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클수록 갈등도 늘지만, 본질은 조건을 따르는 ‘인연성’
참새 입장에서 방앗간은 순경계!
분별심으로 시비하면 서로 다퉈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지나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으로 참새 입장에서 보면 방앗간은 순경계입니다. 즉 마음에 드는 상황이나 대상을 두고 좋은 감정으로 따르려는 것입니다.
이때 감각기관을 의지해 대상과 접촉하며 느끼는 것에 괴로운것, 즐거운것, 괴롭지도즐겁지도않은세가지(三受, 一苦二樂三不苦不樂)의구별이있습니다.
순경계는 자신의 뜻과 부합해 심신이 기쁜(適悅) 상태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것으로 주당이 술을 쳐다보는 모습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이것은 대상과 접촉(觸)하는 순간 세 가지 감각(三受) 가운데 즐거움(樂受)과 좋아하는 마음(愛)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스에 불이 붙는 것처럼 찰나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하려는 욕망(取)이 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대부분 그저 쳐다만 볼 것 같습니다. 가질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다가 체념하고 돌아서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절제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맹목적인 소유욕은 과도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면 대상을 접촉(觸)하는 순간 즐거움(樂受)을 느끼고 동시에 강한 애착(愛)을 채우기(取) 위해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이연기의 順觀에서 본다면 무명을 기반으로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해 고통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즐겁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가까이 하려는 것(樂謂滅時有和合欲)으로 순경계이며, 괴롭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과 떨어지려는 것(苦謂生時有乖離欲)으로 역경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역경계에 잘 걸리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말일 것입니다. 타인이 내뱉는 한마디 말을 따라서 마음에 들면 극락 갔다가, 비위를 거스르면 바로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좋고 싫은 감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갈등과 번민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다 가질 수도 없고 싫은 것을 다 버릴 수도 없다면, 이래저래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인욕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알아 둬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安忍波羅蜜’입니다. ‘편안하게 인내한다’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욕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대상이 아름다운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그 본질을 보면, 여러가지 조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화합체를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매끈하게 빠진 자동차를 언뜻 보았을 때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여러 부속들로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연 따라 잠시 존재하는 것이라서 어느 것 하나라도 조건이 다하면 곧 사라집니다. 즉 영원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을 따라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상과 자신의 본질을 살피는 것으로 다른 말로 一切皆空의 도리를 따르는 인욕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경계는 修身하는 요량으로 억지로라도 참으면 되므로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계 중에서도 분노를 참아야 할 때는 자칫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래서 파도가 자연스럽게 왔다가 가듯이 시비심 없이 인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억지로라도 분별하여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참는 자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참는 것은 억지로 인내하는 것이고, 분별로 참는 것은 사리를 따져 감내하는 것이며, 도리로 참는 것은 시비심 없이 인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에서는 事理를 따져 참는 인내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는 만큼 번뇌도 많을 것이므로 인내해야 할 것도 덩달아 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더 나아가 타인과 시비분별에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나는 항상 말했다. 지혜 있는 자는 어리석은 자와는 다투지 않는다고, 우자가 욕설해도 지자가 잠잠하면, 그것은 곧 참으로 그를 이김이 된다(我常言智者 不應與愚諍 愚罵而智默 即為信勝彼).” <장아함> 전투품의 말입니다.
[불교신문3199호/2016년5월4일자] 범수스님
**순경계 역경계
마음을 따르는 것, 거스르는 것도 수행이다.
길을 걷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억지로라도 ‘인욕’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갖 고통과 번뇌 등을 참는 수행법의 하나인 인욕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헤아려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크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과 거스르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자신의 뜻에 부합되면 順境界라 하고 그렇지 않으면 逆境界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싫어하는 것은 거스르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거나 부족하여도 참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라고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움켜쥐었다간 인과의 과보가 따를 것이고,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이라고 쉽게 내팽개쳤다간 자비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리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常一主宰(변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자아)하는 ‘내’ 가 아니므로 참고 말고 할 주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떤 상황에 처하였을 때 인내와 비례하여 갈등하는 자신을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욕에 따른 여러 공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십이장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힘이 많으며, 무엇이 가장 밝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욕이야말로 힘이 많으니 악을 품지 않는 까닭에 몸과 마음이 아울러 편안하고 건강할 수 있으며, 참는 사람은 악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이 되느니라.”
