復次(부차) 餘經中 多以三種門說諸法(여경중 다이삼종문설제법)
또한 그 밖의 경에서 대부분 三種=세 가지 법으로써 모든 법문을 설하셨으니, 

(또한그 밖의 경()에서는 대부분 3()으로 열반문에 이를 수 있게 제법(諸法)에 대해 말씀하셨나니,)


所謂善門 不善門 無記門(소위선문 불선문 무기문)  

이른바 선문불선문, 그리고 무기문이니라. 

 

무기문(無記門, avyākṛta.)= 아직 선(善)이나 악(惡)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

 

今欲說非善門(금욕설 비선문) 非不善門(비불선문) 非無記門 諸法相故(비무기분제법상고)

說摩訶般若波羅蜜經(설마하반야바라밀경)

지금 선문도 아니고 불선문도 아니며, 그리고 무기문도 아닌 제법의 실상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시는 것이니, 

 

學法 無學法(학법 무학법) 非學 非無學法(비학비무학법) 見諦斷法(견제단법) 思惟斷法(사유단법)

이 밖에 배울 것 있는 이의 법=有學法배울 것 없는 이의 법=無學法, 그리고배울 것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이의 법=非學非無學法과 진리를 보아 끊는 법=見諦斷法과 사유로써 끊는 법=思惟斷法,

(참된 가르침()을 통해 제법(諸法)이 ()’하여서 삼세에 걸쳐 어느 것 하나 치우치지 않는 것임을 배워야 하는 사람=有學과

배움을 통해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임을 터득한 사람들=無學과

참된 가르침()에 대해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인 사람들

見諦斷法=견제도(見諦道)라는 사지(四地)에서 참된 가르침()을 통해 무의식에 갈무리된 불선업(不善業)의 버릇과

思惟斷法=무의식이라는 응어리를 끊어내고 참된 가르침()을 통해 사유(思惟)하여 삿된 견해를 끊어내며)

 

見諦斷法(견제단법,darśanaheya-dharma.)= 4제(諦)를 관찰하여 번뇌를 끊는 단계

思惟斷法(사유단법, bhavanāheya-dharma)= 견제단의 관법수행을 마친 뒤 다시 수습을 더해 사유의 의혹을 끊는 단계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 갓 입문한 초학자로 성문의 사람은 홀로 열반만을 위하는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계(戒)를 지니어 맑고 깨끗함을 지키고 가꾸어 나아가며 생사고해 벗어날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의 끝자락에 이르고자 삶의 온갖 아픔과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거니와, 간혹 관불삼매(觀佛三昧)를 배우거나 부정관(不淨觀)을 배우거나 혹은 일체중생을 한없이 사랑하여 항상 걱정근심 벗어난 편안함으로 즐거운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탬이 되도록 생각하고(大慈) 중생이 오도(五道)를 오가며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한없이 가엾고 안쓰럽게 생각하는(大悲) 마음에 대해 자세히 살피거나 무상(無常)을 비롯한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살펴보며 온갖 훌륭하기 그지없는 참된 가르침(善法)을 통해 공덕을 모으고자 분별하고 오개(五蓋)라는 불선법(不善法)은 버려가며 비록 나름의 지혜를 지녔을지라도 선정(禪定)이라는 감로수(甘露水)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즉 결코 생사고해 벗어날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의 끝자락에 이르러 무상도(無上道)를 결코 얻지 못하는 까닭에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

 

無斷法 可見有對(무단법 가견유대) 不可見有對(불가견유대) 不可見無對(불가견무대)

끊어지지 않는 법=無斷法과 볼 수 있고 대함이 있는 것=可見有對와 볼 수 없으나 대함이 있는 것=不可見有對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不可見無對와

(無斷法 (무단법)=참된 가르침()을 통해 오개(五蓋)에 덮힌 거친 마음에 묶이게 된 것() 끊어내어 일체법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없게 되는 것과

可見有對=마주하게 되는 것의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것과

不可見有對= 마주하지 않는 것의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지니지 않는 것,)

 

上中下法 小大無量法(상중하법 소대무량법) 如是等三法門亦如是(여시등 삼법문역여시)

위ㆍ중간ㆍ아래의 법 등 크고 작은 무수한 법이 있으니, 이렇듯 세 등급의 법문도 이와 같다.

(상중하로 된 가르침()과 크고 작은무량(無量)한 가르침(法) 등이 이와 같거니와 3종(種)으로 열반문에 이르게 하는 참된 가르침(法)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法, dharma)= 어근 √dhṛ(떠받치다)에서 보듯이 dharma는 어떤 현상을 근본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경전 속에서 법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데, 대략 ‘가르침,’ ‘속성,’ ‘덕성,’ ‘특성,’ ‘사물,’ ‘의식의 대상’ 등을 의미. 

 

復次(부차) 餘經中說 四念處(여경중설사념처) 隨聲聞法門(수성문법문)

또한 그 밖의 경에서 4념처를 설하시어, 성문의 법문에 따르게 하였는데, 

 

4념처(4念處, catvāri smṛtyupasthānāni)=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염을 집중하는 관법이며 4념주(念住)라고도 한다.

잡아함경에서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근심·슬픔·번민·괴로움을 떠나 진여법(眞如法)을 얻게 하는 일승(一乘)의 법이 있나니, 이른바 4념처(念處)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身]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염처와 느낌[受]·마음[心]도 마찬가지이며, 법(法)을 법 그대로 관찰하는 염처이다. 만일 4념처(念處)를 멀리 여읜다면 성현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되고, 성현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되면 거룩한 도를 멀리 여의게 되며, 거룩한 도를 멀리 여의게 되면 감로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되고, 감로의 법을 멀리 여의게 되면 태어남[生]·늙음[老]·병듦[病]·죽음[死]·근심·슬픔·번민·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만일 4념처를 믿고 즐거워한다면 성현의 법을 믿고 즐거워하게 되고, 성현의 법을 믿고 즐거워하면 거룩한 도를 믿고 즐거워하게 되며, 거룩한 도를 믿고 즐거워하면 감로의 법을 믿고 즐거워하게 되며, 감로의 법을 믿고 즐거워하면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략

 

於是比丘 觀內身三十六物(어시비구 관내신삼십육물) 除欲貪病(제욕탐병)

如是觀外身(여시관외신) 觀內外身(관내외신)

여기에서 비구는 內身=사람의 몸안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부정물=三十六物을 관찰하여 탐욕의 병을 제거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밖의 몸과 안팎의 몸을 관찰하며,

(이렇게 비구들이 몸 안의 서른여섯 가지 더러운 여러 기관=三十六物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여 탐욕의 병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하고이와 같이 몸 밖의 육경(六境)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며 몸의 안팎인 12()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今於四念處(금어사념처) 欲以異門 說般若波羅蜜(욕이이문 설반야바라밀)

이제는 4념처에서 다른 법문=가르침으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려 하시니, 

 

如所說(여소설) 菩薩觀內身(보살관내신) 於身不生覺觀(어신불생각관)

不得身 以無所得故(불득신 이무소득고)

이른바 보살이 몸안=6입을 관찰하되 몸에 대해서 각관을 일으키지 않고 몸을 얻지 않으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보살이 몸의 6()에 대해 살펴보고=觀內身 몸의 생겨남이 인연의 화합에 의한 것이어서 몸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 지니지 않게 되면 오개(五蓋)에 덮힌 거친 마음()과 오욕(五慾)으로 인하여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게 되어, 몸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을 것이라 여겨 얻으려 하지 않게 되나니=不得身 몸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以無所得故.”고 말씀하셨습니다.)

 

각관(覺觀, 각각 Vitarka Vicāra)= 각과 관은 선정 중에 나타나는 일종의 사유작용으로 선정이 깊어감과 더불어 소멸된다. 대표적인 선정 수습법인 4선(禪) 가운데 초선과 제2선은 각관이 소멸해 가는 순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각은 어떤 대상이 문득 떠오르고 다시 이를 분별하는 사유작용으로 일종의 ‘거친 사유’이다. 한편 관은 이렇게 떠오른 사유작용이 점점 미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곧 정신집중이 깊어지고 안정됨에 따라 생각이 사라져 가는 와중에 해당된다. 이 두 사유작용이 완전히 그친 경지가 다름 아닌 제4선의 사념청정(捨念淸淨:대상에 무관심해진 채 다만 의식만이 맑게 존재하는 상태)이라 하는 것이다.

 

如是觀外身(여시관외신) 觀內外身(관내외신) 於身不生覺觀(어신불생각관)

不得身 以無所得故(불득신 이무소득고)

마찬가지로 몸 밖의 6경을 관찰하고, 몸 안팎의 12입을 관찰함에도 몸에 대하여 각관을 내지 않고, 몸을 얻으려 하지 않으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몸 밖의 6경을 살펴보고 몸 안팎의 12입(入)을 살펴보아 몸의 생겨남이 인연의 화합에 의한 것이어서 몸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지니지 않게 되면, 제멋대로의 거친 마음=覺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으로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觀이 생겨나지 않게 되어 몸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가히 얻으려 하지 않나니, 몸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於身念處中觀身(어신념처중관신) 而不生身覺觀(이불생신각관) 是事甚難(시사심난)

신념처를 통하여 몸을 관찰하되 몸의 각관=身覺觀을 내지 않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신념처(身念處)를 통해서 몸을 살펴보되, 몸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니지 않게 되면 오개(五蓋)의 거친 마음=과 오욕(五慾)에 물들어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이야 말로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 이 각관(覺觀)을 감싸고 끌어들여 청정(淸淨)한 마음만 남게 되는 것을 삼매(三昧)요 선정(禪定)이며 해탈(解脫)이라 합니다.)

 

三念處亦如是(삼념처역여시) 四正勤 四如意足 四禪 四諦等(사정근 사여의족 사선 사제등)

種種四法門亦如是(종종사법문역여시)

나머지 세 가지 염처 또한 역시 그러하며, 4정근, 4여의족, 4선, 4제 등의 갖가지 네 종류의 법문=四法門도 그러하니라.

 

4제(諦, cataḥ satya)= 깨닫지 못한 생존은 고(苦)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苦諦와 고의 원인을 밝히는 진리=集諦와 고가 멸한 경지에 관한 진리=滅諦 그리고 고의 소멸로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道諦를 말한다.)

 

復次(부차) 餘經中 佛說五衆(여경중 불설오중) 無常 苦 空 無我相(무상 고 공 무아상)

또한 그 외의 경에서 부처님은 5중=오온의 무상, 고, 공, 무아의 상을 설하셨나니, 

(또한그 밖의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오온(五蘊)과 무상(無常() “()” 무아(無我)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말씀하셨거니와)

 

今於是五衆 欲說異法門故(금어시오중 욕설이법문고) 說般若波羅蜜經(설반야바라밀경)

지금 여기에서는 5중=오온을 다른 법문으로 설하시기 위하여 '반아바라밀경'을 설하셨느니라.

(지금 다른 가르침(法)을 통해 열반문에 이르게 하고자 오온(五蘊)을 말씀하시고자 반야바라밀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如佛告須菩提(여불고수보리)

마치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菩薩若觀色是常行(보살약관색시상행) 不行般若波羅蜜(불행반야바라밀)

보살이 만일 색은 항상하다고 관찰하여 행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니, 

(보살이 색온(色蘊)이 항상 함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니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에 대해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색(色, rūpa)= 물질, 일반 혹은 유정의 몸을 말한다. 어근√rūp(모양을 취하다)에서 만들어진 말로 ‘형태나 색깔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한편 √rū(무너지다)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아 ‘무너지는 존재,’ ‘변화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受想行識是常行(수상행식시상행) 不行般若波羅蜜(불행반야바라밀)

수ㆍ상ㆍ행ㆍ식이 항상하다고 관찰하여 행한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의 실상(實相)의 항상 함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니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에 대해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수(受, vedanā)는 외부로부터 인상(印象)을 받아들이는 감수작용, 

상(想, saṃjñā)은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표상작용, 

행(行, saṃskāra)은 의지 혹은 잠재적 형성력, 

식(識, vijñāna)은 인식 혹은 식별작용.

 

色無常行(색무상행) 不行般若波羅蜜(불행반야바라밀)

색은 무상하다고 관찰해 행한다면 이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며, 

(색온(色蘊)의 무상(無常)함을 관찰하여,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에 대해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受想行識無常行(수상행식무상행) 不行般若波羅蜜(불행반야바라밀)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다고 관찰하여 행한다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의 무상(無常)함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갖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에 대해 자세히 살피는 것이니라.)

 

五受衆五道如是等(오수중 오도여시등) 種種五法門亦如是(종종오법문역여시)

이밖에 5수중과 5도 등 갖가지 다섯 종의 법문들도 모두 이와 같으며,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과 오도(五道) 등 이와 같이 5종(種)으로 열반문에 이르게 하는 참된 가르침(法)도 이와 같으니라.)

오수중(五受衆)=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
고수(苦受), 수는 감각이라는 뜻으로 고수는 3수(受)의 하나이다. 육체적 고통의 감각으로 낙수(樂受)의 반대.
낙수(樂受), 삼수(三受:감수(感受)의 3종)의 하나이며, 쾌적한 대상을 감수(感受)하고, 심신을 기분 좋게 하는 감각.
희수(喜受), 마음으로 기쁘게 느끼는 것. 마음 가운데 기쁨을 받고 아직 몸의 즐거움에 미치지 않은 상태
우수(憂受), 근심=憂의 감수작용이며 우수(憂受)는 욕계(欲界)에만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없다.
사수(捨受),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감각.

 

5도(道)= 6도(道)를 약하여 5도(道)로 할 때는 천(天)·인·아귀·축생·지옥

 

餘六 七 八等(여육 칠 팔 등) 乃至無量法門亦如是(내지무량법분역여시)

그 밖의 6ㆍ7ㆍ8에서 무량한 법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으니라.

 

如摩訶般若波羅蜜無量無邊(여마하반야바라밀무량무변) 說般若波羅蜜(설반야바라밀)

因緣亦無量無邊(인연역무량무변)

마하반야바라밀이 한량없고 무량하듯이 반야바라밀의 인연을 설하심 역시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느리라.

 

是事廣故(시사광고) 今略說 摩訶般若波羅蜜 因緣起法竟(금약설 마하반야바라밀 인연기법경)

이러한 일은 광대하기에 이제 간략히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인연법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마치노라.

若長爪梵志(약장조범지) 不聞般若波羅蜜氣分(불문반야바라밀기분)

만일 이 장조 범지가 반야바라밀의 氣分=중요 내용인 

 

離四句第一義相應法(이사구제일의상응법) 小信尚不得(소신상부득)

何況得出家道果(하황득출가도과)?

