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各各爲人悉檀
위인실단(爲人悉檀)= 법을 듣는 상대편의 성질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당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성품과 욕망이 각각인 인간이 수없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불같이 성급한 사람도 있고, 오뉴월 엿가락 느러지듯 느린 사람도 있으며, 재산이 많은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분간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는 말을 하여, 결국은 부처님이라는 일불승도(一佛乘道)에 들게 하는 것이 위인실단입니다.
云何各各爲人悉檀者(운하각각위인실단자)?
어떤 것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하는가?
觀人心行而爲說法(관인심행이위설법) 於一事中(어일사중) 或聽或不聽(혹청혹불청)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心行을 관찰해서 설법해 주는 것이니, 한 가지 일을 놓고도 듣는 이가 있고 듣지 않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의 움직임(心行)에 대해 살펴보도록 참된 가르침(法)을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한 가지 일을 놓고도 누구는 알아 듣고 누구는 알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행(心行)은 오개(五蓋)에 덮여 제멋대로 날뛰는 거친 마음(覺)과 오욕(五慾)에 물들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란한 마음(觀)을 뜻하는 것입니다.
如經中所說(여경중소설) 雜報業故(잡보업고) 雜生世閒(잡생세간) 得雜觸雜受(득잡촉잡수)
경에서 '잡된 報業=선업과 불선업이 뒤섞인 과보 때문에 선업과 불선업이 뒤섞인 잡된 세간에 태어나서 잡된 촉감을 받고 잡된 느낌을 받는다” 하셨으며,
雜觸(잡촉)=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촉(觸)’
雜受(잡수)=雜觸을 통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을 만나게 되는 것
更有破群那經中說(갱유파군나경중설) 無人得觸 無人得受(무인득촉무인득수)
파군나경에서는 '촉감을 받을 사람이 없고, 느낌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군나경(破群那經 Moliya Phagguna sutra)에서 중생에게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에 대해, “사람의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촉(觸)’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의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어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군사경(破群邪經, Phālgunasūtra)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
問曰(문왈) 此二經云何通(차이경운하통)?
묻나니, 이 두 경=반야바라밀경과 파군나경은 어떻게 통하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以有人疑後世(이유인의후세) 不信罪福 作不善行(불신죄복 작불선행)
墮斷滅見(타단멸견)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후세를 의심하여 죄와 복의 과보를 믿지 않고, 선행을 하지 않는 단멸견에 떨어지나니,
(어떤 사람들은 후세(後世)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의심을 내어 죄와 복의 과보도 믿지 않고, 선업(善業)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 않게 되어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지게 되거니와,)
단멸견(斷滅見)=ucchedadṛṣṭi.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고 선악업의 과보도 없다는 견해이다. 세상과 나는 죽으면 단절되어 존족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단견(斷見)이라고도 한다.
유신견(有身見)을 바탕으로 한 사견이 변집견(邊執見) 또는 변견(邊見)=극단적인 견해이며, 이에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있다.
단견(斷見)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단견(斷見)은 윤회가 존재하며 무위법인 열반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단견(斷見)은 단멸된다는 극단 또는 단멸된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단변(斷邊)이라고도 한다.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5취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견해가 단견이다. 즉 마치 깨어진 병에 다시는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작자(作者) · 장부(丈夫) 등이 있어 그들은 죽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업의 상속과 윤회를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견해를 말한다.
欲斷彼疑 捨彼惡行(욕단파의 사피악행) 欲拔彼斷見(욕발피단견)
是故說雜生世閒 雜觸雜受(시고설잡생세간잡촉잡수)
그들의 의혹을 끊어주고, 그들의 나쁜 행을 버리게 하며, 그들의 단견=단멸견을 뽑아 주기 위해서 '잡되게 세간에 태어나서 잡되게 촉감을 받고, 잡되게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그들의 의심을 끊어내고 그들의 악행을 버리게 하며 그들의 단멸견(斷滅見)을 뽑아내고자 하는 까닭에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과보 때문에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세간에 나게 되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촉(觸)’을 통해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뒤섞인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라는 오수중(五受眾)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是破群那計有我有神(시파군나계유아유신) 墮計常中(타계상중)
이 파군나는 '나'가 있고 '신'이 있다고 계교하여 항상함을 헤아리는 견해=상견 가운데 떨어졌으니,
(이렇게 파군나(破群那 Moliya Phagguna)비구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의 그 어딘가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고 '정신(精神)'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그러한 헤아림으로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神)=puruṣa. 이 역시 ātman과 함께 상주불변한 나를 가리킨다.
*견해[計常]= śāśvatadṛṣṭi. 곧 앞의 단멸견과 반대되는 상견(常見)을 말한다.