사전에서 인욕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을 감내하여 마음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설사 ‘타인의 핍박을 받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참음의 기준과 한계, 그리고 종류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므로 전체를 소개하기보다 인내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
‘고난에 처하더라도 신심에 동요를 일으키지 말라.’ 그래서
‘인욕의 이치를 잘 알면 수행자의 규범(戒)을 깨뜨리는 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면서 인욕의 자세와 공능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리석어 어기는 戒만큼이나 참지 못하여 범하는 규범(戒)도 빈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행위(業)와 연관시킨다면 비록 남이 자신을 괴롭히더라도 몸을 단속하여 인내하는 身忍行과 타인의 거친 말에도 투쟁을 일으키지 않는 口忍行, 그리고 상대로부터 수치를 당하더라도 원한을 가지지 말라는 意忍行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몸으로 참고, 입으로 인내하고, 생각으로 감내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좋고 싫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평온으로 이끄는 계(戒)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종국에는 해탈과 열반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을 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욕’하라는 것은 단순히 무조건 억누르고 견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는 것은 단순히 삭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거나 똑같은 상황에 이르면 그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것은 그냥 인욕이라 하지만, 일체가 공한 이치를 알고 행하는 인내(行觀一切皆空之安忍)는 바라밀이라 합니다. 바라밀이란 열반(彼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의 총칭으로 인욕으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정진이 인욕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글에 “참는 사람은 惡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이 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달콤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듯이 분노케 하는 것에서 절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인욕하지 않았을 때 따르는 결과를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참으려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절제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억울하거나 부당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 일어나는 화를 다스리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이 흐르는대로 따르면 한순간 기분은 풀릴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해야 할 멍에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이 관계를 <선가귀감>에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내는 마음 한 번 일으키면 백만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
[출처] 작성자 태을주
**마간디야를 통해 본 순경계와 역경계
순경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애욕의 대상이다. 부처님은 애욕의 대상에 당면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셨을까? 나중에 코삼비국 우데나 왕의 왕비가 된 마간디야는 뛰어나게 아름다워서 어울리는 남편감을 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상류층 자제들이 청혼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어느 날 부처님을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의 딸과 결혼할 만한 배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아내와 함께 부처님께 가서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라고 청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마라의 세 딸들이 소녀와 중년의 갖가지 요염한 모습을 하고 와서 당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말씀하시고,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셨다.
갈애, 혐오, 애욕이라는 이름의 선녀처럼 아름다운 세 딸을 보았어도 사랑하고픈 마음이 없었는데,
오줌과 똥으로 가득한 마간디야를 왜 원하겠는가? 그 더러운 몸에 나의 발바닥조차 닿지 않게 하겠네.
이 게송을 들은 마간디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나함과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마간디야는 자신을 오줌과 똥으로 가득한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발바닥조차 닿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처님께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었다. 나중에 코삼비국의 왕비가 된 마간디야는 부처님이 그 나라로 오시자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매수해서 욕설과 비방을 퍼붓도록 지시했다. 삼보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은 부처님께서 성 안에 들어오시자 부처님 뒤를 따라다니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난다는 차마 듣기조차 힘든 욕설을 듣고 부처님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고 간청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려움이 일어나면 어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어려움이 가라앉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여래를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에 비유한다. 전쟁터에 나간 코끼리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처럼, 사악한 자들이 내뱉는 말을 참고 견디는 것이 여래가 할 일이라고 설하시는 것이다.
전쟁터의 코끼리가 날아오는 화살을 참고 견디듯이 나는 욕설을 참고 견디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과 계율을 모른다.
사람들은 축제에 잘 길들인 코끼리만을 데리고 가고, 왕은 길들인 코끼리만 탄다.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잘 참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잘 길들인 사람이다.
노새나 준마나 힘센 코끼리도 길들이면 훌륭하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 『법구경』 320~322
결국 자신을 잘 길들인 사람은 순경계이든 역경계이든 동요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이교도의 집안에 시집간 급고독장자의 딸 쭐라수밧다가 읊은 다음과 같은 게송에 잘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이익이 있으면 우쭐대고 손해가 있으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이익과 손해에 무관심하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명성을 얻으면 우쭐대고 잃으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명성을 얻고 잃음에 무관심하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칭찬하면 우쭐대고 비난하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칭찬하거나 비난받거나 똑같은 태도를 보이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기쁘면 우쭐대고 괴로우면 풀이 죽지만
그분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벗어난 분들이지요. 그런 분들이 저의 스님들이에요. - 『법구경』 304
이 게송에는 여덟 가지 풍파, 즉 八風이 잘 나타나 있다. 이익과 손해, 명성을 얻고 잃음,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에 당면하여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물며 부처님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출처 | 난타 비구를 통해 본 순경계의 활용