四句=네 구절=공(空), 여(如), 법성(法性), 실제(實際)를 여의어, 제일의제와 상응하는 법을 듣지 못했더라면 조그마한 믿음도 얻지 못했을 것이거늘, 하물며 출가해서 도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만약 장조범지가 반야바라밀에 대해 듣지 못하였더라면 제일의(第一義)의 가르침()인 네 구절(句節)인 (), (), 법성(法性), 실제(實際)”를 통해 반야바라밀과 어우러지지 못하여 일체법의 인연을 여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며조금 믿는 것으로 오히려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지도 못하였을 것이거늘 더군다나 출가하여 도과(道果)를 얻게 되는 것이랴)

 

佛欲導引如是等(불욕도인여시등) 大論議師利根人故(대론의사리근이고)

說是'般若波羅蜜經'(설시반야바라밀경)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큰 논사들과 예리한 근을 지닌 이들을 인도하시려는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경'을 설하셨느니라.

 

利根人(이근인)=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음을 명백하게 이해한(利根) 사람들

 

復次(부차) 諸佛有二種說法(제불유이종설법)

또한 부처님들의 설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또한모든 부처님께서는 2()으로 참된 가르침()을 설하셨으니,)

 

一者(일자) 觀人心隨可度者(관인심수가도자)

첫째는 사람의 마음이 제도할 만한가를 관찰하는 것이요, 

(첫째는 그 사람의 마음이 참된 가르침(法)을 옳게 받아들이고 따라 무여열반의 나루터를 건널 수 있는지, 제도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서 설하심이요)

 

二者(이자) 觀諸法相(관제법상)

둘째는 제법의 모양=相을 관찰하는 것이니, 

(두 번째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今佛欲說諸法實相故(금불욕설제법실상고)

說是摩訶般若波羅蜜經(설시마하반야바라밀경)

지금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말씀하시고자 하여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如說'相不相品'中(여설상불상품중) 諸天子問佛(제천자문불)

마치 상불상품(Lakṣanālakṣaṇa-parivarta)에서 설하신 것과 같이 모든 천자(devatā)들이 부처님께 여쭙기를,

 

천자(天子, devatā)= 'devatā'의 원어에는 아주 미묘한 뜻이 있다. 한역으로 천자 혹은 천으로 ‘state of deva’ 신과 같은 사람이나, Deva라는 말은 원래 빛난다는 의미가 포함되기 때문에 결국 선한 사람, 뛰어난 사람 또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한역으로 '천제(天帝)의 아들', 즉 'state of deva=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 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자문화권 천자국의 최고통치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고대 때부터 있어온, 중국 왕조의 주권자라는 칭호를 말한다. 천자의 뜻풀이는 말 그대로 하늘의 주인인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아들'인 천자(天子)로, 하늘(신)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봉선(封禪)을 거행할 수 있는 신분을 말한다.
중국에서의 '천자(天子)'란 말은 본래 주나라(西周)때 만들어진 말로 주(周)가 상(商)을 이기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만든 말이다.

 

是般若波羅蜜甚深(시반야바라밀심심) 云何作相(운하작상)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으니, 어떻게 모습=相(lakṣaṇa)을 짓는것입니까?

(이 반야바라밀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어떻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살펴야 합니까?)

 

모습(相, lakṣaṇa)= 일종의 징후로 드러나서 감각기관에 감지(√lakṣ)된 모양새를 가리키므로 ‘감지새’ 또는 모양, 징후, 표시, 특징, 특색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음.

 

佛告諸天子(불고제천자) 空則是相無相(공즉시상무상) 無作相無生滅相(무작상무생멸상)

부처님께서 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
공(空, sūnyatā)이 곧 실상이니, 相=모습도 없고, 作=지음이 없는 실상이며, 생멸이 없는 실상이며,

(공()’이 즉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고인연의 10가지 모습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는 오진(五塵)과 남((((()이라는 현상과 작용() 멀리 여의어 아무런 얽매임이나 붙들림 없는 모습인 무상(無相)이며, 인연화합의 현상과 작용이 펼쳐지는 무작(無作)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며생멸(生滅)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며,)

 

공(空, sūnyatā, emptiness)= 나가르주나 용수(Acarya Nagarjuna 龍樹, 150~250)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이며, 마음이 자기 자신과 우주 자연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는 연기(緣起)의 일시적인 현상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마음의 작용은 식(識)으로, 마음의 식은 현상을 실재(實在)로 오인한 다음, 나타난 현상을 차별하고 경계 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도 존재하고 저것도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지만, 그것은 마음이 만든 현상이고, 인간은 그 현상들을 나누어 경계 짓고, 차별하여 분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주라는 또 다른 가상을 만든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개념이 일체유심조이며, 일체유심조는 '화엄경'의 게송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 만일 어떤 사람이 알고자 하면,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삼세 일체의 부처를.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응시해야 한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이 게송은 인식론과 존재론을 시적으로 표현한 다음 일체유심조를 결론으로 제시한 오언절구다.

당대(唐代)에 한문으로 번역할 때 송찬(頌讚)의 형식을 살려서 오언절구로 표현하면서 일체유심조가 상징적 개념이 되었다. 일체유심조의 진정한 의미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가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일체유심조는 삼세, 불, 법계의 진리를 깨우친 상태를 말한다.

첫째 삼세는 전생의 과거세(過去世), 현생의 현재세(現在世), 내생의 미래세(未來世)로, 삼세는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하는 시간개념이다.

둘째, 불(佛)은 진리를 깨달은 성스러운 존재인 부다(Buddha) 또는 불타(佛陀)를 말한다. 불은 석가모니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깨우친 존재들을 지칭하나, 불에는 보편적 본질과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셋째 다르마 법계(dharma-dhātu, 達摩馱都)는 인식의 대상인 모든 것을 말한다. 현상세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상세계의 본질인 (형상이 없는) 진여(眞如)를 의미하기도 한다. 법계성(法界性)은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일시적 현상임을 의미한다.

삼세, 불, 법계를 인식하는 주체는 마음이고, 대상을 인식하고 차별하고 경계 짓는 것도 마음이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식(識, cognition) 또는 인식은 대상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얻은 지식이나 지식을 얻는 과정 즉 ‘무엇을 아는 것’이다. 화엄사상에서는 나 자신도 실재가 아닌 일시적 현상이므로 마음이 인식한 것 역시 일시적 현상이다. 사실 마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여의 진리는 공(空), 허(虛), 적(寂), 무(無)다. 일체유심조는 법계(法界)의 모든 것은 마음이 일시적으로 만든 현상, 허상, 가상임을 알려주는 교훈적 의미가 있다. 여기서 ‘나의 인식’인 코기토(cogito)의 주체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존재한다. 현대철학에서 보면, 일체유심조는 뇌신경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통 속의 뇌(Brain in a Vat, 缸中之脑)와 유사하다.-(김승환)

 

無行之相常不生(무생지상불생) 如性相寂滅相等(여성상적멸상등)

無行=지어감이 없는 실상이며, 항상 나지 않아 성품과 같은 실상이며, 적멸의 실상이니라.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것이 실상(實相)에 대해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항상 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서 한결같음()이 자성(自性)이요 실상(實相)이고번뇌의 불길 꺼진 적멸이 실상(實相)으로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는 것이니라.)

 

復次(부차) 有二種說法(유이종설법)

또한 두 가지의 설법=가르침을 설하시니, 

 

一者 諍處(일자 쟁처) 二者 不諍處(이자 부쟁처)

첫째는 다툼이 벌어지는 곳이요, 둘째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니라.

 

諍處 如餘經中說(쟁처 여여경중설) 今欲明無諍處故(금욕명무쟁처고)

說是 般若波羅蜜經(설시 반야바라밀경)

다툼이 벌어지는 곳이란 마치 다른 경해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지금 다툼이 없는 곳에 대해 설하시고자 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시는 것이니라.

 

有相無相(유상무상) 有物無物(유물무물) 有依無依(유의무의)

형상 있음=有相과 형상 없음=無相, 물건 있음=有物과 물건 없음=無物, 의지할 곳이 있음=有依과 의지할 곳이 없음=無依, 

 

有對無對(유대무대) 有上無上(유상무상) 世界非世界 亦如是(세계비세계 역여시)

마주 대할 것이 있음=有對과 마주 대할 것 없음=無對, 위가 있음=有上과 위가 없음=無上, 세계와  세계가 아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은 2종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통해 열반문에 이르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니라.

 

問曰(문왈) 佛大慈悲心(불대자비심) 但應說無諍法(단응설무쟁법)

何以說諍法(하이설쟁법)?

묻나니,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니, 다만 다툼 없는 법만을 말씀하실 것이거늘 어찌하여 다투는 법까지 말씀하시는가?

 

答曰(답왈) 無諍法皆是無相(무쟁법개시무상) 常寂滅不可說(상적멸불가설)

답하나니, 다툼 없는 법(가르침)은 모두가 형상이 없고, 항상 적멸하여서 말할 수 없거늘 

(다툼 없는 참된 가르침(法)이란 하나같이 이렇게 인연의 10가지 모습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는 오진(五塵)과 남(男) 여(女) 생(生) 주(住) 멸(滅)이라는 현상과 작용(法)을 멀리 여의어 아무런 얽매임이나 붙들림이 없는 모습인 무상(無相)으로, 항상 함이란 번뇌의 불길이 꺼진 적멸이며, 일체법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不可說이거늘)

 

今說布施等(금설보시등) 及無常苦空等諸法(급무상고공등제법)

皆爲寂滅無戲論故說(개위적멸무희론고설)

이제 보시 등과 함께 무상, 고, 공 등의 제법을 설하시는 것은 모든것이 적멸하여 희론이 없는 경지를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니라.

 

利根者知佛意(이근자지불의) 不起諍(불기쟁)

예리한 근기는 부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다툼을 일으키지 않거니와 

(영리하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는 것임을 명백하게 이해한(利根)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되어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나,) 

 

鈍根者不知佛意(둔근자불지불의) 取相著心故起諍(취상착심고기쟁)

둔한 이는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형상을 취하여 마음이 집착하는 까닭에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걸림 없고 막힘없는 것인 줄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하는(鈍根) 둔근의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취하여 집착하기에 “다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此般若波羅蜜(차반야바라밀) 諸法畢竟空故(제법필경공고) 無諍處(무쟁처)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이 끝내 공한 경지인 까닭에 다툼이 없는 곳이며,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통하면 제법(諸法)이 끝내 ()”한 까닭에그 어느 곳에서도 아무런 다툼이 없게 되거니와,)

 

若畢竟空可得(약필경공가득) 可諍者不名畢竟空(가쟁자불명필경공)

만일 끝내 공한 가운데서 다툼을 얻을 수 있다면 끝내 공하다 할 수 없으며, 

 

是故般若波羅蜜經(시고반야바라밀경) 名無諍處(명무쟁처)

有無二事皆寂滅故(유무이사개적멸고)

끝내 공함=畢竟空이란, 유와 무의 (유위법과 무위법) 모두가 멸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다경'을 다툼이 없는 곳이라 하느니라.

長爪聞之 卽起憍慢(장조문지 즉기교만) 生不信心而作是言(생불신심이작시념)

장조가 이 말을 듣자 교만한 생각을 내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如我姊子聰明如是(여아자자총명여시) 彼以何術(피이하술)

誘誑剃頭作弟子(유광체두작제자)? 誘 꾈 유  誑 속일 광  剃 머리깎을 체,

내 누이의 아들이 그토록 총명하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술책으로 속이고 꾀어서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았는가?
(장조범지가 이 말을 듣자마자 교만함이 들끓어 올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나 스스로에게 다짐하여 말하기를 “내 누이의 아들이 그리 총명함이 그와 같다면, 그가 어떤 사술로 속여서 머리를 깎여 제자로 삼았을꼬?”하는 것이었습니다.)

 

說是語已 直向佛所(설시어이 직향불소)

이렇게 말하고는 곧장 부처님 계신 곳으로 향했습니다.

 

爾時(이시) 舍利弗初受戒半月(사리불초수게반월) 佛邊侍立(불변시립)

以扇扇佛(이선선불) 侍 모실 시, 扇 부채 선

그때 사리불이 처음으로 계를 받은 지 보름이 되었으며, 부처님 곁에 서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長爪梵志見佛(장조범지견불) 問訊訖 一面坐 作是念(문신흘 일면좌 작시념)

訊 물을 신, 訖 이를 흘,

장조 범지는 부처님을 뵙고, 문안 인사를 드린 후 한쪽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는데,

一切論可破 一切語可壞(일체론가파 일체어가괴) 一切執可轉(일체집가전)

‘어떠한 이론도 모두 깨뜨릴 수 있고, 어떠한 말도 모두 무너뜨릴 수 있으며, 어떠한 집착(이론 또는 가르침)도 모두 바꿀 수 있지만,  

 

是中何者 是諸法實相(시중하자시제법실상)?

그러한 중에서 어떤 것이 제법의 진실 된 모습=實相이라 하겠으며? 

 

何者是第一義(하자시제일의)? 何者性 何者相(하자성 하자상) 不顚倒(불전도)?

如是思惟(여시사유) 

어떠한 것이 제일의이며? 무엇을 자성이라 하는 것이며? 어느 것을 실상이라 칭하며? 어찌하여 뒤바뀌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렇게 사유(생각)를 하였으나,

 

譬如大海水中(비여대해수중) 欲盡其涯底(욕진기애저) 求之旣久(구지개구)

不得一法實可以入心者(불득일법실가이입심자)

하지만 비유하면 마치 대해 가운데에서 그 바다의 바닥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이,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진실로 마음을 기울여 들어갈 만한 법이 하나도 없음에, 

(“비유하자면 마치 큰 바다에서 그 바닥과 끝을 아무리 헤아려본들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하나의 현상과 작용()속에서 실상(實相)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마음이 반야바라밀과 어우러지지 못하여서, 막힘없이 훤히 꿰뚫어보지도 못하거늘저 사람은 어떠한 논의(論議)와 도()로 내 조카를 제자로 삼았을까?”라고 사유(思惟)를 마친 다음에 부처님께 말을 꺼냅니다.)

 

彼以何論議道而得我姊子(피이하론의도이득아자자)?

도대체 그는 어떠한 이론으로 누이의 아들을 제자로 삼았을까?’

 

作是思惟已 而語佛言(작시사유이 이어불언)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부처님께 말하였다.

 

瞿曇(구담) 我一切法不受(아일체법불수)

구담이시여, 나는 온갖 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다고 하시는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佛問長爪(불문장조) 汝一切法不受(여일체법불수) 是見受不(시견수불)?

부처님께서 장조 범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 견해는 받아들이는가?