*상견(常見)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상견(常見)에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상견(常見)은 유위법을 무위법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이다.
상견(常見)은 영원하다는 극단 또는 영원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라는 뜻에서 상변(常邊)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아트만[我, 나, 자아, 영혼]과 대자재천[自在]이 편재[遍]하고 영원불멸[常]한 존재라는 힌두교의 교의가 상견에 해당한다. 여기서 대자재천(大自在天) 또는 자재천(自在天)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말하는데, 힌두교의 3주신 교의에 따르면 시바신은 우주의 본원적 실재인 브라만의 한 측면이다. 즉, 불교에서는 힌두교의 아트만과 브라만이 실법(實法) 즉 실재하는 존재 또는 실체가 아니라 5온에 근거하여 성립된 관념 즉 가법(假法)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적 존재들을 설정하지 않아도 해탈 또는 완전한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보며, 나아가 이러한 가설적 존재들에 의존하는 것이 도리어 해탈 또는 완전한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이에 비해 힌두교에서는 영원불멸한 존재인 브라만에서 현상(불교 용어로는, 유위법 즉 5온 즉 만법 즉 우주)이 전개된다고 본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 즉 사마디 상태에서만 진리를 알게 된다고, 즉 즈냐나[智, 지혜]가 획득된다고 본다. 이와 같이, 불교와 힌두교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상이하며, 각각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破群那問佛言(파군나문불언) 大德(대덕) 誰受(수수)?
파군나(Nāgasena)가 부처님께 '대덕(āyuṣmat)이시여, 누가 (과보를) 받게 뇌는 것입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대덕(大德)= āyuṣmat. 구수(具壽)ㆍ명자(命者)ㆍ혜명(慧命)ㆍ정명(淨命)ㆍ장로(長老)ㆍ장자(長者)ㆍ존자(尊者)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若佛說某甲某甲受(약불설모갑모갑수) 便墮計常中(편타계상중)
만일 부처님께서 '아무개=某甲과, 아무개가 받느니라'고 (정해진 것처럼) 말씀하셨다면 곧 계상=상견에 떨어지게 되며,
其人我見倍復牢固(기인아견배부뇌고) 不可移轉(불가이전)
그 사람은 아견이 더욱 배가되고 굳어져서 바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니,
(그 사람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 삿된 견해가 배가 되고 더욱 단단하게 되어서, 뒤바뀌지 않게 되나니,)
아견(我見)=ātma-dṛṣṭi. 상주불변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을 아견(我見, ahamkara)과 아소견(我所見, mamamkara)으로 나눈다.
아견(我見)이란 ‘나’, 자아(自我)라고 하는 견해로서, 나에 변하지 않는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나의 몸이라 하는 것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사대(四大), 즉 산소나 수소, 탄소, 질소, 그러한 각 원소(元素)가 합해서 겨우 몸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실은 아무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인연법(因緣法) 따라서 잠시 이렇게 한 몸뚱이가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또한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감각작용[受], 상상하는 작용[想], 의욕하는 작용[行], 분별시비하는 의식활동[識], 이러한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됐다. 불교는 이런 면에서 지극히 분석적이고도 과학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아(自我)에 변하지 않고 항상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 이것이 아견이다. 아트만(atman)이 있다는 견해이다.
아소견(我所見)이란 ‘내 것’, ‘내 소유’라는 견해이다.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서 가짜 존재로서 소유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로서, 자신(自身)에게 딸린 모든 물건은 원래 일정한 소유주(所有主)가 없는 것이다.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일 뿐인데, 정말 나에게 소속된 자기의 소유물,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치우친 생각이다. 이러한 현상은 ‘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에 따라 '내 것', ‘내 소유'라는 생각이 따르게 된다. 내 옷 또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동생, 또는 내 물건…… . ‘나’라는 존재가 실은,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줄 모르고서 나한테 따르는 모든 존재나 사람, 사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이다.-아미산
以是故不說有受者 觸者(이시고불성유수자촉자)
이러한 까닭에 받는 이와 느끼는 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러한 까딹에 수온(受蘊)과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진 ‘촉(觸)’의 그 어딘가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촉(觸)”은 촉감(觸感)을 뜻하는 것으로 색온(色蘊)으로 접하게 되는 첫 번째 느낌을 뜻하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색온(色蘊)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18계(界)의 맞닿음으로 인하여 첫 번째 맛보게 되는 느낌이 바로 색온(色蘊)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촉감(觸感)이 일체 심수법(心數法)의 바탕이 되어서는 세 가지 온(蘊)이 생겨나니, 이른바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입니다.-마하반야빌다경
如是等相(여시등상) 是名各各爲人悉檀(시명각각위인실단)
이와 같은 모습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는 실상(實相)을 “각각위인실단(各各為人悉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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