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  三學等用(삼학등용)이라 하니  何者是三學(하자시삼학)이며  云何是等用(운하시등용)고.

"삼학(三學)을 함께 쓴다 하니, 어떤 것이 삼학이며 어떤 것이 함께 쓰는 것입니까?"

答  三學者(삼학자)는  戒定慧是也(계정혜시야)니라.

"삼학이란 계(戒)ㆍ정(定)ㆍ혜(慧)니라."

問  云何是戒定慧(운하시계정혜)오.

"어떤 것을 계(戒)ㆍ정(定)ㆍ혜(慧)라 합니까?"

 答  淸淨無染(청정무염)이  是戒(시계)요,  

   "청정하여 물들지 아니함이 계(戒)요,

知心不動(지심부동)하야  對境寂然(대경적연)이  是定(시정)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아 경계를 대하여 고요함이 정(定)이요,

 知心不動時(지심부동시)에  不生不動想(불생부동상)하며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 때에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며

知心淸淨時(지심청정시)에  不生淸淨想(부생청정상)하야  

  마음이 청정함을 알 때에 청정하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여 내지 선ㆍ악을 모두

乃至善惡(내지선악)을  皆能分別(개능분별)하되  於中(어중)에  無染(무염)하야  得自在者是名爲慧也(득자재자시명위혜야)니라.

   능히 분별하되 그 가운데에 물들지 아니하여 자재를 얻음을 혜(慧)라고 하느니라.

若知戒定慧體俱不可得時(약지계정혜체구불가득시)에  卽無分別者(즉무분별자)하야  

   만약 계ㆍ정ㆍ혜의 본체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 때에 곧 분별함이 없어서

卽同一體(즉동일체)니  是名三學等用(시명삼학등용)이니라. 

   곧 동일의 본체이니 이것이 삼학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이니라."}

성철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강설에서

 

▶ 지혜로우신 여러 분들의 글;  

  

{☆ 계(戒)가 곧 정(定)이며 정(定)이 곧 혜(慧)로서, 삼학을 함께 쓰면 생사(生死)에 해탈하여 열반로(涅槃路)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할 것이니 이것을 중도정각(中道正覺)이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돈오(頓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불교에서]

 

☆ 불교의 핵심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이다.

계(戒)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고, 더불어 잘 사는 마음을 지니고 속세의 부질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욱 박사는 지계(持戒)란 미안에 머물지 않아 후회하는 일을 적게 하는 것으로 진심(嗔心: 화)을 제거하는 이라 했다. 계(戒)를 성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忍)이다. 인(참는 것)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아량이요, 배려이다. 금강경에서도 인을 성취하면 야뇩다라샴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정(定)은 마음의 잡념을 비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다. 계를 잘 지키면 마음이 편하고 밝아져 정에 잘 들 수 있다. 가부좌하여 일로매진 하여 수행을 하면 정력(定力)이 높아지는 데 이 정력은 자신의 나쁜 업(業)을 사라지게 한다. 이는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삼매에 들면 우주의 밝은 에너지가 몸에 들어와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혜(慧)는 개혜(開慧)이다. 정(定)으로 자신의 나쁜 없이 사라지면 마음이 안정이 되어 지혜를 얻는다. 개오(開悟)하여 대지혜(大智慧)를 얻어 우주의 진리를 보고, 우주 각개 공간의 진상을 보며, 신통이 크게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후 가장 강조한 것은 인과법(因果法)과 누구나 불성(因果法)을 지니고 있다는 평등사상이다. 카스트 제도가 공고한 그 당시 이 불성 사상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일성이었다.

[지리산 천년 3암자길에서]

 

삼학(三學)

① 삼학(三學)

계학(戒學):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실천법을 배우는 공부.

정학(定學): 맑고 고요한 마음을 내어 외부의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공부.

혜학(慧學): 맑은 마음에서 밝은 지혜를 내는 공부.

 

②삼학(三學)은 불교 수행의 기본으로 계(戒)를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지혜(智慧)를 이루는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을 말한다. 여기서 학(學)은 글자그대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학’과는 매우 다르다. 세간의 학문은 지식과 기술을 외부로부터 배우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내적(內的)인 수행(修行)을 말한다. 삼학(三學)은 모든 불교도들이 필수적으로 닦아야 될 으뜸가는 실천 덕목으로 생활의 근간으로 삼지 않으면 안될 만큼 중요하다.