(“그대는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이는가?”) 

 

佛所質義 汝已飮邪見毒(불소질의 여이음사견독) 今出是毒氣言(금출시독기언)

부처님께서 물으신 뜻은 ‘그대가 이미 삿된 견해=邪見의 독약을 마셨기에, 지금 그 독기를 뿜어 말하기를 

 

一切法不受 是見汝受不(일체법불수 시견여수불)?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지만, 지금의 그러한 견해를 그대는 받아들이는가?’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장조범지가 지닌 나름의 정의(定義)에 대해 물어보신 뜻은 “그대는 이미 삿된 견해라는 독을 마시고 지금 이렇게 독기를 내뿜으며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그대는 이미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여서는 독을 내뿜고 있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爾時(이시) 長爪梵志(장조범비) 如好馬 見鞭影卽覺(여호마 견편영즉각) 鞭 채찍 편,

便著正道(편착정도)

이때 장조 범지는 명마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얼른 깨닫고 즉시 바른 길로 달려가는 것과 같이 

 

長爪梵志亦如是(장조범지역여시) 得佛語鞭影入心(득불어편영입심)

卽棄捐貢高(즉기연공고) 慚愧低頭 如是思惟(참괴저두 여시사유)

장조 범지 역시 이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채찍의 그림자가 마음에 影入=스며들게 되어 당장에 높은 교만함을 내려놓고, 뉘우치면서 고개를 숙여 이렇게 생각하였으니, 

棄 버릴 기, 捐 버릴 연

棄捐기연= 1. 남을 돕기 위하여 재물을 내놓음2. 내버리고 쓰지 않음

 

佛置我著二處負門中(불치아착이처부문중) 若我說是見我受(약아설시아수)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 부문(部門, 負門)으로 내가 집착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였나니, 만일 내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是負處門麤(시부처문추) 故多人知(고다인지)

'云何自言一切法不受 今受是見?'(운하자언 일체법불수 금수시견)

지금까지의 내 이론이 앞뒤가 다른 면을 드러내는 꼴이 되어,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니, 이제는 어찌하여 그 견해를 받아들이는가?' 하리라. 

 

此是現前妄語(차시현전망어) 是麤負處門(시추부처문) 多人所知(다인소지)

이는 망어를 눈앞에 드러냄이니, 이는 麤負=완전히 항복하는 것으로(완전히 패하는 것), 여러 사람이 다 알게 될것이며, 

(여기에서 그렇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제껏 妄語=거짓말을 떠들어댄 꼴이 되어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일부를 드러내게 되어 많은 사람이 알아보게 될 것이고,)

 

第二負處門細(제이부처문세) 我欲受之 以不多人知故(아욕수지 이불다인지고)

두 번째는 패하는 것은 미세한 것이니 나는 이를 받아들이리라,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作是念已 答佛言(작시념이 답불언) 瞿曇(구담) 一切法不受 是見亦不受(일체법불수 시견역불수)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께 답하였으니,
'구담이시여, 나는 온갖 법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이 견해 또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당신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니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이러한 견해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佛語梵志(불어범지) 汝不受一切法 是見亦不受(여불수일체법 시견역불수)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온갖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견해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니, 

(그대가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이러한 견해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則無所受 與衆人無異(즉무소수 여중인무이) 何用自高而生憍慢(아용자고이생교만)?

그렇다면 아무것도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서 범부와 다를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도도하게 교만을 부리는가?'

(즉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여기 있는 많은 사람과 견주어 다를 바가 없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도도하게 교만을 부리는가?)

 

如是 長爪梵志不能得答(여시 장조범지불능답) 自知墮負處(자지타무처)

이에 장조 범지는 대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졌음을 알고는 

 

卽於佛一切智中起恭敬(즉어불일체지중기공경) 生信心 自思惟(생신심 자사유)

곧 부처님의 일체지 앞에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일체지(一切智, sarvajñāna.)= 3지(智)의 하나. 일체 제법의 총상(總相)을 개괄적으로 아는 지혜, 모든 존재에 관하여 개괄적으로 아는 지혜. 천태(天台)에서는 성문 · 연각(緣覺)의 지혜라 하고, 구사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라 함.

 

我墮負處 世尊不彰我負(아타부처 세존불찰아부) 不言是非 不以爲意(불언시비 불이위의)

彰 밝힐 창, 드러날 창

‘내가 졌건만 세존께서는 나의 진 곳을 드러내시거나 시비도 따지지 않으시고 전혀 개의치도 않으시니, 

 

佛心柔濡 第一淸淨(불심유유 제일청정) 一切語論處滅(일체어론처멸) 濡 젖을 유

부처님의 마음은 부드럽고 연하시어, 으뜸가게 청정하시니, 온갖 말과 논의의 근거가 멸하고 

 

得大甚深法(득대심심법) 是可恭敬處 心淨第一(시가공경처 심정제일)

크고 깊은 법을 얻게 하시니, 이야말로 공경할 만함이며, 마음이 청정하기가 으뜸이니,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어 삿된 소견을 끊어 주는 까닭이다.’

(스스로 사유(思惟)하기를, “내가졌거니와, 세존께서는 내가 진 것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옭고 그름’도 말씀하지 않으시며, 내 의도를 개의치 않으시니, 부처님 마음은 부드럽고 연하며, 뜻이 스스로 지혜를 거리낌 없이 따름이야말로 참으로 청정한 것으로, 일체의 모든 부질없는 논의(論議)가 멸하게 되는 곳이며, 반야바라밀과 함께하게 하는(大) 참된 가르침(法)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하는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할 수 있게 되는, 이러함이야말로 가히 공경할만한 하고 제일이니, 아무도 부처님을 뛰어넘을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佛說法斷其邪見故(불성법단기사견고) 卽於坐處得遠塵離垢(즉어좌처득원진리구)

諸法中得法眼淨(제법중득법안정)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객진(객진번뇌)을 여의고 때를 여의어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의 눈이 맑아졌다.

(부처님께서 참된 가르침(法)을 말씀해주시어 그의 삿된 견해를 끊어준 까닭에,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삿된 견해라는 허물을 멀리 여읠 수 있게 되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할 수 있게 제법(諸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법안(法眼)을 얻게 되었습니다.)

 

객진[塵]=객진번뇌, āgantukopakleśa. 우연히 만나게 된 번뇌. 塵(진)은 먼지를 가리키고, 客(객)은 주인과 반대어인 손님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시 淸淨(청정)한 것이나 우리 집의 먼지처럼 마음의 먼지도 손님과 같이 밖에서 찾아온 것이라는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時 舍利弗聞是語(시 사리불문시어) 得阿羅漢(득아라한)

이때 사리불이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아라한을 얻었으며, 

 

是長爪梵志 出家作沙門(시장조범지 출가작사문) 得大力阿羅漢(득대력아라한)

이에 장조 범지도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으며, 큰 힘을 가진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에 장조범지가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되었으며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여 크나큰 방편의 힘을 지닌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沙門(사문, śramaṇa.)= 출가 수행자. 팔리어 'samaṇa'에서 유래하는 음사어로서 '노력하는 사람', '도인'을 의미한다. 비구(比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원래 사문은 고대인도에서 반(反)베다적이고 반(反)브라만적인 출가 수행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정신원리인 베다 성전이나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전통적인 사상가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사상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불교의 부처님도 이런 사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BC 6~5세기의 인도 사회는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결과 브라만 계급을 대신하여 왕족 계급이 발흥하고, 상공업자의 경제적 실권이 증대하게 된다.
결국 기존의 계급제도와 종교의 권위가 실추된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신흥종교가 또는 사상가가 사문이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들은 베다 종교의 제식(祭式) 만능주의에 반대하고, 극단적인 유물론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업과 윤회의 사상에 입각하여 고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당시의 대표적인 사문들이다. 불교에서 비구를 사문이라 칭하는 이유는 사문들의 특징이 출가주의를 지향한 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復次(부차) 欲令長爪梵志等(욕령장조범지등) 大論議師(대론의사)

또한 장조 범지(brahmacārin Dīrghanakha) 등 큰 논사들로 하여금 

 

於佛法中生信故(어불법중생신고) 說是'摩訶般若波羅蜜經'(설시마하반야바라밀다경)

불법에 대하여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하여 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설하셨으니, 

 

有梵志號名長爪(유범지호명장조) 更有名先尼婆蹉衢多羅(갱유명선니바차구다라)

호가 장조인 범지가 있었고, 선니=勝軍과  바차구다라(Śreṇika Vatsagotrā)와 

 

선니(先尼)=Seniya. 원래는 견계행자(犬戒行者)였으나 뒤에 불제자가 되었다. 승군(勝軍)이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바차구다라(婆蹉衢多羅)=Śreṇika Vatsagotrā. 왕사성 부근에 거주하던 외도로 개나 소처럼 행동하며 살았다고 한다. 독자부(犢子部)라는 뜻을 지님.

 

更有名薩遮迦摩揵提等(갱유명살차가 마건제등) 是等閻浮提(시등염부제)

大論議師輩言(대론의사배언)

살차가와 마건제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염부제에서 큰 논사=論議師들로서 

 

살차가(薩遮迦, Satyaka Nirgranthīputra, 인(認))= 바이샤리에 살던 쟈이나 외도로 나중에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마건제(摩揵提, Mākandika)

염부제(Jambudvīpa , 閻浮提)= 수미산의 사방에 있다는 사대주 혹은 일곱 대륙 가운데 하나로 남쪽에 있기에 남섬부주(南贍部洲, Dakṣiṇa-jambudvīpa)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염부(閻浮)는 잠부(Jambu)나무를 의미하고 제(提)는 섬·육지를 의미하는 범어 dvīpa의 음차이다. dvīpa의 뜻을 따라 염부주(閻浮州)라고도 하며, 다른 음차어로는 염부리(閻浮利), 섬부제(贍部提), 염부제비파(閻浮提鞞波)가 있다. 그러므로 염부제는 ‘잠부나무가 자라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잠부나무는 대력 15m 정도 크기의 나무로 인도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데 강가 주변에 많이 서식한다. 염부제는 원래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불교의 우주관에 나타난 여러 세계 중 인간이 사는 세계를 의미하는 말로 개념이 확장되었다.
잠부나무가 자라는 강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사금(砂金)을 염부단금(閻浮檀金)이라 하는데, 이에 따라 염부제를 좋은 금이 나는 땅이라는 의미의 승금주(勝金州), 호금토(好金土)라고 한역(漢譯)하기도 했다. 또 수미산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염부제(南閻浮提), 남염부주(南閻浮州),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장아함의 '세기경(世起經)' 제18권에는 "수미산 남쪽에 천하가 있으니 염부제라고 한다. 그 땅은 남쪽이 좁고 북쪽은 넓으며 가로와 세로가 각각 7천 유순이다 "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땅 중앙에 거대한 잠부나무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염부제는 인도대륙의 모양과 일치하고 있다. 한편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21권에는 잠부나무의 이파리와 염부제의 땅 모양이 비슷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전에 따르더라도 염부제는 인도대륙의 상징인 것이 확실하다.

 

一切論可破(일체론가파) 一切語可壞(일체어가괴) 一切執可轉故(일체집가전고)

無有實法可信可恭敬者(무유실법 가신가공경자)

'어떠한 이론도 다 깨뜨릴 수 있고, 어떠한 말도 무너뜨릴 수 있나니, 일체의 집착=이론은 뒤 바뀔 수 있으므로 믿을 법도 없고 공경할 법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어떠한 이론도 다 깨뜨릴 수 있고 어떠한 말도 무너뜨릴 수 있나니나름 그럴 듯하다 여겨 붙들고 있는 모든 이론(理論)들은 뒤바뀔 수 있는 까닭에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은 믿을 것도 공경할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如'舍利弗本末經'中說(여사리불본말경중설) 舍利弗舅 摩訶俱絺羅(사리불구 마하구차라)

與姊舍利論議不如(여자사리논의불여)

마치 '사리불본말경( Śāriputrāvadānasūtra)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사리불의 외삼촌인 마하구치라가 그의 누이인 사리(Śārī)와의 논의=토론에서 여의치 않게 되자,  

 

마하구치라(摩訶俱絺羅)= Mahākauṣṭhila. 여기에서는 장조범지와 동일한 인물이다. 구지라(俱祉羅)․구치라(俱絺羅)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俱絺羅思惟念言(구차라사유념언) ‘非姊力也 必懷智人(비자력야 비괴지인)

寄言母口(기언모구)

구치라는 사유를 통해 생각하기를, '이러함은 누이의 힘이 아닐 것이다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을 잉태했기 때문일 것이며, 엄마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이리라.

 

未生乃爾 及生長大(미생내이 급생장대) 當如之何(당여지하)?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럴진대, 태어나서 자란 다음에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思惟已 生憍慢心(사유이 생교만심) 爲廣論議故(위광론의고) 出家作梵志(출가작범지)

이렇게 사유하고 나서,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는 세상의 모든 논의를 널리 익히기 위해 출가하여 범지=바라문이 되기 위하여,

 

入南天竺國(입남천축국) 始讀經書(시독경서)

남천축국에 들어가서 경서를 읽기 시작하였으니, 

 

남천축(南天竺)=dakṣiṇāpatha. 남인도를 가리킨다. 천축(天竺)이란 인도를 가리키던 옛 말로서 이는 인더스 강의 옛 이름인 Sindhuḥ의 음사어이거나 혹은 Sindhu의 미얀마어인 Thindhu, Tindhu의 음역이라고도 한다.

남천축(南天竺)은 5천축(天竺) 중 하나이며, 인도 대륙의 남방에 자리한 여러 국가를 가리키며, 현재의 데칸 고원 이남 지역에 해당함. 고대 인도를 천축(天竺)이라 부르고, 동·서·남·북·중앙 다섯으로 구분하여 이를 5천축 혹은 5인도라 하였다.

 

諸人問言(제인문언) 汝志何求(여지하구)? 學習何經(학습하경)?

많은 사람이 묻기를 '그대는 어떤 뜻을 품고,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어떠한 경서를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長爪答言(장조답언) 十八種大經(십팔종대경) 盡欲讀之(진욕독지)

장조가 대답하기를, '열여덟 가지 대경서를 모두 다 읽고자 한다.'고 하니,

 

十八種大經(십팔종대경)=열여덟 가지 바라문 성전(śāstra)을 말하며, 18명처(明處)라고도 한다. 인도의 정통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학술서를 열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Ŗg-veda(讚頌)․Yajur-veda(歌頌)․Sāma-veda(祭祀)․Atharva-veda(攘災)의 4베다, Śīkṣā(음운론)․Vyākaraṇa(어법)․Kalpa(제식)․Jyotiṣa(천문)․Chandas(詩)․Nirukta(語源)의 6론, Mimāṁsā(철학)․Nyāya(논리)․Itihāsaka(古事)․Sāṁkhya(數論)․Yoga(수습)․Dhanur-veda(弓杖)․Gandharva(음악)․Artha-śāstra(의약)의 8론을 말한다.

