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治悉檀(대치실단)
대치실단(對治悉檀)=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미혹을 대치하고 이익을 주는 것, 병(번뇌)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치유(악을 끊게)하는 단악실단(斷惡悉檀)을 말한다. 즉 중생이 지닌 번뇌와 악업(惡業)을 살펴보고 깨우치게 하여 이를 없애 반야바라밀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참되고 바른 가르침.
對治悉檀者(대치실단자) 有法對治則有(유법대치즉유) 實性則無(실성즉무)
대치실단이라 함은 존재하는 것( bhūtasvabhāva)은 대치(pratipakṣa)할 때에는 곧 있는 것이거니와 실제의 성품은 없는 것으로,
(대치실단이란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모든 현상과 작용(有法)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으로, 즉 일체법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과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입니다.)
譬如重 熱 膩 酢 鹹藥草飮食等(비여중 열 니 초 함 약초음식등)
膩 기름 니, 기름질 니, 酢 초 초, 초 조, 잔돌릴 작, 鹹 짤 함, 다 함
於風病中名爲藥(어풍병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비유하면 마치 重=매우 熱=뜨겁고, 膩=기름지고, 酢=시고, 鹹=짠맛이 나는 약초나 음식 등이 풍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풍병(風病)=일반적으로 중풍(中風)으로 알려져 있으며, 뇌졸중 즉 뇌경색과 뇌출혈과 같은 질환에 이환됐을 때 풍(風) 맞았다고 하기도 하며 중풍에 걸렸다도 합니다.
손사막의 천금방(千金方)에서는 풍병(風病)을 4가지로 분류해서,
첫째 편고(偏枯)는 반신불수를 말하며,
둘째 풍비(風痱)는 몸은 아프지 않으나 사지를 쓰지 못하는 것,
셋째 풍의(風懿)는 갑자기 의식이 없는 것,
넷째 풍비(風痹)는 일반적인 비증의 류로 풍병(風病)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풍병 중 3가지(편고, 풍비, 풍의)는 중풍(中風)에 해당하고, 풍비(風痹)는 중풍이 아닌 관절질환을 이르는 것입니다.- KMD
若輕 冷 甘 苦 澀藥草飮食等(약경 냉 감 고 삽 약초음식등) 澀 떫을 삽, 澁과 同字
於熱病名爲藥(어열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가령 輕=약간 冷=차고, 甘=달고, 苦=쓰고, 澀=떫은 약초나 음식 등은 열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熱病(열병)=열이 몹시 오르고 심하게 앓는 병
若輕 辛 苦 澀 熱藥草飮食等(약경 신 고 삽 열약초여음식등)
於冷病中名爲藥(어냉병중명위약) 於餘病非藥(어여병비약)
약간 辛=맵고 苦=쓰고 澀= 떫고 熱=더운 약초와 음식은 냉병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냉병(冷病)= 냉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온도에서 신체의 특정 부위만 차가움을 느껴 곤란한 상태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전신이 차가움을 느끼는 것. 냉병(冷病)은 여성들에게 흔한 것으로 몸의 일부에 혈액순환이 나빠져 피가 잘 돌지 못하게 되는 관계로 찬감을 느끼게 되는 냉병은 손발이 차고 아랫배가 싸늘하면서 아픈 것이 주 증상이다. 냉(冷)이 많이 흐르고 월경이 고르지 못하며 소화가 잘 안 된다. 또한 냉병은 불임증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佛法中治心病亦如是(불법중치심병역여시) 不淨觀思惟(부정관사유)
불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그와 같아서 부정관으로 사유하는 것은
心病(심병)=마음속의 근심, 고민, 울화병.
①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부정관(不淨觀)= 오정심관의 첫 번째 관으로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자세하게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계기로 삼는 수행법이다. 밖으로 타인의 시체를 관찰하는 방법 이외에도, 안으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 즉 똥·오줌·고름·가래 등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다스리는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주로 ‘부정한 것들을 따라가며 보기’(不淨隨觀, asubhānupassī) 또는 ‘부정한 것들의 모습을 떠올려 생각하기’(不淨想, asubhasaññā) 등의 개념으로 주로 등장한다.