**부처님께서 경계를 대하여 如如不動 하셨음은 많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순경계와 역경계를 잘 활용한 경우도 엿보인다.
태자의 신분으로 있다가 결혼을 앞두고 얼떨결에 출가한 난타 비구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수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알고 계신 부처님께서 어느 날 난타를 데리고 불이 타고 지나간 숲으로 갔다. 거기에는 화상을 입은 암컷 원숭이가 있었는데, 그 원숭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난타여, 저 원숭이와 그대의 약혼녀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그러자 난타가 대답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약혼녀는 이 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인입니다. 어찌 저렇게 화상을 입은 원숭이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난타를 데리고 천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오백 명의 여인들이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를 보고 다시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저 여인들과 그대의 약혼녀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부처님이시여, 저 여인들에 비하면 저의 약혼녀는 마치 원숭이와 같습니다. 이 오백 명의 아름다운 핑크빛 발을 가진 천녀들은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뻐하라, 난타여! 그대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오백 명의 아름다운 핑크빛 발을 가진 천녀들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내가 보증하노라.”
난타가 설레는 가슴으로 말했다.
“부처님께서 오백 명의 천녀를 얻게 된다고 보증하신다면 저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이에 다른 비구들은 난타를 ‘일용직 잡부’ 혹은 ‘장사꾼’처럼 천녀라는 대가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자라고 놀려대고 비난했다. 난타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홀로 떨어져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결국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부처님은 무조건 애욕을 끊으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욕을 적극 활용해서 보증까지 서주며 결국 애욕이 쉬도록 하고 있다.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 바라문 바랏와자 형제를 통해 본 역경계의 활용
바라문 바랏와자는 불교도인 부인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 부처님께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며, “무엇을 부수어야 편안히 살고 무엇을 부수어야 슬픔이 없는지”를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성냄을 부수어야 편안히 살고 성냄을 부수어야 슬픔이 없네.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는 달짝지근한 성냄을 부수는 것을 성자들은 칭찬하나니, 성냄을 부수면 더 이상 슬픔이 없기 때문이네.”
이러한 응답에 감동한 바랏와자는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동생이 찾아와 부처님께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묵묵히 이를 다 듣고 난 부처님은 마침내 주인이 손님에게 차려준 밥상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이처럼 그대가 나에게 비난하고 화내고 욕하였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도로 그대에게 되돌아갔다.”
결국 동생 또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이렇게 셋째, 넷째까지 사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잘 활용하여 마음을 닦는 계기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禪의 중흥조 경허 선사의 「참선곡」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일체 계행 지켜 가면 천당 인간 壽福(수복)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恒隨佛學(항수불학) 생각하고
同體大悲(동체대비) 마음먹어 貧病乞人(빈병걸인) 괄세 말고
五溫色身(오온색신)생각하되 거품같이 觀(관)을 하고
바깥으로 逆順境界(역순경계) 夢中(몽중)으로 관찰하여 喜怒心(희노심)을 내지 말고
虛靈(허영)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八風五欲(팔풍오욕) 일체경계 不動(부동)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순경계와 역경계의 여덟 가지 바람에 동요하지 말고 태산같이 여여如如하자는 뜻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러할진대 부처님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부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을 교화함에 순경계와 역경계를 자유자재로 잘 활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알고 보면 순경계가 역경계요, 역경계가 순경계다. 또한 내가 있기에 경계가 있는 것이지, 내가 사라지면 경계 또한 사라진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애욕과 분노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활용해야 할 현상이다.”
[출처] 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불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 중에 '境界'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것과 또 다른 것이 맞닿아 있는 지점을 말한다.
부처님 법으로 볼 때 경계는 어떤 상황에 직면한 것을 의미한다. 경계에는 역경계와 순경계가 있다.
우리들의 일상사는 역순경계의 바람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좋고 싫고,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춥고 덥고 등등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이리저리 기분이 쏠리면서 허둥대며 살아간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으쓱하고 싫어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말이 아니다.
바람 잘 날이 없이 항상 기분이 오락가락 흐느적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역경계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을 말한다. 피하고 싶고,괴로운 상황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 막거나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른다. 인천 가는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수원 가는 전철이 오고 그 다음에는 구로까지만 가는 전철이 오는 것도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친한 사람이 죽으면 깊은 슬픔이 몰려오는데 이것 역시 견디기 힘든 역경계다. 보고 싶지 않은 상사나 직장 동료를 보는것, 힘든 일에 직면하는 것도 물론 역경계다.
