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을 풀이함 4
卽時衆中聽者心生懈怠,是故佛說:“是一切法皆是助道因緣。”若於是法中邪行謬錯,是名不實;若直行不謬,卽是助道法。是法爲助道故,不爲果。是布施等是有爲法,道亦有爲,同相故相益。道果者,所謂諸法實無出生,一相無相,寂滅涅槃;是故於涅槃不能有益。如時雨能益草木,不益虛空。是故菩薩知是助道法及道果,從初發心來所作善法布施等,知皆是畢竟空,如夢乃至如化。
바로 그 때에 대중 속에서 듣는 이들이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체법은 모두가 도를 돕는 인연인 조도인연[助道因緣)이니라”고 하셨으니,
만약 이 법에 대하여 삿되게 행하거나 그릇됨이 있으면, 이를 진실하지 않은 불실(不實)이라 하며,
만약 곧은 행으로 잘못이 없다면, 그것이 곧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인 것이니,
이 법은 도를 돕기 위한 것이요 과위(果)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보시 등은 곧 유위법(有爲法)이요, 도(道) 또한 유위이니, 동일한 동상(同相)이기 때문에 도와 과위의 도과(道果)가 서로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제법은 실로 벗어나는 출(出)도 나는 생(生)도 없으며, 하나의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라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열반(寂滅涅槃)인 것이며,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는 이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마치 때를 맞추어 내리는 비는 풀과 나무를 이롭게 하나, 허공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도를 돕는 조도법과 도과(道果)를 알면서 처음 초발심한 때부터 착한 선법으로써 짓는 보시 등은 모두가 필경공이라서 마치 꿈과 같은 여몽(如夢)이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여화(如化)라고 아는 것이다.
問曰:若菩薩知諸法實相,何用行布施等爲?
묻나니, 만약 보살이 제법의 실상을 안다면,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答曰:佛此中說:“布施等不具足,不能成就衆生。”菩薩莊嚴身及音聲語言,得佛神通力,以種種方便力能引導衆生。是故菩薩爲成就衆生故,行檀波羅蜜,亦不取檀波羅蜜若有、若無相,亦不戲論如夢等諸法,直行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般若波羅蜜不可取相,乃至十八不共法亦不可取相。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보시 등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중생을 성취시킬 수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보살은 몸과 음성과 언어를 장엄히 하고, 부처님의 불신통력을 얻어서 갖가지 방편력으로써 중생들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은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단바라밀에 대하여 있고 없다는 상(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꿈과 같은 등의 제법에 대하여 희론을 펴지도 않고 곧장 행하여서,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며, 나아가 18불공법 또한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기 때문이다.
知一切不可取相已,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是念:“一切無根本,不可取相,如夢乃至如化;以不可取法不能得不可取相法。但以衆生不知是法故,我爲是衆生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菩薩從初發心來所有布施,爲一切衆生,所謂布施等諸善法爲一切衆生故修,不自爲身。
일체의 것이 불가취상(不可取相)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일체의 것은 근본이 없는 무근본(無根本)이고 상을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이며,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이다.
취할 수 없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의 법으로써는 불가취상(不可取相)의 법을 얻을 수 없는 것이나, 다만 중생들이 이러한 법을 모르기 때문이니, 나는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뿐이다’라고 하며,
이 보살이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일체의 보시를 하면서도 일체 중생들만을 위하나니,
이른바 보시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은 일체의 중생들을 위하여 닦는 것이요,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不爲餘事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但爲一切衆生故。”所以者何?是菩薩遠離怜愍衆生心,但行般若波羅蜜,求諸法實相,或墮邪見中。是人未得一切智,所求一切智事,心未調柔,故墮諸邊,諸法實相難得故。是故佛說:“菩薩從初發心,怜愍衆生故,著心漸薄,不戲論畢竟空 若空有此過,若不空有彼過等。”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일체의 중생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이 보살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다만 반야바라밀만을 행한다면, 제법의 실상만을 구하면서 혹 삿된 사견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였으며, 구하고 있는 일체지에서도 마음이 아직 조복되지 못하여 유연하지 못한 때문에 모든 치우침의 변(邊)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 제법의 실상은 얻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탐착하는 마음이 점점 얇아지는 것이며, 필경공에 대하여서도 ‘만약 공(空)하다면 이러한 허물이 있다’거나, ‘만약 공하지 않은 불공(不空)이라면 저런 허물이 있다’는 등의 희론을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如餘處“菩薩自利益,亦利益衆生”,此中何以但說利益衆生,不說自利?自利、利人有何咎?
묻나니, 다른 곳에서는 “보살은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도 이롭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중생만을 이롭게 한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에 어떤 허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答曰:菩薩行善道爲一切衆生,此是實義;餘處說“自利,亦利益衆生”,是爲凡夫人作是說,然後能行菩薩道。入道人有下、中、上:下者,但爲自度故行善法;中者,自爲亦爲他;上者,但爲他人故行善法。
답하나니, 보살이 착한 선도(善道)를 행하는 것은 일체 중생들을 위한 것이니, 이것이 곧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이며,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들도 이롭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범부인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며, 그러한 뒤에 보살도를 잘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입도(入道)하는 사람에게는 하ㆍ중ㆍ상이 있으니,
하(下)의 사람은 다만 자기 스스로만을 제도하기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하는 이요,
중(中)의 사람은 자기 자신도 위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하는 이이며,
상(上)의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착한 법을 행하는 이이다.
