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연기와 아울러 육상원융(六相圓融) 또한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한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六相)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 동상(同相)*이상(異相) 성상(成相)*괴상(壞相)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하는 관계에 놓여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이 육상의 명칭과 연원은 [화엄경] [십지품]의 초, 환희지에서 보살이 일으키는 열 가지 대원 중 네번째 원에 해당하는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을 설하는 가운데 보이고 있다. 보살이 모든 바라밀행을 닦는데 이 육상의 방법으로 보살행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일행일체행(一行一切行)이 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십지품의 별행경인 십지경에도 보이며 십지경을 주석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육상이 보살수행에서

그치지 않고 일체제법에 다 통하는 것으로 논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다 총상 내지 괴상의 육상을 갖추고 있으며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일체가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상교의의 이론적 조직은 십지경론설을 받아들인 정영사 혜원에게서 발아하여 지엄 [수현기, 오십요문답]을

거쳐 신라 의상[일승법계도]과 현수법장[화엄오교장, 탐현기 등]에 의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육상을 집(屋居)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총상이란 일체 제법은 연기된 존재이니 여러 연이 모여 성립된 전체로써, 하나가 많은 이름을 갖추고 있고, 하나에 많은 덕을 포함한 것이니 부분을 총괄한 전체가 총상이다.

별상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인 각각의 연으로서, 이 별상은 총상에 의지하여 전체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집을 총상으로 하면 집을 구성하고 있는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별상이 된다.

얼굴을 총상이라 한다면 눈 귀 코 입 등은 별상이다. 그러나 눈이 얼굴이고 얼굴속의 눈이다.

총상과 별상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므로 원융이다.

 

동상이란 별상의 하나하나가 서로 어김이 없이 조화되어 전체인 총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이상이란 별상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조화되어 있으면서도 제각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상이다.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서로 화합하여 집을 이루는데 서로 연이되어 어긋나지 않음이 동상이며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각각 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 이상이다. 눈 귀 코 입 등이 조화되어 얼굴모습을 이루고 있음이 동상이며, 눈 귀 코 입 등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음이 이상이다.

 

성상이란 부분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성립시키고 있음을 말하며,

 

괴상은 부분부분이 각각 자법(自法)에 머물러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말한다.

대들보 서까래 기둥 등이 집을 이루는 역용이 성상이며, 그러나 대들보는 대들보 역할을 하고 기둥은 기둥역할을 하는 것이 괴상이다. 눈 귀 코 입 등이 서로 연기하여 얼굴 역할을 함이 성상이며 눈 귀 코 입 등이 각각 다른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이 괴상이다.

 

이들 육상은 차례로 보편성, 특수성, 유사성, 다양성, 통합성, 차별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한 육상의 관계를 체(體) 상(相) 용(用)으로 나누면 총상 별상의 2상은 연기 제법의 체의 측면이고 동상 이상은 상의

측면이며 성상 괴상은 용의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리고 육상 가운데 총상 동상 성상의 3 상은 또 같은 관점에서 논의 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원융문(圓融門)이라 하고

별상 이상 괴상도 공통된 관점에서 파악된 것으로 이를 항포문(行布門)이라 한다.

 원융문은 평등문이고 항포문은 차별문이다. 그런데 무차별의 원융문은 차별을 나타내는 항포문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항포자체가 분명하면서도 항포가 곧 원융이 된다. 여기에 전체와 부분, 하나와 무량이 무애한 무진 법계의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만 이는 지혜의 경계인 것으로 증득을 통해 구현함을 요하는 것이다.

즉, 화엄경의 십바라밀행을 예로 들면 보시바라밀과 지계바라밀 등이 각각 다르나 보시바라밀을 통해서도 불세계를

장엄할 수 있고 지계바라밀을 통해서도 부처님세계를 드러낼 수 있다. 화엄보살의 42계위가 분명하면서도 초발심주에서 처음 발심한 때가 바로 정각을 성취한 때이다. 일성일체성(一成一切成)인 것이다. 이 방편에 의하여 일불승에 회귀하여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십현 육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법계연기는 상즉 상입의 도리가 바탕이 되고 있으니, 이의 논리적 근거는

삼성동이(三性同異)와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본래불임을 철저히 자각함으로써 우리에게 본래 구족해 있는 불성을 여온없이 드러내는 것이 화엄의 보살행이다. 다른 이를 나와 동일시하고 나의 힘을 다른 이에게 미루어 주어, 다른 이와 함께하고 하나되었을 때 절대 독존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때가 바로 석존께서 탄생게에서 보여주신 "청상천하 유아독존"의 경계이리라.