순경계란 자신의 뜻에 맞는 상항에 마주치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고 즐겁고 편안한 상황이다. 내 마음에 아주 잘 들어맞아 내 뜻대로 술술 잘 풀리는 경우다.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거나 칭찬을 듣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산 아파트가 값이 뛰어오르고, 내가 산 주식이 폭등한다. 여하튼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전개되어 기분이 참 좋다. 그래서 자꾸만 그 좋은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들뜨게 된다.
이러한 역.순경계를 만났을 때 수행자가 그 경계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공부가 퇴보한다.
역경계를 만났을 때 그 괴로은 상황에 매몰되면 공부를 놓친다. 경계에 현혹되어 신심과 발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힘겨운 인생살이가 될 수 밖에 없다.
순경계도 마찬가지다.좋아하여 집착하고 편안하여 안주하면, 공부를 놓치게 되고 신심이 헤이해지고 나태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뭔가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증권이라도 크게 오르게 되면, 기쁘기는 한데 하루 종일 거기에 파묻힌다. 마음이 붕떠서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과 접하게 되면 거기에 착 달라붙는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 여인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뱅뱅 돌며 그 여자에 대해 집착한다. 이렇게 순경계는 기분이 좋긴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역경계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깊이 인내하고 받아들이면,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오히려 순경계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순경계에 접하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리고 순경계는 역경계로 돌변하기 쉽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그 여인이 자기의 기대와 어긋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심지어 증오까지 한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순경계가 역경계로 변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역.순경계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 중심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경계든 순경계든 그 경계에 직면해서는 일체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다고 보아 집착을 버려야 한다.
외부의 어떤 경계에 직면하더라도 자기 안에 정견이 서서 일체를 연기 현상으로 보면 모든 괴로움과 삿된 것을 건널 수가 있다.
경계에 직면할 때,경계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경계를 오히려 수행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면서 수용하는 것이다. 내 입장을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서 수용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을 막 타려고 하는데, 차의 문이 닫히면서 출발하는 경우 우리는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러나 그 다음이 더 문제다. 차를 타지 못한 것에 대한 속상한 마음이 생기면서 그것이 나의 마음을 지배해버린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럴 때 다른 자극이 들어오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일진이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하루 종일 그러한 기분에 지배된다. 경계에 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차가 떠나갔구나.편한 마음으로 다음 차를 기다리자.' 라고 마음을 돌려 보자. 경계가 들어올 때 참선 수행자는 그 경계를 향해 화두를 간절히 참구해 가야 한다. 다음 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화두를 들고 수행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은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대혜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다만 망상으로 전도된 마음과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과 분별로 이해하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기뻐하고 시끄러움을 꺼려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눌러버려라.
그리고 이렇게 눌러버린 경계에서 주어진 화두를 살펴라.
이와 같이 역경계가 오든 순경계가 오든 그 상황에 지배당하지 말고 바로 수용하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화두를 간절히 들어 돌파해 나가야 한다. 어려운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등 어떤 역경계에 직면했을 때라도 화두를 빈틈없이 드는 것이 살 길이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화두를 들고 있으면 그 상황은 지나가게 마련이다.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순경계가 좋고 편안하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들뜨고 집착해서는 안된다. 집착하는 순간 또다른 업을 짓게 된다. 경계를 만나는 매순간 화두로 대처하는 공부가 익어지면 역경계와 순경계를 만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일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逆한것이든 順 한 것이든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출처: 광명원 인생의 비밀 천도 효사상
**팔풍부동(八風不動)-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대처하기
온갖 바람이 불어온다. 따사로운 햇살과 더불어 살가운 바람도 불어오고 파도를 휘감고 마을과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쓰나미도 불어온다. 봄바람과 더불어 찾아온 쓰나미의 광풍에 일본열도가 흔들리고 내 마음도 함께 저려온다. 매화향기 그윽한 봄바람과 쓰나미의 역풍에 마음이 붕 뜨는가 하면 무겁게 가라앉는다.
