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 연기 [法界緣起]
화엄종에서, 우주의 모든 현상이 함께 의존하며 발생하여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비추면서 끊임없이 교류하고 융합한다는 관점으로 불교에서 현상세계 그대로가 진실의 세계, 즉 진여(眞如)라고 보는 철학적 견해.
〈화엄경 華嚴經〉을 근거로 한 중국의 화엄종에서 형성되었다.
화엄경에 일관되어 있는 유심설(唯心說)에 근거해 성립된 법계연기는, 모든 사물과 사상(事象)이 자재롭게 서로 의지하는 바가 되어 한없이 교류하고 융합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도 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유심 게송은 "삼계는 허망으로서 다만 이 일심(一心)이 만들어낸 것이며, 12연분(十二緣分)은 모두 마음에 의한다"고 설한다. 법계연기설은 이로부터 전개된다. 즉 그러한 유심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도 한 순간과 구별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의 세계가 한 순간에 담겨 있다. 따라서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 곧바로 정각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념성불'(一念成佛)을 주장한다. 이렇게 무시간적 입장에서 관찰하므로 세계의 존재방식인 연기는 서로 동화하고 드나들며(相卽相入),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重重無盡)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다. 이것을 사사무애라 하는데, 법계란 이 사사무애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런 세계의 존재방식이 법계연기이다. 즉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법계를 바탕으로 해 저마다 개체로서 존재하면서 서로를 내포해 통하고, 하나와 일체가 중중무진으로 일치해가는 동시에 전개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법계연기는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多多卽一)라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모든 것이 아무런 실체성이나 고정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무성의 사상이 있다. <다음백과>
*법계 연기 [法界緣起]
우주만유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인연 따라 얽혀 있어 어느 하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교리. 법계무진연기·법계무애연기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것으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라고도 한다. 중국 및 우리 나라의 화엄종(華嚴宗)을 중심으로 성립되고 발전되었다. 법계의 우주만유는 사물은 천차만별이지만 피차가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어느 하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만유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볼 때에는 중생과 불(佛), 번뇌와 보리(苦提), 생사와 열반(涅槃) 등과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이며,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으로 있게 된다.
그래서 화엄종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를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주장하고, 하나의 사물은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라는 뜻에서 한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우주성립의 체(體)요, 힘인 동시에 그 사물은 전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우주의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끝없이 이어짐)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 한다. 이 사상은 불교연기론의 극치로서 법상종(法相宗)의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와 법성종(法性宗)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등과 같이, 우주연기의 주체를 어떤 한 사물이나 이체(理體)에 국한하지 않고 그 하나하나를 만유의 합당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법계연기는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것이든지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같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원인이 되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화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이다.
화엄종의 교리인 사법계(四法界)·십현연기(十玄緣起)·육상원융(六相圓融)·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은 모두가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는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각기 그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다는 차별적인 현상계를 가리켜 사법계라 하고, 그 반대로 평등한 본체계(本體界)를 이법계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본체는 서로 원인이 되고 융합되어 평등이면서도 차별을 보이며, 또 차별 가운데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이사무애법계이다.
다시 나아가서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 원인이 되어 밀접한 융합을 유지한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그리하여 이 사사무애의 특징적인 모습을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등의 열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십현연기문(十玄緣起門)이다.
이 가운데 동시구족상응문이라 함은 현세 속에 과거와 미래가 다 함께 담겨 있다는 뜻이고, 제법상즉자재문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또 일(一)은 일의 위치를 지키고 다(多)는 다의 면모를 유지하는 가운데 일과 다가 서로 포섭하고 융합한다는 것이 일다상용부동문이다.
일이 없으면 다도 없으며, 일이 있으면 일체가 성립된다. 모든 것이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일로도 되고 십(十)으로도 되며 일체로도 된다. 여기에 화엄에서 가르치는 일즉일체·일체즉일·일즉십(一卽十)·십즉일(十卽一)의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한편, 모든 현상은 각각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 등 여섯 가지 모습을 함께 갖추고 있어 전체와 부분 또는 부분과 부분이 서로 일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육상원융이라고 한다. 신라의 의상(義湘)은 이 법계연기를 설명하면서 독자적인 이이무애법계(理理無碍法界)를 주장하였다.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이사무애나 사사무애는 설하였어도 이이무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이무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이(理)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데, 의상은 이도 사의 경우처럼 차별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라 하여 차별적인 면도 아울러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데 십전(十錢)을 예로 들어 일즉십·십즉일 등의 논지를 전개시킨 것도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된 법계연기설이다. <한국민족대백과>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 청화 스님
부처님 가르침은, 이 특히 대승가르침은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선오후수란 먼저 이치理致로 해서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먼저 그 이론적理論的인 체계를 세운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경을 배우는 것은 아, 그렇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능엄경楞嚴經이나 모두 대승적인 가르침은 모두가 불교의 이치를 세운단 말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증명해서 깨달아서 성자가 되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를 써도 우리가 그 나쁜 버릇 나라는 버릇 너라는 버릇 밉다는 버릇 또는 사랑한다는 버릇 그런 버릇이 잔뜩 끼어 있어놔서 쉽게 닦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코 닦아야 되는 것이지 안 닦고 말아버리면 결국은 아까도 말씀 마따나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영원히 우리가 윤회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윤회를 그 벗어나서 해탈의 경계로 갈려면 좀체로 쉽게 갈 수가 없습니다. 아, 지금 저 같은 사람도 지금 나이가 80다 먹어가지만 아, 누구가 물어서 아, 당신은 지금 윤회를 벗어났습까? 물어오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 왜 그런고 하면 그 습기習氣라. 이치로는 알지만 습기라. 습관성이 딱 배어가지고서 습관성 그걸 녹일라면 오랜동안 오랜동안 닦아야 됩니다.