問曰:是事不然!下者,但自爲身;中者,但爲衆生;上者,自利亦利他人。若但利他,不能自利,云何言上?
묻나니, 그러한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하(下)의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요,
중(中)의 사람은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며,
상(上)의 사람은 자기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이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만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상인(上人)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答曰:不然!世閒法爾,自供養者不得其福,自害其身而不得罪。以是故,爲自身行道,名爲下人。一切世人但自利身,不能爲他。若自爲身行道,是則斷滅,自爲愛著故。
若自能捨己樂,但爲一切衆生故行善法,是名上人,與一切衆生異故。若但爲衆生故行善法,衆生未成就,自利則爲具足。若自利益,又爲衆生,是爲雜行。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세간의 법이 그러한 것이니, 자기 자신에게만 공양하는 이도 그 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이도 죄를 얻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하는 이를 하인(下人)이라 하나니,
일체 세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이롭게 할 뿐, 다른 이들은 위하지 못하나니, 만약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한다면 이것은 곧 단멸(斷滅)이니, 자신만을 애착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의 쾌락을 버리고 다만 일체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상인(上人)이라 하나니, 일체 중생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며, 만약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선법을 행한다면, 그 중생들이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자기의 이익은 곧 두루 갖추게 되나,
만약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 중생들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잡다한 잡행(雜行)이 되는 것이다.
求佛道者有三種:一者、但愛念佛故,自爲己身成佛;二者、爲己身亦爲衆生;三者、但爲衆生 是人淸淨行道,破我顚倒故。是菩薩行般若波羅蜜時,無衆生乃至無知者、見者,安住是中,拔出衆生著甘露性中。甘露性者,所謂一切助道法。何以故?行是法得至涅槃,涅槃名甘露。住是甘露性中,我等妄想不復生。是菩薩自得無所著,亦令衆生得無所著,是名第一利益衆生。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에게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만 부처님만을 좋아하고 생각하여 자기 몸이 부처님이 되기만을 구하는 이요,
둘째는 자기의 몸도 위하면서 또한 중생들을 위하는 이이며,
셋째는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이니, 이러한 사람은 청정하게 도를 행하면서 나(我)라는 뒤바뀜의 아전도(我顚倒)를 깨뜨리기 때문이니, 이러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도 없으며, 이러한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면서 중생을 구출하여 감로의 성품인 감로성(甘露性)에 놓아 주는 것이다.
감로의 성품인 감로성(甘露性)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의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이니,
왜냐 하면, 이러한 법을 행하여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열반을 감로라 하는 것이며,
이 감로성(甘露性)에 머무르면 나(我) 등의 망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음을 얻었으며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중생을 제일 이롭게 하는 제일이익중생(第一利益衆生)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上說“但利益衆生故行道”,今何以故“自得無所著,令衆生得無所著”?
묻나니, 앞에서는 다만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도를 행할 뿐이다”고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도 집착함이 없고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不得已故!若自無智慧,何能利人?以是故,先自得無所著,然後教人。若是功德可得與他如財物者,諸佛、大菩薩所有功德皆應與他,乃至調達、怨賊皆可與之,然後更自修集功德;但是事不然,不可我作而他得。是亦世俗說,非第一義。何以故?第一義中無衆生、無一無異等分別諸法相,此中說亦無所著處。
답하나니, 부득이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에게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다른 이를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음을 얻고나서, 그 뒤에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공덕을 재물과 같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있는 바의 모든 공덕을 모두 다 주어야 하고, 나아가 조달(調達, 제바달다提婆達多, Devadatta)같은 원적에게도 주어야 하며,
그러한 뒤에 다시 스스로가 공덕을 닦고 쌓아 가겠지만, 그렇지가 못한 것이며,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만 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도 세속의 설명일 뿐 제일의(第一義)는 아닌 것이니, 왜냐 하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하나도 없는 무일(無一)이고 다른 것도 없는 무이(無異)이며, 동등하게 제법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니,
이러함 가운데에서 “집착할 곳이 없는 무소착처(無所著處)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復次,如先說“不可說相是第一義”,此中可說故是世俗。
爾時,須菩提問:“佛於道場所得法,爲用世諦故得?爲用第一義諦?”須菩提意:若以世諦故得,卽是虛妄不實;若以第一義故得,第一義中無得、無得者,不可說、不可受。
또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상(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상(不可說相)이 곧 제일의(第一義)이지만, 이 가운데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可說)이기 때문에 이것은 세속의 이치인 것이다.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도량(道場)에서 얻으시는 법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얻는 것입니까? 제일의(第一義)로써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는데,
수보리 존자는 ‘만약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로써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만약 제일의로써 얻는 것이라면 제일의에서는 얻음도 없는 무득(無得)이고 얻는 이도 없는 무득자(無得者)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이고, 받을 수도 없는 불가수(不可受)이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佛答:以世俗語言故說“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中無得者、無有得法。何以故?若是人得是法,卽是二法;二法中,無道、無果。二法者,是菩薩、是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是二法,皆是世諦故有。
若二者,佛法何得不虛妄!若有人不得第一義,但以二法分別諸法,是則虛妄;諸佛、大菩薩得第一義故,爲度衆生令得第一義,雖分別諸法,非是虛妄。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세속의 언어로써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일 뿐, 이 가운데에서는 얻는 이도 없는 무득자(無得者)이고 얻을 법도 없는 무유득법(無有得法)이니라”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만약 이러한 사람(人)과 이러한 법(法)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두 가지의 법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이법(二法)에는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니, 이법(二法)이란 곧 보살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모두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두 가지라면 부처님의 불법이 어떻게 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지 못하고 다만 두 가지 법으로써 제법을 분별할 뿐이라면 이것이 곧 허망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큰 대보살은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으뜸가는 이치인 제일의(第一義)를 얻게 하면서 비록 제법을 분별할지라도,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닌 것이다.