우리 인생은 팔풍경계(八風境界)에 흔들리면서 살아간다. 팔풍경계란 여덟 가지 좋고 나쁜 현상과 접하는 일이다. 나를 이롭게 하는 이익(利)과 늙어가고 기울며 나에게 손해가 가는 쇠(衰)의 바람, 나를 헐뜯고 비방하는 훼(毁)와 나를 기리고 받드는 예(譽)의 바람, 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칭(稱)과 나를 나무라고 꾸짖으며 비난하는 기(譏)의 바람, 나를 괴로움에 멍들게 하는 고(苦)와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하는 락(樂)의 바람이 그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좋고 싫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기쁘고 슬프고 등등의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나룻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간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면서 산다는 점이다. 경계를 나누는 것도 부족해 그러한 경계에 집착하여 한없이 그 경계에 매여 벗어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의 파도는 크게 나누면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로 나누어진다.
역경계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가는 길을 가로 막고 내 마음가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남이 나를 조롱하고 비난하며 나무라면 화가 불끈 치밀어 오른다. 직장인의 경우 자신의 마음을 거스르는 상사와 만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 때문에 일터에 나가는 것이 두렵기조차 하다. 늙어가고 병드는 것도 역풍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슬픔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 괴롭고 힘든 상황에 내몰려 거기에 매몰되다 보면 화가 나고 침울하며 쓸쓸하고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우울하고 침통한 마음이 떠나지 않아 온통 세상이 먹구름이요 분노의 불길로 이글거린다. 거기에 매몰되면 매몰될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급기야는 죽음의 길로 향한다. 그렇게 현실에 깨어 있지 못하고 어두운 길목으로 자꾸만 접어든다.
순경계란 자신의 뜻에 맞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고 즐겁고 편안한 상황이다. 내 마음에 아주 잘 들어맞아 뜻대로 술술 잘 풀리는 경우다. 꿈에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일을 잘 추진해 직장 상사나 동료부터 칭찬과 찬사를 받는다. 투자한 주식이 뛰어오른다. 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고 즐겁다.
순경계는 일단 좋기는 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전개되어 기분이 참 좋다. 그렇게 기분 좋은 건 유쾌한 일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붙들려 우쭐하고 흥분하며 마음이 붕 떠 현실에 깨어 있지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과 접하게 되면 거기에 착 달라붙는다. 이렇게 순경계는 기분이 좋긴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집착한 결과 그만 평정심을 읽어버린다. 더 과한 욕심으로 탐욕을 부려 육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가다가 결국에 속도가 가속되어 걷잡을 수 없이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사실 역경계는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렇구나” 내지는 “상황이 그럴 수도 있겠지”하면서 깊이 인내하고 수용하면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 좋게 일이 전개되기까지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면, 그것마저도 감사거리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순경계는 극복하기가 만만치 않다. 순경계에 접하면 그 상황에 자석처럼, 어쩌면 무모한 불나방처럼 속절없이 붙들려가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기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순경계는 역경계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흔히 주변에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본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연인을 만나면 그 사람에 달라붙어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다가 그 여인이 자기의 기대와 어긋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상실에 젖는다. 증오까지 한다. 심지어는 철전지 원수가 된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순경계가 역경계로 변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코 인생을 잘 살려면 잘 풀릴 때를 조심해야 한다. 순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깨달음은 요원하고 행복 또한 오래 가지 못한다.
아무튼 역경계든 순경계든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경허스님은 『참선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생각하여 희로심(喜怒心)을 내지 말고 허영(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欲) 일체경계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역풍이건 순풍이건 그것은 사실 바람이 분 것뿐이다. 바람에는 실체가 없다. 여러 가지 인연 속에서 시절 인연을 만나 그렇게 바람이 불어왔을 뿐이다. 그것은 신의 징벌도 아니고 자연의 노여움도 아니다. 다만 원인과 조건에 따라 그렇게 움직였을 따름이다. 따라서 거기에 달라붙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집착하며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한다. 팔풍의 바람이 불어올 때 마음을 태산같이 오롯하게 세우면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기에 올바로 깨어 있다면 백천간두 진일보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역경계가 오든 순경계가 오든 바로 그 자리에 화두를 들어보라. 화두를 들고 그것을 온 몸과 마음에 깊게 스미게 해 꼭 붙들어 매는 순간, 이리저리 휘날리는 경계의 바람은 사라지고 평화롭고 잔잔한 내면의 모습과 마주할 것이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경계를 대처해 나가면서 즉시즉시 놓고 살아갈 때 새로운 활로 또한 열릴 것이다.
일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역(逆)하건 순(順)하건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 고명석/ 조계종 포교연구실 종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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