-해주스님-

 

무비스님 해설

六相圓融; 십지품 제1환희지에 六相圓融總相別相, 同相異相成相壞相, 총ㆍ별ㆍ동ㆍ이ㆍ성ㆍ괴 여섯 가지의 圓融입니다. 

  세우는데一切菩薩行이 廣大無量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아니하며, 또 모든 바라밀을 전부 포섭해서 온갖 보살의 지위를 잘 다스리며거기에 總相別相. 同相異相. 成相壞相 所有菩薩行 다 如實하게 설해서 일체사람들을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받아 행하도록 해서 心得增長=마음이 자꾸자꾸 발전해서 廣大如法界=그 넓고 크기가 이 우주의 진리의 세계와 똑 같이해서 究竟에는 虛空과 같고, 未來際 다 할 때까지, 시간적으로는 미래제가 다 할 때까지 일체 세월, 일체 시간 속에서 無有休息= 쉬는 바가 없이 보살행을 행한다.

總相; “집”입니다.  창문, 대들보, 마루, 등은 別相입니다. “문수경전연구회 화엄산림”는 總相이 되고, 개개인의 한 사람ㆍ한 사람의 살림살이는 別相입니다.

同相異相. 공동체라고 봤을 때는 同相이 되고, 차별된 개인의 삶은 異相입니다.

成相壞相. 은 이렇게 많이 모였을 때 하나의 成相이 되는 겁니다.  각자의 삶이 또 따로 있어서 다시 흩어지는 것이  [무너질 壞(괴)]입니다 모든 존재가 이렇게 상반된 원리 속에서 잘 이루어져 가고ㆍ잘 살아 가고ㆍ잘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總相, 다른 입장으로서는 同相, 또 다른 입장에서는 成相이 됩니다. 그러나 눈, 머리, 팔, 비위, 간담 등등 분해한 개체적인 것은 인데 그것이 전부 조화를 이루어서 한 육신을 이루고 있잖아요.

 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섯 가지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면 자기 집착과 고집이 생겨요. 우리는 단체인데 왜 혼자 개별적으로 노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나는 난데 왜 내가 거기에 예속되어야 되느냐?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단체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개인일 수도 있는, 개인이면서 단체가 되고 단체이면서 개인이 되는 이것이 조화를 잘 이루고 원융하게 돌아갈 때,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화엄경에서 하나의 이치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사법계란 우리가 살고 있는 법계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연기의 이치를 보다 선명한 비유로써 묘사한 것.

① 사법계(四法界); 중생이 살아가는 현상의 세계로써 만물이 저마다의 모양과 그 생성 변화의 과정이 제각각인 이

세계는 생멸이 있고 정·부정이 있으며 증감이 있는 세계이다.

 

② 이법계(理法界); 사법계의 근본을 파고들면 제각각인 만물도 그 뿌리는 하나로 통일된, 즉 본질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법계는 생멸도, 정·부정도, 증감도 없다.

사실 사람의 가치도 때와 상황에 따라 극심하게 달라지는 이치도 이법계의 관점에선 당연한 일이다. 전쟁터에선 힘있고 용감한 사람이 영웅이지만 경제성장이 최우선되는 사회에선 기업가나 과학기술자가 우대받는다.

예전에 천시했던 영화배우, 운동선수들도 요즘엔 스타로서 각광받고 있지 않는가? 과거엔 상상조차 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본질의 외화가 현상이고 그 현상의 뿌리가 본질이기에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 즉 이법계와 사법계가 통일된 세계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이치가 바로 이(理)에도 사(事)에도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법계와 상통한다. 중국의 고전 『채근담』에도 이사무애법계가 잘 묘사되고 있다.

"도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나뭇잎도 멈춘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고 잠시 뒤에는 물결이 사라진다."

중생계에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그쳐도 계속 흔들린다. 흔히들 도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목석같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사무애법계란 바람이 불 때는 흔들리고 바람이 그치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본래 둘이 아님을 깨닫는 단계, 보살의 지혜와도 같다.