화두話頭도 참구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고 또는 사경寫經도 하고 또는 불경佛經도 외고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점차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인단 말입니다. 헌데 그렇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 편하게 마음이 산란심散亂心을 하지 않고서 마음 편하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마음 편하게 할라면 먼저 이치로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먼 길을 갈 때도 아, 길을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의 순례巡禮, 길의 순로順路를 모르고 헤맬 때는 얼마나 답답합니까. 마치 안개 속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훤히 길목을 먼저 알고 가야 그래야 자신 있게 가지고 능률도 오르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가 인생길을 가는 데도 그 훤히 우리가 길을 알고 가면 참 재미지고 쉽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 무슨 경 무슨 경 그런 부처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런 길을 그렇게 단적으로 우리한테 말씀한 법문이 이른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연기라. 인연법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무명심에서 업을 짓고, 또는 업따라서 선악의 과보를 받고, 뱅뱅 이렇게 윤회하는 그런 것이 중생경계에서 말하는 업감연기, 업감연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주로 경론으로 말하면 이른바 구사론俱舍論이라 또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라 그런 경에 가서 업감연기 말씀이 있습니다.
헌데 그렇게 되려면 아직은, 우리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 공부해야 공부도 빠르고 그럴 것이라는 다 그런 점에서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이 이른바 대승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소승가르침은 이것은 그냥 먼저 진리의 당체當體를 우리한테 말씀하시지 않고서 우리가 점차로 걸어야 하는 그런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허나 대승가르침은 그냥 그 법의 대요, 진리의 대요를 먼저 이치로 먼저 체계로 해서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단 말입니다.
마명대사馬鳴大師란 분은 위대한 분입니다.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 할 정도로 위대한 분이어요. 용수보살龍樹菩薩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위대하고, 마명대사께서 해놓으신 경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여러분들 들어보셨지요. 대승기신론이라. 일어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이른바 논장論藏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 대승기신론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우리한테 말씀한 가르침인데 연기법으로 하면 연기법적인 사상으로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여래장이나 여래는 부처란 뜻아닙니까. 따라서 여래가 들어있다 그것이 감출 장藏자 여래장인데 여래장은 그 부처님이 들어있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 들어있다. 부처님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은 그러면 어디가 있고 어디는 없는 것인가. 불성은 불성이란 것은 없는 데가 없이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이러지 않습니까.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님의 성품은 나한테나 너한테나 이 공간 속에나 흙 속에나 또는 쪼그마한 그런 원자의 알갱이에나 말입니다. 우주에 끝도 가도 없이 불성은 꽉 차있습니다. 불성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한 가르침이 즉 말하자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진여연기라, 진여眞如가 진여의 덕성德性의 덕성 따라서 이루어진 세계가 진여연기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업감연기의 우리가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山이요 냇河이요 내 몸뚱이요 모두가 다 무명심 때문에 업을 짓고 우리가 과를 받은 그런 하나의 상황인 것이고, 허나 즉 그런 것은 중생의 차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이제는 부처님 차원에서 성자가 보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보시면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의 것이라도 성자가 볼 때와 우리 중생이 볼 때와는 그때는 아주 천양의차天壤之差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미워서 어느 누군가가 자기한테 섭섭하게 해서 굉장히 미울 때는 그냥 곧 때려서 아,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이것은 중생심입니다. 그러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가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모두가 다 이른바 부처님의 화신化身입니다.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것은 어느 것도 유별나게 다른 것이 없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보는 것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ad, 우파니샤드란 인도철학의 중심적인 사상인데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한 법문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advaita이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진리다. 우주란 것은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하나의 진리를 모르니까 자꾸만 마음이 흐트러지고 분열되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우리가 저마다 다 우리가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중생은 체험을 못합니다. 성자가 성자의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성자의 청정한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화신, 다 부처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탐욕심이나 분노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나 삼독심三毒心에 가리워서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중생 아닙니까. 중생심衆生心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자기중심이란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하면 좋게 보이고 나한테 섭섭히 대하면 밉게 보이고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뭐 그때그때 죽든가 말든가 인연따라서 할 것이지...