 

諸人語言(제인어언) 盡汝壽命(진여수명) 猶不能知一(유불능지일)

何況能盡(하황능진)?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한 가지도 알기 어렵겠거늘 하물며 어찌 모두 마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니,

 

長爪自念(장조자념) 昔作憍慢(석작교만) 爲姊所勝(위자소승)

今此諸人復見輕辱(금차제인부견경욕)

이때 장조 범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난 날 교만을 부리다가 누이에게 졌는데, 지금 여기에서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는구나.’

 

爲是二事故(위시이사고) 自作誓言(자작서언)

이러한 두 가지의 사건=事 때문에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我不翦爪(아불전조) 要讀十八種經書盡(요독십팔종경서진)

'내가 18종의 경서를 모두 독파하기 전에는 결코 손톱을 자르지 않으리라.”고 하였고,

 

人見爪長(인견장조) 因號爲長爪梵志(인호위장조범지)

사람들이 긴 손톱을 보고 장조(손톱이 긴) 범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是人以種種經書智慧力(시인이종종경서지혜력)

이 사람이 갖가지 경서를 독파하여 지혜의 힘을 갖추게 되자

 

種種譏刺是法是非法(종종기자시법시비법) 是應是不應(시응시불응)

종종의 옳은 법과 그른 법,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갖가지 옳다고 내세우는 가르침과 옳다고 내세우지만 그렇지 않은 가르침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상응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是實是不實(시실시불실) 是有是無(시유시무) 破他論議(파타론의)

진실함과 진실치 않음, 있음과 없음 등을 따지고 판단하여 남의 논리를 타파했으니, 

(가르침에 실다움이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유상(有常)”이 옳다고 하는 가르침과 “무상(無常)”이 옳다고 하는 가르침 등 모두 나름 옳다고 여기는 이론과 옳다고 내세우는 논의(論議)들의 허물을 들춰내어 타파하니,)

 

譬如大力狂象(미여대력광상) 搪揬蹴蹹(당돌축답) 無能制者(무능제자)

비유하자면 마치 아추 힘이 세고 미친 코끼리가 마구 부딪치고 차고 밟고 설치면,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如是長爪梵志(여시장조범지) 以論議力(이논의력) 摧伏諸論師已(최복제논사이)

이와 같이 장조 범지가 토론의 힘으로 여러 논사들을 굴복시킨 뒤에 

 

還至摩伽陁國(환지마가타국) 王舍城那羅聚落(왕사성나라취락)

至本生處問人言(본지생처문인언)

마가다국(Magadha)으로 돌아와서 왕사성(Rājagṛha)의 나라(Nāḷaka-grāma)라는 마을에 돌아와, 본래 태어난 곳=本生處로 가서 사람들에게 묻기를,

摩伽陁國(마가타국, Magadha.)=  고대 인도 왕국으로 이른바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의 인도 비하르주 갠지스강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고오타마 부처님이 활약하던 B.C. 6세기 중엽 불교를 보호한 왕인 빔비사라왕 때 강대해졌다. B.C. 3자성년 알렉산더 대왕이 북서인도에 침입했을 때까지도 마가다왕국은 강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에 아소카는 남인도로 세력을 뻗고 대제국을 창설했는데, 그는 불교정신에 기반한 복지국가를 실현시켰다. 아소카왕의 사후 급격히 쇠락해 붕괴했다.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 당시의 인도 사대 강국 중의 하나인 마가다국의 수도이며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하고 가장 새로운 경향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구(舊)왕사성과 신(新)왕사성의 둘로 나뉘어 있고, 구도(舊都)는 산성(山城)이라 불리고 현재는 인도 최고의 석조건축으로서 그 자리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나라(那羅, Nāḷaka-grāma.)= 나란타사(那爛陀寺)가 세워졌던 곳.

 

我姊生子(아자생자) 今在何處(금재하처)?

'내 누이가 낳은 자식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有人語言(유인어언) 汝姊子者(여자자자) 適生八歲(적생팔세) 讀一切經書盡(독일체경서진)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일러주기를, '그대 누님이 낳은 아들은 여덟 살에 모든 경서를 다 읽었으며, 

 

至年十六(지년십육) 論議勝一切人(논의승일체인)

열여섯 살이 되자 모든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이겼으며, 

 

有釋種道人姓瞿曇(유석종도인성구담) 與作弟子(여작제자)

釋種=석씨 종족의 도인이 있었으니, 성이 구담(Gautama)이라, 그의 제자가 되었소.'

 

瞿曇(구담)=인도의 석가(釋迦) 종족의 성(姓). 산스크리트어 ‘가우타마(Gautama)’ 혹은 ‘고타마(Gotama)’의 음역어이다.

 

是佛法中(시불법중) 亦有犢子比丘說(역유독자비구설)

이 불법 안에서도 독자부의 비구들이 말하기를

 

독자비구(犢子比丘)=Vātsīputra. 독자부(Vajiputtiyā)는 20부파 가운데 하나로 상좌부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용수에 의하면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은 독자부의 소의논서라 한다.

 

如四大和合有眼法(여사대화합유안법) 如是五衆和合有人法(여시오중화합유인법)

지수화풍의 4대가 화합해서 眼法=안식을 이루듯이, 5衆=오온이 화합해서 사람=人法이 있다고 하였다.

 

4대(大)=caturmahābhūta.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pṛthivi-dhātu), 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 dhātu), 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 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를 말한다.

 

'犢子阿毘曇'中說(독자아비담중설) 五衆不離人(오중불리인) 人不離五衆(인불리오중)

독자부의 논장 '아비담'에서는 “5중=오온이 사람을 여의지 않고, 사람 또한 5중=오온을 여의지 않으니, 

 

아비담(阿毘曇)= Abhidharma. 그 어의는 ‘법(dharma)에 관하여(abhi)’라는 의미로 아비달마(阿毘達磨)․비담(毘曇)이라 음역하거나 대법(對法)․무비법(無比法)․승법(勝法) 등으로 의역한다. 이 중 무비법․승법은 dharma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고 이에 대한 불제자들의 해석을 아비담이라고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 말은 불제자들의 아비담에 대한 이해를 묶은 책인 논서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기원전 2세기 부파불교시대부터 만들어진 논서들을 모아 논장(abhidharma- pitaka)이라 부른다. 여기에 원시불교시대에 성립된 경장과 율장을 더해 3장(tri-pitaka)이 된다. 스리랑카 상좌부와 북쪽의 설일체유부에서는 6족론에 『발지론』을 더해 7론을 논장으로 삼았는데, 뒤에 이 7논을 주석한 아비담이 다수 만들어진다. 이렇듯 본래 아비담의 취지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시대가 지남에 새로운 교리체계로 발전되는 등 그 분석방식이 지나치게 세밀해지면서 오히려 번쇄함을 더하게 된다. 

이는 결국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진의를 일탈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不可說五衆是人(불가설오중시인) 離五衆是人(이오중시인)

5중=오온이 곧 사람이라거나 5중=오온을 여읜 것을 사람이라 말할 수 없으니,

 

人是第五不可說 法藏中所攝(인시제오불가설 법장중소섭)

사람이란 다섯 번째의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장(부처님의 모든 가르침) 안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독자부(犢子部)의 논장(論藏)에 오온(五蘊)이 사람을 여의지 않고 사람도 오온(五蘊)을 여의지 않는다고 하여

오온(五蘊)에 무언가 정()해진 사람이라는 실상(實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오온(五蘊)을 여의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를 지나 제 오대(第五大)가 되는 것이므로일체법의 그 어딘가에 무언가 정()해진 사람이라는 실상(實相)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不可說 )을 법장(法藏)으로 삼아 삿된 생각을 감싸고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說一切有道人輩言(설일체유도인배언) 神人(신인) 一切種一切時(일체종일체시)

설일체유부의 도인들은 '신과 사람=神人은 온갖 종자와 온갖 때와 

 

*일체종(一切種)= 일체법과 일체중생에 반야바라밀이라는 지혜가 씨앗으로 심어져 있다는 뜻.

 

一切法門中 求不可得(일체법문중 구불가득) 譬如兔角龜毛常無(비여토각구모상무)

온갖 법문 안에서 구해도 얻을 수 없나니,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이 없는 것이다'고 하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라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말하기를, “()과 사람 일체법과 일체중생에 반야바라밀이라는 씨앗이 심어져 있어 무시이래로 끊어지지 아니하여 일체의 때에 일체법을 통해 열반문에 이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어서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으므로 구하지 못하는 것이마치 비유하자면 실상(實相)을 구하여 하는 것이 토끼의 뿔 거북이의 털과 같아서 항상 함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Sarvāstivādin. 유부(有部) 또는 설인부(說因部, Hetuvādin), 음역하여 살바다부(薩婆多部)라고도 한다. 기원전 1세기 경 상좌부에서 분파되었는데, 부파불교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다. 바수미뜨라[世友]의 설을 이 부파의 정통설로 간주하는데, "설일체유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든 법(一切法)이 존재하다(有)고 설명하는 부파(部)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 즉, 법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뜻의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대표하는 명제이다.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논서는 2세기 중엽 인도에서 카니슈카(재위 127~151)의 보호 아래 500인의 아라한이 편찬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4세기에 세친(316?~396?)이 설일체유부의 설을 근간으로 하면서 필요시 경량부(經量部)의 설로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한 '구사론(俱舍論)'으로, '구사론'에서는 일체법을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3세(三世)란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의 법이 이 3세에 걸쳐서 실재한다는 것이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라는 주장의 근저이다.
이 주장이 근본불교의 무상설(無常說)이나 무아설(無我說)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유부(有部)에서는 현재세(現在世)를 일찰나(一刹那)로 보고 법체(法體)는 항유(恒有)이지만 찰나멸(刹那滅)로서 미래에서 현재를 통과하여 과거에 낙사(落謝)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유부(有部)의 설이 단순한 실재론(實在論)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즉 심리현상이 찰나멸인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상주불변(常住不變)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변화는 결국 찰나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부(有部)에서는 인간이나 집 · 산 등 찰나찰나의 연속 위에 성립하는 것은 실유(實有)의 법(法)으로는 되지 못하고 색(色)이나 형(形) · 향(香) · 맛 등 찰나에 존재하는 실유의 법에 결합하여서 성립하는 것도 가법(假法)이라고 말한다.

오위칠십오법, 유부(有部)에서는 실유의 법이란 이와 같이 가법으로서의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 要素)라고 하였으며, 그 기체들의 개수를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헤아려 다음과 같이 총 72법이 있다고 하였다.

물질계의 실유의 법(色法): 11종,
정신계의 법: 마음의 주체(心王) 1종,
감각 · 의지 · 욕망 등의 마음의 작용의 법(心所法): 46종,
물질에도 정신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법(心不相應行): 14종.
유부(有部)에서는 이들 72법은 연기(緣起)되는 존재라고 해서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밖에 허공(虛空)과 택멸(열반), 비택멸의 연기(緣起)한 존재가 아닌 것 3종을 통틀어 무위법(無爲法)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유부(有部)에서는 일체법("모든 법 · 법 전체")을 유위법 4위와 무위법 1위의 5위로 조직하였고, 다시 그 5위는 75종의 법으로 분류된다고 하여 일체법("모든 법 · 법 전체")을 5위 75법으로 조직하였다.
이러한 체계는 객관적 세계의 구성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고 주체적 현실에서의 일상생활의 성립, 선악의 행위와 결과의 관계, 마음의 자세, 번뇌와 그 단멸(斷滅)에 관한 이론체계를 의도한 것이다.

 

復次十八界(부차십팔계) 十二入(십이입) 五衆實有(오중실유) 而此中無人(이차중무인)

또한 “18계와 12입과 5중=오온이 실제로 있는 것이나, 이 가운데 사람의 법이라고 할 것은 없다”고 한다.

 

十八界(십팔계, dhātu)=여섯 가지 내적 감각 기관인 육근=안계(眼界), 이계(耳界), 비계(鼻界), 설계(舌界), 신계(身界), 의계(意界),

여섯 가지 외부 대상의 육경=색계(色界), 성계(聲界), 향계(香界), 미계(味界), 촉계(觸界), 법계(法界).

외부 대상에 내부 대상이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여섯 가지 의식인 육식=안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식계(身識界), 의식계(意識界).

dhātu란 계(界), 요소, 원소, 원리, 성질, 어근, 종류란 뜻이 있다. '청정도론(淸淨道論)'이나 '분별론(分別論)' 주석에서는 윤회의 고통을 일으키고 중생에게 괴로움을 부여하기 때문에 ‘계’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구사론'에서는 종(gotra)의 의미로, 산에 있는 철이나 구리 등 많은 종류를 광물(dhātu)이라고 하는 것처럼 18종을 십팔계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한 분류한다는 의미에서 종류[요소]라고도 한다. 금은의 요소가 금은으로 분류되듯 세속적인 것들은 행위와 상태로 분류되어 윤회의 여러 괴로움을 나누기 때문에 종류라고도 부른다.
존재의 요소는 아비달마에서는 분석적이고 법의 요소로 이해했지만 대승에 와서는 점차 바르게 알아야 할 인식의 대상, 식[18계 중 6식과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의 11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번뇌의 방해 요소, 집착하지 말아야 할 대상, 제거하고 벗어나야 할 것으로 의미가 변천되었다.

十二入(십이입)=십이처, 十二處. dvādaśāyatana. '구사론'에 따르면 '처(處, āyatana)'는 마음[心]과 심리현상[心所]이 생겨나는 문 또는 마음과 심리현상을 발생·성장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십이처는 고정불변의 인식 주체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인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12 영역을 의미한다.

