 상태에서 모두를 이익 되게 한 행위이므로 행하기는 했으나 행한 바가 없는 행이어서 삶의 찌꺼기가 전혀 남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없다. 이것은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았으나 그 자취가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는 늘 함께하면서 가아를 통해 진아(참나)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가아가 하는 모든 것은 진아(참나)의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가아가 원리를 깨닫지 못해 망념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진아(참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가아가 원리를 깨닫는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지혜를 얻은 만큼 비례해서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깨달음의 대상은 명상(삼매)을 통해진아(참나)’를 만나고 늘 진아와 함께하는 것(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체득함으로써 진아(참나)가 늘 지혜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삼매에 들었다 할지라도 지혜가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은 잘못된 수행이다.“ - 혜산

    따라서 진아를 인식론적인참 자아의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아(自我)란 생각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한 의식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五蘊)나’라고 믿고, 온 인생을 그곳에 다 쏟아 붇는다. 이는 잘못된 자아의식, 이기적인 자아의식이며, 탐욕, 분노, 고집, 집착, 그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고정관념 또는 아상(我相, atta)이라 한다.

    그런데 아상(我相)이든, 이에 대립되는 무아(無我)이든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식론적인 의식으로 파악할 경우,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바꿀 수가 있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 수행을 통해 의식을 바꾸어버리면, 해탈하게 된다는 말이다. 해탈한 그 맑고 청정한 의식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의식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참 자아의식(참나)이다.

  

    그런데진아(眞我)’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그것은 외도(外道)들이 고정불변의 실체라고 고집하는 나[-아상(我相)-atman]를 지칭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연계해서 개발되고 주장된 진아(眞我), 불성(佛性), 여래(如來) 등을 일컫는다.

    「이러한 진아(眞我)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스스로 작용한다. 스스로 존재하므로 불생불멸하며, 스스로 작용하므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다. 이럴 경우의 진아(眞我-참나)가 브라만의 아트만(atman)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궁지에 몰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의 진아(진아-참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덩달아 같은 선상에 있는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일심(一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개발되고 주장된 이 문제를 우리가 일방적으로 떠안고 전전긍긍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념적으로든 교의의 측면으로든 이 문제를 시원히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불교의 위상이 자꾸 어려워질 것이다.

    , 진아(眞我),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사상이 아닌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같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설하신무아(無我)’는 진아, 불성이 아니란 말이다. , 석가모니께서는 몸도 물질일 뿐이고 마음이나 정신 등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참나’고,짜 나’고나’ 자체가 없다고 하셨다. 만상(萬象)은 조건에 의해서 끝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변하는 것일 뿐, 어떤 고정불변하는참나’가 있어서 이 몸이 죽고 썩어지고 나면 그참나‘가 지옥에 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 또 어떻게 살고 하는 그런 연속성 자체를 부정하셨다. 따라서 이런진아(참나)‘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외도라는 주장이다.

    부처님께서 정신ㆍ물질적인 현상은 조건발생이요, 그래서 연이생(緣已生)이요, 찰나생 찰나멸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법이라고 한다. 법은 연이생이고 찰나생이며 연이멸(緣已滅)이고 찰나멸이다. 이런 법을 부정하면 외도가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존재’라는 것은 제법이 조건생ㆍ조건멸 하면서 흘러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며 무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아, 불성은 비불교, 반불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본성 혹은 불성, 진아라고 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사상은 불성사상인데, 불성, 진아, ‘참나’사상 자체가 반불교사상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 반론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공성(空性)을 뜻하며, 그것은 무아(無我), 평등(平等)이요, 중도(中道)를 뜻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자비(慈悲)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이 적용된다. 단순하게 있다() 없다()를 떠난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체가 바로 공성(空性)인 것이다. 한 차원 높이면 진여불성, 진아가 공성이자 불교 근본교의의 핵심임에 틀림이 없다는 주장이다.

    초기불교의 무아사상(無我思想)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空性)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佛性)으로 인격화된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 불성사상은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의 조사(祖師) 가풍으로 자리 잡는다.

    헌데 부처님은 결코 존재론을 설하시지 않았다. 존재론은 결국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이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등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을 부처님은 번뇌의 온상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해,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찾아들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 불성(佛性), ‘참나(眞我)’ 등을 논하면서 자칫 존재론적 논리로 빠지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것이든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떤 경우라도 부처님 법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특히 대승불교는 무아론 연기설을 생명으로 한다. 반야ㆍ중관의 어디에도 마음을 실체시하고 진아를 설한 부분이 없다. 유식도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의 구조로 알음알이와 마음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밝히고 있지, 어디에도 마음을 실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래장 계열의 <열반경>에서도 12연기가 불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기ㆍ무아를 바탕 하지 않은 불성은 외도의 아트만설이 되고 말기 때문에 <열반경>에서도 연기가 바로 불성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꽃이라는 <화엄경>도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를 상징화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불교는 해탈ㆍ열반을 강조한다. 해탈ㆍ열반은 그러나 결코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해탈ㆍ열반은 그것을 실현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경전들과 아비담마에서는 해탈을 실현하는 세 가지 관문을 설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유위법의 「무상ㆍ고ㆍ무아」이다. 무상ㆍ고ㆍ무아 셋 중 하나에라도 투철할 때 유위의 세계에 대해서 염오하고 이욕 해서 해탈을 실현하고 그 때 체득되는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상ㆍ고ㆍ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못 박고 있다. 유위의 현상에 대한 「무상ㆍ고ㆍ무아」 외에는 모두 개념(산냐/sañña 혹은 빤냣띠/Pannatti)일 뿐이라고 초기경들과 아비담마는 확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自我)니 진아(眞我)니 불변하는 마음이니 하는 것은 모두 개념적인 것일 뿐, 실체가 없다. 특히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산냐(sañña)를 척파할 것을 철저히 강조한다. 이처럼 자아니 진인(眞人)이니 영혼이니 하는 이러한 개념적인 것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을 깨치고 그것과 하나 되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 놀음, 산냐 놀음일 뿐이라고 초기경들과 아비담마와 대승의 <금강경>과 유식까지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불변하는 법이란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깨달음이라는 정해진 법, 그리고 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정해진 법이 있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초월한 마음이나 진아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대승불교가 아니고 힌두교의 교의에 빠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진아’는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는 다르다. 영식(靈識-깨끗하고 신령스런 마음)이 독로(獨露-전체를 드러내는 것)한 상태를 진아라고 부른다. 아상(我相)이 떨어져나간, 영식이 독로한 무아, 무심의 경계는 하나의 본래심이 오롯이 드러난 경지로서 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이름도 모양도 없는 그 자리는 어디까지나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전제하고 있는 그 어떠한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따라서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을 성향(disposition) 또는 가능성(potential)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연기(緣起)와 공()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 불성이나 여래장이 어떤 영구불변의 고정된 본질 또는 자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향(性向) 또는 가능성(可能性)은 기능적 속성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성향이나 가능성은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되고, 그 기능은 존재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성향이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단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과 비판불교론자들이 비()불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사상을 모든 유정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으로 보면 안 된다. 다만 불성을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불성’과여래장’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대상이 존재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성과 여래장은 단지 가능성과 성향일 뿐이다.

    선문(禪門)에서 가르쳐 온참나’와참마음’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중국에서 불교 도입 초기에 중국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도교(道敎)의 체()와 용()의 개념 때문에 동아시아 대승불교에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 혼란의 자취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속성들의 존재 기반이 되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가 됐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는 불교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과학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상식에 의해 봐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그런 독립적 존재자는 없다.

    특히 현대 양자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대상이 소립자들로 돼있고 각 소립자들도 에너지와 다른 소립자들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은 오늘날의 상식이다.

    존재자는 기체가 없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각 속성들도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로부터만, 즉 연기의 관점에서만 그 존재가 이해된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 또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같은 실체 또는 기체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연기로 존재세계를 이해하는 불교나 21세기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실체나 기체의 존재로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불성, 여래장, 진아(참나) 등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다만 유명론적(唯名論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해야 연기론에 걸리지 않는다.

    참나’와참마음’의 개념에 실재성(reality)을 부과해서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체화 또는 실체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선문의 가르침을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 및 비판불교론자들의 논점에 취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二次指示語)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참나와 참마음을 해석하면 참나와 참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고, 또 아트만이나 영혼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가리키는 다양한 의식의 상태들은 모두 연기에 의해 생멸하며 자성(自性)이 없이 공()하기 때문에, 선문의 참나와 참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다른 학파들 안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개념은, 그것에서 실체성이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제거하기만 하면, 대승과 선불교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더 효과적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형이상학적 교리에 있어서도 대승과 선문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불성과 여래장,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모두 붓다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및 공()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불성, 여래장 및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實體)나 형이상학적 실재(實在)로 보면 안 되고, 단지 개념이나 이름으로만 봐야 한다.

    또한 남전(南傳)불교와 북전(北傳)불교를 모두 붓다의 일관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해석이 원효 이래 한국 불교의 이상으로 여겨져 온 회통불교(會通佛敎)를 구현하는데 일조(一助)할 것으로 기대한다.

    결론은 이렇다. 불셩, 여래장, 참나,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로서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겠다.- 홍창성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천부경 구절에 나오는 "본심(本心)은 본() 태양(太陽)이니 앙명인(昻明人)은 중()하고 천지(天地)와 일()하여서"란 내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아가야할 도리와 몸과 마음을 닦아 꾸준히 수행해서 모두가 건강하게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는 정진의 공간입니다.

여기서 본심(本心)이란? 본래의 자신을 나타내는 진아(眞我)의 상태로 참 나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 세상만물의 본질(本質)을 이루는 근본(根本) ()로 작용해서 물질(物質)의 본성(本性)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 나인 진아(眞我)는 창조신의 본자리인 대우주의 진공상태로 이루어진 무극(無極)과 같이 기()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게 존재(存在)하는 것입니다. 

세상만물은 모두 안() () () () () ()에 의해 그 느낌이 반응(反應)해서, 이때에야 헝클어진 마음이 수많은 허상(虛像)과 같이 나타나는 현상(現狀)을 의식(意識)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로써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은 각각 그 존재를 구성하는 새로운 인자로 화해서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면 점점 자라나게 되어서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가면 누구나 몸이 늙어져서 차츰차츰 쇄약 해지므로 결국은 병들어 죽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 실체(實體)를 이루었던 혼백은 모두가 본래 왔던 그 근본자리인 하늘과 땅으로 언제나 변함없이 그냥 그대로의 상태로 완벽하게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인연이 있는 새로운 사물로 다시 태어나서 생장해서 노쇠하여 병사하는 윤회작용을 끝도 없이 반복한다 해도 결코 그 근본 바탕을 이루는 참 기()는 조금도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이룬 근본 바탕은 결코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어서, 참마음을 나타내는 진아(眞我) 역시 조금도 변하지를 않는 것이어서 절대 부동(不動)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만물 중에서 인간들이 그 모습과 본성이 창조신(創造神)과 가장 가까워서 매우 지혜롭고 도덕적인 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아(眞我)를 이루는 참 기()를 가장 옹글게 불어넣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은 우리들에게 진아(眞我)를 이루는 근본 기(根本 )를 후박(厚薄)과 청탁(淸濁)과 선악(善惡)의 개념이 따로 없이, 아주 평등(平等)하고 균등(均等)하게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 본성이 좋고 나쁜 사람이 따로 없으며 본래 잘나고 못난 사람도 없고, 깨달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까지도 결코 없는 것입니다.

때 묻고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중생(衆生)과 깨끗해서 밝은 삶을 살아가는 부처라 불리는 불()이 본래 서로 다르지를 않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衆生)이 곧 부처인 것이고 부처가 곧 중생(衆生)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판단(判斷)해서 말하는 것들은 모두 그 자신(自身)의 안() () () () () ()에 의해서 비춰진 허상(虛象)만을 보고서, 갖가지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그 가치(價値)를 평가(平價)해서 그저 나타내고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 펼쳐진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중에 오직 근본마음을 이룬 진아(眞我)만이 진정(眞正)한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므로 심() () () ()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 비춰진 허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로 우리들의 마음과 몸에 일어나서 느껴지는 수많은 고통과 병까지도 결코 실체가 있으면서도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느끼지를 않는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참 나인 진아(眞我)를 깨달아서 진정한 밝은 마음을 얻어야만 갖가지 수많은 번뇌를 떨쳐낼 수가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되는 수많은 고통을 쉽게 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제부터라도 항상 꾸준한 정신수행을 통해서 진정한 참 나를 찾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를 바르게 이루어서, 급기야 밝고 지혜로운 품성을 지닐 수 있는 크게 밝은 사람인 환인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정신공부를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밝은 마음을 쉽게 찾지를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은 모두 이들이 너무 목적을 이루고자하는 욕심이 지나쳐서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참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지를 못하고 점점 더 깊이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진아(眞我)의 참 모습은 본래 아주 현()하면서도 매우 밝은 것이나, 더욱더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서 잘 드러내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번뇌가 점점 쌓일수록 자신의 참마음을 더욱 느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점점 참마음을 찾기가 힘이 들어서 갈수록 더욱 컴컴한 어둠의 공간을 헤매게 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계속 번민이 쌓여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부려서 더욱 많이 취하려는 집착에서 되도록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이 정신(精神)을 집중해서 부단하게 노력해야만 비로써 진아(眞我)의 본자리가 밝게 드러나 보여서 쉽게 접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참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조식(調息)을 실시하고 정신수양(精神修養)을 통해서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더욱더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을 실천하는 일이 아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수도인(修道人)이라 부르며 매우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수도(修道)를 통하여 진정(眞正)한 참 마음인 진아(眞我)를 찾게 된다면? 마음과 행동이 양()과 음()의 극()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를 이루어서 조화로운 생활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야 비로써 바른 지혜(智慧)가 자라 나와 세상의 갖가지 이치(理致)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能力)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참마음인 본심(本心)은 본래 태양(太陽)과 같이 크게 밝은 것이기 때문에, 아주 대명(大明)하여 매우 밝게 비치는 것이므로 크게 대환(大桓)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밝지를 못해서 매우 무명(無明)한 이유는? 사람들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고 무리하게 힘을 쓰기 때문에, ()과 음()의 욕심(慾心)에 크게 사로잡혀서 본래 가지고 있던 밝은 마음을 크게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욕심(慾心)을 많이 가진 자()를 대단히 밝은 사람이라고 칭()해서 오히려 이들을 크게 떠받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자()들은 대부분 자신만을 위한 탐욕(貪慾)에 크게 사로잡혀서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가득 부리므로,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가리지를 않고 무자비하게 행동해서 타인의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더욱 많이 탈취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명예(名譽)와 물질(物質)을 서로 균등히 나누려하지를 않기 때문에, 서로 간에 화합(和合)을 이루지를 못해서 결국 수많은 반대 세력을 유발하여 서로가 더욱 크게 대립(對立)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려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아주 악랄한 불순세력으로서, 이들은 매우 어둡고 엉큼한 흑심(黑心)을 지닌 악인(惡人)에 불과해서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선()하고 후()하며 청()한 사람을 과거 우리 조상들은 매우 크게 존경하였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아주 어리석다고 비하(卑下)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자신의 심신이 매우 고달플 때는 자신보다 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매우 시기하기가 쉬워서 이들을 크게 비평(批評)해서 반대하게 되고,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하늘에 탓해서 무고한 신을 아주 원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교묘히 꾸며서 속이려는 마음이 매우 많아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일을 유발하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반대하면 이들을 이단이나 사탄이라고 모함해서 매우 경계(警戒)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고한 천신(天神)을 팔아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하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게 만들어서 사회질서와 화합을 깨치기 때문에, 결국 세상만물까지도 매우 어려운 고통 속에 빠지게 만드는 소인배에 불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마음이 크게 밝은 사람은? 밝은 마음인 양심(陽心)도 없고 어두운 마음인 음심(陰心)도 없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마음에 중심(中心)을 유지해서 완전한 중정(中正)의 상태를 이루므로 항상 매우 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마음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아서 착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고 탁()하지도 않아서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으며, ()하지도 않고 박()하지도 않아서 너그럽지도 않고 옹졸하지도 않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우리들 서민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밝은 사람은 먼저 촉감(觸感)으로 느껴서 생각하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끊으므로 금촉(禁觸)하고, 지극(至極)히 하나로 집중(集中)해서 마음이 감동(感動) 될 수 있도록 지감(至感)하는 생활을 실천합니다. 

숨을 고르게 쉬어서 사기(邪氣)에 저촉(抵觸)되는 일이 없게 예방할 수 있는 조식(調息)을 행하므로 수시로 몸과 마음을 단련해서 항상 맑은 정신(精神)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밝은 사람은 몸을 건강하게 단련해서 신강(身康)하게 만들고, 마음을 평안(平安)하게 유지해서 심평(心平)하게 만들며, ()를 고르게 단련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해서 안정시킬 수 있도록 기화(氣和)하고, 정기(精氣)를 낭비하지 않고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보정(保精)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본심을 깨달아 통성(通性)하므로 참 나인 진아(眞我)를 찾고, 지명(知命)하여 창조신의 참뜻을 깨달아서 행하며, 합력(合力)해서 힘을 적당히 길러서 지니고, 남을 넓게 이해해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유 있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밝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올바른 행동(行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어진 마음을 길러서 적당한 덕()을 갖으며, 똑똑해서 뛰어나지도 않고 무지(無智)하여 어리석지도 않는 올바른 마음과 지식(智識)을 터득해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지혜(智慧)를 갖고 있어야만, 진정(眞正)으로 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은? 천지(天地)의 운행(運行)과 기후변화(氣候變化)의 상태를 잘 파악해서, 몸과 마음이 천지(天地)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운(氣運)의 변화(變化)에 일치(一致)하는 슬기로운 생활을 실천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일에 잘 적응(適應)해서 잘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양생(養生)의 법도(法道)를 바르게 실천(實踐)해야만 심신(心身)을 온전하게 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밝은 사람은 언제나 천지(天地)와 합일(合一)하는 생활(生活)을 실천하므로, 급기야 굳게 닫쳐있던 몸과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서 올바른 정도(正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출처 : 새마갈노

 

**眞我[편집]

무아에 반대되는 걔념. 일부 불교도및 종교인들이 참 나. 참 본성의 의미라고 주장하는 개념이며, 쉽게 말해서 수행을 하다 보면 진정한 자아를 찾을수 있으며, 비록 육신이 사라져도 그 안에는 진정한 나 자신을 의미하는 에너지가 남아있다고 하는 가설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불교에서는 잘못된 불교 개념이라 이를 부정하고 있는데, 애초에 진아는 불교가 생겨나기전에 인도에서 존재했던 '아트만'의 개념. 즉 브라만의 교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변의 법칙이 없다는 불교의 교리인 무아설과 크게 충돌하기에 이런 진아를 주장하는 불교도들에 대해, 불교가 아닌 브라만교를 전파하고 있다라며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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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Anatman) 범어 anatman 혹은 nir-atman의 번역이다. 비아[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존하며[], 자체자로서[] 지배적인 능력을 지닌 주체[]로 생각되는 본체적인 실체를 의미한다. 무아는 불교의 근본 교리로서 삼법인의 하나인 무아인[無我印]에 해당한다. 이 제법무아인에서 아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의 뜻과는 구별되는 내용이 있다. 인도에선 예부터 브라만교의 교설에 의해 아트만[]사상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일차적으로 그런 의미의 아의 관념을 부정한 것이다. 나라는 관념, 나의 것이란 관념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아는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 방식이었다.

팔리어 성전에서 말하는 무아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의미는 내가 아니다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불교에선 결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의미. 우파니샤드철학이 아를 실체시하는데 반해 불교는 이런 견해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존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객체적이고 기능적인 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다만 나의 것이란 관념의 포기를 가르친다.

잡아함부 경전 권3에는 오온의 하나 하나가 고이므로 비아이다. 무상이므로 무아라는 교설이 있다. 이것은 아가 아닌 것을 아로 간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신체를 나의 것, 나라고 간주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유부에선 인무아[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했으나 법무아[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이 확립되어 대승불교로 계승되면서 인법의 2무아설이 확립된다. 이때 법무아는 모든 인식의 대상은 인연에 따라 나타난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자성은 없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선 이 무아설이 공관[空觀]과 연관되어 인무아. 법무아. 아법 2을 설하고 공이란 관념조차 초극해 버리는 사상[空空]으로 발전한다.

무아(無我) 불교에서의 무아란 모든 사물이 서로 의지하며 지탱하고 있다는 존재의 진상을 뜻한다. 흔히 무아라고 하면 사심(私心) 또는 아욕(我欲)이 없는 것이라든지 무아몽중(無我夢中)등으로 쓰이며 무엇에 몰두하는 것을 말하나 그것은 불교에서의 무아와 의미가 다른 것이다. ()라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실체의 뜻이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변하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이 아()이며 어떤 무엇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존재가 완전히 끝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란 그러한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의 존재론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를 돌아보면 어느 하나도 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무아라는 존재의 진리를 여실히 알았을 때에만 우리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자애를 품을 수 있다.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아나트만(Anātman),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나딴(Anattan)이다. 무아(無我)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사상에서는 상주(常住)하는 유일의 주재자로서 참된 나인 아트만(ātman)을 주장하였으나,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결코 실체적인 나〔)〕가 아니며, 그러한 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무아설은 아트만을 불변의 실체로 인정하는 기존의 인도 사상과는 구별되는 불교 고유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는 부정하면서도 아트만의 상주설(常住說)과 함께 인도 사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윤회설을 수용하고 있다. 불교의 시각에서 윤회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범부의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무아윤회(無我輪廻)’라고 부른다.

