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明) 또는 치(癡, 산스크리트어: avidyā, moha, mūdha, 팔리어: avijjā, 영어: ignorance, delusion)는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3독(三毒) 즉 불선근(不善根) 가운데 하나이다. 

부파불교와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5가지 자성불선(自性不善) 가운데 하나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즉 6수면(六隨眠)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교학에서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의 9결(九結) 가운데 무명결(無明結)에 해당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4성제(四聖諦)의 교의에서 집제(集諦)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2연기(十二緣起)의 교의에서 제1지분인 무명(無明)에 해당하고, 제2지분인 행(行), 제4지분인 명색(名色), 제9지분인 취(取)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5온(五蘊)의 법체계에서 행온(行蘊)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2처(十二處)의 법체계에서 법처(法處)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8계(十八界)의 법체계에서 법계(法界)에 속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46가지) 중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51가지) 중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무명(無明)은 어리석음, 어둠, 막힘, 미혹(迷惑), 치(癡), 암(闇), 장(障), 미(迷), 우치(愚癡), 무지(無知),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이들 중 미혹(迷惑)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또는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인데, 불교 사전들에서의 정의에 따르면 미(迷)는 사(事)와 이(理)에서 잘못이 있는 을 말하고, 혹(惑)은 사(事)와 이(理)에 밝지 못한 을 말한다.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가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아래 인용문 참조)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무지(無智)는 마음이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 등의 《성유식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 

현대 학자의 견해들 중 하나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산스크리트어 아비드야(avidyā)와 모하(moha)의 번역어로서 명지(明知, vidyā)가 없는 것, 즉 이[理: 진실한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사[事: 사물]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무명(無明)이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을 이루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은 미혹된 존재가 겪는 괴로움[苦]의 근본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不滿足)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갈애(渴愛) 즉 탐욕(貪欲) 또는 집착(執著, 執着)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으로 이해되고 있다.

 

초기불교

고타마 붓다

《잡아함경》에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업,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에 인용된, 고타마 붓다의 설법이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가 일어나며, 즉 구체적으로는 악욕[欲, 惡欲: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 탐욕] · 에(恚, 瞋: 성냄) · 해(害: 해치려 함)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8정도의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다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染污)한 업의 원인이 되며, 염오(染污)한 업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 큰 또는 더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 · 有緣 · 有縛法經)〉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안식[眼]에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안식[眼]의 인(因), 안식의 연(緣), 안식을 속박시키는 자[縛]인가? [지금까지 쌓은]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 안식의 인이고, 업이 안식의 연이며, 업이 안식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업의 인, 업의 연, 업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갈애[愛, 집착, 애욕]가 업의 인이며, 업의 연이며, 업을 [즉, 안식의 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갈애[愛, 집착, 애욕]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갈애(집착)의 인, 갈애(집착)의 연, 갈애(집착)를 속박시키는 자인가?

무명(無明)이 갈애(집착)의 인이며, 갈애(집착)의 연이며, 갈애(집착)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무명(無明)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무명의 인, 무명의 연, 무명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의 인이며, 무명의 연이며, 무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부정사유의 인, 부정사유의 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인가? 안식[眼]과 색경[色]을 인연[緣]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그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어리석음[癡]이 다시 부정사유의 인이며, 부정사유의 연이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안식과 색경을 인연하여 부정사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을 일으킬 때, 그 어리석음[癡]이 바로 곧 무명(無明)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을 바탕하여 구하고 원하는 것[求欲]을 갈애[愛, 집착, 애욕]라 하며, 갈애[愛, 집착, 애욕]에 바탕하여 짓는 것[所作]을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라 한다.

이와 같이[如是], 비구들이여,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는 무명(無明)을 원인[因]으로 하여 갈애[愛, 집착, 애욕]가 된다[不正思惟因無明為愛]

[이와 같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집착, 애욕)가 생기고[無明因愛], 갈애(집착, 애욕)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 생기고[愛因為業], 업(염오(染污)한 업)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즉 3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이 생긴다[業因為眼]. 이식[耳] · 비식[鼻] · 설식[舌] · 신식[身] · 의식[意]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일러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緣 · 有縛法經]〉이라 한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한글본≫

 

사리불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에서는 염부차(閻浮車)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무명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끊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으며, 이에 사리불은 무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명을 끊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소경(小經)에서 염부차는 사리불의 설명을 통해 무명이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으로 이해하며, 그리고 사리불은 8정도(八正道)가 무명을 끊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명(無明)이라고 말들 하는데, 무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명이라는 것은 과거[前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미래[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과거[前際] · 미래[後際] · 현재[中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苦] · 괴로움의 발생[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앎이 없고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안[內]에 대해서도 앎이 없고 밖[外]에 대해서도 앎이 없으며, 혹은 이러저러한[彼彼] 일[事: 개개의 사물, 특히 앞에 나열한 이치들과 관련된 개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어둡고[闇] 막히면[障],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이겠군요.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무명을 끊게 되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이른바 8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소견[正見]과……(내지)……바른 선정[正定]입니다.