계학(戒學; 계(戒)의 원어는 실라(sila)에서 비롯된 말로 ‘행위의 습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목적은 지악수선(止惡修善) 즉, 모든 악을 그치고 착한 행을 닦는데 있다. 이는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다른 종교처럼 안 지키면 심판 받는 식의 남으로부터 받는 계(戒)가 아니라 스스로 받아 지키는 발계(發戒)이다.

계(戒)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不殺生-불살생), 남의 물건을 취하지 않는 것(不偸盜-불투도),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不淫行-불사음), 거짓말 하지 않는 것(不妄語-불망어), 술 마시지 않는 것(不飮酒-불음주) 등 5계(五戒)이다.

이 5계(五戒)는 다시 대승불교에 들어와 10선계와 보살48경계로 늘어나 자신만을 위한 선행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을 위하는 실천행으로 강조된다. 이것은 뒤에 섭율의계(攝律儀戒 : 악을 그치는 계), 섭선법계(攝善法戒 : 선을 행하는 계), 섭중생계(攝衆生戒 : 중생을 이익케하는 계)라는 삼취정계(三取淨戒)로 정리되었다.

한편 출가한 스님들은 교단생활에 따른 좀더 엄격한 출가계가 요구되어 비구가 250계, 비구니가 348계를 지키게 되어 있다. 계(戒)는 출가 스님이나 재가 불자 모두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계(戒)를 어겼다면 바로 참회해야 한다. 계(戒)를 함부로 어길 것 같으면 후에 나쁜 과보를 받게 됨은 물론 수행을 해도 절대 깨달음에 들지 못한다.

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다음의 삼학(三學 )가운데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5계(五戒)는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계(戒)를 받을 때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언정 계를 깨뜨리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과거 스님들 중에는 품속에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니는 분이 있었다. 그 칼을 계도(戒刀)라고 하는데 만약 자기의 손이 계(戒)를 어기면 손을 자르고 입이 계(戒)를 어기면 입을 찢겠다는 강한 의지의 상징인 셈이다. 옛 분들의 말씀에 부처님께 귀의해서 계(戒)를 받은 몸은 계체(戒體)가 되어 청정신이 된다고 하였다. 계(戒)의 청정,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정학(定學)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것이다. 정(定)은 산스크리트어 삼마디(Samadhi)를 번역한 말이다. 같은 의미를 지닌 말들로 선나(禪那 Dhyanu), 등지(等至 Samapatti), 등인(等引 Samahita)등의 용어가 있는데 경전에서는 이런 것들을 그냥 선정(禪定)이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한다. 계(戒)를 지켜 악(惡)을 조복 받고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닦는 사람은 이제 마음을 한곳에 두는 선정 공부를 수반해야 한다. 아무리 계(戒)를 엄수했다 해도 정(定)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데 정학(定學)이 없으면 뒤에 나오는 혜학(慧學)을 이룰 수 없고, 혜학(慧學)이 없으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이고득락의 경지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학(戒學)이 정학(定學)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면 정학(定學)은 혜학(慧學)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끊임없이 흐르며 작용한다. 마치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온갖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고 꺼지는 마음의 활동은 탐냄, 성냄, 어리석음 등의 온갖 번뇌를 야기 시키고 한없는 방황을 가져오게 한다. 때로는 보고 듣고 맛보는 경계를 따라 마음은 흘러가기도 하고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빠져있기도 한다. 정학(定學)은 바로 마음의 이러한 작용을 쉬게 하고 뒤에 나오는 지혜를 성취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 덕목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지붕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빗물이 새듯 마음을 굳게 수행하지 않으면 번뇌가 스며든다.”고 하셨다. 여기서 마음을 굳게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정(定)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그릇된 마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지럽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뇌를 차단시키고 마음의 고요를 가져오게 하는 정(定)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설명하면 세속적인 정(定), 몰입을 주로 하는 정(定), 지혜를 낳게 하는 정(定)이다.

①세속적인 정(定)이란 수행과는 관계없이 세상 생활 가운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악사가 악기를 다룸에 있어 그 마음이 자신이 켜는 악기의 음률에 집중되어 일체의 다른 생각이 일지 않는다면 이것도 일종의 정(定)은 정(定)인 셈이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수도 있고 기사가 바둑에 몰입되어 전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定)은 아무리 깊더라도 수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대상에 빼앗긴 상태로서의 집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定)은 계(戒)를 닦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 탐욕을 일으키면서도 얻을 수 있다.