불교의 무아윤회는 윤회의 주체로서 중유(中有: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 개념을 상정하였으며,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이르러 아뢰야식(阿賴耶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으로 대체되었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중유의 상속’ 또는 무상(無常)오온(五蘊: )의 상속’으로써 윤회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즉 중유라는 개념이 윤회의 주체를 연속시키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업력(業力: 선악의 행위가 남기는 잠재력) 또는 잠세력(潛勢力: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세력)의 상태로 있는 오온이다. 결국 중유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온갖 번뇌와 업에 의해 오염된 온()에 의한 윤회’를 의미한다.

아뢰야식을 장식이라 하여 인간의 심층의식으로 상정하였던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았다. 이는 기존의 상속이론보다 진전된 무아설의 일환이다. 아뢰야식은 업의 잠세력을 의미하는 습기(習氣)일 뿐이며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무아적 존재이다.

불교의 무아설은나〔)〕’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불교 수행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나〔)〕’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법무아는 소승(小乘)의 수행자들이 갖는 그릇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의 법에 대하여 실아(實我)가 있고 실법(實法)이 있다고 그릇 생각하여, 갖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상주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실은 모두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가법(假法)일 뿐, 따로 그 현상들을 있게끔 하는 법아(法我)가 없는 까닭에법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무아는 무소득(無所得)과 무가애(無罣碍)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무소득이란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소유물〔我所〕에 대하여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고정불변할 것을 원하여 이를 집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이 없는 것이 무소득이다. 무가애는 무애(無碍)라고도 하는데, 장애와 정체됨이 없이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것은 무소득의 무집착이 진전하여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중생의 마음은 모든 현상을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 추하다’ 등으로 분별해서 그 2분의 한쪽을 회피하고 다른 한쪽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계의 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회피와 집착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어디에 집착하거나 무엇을 회피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불안하다. 그래서 고이다.

“비구들아, 갠지스 강의 물결을 보아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비구들아, 어떻게 물결에 실체와 본질이 있겠는가.

몸은 물결

느낌은 물거품

생각은 아지랑이

의지는 파초

인식은 허깨비.

이것이 세존의 가르침이다.” <상윳타 니카야 22 : 95 泡沫>

‘나’라는 말은 5온의 일시적인 화합에 붙인 지칭 혹은 명칭일 뿐, 5온에는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다만 갖가지 조건으로 형성되어 매 순간 생멸을 거듭하는 몸-마음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차마(差摩)라는 비구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여러 비구가 병문안을 왔다.

“어떤가, 견딜 만한가?”

“어찌나 아픈지 견딜 수가 없네.”

그때 한 비구가 그를 위로하고자 말했다.

“세존께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차마는나는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여러 비구들이 따지고 들자 차마가 말했다.

“벗들이여, ‘나’가 있다는 것은 이 몸이나’라는 뜻이 아니다. 또 감각이나 의식을 가리킨 것도 아니다. 또 그것들을 떠나서 따로나’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벗들이여, 예를 들면 꽃의 향기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꽃잎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다고 하겠는가. 줄기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이 맞다고 하겠는가.

또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역시 향기가 꽃에서 난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몸이나 감각이나 의식을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것을 떠나서 따로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는 그것들의 통일된 형태를나’라고 하는 것이다.”<상윳타 니카야 22 : 89, 差摩>

그때 비구가 천타(闡陀)에게 말했다.

“몸은 무상하고, 느낌 · 생각 · 의지 · 인식도 무상하다.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 열반은 적멸이다.”

<雜阿含經10권 제7>

“비구들아, 죽음을 면하려거든 네 가지 근본 진리를 사유하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 이것이 첫 번째 근본 진리이니, 사유하고 수행하라.

모든 의식 작용은 고이다. 이것이 두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 이것이 세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 이것이 네 번째 근본 진리이니, 다 함께 사유하라.

비구들아, 이 네 가지 근본 진리를 사유하라. 왜냐하면 그것으로 태어남 · 늙음 · 병듦 · 죽음 · 근심 · 슬픔 · 번뇌 등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增一阿含經23, 增上品4>

무아(無我)는 독립된개체적 자아’라는 생각이 소멸되고, 에고가 죽고, ‘/나 아닌 것’의 2분법이 허물어져 온갖 분별이 끊긴 상태이다. ① 모든 의식 작용은 무상하다(一切行無常), ② 모든 의식 작용은 고이다(一切行苦), ③ 모든 현상은 무아이다(一切法無我), ④ 모든 번뇌의 소멸이 열반이다(滅盡爲涅槃) 4법인(法印)이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고, ()특징’이라는 뜻이다. 4법인에서 ②를 빼고 3법인이라 하고, 4법인에서 ④를 빼고 3법인이라고도 한다.

안팎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생멸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그 현상들의 진행을 모두 무상 · · 무아라고 통찰하는 게 불교의 길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 · · 무아라고 거듭 알아차리고 거듭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그것들의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무상 · · 무아를 열반으로 가는 세 관문이라 한다.[다움 백과]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अनात्मन् anātman, anatman, 팔리어: anattā) 혹은 니르아트만(nir-ātman)의 번역어로 비아(非我)라고도 한다. 불교의 근본 교의 중 하나로 처음에는 자기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서 집착함을 금하는 실천적인 입장에서 주장되었다. 즉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후에는 영원독립하며 주재적인 자아(아트만)의 실재를 주장하는 브라만교의 교의에 반대하여 사람은 5(五蘊)의 집합이요, 생명의 주체인 실아(실재로서의 자아)는 없고 또한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써 생긴 것이며 고정적인 본성은 없다고 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게 되었다.

무아와 무아설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 ·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아(" · 아트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 즉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수행, 즉 도제(道諦: 팔정도, 37도품, 6바라밀 등의 수행)가 실제로 열반(무위법)에 이르게 하는 길이지, '우주가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영원한가 아닌가? (, 아트만)라고 하는 실체(무위법)가 육체(유위법)와 어떻게 다른가?' 등과 같이 실체(무위법)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논하는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마치 독화살에 맞은 상태에서 독화살과 독을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독화살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지는 태도와 같아서, 고타마 붓다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로서 설명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無我 · 무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 무상")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이상(理想)인 열반(涅槃)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한다.

인무와와 법무아

대승불교의 교의에서 무아는 크게 인무아(人無我, 산스크리트어: pudgala-nairātmya)와 법무아(法無我, 산스크리트어: dharma-nairātmya) 2무아(二無我)로 나뉜다.

인무아(人無我)를 아공(我空)이라고도 하며 법무아(法無我)을 법공(法空)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칭하여 2(二空)라고 하는데, 2(二空) 2무아(二無我)와 같은 뜻이다. 2(二空) 또는 2무아(二無我)아법2(我法二空)이라고도 하며,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이 때문에 인법2(人法二空)이라고도 한다. 2(二空)의 교의는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교의 또는 사상이 되었다.

이치로서의 2무아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아집(我執)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법무아(法無我)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유위법(有爲法)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경지로서의 2무아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해 간다는 입장에서는 2무아(二無我)는 실제로 증득될 수 있고 또한 증득되어야 하는 특정한 경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유가유식파의 경우, 이 종파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에 따르면 이무아(二無我) 중 인무아의 경지에 다다르면 아집인 번뇌장이 소멸되어 열반(해탈)이 성취되고, 법무아의 경지에 다다르면 법집인 소지장이 소멸되어 보리(반야 · 대지혜 · 완전한 깨달음)가 성취된다.

《성유식론》에서는 이와 관련된 수행 단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크게 자량위(資糧位) · 가행위(加行位) · 통달위(通達位) · 수습위(修習位) ·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오위 · 五位")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네 번째인 수습위는 다시 십지(十地)의 열 단계로 나뉘는데, 십지는 극희지(極喜地) · 이구지(離垢地) · 발광지(發光地) · 염혜지(焰慧地) · 극난승지(極難勝地) · 현전지(現前地) · 원행지(遠行地: 7) · 부동지(不動地) · 선혜지(善慧地) · 법운지(法雲地: 10)이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아집인 번뇌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7지인 원행지(遠行地)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제8지부터는 아무아의 경지에 있게 된다. 그리고 법집인 소지장은 수습위의 십지 중 제10지인 법운지(法雲地)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데, 완전히 제거되면 다섯 단계("오위 · 五位")의 마지막인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게 되고 해당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비로소 부처가 된다.

유가유식파는 열반과 해탈은 동의어로 사용하는 반면, 열반과 보리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 유가유식파의 문맥에서 열반(또는 해탈)은 아집인 번뇌장이 완전히 제거된 인무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리는 법집인 소지장이 완전히 제거된 법무아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열반을 진해탈(眞解脫: 참다운 해탈)이라고도 표현하며 보리를 대보리(大菩提: 큰 깨달음 · 완전한 깨달음)라고도 표현하고 있다.[위키백과]

 

無我론/한자경

[잡아함경]<유아경>에서 붓다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내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찌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短見이다.”

붓다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 다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恒常된 것에 대해서만 상이나 무상,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有我론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無我론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註-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아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고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성자 도봉별곡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핵심은 무아/공성일 것이다.

무아(無我)라면, 해탈하는 자는 누구인가? 무아(無我)이기에 해탈하는 ""는 없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해탈하는 자가 없다면, 해탈이란 과연 뭔가? 무아(無我)이기에 실체로써의 해탈하는 ""는 없고, 다만 마음이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해탈이라고 명칭한다.

해탈이란 마음에서의 일이다.

실제 해탈되는 ""는 없다. 다만 마음의 변화일 뿐... 그래서 12연기법에서 첫번째가 바로 무명이다. 무명---명색-육입-------노사. 지혜가 생겨 마음 속의 무명無明이 다 사라진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은 마음에서의 일이지, 실제로 어떤 실체, 즉 자아/영혼/에고가 있어서 그게 해탈한 게 아니다. 하지만, 세속법에 따라서 말할 때는 "저 분은 해탈했다. 저 자는 해탈했다"라고 말한다. 왜냐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세속법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즉 진정한 진리인 진제의 측면에서 보면 해탈된 ""는 본래 없다. 일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도 역시 세속법과 진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해탈된 ""는 본래 없다.

마음이 무명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이다. 무명에 빠진 우리 중생들의 마음엔 항상 나/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헛된 믿음이 바로 무명이고, 이 전도몽상/착각이 완전히 부숴진 상태가 바로 해탈이다.

/자아/영혼이 정말로 있다면, 오히려 결코 해탈은 불가능하다.

/자아/영혼은 영원불변해야 한다. 변하는 것은 나/자아/영혼이 될 수 없다. 이게 "" "자아" "영혼"의 개념이다.

변한다면 나/자아/영혼은 두개가 된다. 또는 그 이상이 된다. 두개나 이상이 된다면 어느 게 과연 나인가? 그러므로 나/자아/영혼은 오로지 하나여야 한다. 하나라는 의미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면 해탈이란 결코 얻을 수 없다. 중생은 영원히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체로써의 나/자아/영혼은 없다. 다만 그런 게 있다는 그 착각이 무명이고, 그게 박살나면 해탈이다. 그럼 참나/진아를 찾으면 해탈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과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을까? 만약 정말로 진아/참나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는 결코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무아(無我)와 참나/진아는 서로 상극이지, 같은 의미가 결코 아니다. 또 진아/참나가 있다면, 12연기법 역시나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참나/진아와 연기법은 상극이다.

연기법의 의미는 그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발생되기에 그 어디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없고, 거짓나도 없고, 참나도 없으며, 상위자아도 역시 없다. 다만 마음에서의 일이다.  나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마음에서의 일이요, 거짓 나, 참나가 있다는 것도 역시 마음에서의 일이다.

참나, 진아 VS ()

참나/진아와 공()은 전혀 다른 의미다.

참나/진아는 뭔가 실체가 있다는 유()의 의미이고, ()은 그 어떤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의미다.

깨달아야 할 것이 공()이고, ()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공()이 곧 해탈의 문이라, 공해탈문이라고 한다.

해탈의 문이 바로 공()이다. 그 뭔가 어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한 해탈은 결코 성취할 수 없다.

그 뭔가가 있다고 여기는 게 바로 무명이니까.....

/자아/영혼/참나/진아가 없는데, 모든 작용을 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그게 바로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하셨다.

심위법본....... 유식학파라면 진아/참나라는 얘기가 쬐금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있겠으나,

중관학파라면 코딱찌만큼도 먹히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중관학파가 최고이다. 반야심경, 금강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에 중관사상이 담겨져 있다. 반야심경, 금강경에는 참나/진아가 있다는 소리는 결코 없다.

불교에서 ""의 정의는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이 몸과 마음 즉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명칭/호칭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의 정의이다. ""라는 것은 그저 호칭/명칭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나/진아가 있을 리 없고, 상위자아니 고차원적인 자아니...이런 것도 역시 있을 리 없다.

명칭/호칭도 역시 실체가 없는 거짓인데, 호칭/명칭에 뭔 상위호칭이니, 고차원적인 명칭이 있겠는가?

금강경에 ""가 있다고 나와 있는가?

금강경 17장의 제목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이다. 구경무아분[究竟無我]의 뜻이 뭔가? 궁극적으로 나는 없다는 뜻이다.

참나든 진아든, 상위자아든 고차원적인 자아든.....그런 게 결국 없다는 부처님 말씀이다.

또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도 없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저 이름 뿐이다> 이것이다.

""라는 것은 그저 이름 뿐인 것이다. 호칭/명칭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실체로써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해 보면 답이 나온다. 내 마음 속에 나/참나/진아/상위자아/고차원적인 자아, 이런 게 있던가?

마음속에 뭔가 어떤 실체가 있던가?

그런 걸 발견할 수 있는가?

어디에 머물고 어떤 모습인가?

마음은 비어 있다. 다만 빈 채로 앎의 기능이 있을 뿐.... 그래서 마음/의식의 정의가 바로 앎, 즉 식()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들여다봐야 나도 없고, 진아/참나도 없고, 상위자아니, 고차원적인 자아니....이런 것도 역시 없다.

마음이 마음을 바라보면, 마음이 사라진다. 본래 텅 비어 있으니까....

자신의 마음을 관해보자. 거기서 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 [자연치유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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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불교

지리상으로 인도의 권역(圈域)에서 전개된 불교를 인도불교라고 하며, 인도의 고대언어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전수된 불교를 통칭하여 인도불교라고도 한다. 인도불교의 역사는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그 중 제1단계인 흥륭기(興隆期)는 초기불교시대라 하며, 제2단계인 분파기는 부파불교시대, 제3단계인 발달기는 대승불교시대이고, 제4단계인 쇠퇴기는 밀교시대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인도에 새롭게등장한 신불교 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으며 그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불교성립 배경

1. 역사적 배경; 고대 인더스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하여 모헨조다로와 하랏파지역에 번성했던 토착민의 문명은 아리얀(a-ryan)족의 도래와 함께 쇠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얀족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키스탄(Turkestan) 등에 머물던 유목민으로서 기원전 17, 18세기경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입했다. 아리얀족은 이미 철기문명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드라비다족을 흡수, 지배하게 된다. 아리얀족의 도래를 계기로 하여 인도대륙은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고, 농업의 번성과 함께 농산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과 농경용 기구 또는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수공업도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소도시들이 늘어나고 그를 기반으로 새롭게 대두된 자산가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제군주가 출현하여 16대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6대국 중 대부분이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각 나라의 이름은 앙가, 마가다, 카시, 코살라, 밧지, 말라, 체티, 밤사, 쿠루, 판찰라, 맛차, 수라세나, 앗사카, 아반티, 간다라, 캄보자 등이다. 16대국의 통치형태는 군주정치와 공화정치, 둘로 나누어진다. 밧지국과 말라국은 부족 공화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비롯한 대부분의국가들이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치 형태의 나라였다. 그 중에서 특히 코살라와 마가다가 중심 세력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었다. 도시국가들 간의 정복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마가다국의 빔비사라(기원전 582~554년 재위) 왕은 작은 나라들을 정복, 병합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국가의 형성기에 인도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노예화시키고 아리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민족의식은 독특한 사회계급 제도인 카스트를 성립시켰는데, 이 제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4성(姓) 계급은 다음과 같다. 브라만 : 사제계급.크샤트리야 : 왕족, 귀족, 무사 등의 지배계급.바이쉬야 : 상인, 평민계급.슈드라 : 노예계급. 또한 아리얀족의 종교문화는 지배적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아리얀족의 종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의 성전인 4종의 주요 베다 중에서 『리그베다』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도의 모든 성스런 지혜의 원천으로서 첫째 가는 문헌으로 꼽힌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아리얀족이 드라비다족을 비롯한 토착 원주민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그들의 종교관을 비롯한 관습과 생활문화 전반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쉬바 신앙과 요가행법이다. 특히 요가는 불교에도 채용되어 수행법으로서 널리 쓰였다.

 

2. 사문교단;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가 무너지고,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전통적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혁신 사상가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숲 속에서 수행하였다. 그들은 사문(沙門, sraman), 즉 유행자(遊行者)로 불렸는데, 본래 여기저기 방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이를 뜻한다. 사문(沙門)들의 수행공동체를 상가(samha, 僧伽)라고 한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사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이나교의 개조로 꼽히는 마하비라도 그와 같은 사상적 조류 속에서 성장했다. 사문의 사상은 유물론, 불가지론, 영원 불변론, 일부 불변론, 유한 무한론, 회의론, 원자론 등 수백 종에 이르는 유파를 형성하여, 가히 사상의 홍수시대라 불릴 정도였다. 사문들은 정주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 모양으로 한 벌의 옷만을 걸치거나 나체 상태로 털투성이의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기도 했으며,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길게 기르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혼자서 수행하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이루기도 했으며, 스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제자들이 함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기도 하였다.이처럼 다양한 양태를 보였던 사문들의 공통점은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교의 이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가혹하고 불평등한 카스트제도에 반기를 들었고, 각종 의식과 제례, 동물 희생제 등에 반대하였다. 불교와 자이나교 또한 이러한 사문에 의한 반(反)브라만교 운동의 하나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세속적인 욕망을 떨치고 해탈이라는 초월적인 희구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고행했던 사문은 오랫동안 불교교단에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사문이란 열심히 수행하는 이로서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정진하여 마음의 삼매에 이른다고 한다. 붓다는 사문의 일원으로서 수행을 시작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중도사상을 표방하여 고행수행을 부정하였다.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해탈도 얻지 못한다는 붓다의 깨달음은 새로운 사상의 정립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6세기경에 사문들은 마하비라를 따르는 자이나교단과 고타마 붓다를 따르는 붓다교단으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붓다가 등장하기까지 사문들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교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체계적인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서 정립된 것은 마하비라를 중심으로 한 자이나교단이 최초였다. 붓다 또한 자이나교단의 조직체계를 따라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 발전하는 데는 그다지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붓다 당시의 여러 사상은 서로 간의 대론을 통해서 자웅을 겨루었고 그 흥망이 가려졌다. 그러한 와중에 붓다교단 또한 타 학파와 논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해 나갔다. 붓다의 교법은 사회ㆍ정치적 상위계층에게도 매력적인 사상으로 수용되었으며, 특히 빔비사라 왕의 재위 연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경전 곳곳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빔비사라 왕의 불교 외호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붓다와 제자들

타마 붓다(Gautama Buddha)의 생존 연대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지만, 대략 기원전 500년경에 생존했던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데는 이설이 없다. 그의 일생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경전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기원전 560년경, 현재의 네팔 남부지역에 자리한 룸비니에서 탄생한 싯다르타는 석가(sa-kya) 부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고타마였으며,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목적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싯다르타는 극진한 보살핌 아래 왕궁생활을 영위했지만, 결국 세속의 삶을 버리게 된다. 그의 출가 동기는 ‘사문 유관(四門遊觀)’이라는 일화로 전해지듯이, 생로병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고자 그의 나이 29세 때 왕궁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싯다르타는 약 6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스승들에게 고행과 명상수행을 배워 익혔다. 베살리(Vesa-lI-)에서는 알라라 칼라마의 지도로 명상법을 배웠고, 라자그리하(Ra-jagr톒a)에서는 웃다카 라마풋타 아래에서 수행했다. 싯다르타는 극심한 고행으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였으나 진리를 깨칠 수 없었다. 그는 고행을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보리수 아래 고요히 앉아서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 든 싯다르타는 정각(正覺)을 이루고 붓다(부처)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이 깨달음은 인류세계의 위대한 인본주의 종교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이 인간 이외의 어떤 절대자에 귀의하여 믿음을 요구하지만, 싯다르타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깨달아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싯다르타는 가장 먼저 이전에 자신과 같이 수행한 다섯 비구를 찾아 가서 첫 가르침을 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수행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붓다의 이 첫 가르침을 불교사에서는 초전법륜이라 하기도 하고 중도 대선언이라 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면 쾌락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떠난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첫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때부터 싯다르타는 붓다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붓다는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사성제를 설하였다. 붓다에게서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통찰력과 깨달음, 지혜와 광명을 얻게 된 수행자들은 붓다에게 귀의하게 된다. 붓다의 첫 제자들은 나중에 5비구로 불리는데, 아갸타카운디니야, 아슈와지트, 마하나만, 바드리카, 바슈파 등이었다. 그들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 즉 불과 법에 귀의한 2귀의자로서 제자가 되었으나, 그 이후의 제자들은 불, 법, 승, 3보에 귀의하는 3귀의자로서 교단의 구성원이 되었다. 점차로 늘어가던 교단의 수행자가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에 이르렀을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아, 떠나라.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세간을 사랑하기 위해,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애정과 안락을 위해,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아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도리에 맞고 언설이 잘 정돈된 법을 설하라.”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도 세심하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특히 붓다는 설법할 때마다 다른 이를 위해서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날 것이라는 요지의 가르침으로 인과의 법칙을 강조했다.