이렇게 보는 것이 모두가 다 중생심이란 말입니다. 이런 중생심이 없어지지 않는 한에는 가정도 참다운 평화로운 가정이 못되고 사회도 훌륭한 공정한 진리에 입각한 사회가 못됩니다. 우리가 진리에 입각해서 진리에 비추어보고 진리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비로소 가정이나 사회나 어느 때 어느 곳이나 진정으로 평화와 행복이 보장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리를 불교전문술어로 말하면 그때는 진여眞如 그럽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어째서 그런고 하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오직 그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보통 우리가 세간적世間的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 논리적論理的으로는 아, 진여 진리 그러면 아, 뭐 우리 중생의 생각과 달리 진리가 저만치 대상적으로 있거니 이와같이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진리를 보지만, 부처님의 진여는 그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모든 것이 본래로 존재의 실상實相이 바로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만유宇宙萬有, 나나 너나 자연계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진여眞如로, 진리眞理로 돼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리적인 면에서는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그럽니다. 성품으로 말하면 불성인 것이고 또는 이치로 말하면 진여란 말입니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지 본래 뜻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우선 편할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천차만별로 보지만 바로 보는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한결같이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표독한 업을 많이 지어서 금생에 살인죄를 범한 그 사람도 진여불성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이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청화 스님|작성자 일용>
*화엄가들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보고 있으며, 화엄의 세계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법장은 화엄종의 종취를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라고 밝히고 있다. 법계연기란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 진실 그 자체의 연기의 모습으로 나타내어진 것으로 어떠한 실체성이나 고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계연기설은 지엄에게서 그 틀이 보이며 청량 징관을 거쳐 규봉 종밀에 와서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확정된다.
화엄사상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법계(法界)라고 한다. 두순의 <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는 진공관(眞空觀),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의 법계삼관(法界三觀)을 설하고 있다. 먼저 진공관(眞空觀)은 모든 법은 실성이 없어 유(有)와 공(空)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眞空)임을 관하는 것이다.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은 차별있는 사법(事法)과 평등한 이법(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함을 관하는 것이다.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은 우주간의 온갖 사물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지엄은 법계연기를 보리정분의 정문(淨門)연기와 범부염법의 염문(染門)연기로 나누고 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과 인불가설(因分不可說)로 나누고 그것이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와 보현경계(普賢境界)라고 하고 있다. 종밀에 이르러서는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발전하게 된다. 사종법계(四種法界)는 사물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의 관계를 설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법계(法界)란 Dharma-dhatu의 번역어로 연기현전하는 우주만유이다. 이 법계의 체(體)는 일심(一心)으로 원명구덕(圓明具德)의 일심이며, 총해만유(總該萬有)의 일심이다. 따라서 법계란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 각각의 법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이 법계를 설명하는데 사(事)와 이(理)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인 것이다.
사종법계는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이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를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각각의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개체간의 공통성보다는 차별적인 면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一心眞如)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간의 동일성, 공통성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는 이(理)와 사(事), 즉 본체계와 현상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유기적으로 연걸되어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모든 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 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불교 인터넷 방송>
*보편적 연기론 법계연기(法界緣起) -梵水-
진여란 사물의 참된 상태로 정적인 의미일 때, 시공(時空), 형체(形體), 시종(始終)의 구별이 없지만, 동적(動的)일 땐 외적인 생멸의 상태를 취한다. 따라서 세 가지의 연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12인연에서 논해진 것과 같은 업감연기이며, 둘째는 아뢰야식연기로 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기원을 밝히는 진여연기가 그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물의 생성에 미치는 상호 연관성, 즉 보편적인 연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에 진실의 세계에는 독립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이 있다. 법계(法界)란 모든 존재의 총칭으로 존재의 종류, 본성 등 다양한 뜻을 지녔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세계 또는 우주 전체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 자체인 진여(眞如)이다. 이 가운데 인과론적인 입장에 법계를 논할 땐,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우주를 가리킨다. 연기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단독으로 생기하거나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계 연기설 역시,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여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연기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즉 모든 차별적인 존재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함으로 모든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일체즉일(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상적 우주 속에서 모든 존재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의 실존과 활동에 아무런 장애를 유발하지 않는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존재하므로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으로 대표되는 존재 역시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고 동시적으로 흥기(興起)한다는 생각이 보편적 인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생 철학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총합 철학이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우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사법계(事法界)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이며,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법계란 모든 사물을 개별적으로 차별하여 보는 세계이다. 즉 여러 사물 가운데 통일성은 보지 않고 다양한 차별만을 보는 것이다.