'구사론'에서는 십이처의 가르침이란 붓다가 물질 현상[色]을 불변의 자아[我]로 착각하는 부류의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즉 십이처는 우리의 자아의식을 오근(五根: 눈·귀· 코·혀·몸 등의 5가지 인식능력)과 오경(五境: 오근 각각에 대응하는 색깔[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의 5가지 인식대상)의 10종류의 물질현상으로 해체하는데 초점이 있다.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는 영역은 우선 인식능력인 근(根, indriya)과 그것의 작용대상인 경(境, viṣaya)으로 대별된다. 근에는 시각능력인 눈[眼], 청각능력인 귀[耳], 후각능력인 코[鼻], 미각능력인 혀[舌], 촉각능력인 몸[身] 등의 오근에 사유능력[意, manas]을 더한 6종류, 즉 육근(六根)이 있다. 경 역시 육근 각각에 대응하여 눈의 작용대상인 색깔·형태[色], 귀의 작용대상인 소리[聲], 코의 작용대상인 냄새[香], 혀의 작용대상인 맛[味], 몸의 작용대상인 감촉[觸]의 오경에 사유대상[法, dharma]을 더한 6종류, 즉 육경(六境)이 있다.
『구사론』은 이상의 6가지 인식능력과 그 각각에 대응하는 6가지 인식대상 각각의 결합[觸]을 통해 시각[眼識], 청각[耳識], 후각[鼻識], 미각[舌識], 촉각[身識], 사유[意識] 등 6종류의 인식, 즉 육식(六識)이 매 찰나(刹那) 생겨날 뿐임을 지적하였다. 이리하여 십이처의 설법이 불변의 인식주체를 부정하는 무아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更有佛法中 方廣道人言(갱유불법중 방광도인언) 一切法不生不滅(일체법불생불멸)

空無所有(공무소유) 譬如兔角龜毛常無(비여토각구모상무)

또한 불법의 방광도인이 말하기를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아서 항상하지 않다' 하나니, 

(또불법(佛法)의 방광[方廣 Vaipulya 비불략(毘佛略대승(大乘)의 총칭(總稱)]을 닦는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일체법은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어서생겨남과 사라져 없어짐의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되는 것으로, ‘()’하여 정()해진 자성(自性)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인 것이비유하자면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과 같아서 항상 함의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란 없는 것이다.”)

 

방광도인(方廣道人)=대승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공(空)을 무(無)로 오해하는 사람들, 대승방광의 공한 이치를 잘못 집착하여 공견(空見)에 떨어진 이 또는 소승 중 부불법(附佛法)의 독자도인(獨子道人), 대승 중 부불법의 외도를 방광도인.

 

如是等一切論議師輩(여시등일체론의사배) 自守其法(자수기법) 不受餘法(불수여법)

此是實餘者妄語(차시실여자망어)

이와 같은 일체의 논사=論議師들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법만을 고수하고 남의 법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거짓말이다'고 하니,

 

若自受其法(약자수기법) 自法供養(자법공양) 自法修行(자법수행)

만일 스스로가 그 법을 받아들여 자기의 법에만 공양하고 자기의 법만 수행하면서 

 

他法不受不供養(타법불수불공양) 爲作過失(위작과실)

남의 법을 받아들이거나 공양하지 않는다면 허물이 된다.

 

若以是爲淸淨(약이시위청정) 得第一義利者(득제일의리자)

則一切無非淸淨(즉일체무비청정)

만일 이로써 청정을 삼아 제일가는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면 온갖 것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만약 이렇게 제일의(第一義)를 통해 마음과 지혜의 청정(淸淨)함을 터득할 수 있게 되면 날카로운 지혜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으로즉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어서 청정(淸淨)함을 통해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하는 그 어떠한 삿된 견해도 지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彼一切皆自愛法故(피일체개자애법고)

왜냐하면 저 일체란 모두 스스로 애착하는 특성인 까닭이니라.

(저들 일체는 모두 스스로 애착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問曰(문왈) 若諸見皆有過失(약제견개유과실) 第一義悉檀何者是(제일의실단하자시)?

묻나니, 모든 견해가 모두 (제 각각의) 허물이 있다면, 이 제일의실단은 어떻게 해서 옳다고 하는가?

 

答曰(답왈) 過一切語言道(과일체어언도) 心行處滅(심행처멸) 遍無所依(편무소의)

不示諸法(불행제법)

답하나니, 온갖 언어의 길을 초월하였으며, 마음으로 닿을 곳이 없으며,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무런 법도 보이지 않는다. 

 

諸法實相(제법실상) 無初無中無後(무초무중무후) 不盡不壞(불진불괴)

是名第一義悉檀(시명제일의실단)

제법의 실상은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나중도 없으며 다함도 없고, 무너짐도 없나니, 이것을 제일의실단이라 하느니라.

(생사고해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모든 말들을 끊어내고, 마음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번뇌의 불길이 꺼져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아무런 기댐이 없으면, 오온(五蘊)을 비롯한 12입(入) 18계(界)라는 제법(諸法)의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 지녀서는 아니 되는 것이라고 일러줄 수 있게 되나니, 제법(諸法)의 처음과 중간 맨 끝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어서, 다하지 않게 되고 무너지지 않게 되는 이러함을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如摩訶衍義偈中說(여마하연의게중설)
마치 마하연의의 게송=偈 가운데 설하는 바와 같으니,

 

*摩訶衍=대승, 大乘 마하연(摩訶衍),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야나(摩訶夜那), 상연(上衍), 상승(上乘)

‘대승(大乘)’이라고 한역한 산스끄리뜨어 ‘마하야나(mahayāna)’는 ‘큰 탈 것’을 뜻한다. 최초로 ‘마하야나’라는 단어를 쓴 경(經)은 한역 경전권에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으로 알려진 『팔천반야경(八千般若經, Aṣṭāsa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임으로 미루어볼 때, 대승은 반야부의 공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승은 부파 시대 이후에 발생한 신불교 운동 세력이 기존의 교단들을 비판하며 ‘소승(小乘)’, 즉 ‘히나야나(hīnayāna)’라 하고, 자신들을 ‘더 높은’ 불교로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대승은 공사상과 보살사상 그리고 육바라밀 또는 십바라밀의 체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북 베트남 등 한역 경전권의 불교와 티벳불교를 통칭한다.

 

語言盡竟(어언진경) 心行亦訖(심행역흘)

말로써 표현할 길이 다하고, 마음으로 따질 수도 없으며,
不生不滅(불생불멸) 法如涅槃(법여열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법이 그대로 열반이다.

(일체법이 인연화합이 없이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일체법의 한결같음(如)이 열반인 것이라.)


說諸行處(설제행처) 名世界法(명세계법)

모든 지어감=行함을 말한 곳을 세간의 법이라 하고
說不行處(설불행처) 名第一義(명제일의)
지어감이 없음을 말한 곳을 ()제일의제라 한다.

(“세계 속에 펼쳐지는 인연화합의 현상과 작용()이라고 부르거니와

모든 곳에 대해 자세히 살펴서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지녀서는 안된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라고 부릅니다.)


一切實一切非實(일체실일체비실) 及一切實亦非實(급일체실역비실)

온갖 진실함과 진실 하지 않음과 온갖 진실하기도 하고 진실하지 않기도 함과
一切非實非不實(일체비실비불실) 是名諸法之實相(시명제법지실상)

온갖 진실 아니기도 하고 진실 아닌 것도 아닌 것, 이들 모두를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니라.

(일체법의 실상(實相)에 대해 일체법의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도 지니지 않게 하여

일체법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거나 있지 않다거나 하지 않고

일체법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러함을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 한다.)

 

如是等處處 經中說(여시등처처경중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

이와 같이 경전의 곳곳에서 제일의실단을 말씀하셨지만, 

 

是義甚深(시의심심) 難見難解(난견난해) 佛欲說是義故(불욕설시의고)

說'摩訶般若波羅蜜經'(설마하반야바라밀경)

그 이치가 심히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부처님께서는 이 이치를 말씀하시기 위해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설하신 것이니라.

(이와 같이 곳곳에서 경()을 통해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을 말씀하셨거니와이러한 정의(定義)를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므로바른 견해 지니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나니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정의(定義)를 말씀해주시고자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상대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곧 바로 진리에 들어가게 하는 입리실단(入理悉檀), 즉 훌륭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맡기어 실천하도록 하는 참된 바른 가르침.

 

第一義悉檀者(제일의실단자) 一切法性(일제법성) 一切論議語言(일체논의어언)

제일의실단이라 함은 온갖 법성 온갖 논의와 언어

 

법성 (Dharma-nature , 法性) 법상, 정리, 진여, 공.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것 또는 존재의 진실로서 불변하는 본성을 말함.

법성(法性)은 아비달마불교에서 불설(佛說)을 불설로서 인정하게 하는 기준의 하나였다. 부처님이 남기신 유법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요구됨에 따라, 경과 율 외에 법성에 위배되지 않아야 불설로서 인정하였다. 이 때 법성은 성인의 가르침(진실)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때로는 법상(法相)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법성은 정리(正理, yukti: 올바른 도리)라는 의미로 일반화되고, 불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우선적 기준이 된다.
법성은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철학적 의미를 담지하는 개념이 되면서 다양화된다. 

①'화엄경'에서는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것’ 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존재의 진실로서 불변하는 본성’의 의미로 사용된다. '십지경론'에서는 ‘법체(法體)’라는 용어로 한역되기도 한다. 

② '중론'에서의 dharmatāsbavhāva로서 ‘존재의 자성(自性)’을 의미한다. 쿠마라지바가 '소품반야경'을 번역할 때는 sarva-dharmāṇāṃ prakṛtiḥ를 법성으로 한역했으며 이 역시 존재의 자성을 의미한다. 

③'유마경'에서는 진여(眞如)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④'중변분별론'에서는 ‘존재의 보편적인 양상’의 의미를 지닌다. 

⑤'보성론'에서는 법계(法界, dharma-dhātu)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一切是法非法(일체시법비법) 一一可分別破散(일일가분별파산)

온갖 옳은 법과 옳지 않은 법은 낱낱이 타파되고 흩어질 수 있지만 

(일체법의 자성(自性)=법성이란 일체법에 대해 이것이 참된 가르침()이고 이것은 참된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일체의 논의(論議)와 모든 말은 하나하나 분별하여 깨뜨려지고 흐트러질 수 있으나모든 부처님과 벽지불 아라한께서 자세히 살피신 진실한 가르침()은 깨뜨려지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諸佛辟支佛阿羅漢(제불벽지불아라한) 所行眞實法(소행진실법)

不可破不可散(불가파불가산)

부처님들이나 벽지불, 아라한들이 행하는 진실한 법은 파괴할 수도 없고, 흐트러뜨릴 수도 없는 것이니


辟支佛(벽지불, pratyekabuddha)= 홀로 수행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수행자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무불(無佛)시대에 출현해 스승이나 도반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 성자를 뜻한다(獨覺). ‘인연법 혹은 12연기를 관해 깨달음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阿羅漢(아라한, arhat)= 불교흥기 당시의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수행완성자,’ ‘존경할 만한 수행자’를 의미하던 말이다. 원래 아라한(arhat)이란 어근 √arh(~할 가치가 있다, ~에 필적하다)에서 유래한 현재분사의 형태로 ‘공양드릴 만한 가치가 있는 자’를 의미한다. 여래 10호에서 보듯이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가리키던 말이지만, 부파시대가 되면 그 의미는 협소해져 단순히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를 가리키게 되었다. 응(應)․응공(應供)․불생(不生)․살적(殺賊) 등으로 의역하거나, 나한(羅漢)․아라가(阿羅訶)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上於三悉檀中(상어삼실단중) 所不通者(소불통자) 此中皆通(차중개통)

위의  가지 실단 가운데에서 하지 않던 것들이 여기에 모두 통하느니라.

(위의 세 가지 실단(悉檀)으로 통하지 않던 것들 모두가 여기에서는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問曰(문왈) 云何通(운하통)?

묻나니, 어떻게 통하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所謂通者(소위통자) 離一切過失(이일체과실) 不可變易不可勝(불가변이불가승)

답하나니, 통한다 것은 일체의 허물=過失을 여의어 바꿀 없고, 이길 수도 없음을 말하느니라

(이른바 통한다는 것은일체의 허물과 잘못을 여읜다는 것으로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이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除第一義悉檀(제제일의실단) 諸餘論議(제여론의) 諸餘悉檀(제여실단)

皆可破故(개가파고) '衆義經'中所說偈(여중의경중소설게)

왜냐하면 제일의실단을 제외한 나머지 논의나 실단은 모두 깨트려짐=可破할  있기 때문이니라
'마치 중의경의 게송과 같으니,

(왜냐하면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논의(論議)와 그 밖의 모든 실단(悉檀)은 하나같이 깨뜨려지기 때문입니다.)

 

各各自依見(각각자의견戲論起諍競(희론기쟁경)

(세간의 사람들은) 제각기 스스로 견해에 의지하여, 부질없이 논란(논쟁) 일으키나니

若能知彼非(약능지피비是爲知正見(시위지정견)
만약 그들이 (실상에 대해) 옳지 않음을 알게되그는 바른 견해를 아는 자이니

 

不肯受他法(불긍수타법是名愚癡人(시명우치인)

다른 이의 법(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이를 어리석은 이라 하나니

作是論議者(작시론의자眞是愚癡人(진시우치인)
이러한 희론(논쟁)을 일삼는 이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로다.(지혜가 없는 이들이다)


若依自是見(약의자시견而生諸戲論(이생제희론)

만약 자신의 견해를 참된 가르침=法이라고 여기고 기댐으로써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온갖 희론(논쟁)을 일으키고

若此是淨智(약차시정지無非淨智者(무비정지자)

만약 그러한 것을 맑은 지혜라 한다면, 맑고 깨끗한 지혜도 아니거니와 지혜 없는 사람입니다.  


此三偈中(차삼게중) 佛說第一義悉檀相(불설제일의실단상)

게송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제일의실단의 모습을 설명하셨으니

 

所謂世閒衆生(소위세간중생) 自依見自依法(자의견자의법)

自依論議而生諍競(자의론의이생쟁경)

이른바 세간의 중생들은 스스로의 견해에 의지하고, 스스로의 법에 의지하고, 스스로의 이론에 의지해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세간의 중생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삿된 견해에 기대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가르침(法)에 기대며, 스스로 맞다고 여기는 논의(論議)에 기대어서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거니와,)

 

戲論卽諍競本(희론즉쟁경본) 戲論依諸見生(희론의제견생)

희론은 다툼(논쟁)의 근본이 되고, 희론은 그러한 제 각각의 모든 견해에 의해 생겨나나니,

 

如說偈言(여설게언)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

有受法故有諸論(유수법고유제론) 若無有受何所論(약무유수하소론)

받아들인 법이 있기에 왈가왈부하거니와 받아들임이 없다면 무슨 논의가 있으랴.
有受無受諸見等(유수무수제견등) 是人於此悉已除(시인어차실이제)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견해를 이 사람은 이미 모두 제해버렸네.

(일체법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가르침() 받아들인 까닭에 모든 논의(論議)가 있게 되는 것이나니, 

만약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라면어떠한 논의(論議)를 받아들일 것이며, 

일체법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일체법에 실상(實相)이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을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으로 모두 이미 없애는 것입니다.)