 

2. 교단의 성립과 발전

붓다 당시의 교단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가(僧伽)로 유행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가자들은 무소득(無所得)을 기본으로 하는 무소유 생활을 실천하였고, 어떠한 재물이나 가축, 노예 등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단의 발전을 바라는 재가자의 보시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으며, 붓다에게 귀의하는 자산가들이 기부한 토지와 금전을 토대로 하여 여러 곳에 정사와 사원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도 교단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카쉬야파 3형제의 귀의이다. 우루빌바(Uluvilva-) 카쉬야파는 500명의 결발(結髮) 외도(jatㆍila)들을 이끌던 수장이었고, 나디(Nadi) 카쉬야파는 3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으며, 가야(Gaya-) 카쉬야파는 2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는데, 이 세 형제가 나란히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그들이 함께 이끌고 온 제자들이 모여 불교교단은 그야말로 대도약을 하게 되었다. 둘째, 빔비사라(Bimbisa-ra) 왕의 외호이다. 붓다의 생존 당시에 마가다국의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15세에 즉위하여 16세에 불법에 귀의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투르의 왕위 찬탈로 인해 유폐된 뒤 죽음을 맞았던 빔비사라 왕은 재위 당시에 불교만 후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교단에 대해 우호적으로 베풀었던 것은 교단의 발전에 크나큰 힘으로 작용했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머물 때, 빔비사라 왕은 12만 명에 이르는 브라만과 장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나서 귀의했던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 때 설법을 들었던 12만 명 중에서 11만 명이 법안(法眼)을 얻었고, 1만 명이 붓다에게 귀의했다고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셋째, 최초의 승원(僧園), 죽림정사의 설립이다. 라자그리하에 세워진 죽림정사는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에 자리함으로써 포교의 본거지로서 큰 역할을 다하였다.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세울 때, 그 입지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 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며,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 그 후로 이와 같은 입지가 바로 승원을 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승원은 구조적으로 정사(精舍), 평부옥(平覆屋), 전루(殿樓), 누방(樓房), 굴원(窟院) 등 다양한 양식을 따랐지만, 그 중에서 정사와 굴원이 가장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 정사는 평지에 벽돌이나 돌로 건립되었고, 굴원은 고원의 암석지대에 인공적인 굴을 뚫어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굴원과 정사의 흔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초기교단의 원칙은 유행생활이었지만,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서 정주생활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정립된 교단의 구성원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식차마나와 우바새, 우바이 등으로 세분되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교단은 다양한 구성원 간에도 상호 민주적이며 평등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러한 교단 운영법은 붓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일찍이 붓다는 선언했었다.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승가를 보살핀다’라든지 ‘비구 승가는 나의 지휘 아래 있다’라는 생각은 없다.” 붓다 당시에도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교단이 운영되지 않았듯이, 후대의 불교교단사에서도 교단 구성원의 자율과 화합을 통해서 유지되었던 것은 당연한 추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는 5비구의 출가를 계기로 승가(僧伽)를 형성하였고, 이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여 비구니를 포함한 승가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재가 신도들의 시주와 귀의로 우바새, 우바이도 포함된 사부대중(四部大衆) 공동체를 붓다의 교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교단의 구성원은 흔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보고 있다.

 

3. 경전의 결집

붓다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evamㆍmaya- srutam. 如是我聞).” 이와 같은 서두로 그들은 전법을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전편찬은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결집은 합송(合誦), 합주(合奏), 집회(集會)라고도 한다. 결집의 원어인 상기티(samㆍgI-ti)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읊는 것으로,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여 불설(佛說)을 확정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에서 결집은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경전편찬을 위한 집회가 결집이다. 경전은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즉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삼장은 경장, 율장, 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삼장의 형식으로 불교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경전은 서기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불교경전은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1차 결집;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하자 몇 가지 우려가 있었다. 즉 그의 가르침이 차츰 없어진다든가, 잘못 전해진다든가, 이론(異論)이 제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모여 각기 구전으로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하고 가르침을 정리할 회의, 즉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의 교외에 있던 칠엽굴(七葉窟)에서 이루어졌는데, 마하카쉬야파(maha-ka-syapa)의 주도 아래 아난다(a-nanda)가 경장을 암송하였고, 우팔리(Upa-li)가 율장을 암송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편찬된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그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고급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중을 상대로 한 교화 설법에서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경전 결집, 즉 제1차 결집 당시에 사용된 언어 또한 마가다어라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경전 언어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팔리(pa-li)어 속에 몇몇 잔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결집; 기원전 383년경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바이샬리(Vaisa-lI-)결집 또는 700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vr톔i)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10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10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디파방사(DI-pavam톝a)』와 『마하방사(Maha-vam톝a)』에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10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둘째,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셋째,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넷째,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서 하는 것. 다섯째,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여섯째,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일곱째,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여덟째,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아홉째,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열째,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淨法)으로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9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시키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 아쇼카 왕은 인도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아쇼카 왕은 기원전 260년경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쇼카 왕은 부왕이었던 빈두사라 왕이 그랬듯이,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쇼카 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수많은 불교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ㆍaliputra, 華氏城)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1,000결집, 화씨성 결집, 1,000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3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마하방사』와 『디파방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 왕(서기 73~103년 재위)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현장(玄斡)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불멸 400년경에 카슈미르(KasmI-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 파르슈와(Pa-rs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3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것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었다.

 

부파불교

1. 교단의 분열

붓다의 입멸 이후 점차로 발전을 거듭하였던 불교교단은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 마침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교단의 각 구성원이 평등하게 책임을 지고 서로 존경하는 일미화합(一味和合)을 이상으로 하는 교단이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차츰 대립과 분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근본 분열교단의 분열에 대한 전승 내용은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차이가 있다. 남전의 문헌으로는 『디파방사(DI-pavamxpxa)』와 『마하방사(Maha-vam톝a)』가 있으며, 북전의 기록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다. 인도의 학승 바수미트라(Vasumitra, 서기 1~2세기경)가 저술한 『이부종륜론』의 서두에서는 붓다가 입멸한 지 100여 년이 흐르자 여러 부파들이 일어나 이롭지 못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게 되자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논서를 저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붓다가 열반한 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아쇼카 왕이 재위에 있을 당시에 처음으로 교단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전한다.첫 번째 분파의 원인은 마하데바(Maha-deva)가 주장했던 다섯 가지에 있었다. 그 당시 교단은 용상중(龍象衆), 변비중(邊鄙衆), 다문중(多聞衆), 대덕중(大德衆) 등 네 부류로 나뉘어져 논쟁을 거듭하였다. 그 결과 교단은 대중부(大衆部)와 상좌부(上座部)라는 두 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를 가리켜 첫 번째 교단의 분열이라는 의미에서 근본 분열이라고 한다. 지말(支末) 분열; 한번 분열된 교단에서는 논쟁점이 있을 때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따로 갈라져 나와 별개의 부파를 이루었다. 상좌부와 대중부 가운데서 먼저 분열되기 시작한 쪽은 대중부였다고 전한다. 상좌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대중부는 근본 분열 이후로 100년 사이에 총 4회의 분열을 거듭했다. 결국 8개 부파가 성립되었는데, 그 근본이었던 대중부와 지말 8부파를 합하여 ‘본말 9부파’라고 한다. 상좌부는 붓다의 입멸 후 300년이 지났을 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설산부(雪山部) 둘로 나누어진 것을 시작으로 하여, 100년 동안에 7회의 분열을 거듭하여 총 11개의 지말 부파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대중부가 지말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근본 부파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상좌부의 지위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사료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근본과 지말을 합하여 부르는 숫자에도 차이가 나며, 근본 상좌부의 맥을 정하는 데에도 설이 나뉘고 있다. 대체로 설산부를 근본 상좌부와 동일시하고, ‘본말 11부파’라고 헤아린다. 그리하여 초기 교단은 모두 20개의 부파로 나뉘어졌으나, 그 밖에도 수많은 분파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남전과 북전의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2. 부파 간의 논쟁점과 공과

과연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던 교단 내의 논쟁점들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먼저 근본 분열을 초래했던 논쟁점, 즉 마하데바의 다섯 가지 주장들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아르하트(arhat, 아라한)는 성욕을 일으킬 수 있다.둘째, 아르하트는 무지(無知)가 남아 있다. 셋째, 아르하트는 의심이 남아 있다. 넷째, 아르하트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섯째, 불도(佛道), 즉 길은 소리로써 얻어진다. 마하데바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붓다의 참된 가르침이라 주장하였으며, 그에 대한 논박과 논쟁으로 인해서 마침내 교단은 두 파로 나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의 이면에는 사회적 변화가 또 다른 이유로서 작용하였다고 본다. 교단이 지역적으로 확장되고 생활환경이나 사회적 상황들이 변화되면서 고정적인 율장의 내용만으로는 모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교단 내부에서도 진보와 보수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승단 내에서 벌어졌던 온갖 논쟁의 전말을 상세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부파 분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헌들에서 전하는 각 부파 간의 논쟁점들은 그 당시 교단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불법(佛法)에 대한 엄밀한 해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각 부파 간의 분열은 상호간의 차이를 드러낼지언정 각자가 이해하는 대로 올바른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하고자 노력했던 결과였다. 각 부파의 논쟁 내용은 예컨대 취(聚), 심(心), 삼매(三昧), 천(天)의 4대(大) 등을 비롯하여, 업과 과보의 문제라든지, 출세간법의 문제, 무위법(無爲法)의 인정 여부, 과거와 미래의 실체성이라든지 사물의 실재성 여부, 그리고 깨달음의 문제 등을 비롯한 교리상의 쟁점들을 비롯하여 불탑신앙의 문제 등이다. 사실 『이부종륜론』 등의 문헌에서 전하는 각 부파의 주장점들은 언뜻 보기에 별반 차이가 없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고 논쟁하였던 교리상의 논점들은 대승불교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대승에 속하는 경전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수많은 부파가 갈리는 논쟁점들이 보다 더 진전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승화된 것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이어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씨앗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명료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원류가 부파시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니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중부의 교리가 바로 대승불교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유부, 경량부, 화지부, 법장부 등 상좌부의 교리도 대승불교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사상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상적 조류와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어 가고, 또한 다시 갈리거나, 다시 또 합쳐지면서, 다른 또 하나의 대해(大海)를 이룬다. 불교라는 막막한 대해 속에서 여러 부파의 논쟁과 분파는 작은 개울이거나 아니면 강물이나 또는 파도 거품과 같은 것이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엄밀하고 치열하다 못해 번쇄하기 짝이 없다는 혹평까지 들어야만 했던 부파 논사들의 쟁론들이 ‘철학적 불교’라는 튼튼한 주춧돌을 놓고 ‘종교적 불교’라는 튼실한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부파 논사들의 불교’가 흔히 지칭하듯이 ‘소승(小乘)’, 즉 작은 수레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인식을 재고(再考)하는 것이 부파불교시대의 논쟁사를 올바로 보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대승불교시대는 부파불교시대라는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거대한 붕새와 같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1. 대승불교의 원류

대승(大乘, maha-ya-na)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커다란 탈것, 혹은 운반하는 방도를 의미하는데, 그런 뜻을 품고서 노력하면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붓다와 동일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가르치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대승불교란 일반적으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발흥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가리킨다. 대승경전을 신봉하고 그 교의에 따라 실천하는 불교수행의 한 체계로서, 현재 남방 불교권을 제외한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의 한역(漢譯) 문화권과 티베트계 문화권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발원과 시기, 그 직접적인 동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료한 정설이 없다. 수많은 설명 중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할 만큼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서는 인도에서 대승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경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아쇼카 왕의 재위 시기에 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승불교의 원류에 대한 설명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부파불교의 발전 양상에서 등장하게 된 운동이라는 설로서, 대중부와 경량부 등 여러 부파의 교리 및 활동이 대승불교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둘째로 불탑신앙의 전개와 더불어서 대승불교가 발전한 것이라는 설로서, 붓다의 유골을 모신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붓다의 덕을 찬양하고, 그 힘으로 복과 공덕을 쌓기를 기원하고 있었던 재가 신자를 모체로 하며, 그들에게 붓다의 전기를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주는 법사들을 지도자로 하여 발흥했다고 한다. 셋째로 대승경전을 비롯한 불전(佛典)문학의 등장과 함께 한다는 설이다. 새로운 운동이 주장하는 바를 널리 퍼뜨리는 법사들은 붓다의 덕을 찬탄하는 새로운 경전을 작성했는데, 그것이 대승경전이다. 초기의 대승경전은 불탑숭배를 설하고, 붓다 앞에서의 참회와 예배를 권하며, 보시 등의 이타행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의 전개에 따라 경전 그 자체의 공덕을 고양하고 그에 대한 숭배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대승경전이 대승불교 그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승불교의 독자적인 교리는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나 교단으로서는 독자적인 율장이 없는 점 등 그 모습을 명확히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상과 같이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을 요약하여 말하기를, 인간이 붓다를 믿어 온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붓다가 되어 간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점은 고타마 붓다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성취했던 것처럼,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길을 재차 확인하고 실천하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의 역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대승의 사상과 실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붓다관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대승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붓다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고 자비를 찬탄하며, 불신론(佛身論)을 그 중심에 두었다. 대승의 불신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붓다, 즉 법신(法身)과 중생제도를 위한 붓다의 시현, 즉 색신(色身)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특히 삼신불(三身佛)이라 하여 불신을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써 설명된다. 1)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2)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3)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4) 진신(眞身), 보신(報身), 응신(應身).5) 법신(法身), 지신(智身), 대비신(大悲身).6) 법신(法身), 응신(應身), 화신(化身).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삼신불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3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신은 아미타불, 법신은 비로자나불, 화신은 석가모니불을 꼽는다. 하지만 그 외에도 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다양한 쌍을 이룬 3불상이 봉안되기도 한다. 옛부터 브라마, 비슈누, 쉬바라는 3신(神)을 숭배하는 인도의 신앙적 전통의 영향으로 불교에서도 3신불을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났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찰에서도 3신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신앙적 실천의 주체로서의 보살을 강조했다. 보살이란 보디삿트바(bodhisattva)라는 말을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원래 성불하기 이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고 입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승화시켰다. 여기에는 대승의 구도자에게 붓다를 닮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아라한이라는 이상을 보살로서 대신한 대승에서는 중생 모두가 해탈을 이룰 때까지 스스로 열반에 들기를 거부하고 중생들 속에서 함께 수행하며 그들의 해탈을 위해 진력한다고 강조했다. 대승의 주창자들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불성이 있기 때문에, 집착과 아집으로 인해서 가려진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설했다. 그들은 보살행(菩薩行)이라는 실천 덕목을 설하였는데, 여러 종류의 파라미타(pa-ramita-)는 말 그대로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닦아야 할 수행법들을 총칭한다. 파라미타는 정(定)과 혜(慧)의 2파라미타를 비롯하여, 4파라미타, 6파라미타, 7파라미타, 10파라미타, 32파라미타 등 수없이 많은 조목들이 대승경전에 소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6파라미타이다. 6파라미타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으로서 불도수행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들이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6파라미타는 모든 부처를 낳은 어머니이며 모든 부처가 의지하는 보배라고 말할 만큼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한다. 10파라미타는 6파라미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등 네 가지를 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파라미타 사상에 근거한 가장 이상적인 대보살들로서 문수(文殊), 보현(普賢), 관음(觀音) 등의 여러 보살들이 대승경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파라미타를 실천하는 보살들의 수행에는 그 정도에 따른 단계가 있다는 사상도 정립되었는데, 바로 10지(地) 등의 보살 계위이다. 10지는 보살이 수행하여 성불하기까지 총 52단계의 수행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41부터 제50단계까지를 10지라 한다. 10지는 차례대로 초지(初地), 2지, 3지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제1 환희지(歡喜地), 제2 이구지(離垢地), 제3 명지(明地), 제4 염지(焰地), 제5 난승지(難勝地), 제6 현전지(現前地), 제7 원행지(遠行地), 제8 부동지(不動地), 제9 선혜지(善慧地), 제10 법운지(法雲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0지에 이르러서야 보살은 비로소 불성(佛性)을 보며 중생을 구제하고 지혜를 갖추기 때문에, 10성(聖)이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는다. 이러한 10지 보살사상은 파라미타의 덕목들과 함께 대승불교를 발전시키는 핵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대승불교의 실천이 기반이 되었던 진리관은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설하는 공성(空性)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보살은 무주처(無住處) 열반을 이상으로 하여 이타행을 실천하며, 미혹과 깨달음의 동일한 근거로서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성에 의해 본질이 해명되어, 여래장(如來藏)이라든가 유심(唯心) 또는 유식(唯識)의 이론을 낳았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을 원점으로 하여 제법(諸法)의 연기가 곧 진여(眞如)이며 법계(法界)라고 하며, 그 특색을 공(空) 내지 공성(空性)이라 파악하여, 반야바라밀에 의해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삼는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한 대승불교에서는 이전 교단의 가르침이 스스로 아라한이 되어 열반하는 것을 최상 목표로 했던 것은 다른 중생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편협한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소승(小乘, hI-naya-na)이라고 폄칭하였다.

 

3. 대승경전

대승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붓다의 가르침을 재정비하여 다양한 경전들을 성립시키고 그에 대한 수많은 논서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대승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러한 경전과 논서를 중심으로 사상을 정립하고 흐름을 확대해 나갔다. 대승경전은 거의 7, 8세기경까지 오랜 시일에 걸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한역(漢譯) 경전을 중심으로 볼 때 약 1,200부에 이르며, 티베트어 번역본으로는 약 1,900부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프라크리트어를 포함한 광의의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 대다수의 경전이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그 일부만 원전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된 다양한 대승경전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초기: 1세기경까지로서, 용수(龍樹) 이전에 해당한다. 중기: 용수 이후 세친(世親)까지, 2~5세기경까지를 말한다. 후기: 세친 이후, 6세기부터 밀교, 즉 금강승의 성립기인 7세기경까지를 말한다.이러한 세 단계의 발전을 거치면서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통해서 대승의 사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대승의 경전들을 내용면에서 구분해 보면,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보적부, 열반부, 대집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주요 내용으로는 붓다와 보살의 지혜를 찬탄하고, 삼매의 수행과 가치를 강조하며, 대보살과 불제자, 재가 불자들의 실천수행, 법공(法空)과 법신진여사상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의 편찬에서 그치지 않고, 논서를 통해서 그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침으로써 각자의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승경전이 아함부 경전과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아함부에서 고타마 붓다의 권위를 빌어서 경전을 서술했던 것과는 달리, 법사들 스스로 대승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치중했으며 붓다의 권위에만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대승이 부파불교 또는 원시불교와는 독립적으로 그 사상을 정립하게 된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4. 대승교단의 성쇠

대승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주인공들은 바로 설법사(說法師)들이었다. 대승의 시대에 법사들은 스스로 보살도를 수행하면서 대중을 향해 법을 설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베껴 쓰고 외우며 널리 펴는 것이 공덕을 쌓는 길이었다. 법사들은 일반적으로 보살이라 불렸으며, 그들은 정법의 수호자이자 교법의 정통적인 전수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1세기경부터 불교 전법사들은 힌두쿠쉬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포교하기 시작했지만, 인도불교교단은 굽타 왕조의 성립 이후에는 차츰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굽타 왕조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질서의 토대가 되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에 따라 브라만교, 즉 힌두교는 급속히 세력을 펼쳐 갔으며, 동시에 불교의 사회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힌두교가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대승불교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와 무드라, 만다라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또 다른 발전 양상, 즉 밀교를 성립시키기에 이른다. 인도불교가 국경을 넘어서 드넓게 포교되었던 것과 반비례하여 인도 내에서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내용면에서도 변용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해서 갖가지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첫째로 꼽는 이유는 대승의 교의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보살 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인도국경을 넘어 전파된 대승의 교의는 각 나라의 사상과 결합하여 발전적 수용을 가져왔으나, 정작 인도에서는 소승불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승불교 또한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밀교

1. 성립 배경

마우리야 왕조 때 아쇼카 왕의 두터운 보호를 받고 성장하기 시작했던 불교교단은 인도 내외로 확장되기에 이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인도의 토착종교와 힌두교 등과 혼합되어 새로운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밀교이다. 마우리야 왕조에 버금 가는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굽타 왕조 때부터 지배층의 종교로서 확고하게 자리 매김한 힌두교는 사회 전반의 기본 질서로서 그 골격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8세기 중엽에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하여 성립한 팔라 왕조의 여러 왕들은 불교를 보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동인도와 벵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융성했던 불교는 기존의 대승불교와는 차별화된 교의 내용으로 보다 더 힌두교에 근접한 탄트라불교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이 힌두교와 습합된 탄트라 불교를 대승과 구별하여 금강승이라 하였다. 금강승, 즉 밀교는 인도불교의 최종 발전 단계로서 대승불교의 인도적 변용이라 볼 수 있으나, 밀교교단에서는 자신들의 교의야말로 금강처럼 견고하고 유일 최상의 진리라는 뜻에서 그와 같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밀교의 교의는 힌두교의 의례와 교의 내용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채용함으로써 불교 고유의 특징을 상실함과 동시에 힌두교에 동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밀교의 성립 계기를 단순히 힌두교와의 습합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던 다라니 등의 주력(呪力)은 밀교의 뿌리로서 인정되며, 더 나아가 인도사상의 일반적 토양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밀교의 배경으로서 거론되는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주인 고타마 붓다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시대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多佛)사상, 삼신불설 등은 고타마 붓다를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의 등장함으로써 인도 전래의 신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고타마 붓다가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출가의식을 거친 자들도 다시 재가자와 같은 위치로 돌아갈 만큼 교단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이는 교단의 지적 활동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밀교교단에서 출가비구는 주술사(siddha) 내지 마법사(vajra-ca-rya)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힌두교의 쉬바교 또는 비슈누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탄트라(tantra)는 ‘규정하다, 집행하다, 유지하다, 부양하다’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탄트리(tantrㆍ)’에서 파생된 말로서, ‘의식(儀式), 의례, 원칙, 밀교, 경사(經憲), 자손, 가족, 의류, 주문(呪文), 약(藥), 통치 방법, 군대’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인도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나 자이나교 등에서도 밀교적인 색채, 즉 비의적(秘儀的)이고 의례적인 경향이 강한 교의가 담겨 있는 문헌을 가리켜 탄트라로 부른다. 이와 같이 밀교가 발전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던 곳은 마가다지역의 사원들이었는데 8세기경에 건립되어 융성하다가 13세기 초엽에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그 때까지는 인도에 명목상이나마 불교교단이 존속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후 민중의 불교신앙은 사실상 힌두교와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힌두교와 습합된 불교는 현재 네팔에 남아 있다. 네팔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의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 양자의 구별은 쉽지 않을 정도이다.