뿌리없이 흔들리는 것이 사법계, 바람이 불어도 암석마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법계라면 이사무애법계는 뿌리는

움직이지 않되 나뭇잎만 흔들리는 단계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옛날 6년간 한 스님의 공부를 지성으로 뒷바라지해온 노보살이 한 분 있었다. 어느 날 이 보살이

스님의 공부정도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큰 딸에게 공양을 올리도록 하면서 스님을 유혹해보라고 일렀다.

이 딸이 스님 방에 들자마자 스님을 껴안고 "기분이 어떠신지요?"라고 묻자 이 스님 왈 "고목나무를 껴안은 것 같다."고 해서, 이 말을 전해들은 노보살이 "내가 헛수고를 했구나" 탄식하며 절간을 태우고 그 스님을 내쫓아버렸다.

이 일화는 선방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 보살이 왜 그랬을까? 이것이 도의 본질에 관한 의심인 것이다. 유혹되는 것이야 말할 나위 없지만 그렇다고 고목나무와 같이 느끼는 무감정 또한 아직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보살의 실천을 의미하는 이 단계는 조건과 처지에 따라 어떤 걸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모양을 나투는 수준, 곧 화작이 가능한 경지다. 푸줏간에선 푸줏간 주인이 되고 농촌에선 농사꾼이 되고, 가정에선

살림하는 주부로서 자유롭게 살아간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맛이 있다고 느끼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처럼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일체의 욕망을

절제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것, 그 어떤 일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 자재할 수 있는 것이다.

도안과 범부의 차이는 배가 몹시 고플 때, 앞 뒤 안 가리고 먹을 것에 손이 먼저 가는 사람과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일 뿐이다. 백지 한 장의 차이 같기도 하지만 그 경계를 뛰어넘으려면 꾸준한 수행이 필요하다.

무상과 무아의 이치가 완전히 체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화엄경의 네가지 법계는 십우도(十牛圖)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진리를 소에 비유해서 구도의 과정을 묘사한 이 작품은

마지막에 가면 처음과 같이 허리에 호리병을 차고 술에 취한 듯한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겉모습은 처음의 사법계와 동일하지만 사실은 이미 자유를 얻은 사사무애의 경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진흙속에서 진흙을 탓하는 것이 중생의 사법계라면 사사무애법계, 보살의 단계는 진흙속에서 그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 것이다

[http://blog.jinbo.net/ 정토회]

 

무비스님 해설

역사적으로 화엄경을 많이 공부하신 대개의 화엄학자들이, 화엄경의 깊은 이치를 세 가지 법수로 정리해서 화엄경의 높고 깊은 이치를 표현했습니다.

四法界(四種法界)六相圓融十玄緣起(十玄門).  

화엄사상에서는 이 세상을 그대로 진리의 세계= 法界, 불교용어로 “시방법계” 라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 (法= 진리) 불교적 안목으로 “시방세계”= 이 지구에서부터 저 무한히 넓은 광대한 우주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고 봅니다.  그것을 좀 더 세분화하면 법=진리에는 사물,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의 내면에 존재하는 理法=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四種法界; 事法界인데 일 事, 事=사상, 현상,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의 現相을 그대로 진리로 보는 것.

②理法界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세계, 空ㆍ佛性ㆍ法性 = 理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세계다

③理事無碍法界  진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걸림 없이, 는 理대로. 事는 事대로. 理判ㆍ事判.

이판은 이판대로, 사판은 사판대로 서로 좋아하고 미워 함으로 해서 어떤 한 사찰이, 어떤 한 단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는 뜻으로 사실 모든 존재가 돌아가고 있는 그대로 원만한 상태인 것을 理事無碍法界라 이해합니다.

이치의 면과 사상의 면이 서로 동시에 갖춰져 있지만, 전혀 서로 장애하지 않고 구애됨이 없이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事事無碍法界의 이치를 화엄경에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으로 事事無碍法界는 사물과 사물. 현상과 현상이 걸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산하 석벽의 장애 없이 그냥 통과해서 지나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니고, 현재의 모든 사물과 사물은 그대로 서로가 장애 없이 존재하는, 圓融無碍(원융무애)하게, 또 조화롭게, 전부 남의 것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고, 그 또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華嚴法界玄鏡(화엄법계현경). 또는 八宗綱要(팔종강요) 규봉종밀 스님의 注華嚴法界觀門(주화엄법계관문)에 자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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