 

行者能如實知此者(행자능여실지차자) 於一切法一切戲論(어일체법일체희론)

不受不著不見是實(불수불착불견시실) 

도를 살피는=행자가 이러한 이치를 능히 여실하게 알 수 있다면, 온갖 법과 온갖 희론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거나, 어떠한 견해도 같지 않으니,

 

행자(行者)=스님이 되기위하여 출가한 사람으로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사람, 여기에서는 불도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보겠습니다.

 

不共諍競(불공쟁경) 能知佛法甘露味(능지불법갈로미) 若不爾者則謗法(약불이자즉방법)
이야말로 진실로 다투지 않음이니 (실상을 알게된 것이니), 불법의 감로미를 잘 알게 된 것이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곧 법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만약 다른 사람의 가르침(法)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취하지도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감로미(甘露味)=amṛta. 불사의 맛 또는 경지를 의미

 

若不受他法(약불수타법) 不知不取是無智人(불지불취시무지인)

만일 남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알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지혜 없는 사람이니라. 

 

若爾者(약이자) 應一切論議人皆無智(응일체논의인개무지) 何以故(하이고)?

各各不相受法故(각각불상수법고)

그러한 논쟁자들은 모두 무지한 자이리라, 왜냐하면 서로가 상대방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니라. 

 

所謂有人 自謂法第一義淨(소위유인 자위법제일의정) 餘人妄語不淨(여인망어부정)

이른바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법(자신의 가르침)이 제일의이며 깨끗하다고 하지만, 다른 법(다른 이의 가르침)은 거짓이요 부정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譬如世閒治法(비여세간치법) 故治法者(고치법자) 刑罰殺戮(형죄살육)

비유하건대 마치 세간에서 법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법을 다스리는 이는 형벌을 주거나 살육(사형)을 하는 등 

 

種種不淨(종종부정) 世閒人信受行之(세간인신수행지) 以爲眞淨(이위진정)

여러 가지의 부정한 형벌을 가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믿고 받아 들여 참되고 깨끗하다 여기거니와 

 

於餘出家善聖人中(어여출가선성인중) 是最爲不淨(시최위부정)

세상을 벗어난 성인들=出家善聖에게 있어서, 이는 가장 부정한 것이 되는 것과 같으며,

 

外道出家人法(외도출가인법) 五熱中一腳立(오열중일각립) 拔髮等(구발등)

외도의 출가한 사람들의 법에는 5열 속에서 한 발로 서 있거나 몸의 털을 뽑는 것을 

 

오열(五熱)= 외도의 다섯가지 가학적인 고행으로 태양이 작열(灼熱)하는 가운데 사방에 불을 피우고 그 가운데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것.

 

尼犍子輩以爲妙慧(니건자배이위묘혜) 餘人說此爲癡法(여인설차위치법)

니건자의 무리들은 묘한 지혜라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이를 어리석은 법이라 여기느니라. 

(외도의 출가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에 사방에 불을 피우고 태양의 열기가 한창일 때 한쪽다리로만 서있거나몸의 터럭을 남김없이 뽑아내는 등 나형외도(裸形外道 자이나교)의 무리들은 으뜸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한 고행(苦行)이라 하나다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러한 것을 참으로 어리석은 가르침()이라 합니다.)

 

*니건자(尼犍子, Nirgrantha-putra)= ‘속박을 여읜 자’라는 뜻으로 쟈이나(Jina)교의 실질적인 교주이며,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본명은 Vardha-māna이며, 득도 후에는 Mahāvīra, 혹은 Jina라 불렸다. 30세에 출가해 12년 동안 고행한 끝에 42세에 깨달음을 얻어 승리자(Jina)가 되었다. 72세에 입멸하기까지 인도 각지를 유행하며 교화했다고 한다.

나형외도(裸形外道)= 벌거벗고 몸에 재를 뿌리고 다니는 것을 수행이라 여기는 것.

 

如是等種種外道出家(여시등종종외도출가) 白衣婆羅門法(백의나라문법)

各各自以爲好(각각자이위호) 餘皆妄語(여개망어)

마치 이와 같이, 갖가지 외도의 출가자들과  백의(재가자)와 바라문이 각각 자기의 법(가르침)이 좋다고 하지만, (그 무리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가 거짓이라 여기느니라.

 

백의(白衣)=재가자를 의미한다. 인도의 풍습이 재속인은 주로 흰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

婆羅門(바라문, brāhmaṇa) 인도의 사성계급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성직자 계급

브라만(Brahman)의 음역(音譯)으로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승려 계급이라 하나 나중에 불교(佛敎)에선 세속의 청신사(淸信士-우바새청신녀(淸信女-우바이)를 총칭(總稱)하여 바라문(婆羅門)”이라 불렀으며중국(中國)의 승려들은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통해 인도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분을 승려(僧侶)”라 인정하지 않고 바라문(婆羅門)”이라 불렀습니다.

如說偈言(여설게언)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다시 무상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로 일체법은 자성 없이 공하기에 무상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無常見有常(무상견유상) 是名爲顚倒(시명위전도)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는 견해, 이를 뒤바뀐 생각=顚倒라 하나니,


空中無無常(공중무무상) 何處見有常(하처견유상)

공한 가운데는 무상도 없거니와, 어디에서 항상함이 있음을 보랴.

(“공(空)”함 가운데는 무상(無常)함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거늘,
어찌 항상한 가운데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問曰(문왈)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皆無常相應(개무상상응) 是第一義(시제일의)

云何言無常非實(운하언무상비실)?

묻나니, 온갖 만들어진 것=有爲法이 모두 무상의 모습이라면, 응당 무상이야말로 제일의제=第一義일 것이거늘 어찌하여 무상이 진실이 아니라 하는가? 

 

유위(有爲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유위법(有爲法, Karmic existence, conditioned existence)은 유위(有爲)의 세계,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무위(無爲, uncreated, unformed, unconditioned)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무위법(無爲法, non-Karmic existence, unconditioned existence)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이었는데, 후대의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 의해 3무위(三無爲), 6무위(六無爲), 9무위(九無爲) 등의 설이 생겼다.

 

所以者何(소이자하)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生住滅相(생주멸상)

前生次住後滅故(전앳차주후멸고) 云何言無常非實(운하언무상비실)?

말하자면 온갖 유위의 법은 생ㆍ주ㆍ멸의 모습이니, 먼저 생하고 그 다음은 머무르고 나중에는 멸하는 것이니 어찌 무상이 진실하지 않은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생주멸(生住滅)을 실상(實相)으로 삼는 것이어서, 생겨난 다음 잠시 머무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거니와어찌하여 무상(無常)을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상(無常)이 유위법(有爲法)의 실상(實相)이기는 합니다.

 

答曰(답왈) 有爲法不應有三相(유위법불을유삼상) 何以故(하이고)

三相不實故(삼상부실고)

답하나니, 유위의 법에 (생주멸) 세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습이 진실치 않기 때문이다. 

 

若諸法生住滅(약제법생주멸) 是有爲相者(시유위상자) 今生中亦應有三相(금생중역응유삼상)

生是有爲相故(생시유위상고)

만일 모든 법의 생ㆍ주ㆍ멸이 유위의 모습(실상)이라면 지금 생하는 가운데에서도 세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하리니, 생이 유위의 법인 까닭이 되니, 

 

如是一一處(여시일일처) 亦應有三相(역응유삼상) 是則無窮(시즉무궁)

住滅亦如是(주멸역여시)

이와 같이 낱낱의 생함에 역시 세 가지 모습이 있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주와 멸 또한 그러할 것이다.


若諸生住滅(약제생주멸) 各更無有生住滅者(각갱무유생주멸자)

만일 모든 생ㆍ주ㆍ멸에 각각 다시 생ㆍ주ㆍ멸이 없다면 

 

不應名有爲法(불응명유위법) 何以故(하이고) 有爲法相無故(유위법상무고)

유위의 법이라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유위법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제법(諸法)의 생주멸(生住滅)이 유위(有爲)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면지금 생겨나는 것 속에도 생주멸(生住滅)이라는 모습이 담겨있어야 하거니와 생겨남이 유위법(有爲法)인 까닭에 이와 같이 하나하나 생겨나는 곳마다 마땅히 생주멸(生住滅)이라는 모습이 있게 된다면, 이러함은 인연화합만 있으면 무궁(無窮)하게 펼쳐지는 것으로 주()와 멸()도 이와 같이 됩니다만약 모든 생주멸(生住滅)이 각기 거듭될지라도 생주멸(生住滅)이 없다면 유위법(有爲法)이라 부르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유위법(有爲法)이란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以是故諸法無常(이시고제법무상) 非第一義(비제일의)

이러한 까닭에 모든 법이 무상하다 함은 제일의 실단이 되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제법(諸法)은 무상(無常)한 것이거니와 이러함이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은 아닙니다.)


復次若一切實性(부차약일체실성) 無常則無行業報(무상즉무행업보)

또한 만약 온갖 것의 진실한 성품=一切實性이 무상하다면 행업(업이숙)의 과보=報도 없을 것이니,

(또한만약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없어 무상(無常)하다면 즉 업()을 지어 받게 되는 과보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과 자성(自性)이 없는 것입니다.)

 

행업(行業)=행위의 결과가 익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업이숙(業異熟)이라고도 한다.

 

何以故(하이고) 無常名生滅失故(무상명생멸실고) 譬如腐種子不生果(비여폐종자불생과)

왜냐하면 무상을 생멸이라 부르는 허물이 있게 되기 때문이니, 마치 썩은 종자는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생겨남이라는 현상과 작용을 잃게 되어 사라져 없어짐이라고 부르는 까닭에비유하자면 마치 썩은 씨앗에서 열매가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如是則無行業(여시즉무행업) 無行業云何有果報(무행업운하유과보)?

이러한 즉 행업이 없을 것이요, 행업이 없으면 어떻게 과보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업(業)을 지음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라면, 업(業)을 지음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 과보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今一切賢聖法有果報(금일체현성법유과보) 善智之人所可信受(선지지인소가신수)

不應言無(불응언무)

지금 온갖 성현의 가르침에는 과보가 있다고 함에,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믿어 받드는 바이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以是故(이시고) 諸法非無常性(제법비무상성)

이러한 까닭에 모든 법은 무상의 성품이 아니니라.

(이러한 까닭에제법(諸法)의 무상(無常)함이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삿된 견해를 지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如是等無量因緣說(여시등무량인연설) 不得言諸法無常性(불득언제법무상성)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무상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이와 같이 무량한 인연에 대해서 말씀하셨거니와제법(諸法)의 무상(無常)함이 제법(諸法)의 자성(自性)이라고 말하게 되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無常苦無我等亦如是(무상고무아등역여시)

곧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하니 고, 무아 등도 마찬가지이니라. 

 

무아(無我)= 라는 모습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

불교의 무아설은 ‘나〔我)〕’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불교 수행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 ‘나〔我)〕’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일체법(一切法)과 제법(諸法)= 일체법은 인연화합에 의한 중생을 뺀 모든 현상과 작용을 뜻하는 것이고제법(諸法)은 오온(五蘊)을 비롯한 12()과 18()에 의해 맞닿아 펼쳐지는 바로 여러분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도 됩니다.

 

법(法)은 한자어로 ‘물[水]이 간다[去]’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르마를 법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실제로 현실의 존재 속에는 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현실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육입(六入)·육경(六境) 등의 여러 가지 법 체계를 설하게 되었다. 이 법이란 말은 매우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 행위를 보존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如是等相(여시등상) 名爲對治悉檀(명위대치실단)

이와 같은 모습을 이름하여 대치실단이라 하느리라.

(이와 같이 유위법과 무위법을 통해 실상(實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게 하는 것을 대치실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如說偈言(여설게언)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다시 무상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로 일체법은 자성 없이 공하기에 무상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無常見有常(무상견유상) 是名爲顚倒(시명위전도)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는 견해, 이것을 뒤바뀐 생각=顚倒라 하나니,


空中無無常(공중무무상) 何處見有常(하처견유상)

공한 가운데는 무상도 없거니, 어디에서 항상함이 있음을 보랴.

(“공(空)”함 가운데는 무상(無常)함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거늘,
어디에서 항상 함 가운데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問曰(문왈)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皆無常相應(개무상상응) 是第一義(시제일의)

云何言無常非實(운하언무상비실)?

묻나니, 온갖 만들어진 것=有爲法이 모두 무상의 모습이라면, 응당 무상이야말로 제일의제=第一義일 것이거늘 어찌하여 무상이 진실이 아니라 하는가? 

 

유위(有爲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유위법(有爲法, Karmic existence, conditioned existence)은 유위(有爲)의 세계,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무위(無爲, uncreated, unformed, unconditioned)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무위법(無爲法, non-Karmic existence, unconditioned existence)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이었는데, 후대의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 의해 3무위(三無爲), 6무위(六無爲), 9무위(九無爲) 등의 설이 생겼다.

 

所以者何(소이자하)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生住滅相(생주멸상)

前生次住後滅故(전앳차주후멸고) 云何言無常非實(운하언무상비실)?

온갖 유위의 법은 생ㆍ주ㆍ멸의 모습이니, 먼저는 생하고 다음은 머무르고 나중에는 멸하는 것이니 어찌 무상이 진실하지 않겠는가?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생주멸(生住滅)을 실상(實相)으로 삼는 것이어서, 생겨나게 된 다음 잠시 머무르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거니와어찌하여 무상(無常)을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상(無常)이 유위법(有爲法)의 실상(實相)이기는 합니다.

 

答曰(답왈) 有爲法不應有三相(유위법불을유삼상) 何以故(하이고)

三相不實故(삼상부실고)

답하나니, 유위의 법에 (생주멸) 세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 가지 모습이 진실치 않기 때문이다. 

 

若諸法生住滅(약제법생주멸) 是有爲相者(시유위상자) 今生中亦應有三相(금생중역응유삼상)

生是有爲相故(생시유위상고)

만일 모든 법의 생ㆍ주ㆍ멸이 유위의 모습(실상)이라면 지금의 생하는 가운데에서도 세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하리니, 생이 유위의 법인 까닭이 되니, 

 

如是一一處(여시일일처) 亦應有三相(역응유삼상) 是則無窮(시즉무궁)

住滅亦如是(주멸역여시)

이와 같이 낱낱의 생함에 역시 세 가지 모습이 있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주와 멸 또한 그러할 것이다.