 

2. 교의와 수행법

일반적으로 대중을 향해 널리 개방되어 있으며 세계관 내지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을 명료한 언어로 설하는 통상의 불교를 현교(顯敎)라고 하는 반면에, 비공개적인 교의와 의례를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의해 전수하는 비밀불교를 밀교라고 구분한다. 이러한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밀교의 범위를 명확히 구분짓기란 쉽지 않다. 다만 통상적 구분에 따르자면, 그 범위는 ‘탄트라’라고 이름하는 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그에 따라 의례를 행하는 신앙집단을 총칭한다. 현존하는 불교의 문헌 중에서 ‘탄트라’라는 명칭을 지닌 최초의 것으로는 『초회금강정경(初會金剛頂經)』, 일명 일체여래진실섭경(一切如來眞實攝經)이라 불리는 문헌 중의 본분(本分)에 대한 부록에 해당하는 교리분이다. 이 경전에서는 일반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는 ‘서분, 본분, 유통분’이라는 수미일관된 원전 형식이 완비되어 있지 않으며, 개개의 교의 또는 실천, 행법 등에 대한 비교적 짧은 문단이 각각 ‘탄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밀교교단 내부에서는 7세기경에 성립되어 밀교의 2대 경전으로 꼽히는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의 경우와 같이 문헌 명칭 상으로는 수트라를 채용함으로써 현교의 경전처럼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명칭상의 탄트라라는 말에 국한하기보다는 그 내용에 따라 밀교 경전과 범위가 정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밀교의 주요 교의는 대일 여래, 즉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하여 붓다의 대비(大悲)와 지혜를 상징하는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라는 양계(兩界) 만다라를 통해서, 불성을 지닌 중생이 성불하기 위한 과정과 의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성불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법신(法身)과 한 몸이 되는 요가, 즉 유가(瑜伽)를 중요시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비밀집회 탄트라』에서 상세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밀교는 흔히 잡밀(雜密)이라 하여 다양하고 잡다한 방식의 의례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점차로 교의가 정립되어 순밀(純密)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밀교의 발달 과정은 일반적으로 다음 4단계로 정리한다. 첫째, 소작(所作) 탄트라(kriya--tantra) 단계로서 잡밀경전들이 해당한다. 둘째, 행(行) 탄트라(carya--tantra) 단계로서 순밀을 형성하는 양부(兩部) 대경(大經) 중에서 『대일경』 및 대일경 계통의 경전들이 해당한다. 셋째, 유가(瑜伽) 탄트라(yoga-tantra) 단계로서 『금강정경』 및 금강정경 계통의 경전들이 해당한다. 넷째,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anuttarayoga-tantra) 단계로서 예외적인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널리 전승된 적이 없으며, 다만 티베트에서 성행했다. 이는 다시 방편(方便) 부(父) 탄트라, 반야(般若) 모(母) 탄트라, 불이(不二) 탄트라 등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밀교의 교의에 따른 수행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삼밀(三密) 수행법이다. 이는 법신불인 대일 여래가 설하는 세 가지의 비밀스런 법문(法門)으로서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꼽는 세 가지 업, 즉 신(身), 구(口), 의(意)라는 세 가지 통로로써 짓게 되는 업을 기반으로 하여 수행을 쌓음으로써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밀수행법은 밀교 전반에 걸쳐서 강조되는 행법으로서, 7세기경에 인도에서 정립되어 점차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요컨대 삼밀수행이란 입으로는 진언을 암송하고, 손으로는 다양한 수인(手印, mudra-)을 짓고, 마음으로는 불보살의 도상(圖像)을 염상(念想)하는 수행법을 말하는데, 이를 각각 구밀(口密), 신밀(身密), 의밀(意密)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이와 같은 삼밀을 동시에 수행하라고 권장하였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세속적인 무명(無明)과 초월적인 명(明)의 이원성을 극복하여 해소시킴으로써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더 나아가 가장 세속적인 성적 합일을 초월적인 깨달음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밀교의 의도는 종교적인 목적과 세속적인 소망을 동시에 달성하는 데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불교 자체의 쇠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인도불교의 쇠멸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원인에 대해서는 갖가지 학설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라다크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 1888~1975년)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근본 원인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탄트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불교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원인으로서는 불교교단 자체의 쇠진, 왕족을 비롯한 정치적 지배계층의 후원이 감소한 것, 힌두교도의 박해, 이슬람교도의 침입, 교단 내부의 타락과 부패, 분파의 분열로 인한 교단의 쇠미, 재가 신도를 충분히 양성하지 못한 점 등이다. 그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원인은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공이다. 10세기 초엽에 터키 무슬림이 인도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슬람교도들이 불교사원들을 파괴했던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사원의 불상들은 한갓 우상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불교를 박해하였고, 그들이 인도불교의 조종(弔鐘)을 울린 주도 세력이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슬람의 공격에 대해서 불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로서 불교가 금욕적이며 비폭력적인 종교였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도 땅에서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불교 내부에서 찾는 것이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먼저, 초기 불교가 힌두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제사의식을 철저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붓다는 전법(傳法)의 초기부터 열반을 성취하는 데는 어떠한 의식이나 제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은 부파시대까지만 해도 교단 내부에서 행해지는 최소한의 의식 외에 특별한 제의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잘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을 거쳐서 밀교에 이르면서 불교에서도 의식은 매우 중시되었고, 힌두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띠고 말았다. 또한 초기불교에서 부정되었던 유신론적 신앙은 점차로 퇴색되고 각종의 신격들이 불교신앙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승의 보살신앙과 다불(多佛)사상은 자력신앙을 중시하던 불교를 타력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붓다가 최후의 교설에서까지 오로지 강조했던 것은 각자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구원자였던 붓다는, 세월의 변용을 거치면서 붓다 그 자신만이 중생을 구원해 주는 최상의 구원자로 등극하고 말았다. 불교는 그 최초에 그러했듯이 항상 민중의 관심과 더불어 성장 발전해 왔다. 물론 상인층과 지배계급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성장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불교교단과 교의의 핵심은 항상 민중의 마음을 읽는 데 있었다. 중생의 고통에서 눈 돌리지 않고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을 위로하고 없애기 위한 승단의 노력이 퇴색되어 갈수록 민중의 마음도 불교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현대인도불교

1. 신불교 운동

인도에서 다시 불교가 부흥한 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신불교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신불교 운동을 주창했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Dr. 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년)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암바바데(Ambavade)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에 해당하는 마하르(Mahar) 카스트 출신이었다. 마하르 카스트란 거리 청소나 소각 등을 담당하던 소위 ‘불가촉 천민’에 속하는 집단을 말한다.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 천민은 다만 탄생함으로써 존재로 인정될 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상층의 힌두계급과는 간접적으로도 접촉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신분을 지닌 집단이었다. 실제로 상층계급은 불가촉 천민의 그림자조차 닿기를 꺼려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정통적인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차별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암베드카르가 1956년 10월 14일에 마하라슈트라 주의 나그푸르 시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개종식을 주도했던 첫째 동기도 바로 불교의 인간평등사상에 있었다. 그 당시 집단 개종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80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은 하층계급에 속했다. 그 중 50만 명 정도가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하는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개종했던 것은 유례에 없는 일로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22가지 서약을 선포하였다. 1) 나는 브라만, 비슈누, 마하데바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2) 나는 라마와 크리슈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3) 나는 가우리, 가나파티, 그 외 힌두교의 여러 남신, 여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4) ‘신은 화신으로 나타난다’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5)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전승은 오류이다. 6) 나는 조령제(祖靈祭)를 행하지 않는다. 7) 나는 불교에 반하는 어떠한 말과 행위도 하지 않는다. 8) 나는 어떤 의식도 브라만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9) 나는 전 인류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10) 나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11) 나는 8정도(正道)를 준수한다. 12) 나는 10바라밀을 준수한다. 13) 나는 일체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준수한다. 14)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15) 나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16) 나는 삿된 음행을 범하지 않는다. 17)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18) 나는 불교의 지혜, 지계, 삼매에 따라 생활하고자 노력한다. 19) 나는 인간을 불평등하게 취급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20)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21)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22)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신성하게 맹세한다. 이와 같은 서약을 외친 암베드카르가 “나와 함께 불교로 귀의할 사람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회의장의 참석자 전원이 일어나서 서약을 반복하고 개종하였다고 전한다. 신불교 운동을 주도했던 암베드카르의 궁극적 목적은 불가촉 천민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데 있었다. 슈드라의 신분이나 여성으로서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규정하는 힌두교의 불평등을 비판하고, 불교의 평등주의를 고양시킨 암베드카르의 주창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서 개종한 하층민들의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신불교(Neo-Buddhism)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지만, 이는 고타마 붓다의 사상과 다르다는 뜻은 아니었다.베드카르는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만한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다. 만약 현대사회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른 어떠한 종교도 붓다의 가르침 이상으로 지적이고 과학적인 현대인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개종식을 마친 암베드카르는 행사를 마치자마자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연맹의 개회식에 참석하여 연설하고 나서, 불교 유적지를 순례한 후 뭄바이로 돌아왔다. 그런데 1956년 12월 6일 아침,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타계로 인해 하층민들 사이에서 열렬했던 불교로의 개종이 멈출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나그푸르, 푸나, 아메다바드, 아그라 등지에서 집단적 개종은 계속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생전보다도 사후에 더 크게 발휘되었다. 현재, 신불교 교도들은 암베드카르의 이름인 빔라오(Bhimrao)를 따서 ‘비맘 샤라남 갓차미(Bhimam saranㆍam gacchami)’라고 귀경게의 목록에 편입시켰다. 불ㆍ법ㆍ승 3보에의 귀의만이 아니라 암베드카르에게도 귀의한다는 4보 귀의로 바뀐 것이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암베드카르가 보살과 같다고 여긴다. 인도불교도의 개종에 큰 역할을 했던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결과이다. 현재 마하라슈트라 주를 중심으로 암베드카르의 유업을 잇고 있으며 불교로의 개종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2.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근년에 들어서 불교신자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불교 자체의 부흥이라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인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교 개종식을 비롯한 불교집회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01년 11월 4일에는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전 인도 불가촉민 연합회’의 의장인 람 라즈(Ram Raj)가 주도하는 집단 개종집회가 열렸다. 이 때 운집했던 100만 명에 달하는 하층민들이 불교로 개종하고자 했으나 그 중 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고 집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집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힌두의 신들에게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라는 선언이 낭독됨으로써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힌두교도와의 충돌을 우려한 정부 측의 강압적인 대응으로 인하여 개종의식이 순조롭게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인도불교청년회’, ‘불교도발전협회’ 등 여러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회와 의식, 축제 등을 거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타르프라데쉬 주의 상카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석가족의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 보름에 개최하는 상카시아불교대축제의 경우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행사로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서 인도에 불교사원을 세우기 위한 각종 모금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해외 불교도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의 불교부흥에는 또 다른 요인이 덧붙여진다. 바로 티베트인들의 유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티베트지역을 중국이 점령한 뒤 거세지는 박해를 피하고자 티베트인들은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는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도 이어지고 있는 티베트불교도들의 인도 이주는 사실상 인도불교의 재확산에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으며,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보다도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고 본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의 스승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도는 티베트불교의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새로운 인도불교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흔히 인도에서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불교로서의 전통은 끊겼다고는 말해 왔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제 불교의 산실에서 재생하는 기미가 확연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불교인터넷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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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클수록 갈등도 늘지만, 본질은 조건을 따르는 ‘인연성’

참새 입장에서 방앗간은 순경계!

분별심으로 시비하면 서로 다퉈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지나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으로 참새 입장에서 보면 방앗간은 순경계입니다.  마음에 드는 상황이나 대상을 두고 좋은 감정으로 따르려는 것입니다.

이때 감각기관을 의지해 대상과 접촉하며 느끼는 것에 괴로운, 즐거운, 괴롭지도즐겁지도않은가지(三受, 不苦不樂)구별이있습니다.

순경계는 자신의 뜻과 부합해 심신이 기쁜(適悅) 상태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것으로 주당이 술을 쳐다보는 모습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를  같습니다. 것은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가지 감각(三受) 가운데 즐거움(樂受) 좋아하는 마음() 함께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스에 불이 붙는 것처럼 찰나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하려는 욕망()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없다면 대부분 그저 쳐다만   같습니다. 가질  없음을 안타까워 하다가 체념하고 돌아서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절제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맹목적인 소유욕은 과도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면 대상을 접촉()하는 순간 즐거움(樂受) 느끼고 동시에 강한 애착() 채우기() 위해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이연기의 順觀에서 본다면 무명을 기반으로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해 고통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즐겁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가까이 하려는 (樂謂滅時有和合欲)으로 순경계이며, 괴롭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과 떨어지려는 (苦謂生時有乖離欲)으로 역경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역경계에  걸리는  가운데 하나는 말일 것입니다. 타인이 내뱉는 한마디 말을 따라서 마음에 들면 극락 갔다가, 비위를 거스르면 바로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좋고 싫은 감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갈등과 번민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가질 수도 없고 싫은 것을  버릴 수도 없다면, 이래저래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인욕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알아 둬야   가운데 하나가 安忍波羅蜜’입니다. ‘편안하게 인내한다’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이것은 인욕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대상이 아름다운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본질을 보면, 여러가지 조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화합체를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매끈하게 빠진 자동차를 언뜻 보았을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여러 부속들로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연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이라서 어느  하나라도 조건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을 따라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상과 자신의 본질을 살피는 것으로 다른 말로 一切皆空의 도리를 따르는 인욕수행이라   있습니다.

순경계는 修身하는 요량으로 억지로라도 참으면 되므로 쉬울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계 중에서도 분노를 참아야  때는 자칫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래서 파도가 자연스럽게 왔다가 가듯이 시비심 없이 인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분별하여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자세에 따라  가지로 나눠   있습니다.

단순히 참는 것은 억지로 인내하는 것이고, 분별로 참는 것은 사리를 따져 감내하는 것이며, 도리로 참는 것은 시비심 없이 인욕하는 이라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에서는 事理를 따져 참는 인내가 많을  같습니다. 그것은 아는 만큼 번뇌도 많을 것이므로 인내해야  것도 덩달아 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나아가 타인과 시비분별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나는 항상 말했다. 지혜 있는 자는 어리석은 자와는 다투지 않는다고, 우자가 욕설해도 지자가 잠잠하면, 그것은  참으로 그를 이김이 된다(我常言智者 不應與愚諍 愚罵而智默 信勝彼).” <장아함> 전투품의 말입니다.

[불교신문3199/201654일자] 범수스님 

 

**순경계 역경계

마음을 따르는 , 거스르는 것도 수행이다.

길을 걷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가운데 억지로라도 ‘인욕’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갖 고통과 번뇌 등을 참는 수행법의 하나인 인욕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헤아려봐야 하는 입니다. 이것을 크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과 거스르는 것으로 나눌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자신의 뜻에 부합되면 順境界라 하고 그렇지 않으면 逆境界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싫어하는 것은 거스르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거나 부족하여도 참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라고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움켜쥐었다간 인과의 과보가 따를 것이고,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이라고 쉽게 내팽개쳤다간 자비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리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常一主宰(변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자아)하는 ‘내’ 아니므로 참고 말고 주체를 찾을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떤 상황에 처하였을 인내와 비례하여 갈등하는 자신을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욕에 따른 여러 공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십이장경>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힘이 많으며, 무엇이 가장 밝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욕이야말로 힘이 많으니 악을 품지 않는 까닭에 몸과 마음이 아울러 편안하고 건강할 있으며, 참는 사람은 악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이 되느니라.

사전에서 인욕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을 감내하여 마음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설사 ‘타인의 핍박을 받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합니다. 참음의 기준과 한계, 그리고 종류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므로 전체를 소개하기보다 인내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

‘고난에 처하더라도 신심에 동요를 일으키지 말라. 그래서

‘인욕의 이치를 알면 수행자의 규범() 깨뜨리는 죄에서 벗어 있다’면서 인욕의 자세와 공능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리석어 어기는 戒만큼이나 참지 못하여 범하는 규범() 빈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행위() 연관시킨다면 비록 남이 자신을 괴롭히더라도 몸을 단속하여 인내하는 身忍行 타인의 거친 말에도 투쟁을 일으키지 않는 口忍行, 그리고 상대로부터 수치를 당하더라도 원한을 가지지 말라는 意忍行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몸으로 참고, 입으로 인내하고, 생각으로 감내하라는 입니다. 이유는 좋고 싫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평온으로 이끄는 ()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종국에는 해탈과 열반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을 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욕’하라는 것은 단순히 무조건 억누르고 견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는 것은 단순히 삭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거나 똑같은 상황에 이르면 과정을 반복하게 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것은 그냥 인욕이라 하지만, 일체가 공한 이치를 알고 행하는 인내(行觀一切皆空之安忍) 바라밀이라 합니다. 바라밀이란 열반(彼岸)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의 총칭으로 인욕으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정진이 인욕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글에 “참는 사람은 惡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이 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달콤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듯이 분노케 하는 것에서 절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인욕하지 않았을 따르는 결과를 알기에 억지로라도 참으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절제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억울하거나 부당한 경우를 당하였을 일어나는 화를 다스리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이 흐르는대로 따르면 한순간 기분은 풀릴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해야 멍에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관계를 <선가귀감>에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내는 마음 일으키면 백만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

[출처] 작성자 태을주

 

**마간디야를 통해 순경계와 역경계

순경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애욕의 대상이다. 부처님은 애욕의 대상에 당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까? 나중에 코삼비국 우데나 왕의 왕비가 마간디야는 뛰어나게 아름다워서 어울리는 남편감을 구할 없었다. 대부분의 상류층 자제들이 청혼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어느 부처님을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의 딸과 결혼할 만한 배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아내와 함께 부처님께 가서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라고 청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마라의 딸들이 소녀와 중년의 갖가지 요염한 모습을 하고 와서 당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말씀하시고,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셨다.

갈애, 혐오, 애욕이라는 이름의 선녀처럼 아름다운 딸을 보았어도 사랑하고픈 마음이 없었는데,

오줌과 똥으로 가득한 마간디야를 원하겠는가? 더러운 몸에 나의 발바닥조차 닿지 않게 하겠네.

게송을 들은 마간디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로 자리에서 아나함과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마간디야는 자신을 오줌과 똥으로 가득한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발바닥조차 닿게 하지 않겠다고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처님께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었다. 나중에 코삼비국의 왕비가 마간디야는 부처님이 나라로 오시자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매수해서 욕설과 비방을 퍼붓도록 지시했다. 삼보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은 부처님께서 안에 들어오시자 부처님 뒤를 따라다니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난다는 차마 듣기조차 힘든 욕설을 듣고 부처님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고 간청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려움이 일어나면 어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어려움이 가라앉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여래를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에 비유한다.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처럼, 사악한 자들이 내뱉는 말을 참고 견디는 것이 여래가 일이라고 설하시는 것이다.

전쟁터의 코끼리가 날아오는 화살을 참고 견디듯이 나는 욕설을 참고 견디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과 계율을 모른다.

사람들은 축제에 길들인 코끼리만을 데리고 가고, 왕은 길들인 코끼리만 탄다.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참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길들인 사람이다.

노새나 준마나 힘센 코끼리도 길들이면 훌륭하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 『법구경』 320~322

결국 자신을 길들인 사람은 순경계이든 역경계이든 동요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이교도의 집안에 시집간 급고독장자의 쭐라수밧다가 읊은 다음과 같은 게송에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이익이 있으면 우쭐대고 손해가 있으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이익과 손해에 무관심하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명성을 얻으면 우쭐대고 잃으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명성을 얻고 잃음에 무관심하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칭찬하면 우쭐대고 비난하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칭찬하거나 비난받거나 똑같은 태도를 보이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기쁘면 우쭐대고 괴로우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벗어난 분들이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 『법구경』 304

게송에는 여덟 가지 풍파, 八風이 나타나 있다. 이익과 손해, 명성을 얻고 잃음,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에 당면하여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물며 부처님이야 말할 것이 있으랴?

출처 | 난타 비구를 통해 순경계의 활용

 

**부처님께서 경계를 대하여 如如不動 하셨음은 많은 사례를 통해 있지만, 거기서 걸음 나아가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순경계와 역경계를 활용한 경우도 엿보인다.