—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 한글본≫

 

부파불교

학자들은 설일체유부의 논서들이 세 단계의 발전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는데, 주요 논서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단계:《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

2단계《아비달마시설족론(阿毘達磨施設足論)》《아비달마식신족론(阿毘達磨識身足論)》

《아비달마계신족론(阿毘達磨界身足論)》《아비달마품류족론(阿毘達磨品類足論)》《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3단계《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아비달마 논서들의 발전 순서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아비달마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사리자(舍利子)는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3법품(三法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우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문) "우치의 불선근[癡不善根]"이라 했는데, 우치[癡]란 어떤 것인가? 

(답) 전제(前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후제(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안[內]에 대하여 앎이 없고 바깥[外]에 대하여 앎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업(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앎이 없고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선(善)을 지을 업[善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악(惡)을 지을 업[惡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무기[善惡, 無記]를 지을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는 것이다. 

원인[因]에 대하여 앎이 없고 원인으로 생긴 업[因所生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불(佛)에 대하여 앎이 없고 법(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승가[僧]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苦]에 대하여 앎이 없고 괴로움의 원인[集]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滅]에 대하여 앎이 없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도(道)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착한 법[善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죄 있는 법[有罪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죄없는 법[無罪法]에 대하여 앎이 없는 것이다. 

닦아야 할 법[應修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하열한 법[下劣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훌륭한 법[勝妙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검은 법[黑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흰 법[白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인연으로 생긴 법[緣生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를 사실대로 모르는 것이다[如實無知]. 

이와 같이 앎이 없고[無知], 소견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두우며[黑闇], 어리석고 못났으며[愚痴],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으며[盲冥], 가리워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으며[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渾濁)하며, 가리고 덮여서[障蓋], 소경이 되고 무명(無明)을 일으키며, 무지(無智)를 일으켜서 뛰어난 지혜[勝慧]를 없애고,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또 무명루(無明漏)와 무명폭류(無明暴流)의 무명의 멍에[軛]와 무명의 독 뿌리[毒根]와 무명의 독 줄기[毒莖]와 무명의 독 가지[毒枝]와 무명의 독 잎사귀[毒葉]와 무명의 독 꽃[毒花]과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치(癡), 등치(等癡), 극치(極癡)와 개(改), 등개(等改), 극개(極改) 등 치(癡)의 종류와 치로 생기는 것과 개(改)의 종류와 개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서 우치[癡]라 한다. 

—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삼법품(三法品)〉. 한글본≫

 

아비달마법온족론

12연기: ① 무명 ② 행 ③ 식 ④ 명색 ⑤ 6입 ⑥ 촉 ⑦ 수 ⑧ 애 ⑨ 취 ⑩ 유 ⑪ 생b⑫ 노사

 

목건련(目乾連)은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또한, 목건련은 무명연행(無明緣行), 즉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는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인 무명(無明)과 제2지분인 행(行)의 연기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명연행(無明緣行)이란 무명을 인연하여 탐(貪) · 진(瞋) · 치(癡)의 불선근이 생기는 것과 8정도(八正道)의 반대인 8사(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 생기는 것을 포괄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고 함에서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이른바 전제(前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후제(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안[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밖[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업(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업과 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게 짓는 업[善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악하게 지은 업[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착하거나 악하게 짓는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인(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인으로 생기는 법[因所生法]에 대하여도 아는 것이 없다.