②몰입을 주로 하는 정(定)이란 마음이 대상을 향해 빼앗겨 있다든가, 과거나 미래를 상상함이 없이 마음에 어떤 주제를 만들어 집중하고 있는 정(定)을 말한다. 이것은 불법을 제외한 다른 종교, 예컨데 힌두교나 자이나교 혹은 신선도 같은 곳에서 행하는 일종의 단순 몰입적 ‘정(定)’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신의 이름이나 주문, 혹은 어떤 경구를 암송한다든가 호흡 등을 다스려 다른 생각들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의 주제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定)을 불교에서는 하나의 정당한 수행방편으로 인정을 한다. 불교 내에서도 이러한 수행방편을 때에 따라 쓰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도 있고 때로는 불가사의한 신비 체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뒤에 나오는 혜학을 성취하게는 못하므로 진정한 정(定)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③지혜를 낳게 하는 정(定)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작용을 되비추어 보는 조견법에 입각한 정(定)이다. 즉, 단순한 속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정(定)으로 혜학(慧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보려는 사람은 대상에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다. 대상을 보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보려하기 때문에 자연히 번뇌의 흐름이 차단되어 돌이켜 비춤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정학(定學)의 이룸이다.

 

혜학(慧學)은 지혜를 닦는 것이다. 혜(慧)는 산스크리트어 프라냐(prajna) 즉 반야를 해석한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이란 자신과 세계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알아 생·로·병·사의 일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경지이다. 온갖 번뇌와 무지 속에 가리워져 맹목적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스러지고 마는 생명의 한계로부터 훨훨 벗어나 대해탈 대광명의 마음을 누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慧)는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햇빛 같은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지혜와는 다르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는 흔히 분석하고 추리하고 발명하는 지식적 지혜로 자신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깨치지 못한다. 하지만 계(戒)와 정(定)을 통하여 이루어진 지혜는 자신과 세계의 참모습에 눈을 뜨고 전체적인 속성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최상의 윤리인 계(戒)를 지키고, 일고 꺼지는 자신의 마음을 놓치지 말고 관찰하여 깊은 선정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잘못 알고 있던 의식들이 홀연히 깨지면서 중생 본래 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서 혜(慧)에는 보통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①부처님 설법을 듣거나 경전을 읽고 알게 되는 이론적 지혜인 문혜(聞慧),

②문혜를 스스로 사색해보고 연구해서 확신하게 되는 지혜인 사혜(思慧),

③문혜와 사혜를 생각이나 사상으로써만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수행실천해서 얻게 되는 지혜인 수혜(修慧),

④수혜를 더욱 쌓아 완전히 모든 것을 환히 알아버린 지혜인 증혜(證慧)가 그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지혜가 열리면 모든 법은 무상이요 무아요 고통이라는 것을 활연히 알게 되어 일체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안온한 열반의 경지를 누린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지혜가 열리면 현상적으로 무상이요 무아요 고통인 것 같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법이 진여(眞如)요 청정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체에 대한 차별심이 사라져 본래가 모두 열반임을 보게 된다고 한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이 지혜를 공성(空性)·불성(佛性)·여래장(如來臧)으로 취급하기도 하면서 절대화시키기도 한다.}

[대한불교 연합 조계종 불교 용어 사전에서]

 

{▩ 삼학(三學)

불타의 교법을 바르게 알아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의 가르침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다. 삼학은 대장경의 수많은 가르침을 계·정·혜로 분류하여 공부하는 자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을 제시해준 슬기로운 가르침이다. 해탈도론(解脫道論)에서는 “계·정·혜를 해탈도라 하니 계는 위의를 뜻하고 정 어지럽지 않음을 뜻하며 혜는 알고 느낌을 뜻하고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또 계는 나쁜 업을 제하며 혜는 번뇌의 때를 제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은 각각의 수행이기보다는 계를 닦음으로써 정이 생기고, 정을 닦음으로써 혜가 생기고, 혜를 닦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① 계학(戒學) 계란 심신을 고르고 바르게 하는 것이며 심신에 대해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며, 또 그릇됨을 막고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계의 종류에는 지악계(止惡戒), 행선계(行善戒), 이타행(利他行)의 계가 있다.

우리가 흔히 계라고 말하는 재가자(在家者)의 오계, 팔재계와 출가자(出家者)의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사미 십계는 지악계에 포함된다. 

② 정학(定學) 정이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인데 정을 얻기 위해서는 조신(調身)·조식(調息)·조심(調心), 즉 신체와 호흡과 마음을 잘 조정해야 한다.

정에는 2종이 있으니 나면서부터 마음을 한 곳에 머물러 두는 심작용이 있는 생득선정(生得禪定)과 수행하여 얻어지는 수득선정(修得禪定)이 있다. 