於貪欲病中(어탐욕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탐욕의 병에는 좋은 대치법이 되지만
(불법(佛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릴 때 역시 이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을 사유(思惟)하게 되면 탐욕(貪慾)의 병을 다스릴 수 있게 됨으로 훌륭한 對治法=처방(處方)이라 할 수 있으나, 瞋恚=분노조절장애라는 병을 앓는 이에게는 훌륭하다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른 처방(處方)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於瞋恚病中(어진에병중) 不名爲善非對治法(불명위선비대치법)
성냄의 병에는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대치법=치료법이 될수 없으니,
所以者何(소이자하) 觀身過失 名不淨觀(관신과실 명부정관)
그 이유는 몸의 허물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인데
若瞋恚人觀過失者(약진에인관과실자) 則增益瞋恚火故(즉증익진에화고)
만약 성내는 사람에게 몸의 허물을 관찰하게 하면 성냄의 불길이 더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思惟慈心 於瞋恚病中(사유자심 어진에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慈心=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유하는 것은 성냄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치료방법이 되지만
於貪欲病中 不名爲善(어탐욕병중 불명위선) 非對治法(비대치법)
탐욕의 병에는 좋다고 할 수 없고, 좋은 대치법=바른 처방이 되지 않는다.
所以者何(소이자하) 慈心於衆生中(자심어중생중) 求好事觀功德(구호사관공덕)
왜냐하면 慈心=자심은 중생에게서 좋은 일을 구하고 공덕을 관찰하는 것이나,
(중생을 한없이 사랑하여 항상 걱정근심 벗어난 편안함으로 즐거운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탬이 되고자 생각하는 마음=慈心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은 훌륭한 일로 그 공덕을 살펴보게 한 것이며)
②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자비관(慈悲觀)은 자신의 마음에 자비로움을 일으켜 가득 채워가는 수행법이다. 자비에서 자(慈, mettā)는 자애의 마음으로서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고 비(悲, karuṇā)는 연민의 마음으로서 슬픔을 나누어 가지려는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자비관은 모든 생명체들이 괴로움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기원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권장되는 수행법이다. 줄여서 자관(慈觀) 또는 자애관(慈愛觀)이라고도 한다.
若貪欲人(약탐욕인) 求好事觀功德者(구호사관공덕자) 則增益貪欲故(즉증익탐욕고)
만약 탐욕스런 이가 중생에게 좋은 일을 구하는 공덕을 관찰하게 하면 탐욕이 더욱 늘어나기 때문이며,
因緣觀法 於愚癡病中(인연관법 어우치병중) 名爲善對治法(명위선대치법)
인연관법은 (有爲의 法을 살피게 하여) 어리석은 병에는 좋은 대치법이 되지만
③오정심관(five insight-meditation of calming the mind , 五停心觀)의 인연관(因緣觀)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다. 인연이란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aṭicca)’을 아우르는 개념이지만 초기불전에 따르면, ‘이것을 조건으로 발생한다’는 ‘연기’의 설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초기불전인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 제28경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구절에 의하면, 연기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연기’는 번뇌 따위가 무엇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러한 문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명상법이라고 볼 수 있다.
於貪欲瞋恚病中(어탐욕진에병중) 不名爲善非對治法(불명위선비대치법)
탐욕과 성냄의 병에는 좋지 못하며 또한 대치법(바른 처방)이 되지 못한다.
所以者何(소이자하) 先邪觀故生邪見(선사관고생사견) 邪見卽是愚癡(사견즉시우치)
왜냐하면 우선 삿된 견해로 삿되게 관찰했기 때문에 삿된 소견이 생기는 것이니, 삿된 견해가 곧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니라.
問曰(문왈) 如佛法中說(여불법중설) 十二因緣甚深(십이인연심심)
묻나니, 불법 안에서 12인연을 심히 깊다 하셨으며,
(불법(佛法)에 보면 12인연(因緣)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하셨는데,)
12지연기(dvadasanga pratityasamutpada , 十二支緣起,12인연, 十二因緣, 12연기설, 十二緣起說=인연에 따른 생성'으로 괴로움의 원인과 태어나고 늙고 죽음을 겪으면서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사건들의 흐름이다.