태자의 신분으로 있다가 결혼을 앞두고 얼떨결에 출가한 난타 비구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수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알고 계신 부처님께서 어느 난타를 데리고 불이 타고 지나간 숲으로 갔다. 거기에는 화상을 입은 암컷 원숭이가 있었는데, 원숭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난타여, 원숭이와 그대의 약혼녀 누가 아름다운가?

그러자 난타가 대답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약혼녀는 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인입니다. 어찌 저렇게 화상을 입은 원숭이와 비교할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난타를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오백 명의 여인들이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보고 다시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저 여인들과 그대의 약혼녀 누가 아름다운가?

“부처님이시여, 여인들에 비하면 저의 약혼녀는 마치 원숭이와 같습니다. 오백 명의 아름다운 핑크빛 발을 가진 천녀들은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없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뻐하라, 난타여! 그대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오백 명의 아름다운 핑크빛 발을 가진 천녀들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내가 보증하노라.

난타가 설레는 가슴으로 말했다.

“부처님께서 오백 명의 천녀를 얻게 된다고 보증하신다면 저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이에 다른 비구들은 난타를 ‘일용직 잡부’ 혹은 ‘장사꾼’처럼 천녀라는 대가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자라고 놀려대고 비난했다. 난타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홀로 떨어져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결국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부처님은 무조건 애욕을 끊으라고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욕을 적극 활용해서 보증까지 서주며 결국 애욕이 쉬도록 하고 있다.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 바라문 바랏와자 형제를 통해 역경계의 활용

바라문 바랏와자는 불교도인 부인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 부처님께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며, “무엇을 부수어야 편안히 살고 무엇을 부수어야 슬픔이 없는지”를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성냄을 부수어야 편안히 살고 성냄을 부수어야 슬픔이 없네.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는 달짝지근한 성냄을 부수는 것을 성자들은 칭찬하나니, 성냄을 부수면 이상 슬픔이 없기 때문이네.

이러한 응답에 감동한 바랏와자는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소식을 들은 그의 동생이 찾아와 부처님께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묵묵히 이를 듣고 부처님은 마침내 주인이 손님에게 차려준 밥상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이처럼 그대가 나에게 비난하고 화내고 욕하였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도로 그대에게 되돌아갔다.

결국 동생 또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이렇게 셋째, 넷째까지 사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마음을 닦는 계기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禪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참선곡」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일체 계행 지켜 가면 천당 인간 壽福(수복)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恒隨佛學(항수불학) 생각하고

同體大悲(동체대비) 마음먹어 貧病乞人(빈병걸인) 괄세 말고

五溫色身(오온색신)생각하되 거품같이 觀(관)을 하고

바깥으로 逆順境界(역순경계) 夢中(몽중)으로 관찰하여 喜怒心(희노심)을 내지 말고

虛靈(허영)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八風五欲(팔풍오욕) 일체경계 不動(부동)한 마음을 태산같이 나가세.

순경계와 역경계의 여덟 가지 바람에 동요하지 말고 태산같이 여여如如하자는 뜻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러할진대 부처님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부처님은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제자들을 교화함에 순경계와 역경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알고 보면 순경계가 역경계요, 역경계가 순경계다. 또한 내가 있기에 경계가 있는 것이지, 내가 사라지면 경계 또한 사라진다. 결국 이렇게 말할 있지 않을까?

“애욕과 분노는 극복해야 대상이 아니라, 활용해야 현상이다.

[출처] 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불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중에 '境界'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것과 다른 것이 맞닿아 있는 지점 말한다.

부처님 법으로 경계는 어떤 상황에 직면한 것을 의미한다. 경계에는 역경계와 순경계가 있다.

우리들의 일상사는 역순경계의 바람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좋고 싫고,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춥고 덥고 등등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이리저리 기분이 쏠리면서 허둥대며 살아간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으쓱하고 싫어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말이 아니다.

바람 날이 없이 항상 기분이 오락가락 흐느적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역경계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을 말한다. 피하고 싶고,괴로운 상황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 막거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결과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른다. 인천 가는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수원 가는 전철이 오고   다음에는 구로까지만 가는 전철이 오는 것도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친한 사람이 죽으면 깊은 슬픔이 몰려오는데 이것 역시 견디기 힘든 역경계다. 보고 싶지 않은 상사나 직장 동료를 보는것, 힘든 일에 직면하는 것도 물론 역경계다.

순경계란 자신의 뜻에 맞는 상항에 마주치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고 즐겁고 편안한 상황이다. 마음에 아주 들어맞아 뜻대로 술술 풀리는 경우다.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거나 칭찬을 듣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아파트가 값이 뛰어오르고, 내가 주식이 폭등한다. 여하튼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전개되어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자꾸만 좋은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들뜨게 된다.

이러한 .순경계를 만났을 수행자가 경계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공부가 퇴보한다.

역경계를 만났을 괴로은 상황에 매몰되면 공부를 놓친다. 경계에 현혹되어 신심과 발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힘겨운 인생살이가 밖에 없다.

순경계도 마찬가지다.좋아하여 집착하고 편안하여 안주하면, 공부를 놓치게 되고 신심이 헤이해지고 나태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뭔가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증권이라도 크게 오르게 되면, 기쁘기는 한데 하루 종일 거기에 파묻힌다. 마음이 붕떠서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과 접하게 되면 거기에 달라붙는다.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여인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뱅뱅 돌며 여자에 대해 집착한다. 이렇게 순경계는 기분이 좋긴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경계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깊이 인내하고 받아들이면,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오히려 순경계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순경계에 접하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리고 순경계는 역경계로 돌변하기 쉽다.

예를 들어 여인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여인이 자기의 기대와 어긋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심지어 증오까지 한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순경계가 역경계로 변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순경계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 중심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경계든 순경계든 경계에 직면해서는 일체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고 보아 집착을 버려야 한다.

외부의 어떤 경계에 직면하더라도 자기 안에 정견이 서서 일체를 연기 현상으로 보면 모든 괴로움과 삿된 것을 건널 수가 있다.

경계에 직면할 ,경계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계를 오히려 수행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면서 수용하는 것이다. 입장을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서 수용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차의 문이 닫히면서 출발하는 경우 우리는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다. 차를 타지 못한 것에 대한 속상한 마음이 생기면서 그것이 나의 마음을 지배해버린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럴 다른 자극이 들어오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일진이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하루 종일 그러한 기분에 지배된다. 경계에 치인 것이다.

그러나 순간,'차가 떠나갔구나.편한 마음으로 다음 차를 기다리자.' 라고 마음을 돌려 보자. 경계가 들어올 참선 수행자는 경계를 향해 화두를 간절히 참구해 가야 한다. 다음 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화두를 들고 수행할 있어서 오히려 좋은 기회이기도 것이다.

대혜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다만 망상으로 전도된 마음과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분별로 이해하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기뻐하고 시끄러움을 꺼려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눌러버려라.

그리고 이렇게 눌러버린 경계에서 주어진 화두를 살펴라.

이와 같이 역경계가 오든 순경계가 오든 상황에 지배당하지 말고 바로 수용하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화두를 간절히 들어 돌파해 나가야 한다. 어려운 , 힘든 , 괴로운 어떤 역경계에 직면했을 때라도  화두를 빈틈없이 드는 것이 길이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화두를 들고 있으면 상황은 지나가게 마련이다.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순경계가 좋고 편안하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들뜨고 집착해서는 안된다. 집착하는 순간 또다른 업을 짓게 된다. 경계를 만나는 매순간 화두로 대처하는 공부가 익어지면 역경계와 순경계를  만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일이 눈앞에 이르렀을 , 逆한것이든 것이든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출처: 광명원 인생의 비밀 천도 효사상

 

**팔풍부동(八風不動)-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대처하기

온갖 바람이 불어온다. 따사로운 햇살과 더불어 살가운 바람도 불어오고 파도를 휘감고 마을과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쓰나미도 불어온다. 봄바람과 더불어 찾아온 쓰나미의 광풍에 일본열도가 흔들리고 내 마음도 함께 저려온다. 매화향기 그윽한 봄바람과 쓰나미의 역풍에 마음이 붕 뜨는가 하면 무겁게 가라앉는다.

우리 인생은 팔풍경계(八風境界)에 흔들리면서 살아간다. 팔풍경계란 여덟 가지 좋고 나쁜 현상과 접하는 일이다. 나를 이롭게 하는 이익(利)과 늙어가고 기울며 나에게 손해가 가는 쇠(衰)의 바람, 나를 헐뜯고 비방하는 훼(毁)와 나를 기리고 받드는 예(譽)의 바람, 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칭(稱)과 나를 나무라고 꾸짖으며 비난하는 기(譏)의 바람, 나를 괴로움에 멍들게 하는 고(苦)와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하는 락(樂)의 바람이 그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좋고 싫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기쁘고 슬프고 등등의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나룻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간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면서 산다는 점이다. 경계를 나누는 것도 부족해 그러한 경계에 집착하여 한없이 그 경계에 매여 벗어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의 파도는 크게 나누면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로 나누어진다.

역경계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가는 길을 가로 막고 내 마음가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남이 나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나무라면 화가 불끈 치밀어 오른다. 직장인의 경우 자신의 마음을 거스르는 상사와 만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 때문에 일터에 나가는 것이 두렵기조차 하다. 늙어가고 병드는 것도 역풍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슬픔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 괴롭고 힘든 상황에 내몰려 거기에 매몰되다 보면 화가 나고 침울하며 쓸쓸하고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우울하고 침통한 마음이 떠나지 않아 온통 세상이 먹구름이요 분노의 불길로 이글거린다. 거기에 매몰되면 매몰될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급기야는 죽음의 길로 향한다. 그렇게 현실에 깨어 있지 못하고 어두운 길목으로 자꾸만 접어든다.

순경계란 자신의 뜻에 맞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고 즐겁고 편안한 상황이다. 내 마음에 아주 잘 들어맞아 뜻대로 술술 잘 풀리는 경우다. 꿈에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일을 잘 추진해 직장 상사나 동료부터 칭찬과 찬사를 받는다. 투자한 주식이 뛰어오른다. 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고 즐겁다.

순경계는 일단 좋기는 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전개되어 기분이 참 좋다. 그렇게 기분 좋은 건 유쾌한 일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붙들려 우쭐하고 흥분하며 마음이 붕 떠 현실에 깨어 있지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과 접하게 되면 거기에 착 달라붙는다. 이렇게 순경계는 기분이 좋긴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집착한 결과 그만 평정심을 읽어버린다. 더 과한 욕심으로 탐욕을 부려 육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가다가 결국에 속도가 가속되어 걷잡을 수 없이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사실 역경계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렇구나” 내지는 “상황이 그럴 수도 있겠지”하면서 깊이 인내하고 수용하면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 좋게 일이 전개되기까지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면, 그것마저도 감사거리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순경계는 극복하기가 만만치 않다. 순경계에 접하면 그 상황에 자석처럼, 어쩌면 무모한 불나방처럼 속절없이 붙들려가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순경계는 역경계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흔히 주변에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본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연인을 만나면 그 사람에 달라붙어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다가 그 여인이 자기의 기대와 어긋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상실에 젖는다. 증오까지 한다. 심지어는 철전지 원수가 된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순경계가 역경계로 변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코 인생을 잘 살려면 잘 풀릴 때를 조심해야 한다. 순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깨달음은 요원하고 행복 또한 오래 가지 못한다.

아무튼 역경계든 순경계든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경허스님은 『참선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생각하여 희로심(喜怒心)을 내지 말고 허영(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欲) 일체경계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역풍이건 순풍이건 그것은 사실 바람이 분 것뿐이다. 바람에는 실체가 없다. 여러 가지 인연 속에서 시절 인연을 만나 그렇게 바람이 불어왔을 뿐이다. 그것은 신의 징벌도 아니고 자연의 노여움도 아니다. 다만 원인과 조건에 따라 그렇게 움직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거기에 달라붙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집착하며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한다. 팔풍의 바람이 불어올 때 마음을 태산같이 오롯하게 세우면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기에 올바로 깨어 있다면 백천간두 진일보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역경계가 오든 순경계가 오든 바로 그 자리에 화두를 들어보라. 화두를 들고 그것을 온 몸과 마음에 깊게 스미게 해 꼭 붙들어 매는 순간, 이리저리 휘날리는 경계의 바람은 사라지고 평화롭고 잔잔한 내면의 모습과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경계를 대처해 나가면서 즉시즉시 놓고 살아갈 때 새로운 활로 또한 열릴 것이다.

일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역(逆)하건 순(順)하건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 고명석/ 조계종 포교연구실 종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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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 연기 [法界緣起]

화엄종에서, 우주의 모든 현상이 함께 의존하며 발생하여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비추면서 끊임없이 교류하고 융합한다는 관점으로 불교에서 현상세계 그대로가 진실의 세계, 진여(眞如)라고 보는 철학적 견해.

 

〈화엄경 華嚴經〉을 근거로 중국의 화엄종에서 형성되었다.

화엄경에 일관되어 있는 유심설(唯心說) 근거해 성립된 법계연기는, 모든 사물과 사상(事象) 자재롭게 서로 의지하는 바가 되어 한없이 교류하고 융합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도 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유심 게송은 "삼계는 허망으로서 다만 일심(一心) 만들어낸 것이며, 12연분(十二緣分) 모두 마음에 의한다" 설한다. 법계연기설은 이로부터 전개된다. 그러한 유심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도 순간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의 세계가 순간에 담겨 있다. 따라서 "처음 마음을 일으킬 곧바로 정각을 성취한다" 하여 '일념성불'(一念成佛) 주장한다. 이렇게 무시간적 입장에서 관찰하므로 세계의 존재방식인 연기는 서로 동화하고 드나들며(相卽相入), 이어지고 이어지는(重重無盡) 성격 지닌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다. 이것을 사사무애라 하는데, 법계란 사사무애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런 세계의 존재방식이 법계연기이다.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법계를 바탕으로 저마다 개체로서 존재하면서 서로를 내포해 통하고, 하나와 일체가 중중무진으로 일치해가는 동시에 전개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법계연기는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一卽多多卽一)라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모든 것이 아무런 실체성이나 고정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무성의 사상이 있다. <다음백과>

 

*법계 연기 [法界緣起]

우주만유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인연 따라 얽혀 있어 어느 하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교리. 법계무진연기·법계무애연기

일대연기(一大緣起) 보는 것으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라고도 한다. 중국 우리 나라의 화엄종(華嚴宗) 중심으로 성립되고 발전되었다. 법계의 우주만유는 사물은 천차만별이지만 피차가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하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만유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때에는 중생과 (), 번뇌와 보리(苦提), 생사와 열반(涅槃) 등과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이며, 번뇌가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圓融無碍) 으로 있게 된다.

그래서 화엄종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주장하고, 하나의 사물은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가 우주라는 뜻에서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우주성립의 (), 힘인 동시에 사물은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끝없이 이어짐)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 한다. 사상은 불교연기론의 극치로서 법상종(法相宗)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 법성종(法性宗) 진여연기(眞如緣起) 등과 같이, 우주연기의 주체를 어떤 사물이나 이체(理體) 국한하지 않고 하나하나를 만유의 합당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법계연기는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어느 것이든지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같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원인이 되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화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이다.

 

화엄종의 교리인 사법계(四法界)·십현연기(十玄緣起)·육상원융(六相圓融)·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모두가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는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넷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다는 차별적인 현상계를 가리켜 사법계라 하고, 반대로 평등한 본체계(本體界) 이법계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본체는 서로 원인이 되고 융합되어 평등이면서도 차별을 보이며, 차별 가운데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이사무애법계이다.

 

다시 나아가서 현상 그것도 현상마다 서로 원인이 되어 밀접한 융합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그리하여 사사무애의 특징적인 모습을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등의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십현연기문(十玄緣起門)이다.

가운데 동시구족상응문이라 함은 현세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는 뜻이고, 제법상즉자재문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 일의 위치를 지키고 () 다의 면모를 유지하는 가운데 일과 다가 서로 포섭하고 융합한다는 것이 일다상용부동문이다.

일이 없으면 다도 없으며, 일이 있으면 일체가 성립된다. 모든 것이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일로도 되고 ()으로도 되며 일체로도 된다. 여기에 화엄에서 가르치는 일즉일체·일체즉일·일즉십(一卽十)·십즉일(十卽一)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현상은 각각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 여섯 가지 모습 함께 갖추고 있어 전체와 부분 또는 부분과 부분이 서로 일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육상원융이라고 한다. 신라의 의상(義湘) 법계연기를 설명하면서 독자적인 이이무애법계(理理無碍法界) 주장하였다.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이사무애나 사사무애는 설하였어도 이이무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없다.

이이무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제로서 () 차별이 있어야 하는데, 의상은 이도 사의 경우처럼 차별적인 것이기도 것이라 하여 차별적인 면도 아울러 강조하였던 것이다. ,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십전(十錢) 예로 들어 일즉십·십즉일 등의 논지를 전개시킨 것도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된 법계연기설이다. <한국민족대백과>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 청화 스님

부처님 가르침은, 특히 대승가르침은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선오후수란 먼저 이치理致로 해서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먼저 이론적理論的인 체계를 세운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경을 배우는 것은 , 그렇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능엄경楞嚴經이나 모두 대승적인 가르침은 모두가 불교의 이치를 세운단 말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증명해서 깨달아서 성자가 되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를 써도 우리가 나쁜 버릇 나라는 버릇 너라는 버릇 밉다는 버릇 또는 사랑한다는 버릇 그런 버릇이 잔뜩 끼어 있어놔서 쉽게 닦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코 닦아야 되는 것이지 닦고 말아버리면 결국은 아까도 말씀 마따나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영원히 우리가 윤회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의 경계로 갈려면 좀체로 쉽게 수가 없습니다. , 지금 같은 사람도 지금 나이가 80 먹어가지만 , 누구가 물어서 , 당신은 지금 윤회를 벗어났습까? 물어오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런고 하면 습기習氣라. 이치로는 알지만 습기라. 습관성이 배어가지고서 습관성 그걸 녹일라면 오랜동안 오랜동안 닦아야 됩니다.

화두話頭도 참구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고 또는 사경寫經도 하고 또는 불경佛經도 외고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점차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인단 말입니다. 헌데 그렇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 편하게 마음이 산란심散亂心을 하지 않고서 마음 편하게 공부를 해야 것인데 마음 편하게 할라면 먼저 이치로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길을 때도 , 길을 어디로 것인가? 길의 순례巡禮, 길의 순로順路를 모르고 헤맬 때는 얼마나 답답합니까. 마치 안개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훤히 길목을 먼저 알고 가야 그래야 자신 있게 가지고 능률도 오르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가 인생길을 가는 데도 훤히 우리가 길을 알고 가면 재미지고 쉽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무슨 그런 부처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런 길을 그렇게 단적으로 우리한테 말씀한 법문이 이른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연기라. 인연법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무명심에서 업을 짓고, 또는 업따라서 선악의 과보를 받고, 뱅뱅 이렇게 윤회하는 그런 것이 중생경계에서 말하는 업감연기, 업감연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주로 경론으로 말하면 이른바 구사론俱舍論이라 또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라 그런 경에 가서 업감연기 말씀이 있습니다.

헌데 그렇게 되려면 아직은, 우리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 공부해야 공부도 빠르고 그럴 것이라는 그런 점에서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이 이른바 대승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승가르침은 이것은 그냥 먼저 진리의 당체當體를 우리한테 말씀하시지 않고서 우리가 점차로 걸어야 하는 그런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허나 대승가르침은 그냥 법의 대요, 진리의 대요를 먼저 이치로 먼저 체계로 해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 말입니다.

마명대사馬鳴大師란 분은 위대한 분입니다.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 정도로 위대한 분이어요. 용수보살龍樹菩薩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정도로 위대하고, 마명대사께서 해놓으신 경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여러분들 들어보셨지요. 대승기신론이라. 일어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이른바 논장論藏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 대승기신론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우리한테 말씀한 가르침인데 연기법으로 하면 연기법적인 사상으로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여래장이나 여래는 부처란 뜻아닙니까. 따라서 여래가 들어있다 그것이 감출 장藏자 여래장인데 여래장은 부처님이 들어있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 들어있다. 부처님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불성은 그러면 어디가 있고 어디는 없는 것인가. 불성은 불성이란 것은 없는 데가 없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이러지 않습니까.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님의 성품은 나한테나 너한테나 공간 속에나 속에나 또는 쪼그마한 그런 원자의 알갱이에나 말입니다. 우주에 끝도 가도 없이 불성은 차있습니다. 불성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한 가르침이 말하자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진여연기라, 진여眞如가 진여의 덕성德性 덕성 따라서 이루어진 세계가 진여연기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업감연기의 우리가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山이요 냇河이요 몸뚱이요 모두가 무명심 때문에 업을 짓고 우리가 과를 받은 그런 하나의 상황인 것이고, 허나 그런 것은 중생의 차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이제는 부처님 차원에서 성자가 보면 어떻게 것인가, 부처님이 보시면 어떻게 것인가,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의 것이라도 성자가 때와 우리 중생이 때와는 그때는 아주 천양의차天壤之差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미워서 어느 누군가가 자기한테 섭섭하게 해서 굉장히 미울 때는 그냥 때려서 ,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이것은 중생심입니다. 그러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가 생각할 때는 모두가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모두가 이른바 부처님의 화신化身입니다.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것은 어느 것도 유별나게 다른 것이 없이 모두가 진여불성으로 보는 것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ad, 우파니샤드란 인도철학의 중심적인 사상인데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한 법문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advaita이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진리. 우주란 것은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하나의 진리를 모르니까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지고 분열되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우리가 저마다 우리가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중생은 체험을 못합니다. 성자가 성자의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성자의 청정한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진여불성의 화신,  부처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탐욕심이나 분노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삼독심三毒心에 가리워서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중생 아닙니까. 중생심衆生心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자기중심이란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하면 좋게 보이고 나한테 섭섭히 대하면 밉게 보이고 남편이나 아내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그때그때 죽든가 말든가 인연따라서 것이지...