② 이법계(理法界)
사법계의 무한한 다양성도 그 본성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동일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동일성을 이법계에서 논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성의 측면으로서, 통일성이란 모든 사물의 무차별 동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이 무실체(無實體)라는 점에서 무차별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진공(眞空, 無我)①이며, 이법계의 주된 내용이다. 또 사물이 무실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의타적(依他的)이라는 말로 진공의 이법계는 무실체성(無我)이라는 부정의 면과 의타성(依他性, 緣起)이라는 긍정의 면을 모두 가졌다. 그리고 의타연기(依他緣起)의 이(理)는 만상을 일관하는 이치이므로 이법계(理法界)라 한다.① 경험적 분별 세계의 사물이 각기 고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이(理)와 사(事), 즉 무차별 동일의 세계인 본 체계와, 차별의 세계인 현상계는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속에 있다. 곧 이(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연을 따라 사(事)로 드러나고, 사(事)이므로 그 본체는 무자성이다. 따라서 이와 사는 서로 융합(融合)하여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법계는 사법계의 모든 현상에 공통된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법계에서 독립된 이법계란 없으며 이법계를 떠난 사법계도 없다. 이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는 고래로 수파불리(水波不離)로 설명되고 있다. 물은 본체인 이(理)로, 파도는 현상인 사(事)에 비유된다. 즉 파도와 물은 서로 다르나 체성(體性)은 하나라는 상즉(相卽)의 원리로 설명되고 있다.
이사무애(理事無碍)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이(理)의 전체는 일체의 사(事)에 고루 미치고 있음과 동시에 각각의 사(事)에도 이(理)의 전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것은 사의 전체에 편재해 있는 이가 동시에 개개의 사에 내재함으로 전체가 부분 속에 있고, 부분이 전체 속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의 보편성과 사의 개념성이 서로 뒷받침하여 보편성 전체 속에 개별성이 있고 개개의 개별성 속에 보편성의 전체가 갖추어져 있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모든 존재들이 서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고 한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는 외형상 차별적인 존재이지만, 이사무애(理事無碍)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체는 전체 속에 있고, 전체는 개체 속에 있으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물 속에 동일한 이의 전체가 있다면, 모든 개개의 사물은 서로 동일한 구조 속에 있게 되므로 개체와 개체는 일대 일로 대응하여 서로 타를 함용하고, 또 함용 된다(주편함용(周遍含容)).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무애 없이는 사사무애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이사무애에 그쳐서는 사사무애가 될 수 없다.
이상 사종법계(四種法界)를 구별하여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여법성(眞如法性)에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수연(隨緣)하여 만법이 되는 방면에서 사법계를 세우고, 불변(不變)하는 만법의 체에서는 이법계를 세운다. 그리고 불변과 수연의 교섭 관계에 대해서는 이사무애법계를 세우며, 수연의 법이 상호 교섭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세운다. 이 말은 각각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보는 사법계(事法界)와, 차별적인 개개의 사물에서 동일성 또는 공통성을 보는 이법계(理法界), 그리고 전체 속에 개체가 있고,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은 서로를 포함하고 포함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진여의 수연과 불변에 관련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법계의 모든 사물은 차별적 관계를 가지지만,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음으로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적이거나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만유를 모두 진공(眞空, 無實體)의 관점에서 볼 때, 대립하던 차별적인 존재들은 실제로는 동등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관계를 원융무애(圓融無碍)라 하며,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로 나타낸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 볼 때, 그것은 단독의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 전 우주가 되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하면, 위와 같은 사실에 입각한 하나의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보고 이것을 우주 성립의 체(體)인 동시에 전 우주를 말미암아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法界) 무진연기(無盡緣起)라 한다.
<좋은인연 불교학당>
[왜 그물 網(망)을 자주 쓰느냐? “업” 하면, 내 업하고 네 업이 전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 다른 이도 그냥 알아차리고 또 그 다른 사람의 업이 튀어나오면 나도 알아요. 그것이 상호연관성, 법계연기 성, 즉 법계연기로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 앞산과 뒷산이 나하고 아무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다 연관이 되어있고 관계가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산에 가서 나무 한 그루를 새로 심는 것과, 거기 있던 나무를 잘라버리고 뽑아버리는 것이 그 산 전체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칩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영향을 끼치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영향을 끼치고 ‘전부 그물이 짜여져서 있듯이 우주법계 전체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화엄경의 법계연기설입니다.
그래서 그물 網자를 잘 쓰는 겁니다.]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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