사건들은 연속해서 일어나 한 무리의 사건은 또다른 무리의 사건을 낳는 사건의 연속을 12개의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로 표현한다.
① 무명(無明:산스크리트로는 avidyā, 팔리어로는 avijjā):특히 4성제, 인간의 본질, 윤회, 열반 등에 대한 무지,
② 행(行 saṃskāra/sankhāra):실재에 대한 잘못된 사고의 형성,
③ 식(識 vijñana/viññāṇa):행이 가져오는 인식의 구조,
④ 명색(名色 nāma-rūpa):식의 대상인 이름과 형상, 즉 자아 정체성이 이루어지는 근본원리,
⑤ 육입(六入 sadā-yatana):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눈·귀·코·혀·몸의 5가지 감각기관 및 그 대상들과, 감각적 인상들을 통합하는 기관으로서의 마음,
⑥ 촉(觸 sparśa/phassa):존재하는 대상과 감각기관 사이의 부딪힘,
⑦ 수(受 vedanā):촉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작용,
⑧ 애(愛 tṛṣṇā/taṇhā):즐거운 감각작용에 대한 목마름,
⑨ 취(取 upādāna):성적 대상 등에 대한 애의 심화에 의해 나타나는 집착,
⑩ 유(有 bhava):취에 의해 발동되는 생성과정,
⑪ 생(生 jāti):유의 결과로서 개인의 태어남,
⑫ 노사(老死 jāra-marana):생의 결과로서 늙어서 죽는 것 등이다.
순서대로 관찰하는 順觀緣起 anuloma이나 반대로 관찰하는 逆觀緣起 pratiloma의 관법이 있다.
如說 佛告阿難(여설불고아난) 是因緣法甚深(시인연법심심) 難見難解(난견난해)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인연의 법은 심히 깊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難覺難觀(난각난관) 細心巧慧人乃能解(세심교혜인내능해)
깨닫기 어렵고 관찰하기 어려우니, 마음이 섬세하고 지혜가 공교로운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愚癡人於淺近法(우치인어천근법) 猶尚難解(유상난해) 何況甚深因緣(하황심심인연)?
어리석은 사람은 얕고 가까운 법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심히 깊은 인연이겠느냐'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나니, “이렇게 인연의 현상과 작용(法)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에 대해, 바른 견해 지니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오개(五蓋)에 덮여 제멋대로 날뛰는 거친 마음(覺) 물리치기 어렵고, 오욕(五慾)에 물들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觀) 다스리기 어려우며, 청정(淸淨)함이라는 섬세한 마음에 정련된 지혜를 지닌 사람이라야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가 얕아 참된 가르침(法)의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지라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늘, 하물며 인연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불도(佛道)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랴!
그런데 어찌하여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마땅히 인연의 현상과 작용(法)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今云何言(금운하언) 愚癡人應觀因緣法(우치인은관인연법)?
이제 와서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인연을 관찰하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愚癡人者(우치인자) 非謂如牛羊等愚癡(비위여우양등우치)
답하나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서 소나 양같이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라,
是人欲求實道(시인욕구실도) 邪心觀故(사심관고) 生種種邪見(생종종사견)
이 사람은 진실한 도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삿된 마음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갖가지 삿된 소견을 내나니,
(이 사람은 생사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에 들어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삿된 견해의 마음으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살피는 까닭에 다시 여러 삿된 견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如是愚癡人(여시우치인) 當觀因緣(당관인연) 是名爲善對治法(시명위선대치법)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인연법을 관찰해야 하며, 이것이 좋은 대치실단이라 할 수 있으나,
若行瞋恚婬欲人(약행진에음욕인) 欲求樂欲惱他(욕구락욕뇌타) 於此人中(어차인중)
非善非對治法(비선비대치법)
만일 성을 내고 탐욕을 행하는 사람이 쾌락을 구하거나 남을 괴롭히려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아서 대치방법이 아니니라.