이렇게 보는 것이 모두가 중생심이란 말입니다. 이런 중생심이 없어지지 않는 한에는 가정도 참다운 평화로운 가정이 못되고 사회도 훌륭한 공정한 진리에 입각한 사회가 못됩니다. 우리가 진리에 입각해서 진리에 비추어보고 진리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비로소 가정이나 사회나 어느 어느 곳이나 진정으로 평화와 행복이 보장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리를 불교전문술어로 말하면 그때는 진여眞如 그럽니다. 진眞자, 같을 여如자. 어째서 그런고 하면 모두가 한결같이 오직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보통 우리가 세간적世間的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 논리적論理的으로는 , 진여 진리 그러면 , 우리 중생의 생각과 달리 진리가 저만치 대상적으로 있거니 이와같이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진리를 보지만, 부처님의 진여는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모든 것이 본래로 존재의 실상實相이 바로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만유宇宙萬有, 나나 너나 자연계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진여眞如로, 진리眞理로 돼있습니다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리적인 면에서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그럽니다. 성품으로 말하면 불성인 것이고 또는 이치로 말하면 진여 말입니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지 본래 뜻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우선 편할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천차만별로 보지만 바로 보는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한결같이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표독한 업을 많이 지어서 금생에 살인죄를 범한 사람도 진여불성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이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청화 스님|작성자 일용>

 

*화엄가들은 <화엄경>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보고 있으며, 화엄의 세계는 법계연기(法界緣起) 세계라고 보고 있다. 법장은 화엄종의 종취를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라고 밝히고 있다. 법계연기란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 진실 자체의 연기의 모습으로 나타내어진 것으로 어떠한 실체성이나 고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계연기설은 지엄에게서 틀이 보이며 청량 징관을 거쳐 규봉 종밀에 와서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확정된다.

 

화엄사상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법계(法界)라고 한다. 두순의 <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는 진공관(眞空觀),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 법계삼관(法界三觀) 설하고 있다. 먼저 진공관(眞空觀) 모든 법은 실성이 없어 () ()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眞空)임을 관하는 것이다.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차별있는 사법(事法) 평등한 이법(理法)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함을 관하는 것이다.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 우주간의 온갖 사물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지엄은 법계연기를 보리정분의 정문(淨門)연기와 범부염법의 염문(染門)연기로 나누고 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 인불가설(因分不可說) 나누고 그것이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 보현경계(普賢境界)라고 하고 있다. 종밀에 이르러서는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발전하게 된다. 사종법계(四種法界) 사물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의 관계를 설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법계(法界) Dharma-dhatu 번역어로 연기현전하는 우주만유이다. 법계의 () 일심(一心)으로 원명구덕(圓明具德) 일심이며, 총해만유(總該萬有) 일심이다. 따라서 법계란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 각각의 법이 자성(自性)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법계를 설명하는데 () ()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 것이다.

 

사종법계는 ()법계, ()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이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를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법계는 모든 차별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 현상, 사물, 사건 등을 () () 뜻한다. 각각의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개체간의 공통성보다는 차별적인 면에 촛점을 맞춘 이다. ()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 () 가리킨다. 궁극적 () 총체적 일심진여(一心眞如)이며, ()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간의 동일성, 공통성에 촛점을 맞춘 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는 () (), 본체계와 현상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유기적으로 연걸되어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理事無碍)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모든 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 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無盡緣起)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불교 인터넷 방송>

 

*보편적 연기론 법계연기(法界緣起) -梵水-

진여란 사물의 참된 상태로 정적인 의미일 때, 시공(時空), 형체(形體), 시종(始終)의 구별이 없지만, 동적(動的)일 땐 외적인 생멸의 상태를 취한다. 따라서 세 가지의 연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12인연에서 논해진 것과 같은 업감연기이며, 둘째는 아뢰야식연기로 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기원을 밝히는 진여연기가 그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물의 생성에 미치는 상호 연관성, 즉 보편적인 연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에 진실의 세계에는 독립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이 있다. 법계(法界)란 모든 존재의 총칭으로 존재의 종류, 본성 등 다양한 뜻을 지녔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세계 또는 우주 전체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 자체인 진여(眞如)이다. 이 가운데 인과론적인 입장에 법계를 논할 땐,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우주를 가리킨다. 연기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단독으로 생기하거나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계 연기설 역시,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여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연기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모든 차별적인 존재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함으로 모든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일체즉일(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상적 우주 속에서 모든 존재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의 실존과 활동에 아무런 장애를 유발하지 않는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존재하므로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으로 대표되는 존재 역시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고 동시적으로 흥기(興起)한다는 생각이 보편적 인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생 철학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총합 철학이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우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사법계(事法界)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이며,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법계란 모든 사물을 개별적으로 차별하여 보는 세계이다. 즉 여러 사물 가운데 통일성은 보지 않고 다양한 차별만을 보는 것이다.
② 이법계(理法界)
 사법계의 무한한 다양성도 그 본성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동일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동일성을 이법계에서 논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성의 측면으로서, 통일성이란 모든 사물의 무차별 동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이 무실체(無實體)라는 점에서 무차별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진공(眞空, 無我)①이며, 이법계의 주된 내용이다. 또 사물이 무실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의타적(依他的)이라는 말로 진공의 이법계는 무실체성(無我)이라는 부정의 면과 의타성(依他性, 緣起)이라는 긍정의 면을 모두 가졌다. 그리고 의타연기(依他緣起)의 이(理)는 만상을 일관하는 이치이므로 이법계(理法界)라 한다.① 경험적 분별 세계의 사물이 각기 고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이(理)와 사(事), 즉 무차별 동일의 세계인 본 체계와, 차별의 세계인 현상계는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속에 있다. 곧 이(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연을 따라 사(事)로 드러나고, 사(事)이므로 그 본체는 무자성이다. 따라서 이와 사는 서로 융합(融合)하여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법계는 사법계의 모든 현상에 공통된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법계에서 독립된 이법계란 없으며 이법계를 떠난 사법계도 없다. 이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는 고래로 수파불리(水波不離)로 설명되고 있다. 물은 본체인 이(理)로, 파도는 현상인 사(事)에 비유된다. 즉 파도와 물은 서로 다르나 체성(體性)은 하나라는 상즉(相卽)의 원리로 설명되고 있다.
 이사무애(理事無碍)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이(理)의 전체는 일체의 사(事)에 고루 미치고 있음과 동시에 각각의 사(事)에도 이(理)의 전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것은 사의 전체에 편재해 있는 이가 동시에 개개의 사에 내재함으로 전체가 부분 속에 있고, 부분이 전체 속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의 보편성과 사의 개념성이 서로 뒷받침하여 보편성 전체 속에 개별성이 있고 개개의 개별성 속에 보편성의 전체가 갖추어져 있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모든 존재들이 서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고 한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는 외형상 차별적인 존재이지만, 이사무애(理事無碍)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체는 전체 속에 있고, 전체는 개체 속에 있으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물 속에 동일한 이의 전체가 있다면, 모든 개개의 사물은 서로 동일한 구조 속에 있게 되므로 개체와 개체는 일대 일로 대응하여 서로 타를 함용하고, 또 함용 된다(주편함용(周遍含容)).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무애 없이는 사사무애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이사무애에 그쳐서는 사사무애가 될 수 없다.


 이상 사종법계(四種法界)를 구별하여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여법성(眞如法性)에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수연(隨緣)하여 만법이 되는 방면에서 사법계를 세우고, 불변(不變)하는 만법의 체에서는 이법계를 세운다. 그리고 불변과 수연의 교섭 관계에 대해서는 이사무애법계를 세우며, 수연의 법이 상호 교섭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세운다. 이 말은 각각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보는 사법계(事法界)와, 차별적인 개개의 사물에서 동일성 또는 공통성을 보는 이법계(理法界), 그리고 전체 속에 개체가 있고,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은 서로를 포함하고 포함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진여의 수연과 불변에 관련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법계의 모든 사물은 차별적 관계를 가지지만,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음으로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적이거나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만유를 모두 진공(眞空, 無實體)의 관점에서 볼 때, 대립하던 차별적인 존재들은 실제로는 동등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관계를 원융무애(圓融無碍)라 하며,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로 나타낸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 볼 때, 그것은 단독의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 전 우주가 되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하면, 위와 같은 사실에 입각한 하나의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보고 이것을 우주 성립의 체(體)인 동시에 전 우주를 말미암아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法界) 무진연기(無盡緣起)라 한다.

<좋은인연 불교학당>

 

[왜 그물 網(망)을 자주 쓰느냐? “업” 하면, 내 업하고 네 업이 전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 다른 이도 그냥 알아차리고 또 그 다른 사람의 업이 튀어나오면 나도 알아요. 그것이 상호연관성, 법계연기 성, 즉 법계연기로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 앞산과 뒷산이 나하고 아무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다 연관이 되어있고 관계가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산에 가서 나무 한 그루를 새로 심는 것과, 거기 있던 나무를 잘라버리고 뽑아버리는 것이 그 산 전체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칩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영향을 끼치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영향을 끼치고  ‘전부 그물이 짜여져서 있듯이 우주법계 전체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화엄경의 법계연기설입니다. 

그래서 그물 자를 잘 쓰는 겁니다.]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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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阿羅漢)이 갖추고 있는 3가지의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

 

*三明= 붓다나 아라한이 가지는 세가지에 대해 밝게 아는 불가사의한 능력 ①宿命智明· ②天眼智明· ③漏盡智明. 천안지·숙명지·누진지라고 부르며,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의 경우에 삼명이라 하고, 부처님의 경우에는 삼달(三達)이라 한다.

[智明= ‘꿰뚫어 앎’이라는 의미로 전생을 보고, 내생을 보고, 현생에서 번뇌를 모두 끊을 수 있는 지혜.]

 

 천안지명, 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자기나 다른 사람의 미래 세상에 대한 일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본다.

거리의 멀고 가깝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世間)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가지가지의 유형(有形)과 색(色)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천안명은 단순히 거리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세계관에 가까운 지혜를 말하는 으로 일체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에 쌓여 있음을 여실하게 보는 것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비롯해서 육도(六道)의 온갖 중생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아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아귀에 빠지고 축생에 떨어지는 육도 윤회는 모두 인과 윤회의 법칙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천안명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과의 올바른 법칙을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안명은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중생의 전현실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모두 꿰뚫어 보는 지혜의 을 말합니다. 중생에게는 그런 눈이 없어서 전도된 눈으로 모든 것에  집착하고 부질없는 것에 가치를 두어 언제나 고통을 초래하고, 육도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윤회하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다룬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던 날 새벽에 천안명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 쌓여 있음을 여실히 보시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숙명지명, 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자기나 다른 사람의 지난 생의 일생이 즉 전생을 아는 지혜를 말하며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즉 지나간 과거생의 모든 일들을 자유 자재로 아는 지혜, 다시 말해서 전생(前生)의 일을 아는 신통력입니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우리의 전생을 숙세(宿世)라고 합니다. 숙명통은 겹겹이 쌓인 우리 과거 전생의 일을 밝게 보아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을 다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역시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은 사람들의 전생을 보시고 너는 전생에 어떠어떠했던 누구인데 어떠어떠한 일 때문에 지금 그 과보를 받는다는 형식의 설법을 하시는데 그처럼 전생 일을 환히 아는 것을 숙명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숙명명은 연기(緣起)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법칙을 여실히 아는 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숙세의 업연은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요.

 

 누진지명,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로 번뇌를 끊고 생사의 속박을 벗어나 열반의 이치를 깨달아 얻는[證得] 지혜를 말한다. 번뇌가 멸진하여 번뇌가 없는 心解脫과 慧解脫을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불교에서는 세 번째 누진지가 가장 중요시된다.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최고의 신통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능력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누진지이다.

누진명은 이생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는 지혜를 말합니다.

앞의 천안명을 통해서 육도 중생의 전현실적인 삶을 관조한 다음 숙명명을 통해서 숙세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게 되면 오늘의 자기 존재를 모두 알게 됩니다. 즉 인간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모두 알기 때문에 오늘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며, 존재를 둘러싼 고(苦)원인을 환하게 꿰뚫어 보아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알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끊을 있습니다.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은 천안명을 얻어 중생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신 다음 다시 숙명통을 통해 모든 생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밝게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진명을 얻어서 모든 번뇌를 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기 불교 경전에 의하면 三明으로 붓다는 정각을 성취하였다. 순차적으로 세 가지 지명을 증득하고 정각을 이루는데, 초야에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인 숙명지를, 중야에 중생의 생사를 있는 천안지를, 후야에 번뇌의 소멸을 이룰 있는 누진지를 성취하여 성불하였다.

삼명은 四禪에 의하여 발생한다. 사선을 순차적으로 증득한 뒤, 마지막 제4선에서 삼명을 성취하게 된다. 사선은 禪定·三昧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선에 의해 맑아진 마음 상태에서 세 가지 지혜를 얻고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육통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하는 것으로 삼명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한 것을 말합니다.

삼명이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나 또는 지혜의 이라는 측면이 강한 반면 육통(六通)불가사의한 능력,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게 갖추어진 자유자재한 지혜광명의 신통이며, 이로서 어둠과 어리석음을 깨트리며, 삼명(三明)가지를 보탠 것이 육통입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함.]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수행을 통(通)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神] 능력.]

 

1. 천안통(天眼通)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중생들을 살펴보는 지혜, 보통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

일체 세간의 멀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모든 고락과 가지가지의 유형과 색을 밝히 내다볼 수 있는 자유 자재한 신통력으로 이는 바로 중생을 향한 자비의 힘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무명으로 고통받는 중생이 어느 곳에 있든 부처님은 능히 그 모습을 보시고 해탈의 가르침을 주시는 능력으로, 고통 받는 중생 구제를 위해 필요한 권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2. 숙명통(宿命通) 자신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지혜 즉 모든 생명이 지나온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신통력.   

 

3. 누진통(漏盡通) 번뇌를 제거하는 능력으로 부처님만이 갖추신 누진통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신통력으로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4. 천이통(天耳通) 보통 인간의 귀로는 듣지 못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

세간 일체의 좋고 나쁜 말, 멀고 가까운 말, 또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들의 소리까지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자재한 능력으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발원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  단순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이해한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5.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아는 신통력. 요즘 말로 독심술(讀心術)같은 신통력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타심통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때는 룸비니 동산에서 5비구들을 만났을 때,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이 가까이 오셔도 일어서서 경배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막상 그들에게 다가서자 그들은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오는 등 성자를 맞이하는 예를 다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대들은 나를 아는 체도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죠.

그들의 마음을 다 이미 알고 계셨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타심통은 또 유심히 봐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선종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법을 전하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그 뜻을 알고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粘花微笑) 같은 것도 결국 타심통이라는 연결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타심통 역시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 차원이 아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의도로 그 같은 행동을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호의든 악의든, 그 상대방의 행위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자세를 가져서 먼저 남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아량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6. 신족통(神足通) 또는 여의통(如意通)은 크고 작은 몸을 나타내서 자기 생각대로 자유자재하게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말하며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축지법과 비슷한 개념 또는 요즘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공간이동과 같은 개념입니다.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가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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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果(사과)

초기불교 이래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의 4가지 수행 단계[] 도달 경지[]  말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 사도사과(四道四果), 사향사득(四向四得), 사쌍팔배(四雙八輩), 사과향(四果向), 팔보특가라(八補特迦羅), 팔현성(八賢聖), 팔성(八聖), 팔배(八輩)

예류(預流)= 수다원(須陀洹) 예류향: 예류과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예류과; 예류에 도달한 상태

예류과의 증득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제자는 예류에 들도록 이끄는 “네 가지 요소”를 닦아야 한다. ①지혜롭고 있는 참된 사람[스승] 섬길 , ②정법[참된 ] 배울 , ③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임[如理作意], ④윤리[]·집중[]·지혜[] 가지 실천[三學] 닦음으로써 성자의 법에 이르게 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예류가 성자는 가지 덕목을 갖춘다. ①붓다, ②담마, ③상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의 확립, ④성인에게 친숙하고 집중에 도움이 되는 도덕적 덕목인 다섯 가지 윤리[五戒] 굳게 지키는 것이다. 법의 진리를 보고 나서, 예류는 남아있는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더욱 통찰을 길러 다음의 이정표인 일래를 깨닫는 것이다.

일래(一來)= 사다함(斯陀含) 일래향; 일래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일래과: 일래에 도달한 상태

일래의 단계는 탐욕·분노·무지. 가지 번뇌의 뿌리를 뽑을 정도로 약화시켜 도솔천 욕계에 번만 윤회하여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예류 혹은 일래를 얻은 제자는 다음의 단계인 불환과 아라한으로 나아갈 있다.

불환(不還)= 아나함(阿那含) 불환향: 불환을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불환과: 불환에 도달한 상태

불환의 단계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의 소멸을 통해 도달하고, 다섯 가지 높은 족쇄만을 남겨 놓는다.

응공(應供)= 아라한(阿羅漢) 아라한향: 아라한을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

                                        아라한과: 아라한에 도달한 상태

아라한이 되면 무지를 뿌리로 하는 모든 번뇌가 소멸된다.     

*향은 (, magga)라고도 한다.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제자[聲聞] 가운데 성자가 제자들을 쌍의 여덟 무리[四雙八輩] 불리운 이들이 사향사과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붓다의 제자들이 도달할 있는 성자의 최고 경지가 아라한이었고 아라한이 되는 길에 대해서 세밀한 설명을 제시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독특한 수행론과 번뇌론에 근거해서 사향사과를 점진적인 깨달음으로 설명하고 있고, 테라와다에서는 지혜의 성숙단계에 따른 사향사과를 설명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사향사과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제자를 성문승(聲聞乘) 또는 소승(小乘)이라고 하여, 붓다가 되는 보살승(菩薩乘) 대비시킨다. 그리고 아라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살승(菩薩乘)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한다.

사향은 사과라는 깨달음의 결과에 도달하는 원인이 되는 깨달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예류향은 성자가 되는 최초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견도(見道)라고 하며,

예류과에서 아라한향까지는 남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하는 단계인 수도(修道)라고 한다.

마지막 아라한과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사향사과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성자의 새롭게 제거된 족쇄[번뇌] 남아 있는 윤회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제거된 번뇌(족쇄) 남아있는 윤회
예류(預流 )=수타원, 소따빤나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 의심,
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
인간과 욕계 천상에 최대 7 윤회
일래 (一來 )
사다함, 사까다가미
새로운 근절 없음.
탐욕, 분노, 무지의 엷어짐
욕계(도솔천 ) 윤회
사악도(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떨어지지 않음
불환 (不還 )
아나함, 아나가미
감각적 욕망과 악의(惡意) 색계 (정거천) 즉시 태어남 (化生)
응공 (應供 )
아라한, 아라하따
색계(色界) 대한 갈망,
무색계(無色界) 대한 갈망,
아만, 들뜸, 무지
없음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남

(참고: 한국민족 대백과)

 

사과(四果)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종교적 체험을 크게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는 것으로,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 사과설(四果說) 바로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 세가지 결박의 번뇌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르킨다

둘째의 일래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 . 치의 셋도 약화시켜 세상에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 다섯가지 결박의 번뇌를 끊고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 일체의 번뇌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성문사과(聲聞四果) 설명

  1. 수다원(須陀洹, Sotapanna) :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흐름에 참여한 , 불도 수행에 대한 확신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의 3가지 족쇄를 끊은 성자로서 성문사과의 번째 지위다.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성스러운 흐름(八正道) 들어섰다는 뜻으로 입류(入流) 또는 예류(預流)라고 하며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역류(逆流)라고도 한다.

삼보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으며 계를 갖추고 산다면 수다원의 자질을 갖췄다고 말할 있다. 아무리 늦어도 여덟 번째 생을 받지 않고, 일곱 생만에 아라한이 된다. 그래서 수다원은 파멸되지 않는 , 결정된 , 깨달음에 이르는 이라고도 불린다.

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 악도(惡道, 지옥·아귀·축생)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2. 사다함(斯陀含, Sakadagami) : 일래는 사다함(斯陀含)이라고 음역되는데 수행의 도상에 있어서 윤회의 세계(욕계)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의 족쇄는 이미 소멸되었고, 감각적 욕망 진에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미세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진에는 남아 있는 성자(거친 형태의 탐욕과 성냄을 극복한 성자)이다.

  인간과 천상에 각각 번씩 생을 받은 뒤에야 열반을 증득한다. , 인간 세계에서 사다함과를 얻으면 반드시 하늘 세계에 갔다가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와 열반을 깨닫고, 하늘 세계에서 사다함과를 얻으면 먼저 인간세계에 갔다가 다시 하늘 세계로 돌아와 열반의 증과를 얻게 된다. 이렇게 천상과 인간 세계를 왕래하므로 일래과(一來果)라고 한다. 지혜를 얻어 번뇌와 미혹을 벗어나 진리를 보는 단계인 견도(見道) 이룬 수도(修道)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3. 아나함(阿那含, Anagami) : 불환은 아나함(阿那含)이라고 음역되는데 이상 윤회의 세계(욕계)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한다.

  오하분결은 모두 사라지고, 오상분결 , 도거, 무명이 약화된 성자이다. 이번 생에만 욕계에 머무르고 나면 다시는 윤회의 세계로 오지 않는다.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하며 다시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 번뇌의 윤회에 휩쓸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나함은 욕망에 꺼들리지는 않지만, 물질과 순수한 정신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색계와 무색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며 아직까지 무명(無明) 뿌리가 남아 있어서 존재의 참된 이치를 완전히 꿰뚫은 수준은 되어 사성제(四聖諦) 완전히 증득하지는 못했다고 있다.