若諸生住滅(약제생주멸) 各更無有生住滅者(각갱무유생주멸자)

만일 모든 생ㆍ주ㆍ멸에 각각 다시 생ㆍ주ㆍ멸이 없다면 

 

不應名有爲法(불응명유위법) 何以故(하이고) 有爲法相無故(유위법상무고)

유위의 법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위법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제법(諸法)의 생주멸(生住滅)이 이렇게 유위(有爲)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면지금 생겨나는 것 속에도 생주멸(生住滅)이라는 모습이 담겨있어야 하거니와 생겨남이 이렇게 유위법(有爲法)인 까닭에 이와 같이 하나하나 생겨나는 곳마다 마땅히 생주멸(生住滅)이라는 모습이 있게 된다면 이러함은 즉 인연화합만 있으면 무궁(無窮)하게 펼쳐지는 것으로 주()와 멸()도 이와 같다는 것이 됩니다만약 모든 생주멸(生住滅)에 각기 거듭될지라도 생주멸(生住滅)이 없다면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유위법(有爲法)이란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以是故諸法無常(이시고제법무상) 非第一義(비제일의)

이러한 까닭에 모든 법이 무상하다 함은 제일의 실단이 되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제법(諸法)은 무상(無常)한 것이거니와 이러함이 제일의실단(第一義悉壇)은 아닙니다.)


復次若一切實性(부차약일체실성) 無常則無行業報(무상즉무행업보)

또한 만약 온갖 것의 진실한 성품=一切實性이 무상하다면 행업(업이숙)의 과보=報도 없을 것이니,

(또한만약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없어 무상(無常)하다고 하게 되면 즉 업()을 지어 받게 되는 과보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과 자성(自性)이 없는 것입니다.)

 

행업(行業)=행위의 결과가 익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업이숙(業異熟)이라고도 한다.

 

何以故(하이고) 無常名生滅失故(무상명생멸실고) 譬如腐種子不生果(비여폐종자불생과)

왜냐하면 무상을 생멸이라 부르는 허물이 있게 되기 때문이니, 마치 썩은 종자는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생겨남이라는 현상과 작용을 잃게 되어 사라져 없어짐이라고 부르는 까닭에비유하자면 마치 썩은 씨앗에서 열매가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如是則無行業(여시즉무행업) 無行業云何有果報(무행업운하유과보)?

이러한 즉 행업이 없을 것이요, 행업이 없으면 어떻게 과보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업(業)을 지음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라면, 업(業)을 지음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 과보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까?)

 

今一切賢聖法有果報(금일체현성법유과보) 善智之人所可信受(선지지인소가신수)

不應言無(불응언무)

지금 온갖 성현의 가르침에는 과보가 있으므로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믿어 받드는 바이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以是故(이시고) 諸法非無常性(제법비무상성)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은 무상의 성품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제법(諸法)의 무상(無常)함이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그 어떠한 삿된 견해를 지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如是等無量因緣說(여시등무량인연설) 不得言諸法無常性(불득언제법무상성)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무상의 성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무량한 인연에 대해서 말씀하셨거니와제법(諸法)의 무상(無常)함이 제법(諸法)의 자성(自性)이라고 말하게 되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無常苦無我等亦如是(무상고무아등역여시)

곧 일체의 유위법이 무상하며, 고(苦)ㆍ무아(無我) 등도 마찬가지이니라. 

 

무아(無我)= 라는 모습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

불교의 무아설은 ‘나〔我)〕’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불교 수행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이름 아래 설명되었고, 무아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나 무아행(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아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는 무아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무아성을 자각하여 수양하고 노력함에 따라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인 열반은 무아성의 자각 아래 철저하게 무아행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경지이다. 이 무아는 일반적으로 크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누어 설명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쾌한 해석을 가하였다.
원효는 인무아를 외도(外道)나 범부(凡夫)들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외도나 범부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주재하는 영구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보고 이를 ‘나〔我)〕’라고 하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이 가정적(假定的)으로 화합해 있는 것일 뿐, 특별한 주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인무아’라고 한다고 하였다.

 

일체법(一切法)과 제법(諸法)= 일체법은 인연화합에 의한 중생을 뺀 모든 현상과 작용을 뜻하는 것이고제법(諸法)은 오온(五蘊)을 비롯한 12()과 18()에 의해 맞닿아 펼쳐지는 바로 여러분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도 됩니다.

 

법(法)은 한자어로 ‘물[水]이 간다[去]’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르마를 법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실제로 현실의 존재 속에는 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현실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육입(六入)·육경(六境) 등의 여러 가지 법 체계를 설하게 되었다. 이 법이란 말은 매우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 행위를 보존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如是等相(여시등상) 名爲對治悉檀(명위대치실단)

이와 같은 모습을 대치실단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유위법과 무위법을 통해 실상(實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게 하는 것을 대치실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對治悉檀(대치실단)

대치실단(對治悉檀)=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미혹을 대치하고 이익을 주는 것, 병(번뇌)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치유(악을 끊게)하는 단악실단(斷惡悉檀)을 말한다. 즉 중생이 지닌 번뇌와 악업(惡業)을 살펴보고 깨우치게 하여 이를 없애 반야바라밀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참되고 바른 가르침.


對治悉檀者(대치실단자) 有法對治則有(유법대치즉유) 實性則無(실성즉무)

대치실단이라 함은 존재하는 것( bhūtasvabhāva)은 대치(pratipakṣa)할 때에는 곧 있는 것이거니와 실제의 성품은 없는 것으로, 

(대치실단이란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모든 현상과 작용(有法)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으로, 즉 일체법에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입니다.)

 

譬如重 熱 膩 酢 鹹藥草飮食等(비여중 열 니 초 함 약초음식등)

膩 기름 니, 기름질 니, 酢 초 초, 초 조, 잔돌릴 작, 鹹 짤 함, 다 함

於風病中名爲藥(어풍병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비유하면 마치 重=매우 熱=뜨겁고, 膩=기름지고, 酢=시고, 鹹=짠맛이 나는 약초나 음식 등이 풍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풍병(風病)=일반적으로 중풍(中風)으로 알려져 있으며, 뇌졸중 즉 뇌경색과 뇌출혈과 같은 질환에 이환됐을 때 풍(風) 맞았다고 하기도 하며 중풍에 걸렸다도 합니다. 

손사막의 천금방(千金方)에서는 풍병(風病)을 4가지로 분류해서,

첫째 편고(偏枯)는 반신불수를 말하며,

둘째 풍비(風痱)는 몸은 아프지 않으나 사지를 쓰지 못하는 것,
셋째 풍의(風懿)는 갑자기 의식이 없는 것,
넷째 풍비(風痹)는 일반적인 비증의 류로 풍병(風病)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풍병 중 3가지(편고, 풍비, 풍의)는 중풍(中風)에 해당하고, 풍비(風痹)는 중풍이 아닌 관절질환을 이르는 것입니다.- KMD

 

若輕 冷 甘 苦 澀藥草飮食等(약경 냉 감 고 삽 약초음식등) 澀 떫을 삽, 澁과 同字

於熱病名爲藥(어열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가령 輕=약간 冷=차고, 甘=달고, 苦=쓰고, 澀=떫은 약초나 음식 등은 열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熱病(열병)=열이 몹시 오르고 심하게 앓는 병

 

若輕 辛 苦 澀 熱藥草飮食等(약경 신 고 삽 열약초여음식등)

於冷病中名爲藥(어냉병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약간 辛=맵고 苦=쓰고 澀= 떫고 熱=더운 약초와 음식은 냉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냉병(冷病)= 냉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온도에서 신체의 특정 부위만 차가움을 느껴 곤란한 상태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전신이 차가움을 느끼는 것. 냉병(冷病)은 여성들에게 흔한 것으로 몸의 일부에 혈액순환이 나빠져 피가 잘 돌지 못하게 되는 관계로 찬감을 느끼게 되는 냉병은 손발이 차고 아랫배가 싸늘하면서 아픈 것이 주 증상이다. 냉(冷)이 많이 흐르고 월경이 고르지 못하며 소화가 잘 안 된다. 또한 냉병은 불임증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佛法中治心病亦如是(불법중치심병역여시) 不淨觀思惟(부정관사유)

불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그와 같아서 부정관으로 사유하는 것은 

 

心病(심병)=마음속의 근심, 고민, 울화병.

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부정관(不淨觀)= 오정심관의 첫 번째 관으로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자세하게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계기로 삼는 수행법이다. 밖으로 타인의 시체를 관찰하는 방법 이외에도, 안으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 즉 똥·오줌·고름·가래 등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다스리는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주로 ‘부정한 것들을 따라가며 보기’(不淨隨觀, asubhānupassī) 또는 ‘부정한 것들의 모습을 떠올려 생각하기’(不淨想, asubhasaññā) 등의 개념으로 주로 등장한다.

於貪欲病中(어탐욕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탐욕의 병에는 좋은 대치법이 되지만 

(불법(佛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릴 때 역시 이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을 사유(思惟)하게 되면 탐욕(貪慾)의 병을 다스릴 수 있게 됨으로 훌륭한 對治法=처방(處方)이라 할 수 있으나, 瞋恚=분노조절장애라는 병을 앓는 이에게는 훌륭하다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른 처방(處方)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於瞋恚病中(어진에병중) 不名爲善非對治法(불명위선비대치법)

성냄의 병에는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대치법=치료법이 될수 없으니, 

 

所以者何(소이자하) 觀身過失 名不淨觀(관신과실 명부정관)

그 이유는 몸의 허물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인데 

 

若瞋恚人觀過失者(약진에인관과실자) 則增益瞋恚火故(즉증익진에화고)

만약 성내는 사람에게 몸의 허물을 관찰하게 하면 성냄의 불길이 더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思惟慈心 於瞋恚病中(사유자심 어진에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慈心=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유하는 것은 성냄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치료방법이 되지만 

 

於貪欲病中 不名爲善(어탐욕병중 불명위선) 非對治法(비대치법)

탐욕의 병에는 좋다고 할 수 없고, 좋은 대치법=바른 처방이 되지 않는다. 

 

所以者何(소이자하) 慈心於衆生中(자심어중생중) 求好事觀功德(구호사관공덕)

왜냐하면 慈心=자심은 중생에게서 좋은 일을 구하고 공덕을 관찰하는 것이나, 

(중생을 한없이 사랑하여 항상 걱정근심 벗어난 편안함으로 즐거운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탬이 되고자 생각하는 마음=慈心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은 훌륭한 일로 그 공덕을 살펴보게 한 것이며)

 

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자비관(慈悲觀)은 자신의 마음에 자비로움을 일으켜 가득 채워가는 수행법이다. 자비에서 자(慈, mettā)는 자애의 마음으로서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고 비(悲, karuṇā)는 연민의 마음으로서 슬픔을 나누어 가지려는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자비관은 모든 생명체들이 괴로움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기원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권장되는 수행법이다. 줄여서 자관(慈觀) 또는 자애관(慈愛觀)이라고도 한다.

 

若貪欲人(약탐욕인) 求好事觀功德者(구호사관공덕자) 則增益貪欲故(즉증익탐욕고)

만약 탐욕스런 이가 중생에게 좋은 일을 구하는 공덕을 관찰하게 하면 탐욕이 더욱 늘어나기 때문이며,

 

因緣觀法 於愚癡病中(인연관법 어우치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인연관법은 (有爲의 法을 살피게 하여) 어리석은 병에는 좋은 대치법이 되지만 

 

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인연관(因緣觀)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다. 인연이란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aṭicca)’을 아우르는 개념이지만 초기불전에 따르면, ‘이것을 조건으로 발생한다’는 ‘연기’의 설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초기불전인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 제28경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구절에 의하면, 연기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연기’는 번뇌 따위가 무엇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러한 문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명상법이라고 볼 수 있다.

 

於貪欲瞋恚病中(어탐욕진에병중) 不名爲善非對治法(불명위선비대치법)

탐욕과 성냄의 병에는 좋지 못하며 또한 대치법(바른 처방)이 되지 못한다. 

 

所以者何(소이자하) 先邪觀故生邪見(선사관고생사견) 邪見卽是愚癡(사견즉시우치)

왜냐하면 우선 삿된 견해로 삿되게 관찰했기 때문에 삿된 소견이 생기는 것이니, 삿된 견해가 곧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니라.

 

問曰(문왈) 如佛法中說(여불법중설) 十二因緣甚深(십이인연심심) 

묻나니, 불법 안에서 12인연을 심히 깊다 하셨으며, 

(불법(佛法)에 보면 12인연(因緣)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하셨는데,)

12지연기(dvadasanga pratityasamutpada , 十二支緣起,12인연, 十二因緣, 12연기설, 十二緣起說=인연에 따른 생성'으로 괴로움의 원인과 태어나고 늙고 죽음을 겪으면서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사건들의 흐름이다.

사건들은 연속해서 일어나 한 무리의 사건은 또다른 무리의 사건을 낳는 사건의 연속을 12개의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로 표현한다. 
① 무명(無明:산스크리트로는 avidyā, 팔리어로는 avijjā):특히 4성제, 인간의 본질, 윤회, 열반 등에 대한 무지,
② 행(行 saṃskāra/sankhāra):실재에 대한 잘못된 사고의 형성,
③ 식(識 vijñana/viññāṇa):행이 가져오는 인식의 구조,
④ 명색(名色 nāma-rūpa):식의 대상인 이름과 형상, 즉 자아 정체성이 이루어지는 근본원리,
⑤ 육입(六入 sadā-yatana):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눈·귀·코·혀·몸의 5가지 감각기관 및 그 대상들과, 감각적 인상들을 통합하는 기관으로서의 마음,
⑥ 촉(觸 sparśa/phassa):존재하는 대상과 감각기관 사이의 부딪힘,
⑦ 수(受 vedanā):촉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작용,
⑧ 애(愛 tṛṣṇā/taṇhā):즐거운 감각작용에 대한 목마름,
⑨ 취(取 upādāna):성적 대상 등에 대한 애의 심화에 의해 나타나는 집착,
⑩ 유(有 bhava):취에 의해 발동되는 생성과정,
⑪ 생(生 jāti):유의 결과로서 개인의 태어남,
⑫ 노사(老死 jāra-marana):생의 결과로서 늙어서 죽는 것 등이다.

순서대로 관찰하는 順觀緣起 anuloma이나 반대로 관찰하는 逆觀緣起 pratiloma의 관법이 있다.

 

如說 佛告阿難(여설불고아난) 是因緣法甚深(시인연법심심) 難見難解(난견난해)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인연의 법은 심히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難覺難觀(난각난관) 細心巧慧人乃能解(세심교혜인내능해)

깨닫기 어렵고 관찰하기 어려우니, 마음이 섬세하고 지혜가 공교로운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愚癡人於淺近法(우치인어천근법) 猶尚難解(유상난해) 何況甚深因緣(하황심심인연)?