(만약 성내고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탐욕에 물든 사람이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여 다른 중생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살피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인연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것도 아니거니와 대치실단(對治悉檀)도 아닌 것입니다.)
不淨慈心思惟(부정자심사유) 是二人中(시이인중) 是善是對治法(시선시대치법)
부정관이나 자심으로 사유함은 이런 두 부류의 사람에게는 좋은 대치의 방법이 되나니,
(부정관(不淨觀)과 중생을 한없이 사랑하여 항상 걱정근심 벗어난 편안함으로 즐거운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탬이 되고자 생각하는=大慈의 마음을 지닌 두 사람에게는 훌륭한 대치실단이 되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 是二觀能拔瞋恚(시이관능구진에) 貪欲毒刺故(탐욕독자고)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관찰법은 능히 성냄과 탐욕의 가시를 뽑아 버리기 때문이니라.
復次(부차) 著常顚倒衆生(착상전도중생) 不知諸法相似相續有(불지제법상사상속유)
또한 영원함=常에 집착하는 전도된 중생은 모든 법이 비슷하게 상속함을 알지 못하니,
(또한,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로 항상 뒤바뀐 생각의 중생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연의 화합에 의해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에 의해 일어나는 “유=有爲”를 실상이라고 여기므로,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무상(無常)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대치실단(對治悉檀)의 참된 가르침(法)인 것이나 제일의(第一義)는 아닙니다.)
如是人觀無常(여시인관무상) 是對治悉檀(시대치실단) 非第一義(비제일의)
이러한 사람이 무상을 관한다면 이는 대치실단은 될지언정 제일의실단은 되지 않느니라.
何以故(하이고) 一切諸法自性空故(일체제법자성공고)
왜냐하면 일제 체법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공(空)”을 “비었다.”라고 여기는 것이 피피공(皮皮空)으로 “공연(空然)”하다는 삿된 견해에 물들어 버리게 됩니다.)
*자성(自性)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 일체이며,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며 즉,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그 법(法)의 자성이라고 하며, 간단히 성(性)이라고도 하며 또한 다른 말로 체(體) 또는 실체(實體)라고도 하며 또한 체성(體性)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자성은 해당 법을 다른 법과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흔히 자상(自相)이라고도 하며 또한 체상(體相)이라고도 한다.
어떤 법(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자상(自相) 또는 성(性)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그 법(法)이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다른 법(法)에 대해 일으키는 본래의 작용(作用), 즉 본질적 작용을 업(業) 또는 용(用)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업(業)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작용'의 뜻이 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의 제1권 그리고 호법 등의 '성유식론'의 제5권부터 제7권까지에서는 여러 마음작용(심소법)들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고 있는데, 각각의 마음작용(심소법)을 정의할 때 해당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을 밝힘으로써 해당 마음작용을 정의하고 있다. 본질적 성질인 성(性)과 본질적 작용인 업(業) 또는 용(用)은 동전의 앞면 · 뒷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성질[性]을 다른 말로는 성능(性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성은 성질 즉 본질적 성질을 뜻하고 능은 기능 또는 능력 즉 본질적 기능 또는 본질적 능력을 뜻한다. 한편, 성능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물건이 지닌 성질과 능력 또는 기능'이다.
한편,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합하여 불교 용어로 체용(體用)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를 확대하여, 즉 체(體)와 용(用)을 개별 법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작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체(體)를 일체의 만법의 본성으로, 용(用)을 본성이 일체의 만법 즉 차별적 현상을 구체화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체상(體相)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즉, 체(體)를 본질로, 상(相)을 본질이 구체화된 모습 즉 차별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에 대하여, 공상(共相)은 여러 가지 법(法: 개별 존재)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특성이다. 예를 들어, 가을의 산이 빨갛고 불이 빨갛고 옷이 빨갛다고 할 때의 공통의 빨강을 가리켜 공상(共相)이라고 하고, 파랑 혹은 노랑 등과 구별되는 빨강 그 자체를 가리켜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자상(自相)에는 처자상(處自相)과 사자상(事自相)의 구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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