  4. 아라한(阿羅漢, Arahat) : 무학위(無學位)로서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煩惱) 다하였으며, 해야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생각되었다. 무학위를 간단히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아라한과 이전의 단계를 통칭하여 유학위(有學位, 배울 것이 있는 계위) 또는 유학(有學)이라고 한다.

  가지 족쇄가 모두 소멸되어 이상 태어남이 없어 윤회하지 않는 성자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것을 공양 받아도 업의 흔적으로 남지 않아 마땅히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 해서 응공(應供), 또는 응당히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므로 응진(應眞)이라고 한다. 아만심이 없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번거로워할 일도 없고 들뜨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  중생들은 다음과 같은 족쇄에 묶여 있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족쇄는 오상분결 5가지와 오하분결 5가지로 모두 10가지이다.

 

. 오하분결(五下分結) : 유정(有情) 욕계(欲界) 결박(結縛)시키는 5가지 근본 번뇌

  1. 유신견(有身見) : 자아가 있다는 견해. 오온이 , 나의 ,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

  2. 계금취견(戒禁取見) :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있다고 집착하는

  3. 의심() : 불·법·승 삼보나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4. 감각적 욕망(欲貪) : 욕계의

  5. 진에(瞋恚) :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의 성내는 마음

 

. 오상분결(五上分結) : 유정을 색계·무색계에 결박(結縛)시키는 5가지 번뇌

  6. () : 내가 남보다 낫다, 못하다, 동등하다 하는 마음(我慢)

  7. 도거(掉擧) : 들뜨고 불안한 마음

  8. 무명(無明) : 모든 해로움과 괴로움의 근본 뿌리로 사성제를 모르는

  9. 색탐(色貪) : 감각적 욕망을 벗어났을 나타나는, 순수 물질의 세계와 느낌에 대한 집착(色界欲)

  10. 무색탐(無色貪) : 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나타나는, 순수 정신세계나 그런 인식에 대한 집착(無色界欲)

(참고 kyoungahn 블로그)

 

성문(聲聞): 성문승(聲聞乘) 준말. 가르침을 듣는 수행승. 원래는 원시 불교 성전으로, , savaka라는 것은 출가(出家)에서나 재가에서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불제자(佛弟子) 의미했다. (재속신자(在俗信者) 포함되고 있음.) 후대에 이르러, 불교에서는 교단(敎團) 구성하고 있는 출가 수행승만을 말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 수행하는 사람. 자신의 깨달음 밖에 생각하지 않는 성자. 자기의 완성만을 구하여 힘쓰는 출가(出家). 자기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것에 전념하는 성자. 자기의 완성에만 힘쓰는 출가승.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수행할 있는 제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무한히 오랜시간에 걸쳐 수행한 결과, 아라한(阿羅漢) () 도달함. 사향사과(四向四果) 성자. 수행에 있어서, 사제(四諦) ()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 대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 독각(獨覺) 견주어, 이것을 이승(二乘)·소승(小乘)으로서 낮추고 있다.

 

성인(聖人): 부처님. 깨달음을 얻은 사람. 또는 제자까지도 합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음. <俱舍論 12 9>

견도(見道)이상의 () 있는 사람.

  상인(上人) 반대하여 더욱 존중하여 말함. (해석 ) 외전(外典 : 불교이외의 성전)에서 이르되, 미맹(味萌) 아는 것을 성인이라고 한다. 내전(內典 : 불교의 성전)에서 이르되, 삼세(三世) 아는 것을 성인이라고 한다. <撰時鈔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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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해탈(八解脫)-1

해탈(解脫) 또는 모크샤(산스크리트어: मोक्ष)는 다르마 계통의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에서 몸과 마음의 고뇌와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또는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해탈에 대한 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과 목표를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解脫해탈이란 '해방된다'·'자유로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심신의 고뇌·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인생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여실하게는 지견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해탈에의 도는 중도(中道)이며, 구체적으로는 8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의 이상으로 열반과 동일시되고 있다."

[위키 참고]

 

팔해탈(八解脫)-2

解脫이란? 불교에서의 해탈이란 최종의 모든 번뇌로부터의 벗어남에 의해서 윤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을 뜻한다. 그렇다면 八 解脫이란 해탈하는 여덟 가지 방법인가? 아니면 여덟 번의 해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여덟 가지 해탈 중 하나만 성취해도 된다는 이야기 인가??

먼저 八 解脫에 대한 경전이나 論書의 해설을 참고해 보자. 

1. 운허(耘虛)스님 역 법화경 P.162 수기품 

(1). 일념으로 생각하여 色慾을 제거하고

(2).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고

(3). 貪心이 일어나지 못하게 다스려서 냉철함을 유지하고

(4). 心身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5). 무한한 공간을 생각하여 外界의 차별상을 없애고

(6). 마음의 작용과 몸이 함께 무한 한 경지에 도달하며

(7).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이르고

(8). 그 근원이 항시 현실에 나타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2. 장아함경 卷8(大) 권1 52 上

八 解脫이란 삼계의 번뇌를 破하고 그 繫縛으로부터 해탈하는 8종의 禪定을 말한다.

(1). 먼저 어떤 대상을 오로지 想念하여 욕정을 제거하고

(2). 상념 중인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여 정신통일을 하고

(3). 그 위에 外境으로부터 마음을 분리하여 냉정하게 갖고 심신을 共히 이 단계에서 청정한 경계에 이르게 하고

(4). 오직 무한 공간만을 생각하여 외계의 차별상을 멸하고

(5). 그 마음의 작용과 신체도 무한한 경계에 달하며

(6). 그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달하고

(7). 그 근원처가 항상 현실로 나타나는 경계에 달하며

(8). 때로는 완전한 無의 경계[滅盡地]에 달함을 포함한다. 

3. 장 아함경<폐숙경(弊宿經)>

(1). 물질계차원의 생각을 물질계 그대로 관찰하는 것.

(2). 내적으로 물질계차원의 생각이 없이 外境을 관찰함.

(3). 청정한 해탈.

(4). 물질계차원의 想念을 초월하여 공처해탈에 주착 함.

(5). 공처를 초월하여 識處에 주착 함.

(6). 識處를 초월하여 무소유처에 주착함.

(7). 무소유처를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주착 함.

(8).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하여 想受滅定에 주착 함.   

4. 대반열반경

(1). 內有色想 觀外色 解脫

(2). 內無色想 觀外色 解脫

(3). 淨解脫 身作證 俱足住 解脫

(4). 空無邊處 解脫

(5). 識無邊處 解脫

(6). 無所有處 解脫

(7). 非想非非想處 解脫

(8). 滅盡想定 身作證 俱足住 解脫

 

이상의 다양한 경서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八 解脫이란 각각 어떠한 경지를 설명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위의 의문점을 완전히 해소해 준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번역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八 解脫의 내용 

일반적으로 慧解脫이나 俱解脫 이라고 할 때의 해탈은 그 원어가 vimucti로 “벗어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八 解脫의 解脫은 그 원어가 vimoksa로서 “sa”는 희구법이 적용되는 문법법칙의 작용으로서 “…하려고 희구함”의 뜻이 된다.  따라서 解脫 이란 解脫하려고 하는 여덟 가지 禪定이라는 내용이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 →색계의 경지

2). 내무색상 관외색 해탈→ 색계의 경지

3). 정해탈(subha; 맑고 밝은 것)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

4). 공무변처 해탈→무색계의 경지

5). 식무변처 해탈 →무색계의 경지

6). 무소유처 해탈→무색계의 경지

7). 비상비비상처 해탈→ 무색계의 경지

8). 상수멸 해탈→무색계도 벗어난 경지 

八 解脫은 그目的이 해탈을 하기위한 선정이라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八 解脫이란 “8가지 해탈하려고 하는 선정의 경지”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는 九次第定을 다른 각도에서 여덟 단계로 구성한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 선정이란 해탈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 될 수 도 있다.   

“요가”는 선정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 해서 선정에 들면 즐거움과 기쁨이 있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괴로운 현실에 돌아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부처님께서는 이를 버리고 중도를 택하게 것이라 있다

vimoksa와 비슷한 말이 “pratimoksa ”로서 계율의 조목만 기록한 목차 같은 것을 말하며 이는 “해탈하기위한 계율”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계율 또한 해탈을 원하는 자가 지켜야할 것이기 때문에 목적을 분명하게 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漢譯의 문제를 예로 든다면 화엄경에서 10바라밀이 나오는데 육바라밀의 6번이 智慧바라밀이고 여기에다가 願바라밀. 方便바라밀. 力바라밀 그리고 10번이 다시 知바라밀 이다. 그런데 智慧와 知가 무엇이 다른가?

이는 그 원어가 prajnya 와 jnyana로서 서로 다른데 漢文으로 번역하기는 힘든 것이기 때문으로서

prajnya는 안 것은 안 것이되 아직 알 것이 남아있는 미완성의 앎이고

jnyana는 모두 다 안 것을 뜻한다. 따라서 jnyana는 완성을 뜻한다.

智慧바라밀 prajnya 것은 것이되 아직 것이 남아있는 미완성의  

知바라밀→jnyana→모두 것을 뜻한 완성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은 완성을 뜻하는 단어인데 prajnya 어떻게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가? 라는 의문이 있을 있으나 prajnya 깊어가는 방향으로의 완성을 말하며 jnyana 다시 솟아오르는 방향으로의 완성을 말한다.

깊어져 가는 방향으로의 일단의 완성도 완성이므로 반야바라밀이란 말을 한 것이며 여기서 다시 위로 솟아올라 모두 완성한 것은 그야말로 최종의 완성이므로 그렇게 표시 된 것이다. 漢譯에서는 이러한 미묘한 문제를 명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八 解脫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경지에 들어가 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을 위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설명함으로서 보다 가까이 八 解脫의 경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九次第定을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여덟 단계로 다시 구분한 것인가 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九次第定은 불교수행의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내용으로서 먼저 색계의 4선인 색계1. 색계2. 색계3. 색계4선과 무색계의 단계인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그리고 이를 초월한 상수멸의 아홉 단계를 말한다.

八 解脫은 이 아홉 단계를 어떤 이유에 의해서 여덟 단계로 다시 배정한 것으로서 무엇을 빼고 여덟 단계를 만들었는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위에 있는 八 解脫의 설명을 보면 상수멸과 무색계의 4단계는 그대로 사용됨을 보아 색계에서 어떤 단계를 뺀 것으로 볼 수 있다.  색계의 4단계를 3단계로 줄이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다행히 색계에는 18천의 하늘이 있고 그 내용이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색계에서 무색계로 넘어오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으므로 八 解脫의 내용을 선별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색계선정 중에서 중요한 것은 色界 第4으로서 色界4禪에는 9개의 하늘이 존재하며 그 이름들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욕계의 六天: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색계의 18天

색계1선[離生喜樂] :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색계2선[定生喜樂] : 소광천. 대(무량)광천. 광음천.

색계3선[舍念樂住] : 소정천. 대정천. 변정천.   

색계4선[舍念淸淨]에는 9개의 하늘이 존재하므로 이 9개의 하늘을 세분해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1. A Group - 무운천. 복생천. 광과천. = 觀智 발생

2. B Group - 무상천. 무번천. 무열천. = 의성지 발생 - 팔정도수행

3. C Group -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 = 신족통 발생 - 예류과(수다원) 

무색계(색구경천에서 색에 관한 생각은 완전히 사라진 경지)

4. 더 깊은 삼매정진 - 공무변처 = 천이통 발생 - 일래과(사다함)

5. 더 깊은 삼매정진 - 식무변처 = 타심통 발생 - 불환과(아나함)

6. 더 깊은 삼매정진 - 무소유처 = 숙명통 발생 - 아라한과(초입 아라한)

7. 더 깊은 삼매정진 - 비상비비상처 = 천안통 발생 - 주법 아라한 

멸계[滅界(열반의 단계)]

8. 더 깊은 삼매정진 - 상수멸 = 누진통 발생 - 삼명(不動)아라한 

여기에 8가지의 지혜가 나오는데 그 이름은 관지. 의성지.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또는 明). 천안통(또는 明). 누진통(또는 明)으로 구별되며 색계4선에서 얻는 2개의 지(智)와 무색계에서 얻는 6개의통(또는 3통과 3명)의 8 智慧가 발생함으로 해탈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8단계로 구별하려면 아무래도 8智慧를 따라 구별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八 解脫은 색계의 제1선에서부터 제3선까지는 지혜의 발생단계가 아니므로 이를 제외시킨 것으로 보이며 각 단계에서 나름대로 어떤 지혜를 얻는 단계를 해탈을 하려고 하는 단계로 정함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 된다. 

따라서 색계 제4선의 A구릅말미에서 觀智가 발생함에 따라 색계 제4선의 B구릅으로 넘어오므로 이 觀智가 발생하는 단계를 八解脫의 첫 번째인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이라고 놓은 것이며 意成智의 발생을 (2)내무색상 관외색 해탈로 놓고 (3)정해탈(淨解脫)은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라 함은 色界에서 神足通이 발생함으로 해서 無色界에 넘어오는 것이므로 色界와 無色界의 경계라 하는 것이며

그 다음부터는 無色界 선정(禪定)의 이름인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을 그대로 사용함은 이 단계에서 발생하는 智慧를 얻는 것이 그 단계의 八 解脫의 내용임을 알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八 解脫의 첫 번째인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內有色想 觀外色 解脫) 즉 안으로 色想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으로 色을 보는 경지의 해탈과 관지(觀智)의 내용이 같아야 한다. 실제로 觀智의 내용을 음미해보면 이것이 입증됨을 볼 수가 있다. 

관지(觀智)란 색계3선에서는 18界를 實相으로 보는 경지인데 중층(重層)구조를 가진 18界에서 육근 육경이라는 주관과 대상의 이분법적 관념에서 地. 水. 火. 風의 四大로 분석해봄에 따라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서 육계(六界)라는 단층구조로 바뀌게 되고 육법성이 사라지므로 해서 想이 살아지면 색계 제4선 B구릅의 첫 번째 하늘인 무상천(無想天)에 들게 된다. 이처럼 대상으로서의 實相과 實相 발견의 주체가 하나 되는 것에 의해서 智慧가 발생하니 이것을 관지(觀智)라고 한 것이다.

18界로 봄은 덩어리로 보는 것이고 四大로 본다는 것은 이를 분석해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덩어리로 보는 것을 상(想)이라고 하는데 이를 분석해 봄으로서 상(想)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八 解脫의 첫 번째 단계는 色界의 경지로서 안으로 색상(色想)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으로 色을 보는 경지의 해탈이란 뜻에서 내유색상 관외색 해탈(內有色想 觀外色 解脫)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 無想天은 잠시 존재하는 것이고 육계(六界)가 더 분석됨에 따라 五蘊 즉 색. 수. 상. 행. 식으로 더욱 분석됨에 의해서 여기에 애취(愛取)가 붙어서 오취온(五聚蘊)이라는 想이 발생하게 됨으로 다시 想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修行者는 이 想 역시 사라져야할 대상으로 알게 되며 더욱 수행정진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오취온(五聚蘊)도 무상(無常)하고 괴로워서 무아(無我)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취온(五聚蘊)이 무아(無我)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正見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正見에 의해서 한 智慧가 발생하니 이를 의성지(意成智)라고 하며 意成智의 발생에 의해서 색계 제4선의 C구릅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 意成智 발생의 단계를 八 解脫의 두 번째 과정인 내무색상 관외색 해탈이라는 경지로 표현한 것이다. 즉 안으로 色想이 사라졌으며 아직은 色界의 단계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想은 살아졌지만 아직 구조적인 왜곡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37조도품의 마지막 수행인 八正道의 수행이 이곳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八正道의 마지막 부분인 정정(正定)에 의해서 한 智慧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이제 까지 지(智)라고 불러주든 智慧와 구별해서 통(通)이라고 불러주면서 신족통(神足通)이라고 했으며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결과를 얻은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예류과라고 불러주고 있는 것이다. 

神足通이 발생하면 色界에서 無色界로 넘어오게 되며 공무변처에 들게 되는데 이 색계를 넘어 무색계로 넘어오는 신족통의 단계를 “정해탈(淨解脫)” 이라고 한 것으로서 이를 “정해탈(淨解脫)”이라고 한 것은 색계4선을 사념청정(舍念淸淨)의 경지라고 하고 있으며 이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기억을 갖추고 기쁨과 즐거움을 떠난 이 경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뜻과 또 이 淸淨한 경지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정해탈(淨解脫)”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단계는 그 명칭이 九次第定의 단계와 같으므로 九次第定에서의 설명에 준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神足通부터의 경지는 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내용으로서 實相을 나타내는 부분이므로 말로서 모두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수행자가 내증(內證)에 의해서 알아내야할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八 解脫이 수행자에게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닥쳐올 경지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이정표이며 분류방법으로 보면 智慧차원의 분류라는데 착안해야 할 것이다.

修行者 여러분의 通察과 發展을 祈願합니다. 成佛하십시오.  [東山法師團 惠山 合掌]

 

팔해탈(八解脫)-3                                   

팔해탈은 8종의 觀念이며, 이 관념에 의하여 5欲의 경계를 등지고, 그 탐하여 고집하는 마음을 버림으로 배사라 하고,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3계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해탈이라 한다.

여덟가지 定의 힘으로 탐착심을 버리는 八背捨, 즉 8종의 觀念이며, 이 관념에 의하여 5欲의 경계를 등지고, 탐하여 고집하는 마음을 버림으로 배사라 하고,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3계의 번뇌를 끊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해탈이라 한다.

 

▷ 初禪과 제2禪에 의함.

(1) 色想이 內心에 있으므로 제거하기 위하여 外境에 있는 不淨觀을 수련한다.

(2) 內心의 色想은 사라졌으나 다시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不淨觀을 계속하는 것.

▷ 제4禪.

(3) 앞의 不淨觀의 心을 버리고 外境의 色想에서 청정한 면을 관하여 탐욕이 생기지 않는 淨解脫을 몸에서 깨닫고 구족하여 住하는 것.

▷(4)(5)(6)(7)은 차례로 四無色定에 의함

(4) 물질적인 相을 다 멸하여 空無邊處定에 들어가는 것.

(5) 空無邊心을 버리고 識無邊處定에 들어가는 것.

(6) 識無邊心을 버리고 無所有處定에 들어가는 것.

(7) 無所有心을 버리고 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가는 것.

(8) 受·想 등을 버리고 滅盡定에 들어가는 것.

또 (1)과 (2)를 둘로 나누고 (3)을 四分한 것이 八勝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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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世間)-1

세는 시간, 간은 공간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정 지어지는 일에  가지 다른 원인이 있을  있다. 하나는 필연적인 원인이고,  하나는 순전히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원인이다.

필연적인 것은 인과응보의 법칙대로 어쩔  없는 업보로 생기는 결과로서의 세간을 뜻한다.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은 한계 지어질 아무런 필연적인 원인 없이 이미 인과관계의 멍에를 벗어난 해탈경지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생겨난 세간을 뜻한다.

  가지 유형을 불교에서는 삼종세간(三種世間)으로 분류하는데,  이론은 우리나라의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에서 깊이 있게 전승되었다.

화엄사상의 삼종세간은 기세간(器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다.

기세간은 중생을 수용하는 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대지 등의 물질세계를 뜻한다.

중생세간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변천하고 피차가 서로 간격이 있는 세계로서 오음(五陰:五蘊, 마음과 몸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으로 구성되며, 인간·천상·지옥 등으로 존재양상에 차별이 있다.

지정각세간 부처나 보살이 방편으로 열어 보이는 세계로, 부처의 대지혜로써 치우친 견해를 여의고 세간과 출세간의 만법(萬法)을 두루 아는 세간이다.

신라의 의상(義湘)은  삼종세간 안에 일체의 법(法)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았다.

또한 천태종에서는 중생세간·국토세간(國土世間)·오음세간(五陰世間)으로 분류하는데, 국토세간은 화엄종의 기세간과, 오음세간은 중생세간과 같은 것이며, 오음세간은 중생세간과 국토세간을 다시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5온의 구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생겨나는 세간을 뜻한다.

 

세간-2

중생세간 = 중생세계. 

기세간 =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 생활환경. 器= 그릇. 우리가 지구라는 그릇에 담겨있으니까 그 그릇을 잘 보호하고 가꿔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자연환경)이 우리가 담겨 있는 그릇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이 다 무너지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우리도 역시 무너지는 겁니다. 환경이 썩으면 우리도 썩고, 환경이 불타면 우리도 다 불탑니다. 요즘 green, 녹색운동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활발합니까? 아주 필요한 겁니다. 이 기세간이라고 하는 의미 하나만 제대로 알면 그런 운동하는데 이론적인 밑받침이 아주 훌륭합니다. 

智正覺世間은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의 세계. 지혜로 정각한 세상입니다. [무비스님]

 

세간-3

세간=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불교 술어.

줄여서 세(世)라고도 하며, 깨지고 부서지게  것이라는  있다. 보통 세간이라고  때에는 세간에 속한 것도 포함하며 세상의 사물과 번뇌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세친의 〈불성론 佛性論〉에 의하면 '세'에는 부정되고 없애버려야  것(對治), 옮겨가는 것(不靜住), 진리에 어긋난 거짓(虛妄) 등의 3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세간은 일반적으로 3가지로 구분되는데, 이를 삼종세간이라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오음세간(五陰世間)·중생세간(衆生世間)·국토세간(國土世間)으로 삼종세간을 구분한다.