어리석은 사람은 얕고 가까운 법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심히 깊은 인연이겠느냐'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나니, 이렇게 인연의 현상과 작용()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에 대해, 바른 견해 지니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오개(五蓋)에 덮여 제멋대로 날뛰는 거친 마음() 물리치기 어렵고오욕(五慾)에 물들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 다스리기 어려우며청정(淸淨)함이라는 섬세한 마음에 정련된 지혜를 지닌 사람이라야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가 얕아 참된 가르침(法)의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지라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늘, 하물며 인연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랴!
그런데 어찌하여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마땅히 인연의 현상과 작용(法)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今云何言(금운하언) 愚癡人應觀因緣法(우치인은관인연법)?

이제 와서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인연을 관찰하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愚癡人者(우치인자) 非謂如牛羊等愚癡(비위여우양등우치)

답하나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서 소나 양같이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是人欲求實道(시인욕구실도) 邪心觀故(사심관고) 生種種邪見(생종종사견)

이 사람은 진실한 도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삿된 마음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갖가지 삿된 소견을 내나니, 

(이 사람은 생사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에 들어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삿된 견해의 마음으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살피는 까닭에 다시 여러 삿된 견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如是愚癡人(여시우치인) 當觀因緣(당관인연) 是名爲善對治法(시명위선대치법)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인연법을 관찰해야 하며, 이것이 좋은 대치실단이라 할 수 있으나,

 

若行瞋恚婬欲人(약행진에음욕인) 欲求樂欲惱他(욕구락욕뇌타) 於此人中(어차인중)

非善非對治法(비선비대치법)

만일 성을 내고 탐욕을 행하는 사람이 쾌락을 구하거나 남을 괴롭히려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아서 대치방법이 아니니라.

(만약 성내고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탐욕에 물든 사람이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여 다른 중생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살피도록 하는 것은이러한 사람들에게 인연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것도 아니거니와 대치실단(對治悉檀)도 아닌 것입니다.)

 

不淨慈心思惟(부정자심사유) 是二人中(시이인중) 是善是對治法(시선시대치법)

부정관이나 자심으로 사유함은 이런 두 부류의 사람에게는 좋은 대치의 방법이 되나니, 

(부정관(不淨觀)과 중생을 한없이 사랑하여 항상 걱정근심 벗어난 편안함으로 즐거운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탬이 되고자 생각하는=大慈의 마음을 지닌 두 사람에게는 훌륭한 대치실단이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是二觀能拔瞋恚(시이관능구진에) 貪欲毒刺故(탐욕독자고)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관찰법은 능히 성냄과 탐욕의 가시를 뽑아 버리기 때문이니라.

 

復次(부차) 著常顚倒衆生(착상전도중생) 不知諸法相似相續有(불지제법상사상속유)

또한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모든 법이 비슷하게 상속함을 알지 못하니, 

(또한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에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로 항상 뒤바뀐 생각의 중생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연의 화합에 의해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에 의해 일어나는 유=를 실상이라고 여기므로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무상(無常)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대치실단(對治悉檀)의 참된 가르침(法)인 것이나 제일의(第一義)는 아닙니다.)

 

如是人觀無常(여시인관무상) 是對治悉檀(시대치실단) 非第一義(비제일의)

이러한 사람이 무상을 관한다면 이는 대치실단은 될지언정 제일의실단은 되지 않느니라. 

 

何以故(하이고) 一切諸法自性空故(일체제법자성공고) 

왜냐하면 일제 체법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을 비었다.”라고 여기는 것이 피피공(皮皮空)으로 공연(空然)”하다는 삿된 견해에 물들어 버리게 됩니다.)

 

*자성(自性)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 일체이며,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며 즉,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그 법(法)의 자성이라고 하며, 간단히 성(性)이라고도 하며 또한 다른 말로 체(體) 또는 실체(實體)라고도 하며 또한 체성(體性)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자성은 해당 법을 다른 법과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흔히 자상(自相)이라고도 하며 또한 체상(體相)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자상(自相) 또는 성(性)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 법(法)이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다른 법(法)에 대해 일으키는 본래의 작용(作用), 즉 본질적 작용을 업(業) 또는 용(用)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업(業)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작용'의 뜻이 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의 제1권 그리고 호법 등의 '성유식론'의 제5권부터 제7권까지에서는 여러 마음작용(심소법)들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고 있는데, 각각의 마음작용(심소법)을 정의할 때 해당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을 밝힘으로써 해당 마음작용을 정의하고 있다.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 또는 용(用)은 동전의 앞면 · 뒷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성질[性]을 다른 말로는 성능(性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성은 성질 즉 본질적 성질을 뜻하고 능은 기능 또는 능력 즉 본질적 기능 또는 본질적 능력을 뜻한다. 한편, 성능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물건이 지닌 성질과 능력 또는 기능'이다.
한편,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합하여 불교 용어로 체용(體用)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를 확대하여, 즉 체(體)와 용(用)을 개별 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체(體)를 일체의 만법의 본성으로, 용(用)을 본성이 일체의 만법 즉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체상(體相)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즉, 체(體)를 본질로, 상(相)을 본질이 구체화된 모습 즉 차별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에 대하여, 공상(共相)은 여러 가지 법(法: 개별 존재)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특성이다. 예를 들어, 가을의 산이 빨갛고 불이 빨갛고 옷이 빨갛다고 할 때의 공통의 빨강을 가리켜 공상(共相)이라고 하고, 파랑 혹은 노랑 등과 구별되는 빨강 그 자체를 가리켜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자상(自相)에는 처자상(處自相)과 사자상(事自相)의 구별이 있다.

◎各各爲人悉檀

위인실단(爲人悉檀)= 법을 듣는 상대편의 성질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당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성품과 욕망이 각각인 인간이 수없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불같이 성급한 사람도 있고, 오뉴월 엿가락 느러지듯 느린 사람도 있으며, 재산이 많은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분간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는 말을 하여, 결국은 부처님이라는 일불승도(一佛乘道)에 들게 하는 것이 위인실단입니다.

 

云何各各爲人悉檀者(운하각각위인실단자)?

어떤 것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하는가

 

觀人心行而爲說法(관인심행이위설법) 於一事中(어일사중) 或聽或不聽(혹청혹불청)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心行을 관찰해서 설법해 주는 것이니 가지 일을 놓고도 듣는 이가 있고 듣지 않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의 움직임(心行)에 대해 살펴보도록 참된 가르침()을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한 가지 일을 놓고도 누구는 알아 듣고 누구는 알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행(心行)은 오개(五蓋)에 덮여 제멋대로 날뛰는 거친 마음()과 오욕(五慾)에 물들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如經中所說(여경중소설) 雜報業故(잡보업고) 雜生世閒(잡생세간) 得雜觸雜受(득잡촉잡수)

경에서 '잡된 報業=선업과 불선업이 뒤섞인 과보 때문에 선업과 불선업이 뒤섞인 잡된 세간에 태어나서 잡된 촉감을 받고 잡된 느낌을 받는다” 하셨으며, 

 

雜觸(잡촉)=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육정(六情)과 육진(六塵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

雜受(잡수)=雜觸을 통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을 만나게 되는 것

 

更有破群那經中說(갱유파군나경중설) 無人得觸 無人得受(무인득촉무인득수)

파군나경에서는 '촉감을 받을 사람이 없고, 느낌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군나경(破群那經 Moliya Phagguna sutra)에서 중생에게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에 대해, “사람의 육정(六情)과 육진(六塵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고사람의 고수(苦受낙수(樂受희수(喜受우수(憂受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의 그 어디에도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군사경(破群邪經, Phālgunasūtra)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


問曰(문왈) 此二經云何通(차이경운하통)?

묻나니, 이 두 경=반야바라밀경과 파군나경은 어떻게 통하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以有人疑後世(이유인의후세) 不信罪福 作不善行(불신죄복 작불선행)

墮斷滅見(타단멸견)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후세를 의심하여 죄와 복의 과보를 믿지 않고, 선행을 하지 않는 단멸견에 떨어지나니, 

(어떤 사람들은 후세(後世)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의심을 내어 죄와 복의 과보도 믿지 않고선업(善業)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 않게 되어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지게 되거니와,)

 

단멸견(斷滅見)=ucchedadṛṣṭi.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선악업의 과보도 없다는 견해이다. 세상과 나는 죽으면 단절되어 존족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단견(斷見)이라고도 한다.

유신견(有身見)을 바탕으로 한 사견이 변집견(邊執見) 또는 변견(邊見)=극단적인 견해이며, 이에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있다. 

단견(斷見)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단견(斷見)은 윤회가 존재하며 무위법인 열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단견(斷見)은 단멸된다는 극단 또는 단멸된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단변(斷邊)이라고도 한다.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5취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견해가 단견이다. 즉 마치 깨어진 병에 다시는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작자(作者) · 장부(丈夫) 등이 있어 그들은 죽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업의 상속과 윤회를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견해를 말한다.

 

欲斷彼疑 捨彼惡行(욕단파의 사피악행) 欲拔彼斷見(욕발피단견)

是故說雜生世閒 雜觸雜受(시고설잡생세간잡촉잡수)

그들의 의혹을 끊어주고, 그들의 나쁜 행을 버리게 하며, 그들의 단견=단멸견을 뽑아 주기 위해서 '잡되게 세간에 태어나서 잡되게 촉감을 받고, 잡되게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들의 의심을 끊어내고 그들의 악행을 버리게 하며 그들의 단멸견(斷滅見)을 뽑아내고자 하는 까닭에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과보 때문에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세간에 나게 되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육정(六情)과 육진(六塵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을 통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고수(苦受낙수(樂受희수(喜受우수(憂受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是破群那計有我有神(시파군나계유아유신) 墮計常中(타계상중)

이 파군나는 '나'가 있고 '신'이 있다고 계교하여 항상함을 헤아리는 견해=상견 가운데 떨어졌으니, 

(이렇게 파군나(破群那 Moliya Phagguna)비구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라는 모습의 그 어딘가에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고 '정신(精神)'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그러한 헤아림으로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神)=puruṣa. 이 역시 ātman과 함께 상주불변한 나를 가리킨다.

*견해[計常]= śāśvatadṛṣṭi. 곧 앞의 단멸견과 반대되는 상견(常見)을 말한다.

*상견(常見)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상견(常見)에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상견(常見)은 유위법을 무위법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이다.
상견(常見)은 영원하다는 극단 또는 영원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상변(常邊)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아트만[我, 나, 자아, 영혼]과 대자재천[自在]이 편재[遍]하고 영원불멸[常]한 존재라는 힌두교의 교의가 상견에 해당한다. 여기서 대자재천(大自在天) 또는 자재천(自在天)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말하는데, 힌두교의 3주신 교의에 따르면 시바신은 우주의 본원적 실재인 브라만의 한 측면이다. 즉, 불교에서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브라만이 실법(實法) 즉 실재하는 존재 또는 실체가 아니라 5온에 근거하여 성립된 관념 즉 가법(假法)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적 존재들을 설정하지 않아도 해탈 또는 완전한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보며, 나아가 이러한 가설적 존재들에 의존하는 것이 도리어 해탈 또는 완전한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이에 비해 힌두교에서는 영원불멸한 존재인 브라만에서 현상(불교 용어로는, 유위법 즉 5온 즉 만법 즉 우주)이 전개된다고 본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 즉 사마디 상태에서만 진리를 알게 된다고, 즉 즈냐나[智, 지혜]가 획득된다고 본다. 이와 같이, 불교와 힌두교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상이하며, 각각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破群那問佛言(파군나문불언) 大德(대덕) 誰受(수수)?

파군나(Nāgasena)가 부처님께 '대덕(āyuṣmat)이시여, 누가 (과보를) 받게 뇌는 것입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대덕(大德)= āyuṣmat. 구수(具壽)ㆍ명자(命者)ㆍ혜명(慧命)ㆍ정명(淨命)ㆍ장로(長老)ㆍ장자(長者)ㆍ존자(尊者)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若佛說某甲某甲受(약불설모갑모갑수) 便墮計常中(편타계상중)

만일 부처님께서 '아무개=某甲과, 아무개가 받느니라'고 (정해진 것처럼) 말씀하셨다면 곧 계상=상견에 떨어지게 되며, 

 

其人我見倍復牢固(기인아견배부뇌고) 不可移轉(불가이전)

그 사람은 아견이 더욱 배가되고 굳어져서 바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니, 

(그 사람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라는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 삿된 견해가 배가 되고 더욱 단단하게 되어서, 뒤바뀌지 않게 되나니,)

 

아견(我見)=ātma-dṛṣṭi. 상주불변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을 아견(我見, ahamkara)과 아소견(我所見, mamamkara)으로 나눈다.
아견(我見)이란 ‘나’, 자아(自我)라고 하는 견해로서, 나에 변하지 않는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나의 몸이라 하는 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四大), 즉 산소나 수소, 탄소, 질소, 그러한 각 원소(元素)가 합해서 겨우 몸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실은 아무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인연법(因緣法) 따라서 잠시 이렇게 한 몸뚱이가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또한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감각작용[受], 상상하는 작용[想], 의욕하는 작용[行], 분별시비하는 의식활동[識], 이러한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됐다. 불교는 이런 면에서 지극히 분석적이고도 과학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自我)에 변하지 않고 항상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이것이 아견이다. 아트만(atman)이 있다는 견해이다.
아소견(我所見)이란 ‘내 것’, ‘내 소유’라는 견해이다.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서 가짜 존재로서 소유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로서, 자신(自身)에게 딸린 모든 물건은 원래 일정한 소유주(所有主)가 없는 것이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일 뿐인데, 정말 나에게 소속된 자기의 소유물,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치우친 생각이다. 이러한 현상은 ‘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에 따라 '내 것', ‘내 소유'라는 생각이 따르게 된다. 내 옷 또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동생, 또는 내 물건…… . ‘나’라는 존재가 실은,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줄 모르고서 나한테 따르는 모든 존재나 사람, 사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이다.-아미산

 

以是故不說有受者 觸者(이시고불성유수자촉자)

이러한 까닭에 받는 이와 느끼는 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러한 까딹에 수온(受蘊)과 육정(六情)과 육진(六塵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의 그 어딘가에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 촉감(觸感)을 뜻하는 것으로 색온(色蘊)으로 접하게 되는 첫 번째 느낌을 뜻하는 것입니다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색온(色蘊)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하고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18()의 맞닿음으로 인하여 첫 번째 맛보게 되는 느낌이 바로 색온(色蘊)이라고 하셨습니다이 촉감(觸感)이 일체 심수법(心數法)의 바탕이 되어서는 세 가지 온()이 생겨나니이른바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입니다.-마하반야빌다경

 

如是等相(여시등상) 是名各各爲人悉檀(시명각각위인실단)

이와 같은 모습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는 실상(實相)을 각각위인실단(各各為人悉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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