또 부처님[佛] · 가르침[法] · 승가[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괴로움[苦] · 괴로움의 원인[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善不善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죄가 있고 죄가 없는 법[有罪無罪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마땅히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應修不應修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하열하고 승묘한 법[下劣勝妙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희고 검은 법[白黑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緣生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에 대하여 사실대로 아는 것이 없는 것[如實無知]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없고[無知] 보는 것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둡고[黑闇] 어리석고[愚癡]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고[盲冥] 우리에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고[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하고[渾濁] 가리고 덮였으며[障蓋], 소경이 되게 하고 밝음(총명)이 없게 하며[發無明], 지혜가 없게 하고[發無智] 하열한 지혜를 일으키며[發劣慧],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을 증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루(無明漏) · 무명폭류(無明暴流) · 무명액(無明軛)과 무명의 독 뿌리[無明毒根] · 무명의 독 줄거리[毒莖] · 무명의 독 가지[毒枝] · 무명의 독 잎[毒葉] · 무명의 독 꽃[毒花] ·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어리석고[癡] 평등하게 어리석고[等癡] 극히 어리석으며[極癡], 사납고[欣] 평등하게 패려궂고[等欣] 극히 패려궂으며[極欣], 어리석음의 종류[癡類]와 어리석음[癡]으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 무명(無明)이라 한다.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行)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이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의 성품을 바로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것이라[無明緣行]'고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을 앞의 행[前行]으로 하고 무명을 표치[幟]로 삼기 때문에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무참(無慚) · 무괴(無愧) 등이다. 이 무참 · 무괴로 말미암아 모든 삿된 소견[邪見]을 일으키고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邪思惟]을 일으키며, 삿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삿된 말[邪語]을 일으키고 삿된 말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邪業]를 일으키며, 삿된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생활[邪命]을 일으키고 삿된 생활로 말미암아 삿된 노력[邪勤]을 일으키며, 삿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삿된 기억[邪念]을 일으키고 삿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삿된 선정[邪定]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 삿된 소견 · 삿된 생각 · 삿된 말 · 삿된 행위 · 삿된 생활 · 삿된 노력 · 삿된 기억 · 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한다. 

—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 한글본≫

 

아비달마품류족론

세우(世友)는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무명(無明)은 무엇인가? 3계(界)에 아는 것이 없는 성품[無知性]이다.

—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 한글본 ≫

 

아비달마발지론

가다연니자(迦多衍尼)는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에서 다음과 같이, 고타마 붓다의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언급을 빌어서 무명(無明)을 정의하고 있다.

≪이 [과거세의] 업[此業]을 인연하여 각각의 번뇌(煩惱)가 일어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즉, 이러한 상황을, 즉 과거의 업에 바탕하여 탐 · 진 · 해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

 

아비달마구사론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世親)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무지(無智)는 마음이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승불교

현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불교의 유식학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뉘는데, 제1기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의 유식학이고, 제2기는 세친(世親)의 유식학이고, 제3기는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의 유식학이다.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구분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유식학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잡집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무착(無着)의 《대승아비달마집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3계(三界)에 대해 무지(無知)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무명(無明) 또는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온갖 법(法)에 대해 잘못된 결정[邪決定]을 내리게 하고, 의심[疑]을 일으키게 하고, 잡(雜: 잡염)을 일으키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 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안혜(安慧)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知)'라 표현된 것을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智)'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잘못된 결정[邪決定]이란 전도된 지혜[顛倒智]를 말하며, 의심[疑]은 유예(猶豫)하는 것을 말하며, 잡(雜)은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을 말한다. 그리고 발동근거[所依]가 된다는 것은 우치(愚癡: 어리석음)로부터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대승오온론·광오온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세친(世親)의 《대승오온론》과 그 주석서인 안혜(安慧)의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업과(業果), 즉 업과 그에 따른 과보, 즉 인과의 법칙과, 4성제[諦, 四聖諦]와, 3보[寶, 三寶]에 대해 무지(無智: 밝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할 수 없음)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또한,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에는 구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의 2종이 있다. 즉, 전생(前生)의 업에 합당하게 태어날 때 타고난 무명이 있고, 이번 생에서 잘못된 스승[邪師]이나 잘못된 가르침[邪敎] 또는 자신의 사사유(邪思惟, 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잘못된 생각이나 논리 또는 추리)에 의해 후천적으로 생긴 무명이 있다.

 

성유식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護法) 등의 《성유식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 [위키백과]

 

**무명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갖가지 심오한 해설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체 사물에 대한 도리를 밝게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거나 진리에 대한 무지로 통용되고 있다.

인간 생사의 근원을 밝히는 12연기(緣起)의 첫머리에 나오는 무명은 ‘나’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요 ‘나’를 범부이게끔 하는 근원이며, 모든 번뇌의 근본이요 일체 악업(惡業)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본업경 本業經≫에서는 “무명은 일체법(一切法)을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고,

≪대승의장 大乘義章≫에서는 “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이다. 그 본체에는 지혜도 밝음도 없다.”고 하였다.

≪구사론≫에서는 “무명의 모습은 사제(四諦)와 삼보(三寶) 및 업(業)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유식론 唯識論≫에서는 “무명은 모든 사물과 이치에 대하여 미혹되고 어리석은 것을 본성으로 삼고, 능히 지혜를 결박하여 일체를 잡되고 물들게 하는 것으로서 그 업을 삼는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신론 起信論≫에서의 무명에 대한 해설이다. ≪기신론≫에서는 무명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최초의 한 생각을 근본 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그 근본 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게 또는 거칠게 일어나는 모든 허망한 생각들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하였다.