③ 혜학(慧學) 선종의 최종적인 목적은 깨침의 지혜를 얻는 데 있다. 이 삼학과 육바라밀에서도 혜(慧)가 맨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으며 실천적으로 진실한 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능(能)과 소(所), 자(自)와 타(他)의 대립을 무마시키려는 청정세간지(淸淨世間智)를 지(智)하 하며 출세간무이지(出世間無二智)를 지혜(반야)라고 한다.}

[붓다월드에서]

 

{불도를 수행하는데는 계,정 ,혜(戒 定, 慧)  이 세 가지를  지켜 나가야 하는데

[계(戒)]는 부처님의 경계하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정(定)]은자기의 마음이 굳게 안정되는 것이요,

[혜(慧)]는 지혜가 갖추어지는 것인데  이 세가지를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계(戒); 대승무계니 해서 대승교에서는 계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잘못입니다. 대승무계란 말은 계를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에 맞도록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부처님이 경계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범부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어디로 갈는지 모르니까 그야말로 배를 산으로 끌고 갈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定)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즉 환경이 변한다고 해서 마음이 항상 동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면 혜(慧)가 갖추어집니다. 혜라는 것은 보통 지혜라는 말과 달라서 사물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입니다. 흔히[저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하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의 마음이 미혹이 없어지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마음에 미혹이 남아있는 동안은 사물의 상이 똑똑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소리를 들어도 소리가 올바르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미혹이 없어져서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알아지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정혜(定慧) 구족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정해져서 동요하지 않게 되고 지혜가 갖추어진다. 즉 모든 사물의 실상이 있는그대로 보이게 된다는 뜻이 정혜(定慧)입니다.

[법화경 사랑에서]

 

하나의 종교인 불교는 엄청나게 넓고 깊은 敎理(교리)를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을 담은 經典(경전)만도 우리나라 海印寺(해인사)에 간직된 대장경판은 6천 7백여권이 새겨져 있고 日本(일본)에서 간행된 大正新修大藏經(대정신수대장경)엔 1만3천권의 불전이 수록되어 있다.

그처럼 많은 수량의 문자 속에는 그 무슨 사연들이 쓰여져 있을까?

물론 그 속에는 우주와 인생, 정신계와 물질계ㆍ生命界(생명계)의 온갖 비밀이 다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 궁극의 취지는 모든 생명들로 하여금 그 생명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참된 생명의 값을 되찾으라는 가르침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삶의 진리를 가르쳐 보인 것이니 그 참된 삶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戒ㆍ定(계정)ㆍ慧(혜)’의 三學(삼학)을 내세웠다.

 

戒(계)’라 함은 올바른 행위.

‘定(정)’이란 흔들림 없는 마음

‘慧(혜)’란 슬기로운 生活(생활)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戒(계)’란 우리 인류로서 그 삶을 누리는 존엄성ㆍ가치성을 깨닫고 맹목적인 本能(본능)ㆍ충동ㆍ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언제나 理性(이성)과 良心(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스스로 자제하고 가장 바른 길을 찾아 밟아 나가는 것을 가리킴이다.

  그 實例(실례)로서 ‘내 生命(생명)을 아끼듯이 남의 生命(생명)도 아껴라, 내 것이 아니거든 無理(무리)하게 아끼지 말라. 간음한 짓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등을 비롯하여 온갖 理性(이성)과 良心(양심)의 궤도에 벗어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을 ‘戒(계)ㆍ戒律(계율)’이라고 함이다.

  ‘定(정)’이란 가장 안정된 마음의 상태이다. 世上(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제 마음의 安定(안정)을 얻지 못한다. 그 마음은 항상 원숭이 모양으로 까불고 파발말처럼 날뛴다. 그 까불고 뛰는 마음을 잡아서 태산처럼 정중하고 큰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곧 ‘定(정)ㆍ禪定(선정)’이다. 이런 마음을 잡아 가릴 적에 그는 머리로 해와 달을 이고 발로 땅을 밟고 버티고 선 거룩한 人格者(인격자)로서 우주의 主人公(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慧(혜)’란 곧 마음의 빛이다. 우리의 마음은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있다. 모든 哲者(철자)ㆍ聖者(성자)는 곧 그 마음의 빛을 발명한 분이다. 예수ㆍ孔子(공자)ㆍ소크라테스도 그러하고 석가님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의 빛을 등지고 자꾸 어두운 뒷골목을 더듬어 헤매는 그것이 가련하다.

부처님은 그 많은 法門(법문)을 하신 그 뜻은 오직 우리에게 가장 올바르게 흔들림 없이 슬기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戒(계)ㆍ定(정)ㆍ慧(혜)’의 三學(삼학)이다.

[동대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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