須菩提復問:“世尊!若用二法無道、無果,今以不二法故有道、有果耶?”
佛答:“二法無道、無果,不二法亦無道、無果。”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라고 한다면, 이제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으로써 도가 있는 유도(有道)이고 과위가 있는 유과(有果)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두 가지의 이법(二法)에서도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며,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에서도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니라”고 하셨다.
問曰:餘處說“二法是凡夫法,不二法是賢聖法”,如『毘摩羅詰經』不二入法門中說。
묻나니,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두 가지의 이법(二法)은 곧 범부의 법이요,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은 성현의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 유마경)'의 불이입법문(不二入法門)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答曰:不二入是眞實聖法。或有新發意菩薩未得諸法實相,聞是不二法,取相生著。是故或稱讚不二法,或時毀呰。又佛遮二邊、說中道,所謂非二、非不二。二法名各各別相;不二名一空相。以是一空相破各各別異相;破已,事訖,還捨不二相 是卽是道、是果。何以故?諸賢聖雖讚歎無二法,爲不著故。用是法得道、得果,用是法無道、無果 卽是戲論;無戲論是平等法。
답하나니, 불이입(不二入)은 곧 진실한 성인의 법이니, 혹 새로 뜻을 낸 초발의 보살이 아직 제법의 실상을 얻지 못하였을 때 이 불이법을 들으면 상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기도 하기 때문에, 혹 불이법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 헐뜯기도 하는 것이며,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의 치우친 견해를 막으시면서 중도(中道)를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둘이 아닌 비이(非二)이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닌 비불이(非不二)이다”고 하신 것이다.
두 가지 법의 이법(二法)이란 각각의 다른 모양의 별상(別相)을 말하는 것이며,
둘이 아닌 불이(不二)란 바로 하나의 공한 모양의 일공상(一空相)을 말하는 것이니,
이 하나의 일공상(一空相)으로써 저마다 다른 각각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며, 깨뜨려서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둘이 아닌 모양의 불이상(不二相 )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곧 도(道)요 곧 과위(果)인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성현은 비록 둘이 없는 무이법(無二法)을 찬탄할지라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법으로써 도를 얻는 득도(得道)하고 과위를 얻는 득과(得果)한다’거나, ‘이 법으로써는 도가 없는 무도(無道)이고 과위도 없는 무과(無果)이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희론이니, 희론이 없는 것이 곧 평등한 평등법(平等法)인 것이다.
須菩提白佛言:“若諸法無所有性,何等是平等?”佛答:“若離有性、無性,假名爲平等。若菩薩不說一切法有 不說一切法性、不說一切法相等顯示,亦不說無法 無法性、無法相等顯示,亦不說離是二邊更有平等相,一切處不取平等相,亦不言無是平等,不妨行諸善法,是名諸法平等。”復次,諸法平等者,所謂出過一切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있는 바가 없는 성품의 무소유성(無所有性)이라면, 어떠한 것이 평등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성품이 있는 유성(有性)이거나,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을 여읜다면, 이를 임시로 가명하여 평등(平等)이라 한다”라고 하셨으며,
만약 보살이 일체법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일체법의 법성을 말하지도 않으며, 일체법의 상(相) 등도 말하지 않으나, 드러내어 보이는 현시(顯示)하며,
또한 법이 없는 무법(無法)과 무법성(無法性)과 무법상(無法相) 등도 말하지 않으나, 드러내 보이는 현시(顯示)하며,
역시 이러한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고서 다시 평등상(平等相)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으니,
일체의 경우에서 평등상을 취하지 않고, 또한 이 평등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아서, 모든 착한 선법을 행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제법평등(諸法平等)’이라 하는 것이며,
다시 ‘제법평등(諸法平等)’이란 이른바 일체법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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