무명은 불교의 기본 교리로서 불교가 여러 부파(部派)로 나누어진 뒤에도 인간의 괴로움을 설명하는 근본 교설로 채택되었고, 2종무명·5종무명·15종무명 등으로 무명을 세분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석가모니 당시부터 무명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선종에서는 독자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본성을 뜻하는 법성(法性)과의 일체로 파악되었다.

무명법성일체설에서 볼 때 법성과 무명은 마치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다. 무명이라는 얼음의 본성은 원래가 물이다. 얼음이라고 하지만 물의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 사람의 심성은 본래 얼음이 아니나 법성의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일 뿐, 어느덧 홀연히 생겨난 무명은 곧 근본 깨달음인 본각(本覺)의 법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명법성일체설은 우리 나라 선종에서도 뿌리를 내려 무심선(無心禪)을 정립하기에 이르렀고, 번뇌와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라는 실천적 규범을 낳기도 하였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一心)을 설명하면서, 일심 이외에 별다른 법이 없으나 무명으로 말미암아 일심을 미하게 되어 갖가지 번뇌를 일으키고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무명을 잠재적인 충동력이라고 보았다. 곧 이 충동력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동요하게 되지만, 무명 자체는 아직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였다. 즉, 무명은 일심을 동요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파악하였고, 이 무명의 충동력이 계속해서 일심의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게 될 때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명은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이 되며, 이 무명을 없앨 때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다움 백과

 

**무명(無明)이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 난 사람에게는 허공꽃(空華)이 보이고 달을 쳐다볼 적에 달이 두 개로 보인 것과 같은 것이다.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눈에 병이나 헛것이 보이고 달은 하나뿐인데 두 개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허공을 잘못 보는 것이며 달을 잘못 보는 것이라 허공도 실제를 모르고 달도 본래 모습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 원각경(圓覺經) -

 

**無(없을 무)는 춤을 추고 있는 무당을 그린 글자이다.

舞(춤출 무)와 通(통할 통)한다.

춤사위는 춤을 추는 동안에는 나타나지만 춤을 멈추면 곧 사라진다. 마치 박수소리가 두 손바닥이 마주쳤을 때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존재(existence)에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버리는 것을 因緣(인연)이라고 한다.

즉, 12緣起(연기)는 因緣法으로 시작된다.

實體(실체:substantia) 는 뿌리와 줄기의 관계성이라면, 緣起(연기: transformatio)는 '뿌리가 곧 줄기'라는 개념이다. 즉, 緣起(연기)는 實體(실체)를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실체를 낳게 하는 場所(장소)를 탐구한다.

場이나 所는 實體(실체)가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非物質的 場所에서 物質이 出現하는 것을 깨달아 보는 것이 無明(무명)의 뜻이다.

因(인할 인)은 네모(口: 에워쌀 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大)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의 이 네모(口)가 바로 場所(장소)가 되며, 이 장소로부터 圓(둥글 원)인 360度의 法度가 시작된다. 네모난 場所가 없다면 둥근 하늘을 가질 수 없다. 지구가 '네모나다'는 하는 것은 이렇게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고대인들이 무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圓方角(天地人)의 순서가 아니라, 角方圓(각방원)의 순서로 나아간다.

角이 있어 方이 만들어지고, 方이 있어 圓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一, 二 , 三 의 순서로 보는 것이 아니라, 三, 二, 一의 순서로 보는 것인데, 전자는 量的順序(양적순서)요, 후자는 質的次例(질적차례)이다.

三이 先在(선재)하지 않는다면 一이 二가 되거나 三으로 귀결될 수 없다. 순수한 異質은 서로의 영역으로 옮아갈 수 없으며, 오로지 순수하지 않는 雜(섞일 잡)스러운 것만이 서로의 영역으로 옮아갈 수 있다. 三 은 一과 二를 모두 갖고 있는 雜한 것이므로 이 三의 중개로 一이 二가 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양적으로 보면 一과 二가 합해서 三이 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三이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實體界(cosmos substantiae)에서는 一, 二, 三 으로 진행되고 因緣界(domus transformationis)에서는 三, 二, 一 의 차례로 드러난다. 즉 실체계는 '진화적'이지만, 인연계는 '선택적'이다.

연기의 첫번째인 無明은 이렇게 실체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임을 확실하게 定한다. 즉 一 이 二요, 三 이다 라는 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있고 없고는 실체계에서만 감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결국 認識(인식)작용이 낳는 Cosmos(세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실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無明(무명) 작성자 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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