오음세간이란 색·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  5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세간

중생세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만들어낸 세간

국토세간 중생을 수용하고 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화엄종의 삼종세간.

기세간(器世間)=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중생  유정이라는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 국토세간과 같음

중생세간(衆生世間) 또는 국토세간은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유정이 거주하는 산하대지 등의 물질적 · 자연적 시스템  물리적 우주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 3계에 해당하고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지정세간(智正世間) 부처가 세간과 출세간(出世間) 법(法) 치우침 없이 모두 깨달아 얻은 세간이다. 세속이라는 의미의 세간에 대해 세간의 번뇌를 뛰어넘은 열반의 세계를 출세간이라고 한다.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5온이 공하다는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관점  '깨달음에 들어가는[入法界]' 길[離世間]의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 4향4과 · 9지 · 10지 · 42현성 · 52위 등의 수행계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고·집·멸·도(道)의 사성제에서 고·집의 2제(諦)는 세간에 속하고, 멸·도의 2제는 출세간에 속하는 진리이다.

위키

3종세간은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3가지 관점에서 바라보아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세간(世間)은 무위이자 무루인 출세간(出世間)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유루 · 무루의 유위의 세계를 말한다.

교학적인 면에서 보면, 출세간은 무위의 세계를, 세간은 유위의 세계를 말한다. 실천적인 면에서 보면, 출세간은 무루를, 세간은 유루를 말한다.

다만 화엄종의 3종세간에서 지정각세간 또는 지정세간은 부처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출세간에 해당한다. 힌두철학의 수론학파의 3종세간은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중생  유정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불교의 5취 또는 6도의 구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불교의 3종세간 가운데 

중생세간(衆生世間)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중생  유정이라는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5 또는 6도에 해당하고, 

기세간 또는 국토세간은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유정이 거주하는 산하대지 등의 물질적 · 자연적 시스템  물리적 우주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3계에 해당하고, 

5온세간 또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5온이 공하다는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관점  '깨달음에 들어가는[入法界]' 길[離世間]의 관점에서 나눈 것으로 4향4 · 9 · 10 · 42현성 · 52 등의 수행계위에 해당한다.

 

세간(世間)-4

범어 loka, 축약해서 세[世]라 하며, 로가[路迦]라 음역한다.

세[世]변화해 가는 것[遷流],

간[間]가운데 안이란 의미다. 보통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현상세계를 말한다.

현상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세간이라 한다. 이런 경우는 세속. 범속[凡俗]이란 뜻으로 세상의 사물과 번뇌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모든 현상을 지칭한다.

세[世]에는 부정해서 없애 버려야만 하는 것[對治], 끊임없이 변화는 것[不靜住], 진리에 어긋난 헛소리[虛妄]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불성론 권2] 세간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유정세간(중생세간): 생명체들이 사는 세간으로 중생세간. 유정계라고도 한다.

② 기세간(국토세간): 유정들이 살 수 있게 하는 산하대지 등을 말한다. 물기세간. 기세계. 기계[器界]. 기[器]라고도 한다.

천태종의 삼세간설

①유정세간(중생세간)

②기세간(국토세간)

③오음세간(오중세간, 오온세간); (1) (2)의 세간을 구성하는 오온을 말함.

유정세간. 기세간의 분류는 정보[正報]. 의보[依報]의 분류와 같은데 세간이라고 할 때는 미혹의 세계에만 통하고 보[報]라고 할 때는 미오[迷悟]의 두 세계에 통한다.

세간을 뛰어넘어 있는 것을 출세간[出世間]이라 하고, 보살의 계위나 지혜 선정 등에 세간과 출세간의 구별을 세운다. 예컨데 일반적으로는 미계[迷界]의 인과 [고. 집의 二諦]는 세간이며, 오계 [悟界]의 인과[멸. 도의 二諦]는 출세간이라 한다. 이 밖에 화엄종에선 일반적인 출세간[삼승교의 출세간]을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 출출세[出出世] 출출세간을 주장한다. [문화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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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三學等用(삼학등용)이라 하니  何者是三學(하자시삼학)이며  云何是等用(운하시등용)고.

"삼학(三學)을 함께 쓴다 하니, 어떤 것이 삼학이며 어떤 것이 함께 쓰는 것입니까?"

答  三學者(삼학자)는  戒定慧是也(계정혜시야)니라.

"삼학이란 계(戒)ㆍ정(定)ㆍ혜(慧)니라."

問  云何是戒定慧(운하시계정혜)오.

"어떤 것을 계(戒)ㆍ정(定)ㆍ혜(慧)라 합니까?"

 答  淸淨無染(청정무염)이  是戒(시계)요,  

   "청정하여 물들지 아니함이 계(戒)요,

知心不動(지심부동)하야  對境寂然(대경적연)이  是定(시정)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아 경계를 대하여 고요함이 정(定)이요,

 知心不動時(지심부동시)에  不生不動想(불생부동상)하며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 때에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며

知心淸淨時(지심청정시)에  不生淸淨想(부생청정상)하야  

  마음이 청정함을 알 때에 청정하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여 내지 선ㆍ악을 모두

乃至善惡(내지선악)을  皆能分別(개능분별)하되  於中(어중)에  無染(무염)하야  得自在者是名爲慧也(득자재자시명위혜야)니라.

   능히 분별하되 그 가운데에 물들지 아니하여 자재를 얻음을 혜(慧)라고 하느니라.

若知戒定慧體俱不可得時(약지계정혜체구불가득시)에  卽無分別者(즉무분별자)하야  

   만약 계ㆍ정ㆍ혜의 본체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 때에 곧 분별함이 없어서

卽同一體(즉동일체)니  是名三學等用(시명삼학등용)이니라. 

   곧 동일의 본체이니 이것이 삼학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이니라."}

성철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강설에서

 

▶ 지혜로우신 여러 분들의 글;  

  

{☆ 계(戒)가 곧 정(定)이며 정(定)이 곧 혜(慧)로서, 삼학을 함께 쓰면 생사(生死)에 해탈하여 열반로(涅槃路)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할 것이니 이것을 중도정각(中道正覺)이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돈오(頓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불교에서]

 

☆ 불교의 핵심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이다.

계(戒)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고, 더불어 잘 사는 마음을 지니고 속세의 부질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욱 박사는 지계(持戒)란 미안에 머물지 않아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는 것으로 진심(嗔心: 화)을 제거하는 이라 했다. 계(戒)를 성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忍)이다. 인(참는 것)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아량이요, 배려이다. 금강경에서도 인을 성취하면 야뇩다라샴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정(定)은 마음의 잡념을 비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다. 계를 잘 지키면 마음이 편하고 밝아져 정에 잘 들 수 있다. 가부좌하여 일로매진 하여 수행을 하면 정력(定力)이 높아지는 데 이 정력은 자신의 나쁜 업(業)을 사라지게 한다. 이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삼매에 들면 우주의 밝은 에너지가 몸에 들어와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혜(慧)는 개혜(開慧)이다. 정(定)으로 자신의 나쁜 없이 사라지면 마음이 안정이 되어 지혜를 얻는다. 개오(開悟)하여 대지혜(大智慧)를 얻어 우주의 진리를 보고, 우주 각개 공간의 진상을 보며, 신통이 크게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후 가장 강조한 것은 인과법(因果法)과 누구나 불성(因果法)을 지니고 있다는 평등사상이다. 카스트 제도가 공고한 그 당시 이 불성 사상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일성이었다.

[지리산 천년 3암자길에서]

 

삼학(三學)

① 삼학(三學)

계학(戒學):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실천법을 배우는 공부.

정학(定學): 맑고 고요한 마음을 내어 외부의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공부.

혜학(慧學): 맑은 마음에서 밝은 지혜를 내는 공부.

 

②삼학(三學)은 불교 수행의 기본으로 계(戒)를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지혜(智慧)를 이루는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을 말한다. 여기서 학(學)은 글자그대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학’과는 매우 다르다. 세간의 학문은 지식과 기술을 외부로부터 배우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내적(內的)인 수행(修行)을 말한다. 삼학(三學)은 모든 불교도들이 필수적으로 닦아야 될 으뜸가는 실천 덕목으로 생활의 근간으로 삼지 않으면 안될 만큼 중요하다.

계학(戒學; 계(戒)의 원어는 실라(sila)에서 비롯된 말로 ‘행위의 습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목적은 지악수선(止惡修善) 즉, 모든 악을 그치고 착한 행을 닦는데 있다. 이는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처럼 안 지키면 심판 받는 식의 남으로부터 받는 계(戒)가 아니라 스스로 받아 지키는 발계(發戒)이다.

계(戒)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不殺生-불살생), 남의 물건을 취하지 않는 것(不偸盜-불투도),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不淫行-불사음), 거짓말 하지 않는 것(不妄語-불망어), 술 마시지 않는 것(不飮酒-불음주) 등 5계(五戒)이다.

이 5계(五戒)는 다시 대승불교에 들어와 10선계와 보살48경계로 늘어나 자신만을 위한 선행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을 위하는 실천행으로 강조된다. 이것은 뒤에 섭율의계(攝律儀戒 : 악을 그치는 계), 섭선법계(攝善法戒 : 선을 행하는 계), 섭중생계(攝衆生戒 : 중생을 이익케하는 계)라는 삼취정계(三取淨戒)로 정리되었다.

한편 출가한 스님들은 교단생활에 따른 좀더 엄격한 출가계가 요구되어 비구가 250계, 비구니가 348계를 지키게 되어 있다. 계(戒)는 출가 스님이나 재가 불자 모두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계(戒)를 어겼다면 바로 참회해야 한다. 계(戒)를 함부로 어길 것 같으면 후에 나쁜 과보를 받게 됨은 물론 수행을 해도 절대 깨달음에 들지 못한다.

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다음의 삼학(三學 )가운데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5계(五戒)는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계(戒)를 받을 때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언정 계를 깨뜨리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과거 스님들 중에는 품속에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니는 분이 있었다. 그 칼을 계도(戒刀)라고 하는데 만약 자기의 손이 계(戒)를 어기면 손을 자르고 입이 계(戒)를 어기면 입을 찢겠다는 강한 의지의 상징인 셈이다. 옛 분들의 말씀에 부처님께 귀의해서 계(戒)를 받은 몸은 계체(戒體)가 되어 청정신이 된다고 하였다. 계(戒)의 청정,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정학(定學)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것이다. 정(定)은 산스크리트어 삼마디(Samadhi)를 번역한 말이다. 같은 의미를 지닌 말들로 선나(禪那 Dhyanu), 등지(等至 Samapatti), 등인(等引 Samahita)등의 용어가 있는데 경전에서는 이런 것들을 그냥 선정(禪定)이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한다. 계(戒)를 지켜 악(惡)을 조복 받고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닦는 사람은 이제 마음을 한곳에 두는 선정 공부를 수반해야 한다. 아무리 계(戒)를 엄수했다 해도 정(定)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데 정학(定學)이 없으면 뒤에 나오는 혜학(慧學)을 이룰 수 없고, 혜학(慧學)이 없으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이고득락의 경지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학(戒學)이 정학(定學)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면 정학(定學)은 혜학(慧學)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끊임없이 흐르며 작용한다. 마치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온갖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고 꺼지는 마음의 활동은 탐냄, 성냄, 어리석음 등의 온갖 번뇌를 야기 시키고 한없는 방황을 가져오게 한다. 때로는 보고 듣고 맛보는 경계를 따라 마음은 흘러가기도 하고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빠져있기도 한다. 정학(定學)은 바로 마음의 이러한 작용을 쉬게 하고 뒤에 나오는 지혜를 성취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 덕목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지붕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빗물이 새듯 마음을 굳게 수행하지 않으면 번뇌가 스며든다.”고 하셨다. 여기서 마음을 굳게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정(定)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그릇된 마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지럽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뇌를 차단시키고 마음의 고요를 가져오게 하는 정(定)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설명하면 세속적인 정(定), 몰입을 주로 하는 정(定), 지혜를 낳게 하는 정(定)이다.

①세속적인 정(定)이란 수행과는 관계없이 세상 생활 가운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악사가 악기를 다룸에 있어 그 마음이 자신이 켜는 악기의 음률에 집중되어 일체의 다른 생각이 일지 않는다면 이것도 일종의 정(定)은 정(定)인 셈이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고 기사가 바둑에 몰입되어 전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定)은 아무리 깊더라도 수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대상에 빼앗긴 상태로서의 집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定)은 계(戒)를 닦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 탐욕을 일으키면서도 얻을 수 있다.

②몰입을 주로 하는 정(定)이란 마음이 대상을 향해 빼앗겨 있다든가, 과거나 미래를 상상함이 없이 마음에 어떤 주제를 만들어 집중하고 있는 정(定)을 말한다. 이것은 불법을 제외한 다른 종교, 예컨데 힌두교나 자이나교 혹은 신선도 같은 곳에서 행하는 일종의 단순 몰입적 ‘정(定)’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신의 이름이나 주문, 혹은 어떤 경구를 암송한다든가 호흡 등을 다스려 다른 생각들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의 주제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定)을 불교에서는 하나의 정당한 수행방편으로 인정을 한다. 불교 내에서도 이러한 수행방편을 때에 따라 쓰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도 있고 때로는 불가사의한 신비 체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뒤에 나오는 혜학을 성취하게는 못하므로 진정한 정(定)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③지혜를 낳게 하는 정(定)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작용을 되비추어 보는 조견법에 입각한 정(定)이다. 즉, 단순한 속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정(定)으로 혜학(慧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보려는 사람은 대상에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다. 대상을 보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보려하기 때문에 자연히 번뇌의 흐름이 차단되어 돌이켜 비춤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정학(定學)의 이룸이다.

 

혜학(慧學)은 지혜를 닦는 것이다. 혜(慧)는 산스크리트어 프라냐(prajna) 즉 반야를 해석한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이란 자신과 세계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알아 생·로·병·사의 일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경지이다. 온갖 번뇌와 무지 속에 가리워져 맹목적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스러지고 마는 생명의 한계로부터 훨훨 벗어나 대해탈 대광명의 마음을 누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慧)는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햇빛 같은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지혜와는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는 흔히 분석하고 추리하고 발명하는 지식적 지혜로 자신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깨치지 못한다. 하지만 계(戒)와 정(定)을 통하여 이루어진 지혜는 자신과 세계의 참모습에 눈을 뜨고 전체적인 속성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최상의 윤리인 계(戒)를 지키고, 일고 꺼지는 자신의 마음을 놓치지 말고 관찰하여 깊은 선정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잘못 알고 있던 의식들이 홀연히 깨지면서 중생 본래 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서 혜(慧)에는 보통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①부처님 설법을 듣거나 경전을 읽고 알게 되는 이론적 지혜인 문혜(聞慧),

②문혜를 스스로 사색해보고 연구해서 확신하게 되는 지혜인 사혜(思慧),

③문혜와 사혜를 생각이나 사상으로써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수행실천해서 얻게 되는 지혜인 수혜(修慧),

④수혜를 더욱 쌓아 완전히 모든 것을 환히 알아버린 지혜인 증혜(證慧)가 그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지혜가 열리면 모든 법은 무상이요 무아요 고통이라는 것을 활연히 알게 되어 일체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안온한 열반의 경지를 누린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지혜가 열리면 현상적으로 무상이요 무아요 고통인 것 같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법이 진여(眞如)요 청정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체에 대한 차별심이 사라져 본래가 모두 열반임을 보게 된다고 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이 지혜를 공성(空性)·불성(佛性)·여래장(如來臧)으로 취급하기도 하면서 절대화시키기도 한다.}

[대한불교 연합 조계종 불교 용어 사전에서]

 

{▩ 삼학(三學)

불타의 교법을 바르게 알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의 가르침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다. 삼학은 대장경의 수많은 가르침을 계·정·혜로 분류하여 공부하는 자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을 제시해준 슬기로운 가르침이다. 해탈도론(解脫道論)에서는 “계·정·혜를 해탈도라 하니 계는 위의를 뜻하고 정 어지럽지 않음을 뜻하며 혜는 알고 느낌을 뜻하고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또 계는 나쁜 업을 제하며 혜는 번뇌의 때를 제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은 각각의 수행이기보다는 계를 닦음으로써 정이 생기고, 정을 닦음으로써 혜가 생기고, 혜를 닦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① 계학(戒學) 계란 심신을 고르고 바르게 하는 것이며 심신에 대해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며, 또 그릇됨을 막고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계의 종류에는 지악계(止惡戒), 행선계(行善戒), 이타행(利他行)의 계가 있다.

우리가 흔히 계라고 말하는 재가자(在家者)의 오계, 팔재계와 출가자(出家者)의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사미 십계는 지악계에 포함된다. 

② 정학(定學) 정이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인데 정을 얻기 위해서는 조신(調身)·조식(調息)·조심(調心), 즉 신체와 호흡과 마음을 잘 조정해야 한다.

정에는 2종이 있으니 나면서부터 마음을 한 곳에 머물러 두는 심작용이 있는 생득선정(生得禪定)과 수행하여 얻어지는 수득선정(修得禪定)이 있다. 

③ 혜학(慧學) 선종의 최종적인 목적은 깨침의 지혜를 얻는 데 있다. 이 삼학과 육바라밀에서도 혜(慧)가 맨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으며 실천적으로 진실한 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능(能)과 소(所), 자(自)와 타(他)의 대립을 무마시키려는 청정세간지(淸淨世間智)를 지(智)하 하며 출세간무이지(出世間無二智)를 지혜(반야)라고 한다.}

[붓다월드에서]

 

{불도를 수행하는데는 계,정 ,혜(戒 定, 慧)  이 세 가지를  지켜 나가야 하는데

[계(戒)]는 부처님의 경계하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정(定)]은자기의 마음이 굳게 안정되는 것이요,

[혜(慧)]는 지혜가 갖추어지는 것인데  이 세가지를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계(戒); 대승무계니 해서 대승교에서는 계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잘못입니다. 대승무계란 말은 계를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에 맞도록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부처님이 경계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범부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어디로 갈는지 모르니까 그야말로 배를 산으로 끌고 갈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定)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즉 환경이 변한다고 해서 마음이 항상 동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면 혜(慧)가 갖추어집니다. 혜라는 것은 보통 지혜라는 말과 달라서 사물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입니다. 흔히[저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하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의 마음이 미혹이 없어지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에 미혹이 남아있는 동안은 사물의 상이 똑똑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소리를 들어도 소리가 올바르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미혹이 없어져서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알아지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정혜(定慧) 구족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동요하지 않게 되고 지혜가 갖추어진다. 즉 모든 사물의 실상이 있는그대로 보이게 된다는 뜻이 정혜(定慧)입니다.

[법화경 사랑에서]

 

하나의 종교인 불교는 엄청나게 넓고 깊은 敎理(교리)를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을 담은 經典(경전)만도 우리나라 海印寺(해인사)에 간직된 대장경판은 6천 7백여권이 새겨져 있고 日本(일본)에서 간행된 大正新修大藏經(대정신수대장경)엔 1만3천권의 불전이 수록되어 있다.

그처럼 많은 수량의 문자 속에는 그 무슨 사연들이 쓰여져 있을까?

물론 그 속에는 우주와 인생, 정신계와 물질계ㆍ生命界(생명계)의 온갖 비밀이 다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 궁극의 취지는 모든 생명들로 하여금 그 생명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참된 생명의 값을 되찾으라는 가르침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삶의 진리를 가르쳐 보인 것이니 그 참된 삶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戒ㆍ定(계정)ㆍ慧(혜)’의 三學(삼학)을 내세웠다.

 

戒(계)’라 함은 올바른 행위.

‘定(정)’이란 흔들림 없는 마음

‘慧(혜)’란 슬기로운 生活(생활)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戒(계)’란 우리 인류로서 그 삶을 누리는 존엄성ㆍ가치성을 깨닫고 맹목적인 本能(본능)ㆍ충동ㆍ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언제나 理性(이성)과 良心(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스스로 자제하고 가장 바른 길을 찾아 밟아 나가는 것을 가리킴이다.

  그 實例(실례)로서 ‘내 生命(생명)을 아끼듯이 남의 生命(생명)도 아껴라, 내 것이 아니거든 無理(무리)하게 아끼지 말라. 간음한 짓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등을 비롯하여 온갖 理性(이성)과 良心(양심)의 궤도에 벗어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을 ‘戒(계)ㆍ戒律(계율)’이라고 함이다.

  ‘定(정)’이란 가장 안정된 마음의 상태이다. 世上(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제 마음의 安定(안정)을 얻지 못한다. 그 마음은 항상 원숭이 모양으로 까불고 파발말처럼 날뛴다. 그 까불고 뛰는 마음을 잡아서 태산처럼 정중하고 큰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곧 ‘定(정)ㆍ禪定(선정)’이다. 이런 마음을 잡아 가릴 적에 그는 머리로 해와 달을 이고 발로 땅을 밟고 버티고 선 거룩한 人格者(인격자)로서 우주의 主人公(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慧(혜)’란 곧 마음의 빛이다. 우리의 마음은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있다. 모든 哲者(철자)ㆍ聖者(성자)는 곧 그 마음의 빛을 발명한 분이다. 예수ㆍ孔子(공자)ㆍ소크라테스도 그러하고 석가님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의 빛을 등지고 자꾸 어두운 뒷골목을 더듬어 헤매는 그것이 가련하다.

부처님은 그 많은 法門(법문)을 하신 그 뜻은 오직 우리에게 가장 올바르게 흔들림 없이 슬기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戒(계)ㆍ定(정)ㆍ慧(혜)’의 三學(삼학)이다.

[동대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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